漢字 는 읽고, 외고, 쓰고, 몽땅 어렵다 !? NO. !!
급진 순혈주의 어문학자들의 책동에 반세기를 속아 살았습니다.
한자공부, 현대판 쓰기노예 < PC> 가 암기하고 대신 쓰니 읽는 훈련이 우선입니다.
한자 없인 신조어 못 만들어, 그 빈자리를 구미어가 한글차림으로 덮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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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05) 惠化驛 3番 出口 難易度를 四級(千字) 超過 漢字 낱말 數 로 봅니다, (20)
惠化驛 2番 出口는 늘 설레는 마음으로 걸었던 길이다. 꽤나 좋아하는 일 中 하나인 大學路 小劇場에서의 뮤지컬이나 演劇을 보러가는 길목이어서였다. ‘地下鐵 1號線’이나 ‘라이어’ 시리즈 舞臺도 이 길을 따라 찾곤 했다. (2)
같은 惠化驛에 全혀 다른 世上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2年 半 前, 갑자기 힘든 病을 얻은 큰애가 서울大病院에 入院하면서부터였다. 病院 가는 길인 惠化驛 3番 出口는 가슴 찢는 苦痛을 안고 걷는 길이 돼 버렸다. 서로 마주 보는 두 길이 이렇게 다를 수 있나 歎息이 나오곤 했다.
가끔 했던 講演에서 젊은이들을 꽃에 比喩하곤 했는데 정말 꽃 같은 學生들이 世越號 事故로 犧牲됐다. 救助를 애타게 기다리는 父母의 모습을 TV로 보면서 남 몰래 눈물을 닦았다. 아내는 너무 울어 눈이 퉁퉁 부을 程度였다. 떠난 子息에 對한 哀切한 마음과 懇切한 그리움을 누가 알까. 子息을 잃어 본 經驗이 없는 사람은 알 수 없는 苦痛일 것이다. (5)
죽을 것 같은 그리움도 歲月 앞에는 먹빛처럼 稀微해지기 마련이지만, 아주 드물게는 그렇지 않은 것들도 있다. 半年 前 스물여덟 나이로 永永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가버린 큰애는 只今도 씩 웃으며 어디선가 불쑥 나타날 것 같아 周圍를 둘러보곤 한다. 어린이날을 生日로 둬서 이맘때는 더욱 그렇다. (2)
옆에서 많이들 그런다. 時間이 지나야 解決될 것이라고. 일에 沒頭해 잊어보라고. 고마운 慰勞의 말이긴 하지만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그럴 수 없다는 것을. 子息 代身 나를 가게 해달라고 울부짖어 보지 않은 사람, 子息 따라 나도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理解하지 못할 아픔이란 것을. (1)
떠나보낸 뒤에도 그 아픔을 每日 ‘똑같이’ 느끼는 것이 힘들었다. 아픔을 잘 견디고 있는 ‘척’을 해야 할 때는 더욱 그랬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생각의 서랍欌’을 만들려 해봤다. 그 欌의 칸을 막아 그리움, 사랑, 憤怒, 안타까움, 未安함, 애틋함과 같은 感情의 끝단이 들어갈 서랍을 따로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너무 아파 견디기 힘들 때 그 一部를 잘라 서랍에 保管해 두는 것이다. 그것이 오히려 哀切함의 더욱 切實한 表現이란 생각도 들었다. (1)
그래도 解決이 안 되는 아픔은 언젠가 서랍에 꼭꼭 넣어 두었던 感情의 모서리까지 모두 꺼내 훌훌 털어 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훗날 그리운 사람을 다시 만나는 所望이 이루어졌을 때다. 그런 解寃이 있을 때야 서로 부르는 소리가 비껴가지 않을 것이다. (1)
서랍欌을 만드는 데 힘이 된 것은 周圍의 慰勞였다. 큰애를 보낼 때 얼굴을 무너뜨리고 눈물을 흘렸던 半白의 中年은 큰애 돌잔치 때 왔던 40年 넘은 親舊였다. 어린애처럼 엉엉 울던 덩치가 山만 한 靑年은 外國에서 일부러 歸國한 큰애의 親舊였다. 老軀를 지팡이에 依支해 運柩車를 지켜보던 분은 큰애가 大學院 갈 때 推薦書를 써주셨던 여든이 넘은 옛 上司였다. (4)
이番 事故로 많이 아프다. 어른이라 未安하고 公職者라 더 罪스럽다. 2年餘 鬪病을 하다 떠난 큰애 생각만 해도 가슴이 먹먹한데, 한瞬間 事故로 子息을 보낸 父母의 心情은 어떨까 생각하니 더 아프다. 事故 收拾 過程에서 그분들의 心情을 조금이라도 더 理解하려고 努力했는지, 그분들 立場에서 더 必要한 것을 헤아려는 봤는지 反省하게 된다. (2)
돌아보고 고쳐야 할 것이 한둘이 아니다. 그래도 우리처럼 모든 國民이 함께 아파하는 나라는 그리 흔치 않다. 여기서 더 나아가 서로를 慰勞하고 보듬어 주는 治癒共同體를 만들면 좋겠다. 그리고 犧牲된 분들을 오래 기리고 記憶했으면 좋겠다. 그것이 眞情한 社會的 資本이고, 犧牲된 꽃 같은 젊은이들에게 우리가 진 빚을 갚는 길이다. (2)
惠化驛 3番 出口에는 아직도 다시 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家族 中에 누군가 아파야 한다면 엄마, 아빠나 同生이 아니라 自己인 것이 多幸’이라고 했던 큰애 때문이다.
이番 犧牲者 家族들도 견디기 어려운 事緣들을 갖고 있을 것이다. 그분들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慰勞를 드리고 싶다. 그렇게 할 어떤 方法도 없다는 것을 알기에, 아무 말 않고 그저 따뜻한 허그(hug)를 해드리고 싶다. 그분들에게 닥친 엄청난 아픔의 아주 작은 조각이나마 함께 나누고 싶다는 마음을, 그분들의 힘든 두 어깨를 감싸며 傳하고 싶다.
【 中央 】140505 [時代共感] 金東兗 國務調整室長. 企劃財政部 2次官, 豫算室長, 大統領經濟金融秘書官 歷任
(國漢混用文普及會 kukhanmoon@korea.com)
----- ② 쓰기 연습용 한글전용 페이지. ------
(3505) 혜화역 3번 출구 난이도를 4급(천자) 초과 한자 낱말 수 로 봅니다, (19)
혜화역 2번 출구는 늘 설레는 마음으로 걸었던 길이다. 꽤나 좋아하는 일 中 하나인 대학로 소극장에서의 뮤지컬이나 연극을 보러가는 길목이어서였다. ‘지하철 1호선’이나 ‘라이어’ 시리즈 무대도 이 길을 따라 찾곤 했다. (2)
같은 혜화역에 전혀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2년 반 전, 갑자기 힘든 병을 얻은 큰애가 서울대병원에 입원하면서부터였다. 병원 가는 길인 혜화역 3번 출구는 가슴 찢는 고통을 안고 걷는 길이 돼 버렸다. 서로 마주 보는 두 길이 이렇게 다를 수 있나 탄식이 나오곤 했다.
가끔 했던 강연에서 젊은이들을 꽃에 비유하곤 했는데 정말 꽃 같은 학생들이 세월호 사고로 희생됐다. 구조를 애타게 기다리는 부모의 모습을 TV로 보면서 남 몰래 눈물을 닦았다. 아내는 너무 울어 눈이 퉁퉁 부을 정도였다. 떠난 자식에 대한 애절한 마음과 간절한 그리움을 누가 알까. 자식을 잃어 본 경험이 없는 사람은 알 수 없는 고통일 것이다. (4)
죽을 것 같은 그리움도 세월 앞에는 먹빛처럼 희미해지기 마련이지만, 아주 드물게는 그렇지 않은 것들도 있다. 半年 전 스물여덟 나이로 영영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가버린 큰애는 지금도 씩 웃으며 어디선가 불쑥 나타날 것 같아 주위를 둘러보곤 한다. 어린이날을 생일로 둬서 이맘때는 더욱 그렇다. (2)
옆에서 많이들 그런다. 시간이 지나야 해결될 것이라고. 일에 몰두해 잊어보라고. 고마운 위로의 말이긴 하지만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자식 대신 나를 가게 해달라고 울부짖어 보지 않은 사람, 자식 따라 나도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이해하지 못할 아픔이란 것을. (1)
떠나보낸 뒤에도 그 아픔을 매일 ‘똑같이’ 느끼는 것이 힘들었다. 아픔을 잘 견디고 있는 ‘척’을 해야 할 때는 더욱 그랬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생각의 서랍장’을 만들려 해봤다. 그 장의 칸을 막아 그리움, 사랑, 분노, 안타까움, 미안함, 애틋함과 같은 감정의 끝단이 들어갈 서랍을 따로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너무 아파 견디기 힘들 때 그 일부를 잘라 서랍에 보관해 두는 것이다. 그것이 오히려 애절함의 더욱 절실한 표현이란 생각도 들었다. (1)
그래도 해결이 안 되는 아픔은 언젠가 서랍에 꼭꼭 넣어 두었던 감정의 모서리까지 모두 꺼내 훌훌 털어 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훗날 그리운 사람을 다시 만나는 소망이 이루어졌을 때다. 그런 해원이 있을 때야 서로 부르는 소리가 비껴가지 않을 것이다. (1)
서랍장을 만드는 데 힘이 된 것은 주위의 위로였다. 큰애를 보낼 때 얼굴을 무너뜨리고 눈물을 흘렸던 반백의 중년은 큰애 돌잔치 때 왔던 40년 넘은 친구였다. 어린애처럼 엉엉 울던 덩치가 산만 한 청년은 외국에서 일부러 귀국한 큰애의 친구였다. 노구를 지팡이에 의지해 운구차를 지켜보던 분은 큰애가 대학원 갈 때 추천서를 써주셨던 여든이 넘은 옛 상사였다. (4)
이번 사고로 많이 아프다. 어른이라 미안하고 공직자라 더 죄스럽다. 2년여 투병을 하다 떠난 큰애 생각만 해도 가슴이 먹먹한데, 한순간 사고로 자식을 보낸 부모의 심정은 어떨까 생각하니 더 아프다. 사고 수습 과정에서 그분들의 심정을 조금이라도 더 이해하려고 노력했는지, 그분들 입장에서 더 필요한 것을 헤아려는 봤는지 반성하게 된다. (2)
돌아보고 고쳐야 할 것이 한둘이 아니다. 그래도 우리처럼 모든 국민이 함께 아파하는 나라는 그리 흔치 않다. 여기서 더 나아가 서로를 위로하고 보듬어 주는 치유공동체를 만들면 좋겠다. 그리고 희생된 분들을 오래 기리고 기억했으면 좋겠다. 그것이 진정한 사회적 자본이고, 희생된 꽃 같은 젊은이들에게 우리가 진 빚을 갚는 길이다. (2)
혜화역 3번 출구에는 아직도 다시 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가족 중에 누군가 아파야 한다면 엄마, 아빠나 동생이 아니라 자기인 것이 다행’이라고 했던 큰애 때문이다.
이번 희생자 가족들도 견디기 어려운 사연들을 갖고 있을 것이다. 그분들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위로를 드리고 싶다. 그렇게 할 어떤 方法도 없다는 것을 알기에, 아무 말 않고 그저 따뜻한 허그(hug)를 해드리고 싶다. 그분들에게 닥친 엄청난 아픔의 아주 작은 조각이나마 함께 나누고 싶다는 마음을, 그분들의 힘든 두 어깨를 감싸며 전하고 싶다.
【 중앙 】 140505 [시대공감] 김동연 국무조정실장. 기획재정부 2차관과 예산실장, 대통령경제금융비서관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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