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쭐라웨달라숫따 23강-제4선정의 평온-일부 메모
우 또다나 사야도 법문
일창 스님 통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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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쭐라웨달라숫따(교리문답의 짧은 경)” 법문(2021-4-27)참조.
교재 : 『쭐라웨달라숫따(M44) 법문』 (마하시 사야도 원법문, 한국마하시 사야도 우 소다나 재법문, 비구 일창 담마간다 편역, 도서출판 불방일, 2020년 10월 23일 출간
같이 생기는 동료법들의 균형이 맞도록 도움을 주는 제4선정의 '평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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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 “위사카 장자여, 이 가르침에서 비구는 제4선정에 이르기 전에 이미 (몸의) 행복도 제거했기 때문에, 몸의 괴로움(고통)도 제거했기 때문에, 마음의 행복함(즐거움)과 마음이 괴로움(근심)이 사라졌기 때문에, 괴롭지도 않고 행복하지도 않은 평온한 느낌만 있는, 평온 때문에 새김이 완전히 깨끗한 제4선정에 도달하여 지냅니다.” |
설명:
위에서 “평온 때문에 새김이 완전히 깨끗한(upekkhāsatipārisuddhiṃ)”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제4선정의 칭송할 만한 덕목 중의 하나입니다. 여기서의 평온은 느낌의 평온이 아닙니다. 같이 생겨나는 동료(마음부수)법들의 균형이 맞도록 도움을 주는 성품법입니다. 이것이 마음부수로는 중립(tatramajjhattatā)입니다. 이 중립(평온)은 믿음과 통찰지를 균형 맞춰줍니다. 정진과 삼매도 균형 맞춰줍니다.
어떻게 균형 맞춰주는가 하면, 일부 수행자들은 믿음(saddha)이 지나칩니다. ‘맞는가, 맞지 않는가, 적합한가, 적합하지 않은가’라는 등을 전혀 숙고하지 않고 눈감고 무턱대고 믿습니다. 그래서 숙고하는 지혜가 작고 힘이 약합니다. 어떤 종교나 가르침에 관련하여 근거 없이 그냥 집착하고 있는 것은 이 믿음이 지나치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입문한 일부 사람들 중, 부처님의 가르침과 반대되는 견해를 사실이고 바른 것으로 받아들이고 집착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믿음이 지나쳐 숙고하는 지혜가 힘이 적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믿기에 적당하지 않은 것을 믿는 것은 선업의 믿음이 아닙니다. 잘못된 확신(micchā adhimokkha)이라고 부르는 잘못된 믿음일 뿐입니다. 부처님, 가르침, 승가라는 참된 법들에 대해 믿는 믿음이 지나칠 때도 통찰지 쪽이 힘이 약해지기도 합니다.
숙고하고 반조하는 지혜가 지나쳐도 믿기에 적당한 것을 믿지 않습니다. 많은 경전지식을 의지해서 숙고하는 지혜가 지나치면, 수행하는 모습, 바른 방법조차 믿지 않기도 합니다. 믿지 않기 때문에 전혀 수행하지 않습니다. 수행하더라도 정성스럽게 수행하지 않고서 숙고하고 반조하기만 계속 하기 때문에 삼매가 생겨나지 않습니다. 삼매가 생겨나지 않아 진정한 위빳사나 지혜도 생겨나지 않습니다. 이곳 수행센터에서 수행하는 수행자들 중에서도 처음 이렇게 확실하게 믿고서 수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삼매와 지혜가 생겨나지 않고 시간만 허비한 이들이 있을 것입니다. 나중에 열심히 노력해서 삼매와 지혜가 생겨나 처음에 숙고만 했었던 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잘 이해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 믿는 믿음과 숙고하는 지혜를 균형 맞춰줄 필요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설해 놓으신 새김확립의 가르침과 일치하게 정성스럽게 관찰하고 노력하면 지금 설명했던 중립이라고 부르는 평온의 힘이 생겨 이 믿음과 통찰지를 서로 너무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균형 맞춰줍니다. 이렇게 균형 맞춰졌을 때 특별한 지혜, 특별한 법이 생겨납니다.
그리고 노력하는 정진이 지나치면 마음이 고요함이라고 하는 삼매의 힘이 적게 됩니다. 위빳사나 관찰을 처음 시작하는 이들에게는 봄, 들림 등의 여러 관찰대상들을 다 따라서 관찰하고 있으면, 애쓰고 노력하는 것이 지나치게 됩니다. 따라서 관찰대상에 마음이 잘 머물지 못하게 됩니다. 대상 하나를 관찰하고 있으면서 다른 대상으로 관찰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그 대상을 관찰하더라도 또 다른 대상 쪽으로 마음이 다시 달아납니다. 이렇게 관찰하고 있는 대상에 잘 확립하지 못한 채, 밀착하지 못한 채 산란하게 됩니다. 이렇게 지나치게 산란한 것은 삼매의 힘이 적은 것입니다. 삼매의 힘이 없으면 위빳사나 지혜, 통찰지도 생겨나지 않습니다.
반대로 대상 하나에만 집중해서 계속 관찰하면 애를 쓰지 않기 때문에 정진의 힘이 줄어들게 됩니다. 이렇게 애쓰고 노력하는 정진이 힘이 약하게 되면 삼매가 지나치게 되어 해태·혼침이 들어오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진짜 삼매가 생겨나지 않기 때문에 위빳사나 통찰지도 생겨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정진과 삼매도 균형 맞춰줄 필요가 있습니다. 이렇게 균형 맞춰주도록 처음에는 너무 많은 대상들을 관찰하지 않고서, 그렇다고 계속 한 대상만 관찰하지도 않고서, 최소한 두 대상 정도를 관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따라서 〈앉음, 닿음〉이라고 이 두 가지를 처음부터 관찰하든지, 배의 부풂과 꺼짐을 〈부풂, 꺼짐〉이라고 처음부터 관찰하도록 여기서는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렇게 관찰하여 중립이라고 부르는 평온의 힘이 좋아졌을 때, 지나치게 노력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애씀이라고 하는 노력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게 되어, 그 힘 그대로, 저절로 새김이 좋아집니다. 이렇게 좋아지면 관찰하는 것도 피곤하지 않고 새김과 앎(지혜)이 매우 좋아집니다. 생멸의 지혜에 이르렀을 때 지나치게 노력하지도 않고서도 새김과 앎이 좋은 것이 분명하게 됩니다. 이것은 중립이 분명하게 된 것입니다.
(아비담마의 관점에서 보면) 보시할 때든, 계를 수지할 때든, 부처님께 예경드릴 때든, 법문을 들을 때든, 선업을 행할 때마다 계속해서 이 중립이라는 평온은 포함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일반적인 선업의 마음이 생길 때에는 이 평온이 (한꺼번에 생기기 때문에) 그리 분명하지 않습니다. 경전(아비담마)에 박식한 이들도 이러한 평온을 분명하게 경험하지 못한 이들이 많습니다. 경전의 구절에 따라 기억하고서 말하고 있는 것을 뿐입니다.
새김확립 가르침에 따라 생겨날 때의 물질·정신을 관찰하고 있는 이들은, 경전에 박식하지 않아도 생멸의 지혜에 이르렀을 때 이 균형 맞춰 관찰하는 평온을 스스로 경험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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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형성평온의 지혜에 이르러야 평온을 더욱 분명하게 경험합니다. 형성평온의 지혜에 도달하면 수행을 시작할 때 수행 대상에 네 번이나 다섯 번 정도만 약간 애를 써서 관찰하면 됩니다. 그 다음부터는 애를 쓰지 않아도 사띠와 앎 그리고 대상도 저절로 드러나서 관찰이 잘 되어 앎이 저절로 드러납니다. 그렇다고 애씀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닙니다.
형성평온의 지혜의 덕목
가. 평온한 세 가지 덕목
① 두려워하는 것과 즐기는 것이 사라진다. ② 행복과 괴로움을 평온하게 관찰한다. ③ 애쓰지 않고 쉽게 사띠할 수 있다.
소멸의 지혜, 두려움의 지혜, 염오의 지혜 등에서는 두려워하고 허물도 보고 염오하고 버리려고 하고 벗어나려고 하는 성품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벗어나려고 노력하는 지혜에서는 빨리 빨리 없어지기 때문에, 그런 것이 없는 성품, 적멸한 성품에 도달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다 보면 어떤 현상이 생깁니다. (이것을 스스로 경험해야 합니다.)
① 두려워하는 것과 즐기는 것이 사라진다.
형성평온의 지혜에 도달하면 두려워하는 등의 좋지 않은 것들이 사라집니다. 반대로 그 앞 단계인 생멸의 지혜에서는 빛이 나타나는 것 등을 좋아했었는데, 형성평온의 지혜에 도달하면 이런 것들도 사라집니다. 이것이 청정도론(Vis.ii.293)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두려움도 즐김도 버리고서, 형성들에 대해 좋아하지도 않고 싫어하지도 않고 고르게 된다.”
게송 : 걱정 즐김 사라지네.
② 행복과 괴로움을 평온하게 관찰한다.
형성평온의 지혜에 도달하면 행복이든 고통이든, 좋은 대상이든 나쁜 대상이든, 단지 알기만 할 뿐 균형 맞춰서 잘 관찰하고 있음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앙굿따라 니까야 10가지 모음에서 이렇게 설하고 있습니다.
“비구들이여, 여기서 비구는, 비구는 눈으로 형색을 보고나서 즐겁지도 않고 행복하지도 않고, 마음이 불편하지도 않고 평온하게 살아간다. 사띠하며 바르게 알고 있기 때문이다.”
게송 : 불고불락 평온 관찰
“보고나서”라고 한 것은 보지 않은 것을 숙고하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본 직후에 바로 관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실대로 바르게 알게 되어서 그 대상과 관련하여 번뇌가 생길 기회가 없어집니다. 이렇게 관찰해야 합니다. 이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보고나서 바로 관찰해서 무상 괴로움 무아라고 사실대로 바르게 알면, 그 대상에 대해서 관찰하지 않으면 생길 탐진치가 생길 기회를 얻지 못하고 사라집니다. 생기지 않습니다. 이것을 분명히 기억해 두어야 합니다. “즐겁지도 않고”라는 것은 좋은 대상을 보았어도 즐기거나 그것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불편하지도 않고”라는 것은 아무리 나쁜 대상을 보았더라도 마음 불편함이 생기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평온하게 살아간다.” 즉 단지 알기만 하면서 평온하게 균형을 맞추면서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사띠하며 바르게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귀로 소리를 듣고서 … 코로 냄새를 맡고나서 … 혀로 맛을 보고서 … 몸으로 감촉에 닿고서 … 마음으로 법을 의식하고서 …” 도 마찬가지입니다.
게송 :
형색 보아 관찰해 바로알기를/ 즐김없어 화안내 관찰평온해/(아)라한처럼 수행자 관찰되기를.
소리 들어 관찰해 바로알기를/ 즐김없어 화안내 관찰평온해/(아)라한처럼 수행자 관찰되기를.
냄새 맡아 관찰해 바로알기를/ 즐김없어 화안내 관찰평온해/(아)라한처럼 수행자 관찰되기를.
맛을 보아 관찰해 바로알기를/ 즐김없어 화안내 관찰평온해/(아)라한처럼 수행자 관찰되기를.
감촉 닿아 관찰해 바로알기를/ 즐김없어 화안내 관찰평온해/(아)라한처럼 수행자 관찰되기를.
성품 알아 관찰해 바로알기를/ 즐김없어 화안내 관찰평온해/(아)라한처럼 수행자 관찰되기를.
평온하게 관찰하는 것은 원래 아라한의 덕목입니다. 그런데 볼 때마다 끊임없이 관찰하고 있는 수행자라면 형성평온의 지혜에 도달했을 때, 이렇게 평온하게 잘 관찰할 수 있는 덕목을 어느 정도 갖춘 것입니다.
③ 애쓰지 않고 쉽게 관찰
청정도론(Vis.ii.295)에 “형성들인 물질정신법들을 조사하고 살피는 일에 중립적이 되어(평온하고 무심하게 되어)”라고 나와 있습니다. 이것을 복주서(Pm.ii.460)에서 “형성들인 물질정신법들에 대해 무관심하게 관찰하는 것처럼, 관찰하는 위빳사나 자체에 대해서도 무관심하게 관찰하고 있다.”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대상도 저절로 드러나고 관찰도 저절로 되는 것, 즉 애쓰지 않고 편안하게 관찰한다는 뜻입니다.
나. 특별한 덕목 세 가지
① 오랫동안 유지된다. ② 지날수록 미세하다. ③ 다른 대상으로 달아나지 않는다.
형성평온의 지혜가 무르익으면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 동안이라도 계속 유지됩니다. 시간이 지나도 대상도 미세해지고 관찰도 분명하게 잘 관찰할 수 있습니다. 일부러 부모님이나 가족이나 회사로 마음을 보내더라도 마음이 달아나지 않고, 혹시 가더라도 대상으로 바로 돌아옵니다. 이것이 형성평온의 지혜가 가진 세 가지 특별한 덕목입니다.
이렇게 되면 자세와 얼굴에 드러납니다. 미얀마의 어떤 사야도는 한 달, 두 달 수행을 잘한 수행자들이 사야도께 인사드리러 갔을 때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대들이 처음에 왔을 때는 눈으로 여기보고 저기 보고, 팔도 함부로 움직이는 것이 까마귀 같았는데, 지금은 얼굴도 깨끗하고 몸가짐도 고요한 것이 아라한 비슷하게 됐군요.”
지금까지 위빳사나 수행을 해서 생긴 중립(평온)이 같이 생긴 법들을 균형 맞춰주는 경우를 설명했고, 어쨌든 제4선정에서도 평온 때문에 사띠가 매우 깨끗하게 됩니다. 중립 때문에 사띠가 매우 깨끗하게 된다는 내용도, 4선정은 아니지만, 형성평온의 지혜에 도달한 수행자는 자신이 경험해 본 것과 비교해 보면 사띠가 매우 깨끗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형성평온의 지혜에 익숙하게 도달하는 수행자를 처음에는 하루에 경행을 1시간 하고 3시간 앉아서 수행하라고 지도합니다.(보통 형성평온의 지혜에 도달한 수행자를 3시간 앉게 지도함) 그런 다음 하루에 두 번 혹은 하루에 세 번 수행하라고 합니다. 그렇게 하기를 짧은 사람은 사흘, 긴 사람은 1주일(사람에 따라 차이가 납니다.)이 지나서 형성평온의 지혜가 완전히 무르익으면, 하나의 인식과정에서, 수순의 지혜와 종성의 지혜(마음)에 이어서 도의 지혜가 생겨서 번뇌를 끊어내고 수다원이 됩니다.
이 경에서 담마딘나 비구니 스님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제4선정에 들어갔다가 그 선정에서 나와서 즉시 위빳사나 관찰을 통해서 아라한의 도에 이르러 아라한이 된다면, 그 위빳사나의 기본이 되는 4선정의 평온한 느낌에는, 무명 잠재번뇌가 잠재할 기회가 없기 때문에, 그런 평온한 느낌에서는 무명 잠재번뇌를 제거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첫댓글 사두사두사두
사두 사두 사두 ~~^^
사-두 사-두 사-두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