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참나무 연대기 외 2편
박정인
잎마름병 참나무를 베어내고 나니
반백년 묵힌 말이 한목에 쏟아졌다
딱따구리 입질이 절벽에 세웠던 집
그 구멍에 깃들 만하다는 소문이 돌았을까
굴뚝새 박새 딱새들이 깃털을 남긴 채 떠나갔다
동심원 하나가 마을의 내력을 새기는 동안
몇몇의 이름도 함께 사라졌다
태풍이 후려친, 그 여름
곳집을 관리하던 술 취한 바우 아제가
만가도, 상여도 없이 섶다리와 함께 떠내려갔다
동천 할아버지 쯧쯧 혀를 차셨다
먼 길 떠나는데 상여는 한 번 태워줘야지
좋아하던 막걸리도 아끼지 마라
빈 상여 곡소리 따라 당산나무를 돌고 돌던 만가와
나의 이불 속 겁먹은 송별사와
폭포 아래 소에 말려버린 소년도
제자리 등고선에 기록되었다
어느 추운 톱날이 건들다 간 곁가지엔
중풍 든 노인처럼, 부름켜가 말꼬리를 흘리며 찌그러져 있다
그 촘촘한 곡선에선
가물었던 계절을 밟고 간 봄의 뒤꿈치와
수박화채 같은 그늘의 갈채소리
먼 산불에 놀란 숲의 심장박동소리를 들었다
다람쥐가 도토리를 물고 숨어버린 겨울 숲의 적막과
얼어붙은 여러 해 날씨까지
뭉뚱그려 새겨놓은 굴참나무 연대기는
죽은 후에야 읽게 되는 담담한 진술서다
성묘
꽃을 피우겠다고
엄동설한에 어머니를 땅에 심었다
어머니는 영원히 꽃피워야 마땅하다고 그날, 내가 울었을 때
막내야, 영원은 믿음 가운데도 있는 거란다
다비야말로 온전한 영원일 거야
나는 큰언니를 이겨먹은 기쁨으로 잔디를 심었다
하얀 겨울과 촉촉한 봄이 가고 여름은 자주 젖었지
핑계를 늘이며 가꾸지 못한 사이
어머니는 엉겅퀴 꽃으로 피어났으나
갈풀 속에 묻혀 잘 보이지 않는다
당신의 내용은 왜 쪼갤수록 커지는 걸까
지난 봄, 서너 평 돌밭을 주말 농장으로 일구다가
평생 돌멩이 채굴을 즐기던 당신을 만났지
키 큰 나무는 멀리서 보아야 다 보인다, 는 말 믿었을까
무작정 멀리 떠나온 청맹과니 한 마리가
근동에서 가장 수줍게 핀 풀꽃 곁에
사랑부전나비처럼 잠시 머물다 돌아 나오네
그해
어둠을 빛의 누명쯤으로 생각한 적 있다
구멍 난 양말처럼 쉽게 벗어던질 수 있는
오빠가 의료사고로 떠난 그해, 나는 어둠으로 살기 위해 어둠 속을 찾아들었고 작은 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이 나를 찔렀지만 죽을 만큼 아프진 않았다 지리멸렬한 연애도 돌려주었다 그때 나의 임기응변은 주위로부터 먼저 마음을 거둬들이는 것이었다 일주일 전 널어두었던 빨래를 오늘 별안간 걷어올 때처럼
매일 남의 다리로 걸어다니는 것 같았다 하나도 슬프지 않는 날은 불안했다 맞바람 창 없는 방이 나를 위협했다 살구꽃 그늘 같은 교실에서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면 벽에 핀 수묵의 꽃들이 활짝 웃으며 나를 반겼다 꽃들은 무서운 속도로 알을 슬었다 목소리 없는 저 꽃들은 식물일까 추깃물 냄새를 풍기므로 동물일까 의심이 마수의 눈길을 불러들여 나는 자주 응시되곤 했다 최선을 다하고 싶은 일이 생길까 매일 두려웠다 쿰쿰한 여름은 길바닥에 버찌열매를 떨구며 서성거렸고 수능을 앞둔 학생들 앞에서 나의 태도는 불온했다
가을과 겨울은 제멋대로 짧거나 추웠다
반짝이는 모든 것들에 주눅 들기 시작했고
잘못 통역된 고백처럼 절망이 나를 사랑하기 시작했다
여간해서 복구되지 않는 나의 목소리
그해부터 나는 한 옥타브 아래에서만 목소리를 낸다
시인의 사색
마침내, 사랑이라는 말
창밖에 봄의 밑그림이 완성되어 간다.
정원의 나무들이 나이테라는 제 수첩에다 우리들의 이 암울하고도 슬픈 봄을 모두 적바림하고 있겠다. 나는 갑자기 경건해지며 기록이라는 낱말이 뇌리에 박혔다. 진관내동 산에서 겪은 잎마름병 굴참나무 벌목과 성장기의 체험들이 ‘굴참나무 연대기’로 정돈되는 순간이었다.
봄 햇살이 야트막한 언덕에서 바람처럼 나부끼고, 마른 갈풀을 비집고 나온 하양 노랑 보랏빛 풀꽃에게서 대지의 모성이 느껴졌다. 꽃을 피우기엔 아직 쌀쌀한 날씨지만, 억센 풀 돋아나기 전에 꽃 피우지 않으면 안 될 꽃들이지 싶었다. 저를 캄캄한 세상에 던진 이를 잠깐이라도 만나지 못할까 봐, 고 작고 여린 꽃들이 얼마나 애써 피어났을까를 생각하니 핑 눈물이 돌았다. ‘저 꽃들은 누가 심은 누구의 어머니 일까.’
철 지난 달력을 보고 있으면, 문득 나를 떠난 시간들이 원망스러워진다. 나는 아직 저를 버리지 않았는데 시간이 먼저 나를 버렸다는 배신감에 정신이 번쩍 들다가도, 시간의 잽싼 보폭에 나의 느린 보폭을 맞추지 못한 나태를 돌이켜보게 된다. 나의 내용을 기준점으로 사는 동안, 타인에 대한 사랑이 턱없이 부족했을 것이다. 그 날들을 후회와 반성 속에서 다시 소환하게 되었다.
단단한 땅거죽을 들어 올리는 새순들에게 다시 경의와 찬사를 보낸다. 얇은 마스크 한 장에도 주눅이 들어 대인기피증을 앓고 있는 나로서는 그 보드라운 입술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라보는 이 없으면, 저 언덕배기에 무수히 피어난 꽃들이 무슨 소용 있으랴. 귀먹은 사람을 향해 아무리 그 이름 외쳐본들 또 무슨 소용 있으랴. 서로가 있기에 바라보고 불러볼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세상을 처음 보았을 때처럼, 어찌할 수 없이 눈길만 내보내는 저 수줍음 타는 꽃들과 새들과 바람과 달에게서는 위로를 얻지만, 아무리 현자라 할지라도 그 가르침에서 이 암울을 위로 받을 수는 없을 거란 생각이 든다. 서로가 서로를 기피하는 시대, 연둣빛 바람이 사운거리며 마스크를 벗기려 할 때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사람보다 자연에서 위안을 얻는다.
사랑이 없는 구역을 개척할 수 있을까. 웬만한 슬픔의 뿌리에는 사랑이 똬리를 틀고 있어서, 그 사랑 때문에 맘 놓고 슬퍼할 수도 없을 때가 있다. 분노하고 있는, 그 누구도 단박에 해결할 수 없는 이 뻔뻔한 코로나의 도시에는, 마음 추스르기 위해 몸이 꿀렁꿀렁할 때까지 소주를 들이붓는 사람이 있다. 혈육이 떨어져나가는 슬픔에도 목놓아 울 수조차 없는 상황이지만, 그러니까 그럴수록 살아야 한다. 이 다정한 봄의 풍경을 눈에도 마음에도 온전히 담아둘 수 없음에 굴하지 않으려는 발버둥이다. 헐렁한 삶이 내는 골목의 소음들이 오늘따라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은 코로나가 가져다준 자기성찰의 시간일지도 모르겠다.
코로나 펜데믹 이후, 우리들은 예전보다 서로를 더 많이 이해하고 용서하는 것 같다. 나의 목숨이 나의 것이 아님을 자각하게 해준 것이다. 미울수록 잘 달래어 더불어 가야 한다. 이것이 또 다른 형태의 사랑이라 할지라도 내 본심은, 사랑이 충만하여 두 볼이 닳도록 부비며 사는 언덕을 개척하고 싶은 것이다. 그렇다. 혼자 자연인으로 살아간다 해도 나는 키 큰 나무마다 새들의 집을 달아주고 그들을 위해 좁쌀을 수확할 것이다. 세상 모든 것이 다 사라진다 해도 끝끝내 남아있을 사랑이라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