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서러 (Sorcerer)
1977년 미국영화
감독 : 윌리암 프리드킨
원작 : 조르주 아르노
출연 : 로이 샤이더, 브루노 크레머, 프란치스코 라발
아미도우, 라몬 비에리, 피터 캐펠
칼 존
'엑소시스트' '프렌치 코넥션'으로 알려진 70년대의 명감독 윌리암 프리드킨이 1977년에 발표한 '소서러'는 프랑스의 앙리 조르주 클루조가 연출한 '공포의 보수'를 25년만에 리메이크한 영화입니다.
'공포의 보수'는 프랑스 영화사에서 손꼽힐 걸작으로 인정받고 있고 영화사상 보기 드물게 칸 영화제와 베를린 영화제를 동시 석권한 기록을 갖고 있습니다. 이후에는 두 영화제에 같은 영화를 출품하는 경우가 없어서 전무후무한 기록이지요. 영화평단에서는 일종의 불문율 같은 관례가 있는데 바로 '걸작'의 리메이크한 경우 아무리 잘 만들어도 박한 평가를 받는 것입니다. 리메이크라고 다 그런건 아니고 별로 유명하지 않은 작품이나 유럽 작품을 할리우드에서 대작으로 리메이크한 경우는 예외입니다. ('사운드 오브 뮤직' '가스등'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 '왕과 나' 등이 모두 리메이크 영화입니다.)
아무튼 그런 연유로 '소서러' 역시 박한 평가를 받았고 흥행 성적도 시원찮았습니다. 영화사를 보면 젊은 나이에 혜성처럼 등장해서 연거푸 걸작을 발표하여 승승장구 할 상황인데 갑자기 팍 꺾이고 평범한 감독이 되어 버리는 인물들이 종종 있는데 윌리암 프리드킨이 딱 그랬습니다. '프렌치 코넥션'으로 대뜸 아카데미 작품상, '엑소시스트'로 엄청한 흥행성공, 그 다음 작품이 '소서러'였는데 박한 평가에 흥행까지 별로였죠. 이후 윌리암 프리드킨은 기세가 꺾였고 80년대 이후는 아주 평범한 감독이 되었습니다.
역사에 가정은 무의미하지만 만약 '소서러'가 흥행에 성공하고 평단에서 극찬을 했다면 윌리암 프리드킨의 상황은 많이 바뀌었을 것입니다. 아무튼 그렇게 감독도 묻히고 영화도 묻혔지만 좋은 영화는 결국 빛을 보는 법, 영화를 쉽게 구해서 보는 인터넷 시대가 되면서 '소서러'를 발견한 영화팬들이 늘어났고, 한 명 한 명 이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점점 극찬을 받게 되었습니다. 시네필들이 우리나라에 유행처럼 붐을 이루던 90년대는 워낙 영화를 구해볼 수가 없어서 평론가들에게 시네필들이 끌려다녔고 그들이 골라주는 영화를 구해보기 바빴다면 인터넷 시대가 되어 다운로드와 DVD가 활성화 된 이후에는 관객들이 스스로 이것저것 골라보면서 스스로 걸작을 찾아내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소서러'역시 그렇게 발견된 영화인 셈이고, 이젠 그 진가가 어느 정도 제대로 인정을 받고 있습니다. 영화 칼럼니스트 레너드 말틴이 별 두개 반(네개 만점)을 주며 과소평가했던 이 영화는 IMDB 평점에서 '프렌치 코넥션'과 동등한 7.7 점을 받으면서 호평을 받고 있습니다.
'소서러'와 '공포의 보수'는 어떻게 비슷하고 어떻게 다를까요? 기본 스토리의 골격은 당연히 유사합니다. 폭발물인 니트로글리세린을 트럭에 싣고 4명의 운전자가 각각 트럭 2대에 나누어 타고 험지를 거쳐서 운반하는 과정을 담고 있고, 그중 1명만이 살아남아서 가까스로 운반에 성공한다는 내용. 이건 동일합니다. 이렇게 기둥뿌리가 같은 내용에서 곁가지는 상당히 다르게 만들었습니다.
흑백 -> 칼라 영화로 바뀐 것, 스탠다드 화면비율에서 1.85 : 1 비스타비전으로 바뀐것은 단지 시대의 차이지만 더 짧은 시간동안 더 많은 이야기를 압축한 것은 감독의 재량이었습니다. '공포의 보수'는 초반부는 두 주인공 이브 몽땅과 샤를르 바넬이 안면트고 친해지는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고, 이후 비교적 일찍 트럭출발을 하여 영화의 상당부분은 트럭운행에 할애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트럭이 2대 였지만 오로지 이브 몽땅과 샤를르 바넬이 함께 모는 한대의 트럭위주로 이야기를 끌고 갔고 나머지 트럭은 들러리 였지요.
반면 '소서러'는 2시간 영화를 딱 절반으로 나누어 전반부에서는 트럭에 타는 4인에 대한 각자의 소개를 하고 그들이 남미로 오게 된 사연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남미에 와서 각자 노동자로 힘겨운 생활을 하는 모습도 다루고 있습니다. 4명 또는 2명이 친분을 쌓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고 4명은 제각각 일종의 '독고다이' 같은 존재입니다. 이런 설정이다 보니 영화의 한 30분 정도는 '공포의 보수' 리메이크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고 범죄영화처럼 흐르고 있습니다. 범죄를 저지르고 남미로 일종의 도피성 이주를 한 4명의 남자들, 성당의 불법 도박장을 털었다가 실패하고 조폭조직에게 쫓기게 된 미국인 스캔론(로이 샤이더), 사업을 하다가 사기에 휘말려 거액의 빚을 지고 구속될 위기에 놓인 프랑스인 빅토르(브루노 그레머), 잔혹한 살인청부업자인 스페인계 닐로, 이스라엘에 저항하는 아랍 테러리스트 카셈 등 4명은 추격을 피해서 남미의 어느 유정 근처의 가난한 마을에 숨어들었습니다.
이후의 내용은 '공포의 보수'와 유사합니다. 영화의 나머지 절반에만 트럭을 몰고 죽음의 여정을 떠나는 내용인데 이 1시간 동안 정말 '할거 다 한' 영화입니다. 아슬아슬한 통나무 다리를 트럭이 건너며 부서질듯한 위기를 넘기는 장면, 사람도 쉽게 건너기 어려운 물위의 흔들다라를 거센 비바람이 몰아치는 가운데 건너는 장면, 거대한 나무로 막힌 길을 폭약을 이용하여 폭파시킨 뒤 길을 만든 장면 등 알차고 짜임새 있는 모험의 여정을 정말 CG 시대가 아닌 70년대의 날것 같은 촬영으로 극도의 긴박감을 주며 묘사하고 있습니다.
상당수 장면의 아이디어는 '공포의 보수'에서 당연히 발려왔지만 그럼에도 차별이 되는 독창성과 창의성을 발휘한 영화입니다. '공포의 보수'를 안 본 관객이라면 아마도 정말 굉장히 재미있고 신선한 영화를 발견한 느낌일테고 원전을 본 관객이라면 새롭게 변화된 것에 대한 재미를 쏠쏠히 느낄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2명의 배우에 전적으로 의존한 맞춘 '공포의 보수'와는 달리 4명 각자에게 캐릭터의 힘을 부여하고 다른 단역, 조연 배우들도 나름 역할을 주었기 때문에 좀 더 풍성한 캐릭터를 활용한 영화입니다.
현대의 관객이 '소서러'와 '공포의 보수'를 볼때 느껴지는 시각은 어떨까요? '공포의 보수' 뿐만 아니라 수많은 '고전명작' 들은 아직 고전영화에 익숙하지 않은 관객들에게는 상당한 괴리감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젊은 관객들이 50-60년대 한국영화 걸작을 볼때는 북한말과 같은 성우의 더빙억양을 극복해야 하고 40-60년대 고전영화들은 시대적 차이에 따른 이질감을 사실 극복해야 합니다. 요즘 밥먹듯 영화관을 들락거리는 젊은이들에게 '시민 케인'이나 '게임의 규칙' '7인의 사무라이' '제 3의 사나이'를 갖다주고 보라고 할 경우 아마 중도포기하는 경우도 많을 것입니다. 익숙해야만 걸작대접을 받는 영화들이 있는 것이죠.
그러나 '스타워즈' 이후의 70년대 후반 이후의 영화들은 생각보다 시대의 차이를 쉽게 극복하는 영화들입니다. '레이더스'나 '007 나를 사랑한 스파이' '터미네이터' 같은 영화들은 시대 불문하고 대체로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영화니까요. 그런 영화들을 보고 자란 80-90년대 세대들이 40-50년대 영화를 보면서 느낀 이질감이 컸다면, 2010년대 세대들이 80-90년대 영화를 볼때 똑같은 이질감이 든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느 시점부터 시대가 극복되기 시작한 것이죠.
이런 이유로 '공포의 보수'는 고전에 익숙해진 세대들이 봐야 어느 정도 가치를 인정할 수 있는 영화지만 '소서러'는 지금 시대에 내놓아도 상당히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두 영화는 25년의 시대차이가 있지만 그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기간돋안의 시대의 간극은 25년보다 훨씬 큽니다. 43년이 지난 지금 '소서러'는 여전히 누구에게나 매력적인 영화로 다가서기에 충분합니다.
'공포의 보수'가 없었다면 '소서러' 역시 없었을 것입니다. 윌리암 프리드킨은 과거의 걸작을 가져다 의미있게 재생산하는 역량을 충분히 잘 발휘했습니다 '소서러'를 평가절하하는 분이 있다면 아마도 전반부 1시간 동안에 벌인 장황한 캐릭터 소개와 본론과 별 연관성 없는 이야기들이 너무 잡다하다고 느낀 사람들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앞의 1시간이 있었기에 뒤의 1시간에서의 캐릭터간의 긴장감과 몰입에서 더 큰 효과가 발생했습니다. 특히 '공포의 보수'와 달라진 엔딩내용, 그 엔딩씬 하나가 확 살아난 것도 결국 앞의 에피소드에서 깔아놓은 이야기 때문이지요. 엔딩만 볼 때 '공포의 보수'는 난데없는 허망함 이라면 '소서러'는 범죄세계의 비정함이 느껴지지요. 엔딩만 볼때는 '소서러' 자체가 상당한 독창성이 있었고 바꾼 엔딩에 대해서 분명 더 플러스가 되었습니다.
걸작 고전에서 가져올 건 가져오고 버릴건 버리고 보충할 건 잘 보충한 영화입니다. 특히 니트로글리세린을 트럭에 실을때 모래로 고정시켜서 충격을 방지한 부분을 세밀히 보여주고 출발전 트럭을 정비하는 과정이 보여지는 부분은 확실히 '공포의 보수'에서 놓친 디테일을 가미하여 상황에 대한 긴장감을 더 고조시킨 것입니다. 이렇듯 러닝타임을 더 축소시켰으면서 여러가지 디테일이 잘 들어간 성공적 리메이크는 '황야의 7인' 정도가 생각나네요. 시간을 줄이면서 내용을 첨가하는 것이 결코 쉬운 것이 아닌데.
윌리암 프리드킨은 호락호락한 감독이 확실히 아닙니다. 다만 너무 잘 나갔던 초창기이후 '소서러'에서 불운을 만난 것이지요. 70년대 반짝한 감독처럼 느껴지지만 그의 70년대 수작 목록에는 '소서러'가 하나 더 있었던 것입니다. 당대에는 인정받지 못한, 단지 '리메이크작'이 되었을 뿐이지만. 시대의 변화는 그 영화를 재평가했습니다. 21세기 들어서서 비로소 '공포의 보수'의 그늘에서 벗어난 70년대 수작으로 재탄생한 것이지요.
평점 : ★★★☆ (4개 만점)
ps1 : 원래 스티브 맥퀸을 주인공으로 할 계획이었는데 스티브 맥퀸이 아내인 알리 맥그로우를 공동 주연으로 해달라고 무리한 부탁을 하는 바람에 취소되었다고 합니다. 이 영화에서 여주인공이 나올 자리가 없었던 것이 결국 문제가 된 것이죠. 물론 로이 샤이더의 연기도 좋았지만 영화에서 제 1 주인공의 '스타성'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새삼스러운게 아니니. 스티브 맥퀸도 윌리암 프리드킨도 모두 실수를 한 것이지요. 주인공 캐릭터를 보면 딱 스티브 맥퀸에 너무 잘 어울리는 인물이었기에 더 아쉬운 부분입니다. 이 영화는 전체적으로 윌리암 프리드킨이 원하는 대로 캐스팅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영화가 망한 원인이 되기도 했을 겁니다. 더구나 스티브 맥퀸이 출연했다면 마르첼로 마스트로얀니나 리노 벤추라까지 함께 할 수 있었다고 하니 더욱 아쉬운 결정이었지요. 1974년 '타워링' 이후 스티브 맥퀸에게 사실상 경력단절이 벌어졌기 때문에 더더욱 아쉽지요.
ps2 : 제작당시에 윌리암 프리드킨과 파라마운트사의 고위층과 굉장한 불화가 있었고 이런 것이 세트나 제작비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합니다. 기획-제작 단계에서 삐그덕거리는 영화는 결국 흥행실패로 연결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영화가 그런 케이스였지요.
ps3 : 로이 샤이더는 '프렌치 코넥션'에서 윌리암 프리드킨과 호흡을 맞춘 적이 있는데 오히려 이 '소서러' 촬영시에는 윌리암 프리드킨과 원만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사이에 '죠스'가 크게 성공하여 로이 샤이더의 위상이 올라갔고, 윌리암 프리드킨은 '프렌치 코넥션'때와 너무 달라진 로이 샤이더와 일하기 힘들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ps4 : 닐로(킬러 역)가 경비행기에서 양복을 쫙 빼입고 거만하게 내리는 장면은 사실 별 필요가 없는 장면일수도 있는데 아마도 앙리 조르주 클루조의 '공포의 보수'의 샤를르 바넬 등장 장면의 오마쥬 형식으로 아주 비슷하게 넣은 것 같습니다.
ps5 : 이 영화의 단점 중 하나는 너무 여러 언어가 많이 나와서 자막이 상당히 많이 입혀져 있다는 점입니다. 제3국인에게는 해당이 덜 되겠지만 본토인 미국인들이 보기에는 상당히 불편하지요. 그리고 제3국인 입장에서도 온전한 영상이 아닌 바탕에 자막이 깔리는 부분이 상당히 많으니 불편하긴 하지요. 물론 대사 자체가 그리 많은 영화는 아닙니다.
[출처] 소서러(Sorcerer, 77년) 공포의 보수의 발전적 리메이크|작성자 이규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