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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강남과 강북 초등학생의 방학 생활
by 안재오
서론 : 일반적인 강북의 초등학생들의 방학생활
필자는 최근 조선일보의 부록신문인 『PRIMAS kids - 최고의 아이를 위한 초등영어신문 프리머스키즈-』를 보다가 깜짝 놀랐다. 거기에 실려 있는 “JLS정상어학원” 목동에 다니 는 아이들이 쓴 영어 작문을 보고 놀라움을 금하지 못하였다. 아래 인용기사에 게재되어 있는 초등학교 5학년 아이들의 영작 실력이 상당한 수준이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신문의 작문들이 순전히 아이들의 실력만으로 꾸며졌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주위의 학원 선생님들이 처음부터 방향을 잡아주고 또 첨삭지도를 통하여 가공되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JLS정상어학원”에 다니는 아이들의 영어 실력은 대단한 것 같다.
그러나 필자의 감탄은 단순한 감탄으로만 끝날 수는 없었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5학년인 필자의 딸 안소린이 생각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소린이의 친구들도 떠올랐다. 이 곳 서울 광진구 군자동 아이들을 많이 아는데 목동 “JLS정상어학원” 다니는 아이들만큼 영어를 잘 하는 아이들은 보이지 않는다. 과연 이곳의 아이들이 특목고를 지향하는 학원에 다니는 애들보다 머리가 나쁜 것일까? 필자의 생각은 단연코 “아니다(No)" 이다. 단지 그들의 부모들의 능력과 열성부족으로 그만큼 시키지 못해서 영어 실력의 차이가 나는 것일 뿐이다. 딸 자랑 같지만 나의 딸 안소린은 천재이다. 특히 수학에서 그런 능력을 발휘한다. 영어를 조금만 가르쳐주면 금방 특목고 학원 다니는 아이들에게 뒤지지 않는다. 그러나 필자는 경제적인 여유도 없을 뿐 아니라 초등학교부터 영어에 너무 매달리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비단 영어 뿐만 아니라 지나친 교육, 사교육을 시키는 것은 나쁘다고 본다. 좋은 대학에 보내기 위하여 돈 많은 부모들이 그들의 아이들에게 어릴 때부터 많은 공부를 강제하는 한국적인 현상을 이해는 하지만 이를 극히 부정적으로 본다. 과도한 학습은 아이들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이는 것이다. 이점에 대한 구체적인 증명을 몇 가지의 사례를 들어 밝히는 것이 이 글의 목표이다.
본론 : 어떤 강북 아이들의 사례에서 보는 인간의 사회성 개발
애들이 영어를 잘하여 특목고에 가거나 혹은 유학을 가거나 혹은 그들을 국내의 좋은 대학에 진학시키기 위하여 학부모들은 아이들의 자유 시간을 거의 박탈한다. 프랑스에서 그곳 아이들의 생활을 지켜본 어떤 여기자가 쓴 글을 보면 한국의 아이들이 얼마나 노예적인 생활을 하는지 생생하게 볼 수 있다.
모바일 폰(mobile phone·휴대전화)을 지니고, 소위 '모바일 라이프(mobile life·이동식 생활)'를 사는, '모바일 키드(kid·아이)'야말로 전 세계 어디서도 찾아보기 힘든 한국만의 독특한 문화다.
프랑스 초등학교에서는 사전에 학교에 고지한 보호자가 데리러 와야만 학교에서 아이들을 교문 밖으로 내보낸다. 그런 안전 조치 없이 우르르 쏟아져 나온 아이들은 익숙한 몸동작으로 휴대전화를 걸어 학교가 파했음을 부모에게 알리고는, 기다리고 있던 학원 봉고차에 몸을 실었다. 그렇게 아이들은 집에(또는 직장에) 있는 엄마랑 휴대전화로 연락을 취해가며 학원 버스를 타고 다음 행선지로 향하면서, 저녁 늦게까지 학원을 옮겨 다니는 이동 생활을 하고 있었다. 짬짬이 비는 자투리 시간에 놀이터에 잠깐 머물거나, 근처 친구 집에 들르는 것이 놀이의 전부이다시피 했다.
긴 시간을 집 밖에서 보내는 아이들과 부모를 이어주는 끈이 휴대전화인 셈이다. 아이들의 안전 확인도, 시간 맞춰 학원 가도록 만드는 원격 제어도 휴대전화 하나로 이뤄지고 있었다.
휴대전화에 단지 통화 기능만 있었다면 아이들한테 부담스러운 족쇄였을 것이다. 하지만 게임이며, 온갖 오락거리를 장착한 첨단 기기인 통에 학원 봉고차 안에서나, 쉬는 시간에나 짬짬이 그걸로 시간을 때우며 이동식 생활에 젖어가는 것이다. 앞선 디지털 문화와 펄펄 끓는 사교육열이 뒤섞인 자화상이 한국의 '모바일 키드'인 셈이다.
<조선일보 2009-8-11 [동서남북] '모바일 키드'의 고달픈 하루. 강경희 경제부 차장대우>
여기서 생생하게 묘사된 “모바일 키드”의 모습이 강남이나 어디 잘사는 지역의 흔한 아이들의 생활 모습일 것이다 : “앞선 디지털 문화와 펄펄 끓는 사교육열이 뒤섞인 자화상이 한국의 '모바일 키드'인 셈이다”.
그리고 그런 모바일 키드 아이들에게 부족한 것이 친구들과 노는 시간일 것이다. 놀랍게도 모바일 키드들이 잃어버린 친구들과 노는 시간이야말로 인간의 창조성과 사회성의 발전에 필수적인 요소라는 사실이다. 모바일 키드들이 학원에서 영어 reading, writing, listening and speaking 등의 4 skills을 익히느라 놓쳐버린 기회비용이 사회성과 조직력 그리고 창의성 등 극히 중요한 자산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런 주장을 일반화할 수는, 즉 방학 때, 영어 사교육을 받지 않고 빈둥빈둥 노는 모든 아이들이 열심히 공부하는(열공하는) 아이들보다 사회성, 조직력 그리고 창의성이 높다, 없지만 영어 가져간 대신 사회적 능력에 손실이 생기는 것은 논리적인 귀결이다.
그러면 안소린과 그의 친구들의 방학 생활의 한 단면을 통해서 아이들이 자유시간을 어떻게 활용하고 그를 통해서 사회적 창조성을 얼마나 획득하는지 목격담을 말하겠다.
1) 협상의 전략 학습
소린이와 문주는 친한 친구이다. 이들은 여름 방학한지 2주일 후 자양동에 있는 이마트에 가기로 했다. 주된 목적은 그 안에 있는 서점 “반디앤루니스“ 서점에서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고 또 전과도 사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군자동에서 자양동 이마트까지는 꽤 먼 거리였다. 둘이서 멀리 가기는 무서워서 소린이와 문주는 다른 한 친구를 더 부르기로 했다. 그래서 다빈이를 끼워 데려 가기로 했는데 문제는 문주와 다빈이가 사이가 썩 좋지는 않은 관계였다. 그 반면에 소린이는 둘 다와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다빈이를 초대하는 데 약간의 문제가 있었다. 소린이가 이마트에 가기 몇 일전 먼저 다빈이에게 같이 가자고 하니 다빈이는 거절하였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문주가 다빈이에게 같이 가자고 하닌 다빈이는 뜻밖에도 선듯 동의했다. 그 점이 소린이에게는 다소 불만스러웠다. 왜 자기가 가자고 하니 거절하고 문주가 제안하니 동의했냐는 것. 소린이는 그런 다빈이의 행동에 대해서 일종의 배신감을 느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오해를 서로 대화를 통해서 해결했다. 요는 다빈이의 마음이 바뀌었고 또 다빈이 엄마까지 딸의 외출을 허락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세 소녀는 자기들끼리 재미있는 지역으로 방문을 할 수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설득 혹은 협상의 전략을 확인할 수 있다, 즉 A와 B가 같은 편이고 거기에 C를 끌어들일 경우 A가 해서 안 되나 B가 하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협상의 파트너를 바꾸는 것이 협상 전략의 중요한 토대이다. 이런 사회생활의 중요한 전략을 아이들은 스스로의 조직 활동을 통해서 배우고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아이들은 그 사건에서 이런 결론을 도출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번 후일 아이들이 그와 유사한 경우를 당하면 아마 예전 일을 기억하고 사건을 더 잘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2) 시설물 이용의 어려움 극복
처음에 그들은 “반디앤루니스“ 서점에서 만화책을 공짜로 읽어 보려고 했으나 곧 그를 포기했다. 왜냐하면 만화책들은 비닐 포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경험을 해 본 사람들 많을 것이다. 그 다음 문제는 컴퓨터 검색대에서 구하는 책을 찾고 그 위치를 파악하는 일이었다. 그들은 구하는 책의 위치를 일단 알아둔 뒤 놀고 집에 가기 전에 책을 찾고 꺼내어 구매한다는 시간표를 짰다. 그러나 거기서도 문제는 책이 꽂힌 서가의 위치를 잡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필요한 서가의 위치와 방향을 프린트에서 확인하기가 어려웠다. 즉 지도를 보고 실제 지점을 알기가 어려웠다는 것이다. 그런 어려움을 극복하고 아이들은 그들 스스로가 필요한 책들이 어디에 꽂혀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다음 그들은 원래 구매하기로 했던 물건들을 사러 이 마트의 분야별 판매코너로 갔다. 문주는 일정 플래너를 샀고 다빈이는 공책 2권 그리고 소린이는 스티커를 샀다. 그 다음 다시 서점으로 가서 독서 공간으로 가서 빈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한 사람씩 자기가 예정한 책꽂이로 가서 보고 싶은 책을 뽑아서 왔다. 한꺼번에 모두 같이 가서 각자에게 필요한 책들을 찾아오지 않은 이유는 혹시 그들이 자리를 비운 동안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책보기 위해서 선점한 공간을 빼앗길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이처럼 아이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뺐기지 않기 위해 영리하게 행동했다.
그들은 책을 공짜로 보다가 배도 고프고 목이 말랐다. 물이나 음료수를 어디서 살지를 몰라 넓은 이마트 매장을 둘러보다가 음식코너(푸드 코트)를 인지하고 그곳으로 가서 음료수 캔을 사서 다시 이를 가지고 서점 독서 공간으로 갔다. 서점에는 음식물 반입은 금지되어 있었으나 음료수는 가져 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책을 다 읽은 후 그들은 스티커 사진관으로 가서 5000원을 내고 모두 같이 스티커 사진을 찍었다. 그 사진은 모두 핸드폰 뒷면이 붙여 우정을 기념했다. 단 문제는 다른 둘은 돈이 부족하여 문주가 돈을 혼자 모두 지불하고 다음에 만나 사진 값을 내지 않은 두 사람이 자기들에게 할당된 비용을 문주에게 갚기로 했다. 돌아올 때, 배가 고팠으나 절약하기 위하여 외식을 하지 않고 걸어서 그들의 사는 지역 군자동까지 갔다. 그 후 다빈이 집에 들러 그 집에 있던 과자 쿠앤크를 먹고 매니큐어를 바르고 놀다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3) 경제학 산교육
이런 과정을 통해서 아이들은 자원의 효율적인 배분과 비용의 최소화와 편익의 극대화라는 경제학적 원리를 경험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어느 누구에게 배우거나 부모들의 인도를 받아서 된 것이 아니었다. 모두가 자신들의 흥미와 만족을 사회적으로 추구하는 과정에서 산교육이 된 것이었다. 여기서 필자가 강조하는 대목은 개인들의 흥미와 만족을 추구하는 데도 이를 집단적으로, 여럿이 모여서 하면 훨씬 효율성과 재미가 증대된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사회성이다. 인간류가 다른 동물들에 비해서 물리적, 생물적 기능이 탁월하지도 않으면서 세상을 지배하는 강자가 된 것은 이런 사회성 때문이다. 인간의 사회성을 필자는 “자율적인 협력”이라는 개념으로 정의한다. 개미나 벌들도 고도의 조직생활을 영위하고 원숭이나 바다표범들도 사회적인 질서와 규율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사회성의 특성은 자발적인 협력과 자율적인 복종이다. 다시 말해 인간은 DNA의 명령이나 본능에 따른 복종이 아니다. 그리고 사자나 원숭이 같은 힘에 의한 복종이 아니다. 인간의 사회성은 협동과 경쟁의 양면성을 지닌다. 경쟁 역시 개인대 개인의 그것보다는 주로 기업과 기업의 경쟁처럼 조직들 간의 경쟁이 개인들 간의 경쟁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결론 : 교육의 평등과 자유를 위하여
이런 자발적인 협동의 정신과 기술을 배우기 위해서는 아이들에게 무엇보다도 자유시간을 주어야 한다. “집에(또는 직장에) 있는 엄마랑 휴대전화로 연락을 취해가며 학원 버스를 타고 다음 행선지로 향하면서, 저녁 늦게까지 학원을 옮겨 다니는 이동 생활을 하는” 아이들에게 자유의 공간과 시간은 없다. 그런 아이들은 생활의 모든 면에서 휴대전화로 원격제어되고 있다. 그런 아이들이 영어 실력은 대단히 좋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로봇처럼 리모트 콘트롤되어 성장기를 보내는 아이들의 장래는 불안하다. 그리고 그렇게 자란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 형성되는 미래 사회 역시 창의성과 역동성이 결여된 죽은 사회일 것이다. 필자의 이런 비관론의 근거의 하나는 2003년 이후 점점 추락해 가는 한국의 경제지표들이다. 지난 달 이 칼럼에서 지적한 바 한국의 경제규모는 2003년을 정점으로 11위에서 작년에는 15위로 추락했다. 이런 한국 경제의 침체와 추락은 점점 더 가속화될 것으로 보인다.
이명박 대통령은 4대강 건설이나 녹색성장 등의 개념으로서 한국 경제의 지표들을 향상시킨다고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노예상태의 청소년과 불량한 교육문제를 방치하고서는 어떤 개선도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앞에서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 된 까닭이 그의 창조적인 사회성에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난 개인적인 창의성도 물론 중요하다. 이 둘은 불가분리적으로 연결이 되어있다. 여기서 필자는 고대의 그리스와 로마를 잠시 묵상해 본다. 전자는 그 예술과 학문에서 인류 역사상 불멸의 지위를 차지한다. 그러나 그리스의 영화는 길지 않았다. 거기에 비해서 로마는 학문과 예술에 있어서 그리스를 결코 따라가지 못하지만 세계적인 대 제국을 건설했다. 필자가 이 칼럼에서 말하는 창조적인 사회성은 고대 로마에 적용되는 실천적인 덕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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