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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에는 생명이란 말이 54회, 빛이 23회, 사랑이란 말이 60회 나옵니다. 요한복음은 그래서 생명과 빛과 사랑이 충만한 복음서입니다. 사도요한이 복음서를 기록한 목적은 20:31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가르쳐 줍니다. 사람들은 복받고 돈이 생기는 일에는 관심이 많지만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참 생명,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분을 귀하게 영접해야 합니다. 최고로 귀하게 영접하느냐 아니면 하챦게 영접하느냐에 따라 영생과 멸망이 나누어집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을 가장 귀하게 영접하심으로 생명과 빛과 진리와 은혜를 충만히 얻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첫째,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3). 요한복음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는 장엄한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여기서 “태초”는 시간과 공간과 물질을 초월하여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영원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많은 철학자들은 태초에 무엇이 있었는가? 만물을 생기게 한 분은 누구인가? 하는 만물의 시작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여 왔습니다. 고대 헬라 철학자들은 물이 있어서 물에서 모든 것이 생겨났다, 불이 있었고 불에서 생겨났다, 아니다, ‘그 무엇’이 있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맨처음에 무엇에 의해 시작되었는가에 대해 명쾌한 대답을 주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1:1절은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고 함으로써 이 문제에 대해 명쾌한 대답을 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이란 바로 예수님입니다.
14절에서 말씀은 곧 성육신 하신 예수님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1,2절을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여기서 ‘말씀’은 곧 하나님이요 예수님은 영원 전부터 계신 하나님입니다.
3절에서는 예수님이 바로 창조주이심을 말해줍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히브리서 1:2절에도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우주만물을 창조하셨음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요한 계시록 19:13절에 보면 예수님의 이름을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였습니다. “또 그가 피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만물이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습니다. 저자는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고 함으로써 예수님께서 세상 모든 것을 창조하셨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골 1:16).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예수님이 이 모든 생명체와 만물을 만드신 창조주시라는 것은 인간의 근본 문제를 시원스럽게 해결해 줍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창조 신앙을 거부하고 “나는 부모에게서 태어났고, 나의 조상은 원숭이다”라고 말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면 그의 생애는 우연히 일어난 사고나 장난이나 실수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의 인생은 어쩌다가 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가 되어 그럭저럭 한 세상 살다가 때가 되면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우연히 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한다면 모든 것이 무의미해지고 허무해집니다. 그 어디서도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의미와 목적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에 “나는 왜 이 모양으로 태어났는가?” 하며 운명주의에 빠지고 맙니다. 운명주의 사고는 반드시 쾌락주의가 되게 합니다. 그래서 “어차피 의미없는 한 세상, 즐기다가 가는 거야” 하며 쾌락에 자신을 내 맡기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창조주로서 절대적인 뜻과 목적을 가지고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또 그 기쁘신 뜻을 따라 인간을 창조하셨음을 믿을 때 우리의 인생은 완전히 달라지게 됩니다. 우리는 이제 내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를 알고 목적이 있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알고 산다는 것은 얼마나 영광스럽고 축복된 것입니까? 이는 오직 예수님이 창조주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믿을 때만이 가능합니다.
둘째, 예수님은 생명의 주인이 되십니다 (4-5). 4절을 보면.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다.” 이는 참으로 놀라운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생명을 시작케 하신 분이시요 생명의 주인이심을 말해 줍니다. 생명이란 참으로 신비스러운 것입니다. 긴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면 죽은 듯한 나무 가지에서 잎들과 꽃들이 파릇파릇 싹을 냅니다. 어떻게 이렇게 싹을 내는 것입니까? 이는 그 나무에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는 생각하고 계획하고 일하고 서로 사랑하고 미워하고 갈등하는 것도 우리에게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생명이 우리에게서 떠나게 되면 일순간에 모든 활동이 정지되어 일할 수도 없고 사랑할 수도 없고 시체가 되어 흙으로 돌아갑니다. 도대체 이 생명이 어디서 온 것입니까? 한 생명이 탄생했다가 왜 죽는 것이며, 또 죽으면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스피노자란 철학자는 인체가운데 생명이 어디에 붙어있는가 연구하다가 생명은 대뇌밑에 소뇌근처에 있는 같다고 알쏭달쏭한 말만 했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생명은 생명에서만 나오지 땅에서 그냥 생길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모든 생명은 한 생명의 근원에서 나왔음을 증거해 줍니다.
요한복음은 생명의 기원에 대해 분명한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1:4a) 이 말씀은 예수님이 바로 생명의 근원이 되시고 생명의 주인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헬라어에는 생명을 2가지로 구분합니다. 육의 생명(푸시케) 과 영의 생명(조에)로 구분합니다. 오늘 본문의 생명은 특별히 영의 생명을 의미합니다. 육의 생명도 예수님에 의해 시작되었지만 영의 생명도 예수님에 의해 주어집니다.
예수님은 생명이란 것이 있게 하신 분이시요 생명의 원천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생명 그 자체가 되시고 또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 안에 있는 생명은 죽음이 지배하지 않는 영의 생명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을까요? 성경은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 바로 영생을 얻는 길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3:16절은 말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요 6:40).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다”(6:47,48).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계란이라고 해서 다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유정란이 있고 무정란이 있습니다. 생명이 있는 계란이 있고 생명이 없는 계란이 있습니다. 이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21일 동안 어미 닭의 품속에 넣어보면 생명이 있는 유정란은 병아리가 되어 나오지만, 생명이 없는 무정란은 썩어서 나옵니다. 그 안에 영의 생명이 있는 자는 유정란과 같이 새로운 생명을 낳습니다. 우리가 교회다닌다고 다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없는 자는 무정란과 같이 육신의 생명은 있으나 영의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이 생명을 얻은 자들은 세상에서 가장 부요하고 행복한 자가 됩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생명을 얻은 우리는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또 인생을 낭비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고귀한 생명을 잘 관리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많은 열매를 맺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생명이 자기 것인양 착각하고 살면 안됩니다. 우리에게 있는 생명은 하나님께서 주셨고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기도 하시고 취하기도 하십니다(욥 1:21).
셋째. 예수님은 참 빛입니다.(6-13) 4b절을 보면.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은 사람들에게 빛을 줍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의 생명이 없는 자는 여전히 어두움 가운데서 살아갑니다. 어두움에 있는 자들은 생명을 얻지 못하였으므로 인생의 의미를 모릅니다. 인생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인생의 존재 의미와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인생에 참된 희망이 없습니다. 허무와 운명주의에 시달리며 살아가고, 기껏해야 세상잔재미로 살아갑니다.
어두움에 있는 자들에게는 빛이 필요합니다. 생명을 주고 희망을 주는 빛이 필요합니다. 어두움을 물리치고 길을 밝혀 주는 빛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빛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 우리가 세상의 빛 되신 예수님을 따를 때 생명의 빛을 얻게 됩니다. 그때 우리의 삶은 허무와 무기력과 절망 대신에 의미와 생명력과 희망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예수님의 생명의 빛을 받을 때 사람이 완전히 달라지게 됩니다. 소심했던 자매가 살아나 생명력이 넘치게 되고 이기적인 형제가 변화되어 남을 배려하고 베풀게 됩니다. 불면증과 헛것에 시달리던 분들이 살아나 잠도 잘자고 운명적인 자가 밝은 섭리 가운데 살게 됩니다. 식물이 물이 없어서 말라 죽어가다가 생수를 공급받을 때 살아나는 것과 같이, 살았으나 죽은 상태에 있다가 예수님의 생명의 빛에 접하게 되면 생명이 소생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생명이 살아나는 역사는 고상한 철학이나 사상이나 인간의 비상한 노력으로도 안됩니다. 이는 오직 예수님으로부터 생명의 빛을 받을 때만이 가능합니다.
젊은 나이에 벌써 성공의 길에 들어선 영국의 한 변호사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영국 의사당 앞에서 비중 높은 변호를 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일에 대해 많은 긴장과 부담감을 가진 나머지 지나친 스트레스로 인하여 그만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 이후 출세 가도를 달리던 그의 인생은 점차 망가지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서른 두 살이 되었을 때 인생이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이런 인생을 계속 살기보다 차라리 인생을 포기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강에 뛰어내릴 작정으로 마부에게 테임즈 강을 향해 가자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 청년의 표정을 수상하게 여긴 마부는 청년을 내려놓고는 그를 지켜보고 있다가 그가 강에 투신하려는 순간에 붙잡았습니다. 그리고는 이 청년을 향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앞길이 창창한 젊은이가 이렇게 하면 어떻게 합니까? 그 용기를 가지고 굳세게 사십시오.” 그 마부 때문에 그의 첫 번째 계획은 실패했습니다. 그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다시 음독자살을 시도했으나 이웃 분이 우연히 그의 집을 방문했다가 그가 아직 숨쉬고 있음을 확인하고 해독제를 먹여서 살려 냈습니다. 두 번째 자살에도 실패한 그는 ‘내가 이래서는 죽을 수 없겠구나’라고 생각하고 이번에는 면도날을 가지고 손목의 동맥을 끊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놀랍게도 면도날이 부러지는 바람에 세 번째 시도도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그는 포기하지 않고 네 번째는 꼭 성공하리라 결심하고 목을 매달았습니다. 그러나 목을 매단 순간 또 이웃집 사람이 와서 매달려 있는 그를 발견하고는 곧 끈을 풀어 병원으로 데려가 살렸습니다. 그는 병원에서 “아, 나는 죽을 수도 없는 운명이구나”라고 슬퍼했습니다. 이런 그를 불쌍히 여긴 이웃 사람들이 그에게 복음을 전해 주었습니다. 예수님의 생명의 빛이 그에게 비추이자 죽어가던 그의 생명이 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그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여 많은 찬송가를 작시했습니다. 그가 바로 윌리엄 카우퍼(William Cowper)로서 영국 문학사에 있어서 고전 문학가로 알려진 인물입니다. 그는 주님께서 자신의 죄를 담당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써 더럽고 추한 자신의 삶이 새로운 삶으로 변화되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스가랴서 13장 1절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라는 말씀을 기초로 찬송가를 지었습니다. 이것이 찬송가 258장입니다.
샘물과 같은 보혈은 임마누엘 피로다. 이 샘에 죄를 씻으면 정하게 되겠네.
저 도적 회개하고서 이 샘에 씻었네. 저 도적 같은 이 몸도 죄 씻기 원하네.
속함을 얻은 백성은 영생을 얻겠네. 샘솟듯 하는 피 권세 한없이 있도다.
날 정케 하신 피 보니 그 사랑 한없네. 살 동안 받는 사랑을 늘 찬송하겠네.
이와같이 예수님의 생명의 빛을 받을 때 사람이 근본적으로 살아나게 됩니다.
9절을 보면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예수님은 참 빛이 되십니다. 이는 예수님이 빛의 근원이시며 인생의 본질적인 어두움의 문제, 즉 죄와 죽음문제를 해결하시고 마귀를 멸하실수 있는 유일한 빛이 되십니다. 역사적으로 세상에 많은 작은 빛들이 있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촛불에 비유되고, 석가는 등불에 비유됩니다. 그러나 그들은 인생들에게 부분적으로 빛을 비추었을 뿐 죄와 죽음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빛을 찾는 구도자였지 빛 그 자체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생들을 죄와 죽음에서 구원해 주시는 참 빛이 되십니다.
이 빛되신 예수님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10,11절을 보면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예수님은 세상 모든 생명을 만드신 세상의 주인이 되십니다. 모든 사람이 예수님에 의해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빛보다 어두움 즉 죄를 더 사랑했기 때문에 알아보지 못하였고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있고, 믿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믿고 안 믿고는 자유이지만 그 결과는 영생이냐 멸망이냐 할 만큼 엄청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은 불신으로 인해 하나님의 정죄 아래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구주로 귀하게 맞아들이는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덧입게 됩니다(12).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믿으면 우리의 신분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마귀의 자식에서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로 변화됩니다. 12절에서 ‘권세’라는 단어는 ‘힘’(power)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합니다. 어떤 자신만만한 젊은 청년이 불신자인 세상 자매님과 결혼하면서 일단 결혼한 후에 그녀를 믿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자기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불신자인 아내로 인해 많은 고통을 겪다가 결국에는 아내의 영향을 받아 믿음마저 상실하고 세상적인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의 힘으로 어떤 사람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만이 사람을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할 수 있습니다.
넷째. 예수님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분입니다. (14-18)
14절을 보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하나님은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인간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내려 오셨습니다. 영원하신 분이 시공간에 얽매이시고, 창조주가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성육신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성육신 하신 예수님으로부터 두 가지를 배웁니다.
예수님은 은혜가 충만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영원하신 하나님이시요 창조주로서 영광과 존귀와 능력과 찬양을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모든 영광과 권세를 다 포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온전히 비우셨습니다. 비천한 말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각종 종류의 죄인들을 섬기시기 위해 종이 되셨고, 마침내는 우리 죄를 없이 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이렇게 하시는 은혜가 충만하신 분이십니다.
언더우드나 아펜젤러, 스크렌튼과 같은 선교사들이 미국에서의 안락한 삶을 버리고 미개한 조선에 위험을 무릅쓰고 선교사로 온 것은 큰 겸손과 희생이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성육신의 겸손과 십자가의 희생을 본받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성육신의 은혜를 덧입은 자는 생명을 살리는 하나님의 역사를 위해 기꺼이 자기 권리를 포기하고 낮아지고 희생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진리가 충만하신 분이십니다. 진리란 무엇입니까? 진리란 인생을 바르게 사는 길입니다. 진리란 무엇보다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진리 그 자체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되십니다(요 14:6).
18절을 보면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고 빛이시므로 아무도 육안으로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딤전 6:16). 그러나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요 14:9). 예수님은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 되십니다(골 1:15).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과 빛과 진리와 은혜를 주시기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다 이루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생명을 얻었습니다. 빛을 얻었습니다. 진리를 얻었습니다. 은혜를 얻었습니다. 이 예수님을 온전히 믿음으로 생명의 빛이 충만히 임하여 생명력이 넘치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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