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석은 농부
어떤 농부가 논으로 개간한 땅에 벼농사를 지었는데, 논에 댄 물에 좋은 거름을 뿌려줌으로써 몇 년만에 대 풍년을 맞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농부는 자신의 논에서 나오는 물이 다른 논으로 흘러가 그 논까지 기름지게 만드는 것이 못마땅하고 심통이 났습니다.
그래서 다음 해에는 논에 있는 물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막았습니다. 하지만 나갈 곳이 없어 고이게 된 물은 벼를 썩게 했고, 그해 결국 한 톨의 쌀도 얻지 못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당신이 없으면 내가 없습니다.”
정호승 시인이 일간 신문에 올린 ‘새벽편지’의 제목이다.
빛과 어둠이 함께 세상의 모든 색채를 만듭니다. 한 송이 꽃의 아름다운 빛깔도 저녁마다 불타는 붉은 노을빛도 수평선 너머 저 먼 바다의 푸른빛도 다 빛과 어둠이 함께 만드는 것입니다.
저는 그동안 어둠이 색채를 만든다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어둠이 빛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어둠 속에는 빛이 있습니다. 빛이 있으므로 어둠이 있고 어둠이 있기 때문에 빛이 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그것을 모르고 살아왔습니다.
밤이라는 어둠이 없으면 새벽은 절대 찾아오지 않습니다. 빛은 어둠이 없는 상태가 아니고 어둠은 빛이 없는 상태가 아닙니다.
빛과 어둠은 상호작용을 하는 사랑의 관계입니다. 당신과 나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이 없으면 내가 없습니다. 당신이 있으므로 내가 있습니다. 내가 있으므로 당신이 있는 게 아니라 당신이 있으므로 내가 있습니다.
지난 밤 창을 뒤흔들던 태풍은 순식간에 수많은 나무를 쓰러뜨렸다. 아침에 일어나 아파트 마당에 나가보니 10여 그루의 소나무가 뿌리를 드러낸 채 쓰러져 있었다. 대부분 20m가 넘는 소나무로 어떤 녀석은 허리가 두 동강난 처참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쓰러진 소나무를 바라보며 올 게 오고 만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미국 서남부 지역엔 밑동의 지름이 10cm인데 키가 90m 이상 똑바로 자라면서도 뿌리가 2, 3m밖에 되지 않는 레드우드라는 삼나무가 있다.
이 거목은 체구에 비해 뿌리가 연약하지만 낙뢰에 불타는 일은 있어도 태풍에 쓰러지는 일은 거의 없다. 뿌리가 땅 밑으로 깊게 뻗진 못하지만 옆으로 25m 이상 뻗어 한 뿌리에 여러 그루의 나무가 자라기 때문이다. 지상에서는 각자 한 그루의 나무지만 땅밑에서는 한 뿌리에 연결돼 공동체를 이루며 한 가족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저 소나무도 레드우드처럼 뿌리가 서로 연결됐다면, 나무와 나무사이를 대나무 막대로 한데 연결해 묶어놓기라도 했다면 태풍에 쓰러지진 않았을 것이다.
강진 다산초당 가는 산길엔 소나무 뿌리가 마치 혈맥처럼 길 위로 울퉁불퉁 뻗어 나온 ‘뿌리의 길’이 있다. 그들은 뿌리가 서로 뒤엉킨 채 한 몸을 이루고 있어 산길을 오르는 수많은 사람이 밟아도 아파하거나 태풍에 쓰러지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이처럼 한 그루의 나무가 생존을 유지하기 위해서 뿌리를 깊게 뻗어 내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른 나무의 뿌리와 한 몸이 되어 공동체를 이루는 것 또한 중요하다.
우리도 지상에서는 각자 한 그루의 나무로 서 있지만 그 뿌리는 사회와 국가라는 공동체를 이루며 산다. 그러나 우리가 이루는 공동체는 레드우드나 다산초당 가는 산길의 소나무처럼 서로 이해하고 공존하는 공동체라기보다 이해하기를 거부함으로써 서로 갈등과 분열을 일으키는 공동체다.
지상에서는 함께 공동체를 이루면서도 땅속에서는 나와 다른 뿌리라고 해서 거부하고 받아 들이지 않는다. 나와 삶의 방식이 다르고 이념의 뿌리가 다르다고 해서 서로 한 몸이 되길 꺼린다면 끝내는 소나무들처럼 쓰러지고 말 것이다.
나는 나로서 존재하지만 궁극적으로 나로서만 존재하지 않는다. 당신이 있음으로써 나는 비로소 존재한다.
일찍이 프랑스 작가 로맹 롤랑은 ‘이 세상에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행복이 있다면 서로를 이해하며 사랑하는 것뿐’이라고 말했다. 이는 결국 당신이 없으면 내가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것이다.
인도 출신 예수회 신부 앤서니 드 멜로가 쓴 우화 중엔 이런 이야기가 있다. 남자가 연인의 집을 찾아가 문을 두드렸다. 연인이 ‘누구냐?’고 물었다. 남자가 ‘나야, 나!’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여자는 ‘돌아가라, 이 집은 너와 나를 들여놓는 집이 아니다.’ 하고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남자는 그곳을 떠나 광야로 가서 몇 달 동안 연인의 말을 곰곰이 생각했다. 그러고는 다시 돌아와 문을 두드렸다. 연인이 다시 ‘누구냐?’고 물었다. 남자가 이번에는 ‘너야, 너!’라고 말했다. 그러자 금방 문이 열렸다. 우리는 이렇게 ‘나’이면서도 동시에 ‘너’다. 당신이 없으면 내가 없고, 내가 없으면 당신이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나’라는 존재 속에 포함된 ‘너’라는 존재를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갈등과 분열의 폭을 증폭시킨다.
하늘로 쭉 뻗은 몸매를 자랑하는 소나무만 있다면 조경의 미는 형성되지 않는다. 울타리로 심는 쥐똥나무나 회양목 같이 키 작고 볼품없는 나무와 어우러져야 조경의 미가 완성된다. 서로 다르지만 함께 어우러짐으로써 아름다움을 창조한다는 사실을, 서로 다르다는 점이 갈등의 원인이 되지만 삶의 원동력도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기 위해 어쩌면 지난 태풍이 소나무를 쓰러뜨렸는지 모른다. 태풍은 위장된 축복이라고, 당신이 없으면 내가 없다고 서로 속삭이면서….”
김영식(천호식품 대표) 씨의 또 다른 아름다운 글을 소개하고 싶다. <이웃끼리 저녁 한번 합시다>
“며칠 전 내가 사는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방(榜)을 하나 붙였다. 우리 동(棟) 주민끼리 저녁이나 한 끼 하자는 내용이다. … 사실 같은 건물에 산다는 것은 굉장한 인연이다. 불교에서는 5천 겁(劫)의 인연이 있어야 이웃에 산다고 한다. 부부의 인연이 8천 겁이라고 하니, 이웃과의 인연 또한 얼마나 대단한 건지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인연에도 서로 데면데면하다. 심지어 이웃끼리의 갈등은 사회적 문제까지 확대됐다.
국민의 88%가 이웃 간 갈등으로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하니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런 문제의 시작은 이웃과의 소통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 데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웃끼리 얼굴이라도 익히자는 뜻으로 엘리베이터에 게시물을 붙였던 것이다.
과연 몇 분이나 참석할까?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냥 이웃 몇 분과 식사에 소주나 한 잔 곁들여야겠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기대 이상이었다. 엘리베이터 게시물에는 모임을 응원하는 어린 친구들의 ‘파이팅!’ 메모부터 ‘꼭 참석하겠다.’는 메모까지 모임에 대한 반응이 꽤 좋았다. 드디어 일요일 저녁 6시, 식사 자리에는 총 78가구 중 65명이 참석했다. 서로에게 무관심한 듯 보였던 사람들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 이웃과 친해지기 위해 그렇게 적극적일 수가 없다.
치과의사 부부는 모두에게 줄 선물로 치약을 준비했는가 하면, 위·아래층 사람이 같은 테이블에 앉아 서로 건배를 하면서, 층간 소음을 적게 하려고 위·아래층 상황에 맞춰 의견을 나누기도 했다. 저녁 9시쯤 자리가 파할 때까지 한 사람도 먼저 자리를 뜨지 않았다. 그날 이후 우리 아파트에는 변화가 느껴졌다. 얼굴을 익히고 나니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면 가벼운 인사나 담소를 나누기 시작했다. 주민 스스로 만든 단 한 번의 모임에 이 정도의 변화가 생기다니…. 그러고 보면 한국 사람은 참 어쩔 수 없다. 아무리 무관심한 척해도 얼굴 보고 인사 몇 번 나누면 바로 정(情)이 들고 만다. 이렇게 서로의 사정을 아니 위층에서 아이들이 쿵쿵거린다고 흉기를 들고 올라갈 수 없을 것이며, 아래층에 공부하는 학생이 있는데 감히 쿵쾅거릴 수 있겠는가? 서로가 정을 나눌 기회가 주어지지 못한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하지만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고 가만 있을 게 아니다. 우리 스스로 기회를 만들어 보는 것은 어떨까? 삭막하다는 도시의 아파트촌에서 사람 냄새가 나는 ‘작은 행복’을 만들어 가는 좋은 이웃들이 점점 늘어나길 기대해본다.”(2013.12.6. 조선)
소공동체를 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기에 있다. 공동체의 삶이 얼마나 아름답고 복음적인 삶인가를 체험하고 증거하기 위함이다. 공동체를 사는 것만이 세상과 교회를 살리는 일이다. 전임 교황 베네딕토 16세께서 2008년도 성탄 메시지에서 말씀하셨다. “모든 사람이 자기의 이익만 추구한다면 이 세상은 붕괴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