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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울대동문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최택만(서울)
SK 그룹 창업스토리 최 종 현 회장 (위 사진)
경기 수원시 평동 4번지에는 1953년 SK그룹의 모태인 ‘선경직물’ 공장이 있었다. 이곳은 에너지와 정보통신을 핵으로 한국의 대표급 혁신 대기업 SK그룹을 낳은 ‘산실’이기도 하다. 특히 선경직물 공장은 SK그룹 창업주인 최종건 회장이 몇 안 되는 종업원과 함께 사업을 시작한 곳이다. 1962년 10월 미국 시카고대학 유학 중 부친의 갑작스런 타계로 귀국한 동생 최종헌 회장과 함께 SK그룹의 시동을 건 것이다. 1953년 3월 전쟁으로 폐허가 된 선경직물 공장이 오늘날 매출 100조 원대의 국내 굴지 그룹으로 성장헸기 때문이다. 선경직물로 출항 최종건 회장은 우리나라 재벌 기업 창업주 가운데 가장 짧은 생애를 살면서 가장 많은 업적을 이룩한 기업가이다. 최종건 회장은 경성직업학교 기계과를 졸업하고 일본인이 경영하던 선경직물 공장에 견습기사로 입사해 5년 동안 근무했다. 그러나 자기 사업을 해보겠다는 야망을 품고 1949년 귀국한다. 그는 6·25 동란 중 잿더미로 변한 선경직물 공장을 살리는 작업에 찫수한다.최 회장은 불타버린 100여 대 직기의 부속들을 수습해 재조립하고, 파괴된 공장 건물을 복구해 나갔다. 같은 해 8월 정부 귀속 재산이던 선경직물주식회사를 인수함으로써 창업의 꿈을 실현하게 됐다. 재벌 기업으로 변모 창업 초창기 헌 직기를 사다 설비를 증설하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최종건 회장은 신제품 개발에 남다른 열정을 기울였다. 직기 4대로 출범한 선경직물은 불과 5년 사이에 보유 직기 1000대를 돌파했다. 최종건 회장의 품질제일주의가 빛을 본 것은 해방 10주년 기념 전국 산업박람회에서 닭표안감이 부통령상을 수상하면서부터다. 부통령상 수상업체에 지원된 300만 환의 융자는 선경직물이 주식회사로 도약하는 귀중한 재원이 됐다. 1950년대 후반에는 국내 최초로 합성 직물인 나일론과 테토론을 생산한 데 이어 1960년대에는 크레폰·앙고라·깔깔이· 카이론’ 등 각종 직물을 개발·생산해 국민의 의류생활 개선에 기여했다. 선경이 국내 유수의 재벌 기업으로 부상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말이다. 몇년 동안 노력 끝에 최종건 회장이 아세테이트 원사와 폴리에스테르 원사 공장(SK케미칼)을 건설한 때부터다. 선경 성장사에 커다란 디딤돌을 놓게 된 아세테이트 공장 기공식이 거행된 것은 1968년 3월 25일이었다. 그리고 3개월 뒤 폴리에스테르 원사 공장이 건설되었다. 두 공장 완공 후 최종건 회장은 섬유산업의 계열화를 위해 선경유화(DMT )와 선경석유(정제)를 설립해 화학섬유의 원료산업인 석유화학 공업 진출을 도모했다. 그러나 최종건 회장은 1973년 11월 15일 평생을 꿈꿔온 섬유산업 수직계열화의 꿈을 동생인 최종현 회장에게 넘기고 48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최종건·종현 형제의 성격은 서로 닮은 데가 있으면서도 판이하게 달랐다. 형은 일을 저지르는 편인 데 반해 동생은 일을 가꾸는 편이었다. 형은 통솔력과 추진력·사교성이 월등했고, 동생은 조직력과 계획성에서 형을 앞섰다. 직물 메이커였던 선경이 원산 메이커로 도약한 것은 1968년이다. 최종건 회장과 최종현 회장이 선경인더스트리(현 SK케미칼)의 전신이자 국내 최초의 폴리에스테르 원사 메이커인 선경합직을 만들어 낸 것이다. 국내 외환 대출로 공장설비를 도입하고 공장 건설에 필요한 내자는 합작선인 일본의 ‘제인’으로부터 폴리에스테르 원사를 연불조건으로 수입해 작물을 짜고 팔아 충당했다.
최종현 시대의 개막 최종현 회장이 ‘자의반 타의반’으로 선경그룹의 경영대권을 떠맡은 것은 제1차 석유파동의 한파가 불어 닥친 1973년 12월이다. 선경 창립자이자 맏형인 최종건 회장이 급환으로 타계하면서다. 최종건 회장이 작고하자 선경그룹 총수 자리를 최종현회장이 승계한다. 국제시장이 어려운 상황 속에 최종현 회장은 1974년 전년대비 71% 증가한 8600만 달러어치의 원사를 수출했다.1975년에는 200억 원을 투입하여 울산에 일산 100t 규모의 폴리에스테르 원사공장을 건설하면서 국내 전체 화학섬유 생산능력의 34%를 점유하게 됐다. SK그룹 창업주이자 형인 담연 최종건 회장이 타계한 뒤, 최종현 회장은 최고경영자로서 고독한 길을 걸어가야 했다. 당시 최종현 회장은 신년사 형식을 빌려 ‘석유에서 섬유까지’라는 수직계열화를 공식적으로 천명한 데 따른 사내의 의혹 어린 시선은 물론, 성공 가능성에 대한 임원들의 부정적인 견해가 많았다. 하지만 손길승(당시 이사· SK텔레콤 명예회장) 회장이 훗날 말했던 것처럼 수직계열화는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최종현 회장의 최대 성공작으로 인정받고 있다. 1976년 종합무역상사인 주식회사선경을 발족시킨 손 이사는 종합상사로서 성장기반을 확보하기 위한 기업 확장에 나서 국영인 유공(현 SK에너지)을 선경이 인수하게 된다. 최종현 회장은 10여 년 동안 공을 들여 온 산유국과의 인맥을 통한 정면 돌파로 유공 인수에 성공했다. 유공을 인수하면서 자신감을 얻은 최종현 회장은 종합 에너지·종합 화학기업으로의 과감한 기업 변신을 단행했다. 선경기계주식회사·선경금속주식회사·선경머린주식회사·선경목재주식회사 등 중소기업형 계열기업 16개를 매각해 해산 정리하고, 1조5000억 원이라는 막대한 자금을 투입해 1991년 6월 9개 신규 석유 화학 공장을 준공했다. 독자적인 경영기법 추구 최 회장은 자신이 오랜 세월을 거쳐 직접 경험한 것을 시스템으로 만들어 함께 나누고자 했다. 최종현 회장은 경영활동의 대부분을 각 계열사의 '수스펙' 추진상황을 보고 받는 데 할애했다. 전경련 회장직을 세 번 연임한 최 회장은 일정이 잡혀 있는 날이나 주말을 제외하고는 각 계열사 사장이 아닌 부장과 부원이 직접 부서의 추진계획과 진행상황을 보고토록 독려했다. 장시간 의견을 교환하는 릴레이 토론으로 ‘도시락 식사’는 다반사였다고 한다. 특히 세 번째 도약은 정보통신 사업에서찾을 수 있다. 1990년대 들어오면서 정보통신분야가 미래의 핵심 산업이라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한국의 대다수 대기업들이 경쟁적으로 정보통신 사업권을 따내고자 했다. 그러나 SK는 10년 전부터 미래 성장동력의 하나로 정보통신사업 진출을 준비했다. 1992년 정부는 제2이동통신 사업자의 진출 허가와 기존 한국이동 통신의 민영화를 발표했다. SK는 그동안 준비해온 것을 바탕으로 마침내 1994년 한국이동통신의 경영에 참여하게 됐다. 당시 한국이동통신은 부호분할 다중접속(CDMA) 시스템 개발이 한창이었고, SK는 1996년 1월 세계 최초로 CDMA 상용화를 이뤄냈다. 이것이 SK의 세 번째 도약의 시작이었다. CDMA 세계 최초로 상용화 1994년 1월 중순 최종현 회장은 김창근 그룹 재무 담당 임원( SK케미칼 부회장)을 급히 찾았다. 불과 10여일 앞으로 다가온 한국이동통신(SK텔레콤) 공개 입찰과 관련해 확인할 것이 있어서였다. 1년 4개월여 전인 1992년 8월 최종현 회장은 어렵게 따낸 제2이동통신 사업권을 반납하는 대신 한국이동통신을 인수해 정보통신사업에 진출하겠다는 쪽으로 방향을 잡은 터라 그룹 차원에서는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문제는 선경이 한국이동통신을 인수한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1주당 5만여 원에 불과하던 한국이동통신 주가가 50일 이상 상한가를 기록하더니, 주당 30만 원 가까이 올랐다는 점이다. 때문에 그룹 내에서는 30만 원에 가까운 가격으로 한국이동통신을 인수하는 것은 무리라는 의견이 주를 이뤘다. 당시 시세로 따지면 2000억 원 이상 더 주고 사는 셈이었기 때문이다. 최종현 회장은 정보통신사업이 어떤 속도로 발전할지와 5년 뒤 한국이동통신을 인수한다면 얼마에 인수할 수 있을지를 따져 물었고, 김 부회장은 “정보통신사업은 빠르게 발전할 것이고 만약 5년 뒤에 한국이동통신을 인수한다면 5000억 원은 더 줘야 할 것 같다”고 답했다. 잠시 생각에 잠긴 최종현 회장은 단호한 어조로 “사업을 충분히 준비해 왔고 미래가 밝으니 자금 2000억 원을 더 주는 것은 비싸게 사는 것이 아니다. 10년 이내 1~2조 원의 이익을 낼 것이기 때문에 비싸더라도 무조건 사라”고 지시했다. 인수가격만 4271억 원에 달하는 대규모 거래였다. 최종현 회장이 한국이동통신을 시세보다 비싸게 산 데는 특혜 시비를 없애겠다는 뜻만 담겨있는 것이 아니었다. 비싸게 산만큼 반드시 정보통신사업에서 성공해야 하며, 그렇지 못할 경우 그룹이 망할 수 있다는 일종의 ‘배수의 진’을 친 것이다. 이처럼 한국이동통신이 현재의 SK텔레콤으로 고속성장한 데는 그의 또 한 번의 파격적인 결정이 한몫을 했다. 그는 손 이사를 한국이동통신 대표이사 부회장 자리에 앉히는 등 소수를 제외하고 한국이동통신 현직 임원 전원을 유임시켰다. 가능한 기존 조직을 흔들지 말고 그대로 가져가고 선경의 문화가 한국이동통신에 자연스럽게 깃들게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유언’ 1980년 유공을 인수할 당시 최종현 회장은 울산에 있는 정유공장을 방문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전국에 있는 사업장을 일일생활권으로 돌아보기 위해 헬기를 구입할 정도였다. 전국의 사업장을 방문하는 것이 큰일이었던 최 회장은 헬기를 타고 다니면서 시간을 크게 줄일 수 있어 효율적인 경영은 가능해졌지만 큰 고민이 하나 생겼다. 그것은 바로 전국 산하를 덮고 있는 묘지였다. 전통적인 유교사상의 영향으로 대부분 매장을 하는 것이 관례로 인해 전국의 산하는 묘지로 넘쳐났다. 그때부터 최 회장은 국토의 효율성 측면에서 묘지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최종현 회장은 화장만이 묘지로 인한 국토의 비효율적 이용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이라며 화장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내가 죽거든 시신은 화장하고 최고 수준의 화장시설을 만들어 사회에 기증해 장묘문화 개선에 앞장서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1998년 8월 26일 최종현 회장은 폐암이 악화되면서 영면에 들어갔다. 유언대로 아들 최태원 회장은 화장으로 장례를 치렀다. 최종현 회장의 화장 소식은 사회에 신선한 충격을 줬고 다른 재벌가에도 영향을 끼쳤다. 그의 ‘아름다운 유언’은 ‘아름다운 기부'로 완성됐다. 훌륭한 화장 시설을 만들어 기증하라는 유언에 따라 2010년 1월 12일 SK는 최신 장례문화센터를 준공하고 세종시에 기증했다. 대를 이은 약속도 값지지만 우리 장례문화에도 큰 울림이 됐다. 한 사람의 신념과 결단으로 시작된 자그마한 변화는 작게는 장례문화를 바꿨다. 최택만 대한언론인회 논설위원 |
첫댓글 훌륭한 분 입니다 존경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