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 [1]
3주 정도 지나고 6월 말이 되자,엄마가 이제 한고비 넘기고 서서히 기력을 찾기 시작했다. 두번째 항암치료 날이 코앞인지라 참으로 다행이었다. 그리고 한국 여자 셋이 합류하기로 했다. 일종의 인력 총동원 전략이었다. 친구, 가족, 병원 사람 할 것 없이 모두가 말하기를 간병하는 사람이 자기 시간을 가져야 환자를 더 잘 돌볼수 있다고 간곡히 내게 말했다.
서로 돌아가면서 엄마를 돌보니 각자 한숨 돌릴 여유가 생겨 엄마 식단에도 더 신경 쓸수 있었다. 우리는 입맛 돌게 할 음식과 엄마가 편하게 소화시킬 수 있는 한국 음식을 생각해내는 데 매진했다. 처음에는 계씨 아주머니가 왔다. 그리고 3주 뒤에는 엄마가 LA 김이라고 부르는 아주머니가 바통을 이어받기로 했다. 그 다음엔 나미 이모가 오는 게 어떻겠느냐는 이야기가 잠깐 오갔지만 나미 이모는 은미 이모가 돌아가시기 전 2년 동안 혼자 간병을 떠맡았기에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기를 바랐다. 어떻게든 우리끼리 해결을 해서, 이모가 자기 동생의 투병과정 또다시 고스란히 겪는 일만은 피하게 하고 싶었다.
계씨 아주머니가 도착하는 순간 이제 모든 게 더 나아질 것만 같았다. 아주머니는 근엄한 간호사처럼 차분하고 질서 있는 분위기를 풍겼다. 키는 잘닥막하지만 몸매가 다부졌고 얼굴이 넙데데한 편이었다. 나이는 엄마보다 몇 살 위로, 60대 중반 정도가 아니였을까 싶다. 아주머니는 정숙한 안주인처럼 반백의 긴 머리카락을 말아올렸다. 웃을 때면 입술이 쫙 펴졌다가 입꼬리가 올라가기 직전에 그대로 멈춰서, 꼭 웃다가 마는 것처럼 보였다.
아
식탁에 앉은 엄마를 중심으로 우리 세 사람이 모였다. 계씨 아주머니는 확실한 목표와 기분 전환 거리를 가지고 왔다. 자기 나름대로 자료 조사를 한 프린트물 그리고 한국 페이스 마스크와 매니큐어와 씨앗 봉지들이었다. 엄마는 파자마를 입고 그 위에 가운을 걸친 채였다. 어리른 함부로 방치된 인형처럼 뭉텅뭉텅 빠져 있었다. "우리 다 같이 내일 아침에 이걸 심자." 아주머니가 말했다.
아주머니는 얇은 봉지 세 개를 치켜들었다. 우리가 즐겨 쌈을 싸먹던 적상추, 방울토마토 그리고 한국 고추씨였다. 어릴적 서울에 있던 어느 고깃집에 갔을 때 직감적으로 날고추를 집어 쌈장에 푹 찍어 먹어서 엄마의 탄성을 자아낸 일이 있었다. 이 채소의 쓰고 매운 맛은, 고추와 콩을 발효시켜 만든 쌈장의 향긋하고 짭짤한 맛과 완벽하게 궁합이 맞았다.
이는 날것인 무언가가, 두 번의 죽음을 겪은 제 사촌과 재회하는 것 같은 하나의 시적인 조합이었다. "한국 사람들은 옛날 옛적부터 이렇게 먹었어." 엄마는 그떼 그렇게 말했다. "아침마다 주변을 산책하는 거야." 아주머니가 말했다. "식물에 물도 주면서 자라는 것도 보고." 아주머니는 현명했고 우리를 감화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