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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송선생 이야기(7)
소몰이꾼 소년 이야기1
어떤 사람이 고향이 어디냐고 물어오면 보성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그분은 단번에 “거기 녹차로 유명한 곳 맞죠” 라고 말한다.
그런데 보성은 녹차만 유명한 게 아니라 두 가지 유명한 것이 더 있어서 흔히들 사람들이 삼보(三寶)의 고장이라고 부른다.
첫째는 전국 생산량의 1/3을 차지한다는 녹차가 유명한 고장 다향(茶鄕),
명창 정응민선생을 비롯한 판소리와 국창 등 유명 예술인들이 많이 나온 고장 예향(禮鄕),
나라가 위태로울 때마다 목숨을 걸고 나서 싸웠던 의병과 애국지사들이 많은 고장이라고 해서
의향(義鄕)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여기에 또 바다와 산과 호수가 아름다워서 삼경(三境)의 고장이라고도 부른다.
예나 지금이나 늘 자랑스럽고 어디를 가더라도 아름다운 곳 보성에 가면
아직도 옛 명성을 간직한 5일시장이 읍면지역을 돌아가며 장이 서고 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5일장이 보성장과 벌교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소몰이꾼 소년 이야기는 1970년대 무렵 보성장과 벌교장 쇠전(牛市場)을 다니면서 겪은 이야기다.
한 방에서 같이 잠자며 생활하는 할아버지와 길동무 삼아서 같이 소를 몰고 보성장으로 걸어갔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오고,
이틀 뒤에는 반대쪽 벌교장으로 소를 몰고 걸어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면서 보고, 듣고, 느꼈던 옛이야기다.
보성장은 매 달 2일과 7일에 장이 선다.
1960~70년 대 무렵 보성장은 전남 동부6군에서 가장 큰 쇠전(牛市場)이 서는 곳으로 널리 알려졌다.
특히 보성장의 쇠전(牛市場)은 남원에 있는 성우장과 함께 송아지를 사고파는 장으로 더욱 유명했다고 한다.
보성장 쇠전(牛市場)이 서는 날이면 소장수를 따라 경상도 진주와 전북 남원에 있는 쇠전(牛市場)까지 걸어서
소를 몰아다 주는 전문 소몰이꾼들이 많아서 보성 쇠전(牛市場)이 늘 북적거렸다고 한다.
그 소몰이꾼들은 대개 한 사람이 소를 네 다섯 마리를 모는 게 보통이었는데,
소를 모는 실력이 뛰어난 소몰이꾼은 훨씬 많은 열 마리까지도 앞뒤로 몰았던 것 같다.
어린 소년이 보기에는 혼자서 그 많은 소를 앞뒤로 몰고가는 모습이 참으로 신기하고 소 다루는 기술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보성장이 열리는 날이면 할아버지와 소년은 새벽닭이 우는 네 다섯시 경에 일찍 일어난다.
꿀잠을 자다가도 할아버지께서 흔들어 깨우면 소년은 벌떡 일어나서 검정 솜이불을 웃목에 개어 놓고
물앵두나무가 있는 샘가로 가서 찬물에 세수를 하면서 잠이 덜 깬 정신을 차린다.
그리고 얼른 방으로 들어와 엄마가 차려준 새벽밥을 할아버지와 함께 겸상하여 밥을 먹는다.
밥을 빨리 먹기 위해서 찬물에 밥을 말아서 후루룩 먹는다.
그리고는 다 먹은 밥상은 부엌에다 갖다 놓고 외출 옷을 챙겨 입은 다음
할아버지와 같이 마당가 치깐(변소) 옆에 있는 소막(마굿간)으로 가서 장으로 몰고 갈 소들의 상태를 한 번 살펴본다.
할아버지는 장으로 떠나기 전에 소들에게 물을 충분히 먹인다.
큰 고무다라이에 물을 가득 떠다 주고 거기에 보릿재가루를 두 세 바가지 부어서 물에 타 준다.
대막대기로 보릿재가루를 휘휘 저어주면 소가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혀로 싹싹 할트면서 깨끗하게 먹는다.
할아버지 말씀으로는 물을 충분히 먹어야 소가 먼길을 가는데 덜 힘들어 한다고 했다.
소들이 떠다 준 물을 다 먹으면 이제 장으로 떠날 채비를 한다.
소를 몰고 갈 때 쓸 단단한 대막대기를 한 개씩 챙기고 할아버지가 소막에서 소를 몰고 나오면 집 대문을 함께 나선다.
여름에는 날이 빨리 새서 덜 불편하지만 겨울에는 집을 나설 때 날이 빨리 새지 않아서 주위가 한참 어두컴컴하고
새벽 달이 없는 날은 걸어갈 길도 보일락말락할 정도로 많이 어둡다.
겨울 동트기 전 이른 새벽은 정말 어둡다.
1~2월 한 겨울에는 어둠 속에 사람 입김이 하얗게 보이고 소 입에서도 하얀 김이 푸푸소리와 함께 풀풀 세게 나온다.
집 대문을 열고 동넷길 밖으로 나가면 금방 묏등이 많이 있는 공동산이 나온다.
그 공동산 옆으로 구불구불하고 좁디좁은 밭둑길이 쭈욱 나 있다.
밭둑길을 따라 소들을 몰고 터벅터벅 신작로 길로 내려가면 그 때부터 보성장으로 가는 기나긴 신작로 길 걷기가 시작된다.
겨울철 새벽에는 집에서 출발할 무렵에 아직 날이 새지 않아서 신작로 길도 많이 어둡다.
사람도 다니지 않고 차도 한 대도 다니지 않는다.
그래서 어두워도 소를 몰고 길을 가기가 그렇게 어렵지는 않다.
할아버지와 소년은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면서 희미하게 보이는 신작로 길을 따라 갓길로 소를 몰면서 걸어간다.
할아버지가 쇠고삐를 잡고 소를 몰고 갈 때 소년은 소들이 길옆으로 새지 않고 한 줄로 서서 잘 가도록
앞뒤로 왔다갔다 하면서 막대기로 소 엉덩이를 때리면서 도와드린다.
어떤 날이었다.
그날은 할아버지가 벌교장에서 소를 다섯 마리나 몰고 오셔서 함께 보성장으로 소를 몰아다 줘야 했다.
그날은 앞쪽에다 소 세 마리를 몰고 뒷쪽에다 두 마리를 두고 끌면서 갔다.
그런 날은 할아버지가 많이 힘들어 하신다.
왜냐하면 할아버지는 젊어서 남의 집 초가지붕 이엉을 덮어주는 일을 하다가 지붕에서 미끄러져 발목을 많이 다치셨다.
그래서 평소에도 다리를 절뚝거리면서 걸어다니시는데
그날처럼 여러 마리 소를 몰고 가다가 소가 자동차 소리에 놀라서 갑자기 뛰어가거나 소끼리 뒤엉키며 달려가면
소들을 따라가 잡을 수가 없어서 쩔쩔매신다.
소들이 놀라서 갑자기 달리기를 하면 할아버지는 쇠고삐를 그냥 다 놔불고 뒤에서 천천히 절둑거리면서 소들을 따라간다.
그럴 때는 소년이 빨리 달려가서 달려가는 소들의 쇠고삐를 붙잡아서 한 데 모은 뒤 할아버지께 건네 드린다.
그러면 할아버지가 쇠고삐를 고쳐잡고 가던 길을 다시 간다.
날이 어스름하게 밝아오는 시각에 할아버지가 절뚝거리면서 소를 몰고 가는 모습을 보면
혼자서 여러 마리 소를 몰고 갈 때는 참 힘드시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짠한 생각도 들었다.
늙으신 할아버지가 소몰이꾼을 그만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소몰이꾼을 그만 두지 못하셨다.
소몰이꾼을 해서 할머니 한약도 사드리고 당신 담뱃값과 용돈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와 함께 소를 몰고 한참을 가다가 소년이 소를 직접 몰아보겠다고 하면
할아버지가 그러라고 하시면서 앞쪽 소 한 두 마리 고삐를 맡겨준다.
그러면 할아버지 앞쪽에서 소년이 쇠고삐를 잡고 소를 몰고 간다.
또 할아버지와 교대하여 소년이 소를 모두 다 몰고가기도 한다.
할아버지께서 길을 가다가 소변이 마려울 때면 잠시 볼 일을 보실 수 있도록 도와드려야 할 때다.
소년의 집에서 보성장으로 걸어가는 길은 멀고도 여간 힘이 드는 길이 아니다.
그러나 할아버지와 같이 가는 그런 날은 심심한지도 모르고 언제 간지도 모르게 금방 한 바탕에 갈 수 있는 그런 길이었다.
조성 소년이 사는 동네에서 신작로 길을 따라 보성장으로 가는 길은 여러 마을들을 지나간다.
가장 먼저 지나는 곳은 석조인왕상 문화재자료와 옛 절터가 있는 청능마을 앞이고,
조성남초등학교와 약국이 길가에 있는 덕정마을 앞을 지나간다.
덕정마을 위쪽에는 소년이 중학교를 가지 못하고 집이 가난했던 동무들과 함께 공부하러 다니던 봉덕재건중학교가 있었다.
재건중학교를 다니면서 조성중학교 다니는 학생들을 큰 길에서 마주치기가 참 싫었다.
그래서 그들을 피하기 위해 신작로에서 멀리 떨어진 산길과 논둑길로 멀리 걸어다녔다.
어쩌다 길에서 마주치면 챙피하고 자존심이 상했다.
그 재건중학교는 중학교 졸업학력을 인정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도교육청에서 실시하는
고등학교 입학자격 검정고시를 보고 합격을 해야만 고등학교를 입학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 그런 학교였다.
덕정약국 앞을 지나서 약간 내리막 길을 가다보면 김해김씨가 집성촌을 이루어 사는 감동마을 입구가 나오고,
윤기 반지르하고 찰기가 많은 예당평야의 품질 좋은 쌀을 생산하는 도정공장과
초·중·고등학교가 다 있는 득량면 예당리 5일시장 옆길을 지나간다.
예당을 벗어나면 논 가운데로 난 구불구불한 신작로 오르막길이 한참 이어지는데 한참을 가면 덕산마을 입구가 나오고
마음씨 좋고 순박한 겸백사람들이 봇짐을 이고지고 예당장을 보려고 넘어다녔다는
파청재 아래 파청마을 앞을 지나가게 된다.
여기서부터는 신작로 길이 더욱 구불구불하고 오르락내리락하다가 산모둥이를 돌면 내리막길이 박실마을 앞까지 이어진다.
박실마을은 제주양씨와 진원박씨의 집성촌이며
조선시대부터 현대까지 이름난 인물들이 많이 나왔다고 해서 양택명당(陽宅明堂)으로 널리 소문난 마을이다.
박실마을 앞을 휘돌아서 가다보면 득량초등학교가 나온다.
이쯤 왔을 때 길이 구불구불한 곳에서 큰 차가 지나가게 되면 소를 몰고가기가 여간 힘이 들지가 않다.
자동차가 몰고 가는 소 옆으로 세게 지나가면 소들이 놀라서 빨리 달려가거나
어떤 때는 길이 아닌 길옆 나락이 심어진 물논으로 들어가버리기도 한다.
그래서 소를 몰고 갈 때 앞쪽이나 뒤쪽에서 큰 차가 나타나는 소리가 들리면 쇠고삐를 바짝 잡고 미리 대비를 한다.
한참을 또 가다보면 겸백으로 들어가는 군머리가 나오는데
정유재란 때 최대성 의병장께서 의병 수천명을 이끌고 왜군을 물리치며 수많은 공을 세우고
계속 왜군과 싸우다가 45세의 나이에 조총에 맞아 전사한 곳이 원통하고 한 많은 그 군머리다.
군머리 사거리를 지나가다가 고개를 돌려 오른쪽을 올려다보면 산비탈에 유역변경식으로 지어진
보성강수력발전소 건물과 산비탈에 커다란 물탱크가 보인다.
이 발전소는 우리나라 남한 최초의 수력발전소로 일제 강점기 때 득량면 간척지인 예당평야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해
겸백면 용산리 부근 보성강에 큰 보(洑)를 만들고 군머리쪽 산으로 도수터널을 뚫어서 물을 내려보내면서
83.6m의 높이에서 물을 떨어뜨리는 낙차를 이용해 발전기를 돌리는 다목적 수력발전소를 세웠다고 한다.
이 물을 이용하여 지금도 드넓은 예당평야에서 벼농사를 지으며 품질 좋은 쌀을 생산하고 있다.
평평한 신작로를 따라 계속 가다보면 ‘섯바무’라고 부르던 신전마을 앞을 지나고 구불구불한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백범 김구선생이 인천감옥을 탈출한 후 잠시 몸을 피해 숨어살았다고 알려진
크게 구부르진 오르막길목에 쇠실마을 입구가 나온다.
거기서부터 오르막 길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
구름도 한참을 쉬어간다는 곳. 그 굽이굽이를 셀 수가 없이 많고 높이가 아스라하게 높아서 안개가 자주 끼는
고개 그럭재(요즘 기러기재)를 깐닥깐닥 넘어간다.
그럭재를 넘어가면 초당마을 앞이다.
여기서부터는 쉬운 내리막길이 쭈욱 이어진다.
쌍룡마을을 지나면 율포해수욕장이 유명한 회천 들어가는 철길앞 삼거리가 나온다.
그 쯤에 날이 한참 밝아진 아침이 된다.
그러면 소를 더 바삐몰아서 쇠전이 열리는 보성장에 드디어 도착하게 된다.
소를 몰고 보성장 쇠전에 도착하면 쇠전머리에서 우리 동네 소장수아저씨가 기다리고 있다.
소장수아저씨를 만나면 쇠말뚝이 있는 곳까지 소를 몰고가서 소를 건네준다.
그러면 그 아저씨가 쇠고삐를 받아 소를 쇠말뚝에 묶는다.
그리고는 할아버니께 “어르신 애썼습니다. 욕 보셨습니다. 국밥이나 한 그릇 잡숩시다.”
하고 인사하면서 쇠전 모퉁이 국밥집으로 가자고 손을 이끈다.
그러면 소년도 할아버지를 졸졸졸 따라서 간다.
걸어가다가 멀리서 국밥집을 바라보면 흰 포장이 쳐진 처마밑으로 하얀 김이 모락모락 나온다.
그리고 고소하고 맛있는 냄새가 멀리까지 폴폴 풍겨온다.
국밥집 안으로 들어가면 훈짐이 푹 돈다.
사람들로 국밥집이 벌써 버글버글하다.
긴 나무의자에 앉으면 소장수아저씨가 국밥 한 그릇과 막걸리 한 잔을 시켜서 준다.
그리고 바지골마리에서 전대를 꺼내 할아버지께 돈을 준다.
소 한 마리에 오백원을 준다.
소몰이 삵을 건내주면서 “어르신, 국밥 잘 잡수시고 이따 장으로 한 번 와보시오”
하고 인사를 한 뒤 바삐 쇠전쪽으로 돌아간다.
할아버지와 소년은 국밥 한 그릇을 가운데 두고 같이 숟가락질을 하며 나누어 먹는다.
그 국밥은 커다란 툭시발에 돼지 머릿고기와 허파, 간, 곱창 등 삶은 고기가 골고루 푸짐하게 들어있는 국물밥이다.
한참을 먹다 툭시발 국밥이 몇 숟가락 남으면 할아버지가 소년보고 나머지 다 먹으라고 하면서 숟가락을 먼저 내려놓는다.
그리고는 막걸리 한 잔을 단숨에 들이마시고 깍두기 한 점을 집어서 드신다.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궐연담배 새마을 한 개비를 꺼내 물고 지포나이타로 불을 붙이신다.
그러면 소년은 국물 한 방울 밥 한 톨까지 남기지 않고 딱딱 긁어서 먹고 자리에서 얼른 일어난다.
그 때마다 소년은 할아버지가 자기를 생각해서 먼저 그만 잡수시고 국밥을 남겨주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할아버지께서는 어려서부터 유독 큰 손자인 소년을 많이 챙겨주고 사랑해 주셨다.
동네 잔칫집에 갔다 오실 때는 골마리에 흰손수건으로 싸서 떡 한 조각이라도 꼭 가져다 주신 분이다.
국밥집을 나오면 소년은 할아버지와 같이 쇠전을 한 바퀴 빙 둘러본다.
소장수들이 쇠말뚝에 묶여진 소를 바라보며 한 사람이 돈뭉치를 넘겨주면 돈이 적다고 안 받으려고 하면서
돈을 밀치기도 하고 계속 주거니받거니를 하면서 소값 흥정을 한다.
그러다 흥정이 잘 이루어지면 돈을 주고받으며 서로 웃는다.
소장수들이 소를 사고파는 것을 한참 구경하다가 할아버지가 동네 소장수아저씨에게 가서
다음 벌교장에 몰고 갈 소가 있냐고 물어보면 “조깐만 기다려 보시오”라고 하거나,
“어쩌까요? 오늘은 없어라”라고 할 때가 있다.
그렇게 벌교장에 몰고 갈 소가 없다고 하는 날은 장 안을 더 둘러보다가
조성으로 내려가는 비둘기호 기차시간에 맞춰서 보성역으로 걸어간다.
역 대합실에 들어가서 할아버지는 어른표 한 장, 소년은 학생용 반 표 한 장을 끊는다.
그리고는 비둘기호 기차를 타고 딱딱한 의자에 앉아 철길 옆 산천구경을 하면서 조성역으로 온다.
조성역에서 기차를 내리면 다시 집으로 터벅터벅 걸어서 온다.
버스비를 아끼기 위해서 걸어오는 것이다.
그러면 어쩔 때는 거의 점심 때가 다 된다.
집 마당에 들어서면 샘가에서 빨래를 하는 좋은 엄마가
소년을 보고 고생했다고 말하며 짠한 표정을 살짝 짓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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