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앗은 하느님의 말씀이며 땅은 생명의 원천
오늘 복음은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에서 보면 하느님 나라는 우리의 노력과는 상관없이 진행되고 있는 듯 한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세상의 논리로 본다면 열심히 노력하고 기도하면
하느님 나라를 차지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이 더욱 효과적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비유는 세상의 논리와는 반대되는 방향으로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계시해주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마르 4,26~27).
농사를 지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농사가 얼마나 힘든지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씨를 심은 다음에도 물과 퇴비를 주어야 하고 자라면 김을 매고 잡초도 뽑아
주어야 하는데, 그저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가 자란다고
하는 말은 농사를 지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 하는 말 같이 들립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농부의 그런 수고를 모르실 리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수고에 대해서 말하고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보다는 아무리 농부가 수고를 한다 해도 농사는
농부의 그런 수고만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농부는
씨라 자랄 수 있도록 도울 수는 있어도 그것을 자라게 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 나라의 신비입니다.
사람이 땅에 씨앗을 뿌리지만 그 씨앗이 움트고 자라며
마침내 열매를 맺는 모든 과정을 사람 스스로가 주관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열매가 익으면 사람은 그 열매를 추수함으로써 결실을 누립니다.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는 씨앗과 그것을 자라게 하는 땅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씨앗은 하느님의 말씀이며 땅은 생명의 원천입니다. 씨 뿌리는 이의 노력은
하느님의 말씀과 생명의 원천에 비하면 그 비중이 작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하느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뜻보다 우리의 의지를 앞세우거나 하느님의 뜻을 거슬러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씨앗을 땅에 심는 농부이기 때문입니다.
농부는 밭을 일구고 비옥하게 하며 씨앗을 뿌리고 물을 줍니다. 그러나 그는 씨앗을
싹트게 하고 성장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 씨앗이 자라는 과정도 알 수 없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느님께서 싹트게 하시고 성장시켜 주실 것을 믿고
기다리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전적으로 하느님의 손안에 있습니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줄기가, 다음에는 이삭이 나오고
그다음에는 이삭에 낟알이 영근다. 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곧 낫을 댄다.”
(마르 4,28~29) 오늘 이 비유 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도 예수님의 마음으로 하느님 아버지의 나라가 오기를 간절히 바라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기를 희망하면 좋겠습니다.
글 : 朱洛權 세례자요한 神父 – 광주대교구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는 것
저는 햇수로 17년째 심리 상담을 하고 있습니다.
상담자가 하는 일은 잘 듣고 좋은 질문을 던지는 데서 시작합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 같지만 잘하기는 생각보다 어렵습니다.
성급히 판단하는 태도를 내려놓고 공감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임하지 않으면
상담은 효과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상담자들은 공감을 제대로 하기 위해 이론 공부와 실습 훈련을 합니다.
처음에는 공감 능력이 타고나는 성품인 줄 알았습니다.
감수성이 풍부하고 따뜻한 사람이 공감도 잘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게 전부가 아님을 이제는 압니다.
공감은 단지 한 순간 마음의 울림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1970년대 20대였던 디자이너 패트리샤 무어(Patricia Moore)는
시야를 흐리게 하는 안경, 귀를 틀어막은 솜,
균형 잡기 힘든 구두를 착용한 채 살아보는 실험을 했습니다.
그렇게 4년간 100개가 넘는 나라를 다니며 노인의 삶을 직접 체험했다고 합니다.
‘타인의 신발을 신고 걸어보라.’는 격언을 몸소 실천한 셈입니다.
그 후 그녀는 소리 나는 주전자, 양손잡이 가위 등
누구나 불편 없이 사용할 수 있는 디자인을 고안했습니다.
공감에 대해 생각할 때 저는 예수님이 떠오릅니다. 살과 뼈를 가진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가장 낮은 곳에서 태어나 온갖 수모와 배신,
육신이 찢기는 고통을 견디시고 십자가 죽음을 받아들이신 분.
감히 저는 하느님의 깊은 뜻을 다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루카 22,42)라고
하셨던 예수님의 기도를 통해 인간의 몸으로 겪으셨을 두려움과 고통을 조금은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어쩌면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우리를 향한 사랑을 보여주신 게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매일 하느님 뜻을 어기며 멋대로 살아가고, 하지 말라는 짓을 하고, 자꾸 멀어져도
하느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하느님
말씀을 따라 사는 것,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면 상대가 그 마음을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사랑을 보여줄 수 있는, 제가 아는 좋은 방법은 공감입니다.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공감 받을 때 얼어붙었던 마음이 녹고 상처가 아물기 시작합니다.
공감이 어렵게 느껴질 땐 일단 궁금해 하는 마음부터 시작합니다. 상담할 때도
몇 번의 만남이 거듭되면서 그의 고통이 어떻게 만들어져 왔는지 이해하게 됩니다.
깊이 알게 되면 그 사람에게 애정이 생깁니다.
저는 상담이라는 귀한 일을 하게 부르신 하느님께 늘 감사드립니다.
한 사람을 알아가고, 그의 세계를 이해하게 되는 건 참 놀랍고 아름다운 일입니다.
물론 제가 아무리 노력해도 타인의 마음에 공감하는 데는 한계가 있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연결되고자 할 때, 그 마음 자체는 가닿지 않을까요.
글 : 이경애 Angela – 상담심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