인천은 항구도시다
130년 전인 1883년에 이뤄진 '개항'은 인천이 항구도시임을, 그리고 수도 서울로 향하는 관문임을 다시 한번 대내 외에 각인시켰다. 인천의 개항이 이뤄지는 과정에서 외세의 강압이 작용했지만, 인천이라는 도시가 개항을 통해 발전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개항 전후 근·현대사에서 인천은 역사의 중심이었다.
그 인천의 역사를 한꺼풀 벗겨 보면 인천항이 자리하고 있다. 인천항의 변화과정을 통해 인천과 대한민국의 역사를 엿볼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 신라·고려시대, 대외교류 거점 >
'인천'이라는 이름이 생기기 전부터, 인천은 한반도와 중국을 잇는 해상교통의 요충지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인천'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조선시대 때부터는 인천과 인천항의 역할이 축소된다. 초기 백제가 사용한 대외 항로는 모두 인천을 거쳤다.
한성에서 수로를 통해 강화만 바다로 나가는 항로가 있었으며, 육로로 부평을 거쳐 인천지역까지 온 다음
현재 인천시 연수구 옥련동에 있는 능허대에서 출항해 바다로 나가기도 했다. 특히 능허대는 백제가 중국 동진과 통교를 시작한 근초고왕 27년(372년) 부터 개로왕 21년(475년)까지 100년 넘게 사신들이 중국을 왕래할 때 출발하는 나루터로 사용됐다.
고려시대에도 역시 인천은 해상 교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했다. 고려의 태조인 왕건은 해상 토호세력으로, 지금의 황해도 남부와 경기도 서부, 강화도 등이 합쳐지는 곳에서 세력을 형성한 해상(海商)이었을것이라는 의견이 많다.
왕건이 고려를 세운 뒤 고려시대의 해양활동은 주로 서해에서 활발하게 이뤄졌다. 당시 교역의 중심지는 국제항이라고 불릴 수 있는 벽란도였다. 그러나 고려와 송나라를 오가는 주요 항로중에 강화만과 인천만을 지나는 항로가 포함되는 등 인천은 당시 수도인 개경으로 향하는 관문 역할을했다.
조선이 건국되면서 대외교역과 관련해 인천의 역할은 줄어들었다. 조선이 바다를 봉쇄하는 정책을 펼쳤기 때문이다. 상인들과 사신들의 왕래가 많았던 인천지역 항구와 포구도 그 기능을 잃고 평범한 어촌마을로 전락했다.
대신 조선시대 인천의 포구는 고려시대부터 발달하기 시작한 조운제도로 인해 전국의 물자를 보관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조운은 토지에 과세된 현물 세곡을 전국 각지에서 보관했다가 선박을 이용해 서울로 수송하는 것을 일컫는다. 산지가 많은 한반도의 특성상 육로교통이 불편했고, 이 때문에 강과 바다를 이용해 세곡을 운반했다. 인천은 서울과 인접해 있어 서울로 향하는 전국의 물자가 모여들었다.
< 1883년 인천항 개항의 그 시기의 대한제국은? >
조선과 미국의 역사적인 첫 만남은 조선의 통상을 요구하던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불태워진 사건에서 시작된다. 당시 조선은 흥선대원군에 의해 강력한 쇄국정책을 고수하고 있었다. 조선과의 수교를 맺기 위한미국의 물밑교섭은 수차례 이어졌고 그러던 중 1871년 미국함대는 조선에게 문호개방을 요구하며 강화도를 침략하기에 이른다. 이 사건이 바로 ‘신미양요’ 이며 양국 모두 값비싼 댓가를 지불한 후, 조선은 1882년 5월 22일 미국과 청나라의 주선으로 조미조약을 체결하게 됩니다
1883년 개항 초기의 제물포항과 눈덮힌 월미도 정경
1883년 개항당시의 영국 영사관
1883년 개항당시의 일본 영사관.
1899년 경인선 개통당시 승객모습
1900년 제물포
1900년 제물포항
1900년 제물포항
1900년대 인천역사 모습
개통 당시 경인지선간 한곳의 역
1901년 우각리역 주변 (서울방면→인천, Burton holmes Trsvelogues,1901)
1900년대 제물포 전경
1900년대 꿈을 싣고 달리던 향학(向學)열차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
1901년 제물포 구락부 전경
최근엔 드라마 '도깨비' 의 촬영지로 다시 주목받고 있는 '제물포구락부'는 개항 이후 들어온 각 국의 외국인들의 사교클럽으로 조성한 공간입니다.
현 건물은 1901년 러시아 건축가 사바찐이 설계한 것으로 118년 된 건축물 입니다. 1900년 설계, 이듬해 6월 22일 완공했으며 지상1층, 반지하2층의 벽돌조 건물입니다.
1902년 제물포 부두
1902년 제물포 부두
1903년 월미도가는 목교와 철교.
1904년 제물포 부두
1904년 제물포 부두
1904년 제물포 일본공사관 앞의 일본장교들
1904년 제물포에 일본군 도착
1904년 제물포부두에서 소모품을 교체 할 일본과 한국 하급 노동자들
1904년 제물포 해변의 건설 빔 하역 작업
1904년 일본에서 말을 가져와 제물포에 해변으로 옮기고 있다
1904년 제물포 해변에서 일본 기병부대
1904년 제물포 부두. 일본 기병과 공급물자를 지켜보는 오른쪽의 한국 노동자
1904년 제물포 부두 하급 노동자 겨울 의상이다.
1904년 제물포 부두.
공급물자 하역을 감독하는 일본인
1904년 제물포 부두. 목재운반 중
1904년 제물포 부두에서 의료 용품을 병원으로 운반
1904년 제물포 적십자 병원
1904년 제물포 부두에 말의 상륙을 위해 만들어진 선착장.
1904년 제물포 부두에 도착한 말
1904년 제물포 부두에 조랑말들 상륙
1904년 제물포 부두의 러시아 밀 창고
1904년 제물포에 상륙한 일본 공병과 광부의 분대
1900년대 초의 인천항 일본군 군마가 상륙한 모습
1904년 일본군이 상륙을 위해 탄 보트로 붐비는 제물포
1904년 일본 보병 부대 상륙
1904년 러일전쟁 당시의 용암포.
러일전쟁 - 1904년 2월 8일∼1905년 만주와 한국의 지배권을 두고 러시아와 일본이 벌인 제국주의 전쟁
바리아크호(號)와 코리에츠호(號)
인천항에정박했던러시아 군함이일본 함대로부터 인천항을 철수하라는 최후통첩을 받고 그들 요구대로 순순히 뱃머리를 돌려인천 내해에서 팔미도 쪽으로 빠져나가는데 일본군 함대는 느닷없이 포문을 열어 대포세례를 가했다.
러시아 함대도 포문을 열었지만 그때 벌써 바리아크호(號)와 코리에츠호(號)는 선체에 포탄을 맞고 선내에 물이 차기 시작했다.
바리아크號
러시아 군함은 패전을 각오하고 응사를 하면서 소 월미도 부근까지 쫓겨가다가 더 이상 지탱할 수 없자 함내 화약고에 불을 지르고 자폭했다. 바리아크호, 코리에츠호에 이어 러시아 수송선 승가리호도 스스로 자폭했다.
인천 연해에서 버러진 러시아함전 코리에츠호의 닻은 크기가 9척이나 되고 중량이 약 9백근이며 그 닻을 두드리면 종소리가 났다하는데 일본인 골동품 수집가에 의해 일본으로 가져갔다는 후문이다.
코리에츠號
1904년 2월 8일 침몰하는 코리에츠호(號)
1904년 2월 8일 자폭하여 침몰하는 러시아 함대 코리에츠호(號)
인천항에 침몰한 러시아 수송선 승가리호(Sungari)호(號)
1900년대 초 인천항 모습
1900년대초 공동묘지(현 율목공원)에서 바라본 인천항
1900년대초 대불호텔과 일본우선회사 인천지점
1900년대 초 월미도에서 바라본 응봉마루 각국공원
1900년대 초 인천항. 응봉산 정상에 미국인 별장 모습도 보인다
1883년 개항당시의 청국 영사관
1883년 만국공원(萬國公園)서 내려다 본 인천항과 시가
1910년 기차가 달리는 모습
제물포 구락부에서 바라본 인천항
1930년대 동인천역
1930년대 송도 유원지
일제 강점기 시절의 인천의 일본인 거리 모습.
전봇대가 서 있다
일제 강점기 시절의 제물포역
일제 강점기 시절의 제물포역
1950년 인천시립박물관
1967년 동인천역 광장
1968년 인천 차이나타운
1971년 8월 8일 인천 송도해수욕장
1974년 인하대학교
1981년 간석동 간석오거리
1980년대 중반 동인천역 앞
1987년 인천역
1988년 수인선 소래철교
1980년대 동인천역
1980년대 제물포역
1988년 부평역 앞
1988년 지금은 없어진 송도 유원지
1980년 동인천역 건너편 번화가
1990년대 초 젖소목장이 있던 구월동
1990년대 초반 인천공설운동장 지금의 숭의구장
1990년대 초반 계산동
1990년대 중반 송현동
첫댓글 자유공원있는 산이 응봉산이에요 사진속 일본인거리는 현 중구청 앞길인듯합니다 인천사람으로 좋은사진 감사합니다
좋은 날들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