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백제
목차
1. 개요
2. 역사
3. 여담
1. 개요
백제가 서울 경기 일대에 수도를 두었던 시대. 오늘날 백제 하면 충청도, 전라도부터 떠올리기 마련이라 한성백제를 낯설게 여기는 경우도 꽤 있지만, 실상은 도시국가 백제의 시작을 알린 곳이자 이후 영역국가로 변신하는, 백제 역사 통틀어서도 최전성기를 장식했던 시대였다. 한성백제 시대는 BC 18년부터 AD 475년 (492년)까지이다. 백제 제1대 왕인 온조왕(溫祚王, BC 18년 ∼ AD 28년)부터 제21대 왕인 개로왕(蓋鹵王, 455년 ~ 475년)까지의 총 493년간의 시기이다.
한성백제 시대에 재위한 왕들을 나열하면 백제 제1대 왕인 온조왕(溫祚王, BC 18년 ∼ AD 28년), 제2대 왕인 다루왕(多婁王, 28년 ∼ 77년), 제3대 왕인 기루왕(己婁王, 77년 ~ 128년), 제4대 왕인 개루왕(蓋婁王, 128년 ~ 166년), 제5대 왕인 초고왕(肖古王, 166년 ~ 214년), 제6대 왕인 구수왕(仇首王, 214년 ~ 234년), 제7대 왕인 사반왕(沙伴王, 234년, 살해된 것으로 추정됨), 제8대 왕인 고이왕(古爾王, 234년 ~ 286년), 제9대 왕인 책계왕(責稽王, 286년 ~ 298년), 제10대 왕인 분서왕(汾西王, 298년 ~ 304년, 암살되었음), 제 11대 왕인 비류왕(比流王, 304년 ~ 344년), 제12대 왕인 계왕(契王, 344년 ~ 346년, 요절), 제 13대왕인 근초고왕(近肖古王, 346년 ~ 375년), 제 14대 왕인 근구수왕(近仇首王, 375년 ~ 384년), 제15대 왕인 침류왕(枕流王, 384년 ~ 385년, 단명), 제16대 왕인 진사왕(辰斯王, 385년 ~ 392년,《일본서기》에서는 시해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음), 제17대 왕인 아신왕(阿莘王, 392년 ~ 405년, 횡사), 제 18대 왕인 전지왕(腆支王, 405년 ~ 420년), 제 19대 왕인 구이신왕(久爾辛王, 420년 ~ 427년), 제 20대 왕인 비유왕(毗有王, 427년 ~ 455년, 살해된 것으로 추정), 제 21대 왕인 개로왕(蓋鹵王, 455년 ~ 475년)이다.
문헌상 기원전 18년부터 기원후 475년까지 총 493년이라는 기간 동안 백제의 공식적인 수도였던 위례성에 백제 군주가 있던 시기이다. 다만 후술하 듯 고고학적으로는 기원후 200년대인 3세기 중반을 넘지 못해서 실제 백제 건국이 언제 이뤄졌는지는 학계에서도 이견이 있다.
이 용어를 따라 이후 웅진성, 사비성으로 천도한 후기 백제를 웅진·사비 백제라고 부르기도 한다.
2. 역사
백제가 온조왕에 의해 건국되었을 때부터 백제가 고구려 장수왕의 침입에 의해 개로왕이 전사하고 문주왕에 의해 공주 웅진성으로 천도하기 전 위례성에 도읍했던 시기 백제를 뜻하는 명칭이며, 지금의 풍납토성 안의 모 아파트 뒷쪽 부지를 위례성 시기 평시 수도, 몽촌토성 일대를 전시 수도로 추정한다.
마한의 수십 거수국 중 하나였던 백제가 목지국을 쓰러뜨리고 마한의 새 맹주가 되어가던 시기로, 근초고왕 최전성기 무렵엔 북으로는 371년 평양성까지 쳐들어가 고구려 고국원왕을 사망시키고, 남으로는 왜국에 칠지도를 선물할 정도의 위용을 보였으나, 475년 장수왕 군대에게 역으로 위례성을 함락당하고 개로왕이 사망하면서 막을 내린다.
좀 더 정확히는 개로왕 사망 이후 개로왕의 바로 아래 동생 문주왕이 지원군으로 끌고 온 백제-신라 연합군의 비호 아래, 고구려군이 한강 너머 바로 북쪽 코앞에 있는 상황에서도 어쨌든 풍납토성에서 정식 즉위식은 거행했고, 천도도 바로 쫓기듯 내려온 게 아니라 폐허가 된 위례성 궁성 자리에서 적어도 한달 정도는 위치를 심사숙고했고, 이후 오늘날 공주 지역에 천도하기로 결정하면서 궁실과 조정이 완전히 피폐해지진 않은 웅진백제를 이끌 수 있었다.
허나 한성에 비해 지역적 기반도 약했고 고구려에 대패한 왕실의 입지도 크게 줄어들었기에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웅진성으로 천도한 이후 백제 왕권은 한성 시기에 비해 크게 약해지고 만다. 기존 제도와 관행도 무너졌기에 한동안은 지역 세력가들이 군사력만으로 정치적 의사를 관철시키기 쉬운 환경이 되었다. 501년 무령왕 즉위 전까지 (문주왕, 삼근왕, 동성왕 등) 왕이 무려 3명이나 암살되거나 암살당한 듯한 기록이 나오는 만큼, 이후 백제는 정치적으로 꽤 혼란스러운 시절이 한동안 이어진다.
3. 여담
한성백제 시대가 끝나면서 사실상 백제왕국은 망한 거나 다름없다는 수사학적 견해도 있긴 하다. 현대도 그렇지만, 전근대 시대에 국가의 수도와 중심지가 소멸하여 왕국을 낙후된 지역으로 통째로 이전해야 했다는 것은 사실상 멸망에 준하는 대격변이기 때문에, 서진의 멸망으로 동진으로 쇠락한 진나라, 금나라의 침공으로 남송으로 밀려난 송나라와 비슷하게 보는 관점이 있다. 실제로 일본서기에서도 개로왕 때 한성이 함락되자 '백제가 멸망했다'라는 표현이 나온다.
그러나 이는 다분히 문학적인 견해로 하는 얘기지, 진지한 역사적인 견해로는 볼 수 없다. 백제가 경기도를 통째로 상실하긴 하였으나 충남전라 일대는 여전히 유지했고, 급격히 잃은 국력은 이후 침미다례 등 전라도 전체를 직접 지배화하고, 한성백제 시절에는 영토가 아니었던 경남 서부 일대와 충북 일부 약간을 추가해서 상당히 추슬렀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직 논란은 있으나 적어도 무령왕 당시엔 백제가 경기도 일대를 일시적으로 수복했다는 견해도 있다. 무령왕 당시 갑자기 백제 수도 사비를 중심으로 해서 엉뚱하게도 고구려식 생활 문화가 백제 전체에 파급되는 고고학적 양상이 나타나는데, 학자들은 무령왕 당시 백제가 경기도에서 고구려인 혹은 고구려화된 백제인들을 이주시켜서 이러한 현상이 나타난다고 보고 있다.
사실 대중의 일반적 관념과는 달리 백제가 가장 오랫동안 도읍한 곳은 충청도의 웅진성, 사비성이 아닌 한강 이남의 하남위례성이었다. 그러나 현재까지 고고학적 연구성과에 의거하면 한강 유역에서 가장 이른 고구려계 돌무지 무덤 유적은 상한이 기껏 3세기 중반이고 백제가 고대 국가로서 출범한 시기도 그때쯤이라고 유력하게 추정하기에[4], 고대 국가 단계에 들어선 백제의 '수도'를 기준으로 본다면 결국 3세기 중반이 상한이다.
한편 문헌사학계에 따르면 3세기 사서인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등장하는 마한 54개국 내 백제국의 존재, <삼국사기> 혹은 <속일본기>에 의거한 근구수왕 이전 13명 혹은 15명 왕, <삼국사기> 온조왕기 기록에서의 대방군의 부재, 1~2세기 고구려 관직명인 좌보, 우보가 백제 초기 기록에 등장하는 사실 등으로 비추어서 백제 건국을 고고학계의 정설인 3세기보다 앞선 1~2세기로 바라보는 시각이 있다.
따라서 이러한 고고학계와 수정론계열 문헌사학계의 백제 초기사 출발시점에 대한 괴리는 학계의 특별한 성과가 없을 시 평행선을 달릴 것으로 보인다. 다만 2세기 중후반까지 연대가 올라가는 임진강 유역에 위치한 고구려 계열 유적을 하북위례성기 백제 유적으로 비정한다면 두 사학계의 괴리는 어느 정도 메워진다. 또한 풍납토성 일대를 백제의 첫 수도로 고정한다 하더라도 사서상 건국인 왕통의 시작과 실질적인 국가로서의 출발인 고대 국가 진입 시점이 다를 수 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사실 온조왕으로 상징되는 백제 왕가의 시작이 풍납토성 축조로 대표되는 백제의 고대 국가화 시점에 선행한다 하더라도 큰 문제가 없다. 사서 상 백제가 본격적인 국가 체제를 정비하는 시기와 풍납토성이 축조되는 시기가 모두 고이왕 대로 일치하기 때문에, '건국'이 특정 시점에 고정된 사건이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난다면 문헌과 고고학적 증거를 조화롭게 수용할 수 있다.
2010년대 이후 인터넷에서 말하는 백제사는 한성백제사가 압도적이라는 낭설 또한 실제 역사와는 분명 괴리가 있다. 물론 웅진 시기(63년)나 사비 시기(122년)보다는 긴, 약 200~300여년을 자랑하는 역사인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백제를 서울로만 한정지어 보는 것 역시 백제를 충청도(+전라도)에 한정지어 바라보는 것만큼 편향된 생각이다. 특히 웅진과 사비는 현재 공주시와 부여군으로 행정구분이 나뉠 뿐 직선거리상 27km밖에 안 떨어져 있으며, 같은 금강 권역이기에 큰 틀에서는 합쳐서 보아도 무방한데 이 경우 185년까지 늘어난다. 이 정도면 한성백제에 비해서도 길이가 아주 짧은 편은 아니다. 무엇보다 한성 시기를 얼마로 잡든 간에 고이왕 이전까지 거의 도시국가 내지는 그에 준하는 미약한 세력으로 보낸 한성백제가, 단지 기간이 더 길다는 이유만으로, 어엿한 영역 국가로서 200년을 보낸 웅진/사비 백제보다 존재감이 크다고만 단언하기도 힘들다.
그러나 최초로 서울 지역을 중심지로 하는 고대 국가였기에 한성백제란 명칭은 큰 의미와 비중이 있으며, 특히 1997년 풍납토성 발굴 이후 서울 향토사에서의 한성백제의 존재가 강조되기 시작했다. 그랬기에 서울 지하철 9호선 한성백제역이 만들어졌고, 2004년부터 서울에 백제예술대학교 아트센터가 있다.
별개로,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이 백제 유적이라는 것이 밝혀지고, 풍납토성의 환호 자체는 기원전으로도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음이 밝혀짐에 따라, 서울은 역사가 2천 년이 넘는 도시임이 확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