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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창24:1-27절)
여러분은 운명이라는 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세상 사람들은 자신이 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어떤 절대자에 의하여 자신의 운명이 결정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운명 철학을 믿는 사람들은 자신이 태어난 년월일시를 가지고 사주팔자를 만들어 믿고 삽니다. 그러나 이런 관념은 심히 잘못된 인생관입니다. 사전에 보면 ‘운명이란 사람의 몸을 둘러싸고 닥치는 선과 악, 길흉의 사정으로 인생 전반의 사건이 필연의 초인간적 위력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는 신앙 또는 사상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고 정의합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어떤 절대 신이 정한 뜻대로 부유하든지 가난하든지 귀하든지 천하든지 그대로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운명을 좋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좋은 일이 갑자기 일어나면 그것을 운명이라고 말하지 않고 행운이라고 하고, 불치병이나 혹은 도저히 극복하기 어려운 고통스러운 처지에 처하게 되면 스스로 그 인생을 체념하면서 팔자나 운명을 들먹입니다. 스스로 운명의 노예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비난하고 심지어는 학대하고 싫어합니다. 요즈음 유행하는 말 중에 금수저, 흙수저라는 말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평생을 가난하게 살라는 법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참으로 옳지 못한 삶의 자세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이 가질 태도는 전혀 아닌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주권적 섭리로 성도들의 삶을 이끌어 가십니다. 그러나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그런 운명이 결코 아닌 것입니다. 오히려 이것은 절대 주권적인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사랑하는 아내 사라의 죽음으로 고독과 죽음에 대한 위기의식을 느낀 아브라함은 자신의 유일한 아들이자 언약의 후손인 이삭의 결혼을 서두르게 됩니다. 창세기를 읽어보면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것 같은 내용이 지루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그 내용이 바로 본 장입니다. 가장 긴 본 장의 주제는 언약의 씨를 순결하게 보존하는 데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언약의 후손인 이삭과 함께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며느리를 구해야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범사에 하나님께 복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그가 나이 많아 늙었을 때는 가축과 노비와 은금이 풍부했습니다. 이제 그는 그 모든 재산을 아들인 이삭에게 물려주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기 친족의 딸을 며느리로 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집의 모든 소유를 맡은 늙은 종을 불러서 자신의 환도뼈 밑에 손을 넣고 맹세를 하게 했습니다.
*창24:2 아브라함이 자기 집 모든 소유를 맡은 늙은 종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내 허벅지 밑에 네 손을 넣으라.
그 늙은 종은 아브라함에게 맹세를 하고 낙타 열 필과 그 주인의 모든 좋은 것을 가지고 아브라함의 고향인 메소포타미아로 떠났습니다. 아브라함은 종을 떠나보내기에 앞서 세 가지 단서를 붙였습니다.
첫째는, 이삭의 아내를 가나안인 중에서 선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창24:3 내가 너에게 하늘의 하나님, 땅의 하나님이신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게 하노니 너는 내가 거주하는 이 지방 가나안 족속의 딸 중에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지 말고..
이것은 순수한 혈통 보존이라는 목적 그 이상입니다. 자신의 종족이 우상을 숭배하는 가나안 종교와 더러운 풍습의 불결함에 오염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종교적 차원의 결단이었습니다.
둘째는, 자기의 고향, 자기의 친척에게 가서 이삭의 아내를 데리고 오라는 것입니다.
*창24:4 내 고향 내 족속에게로 가서 내 아들 이삭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라.
아브라함은 우연한 기회에 어떤 사람으로부터 자기의 동생 나홀이 자녀를 낳고 하란에서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제 종을 그곳으로 보내어 이삭의 아내를 택하도록 명령하는데 이것은 모든 것을 준비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그의 신앙이었습니다.
*창24:7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내 아버지의 집과 내 고향 땅에서 떠나게 하시고 내게 말씀하시며 내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이 땅을 네 씨에게 주리라 하셨으니 그가 그 사자를 너보다 앞서 보내실 지라 네가 거기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할지니라.
셋째는, 이삭을 자기의 고향으로 절대 데리고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창24:6 아브라함이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을 그리로 데리고 돌아가지 아니하도록 하라.
*창24:8 만일 여자가 너를 따라오려고 하지 아니하면 나의 이 맹세가 너와 상관이 없나니 오직 내 아들을 데리고 그리로 가지 말지니라.
이삭이 메소포타미아 지방인 하란으로 가면 세상의 문명을 보고 마음이 현혹되어 그곳에 정착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본토, 친척, 아비 집에서 불러내어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서 살게 하셨다는 확실한 믿음의 의식이 있었습니다. 그 믿음을 아들 이삭에게 물려 주고 싶은 것입니다.
평소에 신앙의 삶을 잘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 막상 하나님을 믿고 신뢰해야 할 중요한 시점에서 하나님보다 자신의 지혜와 경험에 의존하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온전히 믿지 못할 때 나타납니다. 아브라함의 간곡한 당부를 받고 그의 특사가 되어 메소포타미아로 떠난 엘리에셀은 어떤 근거나 판단으로 이삭의 아내를 구해야 할지 막막한 상태에서 목적지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는 아브라함의 동생이 살고 있는 하란 땅에 도착하자 나홀의 도성에 있는 우물가에 약대를 꿇렸습니다. 이때는 저녁이라 여인들이 물을 길으러 나올 때였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처럼 지금까지 살아온 자신의 연륜에서 얻어진 경험에 의존하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자신의 앞날을 의탁합니다. 여기에 아브라함의 종의 신앙이 잘 나타납니다.
*창24:12-14 그가 이르되 우리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오늘날 나에게 순조롭게 만나게 하사 내 주인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성 중 사람의 딸들이 물 길으러 나오겠사오니 내가 우물곁에 서 있다가 한 소녀에게 이르기를 청하건대 너는 물동이를 기울여 나로 마시게 하라 하리니 그의 대답이 마시라 내가 당신의 낙타에게도 마시게 하리라 하면 그는 주께서 주의 종 이삭을 위하여 정하신 자라 이로 말미암아 주께서 내 주인에게 은혜 베푸심을 내가 알겠나이다.
엘리에셀은 하나님께서 이미 선택해 두신 이삭의 아내를 순조롭게 만나기를 기도했는데 그의 기도는 구체적인 것으로 그녀의 인품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내용이었습니다. 즉 낯선 나그네를 도와주는 자상한 마음씨, 사랑이 넘치는 순종, 동물에게까지 동정을 보이는 그녀의 헌신, 충분한 물을 먹이는 그녀의 수고를 말합니다. 처녀 아이가 낙타 열 마리에게까지 물을 충분히 마시게 한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종이 몰고 온 낙타들은 모두 광야와 사막을 지나오는 동안에 몸속에 저장하고 있던 물을 다 소비하였으므로 갈증이 심한 상태였습니다. 낙타는 원래 위에 물을 저장하여 두는 덕분에 장기간 물을 마시지 않아도 되지만 한 번 마시면 대단한 분량의 물을 먹습니다. 그런데 한두 마리도 아니고 열 마리의 낙타에게 물을 다 마시게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닌 것입니다. 이런 기적 같은 일들이 일어나도록 엘리에셀은 하나님께 기도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종이 미쳐 기도를 마치기도 전에 심히 아리따운 처녀가 물 항아리를 어깨에 메고 우물로 내려가서 물을 길어 올라오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본 아브라함의 종은 그녀에게 달려가 항아리의 물을 조금 마시게 해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급히 물 항아리를 손에서 내려 종에게 마시게 하고 또 종의 낙타에게도 물을 길어 배불리 마시게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녀는 급히 물 항아리의 물을 구유에 붓고 다시 길으려고 우물로 달려가서 모든 낙타를 위하여 부지런히 물을 길었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걸렸는지 모르지만 낙타 열 필이 물을 다 마실 때까지 종은 그녀를 묵묵히 주목하고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과연 평탄한 길을 주셨는지 알기를 원했습니다. 물론 종은 그녀를 바라보면서 조용히 하나님께 기도했을 것입니다. 실로 이 같은 침묵은 하나님의 뜻을 고대하는 영혼의 목마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윗도 악인 앞에서 하나님을 잠잠히 바라보고 하나님의 판단을 기다렸습니다.
*시39:1-2 내가 말하기를 나의 행위를 조심하여 내 혀로 범죄하지 아니하리니 악인이 내 앞에 있을 때에 내 입에 재갈을 먹이리라 하였도다. 내가 잠잠하여 선한 말도 하지 아니하리니 나의 근심이 더 심하도다.
종이 기도하며 잠잠히 기다리는 동안 그녀는 상당한 시간과 정성을 기울여 낙타에게 충분한 물을 공급하였습니다. 낯선 나그네에게 베푼 그녀의 언행은 단순한 예의가 아니라 진정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아름답고 친절한 행동이었습니다. 이제 한 가지를 제외하고는 그가 찾던 여성의 모든 조건은 충족이 되었습니다. 그 한 가지는 과연 이 여성이 아브라함의 혈족인가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늙은 종은 이삭의 신부를 구하기 위해 그 주인의 모든 좋은 것을 가지고 길을 떠나 왔습니다.
*창24:10 이에 종이 그 주인의 낙타 중 열 필을 끌고 떠났는데 곧 그의 주인의 모든 좋은 것을 가지고 떠나 메소포타미아로 가서 나흘의 성에 이르러--
주인이 준 금, 은 보화를 낙타에 잔뜩 싣고 온 아브라함의 종은 그녀가 물을 낙타에게 다 먹이고 나자 자기가 가지고 온 보화 중에서 반 세겔 중 금 고리 한 개와 열 세겔 중 금 손목 고리 한 쌍을 그녀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녀에게 물었습니다. ‘네가 누구의 딸이냐 청하건대 내게 말하라 네 아버지의 집에 우리가 유숙할 곳이 있느냐’그때 그녀가 대답하기를 ‘나는 밀가가 나흘에게서 낳은 아들 브두엘의 딸이니이다 우리 집에 짚과 사료가 족하며 유숙할 곳도 있나이다.” 이로써 리브가는 아브라함의 형제인 나홀의 후손임이 밝혀졌습니다. 이에 엘리에셀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자를 먼저 보내시고 모든 일을 형통하게 하심에 깊은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창24:27 이르되 나의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나이다. 나의 주인에게 주의 사랑과 성실을 그치지 아니하셨사오며 여호와께서 길에서 나를 인도하사 내 주인의 동생 집에 이르게 하셨나이다 하니라
아브라함의 종은 환대하는 리브가가 자기가 찾고 있던 그 처녀임을 확인하고 그녀에게 예물을 건네주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결혼 풍습에 당사자가 모든 결정을 할 수 없었으므로 가족의 동의를 구합니다. 그리하여 리브가의 집에 도착한 종은 매우 길게 자신의 사명을 설명하고 하나님의 선하게 인도하심을 감사했습니다. 리브가와 그의 가정에서는 아브라함의 종의 설명을 듣고 약간의 주저함도 없이 결혼을 승낙합니다.
*창24:50-51 라반과 브두엘이 대답하여 이르되 이 일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았으니 우리는 가부를 말할 수 없노라 리브가가 당신 앞에 있으니 데리고 가서 여호와의 명령대로 그를 당신의 주인의 아들의 아내가 되게 하라.
이에 아브라함의 종이 그들의 말을 듣고 땅에 엎드리어 여호와께 절하고 낙타 열 필에 실고 온 은금 패물과 의복을 꺼내어 리브가에게 주고 그 오라비와 어머니에게도 주었습니다. 모든 일이 하나님께서 섭리하시는 대로 형통하게 진행이 되었습니다. 리브가는 엘리에셀을 따라 가나안 땅으로 와서 이삭의 신부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모든 일들을 두고 어떤 사람들은 이것마저도 운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세상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이 받는 구원까지도 운명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미리 아시고 예정하시고 선택하셨다면 그것까지도 운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의 예정된 구원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합니다.
*엡1:4-5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롬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렇습니다. 사실 우리의 구원은 창조주 하나님에 의해 미리 정해졌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구원이 운명이라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왜냐하면 운명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은 신이 축복하면 축복하는 대로, 신이 저주하면 저주하는 대로 당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그들이 느끼고 생각하고 판단하는 대로 신을 좋게도 말하고 악하게도 말하는 것입니다. 태국에는 큰 부처상이 누워서 잠을 자고 있는 절이 있습니다. 와불이라고 하는데 사람들은 이 부처가 잠을 깰까 조심스럽게 그곳을 지나갑니다. 그리고 그 부처를 향하여 평화의 기원을 드리고 있습니다. 인간이 만든 잠자는 돌부처가 자신들에게 평화를 준다고 믿으니 참으로 기가 막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다 그의 축복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가만히 두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다 멸망의 길로 걸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과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은 그의 기쁘신 뜻을 따라 그 중에서 몇몇 사람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 사역의 구원이었으며, 동시에 타락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따라서 구원은 인간의 운명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우리는 운명과 하나님 사랑인 구원을 분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변화무쌍한 우리의 모든 삶은 운명이 아닌 것입니다. 사람들은 잘 되고 못 되는 일들을 다 운명으로 돌립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생의 파란만장한 모든 일들을 운명이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도리어 이러한 인생을 하나님의 주권적 사랑으로 가르칩니다. 요셉은 참으로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는 어릴 때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 슬하에서 형들의 시기와 질투를 받으며 자랐습니다. 그 결과 형들에 의해 애굽에 노예로 팔려갔으며, 노예 생활 중에 여주인의 모함으로 옥에 갇혔고 그곳에서 바로의 신하들의 꿈을 해몽해 줌으로써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었습니다. 요셉은 이러한 자신의 인생을 단 한 번도 운명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절대적 섭리 안에서 자신들을 축복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믿었습니다. 그 사랑의 인도하심에 감사하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며 살았습니다. 가난하든지 부하든지 그것이 그의 인생을 좌우하지는 못했습니다. 요셉은 선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믿었습니다. 모세 역시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태어난 즉시 나일 강에 버려졌습니다. 애굽 공주의 도움으로 구사일생 목숨을 건졌지만 40년 동안 애굽인으로 살아가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모세는 동족을 괴롭히는 애굽인을 죽인 일로 인해 미디안 광야로 도망을 쳤으며 40년 동안 목동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출애굽의 지도자가 되어 이스라엘 백성을 40동안 광야에서 이끌었습니다. 모세는 알 수 없는 인생의 길을 한평생 걸어온 사람입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그것을 자신의 운명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위대한 섭리 속에서 자신을 변화시키고 이끌어 주심에 감사하며 순종하며 그 어떤 고난도 애굽의 영화보다 자랑스럽게 여기며 즐거워했습니다. 오늘 날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연단하시고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바울은 가장 많은 연단을 받은 사람 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는 이 연단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롬5:3-5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그러므로 우리의 삶을 운명이라고 하면서 체념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 어떤 형편에 처하든지 오직 하나님의 사랑을 믿으며 하나님의 섭리하심과 인도하심을 따를 때 비로소 하나님의 뜻이 우리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의 죽음까지도 운명이 아닌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날이 갈수록 죽음에 대한 소식이 많이 들려옵니다. 지진과 홍수, 가뭄, 화재, 태풍 등의 천재지변은 말할 것도 없고 전쟁과 살인과 같은 인재지변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습니다. 화재를 진압하던 젊은 소방관들의 죽음은 우리를 아프게 합니다. 요즈음은 바다에서 배가 조난을 당하고 선원들이 매일 죽어갑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죽음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슬퍼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는 자들에게 있어서 죽음은 운명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생명을 거두어가시는 것은 고통이나 슬픔을 주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유익을 주려 하시는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이 사실을 깨닫고 빌립보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빌1:21-23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따라서 성도들에게 있어서 죽음은 운명이 아니라 우리를 영원한 안식으로 데려가시기 위한 하나님 사랑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를 결코 운명이나 팔자소관으로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주권으로 우리 생애를 주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채념하거나 불평하기보다는 오히려 삶의 모든 곳에서 발견되는 하나님의 주권적 사랑의 손길과 섭리에 감사합시다. 그리하여 우리의 구원도, 변화무쌍한 삶도, 그리고 죽음마저도 하나님 사랑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달아 오직 절대 주권을 지니신 하나님께 찬송과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앤드류 카네기가 어렸을 때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그는 어머니를 따라 시장에 갔습니다. 그는 어머니 옆에서 빨간 앵두가 먹고 싶어서 열심히 그것을 쳐다보았습니다. 그러자 상점 주인이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얘야 한 줌 가져가거라.‘ 그러나 앤드류는 고개를 살레살레 흔들었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습니다. ’왜 앵두를 싫어하니.‘ ’아니에요 무척 좋아해요.‘ ’그렇다면 주저하지 말고 한 줌 가져 가거라.‘ 그래도 소년은 손을 내밀지 않고 가만히 앵두를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자기 손으로 앵두를 가득히 쥐더니 앤드듀의 모자 속에 넣어주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가 물었습니다. ’앤드류, 아까 어째서 앵두를 집지 않았니.‘ 그랬더니 그 소년은 자신있는 표정으로 어머니에게 말했습니다. ’아저씨의 손이 제 손보다 크잖아요.‘ 참으로 놀라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어린아이의 손으로 몇 개의 앵두를 잡을 수 있겠습니까. 앤드류는 어른의 큰 손으로 많은 앵두를 받기를 기다린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노력으로 얻은 행복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크신 능력의 하나님이 주실 것을 바라보고 기다리면 하나님의 섭리와 사랑은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행복과 만족을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당한 생사화복을 모두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위대하시고 온전하신 절대 섭리와 주권을 믿으며 살아갈 때에 우리 인생에 놀라운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나를 예정하신 하나님은 내 인생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예비해 주십니다. ’사람은 할 수 있는 일을 하지만 하나님은 의도하신 일을 행하신다.‘고 했습니다. 비밀한 일을 계획하시고 진행하시는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형통한 복을 누리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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