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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쓸데없는 가정이고 후금과 청나라를 상대한 어떤 나라도 제대로 성공한 적이 없는 작전이었습니다.
바로 여진족 굶겨죽이기 프로젝트!!!
후금이나 청이나 기본적으로 군량 후송부대 자체가 없습니다.
군량은 모두 병사가 알아서 휴대하는 거지요.
후금의 기록이나 포로로 잡힌 이민환의 기록을 살펴보면
여진족은 군량으로 미숫가루를 먹고 잠은 노숙이 기본이었습니다.
미숫가루를 물에 풀어 조금씩 먹는데, 굶주림에 매우 익숙하다고 합니다.
병자호란 직전 청의 식량사정은 심각한 수준이었습니다.
병자호란 직전 심각한 청나라의 식량 사정 https://cafe.naver.com/booheong/163569
당시 홍 타이지가 각군에 내린 군량 휴대량은 다음과 같습니다.
1. 팔기군(여진+내번 몽고족)+한족군
-명령하달일 : 1636년 11월 19일
-휴대군량 : 15일치
-집결일 : 11월 29일 심양성 밖
-집결 병력 : 약 21580명(기병 약 7300명)
2. 외번 몽고족
-명령하달일 : 1636년 11월 11일
-휴대군량 : 20일치
-집결일 : 11월 30일 심양성 밖
-집결병력 : 약 12000명
여기에는 노비병력 등은 제외한 수치입니다.
당시 여진족이 키우던 말 또한 굶주림에 매우 강하였고
특별하게 말 먹이인 꼴을 준비하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즉 중앙정부에서 군량과 말 먹이를 전혀 준비할 이유도 없었지요.
당시 청군이 대략 15일~20일치 군량만 준비하였다면
당시 청군의 행군 루트를 살펴보면
홍 타이지의 본군은 심양에서 한양까지 28일 걸렸습니다.
청 본군 압록강 도강후 19일차 진군로 추정 https://cafe.naver.com/booheong/158867
병자호란 청 태종 진군로 연구 https://cafe.naver.com/booheong/157391
즉즉, 당시 청군은 조선에 들어갈 군량만 준비하였지
돌아올 때 필요한 군량 따위는 생각도 안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즉 현지조달이 필수적이었습니다.
반면에 조선 조정은 청군의 진군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였고
당연히 청야전술은 시행하지도 못했습니다.
부랴부랴 남한산성으로 들어가긴 했는데 중요한 군량은 바로
연려실기술 인조조 고사본말 中
광주 목사 한명욱(韓明勗)이 산성에 군량을 운반해 들여보내는 것이 민폐가 된다고 하여,
갑사창(甲士倉)을 강가에 짓고 군량을 모두 이 창고에 두었는데, 이에 이르러 모두 적에게 점거당하였다.
청군에 갖다 바친 꼴이 되었습니다.
결국 청군은 배부르게 밥을 먹게 되었네요.
조선왕조실록 1636년 12월 27일 기사 中
이기남으로 하여금 소 두 마리, 돼지 세 마리, 술 열 병을 가지고 가게 하였다.
노장(虜將)이 받지 않으며 말하기를,
“황천(皇天)이 우리에게 동방을 주셨으니, 팔도의 주육(酒肉) 등 모든 물건은 우리가 마음대로 할 수 있다.
국왕이 현재 석혈(石穴)에 처해 있고 내외가 통하지 않아서, 종신(從臣) 이하가 모두 굶주릴 것인데,
이것을 어디에서 얻었는지 모르겠다. 너는 가지고 가서 굶주린 신민에게 나누어 주라.”
결론을 다 알고 하는 이야기이지만
최전방 의주에서 청군의 움직임을 미리 파악하여 보고하였으니
작계대로 백성들은 산성으로 도망가고 식량은 모조리 제거하는 청야전술을 펼치고
인조가 강화도로 가서 수비를 튼튼히하고,
근왕병이 모여 적절히 대치만 하면서 한 달 정도만 버텼다면
청군은 식량이 바닥나고 돌아가지도 못하고 버티지도 못하는
극한 헬조선 체험을 했을 것이라 단언합니다만, 현실은 항상 힘쎈편!!!
만약 홍 타이지의 본군이 굶주림에 몰려 퇴각을 개시하고, 이를 조선군이 뒤쫓고
이미 한번 요동 빈집털이를 준비하다 쫄려서 도주한 명나라 군이
홍 타이지 퇴각 소식을 듣고 요동을 쳤다면.....
병자호란 당시 요동으로 진군한 명군 7만(조선아 버텨줘!) https://cafe.naver.com/booheong/158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