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수만경전(心隨萬境轉)이요
전처실능유(轉處實能幽)라
마음은 모든 경계를 따라서 일어나는데
일어나는 곳마다 바로 거기서 능히 그윽해버린다.
중생은 경계에 따라서 마음이 일어나는데 한 생각 일어나면 그 한 생각으로 인해서 점점 생각이 벌어져가지고 가지가 쳐서 그 생각이 점점 발전을 해가지고 얼굴에 표현이 되고 나아가서는 행동으로 나타나가지고 큰 일을 저질르게 돼.
그래가지고 그 한 생각으로 인해서 슬픔에 구렁에 빠지기도 하고 노여움의 불구덩이에 빠지기도 하고 나가서는 지옥 구덩이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기도 하고 그러는데, 그 한 생각, 물론 우리가 살아있으니까 무슨 소리를 듣던지 색상을 보던지 어떤 경계를 닥치면 경계에 따라서 저것이 차 소리라던지 비행기 소리라던지 어린애 소리라던지, 저건 꽃이다 붉다 검다, 우리가 살아있기 때문에 경계에 따라 생각이 일어나는 건 당연한데 일어나는 그 때에 일어나는 바로 그 자리에서 능히 경계에 휩싸여 끌려들어가지 아니하고 바로 그 자리에서 본성을 인득해버린다.
수류인득성(隨流認得性)이면
무희역무우(無喜亦無憂)라
일어나는 그 경계를 발판으로 해서 자기의 본성자리로 돌아와버린다. 이것이 수류인득성(隨流認得性)이야. 수류인득성을 해버리면 무희역무우(無喜亦無憂)라. 기뻐할 것도 없고 근심할 것도 없다.
우리는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그 생각, 바로 생사심인데 이 세상에 나왔다가 한평생 살다가 죽어가고 죽었다가 다시 또 자기 업에 따라서 어디 태어났다 다시 죽기를 무량억천만겁을 윤회를 하면서 금생에까지 이르렀는데, 그 육도윤회의 근본이 무엇이냐 하면 한 생각 때문에 그런거여. 한 생각 일어나는 그것이 원인이 되어가지고 천당에도 올라가고 축생도 되고 사람도 되고 귀신도 되고 그런 것이여.
그런데 그 일어나는 한 생각을 어떻게 단속을 하느냐. 여기에서 지옥으로 떨어질 것을 미연에 방지할 수도 있고, 축생이 될 것을 미리 방지할 수도 있고 그러기 때문에 천당에 가고 싶으면 천당에 가고 지옥에 가고 싶으면 지옥에 가고 육도윤회를 자유자재로 할 수가 있는 능력을 우리는 낱낱이 다 가지고 있는 것이여.
그 방법을 잘 모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한 생각 그걸 단속을 못해가지고 원치도 아니한 지옥에도 떨어지고, 독사도 되고, 귀신도 되고, 수라도 되고 이러지 참으로 그 한 생각을 단속할 방법만 분명히 알아서 실천을 해나가면 우리는 지옥에 갈 필요가 없어.
천당에도 가고 싶으면 가고, 사람으로 태어나되 좋은 여건하에 태어나서 자기도 훌륭한 인격을 이루고 모든 사람을 제도할 수 있는 그러한 사람이 될 수도 있는 거여. 이것이 바로 참선법인데 참선법은 다른 것이 아니고 일어나는 한 생각을 단속하는 방법이다.
한 생각을 어떻게 단속하느냐?
슬픈 일을 당하던지 또는 속상한 일을 당하던지 괴로운 일을 당하던지 기쁜 일을 당하던지 어데서 언제 어떠한 일을 당하더라도 바로 그 때 그 자리에서 '이무엇고?' 자기의 본참화두를 거각하는 것입니다.
금방 녹음법문을 통해서 조실스님의 법문을 들었습니다만, 활구참선이 바로 가장 빨리 어떠한 근기라 하더라도, 남자가 되었건 여자가 되었건, 나이가 많건 적건, 지식이 있고 없건 또는 성질이 급해서 성을 잘 내건, 빈부귀천과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누구라도 부처님과 차등이 없는 진여불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그 생각만 두번째 생각으로 벌어지기 전에 어떠한 생각이 일어나자마자 동시에 '이무엇고?'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자기의 화두를 참구한다면 거기에서 육도윤회는 끊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과거에 죄를 많이 지었는데 죄 많은 사람이 참선한다고 어떻게 견성성불하며, 이뭣고 좀 한다고 해서 내가 그 많은 죄를 지었는데 어떻게 지옥에 안떨어질 수가 있겠는가?
이러한 생각으로 미리 겁을 집어먹고 스스로 도업을 닦아 이루는 것을 포기하는 사람이 종종 있는데 부처님께서는 그러한 죄많은 사람을 위해서 업이 두터운 중생을 위해서 이 사바세계에 출현하셔서 그 많은 법을 설하였고, 3천년전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출현하신 그 부처님만이 아니라 정식으로 출현하시는 부처님만이 아니고 온 법계에 인연 있는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형형색색으로 부처님과 보살님과 아라한과를 증득한 성현들이 수없이 천백억 화신을 나투면서 우리 중생 앞에 출현을 해 계신 것입니다.
죄도 없고 공부를 잘하는 사람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죄 많은 사람일수록 업이 두터운 사람일수록 불보살과 성현은 백배 더 불쌍한 마음으로 어떠한 방법으로 이 중생을 제도할까. 그 중생에 알맞는 방편을 써서 제도하려고 노력하고 계신 것입니다.
업이 두터운 우리 보잘것 없는 중생도 아들 딸을 많이 두면 공부잘하고 착한 아들은 흐뭇하고 기쁘고 그렇지만, 공부를 잘 못한다던지 몸이 어디가 불구자라던지, 마음이 바르지 못해 못된 일을 많이하는 자식에 대해 부모는 밤잠을 못주무시는 것입니다. 몇배 그 자식에게 마음이 더 가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이 자식을 바로 잡아줄까. 이 병신을 어떻게 바로잡아줄까. 자나깨나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뜨거운 사랑과 자식을 아끼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생각을 미루어보면 불보살과 성현들께서 우리 죄 많은 중생들에 대해서 어떻게 하면 이 중생을 제도하며 바른길로 이끌고 생사없는 해탈도를 증득해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뜨겁게 가지고 계실 것인지 충분히 알고도 남음이 있는 것입니다.
어떤 종교에서는 자기만을 믿어야지 자기를 배반하고 비방하는 사람은 3대까지 벌을 주어서 멸종을 시킨다고 하는 그러한 외도의 경을 봤습니다만 우리 부처님은 중생에 대한 보복이라고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 중생들 보고도 "보복을 하지 말아라. 보복으로서 원수는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보복을 하면 다음 기회에 상대방이 나에게 보복을 하고 내가 또 보복을 하고 해서 점점 더 미움과 원망과 싸움은 더 커져서 나중에는 온 세계가 싸움의 세계가 되서 지옥으로 변할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 자비로서 바른 마음으로 상대방을 불쌍하게 생각하고 어떠한 방법을 쓰면 저 사람 마음을 편안하게 해줄수 있을까 이런 자비심을 가짐으로써 싸움은 없앨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영원성이 없어. 잠시도 고대로 있는 것이 없고 시시각각으로 변해서 결국은 없어져. 우리 눈에 태양은 언제나 한결같이 빛나고 있는 것 같지만 몇억년이 지나면 저 태양도 언젠가 불이 꺼질 때가 오는 것입니다.
원자현미경 같은 것으로 관찰하면 매일같이 태양의 모양이 변해가고 있는 것을 과학자들은 다 보고 알고 있는 것입니다. 하늘에 번쩍이는 저 수많은 별들, 달, 이 지구도 시시각각으로 변하가고 있고 우리 몸뚱이도 해마다 어린애는 자라고 자란사람은 늙어가고 이것이 바로 무상한 증거인 것입니다.
하루하루 우리가 살아가는 것은 죽음에 한걸음 한걸음 다가가고 있다고 표현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진리의 눈으로 보면 생사는 본래 없는 것이고 이렇게 시시각각으로 변해가는 것은 살아있는 진리의 모습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만, 진리를 깨닫지 못한 사람의 눈으로는 그 진리의 살아있는 모습이 바로 생사요 그것이 무상으로 느껴지는 것이고 무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무상이라 하면 덮어놓고 우리는 나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이 무상한 속에서 살면서도 전혀 무상한 것을 모르고 영원한 줄 알고 우리 몸뚱이도 영원히 살 줄 알고, 명예나 권리나 재산같은 것도 영원히 자기가 누릴 줄 알고 거기에 빠져서 세월가는 줄 모르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진리의 눈을 떠가지고 무상 속에서 살면서 무상을 전혀 느끼지 않고 영원을 살아갈 수 있다면 전혀 문제가 없건만, 탐진치 삼독에 살면서 오욕락에 빠져가지고 정신을 못채려서 무상한 것을 영원한 것으로 착각한 나머지 무상한 줄 모른다면 그것은 참 큰 일 날 일인 것입니다.
우리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는 지옥과 천당, 수라와 아귀, 축생과 인도, 육도윤회가 분명한 것이고 이것은 불법에 의해서 참나를 깨닫지 않고서는 천하 없이도 이 생사의 고해에서 해탈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불법을 닦을 사람은 첫째 무상(無常)을 깨달라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정말 괴로운 것이라는 점을 철저히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설하신 사제(四諦)법문의 맨 첫머리에 있는 고제(苦諦)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무상한 것이요, 괴로운 것이요, 이 몸뚱이도 무상한 것이요, 괴로운 것이다. 무상한 것을 철저히 느끼면 도를 닦을 마음이 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괴로운 것을 면할려면 괴로움이 어째서 생겨났는가 그 원인을 알아야 합니다. 바로 우리의 삼독심 때문에 괴로움의 원인이 생격난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살아가려면 욕심이 없으면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느냐. 돈에 욕심이 있어야 온갖 고생을 하면서 돈을 벌려고 하고. 명예에 대한 욕심이 있어야 열심히 공부해서 판사도 되고 장관도 되고 그러지 욕심이 없으면 "에이 허망한 것" 전혀 공부도 할려고 하지도 않고 그렇게 해서 무슨 도를 이룰 수 있겠느냐?
그러니 이 세상을 남부럽지 않게 살아가려면 불같은 욕심이 있어야 하고 명예나 권리에 대한 욕심이 있어야지 그런 것이 없으면 게으름에 빠져서 일도 안하고 잠이나 퍼자고 전인류가 그러면 가정이 무엇이 되고 국가가 무엇이 되느냐?" 이렇게 생각할런지 모르지만.
정말 철저하게 무상한 줄 깨닫고 명예나 권리나 재산이나 색이나 그러한 오욕락이 영원성이 없는 허망한 것이라는 것을 오히려 그러한데 지나친 욕심을 부리고 탐착을 하면 악도에 떨어진다. 악도라는게 현실적으로는 정신적인 고통을 악도라고 생각하면 금방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몸뚱이 살아있을 때는 육체적 정신적 고통, 갈등 이러한 것이 바로 사후에는 지옥과 같은 것입니다. 살아있을 때 정신적인 안온을 얻지 못한 사람, 정신적 해탈을 얻지 못한 사람은 숨이 끊어지자마자 바로 지옥으로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괴로움의 원인인 육도윤회를 해서 고통받는 원인은 우리는 무명업식으로 탐진치 삼독심의 불이 치성함으로 해서 오욕락을 영원한 것으로 착각한 데에서 괴로움에 빠지게 된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괴로움을 없이해서 영원한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느냐? 그러한 삼독심, 오욕락, 무명심 그러한 마음을 없이하면 된다. 없이하려면 어떻게 하면 되느냐? 염불한다던지, 경을 외운다던지, 주문을 외운다던지 기도를 한다던지 여러가지 수행법이 있지만 그 많은 수행법 가운데 가장 수승한 수행법이 참선이라 하는 것입니다.
참선은 아까 말씀드렸듯 꼭 머리를 깍고 깊은 산중에 들어가야 하는 게 아니고, 머리가 있건 없건, 나이가 많건 적건, 누구라도 일어나는 한 생각을 돌이켜서 대관절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렇게 한생각 돌이키면 이것이 바로 무명을 돌이켜서 보리로 돌아오는 길이고 생사고해에서 해탈언덕으로 건너가는 길인 것입니다.
이 방법이 너무 쉽고 너무 평범하고 너무 간단해서 글 읽기를 좋아하고, 뭣을 연구하기를 좋아하고, 이론적으로 따지기 좋아하는 현대학문을 한 지성인들은 그 재미도 없고 맨날 해봤자 답답하기만 하고 뭣이 알아지는 것도 아니니 그런 참선을 하기보다는 <금강경>이나 <유마경>이나 <법화경>이나 그런 부처님 경전을 읽고 연구하고 해석하고 교리적으로 연구하는 것이 훨씬 더 재미가 있고 알아진 것이 있고 누구 앞에 자신있게 불교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도 있고 그러니 대부분 이러한 지성인들이 교리적으로 이렇게 연구하기를 좋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참선은 3년을 하거나 10년을 해도 해갈수록 가슴이 답답하고 알아진 것이 없고 오히려 뭣이 알아지면 못쓴다 그러고. 그러니 누가 "참선이 뭣이냐 깨달으면 대관절 무엇을 깨달으며 어떻게 되는 것이냐?" 누가 물어봐도 "아, 나는 잘 모른다"고 모른다고 대답하는 게 창피하지 않느냐.
그러니 교리적으로 공부하면 1시간 공부하면 1시간 공부한 만큼 얻은 바가 있고, 1달을 공부하면 1달을 공부한 만큼 알아진 바가 있고, 누구 앞에 이야기하면 모두 발심을 해서 불교가 좋다고 따라와주고 해서 참선을 등한시하고 교를 숭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만.
그럼 교와 참선이 다른 것이냐?
교는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문이고 참선은 부처님께서 나를 깨닫기 위해 지도하신 깨달음에 이르는 수행법이다 이 말이여. 그럼 수행을 바르게 하기 위해 설하신 것이 부처님 경전이라. 참선과 경전을 나눌 수 없단 말여.
경을 올바르게 이해를 하고 올바르게 공부를 하면 참선을 철저히 할 마음이 날 수밖에 없는 것이고, 참선을 올바르게 하면 교가 하나도 버릴 말씀이 없어. 전부가 소중하고 훌륭한 법문이다 그 말씀이여.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 때부터 달마스님에 이르기까지 인도에서는 뭐가 선종이고 누구는 교종이고 하는 파당이 없었다 이 말씀이여. 가섭존자, 아란존자, 상나화수해서 제28대 보리달마에 이를때까지 선사이면 교리에도 통달했고 그런 것이지.
(참선)수행법이 책으로는 해나갈 수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눈으로 볼 수 있는 길을 갈 때에도 처음 가는 길은 자꾸 사람에게 물어봐야 하고 가다가 두 갈래, 세 갈래, 네 갈래길을 만나면 사람에게 물어서 가야하는 것인데. 물어보지 않고 간다던지 또 그 길을 잘 모르는 사람 지시를 받아가지고는 어먼 길로 간다 그 말씀이야.
하물며 마음을 닦는 길은 눈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에 사람이 지은 업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고, 생긴 모양도 다르고, 생각도 다르기 때문에 공부를 지어나가되 처음 시작은 같은 방법으로 해나가지만 한 달, 두 달 해나가다 보면 각기 다른 경계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때 책을 아무리 봐도 어떻게 하라고 쓰여있지 않습니다. 천상 자기가 믿을 수 있는 선지식이 있어야 그런 선지식에게 지도를 받아야 하고, 공부를 해나가는 중간에도 옳게 하는가 점검을 받고, 이상한 경계가 나타날 때에도 즉각 그 상황에 대해 보고를 해서 많이 못쓰게 되기 전에 바로잡아나가야만 허송세월을 아니할 뿐만 아니라 삿된 경계에 빠지지 않게 될 것입니다.
한번 삿된 경계에 빠져놓으면 나중에 얼마있다 다른 선지식으로부터 너의 경계가 올바르지 못하다는 것을 지적 받아도 그 말을 믿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미 자기 나름대로 경계에 맛을 붙여 깊이 빠져들어갔기 때문에 그런 경계에서 빠져나오는 것을 대단히 아깝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애를 써서 얻은 경계이고 얼마나 좋은데 이걸 버리는가. 안된다."해서 다른사람 말을 곧이듣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부처님이 출현해도 그 사람은 제도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공부는 처음 시작할 때 바른 선지식을 만나서 시작해야 하고, 어떤 특이한 경계가 나타나거나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렀을 때도 반드시 선지식의 점검을 받고 인가를 받아가지고 깨달은 뒤의 보림수행에 있어서도 직접적 지도를 받아야만 부처님과 조사와 똑같은 수행의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달마스님께서도 혈맥론에 말씀하시기를 '이 도법에 있어서 사람 만나기가 어렵다.' 도를 닦는 수행인은 스승 만나기가 어렵고 그런 선지식은 정말 올바른 사상을 가지고 올바르게 수행해 나갈만한 좋은 제자를 만나기 어렵다고 말씀을 하셨고, '급히 스승을 구하지 않으면 일생을 헛되이 보내리라.' 이렇게도 말씀을 하셨습니다.
스승을 만났다고 해서 스승한테 무엇을 얻을 것이 있는 건 아니지만, 스승을 만나지 아니하고는 올바르게 수행을 해나갈 수 없기 때문에 우선적으로 스승을 찾아야 된다고 강력히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해서 바른 스승을 만날 수 있을까?
무엇을 보고 바른 스승을 분별할 수 있을 것인가?
스승이 미간에는 백호상이 번쩍이고 있고 몸에는 무슨 오색찬란한 방광을 하고 있고 부처님의 32상과 80종호를 갖춘 그런 선지식이 어디 나타나셨다면 밤에도 그 선지식을 알아볼 수 있고 아무리 어리석은 사람도 대번에 알 수가 있겠지만, 선지식이 출현할 때는 꼭 그러한 원만상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고 화엄경의 53선지식처럼 때로는 승려로 태어나기도 하고, 때로는 어린 동자로 나투기도 하고, 때로는 창녀같은 그러한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때로는 장자로 나타나기도 하고, 때로는 귀신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이러기 때문에 도무지 신심이 없고 근기가 약한 중생의 눈으로서는 참 선지식 분별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무상을 깨닫고 철저하게 발심을 해서 바른 마음으로, 진실한 마음으로, 성실한 마음으로, 청정한 마음으로 선지식 만나기를 갈구하면 선지식은 언제라도 만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면, 선지식이 한두사람이 아니고 이 우주법계에 가득차 있는 것이 바로 불보살의 화현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심이 부족하고 정성이 부족하기 때문에 눈으로 불 수 있는 모든 것, 귀로 들을 수 있는 모든 것, 삼라만상 두두물물이 부처님이요, 보살이요, 성현이 아닌 것이 없건만 그것을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상대하고 있으면서도 그 선지식을 알아보지 못하고 세월을 보내고 있고 업을 짓고 있는 그러한 안타까운 생활을 우리는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에 말씀드린 우리의 마음은 경계 따라 움직이는데 그 경계 따라 일어나는 바로 그곳에서 화두를 챙기는 것이 이것이 바로 부처님을 만나뵙는 가장 요긴한 방법이요, 선지식을 만나뵙는 바로 그 방법인 것입니다. 이래서 이 방법을 최상승법이라 정법이라 그러는 것입니다.
이러한 최상승법을 믿고 실천하는 사람은 여러분 가정에서 선지식을 만나뵈올 수가 있고 살아계신 부처님을 만나뵈올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직장에서도 선지식을 만나뵈올 수 있고, 관세음보살을 만나뵈올 수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여러분 마음에서 일어나는 희로애락 이것이 팔만사천 번뇌망상입니다만, 이 최상승법을 믿고 공부해나가는 사람은 그 팔만사천 번뇌가 바로 보리심으로 승화해버리는 계기를 만드는 것입니다.
팔만사천 마구니라 그러는데 다른게 아니고 팔만사천 번뇌를 갖다가 팔만사천 마구니라 그러고, 그 팔만사천 번뇌를 가지고 화두를 들어서 자기 본성으로 돌아가는 것을 팔만사천 법문이라 그러는 것입니다.
이렇게 분명한 것입니다. 무엇이 어려운 것입니까?
죄 많은 사람이라고해서 안될 것이 없고 무식한 사람이라고 해서 안될 것이 없습니다. 뒤로 시간을 미루지 말고 당장 이 자리서부터 무슨 생각이라도 일어날 것입니다. 돈 생각, 자식 생각, 남편 생각 별별 생각이 일어나겠습니다만, 일어나는 그 생각을 놓치지 마십시오. 한 생각 돌이키면 바로 한 생각 성불인 것입니다.
한생각을 놓치면 바로 그 한생각이 마구니로 변하게 되고 그것이 지옥으로 떨어지는 올가미에 걸려드는 것입니다. 한걸음 잘못 디뎌서 지옥으로 가느냐 한걸음 잘 디뎌서 극락세계로 가느냐 그것이 화두를 잘 드느냐 안드느냐 거기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정법이라 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너무나 쉽고 평범한 것입니다. 설사 재미가 없지만 이 시간부터서 적극적으로 실천을 해보십시오. 하루를 그렇게 해보고 한달을 그렇게 해가다가 자기를 돌이켜보십시오. 어느새 과거의 자기가 아니라고 하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모든 점에 있어서 향상이 되어있을 것이며, 모든 점에 있어서 승화가 되어 있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자기 가족들, 친구들, 직장에서나 어디를 가거나 그 사람은 벌써 마음씀이 달라져가고 있을 것이며, 얼굴에서 풍기는 것이 달라져가고 있으며, 행실이 달라져가고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새마음갖기 운동이 될 것이며 이것이 사회정화운동의 기본요소가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께서 우리 중생들에게 설해주시고자 하는 최고의 미묘법문인 것입니다. 이것이 아니고서는 해탈도를 증득할 수 없는 것이며, 이것이 아니고서는 세계평화도 이룩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그렇게 간단하고 명백하고 쉬운 것인데 중생은 과거에 지은 업이 있어서 그 한 생각 돌리기가 그렇게 힘이 듭니다. 그래서 그 한생각을 공간적으로 표현하면 10만8천국토라 이렇게 어마어마한 표현을 부처님께서 쓰셨고, 때로는 삼아승지겁이라 이렇게 표현을 하셨고 그랬습니다.
이것이 바로 조사문중, 정법문중, 최상승문중에 있어서는 찰라멸각이라 그랬습니다. 찰라에 무량겁 죄업을 멸각 녹여 없애는 것입니다. 일초즉입여래지(一超卽入如來地)라, 한번 뛰어 부처님 세계에 뛰어든다 이렇게도 표현했습니다.
어렵지만, 잊어버렸다 또 챙기고 또 챙기고 해서 계속해서 되풀이해서 해가면 습관이 될 것이고 습관이 되면 하려고 안해도 저절로 되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똑같은 일을 되풀이 해서 할 때는 나중에는 무의식 중에도 되야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득력이라 하는데, 득력이라 하는 건 공부를 하니까 이상한 힘을 얻은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할려고 애를 써도 잘 안되던 것이 할려고 안해도 저절로 이렇게 화두가 들려지고 이것이 바로 힘을 덜어지는 것을 다른 표현으로 힘을 얻었다 하는 것입니다.
여기 모이신 분은 숙세의 인연으로 최상승법 정법에 깊은 인연이 있어서 법보전에 모여서 최상승법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 여러분은 듣게 된 인연을 맺게 된 것이라고 산승은 생각합니다.
이러한 인연이 날과 달로 더욱 굳어지고 깊어져서 이 자리에 모이신 분은 결정코 금생에 대도를 성취하게 되기를 믿고 간절히 축원을 하는 바입니다.
한사람도 빠짐 없이 일시에 대도를 성취하고 세세생생에 이 정법문중에서 다시 만나서 또 도업을 성취를 하고 이 법계에 한 중생도 남는 중생이 없도록 우리 목표를 설정할 것을 다짐하고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 1982년 10월 3일, 첫째 일요법회 >
첫댓글 감사합니다 설촌님.. 귀한 법문이라 모셔 왔습니다 _()()()_
우리는 고통받거나 감정에 쌓여있을 때 그 고통, 그 감정이 자기자신이라 믿고 있습니다. 반대로 행복할 때도 그 행복이 자기자신이라 믿고 있습니다. ..어른들은 말하지요.. 서둘지 말고 한걸음 물러서서 판단하라고.. 이 때 한 걸음 물러서지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다들 잘 이해하고 있지만.. 고통.어떤 나쁜감정들.행복..이것이 자기와 완전한 한 몸으로 착각하여 물러서지지 안ㅎ습니다. 한발짝 뒤로 물러 설 줄만 알면 공간이 확보 되기때문에 착각들이 움직이는 모습들을 조용히 관찰할 수가 있습니다. _()_ 마하반야바라밀 ..그냥 지켜 보고만 있어도 우리는 고요해 질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