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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영남시찰 원문보기 글쓴이: 경천애인
동양철학사
中國思想
중국의 역사를 통하여 지속적으로 전개된 사상의 전체. 이것이 특히 문제시되는 것은 그 발상(發祥)이
고대 그리스나 인도와 같이, 극히 오랜 옛날부터 독자성을 가진 전통을 형성하고, 한국을 비롯한 동양
제국(諸國)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으며, 현대에 이르기까지 그 특수한 성격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는 중국철학이라는 명칭으로 연구대상이 되나 그 실태는 전통사상에 치중하고 있어, 현대 중국
연구는 별도로 행해지기도 한다.
【사상의 성격】 일반적으로 중국사상은 현실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다. 형이상학적 사고(思考)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형이상(形而上)의 세계를 현실의 실재세계에서 뚜렷하게 분별하는 관념철학으로서의
사고는 부족하다. 예컨대 유교사상과 노장(老莊)의 도가사상(道家思想)은 전통사상으로서 오랫동안 주
류를 이루어 왔으며 유교에서 말하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의 가르침에서 알 수 있듯이, 도덕과 정치
를 중심으로 하여 어디까지나 현실과 밀착된 형태에서 사고하였다. 노장에서는 현실의 근저에 있는 도
(道) 사상이나 정치사회 밖으로 나가는 은일(隱逸) 사상 등을 보면 마치 초월적인 사고가 행해지는 것
처럼 생각되지만, 실은 역시 개인생활의 평안이라는 현실적인 관심이 중심을 이루었다. 인도에서 전해
온 불교도 그 진여(眞如)의 세계가 본래의 순수한 형태로서보다는 ‘입처즉진(立處卽眞:현실세계가 그
대로 진실세계)’이라는 형태로 이해되었다는 것도 그러한 사실을 입증한다. 이 현실주의적 경향은 실
은 일반적인 감각중시의 입장에서 온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 손에 닿는 것이 그렇지 않은 것보다 확
실하고 진실하다고 생각하는 입장이다. 추상적 사고는 진실성이 없는 것이라고 거부되었다. 이 감각중
시의 입장은 과학적·유물론적인 사상과 연결되는 것처럼 생각되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못하였다. 개체
(個體)의 객관적 관찰보다는 다양한 현상의 형식적 종합을 추구하는 경향이 한편으로 강하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강한 감각중시의 경향은 현상의 다양과 답답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비약을 갈구했을
지도 모른다. 음양(陰陽)·오행(五行:木·火·土·金·水)에 의한 우주론과 그 밖의 정리는 그 좋은 예
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형식 또는 원칙의 존중이라는 경향이 생겨난다. 유교에서의 예(禮)의 존중
이 바로 그것이다. 잡다한 현상을 잡다한 그대로 방치해둘 수 없다면 그 잡다한 현상에 관한 통일의 원
리를 추구함직도 하지만, 그런 방향으로 나가기보다는 형식적 원리에 의한 질서를 추구하였다. 따라서
그 질서원리와 현실은 완전히 일치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한 일이나, 그것은 그것대로 허용된다. 원칙은
원칙으로서 중요하지만, 현실과 거리가 있다는 것은 어쩔 수 없다는 관용의 입장이다. 이 입장은 이른
바 ‘중용(中庸)’의 사상, 현실에서의 조화(調和) 존중의 사상과 연결된다. 중국사상의 현실주의적 경
향을 주축으로 한 성격규정은 이상과 같으며 이러한 사상에서는 신과 악마, 유물론과 관념론이라는 절
대적 대립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절대자(絶對者)와 개체, 사람과 자연의 관계
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원래 인생론적이고 조화의 철학이며, 예술적인 사상이었다. 또한 중국사상에
서는 ‘천(天) 사상’도 중요하다. 천은 자연 그 자체라고 생각되었고 권위 있는 명령자·통솔자로 생
각되었으며, 또한 우주와 인생을 관찰하는 이상적인 질서원리로 생각되었고, 운명을 좌우하는 근원자
(根源者)로 생각되었다. 그러한 존재로서의 천과 사람의 깊은 관련 속에서 생각하는 것이 중국사상의
주류를 차지하는 정통적 경향이다. 이에 대하여, 천을 자연 그 자체로 보고 인생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
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이단적(異端的) 사상이다. 이단사상은 각 시대를 통하여 그 나름대로 강
세를 보였지만 정통사상의 광범한 보급에는 결국 미치지 못하였다. 인생론적인 중국사상은 인간의 현실
생활의 문제를 가장 중요시하면서도 인간존재의 유한성(有限性)을 스스로 깨닫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역사적 변천】 중국 사상사의 시대구분은 4기(期)로 나눌 수 있다. 제1기는 주초(周初)에서 한초(漢
初)까지(BC 21∼BC 2세기)로 황허문명[黃河文明]의 정신문화가 순조로운 발달을 이루어 공자(孔子)를
비롯한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사상이 만개(滿開)했던 시대이다. 제2기는 한왕조(漢王朝)의 체제가 확립
되어 당말(唐末) 5대까지(BC 2∼AD 10세기)로 왕조체제와 결부된 유교의 권위가 확립되고 마침내 고정
화되면서 불교와 도교(道敎)가 대두하게 된다. 제3기는 송초(宋初)에서 청말(淸末)까지(10∼19세기)로
유교가 새로운 해석으로 다시 생명을 찾은 시대이다. 송학(宋學) 즉 주자학(朱子學)과 명학(明學) 즉
양명학(陽明學)을 정점(頂點)으로 하는 시대이다. 제4기는 청말 아편전쟁 이후로, 서양세계의 충격에
의해 전통사상이 근본적 변혁을 강요당하게 된다.
〈제1기(고대)〉 중국사상이 그 후의 전통과 같은 관계를 가진 것으로서 처음으로 분명해진 것은 주왕
조(周王朝) 초기부터이다. 그 이전의 은대(殷代)의 사상은 그 종교적인 상황을 다소 엿볼 수는 있지만,
아직 분명치 않다. 다만 조상신(祖上神)이나 잡다한 자연신(自然神)을 중심으로 하여 제(帝)라고 하는
최고의 인격신(人格神)이 있어, 그것이 주초(周初)의 천의 사상에 영향을 끼쳤을 뿐이다. 은나라 대신
들어선 주나라 사람들은 그 왕조 교대라는 사실을 단순한 무력(武力)의 제압이라 생각하지 않고, 천명
(天命)에 의한 것으로, 그 근원은 백성을 평안케 하는 왕자(王者)의 덕(德)에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
경우 천은 그래도 종교적·초월적 의미를 가지고 있으나, 덕이라는 인간 문제에 치중하여 생각하는 점
에 이미 중국사상의 두드러진 특색이 나타난다. 이러한 경향은 일반적 종교의례를 인간적·합리적으로
해석하는 경향과 상응하는 것으로 마침내 춘추(春秋) 말기의 공자의 유교가 탄생하였다. 공자도 또한
천을 존중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공자의 내면의 윤리적인 문제로서 공자 자신의 한계상황에서 말한 것
이어서 주초에서처럼 특별히 강조된 것이 아니었다. 공자의 최대 관심은 인간세계의 새로운 질서 수립
에 있었다. 춘추시대까지의 사회는 혈연적 일족(一族)으로 지켜진 세습적 영주(領主)가 중심이 되었으
나, 말기에서 전국시대(戰國時代)에 걸쳐 해체되기 시작하여, 경지(耕地)와 농민을 확보한 새로운 지주
세력이 옛 영주를 뒤엎는, 이른바 하극상(下剋上)의 시대가 되었다. 이 세력은 일반 민중의 대두를 촉
진하고, 따라서 활발한 사상의 개화(開花)를 위한 토양이 형성되었다. 공자는 우선 이 혼란한 사회를
혈연의 연대의식에서 배운 새로운 도덕질서에 의해 안정시키려고 하였다. 인(仁)의 사상이 바로 그것이
다. 그러나 공자에 이어 나타난 묵자(墨子)는 겸애교리(兼愛交利) 즉 나의 몸을 사랑하듯이 남을 사랑
하고 서로 이익을 도모한다는 사상을 내세워, 유교의 인이 가족애(家族愛)에 입각한 차별애(差別愛)임
을 극복하려고 하였다. 공자 사상의 주관적 측면을 발전시킨 맹자(孟子)는 묵가(墨家)와 대항하기 위해
인과 함께 의(義)의 덕을 강조하여 사랑의 차이 등을 설명하고, 인간 본성을 선(善)한 것[性善說]이라
하여 윤리의 내면적 주체성을 강조하였으며, 또한 왕도정치론(王道政治論)을 펴 유교의 정비를 이루었
다. 같은 무렵 이러한 현실적 입장에서, 인간만을 관찰하는 입장을 비판하면서 현상의 안쪽을 주시(注
視)하고 또한 자연 속에 있는 인간을 보려는, 노자(老子)와 장자(莊子)의 도가사상(道家思想)이 나타났
다. 세속을 초월한 입장에서 현실을 고쳐봄으로써 정신의 평안과 사태의 처리를 도모하려는 것으로, 그
중심은 도의 자연성과 통일성의 강조였다. 유가(儒家)의 순자(荀子)는 이에 반발함으로써 같은 유가의
맹자와 대립되는 입장에 섰다. 여기서는 선이란 인간의 작위(作爲)이다. 내면의 자연성을 좇는 것이 아
니라 성인(聖人)이 제정한 외적·객관적인 예제(禮制)를 좇아야 한다 하고, 인간본성은 악(惡)이라 하
였다[性惡說]. 그러면서도 인간의 지능을 속박하는 천은 부정하였다. 이 객관적인 사회규범으로서의 예
(禮)의 강조는 앞으로 올 통일제국(統一帝國)의 이론으로서 준비되었으며, 같은 시대의 한비(韓非)의
법가사상(法家思想)은 보다 직접적으로 그 목적과 합치하였다. 그것은 엄격한 상벌(賞罰)에 의해 객관
적·형식적인 법의 통계를 유지하려는 것으로, 강한 인간불신(人間不信)을 바탕으로 한 지배의 철학이
었다. 순자의 예사상과 한비의 법사상으로 통일제국의 이론적 준비는 끝났다.
〈제2기(중세)〉 한제국(漢帝國)의 지배이론은 동중서(董仲舒)의 유교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그것은 신
비적인 음양사상과 결부된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사상이었다. 인간계의 사건과 자연계의 변이(變異) 사
이에는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어 천의(天意)가 거기에 나타난다고 함으로써 천명(天命)을 받은 왕권을
수식하였다. 유교는 여기에 신비적인 색채를 가하여 한왕조의 국교(國敎)가 되었다. 그러나 이데올로기
화(化)한 사상은 부질없이 신비적·미신적 경향을 조장하였다. 후한(後漢)의 왕충(王充)은 이에 대한
비판으로서 의사적(意思的)인 천의 존재를 부정하고, 이를 기(氣)의 운행에 의한 물리적 자연이라 생각
하여 미신타파에 노력하였으나 그 비판적 합리주의는 개인의 운명을 인정하는 점에서 커다란 한계를 가
지고 있었고, 그 영향도 미미하였다. 그러나 후한의 정치권력이 붕괴되자 도덕주의에 대한 반발로서 노
장사상이 번성하게 된다. 3∼4세기의 위(魏)·진(晉) 시대에는 유교적인 예교(禮敎)에 얽매인 신사를
이[]에 비유하거나 사관(仕官)을 떳떳치 못한 것으로 생각하는 풍조가 높아, 유교의 성격도 한대(漢代)
와는 다른 자유롭고 절충적인 것이 되었다. 노장의 도사상은 마침내 불교의 이해를 도와 특히 반야(般
若)의 공사상(空思想)에 관한 깊은 철리(哲理)를 깨닫게 되어 현실적인 중국사상도 이 인도사상과의 교
류로 더욱 폭을 넓히고 심화되었다. 그러나 인도의 사변적(思辨的)·피안적(彼岸的) 불교는 끝내 주류
가 되지 못하고, 수(隋)·당(唐)에 와서 성립된 천태(天台)·화엄(華嚴)·선(禪), 그 밖에 중국불교의
제파(諸派)는 모두가 피안보다 현실을, 번잡한 것보다 간이직절(簡易直截)한 것을, 사변보다 실천을 중
시하는 중국적인 것이 되었다. 또한 불교의 형성과정을 모방하여 노자를 조사(祖師)로 하는 도교가 민
간의 미신을 포섭하여 성립되었으나, 종교사상으로서는 저속한 것이었다. 유교는 정치적으로 이용되면
서 사상적으로는 번성하지 못하였으나 당말(唐末)에 와서 한유(韓愈)가 이러한 풍조에 반대하여 유교의
복고적(復古的) 혁신운동을 주장함으로써 앞으로 다가올 송학(宋學)의 선구(先驅)가 되었다.
〈제3기(근세)〉 송대(宋代)에는 정치의 중심적 담당자가 세습적인 귀족이 아니라 개인의 능력으로 과
거에 급제한 신흥(新興) 인재들이었다. 사상계가 활발해진 것은 이런 사실과 관계가 있다. 당나라 한유
도 이러한 신흥 인재였다. 여기서는 불교의 철리에 대항하여 유교의 입장에서 새로운 인생철학을 확립
하는 것이 주안점이 되고, 그것은 송학 또는 이학(理學)이라 불리었다. 그것은 11세기, 북송(北宋)의
주염계(周濂溪), 정명도(程明道)·정이천(程伊川) 형제, 그리고 장횡거(張橫渠) 등의 사상가에 의해 이
(理)의 철학, 기(氣)의 철학 또는 화엄(華嚴)의 철학을 응용한 근본의 이와 현상을 일치시킨 철학 등으
로써, 형이상학적인 사상에 입각한 인생철학, 특히 심성(心性)의 이론이 발전하여, 그것들이 마침내 주
자(朱子)에 의해 대성되었다. 이것이 이른바 주자학(朱子學)으로, 우주 존재의 근본은 태극(太極)으로
서의 이(理)라는 설이다. 그러나 존재가 현상(現象)하기 위해서는 기(氣)의 참여가 필요하다. 이렇게
하여 세계는 이와 기에 의해 성립되었는데, 인간에 있어 이는 본연의 성(性)으로서 선(善) 그 자체이지
만, 기는 그 물질성에 의해 정욕(情欲)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그래서 사람으로서의 수양은 이 인욕
(人欲)을 누르고 천리(天理)를 발휘하는 일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내적 심성을 가다듬어 내성(內省)하
는 동시에 내외를 관철하는 이를 파악하기 위하여 외계의 사물 하나하나에 관한 이를 탐구할 필요가 있
다고 하였다. 이 방법을 거경궁리(居敬窮理)라고 한다. 이와 같은 주자학의 흐름 외에 북송의 구양 수
(歐陽修)의 실증주의나 왕안석(王安石), 남송(南宋)의 영가학파(永嘉學派) 등에서 볼 수 있는 실리적
공리주의 사상 등도 있었으나, 송대는 대체로 보아 존재의 근원과 심성의 본질을 생각하는 내성적·사
변적 사상이 지배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주자학에 대항하는 사상으로 육상산(陸象山)의 심학(心學)이
있다. 그 사상은 마침내 명대(明代) 중기의 왕양명에게서 완성되었다. 주자에게서는 이가 외계의 사물
에도 객관적으로 널리 존재하는 것이었으나, 왕양명에게서는 심(心)이 바로 이(理)로서 심 외에는 이가
존재하지 않는다. 심을 인지(認知)함으로써 이가 생겨난다. 뿐만 아니라 그 지(知)는 행(行), 즉 체험
을 통해서만 확실해진다. 즉 지행합일(知行合一)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주자학의 형식화에 따른
사회나 정치의 질서 원리로서만 밖으로부터 강요되는 이의 성격을 바꾸어 자유로운 인간의 주체성을 회
복하려고 하는 움직임이었다. ‘양지(良知)를 이루다’ 즉 본래적인 심정을 충분히 발휘하는 일, 그러
기 위해 ‘사상(事上)에서 마련(磨練)한다’고 하는 수양론(修養論)에 의해 양명학은 완성되었다. 명말
(明末)이 되면서 이 주관적 경향은 한층 심해져 이탁오(李卓吾)처럼 인욕(人欲)을 긍정하고 거짓 없고
솔직한 동심(童心)을 존중하여 기성질서에 반역하는 사상도 생겨났다. 그러나 한편 양명학의 실천적 면
을 이어받아 17세기 명말 청초(明末淸初)에는 일종의 실학적 경향이 활발하였다. 황종희(黃宗羲)나 고
염무(顧炎武)가 그 대표적 인물이다. 그러나 이 경향은 청조(淸朝)의 한인(漢人) 압박으로 세력을 잃고
훈고고증(訓考證)의 학술로 바뀌어 사상계에서는 크게 세력을 떨치지 못하였다.
〈제4기(근대)〉 중국은 아편전쟁(1841∼42)으로 심한 충격을 받았다. 사상계에서 그것을 가장 민감하
게 받아들인 것은 공양학파(公羊學派) 사람들이었다.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의 이론을 재생시킴으
로써 어려운 시국에 대처하는 개혁사상을 실시하게 되었으며, 그것은 이른바 변격이론(變格理論)으로서
청·일전쟁(淸日戰爭:1894∼95) 후의 캉유웨이[康有爲]로 이어진다. 그러나 서양의 침입은 한편 중국의
전통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서양문물을 이용함으로써 복리를 얻으려고 하는 ‘중체서용론(中體西用論)’
을 일으켰는데, 또 한편으로는 민족주의 사상을 고양하여 멸만흥한(滅滿興漢)의, 혁명사상을 촉진시켰
다. 이렇게 하여 오랜 왕조체제에서 민국(民國)으로 전환하는 신해혁명(辛亥革命:1911∼12)을 맞이하게
되며, 그 지도자 쑨원[孫文]은 최초의 서양적 사상가이다. 그의 민족·민권·민생의 삼민주의(三民主
義)는 확실히 데모크라시의 이론을 주축으로 한다. 이러한 데모크라시와 사이언스의 입장에서 전통적인
중국사상은 봉건적 사상이라 하여 이제 통렬한 비판대상이 되었다. 5·4운동(1919)의 문화혁명 시기는
그 정점이라 할 수 있다. 근대의 마오쩌둥[毛澤東] 이 후의 상황은 얼핏 보기에 전통적인 것과 완전히
동떨어진 것처럼 생각되지만, 위에서 말한 역사를 돌이켜 보고 그 사상의 성격을 생각해 보면 전통적
사상은 지금도 강하게 존속하며, 또한 미래에도 존속할 것이다.
中國史槪觀
三皇五帝
중국 고대의 전설적 제왕. 3황은 일반적으로 천황(天皇)·지황(地皇)·인황(人皇 또는 泰皇)을 가리키
지만, 문헌에 따라서는 복희(伏犧)·신농(神農)·황제(黃帝)를 들기도 한다. 또는 수인(燧人)·축융(祝
融)·여와(女) 등을 꼽는 경우도 있다. 사마 천(司馬遷)은 3황의 전설을 믿을 수 없는 것으로 생각했는
지, 《사기(史記)》의 기술을 오제본기(五帝本紀)에서부터 시작한다. 사마 천이 5제로 든 것은 황제헌
원(黃帝軒轅)·전욱고양(頊高陽)·제곡고신(帝高辛)·제요방훈(帝堯放勳:陶唐氏)·제순중화(帝舜重華:
有虞氏) 등이며, 별도로 복희·신농 또는 소호(少昊) 등을 드는 경우도 있어 일정하지 않다. 원래 이
전설은 다양한 신화·전설이 혼입된 것이며, 도덕적·정치적으로 억지로 끌어들인 것이어서 그 기원은
애매하다. 오행설이 일반화된 전국시대 말 이후 이야기 경향을 띠게 되었다.
夏
중국 전설상의 가장 오래 된 왕조. 하와 그에 이어지는 은(殷)·주(周)를 합하여 3대라고 병칭하며, 옛
중국에서는 이상적 성대(聖代)로 불려왔으나, 명확한 유적·유물이 남아 있는 것은 은나라 이후이다.
《사기(史記)》 <하본기(夏本記)>에 의하면, 하왕조(夏王朝)의 시조 우(禹)는 황허강[黃河]의 홍수를
다스리는 데 헌신적으로 노력하여 그 공으로 순(舜)이 죽은 뒤, 제후의 추대를 받아 천자가 되었다고
한다. 우는 제위를 민간의 현자에게 양여하려고 하였으나, 제후는 우의 아들 계(啓)를 추대하였으므로
이때부터 선양제(禪讓制)가 없어지고 상속제(相續制)에 의한 최초의 왕조가 출현하였다고 한다. 17대의
이규(履癸), 즉 걸(桀)에 이르러 정치가 포악을 극하였으므로 민심을 잃어서 은나라 탕왕(湯王)에게 멸
망하였다. 주나라 때에는 허난성[河南省] 동부에 있는 기(杞)나라가 하의 후예라고 칭하였으나, 만일
하왕조가 실재해 있었다면 그 위치는 오히려 산시성[山西省] 남서부를 중심으로 한 황토대지(黃土臺地)
에 있었을 가능성이 많다. 또, 고대 중국에서는 오랑캐에 대하여 중국의 제후를 중화(中華)·화하(華
夏)라고 총칭하였다. 한편, 유목민족인 흉노(匈奴)를 하의 후예라고 하는 설 따위도 《사기》에는 나타
나지만, 근거 없는 말이다.
殷
중국 고대의 왕조(?~BC 1100?). 수도의 이름을 따라 상(商)이라고도 한다. 하(夏)·은·주(周) 3대의
왕조가 잇달아 중국 본토를 지배하였다고 하나, 하왕조는 고전(古典)에만 기록되어 있을 뿐, 전설적인
존재에 불과하다. 이에 대하여 은왕조는 20세기에 들어서 그 수도에 해당하는 은허(殷墟)의 발굴이 진
행됨에 따라서, 적어도 그 후기에는 당시의 문화세계였던 화북(華北)에 군림하였던 실재의 왕조였음이
판명되었다. 따라서 은나라는 중국 최고(最古)의 역사적 왕조라고 할 수가 있다.
【성립과 계보】 전설에 따르면 하왕조는 중국 전토를 휩쓸었던 대홍수를 잘 다스렸고, 전국을 9개 주
(州)로 나누어 지방 통치 조직을 완성한 우(禹)의 자손을 왕으로 섬겼다. 그로부터 17대째가 되는 걸왕
(桀王)은 전제정치로 인하여 중국 백성의 지지를 잃었다. 은왕조의 개조(開祖)인 탕왕(湯王:天乙)은 백
성의 요망에 따라 걸왕을 쳐서 멸하고 은왕조를 창설하였다고 한다. 이 탕왕으로부터 29대의 왕이 잇달
아 중국을 통치하였다. 이 왕조의 계도(系圖)는 한대(漢代)에 사마 천(司馬遷)이 고대의 계보에 따라
《사기(史記)》<은보기(殷本紀)> 속에 기술하고 있다. 19세기 말에 허난성[河南省] 안양현[安陽縣] 샤
오툰촌[小屯村]의 은허, 즉 은나라 수도의 유적으로 알려진 장소에서 갑골문자를 새겨 놓은 귀갑(龜甲)
과 우골(牛骨)이 다량 발견되었다. 최근 학자들의 연구에 따라 갑골문자는 은왕조의 점술사가 은나라
선조의 제사를 점쳤던 것이었으며, 여기에 나타나는 여러 왕의 이름과 그 세계(世系)는 《사기》에 전
하는 은왕조의 계보와 대체로 일치한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문화】 은왕조는 개조인 탕왕 이래로 여러 차례 도읍을 옮겼으나 20대의 왕 반경(盤庚)이 은허로 옮
긴 이후 31대의 주왕(紂王:帝辛)이 주나라 무왕에게 멸망당할 때까지 은허에 정주하였다. 최근 고고학
적 발굴이 진전됨에 따라 각지에서 은대의 유적이 발견되었는데 고고학자는 전기·중기·후기로 구분한
다. 전기의 유적 중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허난성 얼리터우[二里頭]의 유적이다. 이 유적은 이보
다 앞선 허난성 신석기시대 룽산문화[龍山文化]의 영향을 받아, 은대의 최전기(最前期) 문화를 대표하
고 있다. 이 유적들은 허난성 중부에서 산시성[陝西省]에 이르는 황허강[黃河] 연변의 황토지대에 분포
되어 있다. 중기의 유적 분포지역은 이보다 확대되어 있으며 그 대표는 허난성 정저우[鄭州]의 유적이
다. 후기에 이르면 서쪽은 산시성 치산현[岐山縣]에서 동쪽은 산둥성[山東省]의 지난[濟南], 북쪽은 허
베이성[河北省]·산시성[山西省]에서 화이허강[淮河] 유역에 걸치는 화북평원의 거의 전부와 양쯔강[揚
子江] 중류에까지 확대되었다. 요컨대 은허시대의 은문화는 이 광대한 지역에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은왕조는 약 1,700 m의 토벽으로 둘러싸인 정저우를 중심으로 하여 대도시국가를 형성하고 있었다. 성
문 밖에서는 청동기·도기(陶器)·골기(骨器)를 만드는 장인의 공장과 주거가 발굴되었다. 반경이 은허
로 천도한 이후, 귀갑과 우골에 새겨진 점복문(占卜文), 즉 갑골문자의 기사(記事)와 궁전·묘능의 유
적과 유물에 의하여 여러 가지 사실이 밝혀졌다. 은의 여러 왕은 타이항산맥[太行山脈]에서 동방으로
흘러가는 위안허강[洹河]의 굴곡진 지점에, 하안(河岸)의 단애(斷崖)를 북·동쪽으로 업고, 서쪽으로는
도랑을 파서 북서의 유목민에 대비하는 견고한 성을 쌓았다. 샤오툰촌 북쪽의 대지 중앙에는 토단(土
壇)을 쌓아 올려, 위에 종묘(宗廟)·궁전을 건축하였다. 제왕이 죽으면 그 시체는 위안허강의 북안 허
우자좡[侯家莊]의 지하 13 m에 200 m2 이상의 큰 널방[墓室]을 만들고, 생전에 애용했던 거대하고 정교
한 청동기를 비롯하여, 옥기(玉器)·석기 등을 껴묻거리[副葬品]로 함께 매장하였다. 호화로운 청동기
는 고대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최고의 예술품이지만, 그보다도 이 널방의 안팎으로 산재해
있는 다수의 인골군(人骨群)이 고고학자를 놀라게 하였다. 이들은 소수의 시종(侍從)·시녀는 있지만
대부분은 병사(兵士)로서, 왕에게 순사(殉死)한 것이며, 그 수는 한 왕묘에 500명에서 1,000명에 달하
였다. 은의 왕은 점복(占卜)으로 신의(神意)를 받아서 백성을 통치하는 종교적인 원수(元首)였다. 또한
이민족을 정복하여, 그들을 노예나 병사로 삼았던 것 같다. 이민족 가운데 북서의 고방(苦方)·토방(土
方)이라 불렸던 유목민이, 은허로 옮긴 당초의 무정왕시대(武丁王時代)의 강적이었다. 그리고 서경(西
境)의 산시성에 있던 주(周)민족은 제후(諸侯)로서 은왕조에 복속되어 있었다.
【멸망】 은왕조도 말기의 무을(武乙)·주왕의 시대에 이르자, 신의 은총을 받은 나머지 방자해져서 자
신이 신과 똑같은 절대자라고 믿고 혹독한 전제군주로서 제후·백관·인민들에 대하여 잔혹한 압정을
가하였다. 또한 동남아시아와의 무역을 활발히 하기 위하여, 화이허강 유역의 인방(人方)이라고 하는
동이민족(東夷民族)의 국가를 정복하였다. 주왕이 전쟁에 국력을 다 써버린 틈을 타서 서방의 산시성에
서 실력을 길러, 이 지방 제후의 인망을 얻고 있던 주나라의 문왕(文王)이 동진하여 화북평원으로 내려
왔다. 문왕의 뒤를 이은 무왕(武王)은 더욱 동진하여 은나라 주왕의 대군을 목야(牧野)의 싸움에서 무
찌르고 은의 수도에 입성하여, 주왕을 죽이고 은왕조에 대신하여 주왕조를 일으켰다. 무왕은 은의 왕족
인 무경(武庚)을 위(衛)에 봉하여 뒤를 잇도록 하였으나, 무왕이 죽은 뒤 반란을 일으켜 성왕에게 멸망
당하였다. 중국 최고(最古)의 역사적 왕조인 은왕조는 주술(呪術)이 문화의 기조를 이루었으며, 그 결
과로 죽은 왕에게 1,000명의 군인을 희생시키는 등 불합리한 체제를 유지하였기 때문에, 은의 문화를
받으면서 보다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주민족에게 패하였다.
周
중국의 고대 왕조(BC 1122?∼BC 256). 은(殷)나라 다음의 왕조이며, 이전의 하(夏)·은과 더불어 삼대
(三代)라 한다. 요(堯)·순(舜)의 시대를 이어 받은 이상(理想)의 치세(治世)라 일컬어진다.
【건국】 주왕조(周王朝)의 시조는 후직(后稷:棄)이며, 13대째의 고공단부(古公亶父:太王) 때에, 기산
(岐山:陝西省 中部)에 옮겨 정주(定住)하고, 국호를 주(周)라 하였다. 당시 황허강[黃河]의 하류지역에
는 은왕조(殷王朝)가 번영하고 있었는데, 주족(周族)은 그 서쪽 변두리의 제후(諸侯)의 하나였다. 태왕
의 손자 문왕(文王:昌)에 이르러 태공망(太公望:呂尙) 등의 보좌로 서방의 패자(覇者:西伯)가 되었다.
그 아들 무왕(武王:發)은 제후의 지지를 받아, 당시 민심을 잃고 있던 은의 주왕(紂王)을 멸할 싸움을
일으켰다. 이 출병(出兵)을 하지 말도록 간(諫)한 백이(伯夷)·숙제(叔齊)의 이야기는 유명하다. 그러
나 무왕은 마침내 목야(牧野)전투에서 은의 대군을 무찔러 주왕을 죽이고, 은왕조에 갈음하여 주왕조를
창시하였다.
【문화】 주는 종주(宗周:陝西省 渭水 유역의 鎬京)를 도읍으로 하였으나, 동방을 통치하는 중심으로서
낙수(洛水)를 따라서 동도(東都) 성주(成周)를 건설하였다. 그리고 희성(姬姓)의 동족을 노(魯)·위
(衛)·진(晉) 등의 요지에 후(侯)로 봉하고, 건국의 공신 태공망 여상도 제(齊)에 봉하였다. 이것을 봉
건(封建)이라 부르고, 흔히 무왕의 동생 주공(周公:旦)이 처음으로 실시한 제도라 하나,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이 ‘봉건’과 유사한 제도는 이미 은대 말기에 행하여진 것 같다. ‘봉건’뿐만 아니라 주공이
창시했다고 하는 주의 예제(禮制)는 후세에 원망을 산 것이 많으나, 주의 청동기문화(靑銅器文化)나 상
형문자(象形文字)는 은에서 발달한 것을 이어받은 것이 명백하다. 대체로 주의 문화는 은의 문화에 힘
입은 바가 많다. 은을 멸한 후, 주의 지배자는 그 정치적 변동 등을 하늘의 뜻에 의하는 것으로 보았
다. 즉, 일찍이 은에 내린 천명(天命)은 주왕(紂王)이 민심을 잃었기 때문에 은에서 떠나고, 새로이 주
(周)에 내려진 것이라 했다. 이렇게 천명을 고친, 즉 혁명(革命)한 주왕조가 영속되기 위해서는 덕(德)
을 닦고 쌓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였다.
【동주시대】 무왕부터 소왕(昭王)·목왕(穆王)에 이르는 동안이 주왕조의 전성기였으나, 마침내 BC 9
세기부터 안에서는 제후의 이반(離反), 밖에서는 융적(戎狄)의 침입이 잦아져서 주는 내리막길로 들어
서게 되었다. 11대 선왕(宣王:靜)은 융적을 격퇴하여 한때 세력을 회복하였으나, 그의 아들 유왕(幽王)
은 포사(褒)를 총애하여 내정이 문란해져서 견융(犬戎)의 침입을 초래하여 유왕은 살해되었다. 그의 아
들 평왕(平王:宜臼)은 마침내 도읍을 성주(成周:河南省 洛陽 부근)에 옮기고 주왕조를 부흥시켰다. 이
평왕의 동천(東遷:BC 770) 이전을 서주(西周)라 하며, 그 이후를 동주(東周)라 불러 구별한다. 동주시
대에 들어서서 약 반세기가 지나 춘추시대(春秋時代)가 시작된다(BC 722). 춘추시대에는 제후 등의 이
반으로 국내의 정정(政情)이 불안정하였고, 열국 간에 전쟁과 회맹(會盟)이 끊이지 않았으며, 제(齊)의
환공(桓公), 진(晉)의 문공(文公)과 같은 패자(覇者:覇는 伯과 같은 뜻이며, 大諸侯를 의미한다)가 회
맹을 주재(主宰)하여, 중원(中原)의 질서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패자는 명목상으로는 주왕실의 권위를
존중하고, 주의 봉건질서를 적극적으로 허물어뜨리고자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BC 5세기에 들어서자,
여러 나라의 내부에서 하극상(下克上)의 풍조가 일어나, 그 기세에 눌려 주의 위열왕(威烈王)은 진의
유력한 귀족 한(韓)·위(魏)·조(趙)의 3씨를 정식으로 제후로 격상하는 것을 인정했다(BC 403). 이 해
를 전국시대(戰國時代)가 시작되는 해로 보는 설이 있는 것은 주왕 자신이 ‘봉건’의 정신을 망각한
점을 중대시하기 때문이다. 전국시대의 주왕은 낙양 부근을 영유하는 한낱 작은 제후에 지나지 않았고,
그것도 마침내 동서(東西)로 분열된 나머지 BC 256년, 난왕(王)이 진(秦)에 항복하여 주는 멸망하였다.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
BC 8세기에서 BC 3세기에 이르는 중국 고대의 변혁시대. 춘추시대의 시초는 BC 770년, 주(周)왕조가 뤄
양[洛陽]으로 천도한 후로, 노(魯)나라의 연대기 《춘추》의 최초의 해(BC 722)라고 한다. 전국시대의
시초는 진(晉)의 유력 귀족인 한(韓)·위(魏)·조(趙) 3씨가 실권을 잡은 해(BC 453), 또는 이 3씨가
정식 제후(諸侯)로 승격한 해(BC 403)이며, BC 221년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의 통일로 끝이 난다.
【정치】 춘추에서 전국에 걸친 전국시대는 서주시대(西周時代)의 봉건제도(封建制度)가 해체되고, 진
(秦)·한(漢) 황제 아래에서의 중앙집권 체제가 형성되어가는 과도적 시대이다. 춘추시대는 서주 이래
의 제후국이 100여 개나 존속하고 있어서 전통적 기풍이 강하였으나, 전국시대에 들어와서는 강국이 약
국을 병합하여 진(秦)·초(楚)·연(燕)·제(齊)·한(韓)·위(魏)·조(趙)의 이른바 전국칠웅(戰國七雄)
이 성립하였다. 각국의 군주는 스스로 왕을 자칭하고 광대한 영역을 통치할 관료기구를 정비하였으나,
그 중에서도 서방의 진은 적극적인 정치개혁에 의하여 부국강병에 힘써 마침내 천하통일에 성공하였다.
【사회경제】 이 시대의 정치적 변동은 농업생산력의 향상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춘추시대 말에는 철
제농구가 사용되기 시작하였고, 전국시대에는 우경(牛耕)이 시작되었으며, 치수관개(治水灌漑) 공사도
각국에서 시행되어 경지면적이 증대하였다. 이렇게 새로 개척된 농지에서의 수확이나 산의 나무, 해변
의 소금·물고기 등 산물에 대한 과세로써 전국시대의 각국 군주는 권력을 강화하여 나갔다. 한편, 소
금이나 철(鐵)의 생산 판매업자도 거리(巨利)를 취했으며, 교환경제의 발달과 더불어 쟁기 모양을 본뜬
포전(布錢), 소도(小刀)의 형을 이룬 도전(刀錢) 등 청동제 화폐가 유통되었다. 이러한 경제적 발전은
사회조직에도 변화를 가져와, 이제까지의 씨족 결합이 무너지고 5인 평균가족이 독립할 수 있는 경제생
활을 영위하게 되었다. 그들 중에는 몰락하여 노예가 되는 자도 나왔으나 한편으로는 광대한 토지를 취
득하고 유력한 호족(豪族)을 중심으로 동족이 결집하는 호족도 나타났다. 가문의 배경이 없더라도 본인
자신의 재능·자각으로 활약할 수 있는 시대이기도 하였다. 몰락한 귀족의 자손을 비롯하여 상공업자나
농민들도 입신출세하기 위하여 군주나 유력 인사에게 접근하여 법률·군사·외교 등 각자 재질에 따라
그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자가 속출하였다. 군주나 유력관료측에서도 부국강병을 위하여 널리 인재
를 구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타국에서 온 망명자도 등용하였다.
【사상】 ‘제자백가(諸子百家)’ 또는 ‘백가쟁명(百家爭鳴)’이라는 말처럼, 이 시대는 중국 사상사
상(思想史上) 드물게도 그 활동이 활발했던 시대였다. 정치적·사회적 변동을 배경으로 하여, 어떻게
하면 질서를 회복할 수 있는가를 각자가 자기의 소신에 따라 적극적으로 발언하였기 때문이다. 공자·
맹자·순자 등의 유가(儒家)는 효제(孝悌)·인의(仁義)·예(禮)를 바탕으로 정치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
였고, 묵자를 비조로 하는 묵가(墨家)는 가족이나 국가의 경제를 초월한 겸애(兼愛)의 정신을 역설하였
으며, 상앙(商)·한비(韓非)와 같은 법가(法家)는 법의 일원적 지배, 군주권력의 절대화에 의하여 부국
강병의 실현을 정치의 목표로 삼았다. 그러한 정치에 기대를 거는 제학파에 대하여, 문화생활을 부정하
고 개농주의(皆農主義)를 주장하는 농가나, 인위적 정치도덕의 폐기를 주창하는 노자·장자 등의 도가
(道家)도 있었다. 그러나 이같이 활발하던 사상활동도 진·한 제국의 성립을 전후하여 정통사상의 기준
이 나타남과 함께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합종연횡(合從連衡)
중국 전국시대의 최강국인 진(秦)과 연(燕)·제(齊)·초(楚)·한(韓)·위(魏)·조(趙)의 6국 사이의 외
교 전술. BC 4세기 말 여러 나라를 유세하고 있던 소진(蘇秦)은 우선 연에게, 이어서 다른 5국에게
‘진 밑에서 쇠꼬리가 되기보다는 차라리 닭의 머리가 되자’고 설득하여, 6국을 종적(縱的)으로 연합
시켜 서쪽의 강대한 진나라와 대결할 공수동맹을 맺도록 하였다. 이것을 합종(合從:從은 縱)이라 한다.
뒤에 위나라 장의(張儀)는 합종은 일시적 허식에 지나지 않으며 진을 섬겨야 한다고, 6국을 돌며 연합
할 것을 설득하여 진이 6국과 개별로 횡적 동맹을 맺는 데 성공하였다. 이것을 연횡(連衡:衡은 橫)이라
고 한다. 그러나 진은 합종을 타파한 뒤 6국을 차례로 멸망시켜 중국을 통일하였다.
秦
중국 주(周)나라 때 제후국의 하나로 중국 최초로 통일을 완성한 국가(BC 221∼BC 207).
【건국】 BC 10세기 목축으로 이름이 나 있던 대구(大丘)의 비자(非子)는, 주나라 효왕(孝王)으로부터
진읍(秦邑:甘肅省 淸水縣)에 봉해져 서융(西戎)의 방위를 맡음으로써 진을 일으켰다. 그 후 진은 BC 8
세기 초, 주나라가 견융(犬戎)의 공격을 받을 때 유왕(幽王)을 도왔고, BC 771년 평왕(平王)이 동쪽 낙
읍(洛邑)으로 천도하였을 때에는 이를 호위한 공으로 산시성[陝西省]의 서부 지역을 맡아 제후(諸侯)로
승격하였다. 이가 양공(襄公)이다. 진나라는 BC 7세기의 무공(武公) 때부터 정복지를 현(縣)으로 만들
기 시작했는데, 현이라고 해도 그것은 명목일 뿐 실상은 읍과 다름이 없었다. 진나라는 간쑤성[甘肅省]
동부에서 웨이수이강[渭水] 연안을 따라 이동하다가 무공의 동생인 덕공(德公) 때에 옹성(雍城:陝西省
鳳翔縣)으로 이동하였다.
【춘추시대의 진】 BC 659년에 이르러 목공(穆公)은 백리해(百里奚)·건숙(蹇叔) 등을 등용해 정치를
혁신하고, 동쪽의 진(晉)나라와 싸워 하서(河西)의 땅을 빼앗았으며, 또한 서융 출신의 유여(由余)를
등용, 서방 이민족의 12국을 통합하고 영토를 1,000리에 이르도록 확장하여 서방의 패자(覇者)가 되자,
주나라 황실에서는 동고(銅鼓)를 하사해 경축하였다 한다. 그 후 하서 땅은 다시 진(晉)나라에 빼앗기
는 등 진(秦)나라의 당면한 적은 진(晉)나라 였으므로 초(楚)나라와 손을 잡고 빈번히 진(晉)나라와 싸
웠다. 진나라는 무공(武公)에서 목공(穆公) 때에 걸쳐 산시성 내의 작은 나라들을 병합하여 관중(關中)
의 땅을 통일하였다.
【전국시대의 진】 헌공(獻公) 때에는 순사(殉死)의 습속을 금지하고 BC 383년에는 동녘에 역양성(陽
城:陝西省 臨潼縣 북동)을 구축하여 동방으로의 진출 의지를 보여주었다. BC 362년 효공(孝公)이 왕위
에 오르자 위(衛)나라 사람 상앙(商)을 등용해 내정을 개혁하였다. 즉 종래의 혈연 존중의 인사를 고쳐
서 공적에 따른 신분제도를 설정하고, 군사조직과 토지제도를 혁신하여 조세(租稅)를 공평하게 했으며,
병농(兵農)을 일치시켰다. 이때부터 종래의 읍(邑)과는 그 성격이 다른 새로운 현(縣)이 생겼고, 군주
권이 현내의 서민과 직결되었다. 이같이 하여 국력이 증강된 진나라는 위(魏)나라를 공략해 하서(河西)
의 땅을 빼앗았기 때문에 위나라는 수도 안읍(安邑:山西省 解縣)에 불안을 느껴 대량(大梁:河南省 開封
縣)으로 천도하였다. 진나라는 효공 때 수도를 셴양[咸陽]으로 옮겨 셴양은 진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수
도로 남았다. 위나라의 대량 천도와 진나라의 국력 증강은 열국(列國)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열국
은 연합전선을 펴 진나라를 관중(關中)의 땅에 봉쇄해 두려는 소진(蘇秦)의 이른바 ‘합종책(合縱策)’
을 안출하였다. 이를 알게 된 진나라의 혜문왕(惠文王)은 공손 연(公孫衍)으로 하여금 ‘합종책’을 분
쇄하도록 명하고, 장의(張儀)로 하여금 각국이 진나라와 단독강화를 맺게 하는 이른바 ‘연횡(連衡)’
을 성립하게 하였다. 이와 같은 책동이 진행되고 있는 사이에 진은 파(巴)·촉(蜀), 즉 쓰촨성[四川省]
을 장악하고, 초(楚)나라로부터는 한수이강[漢水]의 상류를 빼앗았다. 이로써 진나라는 어느 때든지 초
나라를 공격할 수 있는 위치를 확보하였다. 혜문왕은 BC 325년부터 공(公) 대신 왕호를 사용하였는데,
이로부터 다른 나라들도 모두 왕호를 쓰게 되었다. 소양왕(昭襄王) 때에 이르러 청두[成都] 부근에 운
하를 열고 쓰촨의 옥야(沃野)를 개발하는 한편, 진나라 장수 백기(白起)는 BC 278년에 대병력을 이끌고
초나라를 공격하여 수도 영()을 함락하고, 초왕 역대의 능역(陵域)이던 이릉(夷陵)을 불태워버렸다. 초
나라는 허난[河南]의 진(陳:河南省 淮陽縣)으로 옮겨야 하였고, 뒤에 다시 수춘(壽春:安徽省 壽縣)으로
옮겼다. 진나라 군대는 양쯔강[揚子江]을 건너 다시 구이저우성[貴州省]의 동부와 후난성[湖南省]의 서
부도 공격하였다. 백기 장군은 북방의 조(趙)나라도 공격하여, 장평(長平)의 싸움에서는 항복한 조나라
의 군사 40만을 구덩이에 생매장하고 수도 한단(邯鄲)에 육박하였으나, 초(楚)나라와 위(魏)나라의 원
군이 투입되어 포위망을 풀고 철수하였다. 이즈음 진나라는 서제(西帝), 제(齊)나라는 동제(東帝)라고
높여서 ‘황제’ 칭호를 쓰기도 하였으나 얼마 후 다시 왕호를 썼다. 소양왕이 위나라 사람 범수(范)를
등용한 뒤부터는 그의 건의에 따라 ‘연횡책’을 버리고 ‘원교근공(遠交近攻)’ 정책으로 전환하였다.
이로부터 진나라는 마지막 마무리 작전에 들어갔다. 이와 같은 진나라의 형세를 살핀 주왕(周王) 난()
은 열국을 ‘합종’하여 진나라를 칠 계획을 세웠고, 이를 안 진나라는 주나라부터 공격을 시작하자 난
왕은 영읍(領邑) 30과 인구 3만을 바치고 항복함으로써 주나라는 멸망하였고, 7년 후에는 동주군(東周
君)도 멸망하였다.
【진의 통일】 BC 247년에 즉위한 진나라 왕 정(政)은 어렸기 때문에 모태후(母太后)가 섭정했는데, 장
성해서 친정(親政)을 시작하자 재상 여불위(呂不韋) 등을 제거하고 이사(李斯)와 같은 인재를 등용하였
다. 그는 법가(法家)의 학자로서 이후부터 진나라 정치는 그의 의견에 따라 시행된다. 대외적으로는 여
전히 ‘원교근공’ 정책을 써서, 진나라의 왕전(王) 등 장수들은 여러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어 BC 230
년에는 먼저 한(韓)나라를 멸망시키고, 조(趙)·연(燕)·초(楚)·위(魏)·제(齊)의 순으로 6국을 통일
하였다. 한나라가 멸망하고부터 제나라가 멸망하기까지는 불과 10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진왕 정은 황
제가 되고, 이로부터 진나라는 황제가 죽은 뒤에 그 이름을 정하는 시호를 사용하지 않게 되어 그는 시
황제(始皇帝)가 되고, 그 후의 황제는 이름 없이 2세·3세로 부르게 되었다. 중국 역사상 최초의 통일
국가가 된 진나라는 군현제(郡縣制)를 실시하여 전국을 36개 군으로 하고 각종 통제정치를 단행, 획일
적인 문화를 창조하였다. 이른바 중앙집권적 전제군주제가 완성된 것이다. 시황제는 다시 북쪽의 흉노
를 쫓아내어 만리장성을 구축하고 남쪽은 광둥성[廣東省]·광시성[廣西省]에서 베트남 북부까지 정복하
였다. 진나라의 위명은 해외에까지 뻗쳐, 중국의 다른 이름을 ‘支那(지나)·震旦(진단)’ 등으로 부르
게 되었는데, 이는 진(秦)이라는 음이 와전한 것이다. 그러나 시황제의 대외전쟁은 결국 국민의 부담이
되는 것이어서 만년에는 민심이 동요하자 극단적인 탄압정책이 시작되었다. 시황제가 죽은 뒤에는 2세
황제가 위에 올랐는데 환관인 조고(趙高)와 이사(李斯)의 불화로 조고가 이사를 죽이고 궁중의 권력을
장악했으며, 2세 황제도 살해하였다. 유군(幼君) 자영(子)이 진왕이 되어 조고를 처단했으나, 자영은
BC 207년 한중(漢中)에 들어온 유방(劉邦)에게 항복함으로써 시황제의 중국 통일 후 불과 3세, 15년 만
에 진나라는 멸망하였다.
漢
진(秦)에 이어지는 중국의 통일왕조(BC 202∼AD 220). 왕망(王莽)이 세운 신(新:8~22)나라에 의하여 잠
시의 중단이 있어, 그 이전에 장안(長安)을 수도로 하였던 한을 전한(前漢:西漢), 뤄양[洛陽]에 재건된
한을 후한(後漢:東漢)이라고 한다.
【역사의 개설】 한왕조의 창시자는 진말(秦末)의 반란 지도자의 한 사람인 유방(劉邦:高祖)이다. BC
206년 진이 타도되자 반란의 통일적 지도자 항우(項羽)는 그를 한왕(漢王)으로 봉하였으나, BC 202년에
항우를 타도하여 황제의 자리에 올라 장안을 수도로 하고 중국을 통일하였다. 한왕조는 기본적으로는
진(秦)나라의 국가체제를 계승하여 전국통치의 조직은 군현제를 기본으로 하였다. 그러나 한왕조의 수
립은 진말의 난 이래의 여러 집단의 지도자와 유방 직속 부하들의 협력에 의한 것이어서, 유방은 이들
공신(功臣)과 그의 일족을 제후왕·열후(列侯)로서 각지에 봉건하였다. 한(漢)의 군현과 봉건 병치제도
를 군국제(郡國制)라고 부르는데, 유방의 치세 중에 공신인 왕들은 모두 멸망하고, 왕은 결국 유씨 일
족(劉氏一族) 출신자에 한하는 것이 한왕조의 정제(定制)가 되었다. 한나라의 봉국(封國)은 춘추시대
이전의 제후의 씨족적 결합을 기초로 한 읍(邑)과는 성질이 다르지만, 제후왕은 중앙관제와 유사한 관
제를 가지며, 한대(漢代) 초기에는 자립적 경향이 있었다. 유방이 죽은 뒤 황후 여씨(呂氏)와 그 일족
에 의한 궁정정치의 일시적 혼란이 있었으나, 문제(文帝)·경제(景帝)의 시기에 한왕조의 지배체제가
안정을 되찾게 되자 제후왕의 봉토삭감 정책이 취하여져, BC 154년에 일어난 오초 7국(吳楚七國)의 난
후에 경제는 제후왕의 세력을 삭감하였으며, 무제(武帝) 때 제후왕은 봉국에 대한 통치의 실권을 완전
히 잃어 군국제는 내용면에서는 군현제와 똑같은 것이 되어, 한왕조의 중앙집권적 전제통치의 체제가
완성되었다. 한편, 무제 시대에 한제국은 대외적으로 크게 영토를 확대하였다. 북방의 흉노에 대하여
초기에는 유화정책을 취했으나, 여러 차례 원정을 실시하여 그 세력을 고비사막 이북으로 물리쳤다. 동
방으로는 한반도에까지 진출하여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하고, 또 남방으로도 출병하여 한나라의 영토는
안남에까지 미치어, 일남군(日南郡) 등의 9개군을 설치하였다. 서방에서는 장건(張騫)의 원정을 계기로
서역(西域) 제국을 복속시키고, 중국과 서방과의 교통로인 이른바 ‘실크로드’가 개척되었다. 이와 같
이 무제의 치세는 사상 최대의 대제국이 건설된 전성기였으나, 반면에 제국(帝國)의 모순이 표면화하기
도 하였다. 특히 대규모의 원정, 토목사업, 궁정의 사치 등으로 국가재정의 파탄을 초래하자 이것을 극
복하기 위하여 증세(增稅), 화폐제도의 개선, 소금·철·술의 전매제, 균수법(均輸法)·평준법(平準法)
에 의한 상업관영(商業官營) 등의 재정정책이 취하여졌다. 이 정책은 재정의 불균형을 구하는 효과는
있었지만, 주로 농민에게 과중한 부담이 되어 사회적 모순이 심화되었다. 따라서 소제(昭帝)·선제(宣
帝) 시대에는 지방통치를 중심으로 한 내정의 안정에 힘을 기울이게 되었다. 한편, 무제의 장기에 걸친
독재적 통치기간 중에 3공(公)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정부 기관이 명목화하게 되고, 황제 측근자들이 정
치의 실권을 잡는 경향이 생겼다. 특히 원제(元帝) 이후는 외척(外戚)·환관(宦官) 등 근신(近臣)이 항
상 국정의 실권을 잡게 되어 궁정정치는 급속히 부패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외척(外戚) 왕망(王
莽)이 8년에 평제(平帝)를 독살하고 제위(帝位)에 올라, 국호를 신(新)이라 하고 한왕조는 일단 멸망하
였다. 왕망은 《주례(周禮)》에 기록된 이상화된 주나라의 여러 제도를 현실화하려는 공상적이며 졸속
한 개혁을 단행하였으므로, 정치적·사회적 모순이 폭발하고, ‘적미(赤眉)’ 등의 농민집단과 호족(豪
族) 세력의 반란에 의하여 재위 15년 만인 22년에 멸망하였다. 왕망 말기 반란의 지도자층 가운데서,
경제(景帝)의 6대 자손인 유수(劉秀)가 남양(南陽:河南) 호족연합의 지도자로서 두각을 나타내어, 농민
집단이나 호족의 자립세력을 평정하고, 25년 뤄양[洛陽]을 수도로 하여 후한(後漢)을 재건하였다. 그가
곧 광무제(光武帝)이며, 유교를 국교로서 확립시키고 군병(郡兵)을 폐지하는 등의 개혁으로 통일제국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한나라는 명제(明帝)의 치세부터 재차 적극적인 대외정책을 취하여 북방으로는 북
흉노를 압박하고, 화제(和帝) 때에는 한제국(漢帝國)의 지배권이 파미르고원을 넘어, 카스피해(海) 이
동에 있는 동서 투르키스탄의 50여 개의 서역국가군(西域國家群)까지 확대되었다. 그러나 화제 이후의
황제는 어려서 즉위하였을 뿐만 아니라 단명하였으므로, 또다시 외척과 환관이 권력을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경향에 대하여 기골 있는 관료나 학자의 일파가 환관의 권력 독점에 대한 비판을 전개
하였지만, 두 번에 걸쳐 탄압을 당하였다. 그 사건을 ‘당고(黨錮)의 옥(獄)’이라 하며, 그 후 궁정정
치는 혼란을 거듭하고 후한왕조는 소농층(小農層)의 몰락, 호족세력의 발전 등의 사회적·정치적 과제
에 대처하는 통치 능력을 상실하였다. 호족은 전한시대부터 사회적 세력을 확대하고, 후한의 재건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으므로 후한은 호족의 정권참가로써 지탱되고 있었다. 유교 국교화의 강화도 호족
층이 자체결합의 근거를 유교에 구하였던 것과 관계가 있다. 그들은 효렴(孝廉) 등의 관리임용제도를
통하여 중앙관료에의 길을 확보하였으며, 지방에서는 소유지를 확대하여 소농층을 지배하에 편입하였
다. 그 결과 황제통치의 기반인 농민층은 축소되고 호족층에 대한 국가의 통제력이 감퇴되었다. 이와
같은 정치적·사회적 모순의 누적 끝에 일어난 것이 황건(黃巾)의 난으로서, 도교(道敎)의 시초인 태평
도(太平道)의 주창자 장각(張角)이 수령이 되어, 184년 빈농을 중심으로 하는 대규모의 농민반란을 일
으켰다. 황건의 난 진압과정에서, 각지에 정치적·군사적 자립세력이 호족세력과 결탁하여 급격히 성장
하였다. 그 중의 한 사람인 원소(袁紹)가 궁정의 환관을 절멸시켰으나, 그 후로는 원소·동탁(董卓)·
손책(孫策)·조조(曹操)·유비(劉備) 등의 군웅이 할거함으로써, 후한 제국은 완전히 분열되었다. 후한
최후의 황제인 헌제(獻帝)를 옹립하여 하북(河北)을 지배하던 조조의 아들 비(丕)는 220년, 헌제를 강
박하여 제위를 물려받고, 위(魏)왕조를 창시함으로써 후한은 멸망하고, 3국시대가 시작되었다.
【정치】 한왕조는 진나라가 세운 황제의 직접통치에 의한 전제적 관료국가의 체제를 계승하였다. 따라
서 중앙과 지방의 관제는 진제(秦制)를 답습하였다. 중앙관제로는 황제 밑에 3공(公)이 있어, 승상(丞
相)은 황제를 보필하여 백관을 통솔하고, 태위(太尉)는 당시 상설의 관(官)은 아니었으나 군사를 담당
하고, 어사대부(御史大夫)는 감찰관인 어사를 통솔하는 한편 부승상(副丞相)으로서 행정에도 참여하였
다. 3공 밑에 중앙행정을 분담하는 관서로 태상(太常:禮儀祭祀)·광록훈(光祿勳:宮廷護衛)·위위(衛尉:
宮門守備)·태복(太僕:帝室의 車馬管理)·정위(廷尉:司法)·대홍려(大鴻'A:諸侯 및 外國의 來朝)·대사
농(大司農:국가재정)·종정(宗正:皇族關係)·소부(少府:帝室財政) 등 9시(寺)가 있었다. 9시의 장관을
구경(九卿)이라 하고, 집금오(執金吾:수도의 치안)·장작대장(將作大匠:토목공사)·대장추(大長秋:皇后
職·東宮職)를 더하여 12경(卿)이라고도 불렀다. 군(郡)은 지방통치의 중심기관이었으며, 그 장관으로
태수(太守), 군사지휘관으로 위(尉)를 두었다. 태수 밑에 부관으로서 승(丞)이 있고, 수(守)·승(丞)
밑에 지방행정의 실무를 담당하는 공조(功曹)·연사(椽史) 등의 속관이 있었다. 공조는 그 지방의 호족
출신자가 임명되었으며, 지방행정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군(郡)은 현을 통할하였으나, 현에도 영
(令)·장(長)·위(尉)가 임명되고, 군과 똑같은 하부기구가 있었다. 현(縣)의 통할하에는 향(鄕)과 정
(亭)이 있었으며, 향에는 유질(有秩)·색부(嗇夫)·유요(游)가 임명·파견되어, 호적·징세·요역(役)
등을 담당하고, 정에는 정장(亭長)이 있어 경찰업무를 담당하였다. 현·향·정은 성곽으로 둘러싸인 도
읍으로서 공통의 성격을 가진 취락으로, 춘추시대 이전의 읍이 그 기원이 된 것이 많았으나, 진(秦)·
한(漢)의 형성과 함께 치수 관개기구의 정비로 개척이 진행된 화북평원(華北平原) 등에 새로 건설된 현
이 상당수가 있어 현은 전제제국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현·향·정 등의 도읍(都邑)은 약간의 이
(里)로 구분되고, 이것이 일반 양민의 거주지구였다. 따라서 이는 종래와 같은 자연부락이 아니고, 이
에는 이민(里民) 출신의 이부로(里父老)가 있어 그 유력자를 현·향 등의 삼로(三老)로서 교육을 담당
케 하였다. BC 106년 국토를 13개주로 나누고, 자사(刺史)를 파견하여 군태수(郡太守) 이하에 대한 감
찰을 행하였다. 후한(後漢)에서는 자사가 지방장관의 실질적 역할을 하게 되었고, 주(州)는 군·현의
위에 위치하는 지방통치의 단위가 되었다. 한제국에서는 군·현 이외에 제후의 나라가 있었고, 경제·
무제의 억압정책으로 군국제(郡國制)가 실질적으로는 군현제(郡縣制)가 되었다. 이상과 같이 한제국은
전제적 통치기구에 의하여 농민에 대한 직접적이며 개별적인 인신지배(人身支配)를 실현하였고, 각종
조세와 요역을 부과하였다. 조세 중에서 전조(田租)는 그 토지의 수확량에 일정률을 부과하는 것이 원
칙으로, 고조(高祖) 때에는 15분의 1, 이후 수차의 변경을 거쳐 경제(景帝) 때인 BC 156년에는 30분의
1로 정해졌다. 후한에서는 30년부터 30분의 1이 정제(定制)로 되었다. 그러나 이 정률제(定率制)는 현
실의 운용면에서는 토지면적에 대한 수납액이 정하여져 정액제(定額制)가 실시되었다. 조(租)라고 부르
는 조세에는 시조(市租:商業稅)·해조(海租:漁業稅) 등이 있었다. 인두세(人頭稅)로는, 산부(算賦)는
15∼56세의 남녀에게 1산(算:120錢, 상인과 노비는 배액)을 부과하고, 구전(口錢)은 3∼14세의 남녀에
게 23전을 부과하였다. 그밖에 재산세로서 자산(算:算緡錢)이 있는데, 1만 전(錢)에 대하여 1산(算:120
錢)을 부과하였으며, 무제 때 상공업자의 자산이 특히 중과(重課)되었다. 농민이 부담한 요역으로는 노
역(勞役)과 병역(兵役)이 있는데, 노역은 15∼56세의 남자가 매년 1개월, 거주 군·현의 노역에 동원되
었으며, 이것을 경졸(更卒)이라 하였다. 실역(實役)에 종사하지 않을 경우는 경부(更賦)라 하여 300전
(錢)을 대납케 하고, 경부는 후에 상제(常制)의 부담으로 전환되는 경향이 있었다. 이상의 조세 가운데
전조·산부·경부 등은 대사농(大司農)이 수납하여 국가재정에 편입시키고, 시조·구전 등은 소부(少
府)에 수납하여 제실(帝室)재정의 수입으로 하였다. 한나라의 병제는 징병제로서 병역은 요역의 일종으
로 23∼56세의 강건한 남자에게 일률적으로 부과하였다. 재역기간 중, 1년은 출신지 군(郡)에서 군병
(郡兵)으로 복무하고, 1년은 황제의 근위군, 수도의 수비대 병사로서 복무하든가, 변경의 정졸(正卒:實
役에 복무하지 않을 경우에는 免役錢 징수)로서 복무하였으며, 잔여기간은 출신지에서 연 1회의 도시
(都試:군사훈련)가 부과되었다. 후한은 군병제(郡兵制)를 폐지하여, 일반농민은 병역의 실무가 사실상
해소되고, 특정한 가족에게 영구적인 병역이 부과되기 시작하였다.
【사회·경제】 한나라 때에 사회의 기초적인 구성원은 농민이었다. 그들은 오구가(五口家:다섯 식구)
와 같이 소형의 가부장적인 가족을 구성하여 자영농업을 영위하는 소농민이었으며, 군현제를 통하여 국
가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았다. 그 거주구(區)는 군현제하의 이(里)이지만, 농민은 원칙적으로 모두 국
가로부터 작위(爵位)를 받아서 이내(里內)의 신분질서를 형성하고, 그것을 매개로 하여 황제 지배하의
국가질서 내에 조직되어 있었다. 그러나 한나라는 각종 조세·요역 등의 부담의 중압으로 농민층의 빈
곤화가 진척되고, 이와는 반대로 호족층은 더욱 세력이 신장되어 대토지 소유자가 되고, 농민은 소작인
이나 노비로 전락하여 그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게다가 상인·고리대금업자의 활약으로 이 농민층
은 더욱 몰락하게 되었다. 상품생산과 판매에 종사하는 상공업자는 도시의 시(市:市場)라고 부르는 상
업구역에서 영업하며 시적(市籍)에 등기되어 시조를 부담하고, 법률적으로는 농민보다 한 단계 낮은 신
분적인 지위에 있었다. 최하층의 신분으로서는 관유(官有)·사유(私有)의 노비가 있어 이들은 매매의
대상이 되었다. 노비의 일부는 수공업 등에 사역되는 경우도 있었으나, 한대(漢代)의 많은 생산부문에
서 노비가 직접적인 생산자의 주요부분을 차지한 경우는 적었던 것 같으며, 대부분은 가내의 잡용이나
기타 비생산부문에 사용되었다. 한대의 중국은 철제농구의 전면적인 보급, 우경(牛耕)의 일반화와, 통
일 전제제국에 의한 치수·관개시설과 기구(機構)의 정비에 따라 농업생산력이 현저하게 증가하였으며,
전한의 대전법(代田法), 후한의 구종법(區種法) 등의 농경기술의 개발도 진척되었다. 한대 농업의 중심
은 치수관개가 잘 된 화북(華北)에서의 보리·조 등이 주요작물이고, 강남 저습지대의 벼농사는 기술적
으로 아직 발달하지 못한 상태에 있었다. 한대는 전국시대에 성장한 수공업이 더욱 발전한 시대이다.
한대의 수공업에는 농민 및 호족층의 자급자족적인 가내수공업도 있었으나, 중요한 경향은 민간수공업
자의 상품생산의 발전이다. 철기 수공업과 염엄(鹽業)은 특히 발전하여 대상인에 의한 대규모의 경영이
출현하였고, 기타 청동기 수공업·칠기 수공업·섬유 염색 수공업·양조업·식품가공업·피혁업 등이
번영하였다. 또한, 한대는 대규모의 관영 수공업이 출현하였는데, 대부분은 소부가 관할하였지만 무제
때에는 소금·철·술의 전매제가 시행되어 대사농(大司農)이 관할하였다. 상업의 중심은 도시에 설치된
시(市)이며, 점포는 시내에서 업종별로 나뉘어 배열되고, 이것을 사(肆)라고 불렀다. 도시에서는 시사
(市肆)에 점포를 가진 좌상(坐商)이 일상적인 상품매매에 종사하였으나, 각 지역간 또는 도시간의 원격
지 교역도 번영하여, 이에 종사하는 대상인·상려(商旅)가 출현하였다. 외국무역도 사상 최초의 번영을
보였으며, 그 중에서도 서역무역이 가장 유명하였으나, 북변에 설치된 관시(關市)에 의한 북방유목민과
의 무역, 쓰촨성[四川省] 방면을 경유하는 서남의 오랑캐·인도 등과의 무역, 광저우[廣州]를 거점으로
하는 남해무역도 번영하였다. 상업의 번영에 대응하여 화폐의 유통도 활발하였으며, 화폐경제가 농민의
일상생활에까지 침투하여 통화제도가 확립되었다. 한대의 주화는 무제 때인 BC 119년에 오수전(五銖錢)
이 제정되었으며, BC 113년 이후는 상림(上林)의 3관(官)에서 관주전(官鑄錢)이 나와 당(唐)나라의 개
원통보(開元通寶)가 제정되기까지 중국 화폐의 기본형식이 되었다.
【문화】 한나라 문화는 춘추전국시대에 형성된 각 분야의 문화를 보다 발전시키는 동시에, 그 후 중국
의 전통적 문화의 기본적 양식으로 형성된 것이 많아, 한나라가 중국문화사에서 차지하는 지위는 매우
중요하다. 학술·사상의 분야에서는 전한 전반기(前半期)는 도가사상과 법가사상, 특히 후자가 전제적
통치의 현실면에서 지도이념으로서의 지위를 차지하였다. 무제의 치세에 동중서(董仲舒)의 헌책(獻策)
으로 오경박사(五經博士)가 설치되어 유교의 국교화가 비롯되었다. 이런 경향은 원제(元帝)의 시기부터
결정적으로 되어, 유교는 국가통치·사회질서의 기본적 이념으로서의 지위를 확립하고, 후한시대로 계
승되었다. 전한시대의 학자는 옛 경문(經文)의 복원(復原), 정본(定本)의 작성에 노력하여, 경전을 금
문(今文:漢代의 書體)·고문(古文:先秦時代의 옛 書體)의 2계통의 경서(經書)로 성립시켰다. 후한시대
에는 마융(馬融)·정현(鄭玄) 등의 학자에 의하여, 고전의 주석에 전념하는 훈고학(訓學)이 발전하였
다. 사학(史學)에서 한대는 명확한 역사적 의식으로 편집된 사서(史書)가 출현했던 시대이다. 사마천
(司馬遷)의 《사기(史記)》, 반고(班固)의 《한서(漢書)》는 그 대표작으로서, 이후의 중국 정사(正史)
의 기본형식이 확립되었다. 과학적 지식의 분야에서도 진보와 그 체계화가 이루어졌는데, 유흠(劉歆)의
《삼통력(三統曆)》은 중국의 천문학·역법(曆法)의 틀[型]을 만들었으며, 수학의 저작으로서 《구장산
술(九章算術)》, 의학을 체계화한 《상한론(傷寒論)》 《황제내경(黃帝內經)》 등은 특히 유명하다. 문
학분야에서는 《사기(史記)》와 《한서(漢書)》가 한대 산문학(散文學)의 대표적인 거작이다. 운문학
(韻文學)에서는 전국시대에 비롯된 초사(楚辭) 등의 흐름을 채택한 사부(辭賦)와, 궁정문학으로서 악부
(樂府)의 양식이 나타났다. 미술·공예 대부분은 예속적 직인층(職人層)에 의하여 제작(制作)되었다고
생각되나, 이 분야에서도 현저한 전진이 있어, 중국의 전통적인 기본 양식으로 형성된 것이 많다. 회화
(繪畵)에는 칠화(漆畵), 고분벽화 등이 있으며, 조소(彫塑)에는 화상석(畵像石)이나 이상(泥像) 등이
있다. 서(書)는 한대에서는 예서(隸書)가 정식 서체로서 중시되었으나, 해서·행서·초서 등의 서체도
생겨났으며, 후한 말에는 장지(張芝)에 의하여 고유의 서예(書藝)가 형성되는 경향이 나타났다. 또, 공
예도 동기·칠기·도기·직물 등의 기술과 양식에 현저한 진보가 있었다.
【공예】 한대의 미술은 국가적인 통제가 강하였다. 그러나 미술의 발전을 위축시키기는커녕 오히려 큰
조직을 효과적으로 이용하여 양산(量産)하고, 단순한 형식 속에서도 층이 두텁고 깊이 있는 표현을 창
조하였다. 중앙과 지방에 공예품을 제작하는 공방이라 할 만한 공관(工官)이 만들어졌다. 제도(帝都)에
서는 고공실(考工室)·동원장(東園匠)·상방(尙方)이라고 하는 관제 공방이 있었다. 고공실과 상방은
오로지 제실용(帝室用)의 여러 기물(器物)을 만들고, 동원장에서는 능묘에 부장되는 명기류(明器類)를
만들었다. 은(殷)·주(周) 시대의 공예품은 제례용구가 대부분을 차지하였으나, 한대에서는 일상용구의
제작이 많아졌다. 그러나 이것도 일반 서민이 쓰던 기구라고는 보기 어려우며, 제왕 주변의 특수계급의
사람들이 사용하던 것이 대부분이었다. 공예 가운데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동기이다. 은·주의 초자
연적·주술적인 형태가 여기에서는 지극히 인간적인 생활의 용구로서, 신선한 생명력이 주입되었다. 신
(神)의 용품이던 것이 인간의 용품으로서 새로운 사명을 지니게 된 것이다. 박산로(博山爐:山東省 靑州
의 산을 본딴 향로)·촛대·초두(뺅?음식물을 데우는 容器)·대구(帶鉤:혁대 고리) 등에 정교한 기법을
구사한 일품(逸品)이 많다. 동경(銅鏡)도 이 시대에 수작(秀作)이 많아 신선문(神仙文)·기하문(幾何
文)·신수문(神獸文) 등을 곁들인 것이 있고, 또 금은 상감(象嵌)의 기술을 응용한 것도 있다. 칠공예
품도 한대 공예의 일품에 속한다. 제법에도 몇 종류가 있어, 목심칠(木心漆), 건칠(乾漆), 대[竹]를 엮
어서 틀을 만들고 옻칠을 두껍게 입힌 남태칠기(藍胎漆器)와 토기에 칠을 입힌 것 등이 있다. 한국의
낙랑군(樂浪郡) 유적에서 발견된 것이 그 좋은 예이다. 옥기도 중국 특유의 산물인데, 주대(周代)에 이
미 관영의 제조소가 있었으며, 한대에는 귀족의 의례적 필수품으로서뿐만 아니라, 일반의 장식품으로서
패옥(佩玉)·옥즐(玉櫛)·옥부(玉斧)·옥배(玉杯) 등이 만들어졌다. 명기는 무덤 속에 사자(死者)와 함
께 넣기 위하여 특별히 만든 채색도자기인데, 사람의 형태를 취한 것을 용(俑)이라고 한다. 용 이외에
도 조수(鳥獸)를 비롯하여 말이나 소를 나타낸 것에 걸작이 있으며, 사자가 생전에 살았던 것으로 보이
는 주택건축이나, 양·멧돼지 등의 명기도 있다. 이들 명기는 조각으로서 보더라도 조형성이 뛰어난 것
이며, 소박한 가운데서도 한대 장인(匠人)의 생명과 역량을 잘 나타내고, 또 당시의 생활습속을 구체적
으로 말해주고 있다. 도자기도 한나라는 다음 시대인 육조(六朝)와 함께 그 초창기에 해당하며, 당
(唐)·송(宋)시대가 동양 도자기사(陶瓷器史)의 백미(白眉)를 이룬다면 한대는 그 선구(先驅)라 할 수
있어, 이 시대에 이미 높은 화도(火度)로써 용해시키는 유약, 즉 고열유(高熱釉)가 사용되었다. 이때의
도기는 동기 같이 묵직하게 생긴 중후한 형태의 것이 많았다. 염직은 문헌에 보이는 것과 한대의 유적
에서 출토된 유품을 비교하여 대체로 짐작할 수 있다. 수(繡)·금(錦)·기(綺)·능(綾)·나(羅)·문직
(紋織) 등 기법적으로 상당히 뛰어나, 그 중에는 당대(唐代)의 그것과 다를 바 없는 것도 있다.
【회화】 회화라고 하여도 오늘날 볼 수 있는 한대의 유품은 전(塼)이나 능묘의 벽면에 새겨진 화상석
(畵像石)이 주된 것인데, 그들에게서 볼 수 있는 자유분방한 필치는 중국 회화를 발전시키는 풍요한 기
반을 이루고 있다. 특히, 선묘(線描)를 중히 여긴 이 시대의 필법은 선(線)의 예술이라고 불린 중국화
의 선구를 이루고 있다. 인물·풍경·동물·화훼(花卉)·신선 등 모든 분야에 미치고 있어, 중국미술의
한없는 깊이와 풍요함을 절실히 느끼게 한다.
新
중국의 왕망(王莽)이 전한(前漢)을 멸하고 세운 왕조(8∼23). 왕망은 전한 황실의 외척 왕씨의 일족이
었다. BC 8년 대사마가 되었고 9세의 평제(平帝)를 옹립한 후 안한공(安漢公)이 되었다. 그러나 평왕을
죽인 다음 2세(歲)의 영()을 세워 스스로 섭정이 되어 가황제(假皇帝)를 자칭하였으며, 8년에는 전한을
무너뜨리고 신나라를 세웠다. 왕망은 복고주의(復古主義)를 내세워 《주례(周禮)》 등 유교경전을 근거
로 하는 개혁정치를 단행하였다. 즉 고전에 입각하여 삼공(三公)과 구경(九卿) 이하의 관직을 제정하고
정전법(井田法)을 모범으로 하는 한전(限田)정책과 노비매매를 금지하였으며, 국가 권력에 의해서 물가
의 균형책과 전매제도(專賣制度)를 강화하여 상업을 통제하였고 또한 화폐를 개주(改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개혁정책은 실정에 맞지 않아 사회는 혼란에 빠졌고 흉노(匈奴)를 비롯한 대외정책도
실패했기 때문에 안팎으로 불안과 동요가 고조되었다. 그 결과 적미(赤眉)·녹림(綠林) 등의 농민반란
이 각지에서 발생하였고 또 지방의 여러 호족도 이에 호응하여 봉기하여 왕조 개창 15년 만에 후한(後
漢)의 광무제(光武帝)에게 멸망하였다.
三國時代
중국 후한(後漢)이 멸망한 후 위(魏)·오(吳)·촉한(蜀漢) 등 3국이 정립(鼎立)했던 시대. 184년 황건
적(黃巾賊)의 난이 일어나자, 후한 왕조의 권위는 붕괴하여 동탁(董卓)이 뤄양[洛陽]으로 입성하여 환
관(宦官)을 주멸하고, 황제의 폐위를 감행하려고 하였다. 이 때문에 동탁 토벌의 군이 각지에서 일어나
게 되었다. 산둥[山東]에 있던 조조(曹操)도 189년에 군사를 일으켜 황건적을 격파하고 동탁을 토멸하
여 후한의 헌제(獻帝)를 옹립해서 기주목사(冀州牧使) 원소(袁紹)와 화북지방을 양분(兩分)하였다. 양
자(兩者)는 202년 관도(官渡)에서 자웅을 결하였으나, 이 싸움에서 승리한 조조는 화북지방의 지배권을
거의 확립하였다. 한편, 형주목사(荊州牧使) 유표(劉表)에게 식객(食客)으로 있던 유비(劉備)는, 현신
(賢臣) 제갈양(諸葛亮)의 협력을 얻어 형주를 빼앗아 손에 넣고 오(吳)의 손권(孫權)과 동맹하여 조조
의 남하를 저지하였으며, 211년에는 익주(益州)를 공략하여 이 지방을 빼앗았다. 그 후 오(吳)의 손권
은 유비와 싸워서 형주를 손에 넣었으며, 거의 양쯔강[揚子江]의 중·하 유역을 세력하에 두었다. 220
년 조조의 아들 조비(曹丕)는 후한의 헌제를 강압하여 제위를 양위케 하고, 뤄양에 도읍하여 위국(魏
國)이라 칭했다. 그 전년에 한중왕(漢中王)을 호칭하던 유비는, 한의 정통을 계승한다고 칭하여 성도
(成都)에 도읍하고, 한제(漢帝) 또는 촉한제(蜀漢帝)라 칭하였다(221). 손권은 처음에 위의 오왕(吳王)
으로 봉해져 있었으나, 222년에는 스스로 연호(年號)를 세우고, 또한 229년 오제(吳帝)의 제위에 올랐
기 때문에, 여기에 3국의 분립이 확정되었다. 3국 가운데 화북(華北)에 있던 위는 병호제(兵戶制)·둔
전제(屯田制)·구품관인법(九品官人法) 등을 실시하여, 군사적·경제적 기초를 공고히 함으로써 가장
강력한 국가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촉한은 국토도 좁고 가장 약하였으나, 한의 정통을 계승한 것으로서
중원의 회복을 뜻하여, 수차에 걸쳐 위에 도전하였다. 그 후 위에서는 사마 의(司馬懿)가 중심이 되어
이를 격퇴하였기 때문에 마침내 사마씨가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으며, 그의 아들 사마 소(司馬昭)는 263
년 촉한을 멸망시킨 공적으로 진왕(晉王)에 봉해졌으며, 265년에는 그의 아들 사마 염(司馬炎)이 위제
(魏帝)를 강압하여 제위를 양위받고 진(晉)나라를 세웠다. 이 사람이 서진(西晉)의 무제(武帝)이다. 무
제는 280년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재차 중국을 통일하였다.
魏
중국 삼국시대 3국의 하나(225~265). 후한(後漢) 말 당고(黨錮)의 옥, 황건(黃巾)의 난으로 후한의 위
세는 땅에 떨어지고, 동탁(董卓)·원소(袁紹)·원술(袁術)·공손 찬(公孫讚) 등 군웅이 각지에 할거하
였다. 조조(曹操)도 한 부장(部將)으로서 황건적을 토벌하여 복속시키는 등 점차 세력을 확대하더니,
196년 헌제를 허(許:河南省 許昌縣)에 받들어, 승상(丞相)이 되고 위국공(魏國公)에 봉하여 화북(華北)
을 통일하였다. 당시 강남(江南)에는 손권(孫權), 쓰촨[四川]에는 유비(劉備)가 세력을 떨치고 있었으
나, 208년 조조가 적벽(赤壁:湖北省 嘉魚縣 西)에서 유·손의 연합군에게 크게 패하자 천하 3분의 형세
가 정하여졌다. 216년 조조는 위국왕(魏國王)으로 봉하여졌으나, 220년 조조가 죽자 아들 조비[文帝]는
헌제에게 강요하여 제위를 선양받아, 연호를 황초(黃初)라 하고 뤄양[洛陽]에 도읍하여, 위나라를 세웠
다. 조조는 전란과 황폐 속의 중원을 지배하면서, 부국강병을 도모하기 위하여 대규모 둔전제(屯田制)
를 실시하고, 징병제(徵兵制)를 대신한 병호제(兵戶制)를 실시하였다. 또한 징세의 단위를 호(戶)로 하
는 호조(戶調)를 시작하였고, 인재를 발탁하기 위하여 구품관인법(九品官人法)을 제정하였으나, 실제로
는 명문 출신자가 관계(官界)를 독점하였다. 그 중에서도 사마씨(司馬氏)의 세력은 강대하여서, 황제를
폐립(廢立)하기도 하였다. 265년 사마 염(司馬炎:武帝)은 위의 선례에 따라 원제(元帝)에게 양위를 강
요하여 제위에 올랐으며, 위는 멸망하였다.
吳
중국 삼국시대 국명(222∼280). 한말(漢末) 군웅(群雄)의 한 사람인 부춘(富春:浙江省 富陽縣)의 호족
(豪族) 손견(孫堅)이 원술(袁術) 밑에서 동탁(董卓)을 토벌하여 세력을 얻고, 그의 맏아들 손책(孫策)
은 영자강 동쪽의 여러 군(郡)을 평정하고, 동생 손권(孫權)에 이르러 208년(건안 13) 유비(劉備)와 결
탁, 조조(曹操)의 대군을 적벽(赤壁) 싸움에서 크게 무찌른 뒤, 천하를 3분(分)하여 그 하나를 영유하
게 되었다. 조조의 아들 조비가 한나라 헌제(獻帝)로부터 제위(帝位)를 양도받아 위(魏)의 황제가 되자
손권도 오왕에 봉해졌으나 222년 스스로 연호를 황무(黃武)라 부르고 229년 위와 촉한(蜀漢)의 싸움이
격화하자 그 틈을 타고 무창(武昌)에서 제위에 올라 국호를 오라 하고 도읍을 말릉(陵:현재의 南京)으
로 옮겨 그곳을 건업(建業)이라 불렀다. 오는 손권 때 위세를 떨쳤으나 그가 죽자 국내의 대성(大姓)들
이 서로 싸우고 내란도 자주 일어나 국력이 쇠퇴하였다. 263년 촉한이 위에게 망하고, 위가 진(晉)에게
망하자 진은 대군을 파견하여 오를 공략하였으므로 210년 건업은 함락되고 오는 멸망하였다.
蜀漢
중국 삼국시대에 정립(鼎立) 상태에 있던 한 나라(220~263). 전한(前漢) 경제(景帝)의 후손 현덕(玄德)
유비(劉備)가 촉(蜀:四川省)에다 창건하였다. 정식 명칭은 한(漢). 계한(季漢)이라고도 하며, 촉(蜀)·
촉한으로 통칭한다. 후한(後漢) 말 황건적(黃巾賊)의 대반란이 일어나 후한의 권위가 무너지자 군웅할
거의 정세는 결정적이 되었다. 형주(荊州) 목사 유표(劉表)의 객장(客將)이던 유비는 유표가 죽은 뒤
그의 아들 종(琮)이 조조(曹操)에게 투항하자, 제갈 량(諸葛亮)의 협력을 얻어 천하 ‘3분의 계(計)’
를 세우고 손권(孫權)과 동맹하여 적벽(赤壁) 전투에서 조조를 격파하고 형주의 목사가 되었다. 이리하
여 양쯔강[揚子江] 중류 유역을 거의 장악하자, 익주(益州:成都) 목사 유장(劉璋)을 공략하여 스스로
익주 목사가 된 뒤 219년 스스로 한중왕(漢中王)이라 칭하였다. 다음해 조비(曹丕)가 한제(漢帝)의 양
위를 받아 제위에 오르자, 221년 유비도 또한 제위에 올라 수도를 청두[成都]로 정하고, 고조(高祖) 이
하의 종묘를 세워 한(漢)의 정통성을 명백히 하였다. 다음해 손권도 연호(年號)를 세웠으므로 바야흐로
3국 정립의 형세가 되었다. 그러나 형주의 영유를 둘러싼 촉한·오(吳)의 대립은 해결되지 않았으므로,
유비가 친히 군대를 이끌고 오를 쳤으나 백제성(白帝城)에서 병사하고 말았다. 후사를 위임받은 제갈
량은 후주(後主) 유선(劉禪)을 잘 보좌하여, 오나라와의 국교를 회복하고 산업을 장려, 민력을 기른 후
윈난[雲南]·구이저우[貴州]를 토벌하여 이를 개발하는 등 국력을 강화하였다. 동시에 중원(中原)을 회
복하고자 자주 북벌을 시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234년 우장위안[五丈原]에서 대전중 병사하였
다. 그 후 장완(蔣琬)·비위(費褘)·강유(姜維) 등이 국정을 담당하였는데, 해마다 일어난 위(魏)와의
전쟁 때문에 환관 황호(黃晧)의 전횡까지 겹쳐, 국력이 쇠퇴하여 263년 위군의 대공격에 유선이 항복함
으로써 멸망하였다.
晉
위진남북조시대(魏晉南北朝時代)의 중국 왕조. 서진(西晉:265∼316)과 동진(東晉:317∼419)으로 구분되
며, 그 제실(帝室)은 사마씨(司馬氏)이다. 사마씨는 원래 하내온현(河內溫縣:河南省 溫縣)의 명족으로,
사마 의(司馬懿)가 3국의 하나인 위(魏)나라의 조조(曹操)를 비롯하여 여러 황제를 섬기면서 군사적·
정치적으로 공적을 세워 권신(權臣)이 되었다. 그가 죽은 뒤에도 그의 아들 사(師) 및 소(昭)도 권신으
로서 세력을 확보하고 반대자를 제거해서 위나라 황실을 위압하였다. 263년 소가 집정할 때 3국의 하나
인 촉한(蜀漢)을 멸망시켰고, 265년 소의 아들 사마 염(司馬炎:武帝)은 위나라의 황제 조환(曹奐)으로
부터 선양(禪讓)이라는 명목으로 황제위를 빼앗아 제위에 오르고 뤄양[洛陽]을 도읍으로 삼아 진나라
(西晉)를 세웠다. 진나라는 280년에 오(吳)나라를 평정하여 3국을 통일하고, 점전법(占田法)·과전법
(課田法) 등의 토지제도와 세법(稅法)인 호조식(戶調式)을 공포하였다. 2대의 혜제(惠帝)는 무능하여
귀족관료는 9품관인법(九品官人法:九品中正法)에 따른 문벌주의에 안주하고 소외된 하급 사인(士人:寒
門)의 일부는 제실(帝室)의 일족인 여러 왕의 심복이 되어, 290년 8왕의 난을 일으켰다. 또 이 반란에
종군한 흉노 등 변방의 여러 민족들도 자각하기에 이르러, 민족의 독립을 목표로 궐기하여 영가(永嘉)
의 난을 일으켰다. 이로써 뤄양과 장안(長安:西安)은 외방 민족에게 파괴되고 311년에는 3대의 회제(懷
帝)가 살해되었으며, 316년에는 4대의 민제(愍帝)도 잡혀 서진은 멸망하였다. 이에 앞서 오(吳)나라의
옛 도읍지 건업(建業:南京)에 있던 서진 왕족의 사마 예(司馬睿:元帝)는 뤄양과 장안이 함락되자 건업
을 도읍으로 삼아 동진을 세웠다. 황허강[黃河] 유역에서 남쪽으로 이주한 왕도(王導) 등 귀족은 강남
(江南)의 토착 명족(名族)에 비해 우위를 차지하면서 이들과 화합하여 귀족제의 국가를 이루어갔다. 또
한 북방으로부터의 인구 유입에 따라 양쯔강[揚子江] 중·하류 유역의 개발이 진전되어 장원(莊園)도
형성되었다. 문화면에서도 왕희지(王羲之)의 글씨, 고개지(顧愷之)의 그림, 도연명(陶淵明)의 시 등 훌
륭한 명사들이 나와 좋은 작품들을 남겼다. 그러나 동진의 제권(帝權)은 약해서 장군들의 정권싸움이
끊이지 않다가 419년 무장(武將) 유유(劉裕)가 공제(恭帝)로부터 선위(禪位)받아 송(宋)나라를 일으켰
으나 얼마 가지 못하고 멸망하였다.
五胡十六國
304년 유연(劉淵)의 건국에서 439년 북위(北魏)의 통일까지 중국 화북(華北)에 흥망한 5호(胡)와 한인
(漢人)의 나라 및 그 시대. 4세기 초엽에서 100 수십 년간 화북에서는 흉노(匈奴)·갈(:흉노의 별종)·
선비(鮮卑:터키계라는 설이 있다)·저(:티베트계)·강(羌:티베트계)의 이른바 5호가 잇달아 정권을 수
립하여 서로 흥망을 되풀이하였다. 그 중에는 한인이 세운 왕조도 있고 그 수도 16개국을 넘었는데 이
것을 흔히 5호 16국이라고 한다. 이민족(異民族)에 의한 중국지배의 최초의 형태이다. 이보다 앞서 한
제국(漢帝國)이 주변의 이민족을 정복하여 한문화(漢文化)를 침투시켜 나가자 이민족의 중국 내륙에 거
주하는 자가 늘어갔으나 민족의 자주성을 잃은 그들은 한민족으로부터 갖가지 압박을 받고 노예·농노
등으로 전락하는 자도 적지 않았다. 이와 같은 경향은 위(魏)·진(晉) 시대에 이르러 더욱 심했는데 크
고 작은 반항을 거듭하다가 304년 흉노의 추장인 유연이 팔왕(八王)의 난에 편승하여 거병(擧兵), 산시
[山西] 지방에 흉노국가를 재건하였다(漢:뒤에 前趙로 바꿈). 같은 해 저족인 이웅(李雄)이 쓰촨[四川]
에 대성황제(大成皇帝)를 자칭하며 나라를 일으켰다. 이어서 서진(西晉) 왕조는 한군(漢軍)에게 수도
뤄양[洛陽]을 빼앗기고 멸망, 강남(江南)에 망명정권이 탄생하였다(東晉). 한(漢:東晉)은 갈족인 석륵
(石勒:後趙)에게 멸망되고 후조도 또한 동북방면에서 남하한 선비족의 전연(前燕)과 서쪽의 저족인 전
진(前秦)으로 2분되었다. 전연을 평정한 전진(前秦)의 부견(堅)의 치세는 5호시대 중에서도 가장 안정
된 시기였으며 그 지배지역은 화북 전토는 물론 쓰촨·서역에까지 미쳤다. 다시 동진(東晉) 정복을 꾀
했으나 화이허강[淮河] 남안(南岸)의 페이수이[肥水]에서 대패함으로써 멸망, 화북은 다시 후연(後燕:
鮮卑)과 후진(後秦:羌)으로 분열하였고 간쑤[甘肅] 방면에서도 여러 민족의 소국가가 분립하여 서로 항
쟁하였다. 이윽고 일어난 선비탁발부(鮮卑拓跋部)인 북위(北魏)가 제국가를 평정하고 북량(北凉)의 멸
망을 끝으로 이 시대는 종지부를 찍었다. 같은 무렵 강남에서도 송(宋)이 진(晉)에 교체되어 새로운 단
계에 들어갔으므로 이 이후를 남북조라 부른다. 오호의 제국가는 호족(胡族) 중심의 국가로 유목사회
특유의 부락제도로 호족을 묶어놓았으나 한족에게는 중국 전통의 군현제(郡縣制)를 적용하여 이른바 호
한(胡漢) 2중체제를 실시하였다. 또한 군주 중에는 폭군도 적지 않았으나 한문화를 존중하였고 한족 사
대부(土大夫)를 예우하였으며 중국의 왕조로서의 정통성을 주장하려는 경향도 강하여 반드시 야만과 무
질서만의 시대는 아니었다. 불교에 관심도 많았고 불도징(佛圖澄)·구마라습(鳩摩羅什) 등 서역승(西域
僧)과 도안(道安) 등의 한승(漢僧)이 중국 불교 발전에 기여하였다. 다만 정권의 바탕을 이루는 부락제
도의 존재가 국가의 통일성을 저해하였으므로 각 왕조는 모두 단명하였으며 복잡한 정국을 펼치게 되었
다.
南北朝時代
중국 역사상의 시대구분의 하나(420~589). 진(晉)나라와 수(隋)나라 중간시대에 해당하며, 이 동안 중
국은 남북으로 분열되어 각각 왕조가 교체해서 흥망하였다. 남조는, 한족(漢族) 왕조인 송(宋)나라의
문제(文帝)에서 시작되어 제(齊)·양(梁)·진(陳)의 4왕조가 교체하여 나라를 세웠다가, 589년 진이 수
의 문제(文帝)에게 멸망될 때까지를 가리킨다. 북조는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의 혼란을 수습한 북위
(北魏)의 태무제(太武帝) 때부터 시작되어, 이 북위가 동위(東魏)와 서위(西魏)로 분열하고 동위는 북
제(北齊)에게, 서위는 북주(北周)에게 교체되었다가 북주가 북제를 멸망시키고 한때 화북지역을 통일하
였으나, 얼마 못가서 외척 양견(楊堅:文帝)이 제위를 양위받고 건국한 수가 남조 최후의 왕조인 진을
멸망시키고 중국천하를 통일한 때까지를 말한다. 이 시대의 정치적 특징으로는 남조에서는 귀족정치의
번영이었고, 북조에서는 군주권의 강화였다고 할 수 있다. 남조의 귀족은 구품중정법(九品中正法)을 이
용하여 항상 고급관리의 지위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왕조의 교체는 군사권을 장악한 무관에 의하여 이
루어졌다. 북조의 군주는 선비족(鮮卑族) 출신의 탁발씨(拓跋氏)로서, 군주권강화를 위하여 지배종족인
선비를 모든 군사담당자로 구성하였으며, 호적을 정비하여 인보제(隣保制)와 삼장제(三長制)에 의해서
체제를 지탱하였다. 또한 균전법(均田法)이 처음으로 시행되었으며, 부병제(府兵制)도 채용하였다. 이
북조의 군주권 강화를 위하여 실시된 정치기구가 뒤에 수·당(唐) 두 제국의 정치기구로서 완비되었다.
문화면으로는 유교보다 불교·도교(道敎)가 성하였다. 불교는 남조에서 불법존숭의 황제까지 나타났고,
북조에서는 국가불교적인 성격이 강하여 윈강[雲崗]·룽먼[龍門]석굴과 마이지산[麥積山]석굴 등과 같
은 대대적인 조불사업(造佛事業)이 성행하였다. 도교는 남조에서는 양의 도홍경(陶弘景)에 의해서 대성
되었고, 북조에서는 북위 태무제 때의 도사(道士) 구겸지(寇謙之)가 천사도(天師道)를 대성하고 국가본
위의 도교 종파를 이루어 중국 도교를 종교로서 확립되게 하였다. 문학은 남조에서는 진(晉)에서 송
(宋)에 걸쳐 도연명(陶淵明)과 사영운(謝靈運) 등이 나타났으며, 그 경향은 귀족사회의 풍조를 반영하
여 화려한 수사를 중용한 사륙변려체(四六儷體) 문장이 널리 보급되었다. 양나라 소명태자(昭明太子)의
《문선(文選)》과 서릉(徐陵)의 《옥대신영(玉臺新詠)》은 그와 같은 경향을 바탕으로 하여 편찬된 시
문집(詩文集)이다. 이 같은 귀족적인 경향에 대하여 생생한 민간의 감정을 표현한 악부(樂府)가 있었는
데, 남조의 악부는 연애감정을 노래한 것이 많았고 북조의 악부는 전쟁과 영웅을 노래한 용맹하고 웅장
한 것이 많았다. 이 밖에 문학작품이 아닌 것으로, 북위의 여도원(Y道元)의 《수경주(水經注)》와 양현
지(羊衒之)의 《낙양가람기(洛陽伽藍記)》, 가사협(賈思d)의 《제민요술(齊民要術)》, 안지추(顔之推)
의 《안자가훈(顔子家訓)》 등이 주목받을 만한 작품이다.
隋
중국의 통일왕조(581∼618). 양견(楊堅:文帝)이 581년 북주(北周)의 정제(靜帝)로부터 양위받아 나라를
개창하고, 589년 남조(南朝)인 진(陳)을 멸망시켜 중국의 통일왕조를 이룩하였다. 문제·양제(煬帝:
廣)·공제(恭帝:侑)의 3대 38년이라는 단명 왕조였으나, 남북으로 갈라져 있던 중국을 오랫만에 하나의
판도에 넣어 진(秦)·한(漢)의 고대 통일국가를 재현하였고, 뒤를 이은 당(唐)이 중국의 판도를 더욱
넓혀 대통일을 이룩하는 데 기반이 되었다는 점에서 존립의의가 크다.
【역사의 개략】 양견은 북주 황실과 인척관계임을 기화로 세력을 확대하였다. 즉 양견의 처는 북주의
주국(柱國:제2勳位)이던 독고 신(獨孤信)의 딸이었고, 그 처의 언니는 북주 명제(明帝)의 황후였으며,
양견 자신의 딸은 북주 선제(宣帝)의 황후임과 동시에 정제(靜帝)의 어머니였다. 양견은 북주에서 그의
전권(專權)에 맞서는 위지형(尉遲) 등 반대세력을 물리치고 상국(相國:首相)·수왕(隨王)이 되어, 그의
사위인 정제로부터 선양(禪讓)이라는 형식으로 쉽게 북주를 빼앗아 수조(隋朝)를 개창하였다. 양견을
수나라의 고조(高祖)라고도 하는데, ‘隋’란, 원래 양견이 수왕(隨王)이 되었던 데서 연유한 것으로서
‘隨’자에 ‘착(o)’이 있으면 뛴다는 뜻으로 왕조가 안정되지 않는다 해서 ‘隋’로 하였다고 한다.
문제는 587년 그의 보호국으로 강릉(江陵:湖北省)에 도읍을 정하고, 남조(南朝) 양(梁)의 황실 자손이
다스리던 후량(後梁)을 멸망시켰으며, 589년 그의 차남인 진왕(晉王) 광(廣:煬帝)을 행군원수(行軍元
帥)로 삼아 남조의 진(陳)을 멸망시켜 통합함으로써, 동진(東晉)의 남천(南遷) 이래 317년에 걸쳤던 중
국 분열에 종지부를 찍었다. 문제는 내정에 힘을 쏟아 재정적으로는 긴축정책(緊縮政策)을 취하였으며,
오랫동안 남북으로 갈라져 있던 중국의 통일을 추진하였다. 대외적으로는 장성(長城)을 축조하여 터키
계(系) 돌궐(突厥)의 침입에 대비하였으며, 598년(고구려 영양왕 9)에는 요서(遼西)를 침범한 고구려를
정벌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황실에서는 문제의 장남 용(勇)이 황태자가 되었으나, 진(陳)을 토벌하
는 데 큰 공을 세운, 간지(奸智)가 넘치는 진왕 광이 형인 용을 대신해 황태자가 되고 뒤에 즉위하여
양제(煬帝)가 되었는데, 문제는 아들 양제에 의하여 살해되었다고 한다. 양제는 문제의 유업(遺業)을
이어 중국의 남북을 잇는 대운하(大運河)를 완성하고, 남북의 통일을 추진하여 동도(東都:東京)를 뤄양
[洛陽]에 조성하고, 토욕혼(吐谷渾)과 돌궐을 토벌하였다. 또한 611∼614년 돌궐과 손을 잡을 우려가
있었던 고구려에 3차에 걸쳐 대군을 파견하여 원정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양제는 중국 통일 후
얼마되지 않았음에도 너무 서둘러 대대적인 토목공사와 원정을 속행하였기 때문에, 백성들은 모든 면에
서 과중한 부담으로 고통을 받았다. 특히 고구려 원정 기지에 가까웠던 산둥[山東] 지방 백성들은 그
고통이 더욱 심하였고, 게다가 이 지방은 옛 북제(北齊)와 북주(北周)로 이어지는 나라의 영토여서 북
주를 멸망케 한 수왕조에 대한 반감도 높아서, 반란사건도 이 지역에서 가장 많이 일어났다. 613년 제2
차 고구려 원정 도중에 일어났던 양현감(楊玄感)의 반란은 2개월 만에 진압되었으나, 그 후 수나라는
본격적인 반란기에 들어갔다. 또한 양현감의 반란이 있을 무렵 옛 남조(南朝)의 영토 안에서도 백성들
의 불만이 폭발하여 반란은 삽시간에 각 지방으로 확대되어 갔다. 이러한 소용돌이 속에서도 양제는 강
도(江都:揚州)에 행행(行幸)하는 등 사치스러운 생활에 빠져 있었다. 617년 타이위안[太原:山西省] 유
수(留守) 이연(李淵)은 내란이 격화하여 양제가 있던 강도가 고립되자, 타이위안의 호족들을 끌어모아
군사를 일으켜 장안(長安)을 탈취하고 양제의 손자인 유(侑:恭帝)를 옹립하였다. 그러나 618년 양제가
강도에서 우문화급(宇文化及)에 의하여 살해되자, 이연이 공제로부터 양위받아 스스로 즉위, 당조(唐
朝)를 창건함으로써 수나라는 멸망하였다. 당나라가 세워진 뒤에도 양제의 총애를 받던 왕세충(王世充)
은 공제의 동생인 월왕(越王:)을 옹립, 수나라의 대통을 잇게 하였으나, 619년 그를 폐위하고 스스로
즉위, 정국(鄭國)을 세움으로써 수나라의 황실은 그 맥이 완전히 끊겼다.
【정치】 문제는 북주를 이었으나, 그 제도를 그대로 따르지 않고 북주의 여러 법령을 근간으로 개혁을
단행하여 개황율령(開皇律令)을 공포하였다. 중국 법제의 모법이기도 한 당나라의 율령제(律令制)는 거
의 이 때 그 기초가 다져진 것이다. 관제(官制)로는 상서(尙書)·문하(門下)·내사(內史)·비서(秘
書)·내시(內侍)의 5성(省), 어사(御史)·도수(都水)의 2대(臺), 태상(太常)·광록(光祿)·위위(衛
尉)·종정(宗正)·태복(太僕)·대리(大理)·홍로[鴻'A]·사농(司農)·대부(大府)·국자(國子)·장작(將
作) 등 11시(寺)를 두었다. 그러나 정치의 중추적 기능은 상서·문하의 2성에 집중되어 있어, 상서성에
는 이부(吏部)·예부(禮部)·병부(兵部)·도관(都官:당의 刑部)·탁부(度部:당의 戶部)·공부(工部) 등
6조(曹)를 두었는데, 이는 당나라 6성(省)·1대(臺)·9시(寺)·5감제(監制)의 기초가 되었다. 지방에는
주(州)·군(郡)·현(縣)을 두어 그 장관을 각각 자사(刺史)·태수(太守)·영(令)이라 하였다. 그러나
주와 군은 그 넓이에 있어 차이가 없었으므로 군을 폐지하고 주에 현이 직속하게 하였다. 또한 자사가
그 때까지 장악하고 있던 병권(兵權)을 빼앗아 지방행정에서 병제를 분리하여 부병제(府兵制)를 따로
두었으며, 지방의 관리는 모두 중앙에서 직접 파견하여 중앙집권을 꾀하였다. 토지제도로는 북위(北魏)
에서 비롯된 균전제(均田制)를 북제(北齊) 때 보완한 제도를 근간으로 해서 시행하였으나, 그 세부적인
것은 밝혀지지 않은 것이 많다. 수나라는 중앙의 지배권력을 말단 백성에까지 침투시키기 위해 북위(北
魏) 이래의 인보제(隣保制)를 두어 500가(家)를 향(鄕), 100가(家)를 이(里), 25가를 여(閭), 5가를 보
(保)라 하여 각각 그 장(長)을 두었다. 특히 옛 북제(北齊) 지방에서는 모열(貌閱)이라 해서 백성의 머
릿수를 일일이 확인하여 나이 등의 부정신고를 엄중하게 단속하였다. 이 같이 제도를 정비한 결과 인구
의 장악수(掌握數)가 증대하여 609년에는 호수(戶數) 890만 7,549, 인구 4,601만 9,956명에 이르러, 이
후의 당나라 초기 때보다 월등히 많은 인구수를 나타냈다. 또한 문제(文帝)는 구품관인법(九品官人法)
이라 해서 그 때까지 귀족의 출세의 발판이 되어온 관리임용법을 폐지하였고, 양제는 관리임용법으로서
진사과(進士科)를 두었는데, 이것은 뒤에 당나라에 과거제(科擧制)라 불리어 성행하게 된 관리임용제의
창시로, 고려에서도 이를 실시하였다. 양제는 즉위 후 문제의 율령을 개정하여 대업율령(大業律令)을
발포하였는데, 후에 당나라가 제정한 율령은 문제의 개황율령(開皇律令)을 근간으로 한 것이다.
【문화】 수시대의 문화는 그 기간이 짧았고, 이 때 일하던 사람들은 당나라에서도 활약을 계속하였기
때문에, 수와 당의 문화는 획을 그어 구별하기 어려운 점이 많다. 그러나 수나라의 남북통일에 의해서
그 때까지 남북으로 갈라져 있던 문화가 하나로 융합하게 되어 남조계(南朝系)의 문화계 종사자들도 수
나라 조정에서 일하게 되었다. 사상면에서 왕통(王通)은 《문중자중설(文中子中說)》을 남겼는데, 그는
노장사상(老莊思想)을 바탕에 두고 공자(孔子)의 가르침을 전파한 특이한 사상가로, 후세에 그 사상적
가치를 인정받게 되었다. 불교에서는, 문제가 불교에 귀의(歸依)하여 주(州)마다 대흥국사(大興國寺)를
세웠고, 양제도 진왕(晉王)으로 불릴 때부터 불교를 숭상하였다. 지의(智)의 천태종(天台宗), 길장(吉
藏)의 삼론종(三論宗)은 수나라 때 개창되었다. 문학면에서도 남북융합의 바람이 불어, 그 때까지 육조
문학(六朝文學)이 외형의 아름다움을 위주로 명맥을 이어온 데 대한 반성이 가해졌다. 이 당시에는 새
로운 경향의 문학이 생겼다고 할 수는 없으나, 당(唐) 시대에 일어나는 문학 융성의 소지(素地)를 숙성
시켰다고 할 수 있다. 미술면에서는 불교 조각 가운데 석조물이 오늘날에도 많이 남아 있다. 뤄양 남쪽
룽먼[龍門]석굴의 약방동본존(藥方洞本尊)과 양협보살(兩脇菩薩)·양협나한(兩脇羅漢) 등과 산시성[山
西省] 타이위안[太原]에서 가까운 톈룽산[天龍山]의 제8동굴은 문제 때인 584년에 조영(造營)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산둥성[山東省]의 지난[濟南]에서 가까운 위한산[玉5山]의 불곡사(佛錐?에는 수나라 기
년(紀年)의 좌고(坐高)에서 30 cm~1 m에 이르는 불상이 많다. 또한 산둥성의 윈먼산[雲門山] 석굴에는
제1동굴과 제2동굴이 있는데, 제1동굴에는 중앙에 큰 좌불(坐佛), 좌우에 협시보살(脇侍菩薩)이 있다.
이들은 모두 경직된 블록적(的) 구성으로 당(唐)시대의 원만한 형식에 가까우나 우미(優美)하다기보다
는 웅장하고 중후하다. 금동불 중에는 석조와는 달리 우아하고 친밀감에 넘치는 소상(小像)이 있다. 또
한 한말(漢末) 삼국 이래 쇠퇴하였던 동경(銅鏡)의 제작이 성행하여 수경(隋鏡)이라 불리는 사수문(四
獸紋)·사신문(四神紋)·단화문(團華紋) 등이 있다. 이들 거울의 배면 외구(背面外區)에는 문학적으로
표현된 명문(銘文)이 있으머, 그 안에 문제의 연호(年號)인 ‘仁壽’라는 글씨가 보여 수의 것임이 확
인되었다.
【고구려와의 관계】 수나라가 일어선 581년은 고구려의 평원왕, 신라의 진평왕, 백제의 위덕왕이 다스
리던 삼국시대의 말기로, 그 전까지 북주(北周) 및 진(陳)과 주로 관계를 맺어오던 삼국 중 고구려와
백제는 수나라가 수립된 그 해에 사신(使臣)을 보내어 왕의 책봉을 받았고, 진나라와 관계가 깊었던 신
라는 진나라가 수나라에 의해 멸망한 뒤에야 사신을 보내고 왕의 책봉을 받아, 수나라와 3국은 형식상
주종관계에 서게 되었다. 그러나 만주의 랴오허강[遼河]을 경계로 수나라와 국경을 상접한 고구려는,
589년 수나라가 남조(南朝) 최후의 왕조 진(陳)을 멸망시키고 중원(中原)을 통일하자, 그 세력의 동진
을 경계하여 재빨리 병사·군량 등을 증강하고 병기를 제조하는 등 가상적국(假想敵國)으로서 대하였
다. 평원왕에 이어 즉위한 영양왕은 한 걸음 더 나아가 598년(영양왕 9) 친히 말갈병(靺鞨兵) 1만여 기
(騎)를 거느리고 랴오허강 서쪽의 요서(遼西)지방에 쳐들어가 양국은 첫 충돌을 하게 되었다. 이에 수
의 문제(文帝)는 수륙군 30만을 이끌고 고구려 원정에 나섰으나, 육상부대는 도중에 홍수를 만난 데다
가 군량미의 수송이 여의치 않아 군사들은 굶주렸고 질병까지 유행하여 곤욕을 치렀다. 고구려의 평양
성을 향하여 항행하던 해상부대는 폭풍을 만나 큰 타격을 받자, 수나라 원정군은 고구려와 싸워보지도
못하고 회군(回軍)하였다. 그 후 양국 관계는 고구려가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요서를 공격한 데 대한
사과를 함으로써 표면상으로는 일단 정상을 회복하였으나, 수의 식자층에서는 고구려를 다시 정벌하자
는 여론이 비등하였다. 문제에 뒤이어 즉위한 양제는 부황(父皇) 때의 한(恨)이 남아 있는 데다, 고구
려가 돌궐(突厥)과 비밀히 내통하면서 조공(朝貢)조차 바치지 않자, “고구려왕이 친조(親朝)의 예를
하지 않으면 친히 군사를 이끌겠다”고 통보하였다. 이에 때맞추어 고구려의 남진(南進)에 시달려 온
백제와 신라는, 번갈아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고구려의 토벌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같은 위협이나
주변정세에도 고구려는 굴하지 않고 입조(入朝) 요구를 묵살, 거부하였다. 고구려의 태도에 화가 난 양
제는 원정을 결심하고 전쟁준비에 총력을 기울여, 612년(영양왕 23) 제1차 고구려 원정을 단행하게 되
었다. 이 당시의 수군(隋軍) 규모는 수군(水軍)을 제외한 육군만도 좌익 12군(軍), 우익 12군에 총수
113만 3800명, 군량운반자는 그 2배에 이르러, 출정 군사가 모두 탁군(郡:北京 부근)의 본진을 떠나는
데 40일이 걸릴 정도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인해전술에도 수군은 고구려군의 지략과 용맹에 고전하다
가 을지문덕의 살수대첩(薩水大捷)으로 섬멸되어 개전 4개월 만에 전군을 철수하였다. 수나라는 613·
614년 2차·3차의 고구려 정벌을 단행하였으나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수는, 고구려가 3차원정 때 제의
한 강화(講和)조건에 따라 고구려 왕의 입조(入朝)를 요구하였으나, 고구려 영양왕은 끝내 수나라에 가
지 않았다. 수는 고구려 정벌을 위해 무리하게 강행한 징발·사역 등으로 민심이 이반되어, 2차 원정
때 양현감(楊玄感)이 반란을 일으킨 것을 계기로 전국이 반란에 휩쓸려, 결국 고구려의 원정이 수왕조
멸망의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모처럼 중국의 통일왕조로 등장한 수는 3국에 정치적·문화적으로 영향
을 미칠 기회를 맞았으나, 그 후반기의 잦은 원정·반란 등으로 인한 국력 소모로 자체의 문화조차 뚜
렷이 형성하지 못하였다. 이렇다 할 문화적 교류도 없이 다만 승려들이 불법(佛法)을 구하기 위해 건너
간 데 그쳤으며, 간접적으로는 율령·관제(官制)·과거제도(科擧制度) 등 수에서 제정된 제도들이 당
(唐)·송(宋)을 거쳐 통일신라와 고려에 전래되었을 정도이다.
唐
수(隋)나라에 이은 중국의 왕조. 618년 이연(李淵)이 건국하여 907년 애제(哀帝) 때 후량(後梁) 주전충
(朱全忠)에게 멸망하기까지 290년간 20대의 황제에 의하여 통치되었다. 중국의 통일제국(統一帝國)으로
는 한(漢)나라에 이어 제2의 최성기(最盛期)를 이루어, 당에서 발달한 문물(文物) 및 정비된 제도는 한
국을 비롯하여 동(東)아시아 여러 나라에 많은 영향을 끼쳐 그 주변 민족이 정치·문화적으로 성장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특히 한국의 경우 삼국체제(三國體制)가 붕괴되고 정치세력 판도가 크게 바뀌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중기 안녹산(安祿山)의 난(亂) 이후 이민족(異民族)의 흥기(興起)
와 국내 지배체제의 모순이 드러나 중앙집권체제의 동요는 물론 사회 및 경제적으로도 불안이 가중되어
쇠퇴의 길을 밟았다.
【정치】 수나라 말기 내란이 한창이던 617년, 진양(晉陽:太原)에서 반란진압을 하고 있던 태원 방면
사령관 이연은 둘째아들 세민(世民) 등과 더불어 거병(擧兵)하여 장안(長安)을 점령하고, 618년 수(隋)
의 양제(煬帝)가 반란군의 우문화급(宇文化及)에게 살해되자 양제의 손자 공제(恭帝)를 협박하여 선위
(禪位)받아 즉위하고 국호를 당이라 하였다. 건국 초에는 각지에 군웅(群雄)이 할거하고 있었으나, 차
례로 이들을 평정하고 천하를 통일하였다. 여기에 이르기까지 최대의 공로자는 세민이었는데, 형이며
태자(太子)인 건성(建成)과 동생 원길(元吉)이 시기하자, 세민은 이들 형제를 죽이고 626년 제2대 황제
에 올랐다. 이를 ‘현무문(玄武門)의 난’이라 하며, 세민이 곧 태종(太宗)이다. 태종은 즉위하자 최대
의 외적(外敵)이던 돌궐(突厥)을 평정하였으며, 주변의 여러 종족도 조공(朝貢)하게 되어 국위(國威)를
크게 떨쳐서, 한(漢)나라를 능가하는 대제국(大帝國)이 되었다. 태종은 내치(內治)에도 힘써 치세 20여
년은 ‘정관(貞觀)의 치(治)’라고 하는 태평성대를 이루었다. 태종의 후광(後光)은 뒤를 이은 고종 때
까지 미쳤으나, 고종이 말년에 황후를 폐하고 태종의 궁인(宮人)이었던 무씨(武氏:則天武后)를 황후로
세움으로써 이른바 ‘여화(女禍)’의 길을 열게 되었다. 무후는 고종에 이어 즉위한 자기 아들인 중종
(中宗)과 예종(睿宗)을 폐하고 즉위하여 국호를 주(周)로 개칭[武周革命]하였으며,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제(女帝)로서, 재위 16년간은 악랄한 책략과 잔혹한 탄압의 공포정치가 계속되었다. 반대파의 쿠데타
로 황제에 복위한 중종은 국호를 당으로 복구시켰으나 황후 위씨[韋后] 또한 실권을 쥐고 중종을 독살
한 뒤, 권력을 휘두르는 등 무후시대의 정정(政情)이 재현되었다. 위씨 일파를 무력으로 무너뜨리고 예
종을 복위시켜 당조(唐朝)를 명실공히 정상적인 궤도에 올려놓은 자가 이융기(李隆基), 즉 현종(玄宗)
이다. 그는 정치를 쇄신하고 사회안정에 힘써서 ‘정관의 치세’에 비길 만한 ‘개원(開元)의 치세’를
열어 당의 최성기(最盛期)를 이루었다. 현종의 치세는 선천(先天) 1년, 개원 29년, 천보(天寶) 15년을
합쳐 45년간(712∼756)인데, 이 시기에 문화의 꽃이 만발하여 서울 장안(長安)은 명실공히 정치·문화
의 중심지로서 태평성대를 누렸다. 그러나 번영은 궁중이나 상류층의 전유물일 뿐, 그 이면에는 균전제
(均田制)의 모순이 격심해지고, 농민은 변경(邊境)으로 강제 출병(出兵)되고 중세(重稅)로 시달리는 등
현종 말기의 천보시대에는 당조 와해의 징조가 보이기 시작하였다. 게다가 오랜 통치에 권태를 느낀 현
종은 양귀비(楊貴妃)를 얻어 연유(宴遊)를 일삼고 양귀비의 일족인 양국충(楊國忠)을 재상(宰相)으로
삼아 국사를 맡겼는데, 755년 평로(平盧) 등 3지구의 절도사(節度使)를 겸하고 있던 안녹산(安祿山)이
양국충의 제거를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켜 뤄양[洛陽]에 이어 장안을 점령하였다. 현종은 쓰촨[四川]에
피란하고 그 도중에 양귀비는 살해되었다. 안녹산의 부장(部將) 사사명(史思明)에 이어진 이 반란은 9
년 동안 계속된 끝에 이민족(異民族)의 도움으로 겨우 그 예봉(銳鋒)을 꺾을 수 있었으나, 조정측에서
완전히 평정할 힘은 없었다. 이 반란으로 균전법을 기반으로 하였던 고대(古代) 중국사회는 몰락의 첫
발을 내디뎠으며, 반란 후 당조(唐朝)의 정치체제도 일변하였다. 반란에 가담한 부장들은 허베이[河
北]·산둥[山東]을 점거, 조정으로 하여금 절도사의 지위를 승인하게 하였다. 또한 반란 중에 조정에서
전국 곳곳에 절도사를 둠으로써 번진체제(藩鎭體制)가 전국에 미쳐 조정 자체가 하나의 번진으로 격하
되는 듯한 경향마저 띠게 되었다. 번진의 절도사란 몇 개의 군진(軍鎭)을 관할하는 지휘관인데, 현종
때 모병제(募兵制)가 실시되자 많은 병사를 마음대로 모집하여 강력한 세력을 가지게 되어 대종(代
宗)·덕종(德宗) 때는 이들의 횡포와 반란에 시달려 덕종은 조명(朝命)을 거역하는 허베이 제진(諸鎭)
의 토벌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헌종(憲宗)은 절도사의 권한을 축소함으로써 한동안 중앙집권(中
央集權)에 성공하였으나, 중앙집권의 강화책, 특히 재정강화는 일반민중에 가혹한 부담을 주어 숱한 유
민(流民)이 생겼다. 또한 조세의 중앙집중은 일반 농민뿐만 아니라 지주호족층(地主豪族層)에게도 고통
을 주고 번진병사의 대우를 악화시켜 절도사와 병사 간의 분쟁 및 지주·농민·유민을 주체로 한 반항
은 859년 구보(甫)의 난을 일으켰고, 868∼875년의 방훈(龐勛)의 난에 이어 875∼884년에는 황소(黃巢)
의 대란을 겪었다. 물론 이 반란도 실패로 끝났으나, 이 전란으로 강회(江淮)의 곡창지대가 황폐되어
국가재정은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다. 또한 중앙의 통제력도 약화되어 조정 내부는 환관파(宦官派)와 재
상파(宰相派)로 갈려져 각기 외부의 번진을 자파 세력으로 끌어들여 싸우던 중 재상파와 내응한 황소의
구장(舊將) 주온(朱溫:朱全忠)이 장안에 들어가 소종(昭宗)을 살해한 다음 애종(哀宗)을 폐위시키고,
907년 스스로 즉위하니 당은 이로써 20대, 약 290년 만에 멸망하였다.
【제도】 당나라는 수나라의 제도를 이어받아 과거의 제도를 집대성,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하였다. 중앙
관제로는 3성(省) 6부(部)를 두어 국정을 관장하였고, 지방은 10도(현종 때는 15도)로 나누어 그 밑에
주(州:郡으로도 개칭)·현(縣)을 두었다. 도는 행정구역이 아닌 순찰구역으로, 처음에는 장관을 두지
않았으나 후에 순찰사를 두어 지방의 감찰임무를 맡게 하였다. 또한 주에는 자사(刺使), 현에는 현령
(縣令)을 두어 다스리게 하였다. 일반민은 향(鄕:500家)·이(里:100家)·인보(隣保:5家) 제도에 따라
조직되어 현의 지배를 받았다. 이(里)의 책임자인 이정(里正)은 민호(民戶)의 가족 수와 토지를 호적에
올려서 토지의 환수, 부세(賦稅)의 징수 등의 사무를 맡아보았다. 일반민의 대부분은 이른바 균전농민
(均田農民)으로 나라에서 일정한 토지를 지급받아 직접 국가에 조용조(租庸調)를 바쳤다. 이 밖의 의무
로서 병역·잡요(雜)가 있었으며, 병사로 뽑힌 자는 병역기간 중 국도(國都)의 경비, 변경(邊境)의 방
위, 향리에서의 동계교련(冬季敎練)에 종사하였다. 이들은 그 지방의 절충부(折衝府)에 소속되어 있어
서 부병(府兵)이라 하였다. 관리를 임용하는 데는 고관의 자제에게 시험을 치르지 않고 선조의 관위(官
位)에 따라 임명하는 은음제(恩蔭制)와 학과시험에 의한 선거(選擧:科擧)로 하였다. 이러한 여러 제도
와 국가통치는 율령격식(律令格式)이라는 독특한 법체계에 의해서 시행되었다. 이 중 율은 금지법(禁止
法:刑法), 영은 행정법규(行政法規:命令法), 격은 증보개정법규(增補改正法規), 식은 시행세칙(施行細
則)이다. 그러나 율령제도도 후기에 와서는 무너지고, 농정(農政)의 기반을 이루었던 균전제도 역시 지
배층의 장원제(莊園制)에 의해 유명무실화하여 조용조제(租庸調制)에 대신해서 대토지의 사유(私有)를
인정하는 양세법(兩稅法)을 제정하였다. 국방의 근간을 이루던 부병제도 역시 현종 때 무너지기 시작하
여 이에 대신해서 실시한 병제는 절제사의 세력을 비대화해서 상대적으로 중앙집권을 약화시켰다.
【문화】 유학(儒學)에서는 공영달(孔穎達)이 태종의 명을 받아 고전에 관한 주석(註釋)을 정리·종합
해서 《오경정의(五經正義)》를 편찬하였다. 역사에 있어서도 《주서(周書)》 《북제서(北齊書)》 《양
서(梁書)》 《진서(陳書)》 《수서(隋書)》 《진서(晉書)》 및 《남북사(南北史)》와 같은 전대(前代)
의 왕조사가 편찬되었다. 중기에 이르러 유학의 독자성을 고양(高揚)하고 여기에 선종(禪宗)의 학설을
도입한 한유(韓愈)·이고(李)의 고문운동(古文運動)은 후대의 송학(宋學)을 앞지르는 선구적인 사상을
내포한 것이었다. 당대의 문학은 귀족문학으로서 시(詩)·문(文) 모두 현저한 발전을 이루었으며, 문학
사상(文學史上) 초당(初唐:국초에서 현종까지 약 100년간)·성당(盛唐:현종∼숙종 50년간)·중당(中唐:
代宗∼文宗 70년간)·만당(晩唐:문종∼唐末 80년간)의 4기로 나누고 있다. 문장(文章)에 있어서는 중당
기에 한유·유종원(柳宗元)이 출현, 고문(古文)을 부흥하여 종전에 형식미(形式美)만을 추구하였던 변
려체(儷體)를 배제하자는 고문운동이 일어났으며, 《유선굴(遊仙窟)》 《회진기(會眞記)》 《이혼기(離
魂記)》 《이왜전(李娃傳)》 등 문어체소설(文語體小說)이 나타나 문장의 묘미를 보여 주었다. 특히 관
리를 임용하는 선거에서 작시(作詩)를 중요시하였기 때문에 시는 공전절후(空前絶後)의 성황을 이루어
오언(五言) 및 칠언(七言)의 율시(律詩)와 절구(絶句)의 형식이 완성되어 성당기에 이백(李白)·두보
(杜甫)의 2대 시성(詩聖)을 비롯하여 시화일치(詩畵一致)의 묘미를 보여준 왕유(王維), 전원과 자연을
읊은 맹호연(孟浩然), 정로이별(征虜離別)을 읊은 고적(高適)·왕창령(王昌齡) 등이 나오고, 중당기에
는 백거이(白居易)·원진(元), 만당기에는 두목(杜牧)·이상온(李商穩)·온정균(溫庭筠)이 나왔다. 산
문 분야에서는 수대(隋代)의 괴기전설(怪奇傳說)을 원류로 하는 전기소설(傳奇小說)이 많이 나왔다. 음
악분야에서는 한(漢)나라 이래의 아악(雅樂:궁중음악)·속악(俗樂:민간음악) 및 호악(胡樂:西域音樂)이
정착되고 특히 호악이 번성하였으나 말기에 가서는 서역과의 교류가 끊기면서 호악도 쇠퇴하였다. 또한
음악연주도 궁중에서 민간으로 옮겨가는 경향이 있어 신속악조(新俗樂調)라고 하는 음악이 흥성하였다.
서화(書畵)·조각(彫刻) 등의 미술에 있어서도 수대의 전통을 이어 발전시켰으나, 중기 이후 크게 변모
한 면도 있다. 종교에서는 특히 불교가 발전하여 수 이래의 천태종(天台宗)과 화엄종(華嚴宗)이 종래의
여러 교의(敎義)를 집대성하고, 현장(玄)은 인도에서 가지고 온 방대한 경전(經典)의 번역사업을 일으
켜 법상종(法相宗)을 확립하였으며, 당과 인도 사이에 승려의 교류도 활발하였다. 불교교리의 연구가
진전됨에 따라 천태·화엄·법상 외에 지론(地論)·섭론(攝論)·구사(俱舍)·성실(成實)·삼론(三論)·
진언(眞言)·삼계(三階) 등 다수의 종파가 분립하여 제실(帝室)·귀족의 호응을 얻어 불교는 전성기를
맞았다. 이 밖에 정토교(淨土敎)와 선종(禪宗)이 개종(開宗)되어, 특히 선종은 말기에 다른 종파가 모
두 쇠퇴된 뒤에도 홀로 번영하여 중국불교로 완성되었고 송학(宋學)에도 다대한 영향을 주었다. 한편
도교(道敎)는 노자(老子)의 성(姓)이 제실과 같은 이씨(李氏)였던 관계로 제실의 호응을 크게 얻어 현
종은 《도덕경(道德經)》을 집집마다 비치하게 할 정도였다. 이 밖에 동서간의 교통이 발달함에 따라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敎)·마니교(摩尼敎), 아랍의 이슬람교, 그리스도교의 일파인 경교(景敎:네스
토리우스派) 등의 외래종교도 들어와 이들의 사원(寺院)이 여러 곳에 세워졌다.
【당나라와 한반도와의 관계】 당나라가 개국한 618년의 한반도는 삼국시대로 고구려의 영류왕(榮留王)
1년, 신라의 진평왕(眞平王) 40년, 백제 무왕(武王) 19년에 해당되며, 당나라가 멸망한 907년은 신라·
후백제·마진(摩震)·발해(渤海)가 한반도 및 만주 일부지역에서 각축을 벌이던 때이다. 당나라 건국 3
년 후인 621년 신라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고 당나라에서도 신라에 사신을 보내와 삼국 중 가장 먼저
국교를 튼 신라는 당나라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으나, 국경을 접한 고구려와는 사이가 나빠 결국 당
나라 고종 때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에 의해 백제와 더불어 멸망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보다 앞서 고
구려는 628년 처음으로 당에 사신을 파견하여 봉역도(封域圖:국경의 경계도)를 보내는 한편, 당나라를
경계하여 631년(영류왕 14)부터 16년간에 걸쳐 동북은 부여성(夫餘城:農安)에서 서남은 발해만에 이르
는 국경지대에 1,000여 리의 장성(長城)을 쌓았다. 백제에서는 651년 사신을 보내고, 당나라에서는 새
서(璽書)를 주어 신라와 화해하게 했다. 당나라의 태종은 일찍이 고구려를 도모하려는 야심을 품었으나
수나라가 패한 사실을 감안하여 신중을 기하고 있었다. 642년 백제가 신라를 쳐서 대야성(大耶城:陝川)
등 40여 성을 빼앗고, 고구려와 백제가 신라의 당항성(黨項城:南陽)을 빼앗아 신라의 대당(對唐) 교통
로를 끊으려 하자 신라는 당나라에 구원을 청하였다. 당은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어 신라를 치지 말도록
권유하였으나, 연개소문이 두 번째 온 당나라 사신을 굴에 가둠으로써 두 나라의 숙명적 대립은 시작되
었다. 645년 이래 안시성(安市城)의 혈전(血戰)을 비롯하여 여러 차례 크고 작은 전쟁을 치르고, 660년
백제가 멸망한 뒤, 668년 고구려도 신라와 당에 의해 멸망하였다. 이로써 삼국의 정립시대(鼎立時代)는
막을 내리고 당나라는 백제의 고지(故地)에 웅진(熊津) 등 5도독부(都督府)를 두었으며, 고구려의 평양
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部)를 두고 전 영토를 9도독부, 42주(州), 100현으로 나누었다. 669년 고구려민
2만 8200호(戶)를 인구가 희소한 중국의 내지(內地)로 옮기는 이민정책을 써서 고구려 유민의 실질적
예속화를 꾀하였다. 이에 앞서 당나라는 신라에도 계림도독부(鷄林都督府)를 설치, 문무왕(文武王)을
계림도독으로 삼아 한반도의 완전귀속을 꾀하였다. 이로부터 당나라와 신라는 고구려·백제의 고토(故
土)에서 영토 쟁탈전을 벌여 당나라는 677년(문무왕 17) 안동도호부를 신성(新城:만주 撫順 부근)으로
옮긴 후 양국관계는 거의 정상을 회복하였으며, 699년 고구려 유민 대조영(大祚榮)이 고구려의 고토에
진(震:후의 발해)을 세움으로써 당나라와 한반도의 관계는 삼국시대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갔다. 당과
발해는 초기에 여러 차례의 충돌이 있었으나, 2대 무왕(武王) 때부터는 발해에서 태도를 바꾸어 당나라
의 관제(官制)와 문화 등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신라는 649년 처음으로 당의 의관(衣冠)을 사용하
고, 650년 당의 연호(年號)를 사용함으로써 당의 문화 및 제도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이렇듯 처음
부터 시작된 당제(唐制)의 채용은 통일 후에 더욱 성행하여 경덕왕 때에 이르러서는 여러 제도가 모두
갖추어졌다. 또한 왕권이 강화됨에 따라 당나라의 율령격식을 많이 섭취할 수 있었다. 한반도에서 최초
의 중세적 전제왕국(專制王國)을 확립한 고려도 선진 전제왕국인 당나라의 제도를 모방하여 관제를 정
비하였고 이와 같은 고려의 제도는 다음의 조선왕조에 다시 계승되었다. 교육에 있어서도 삼국이 귀족
의 자제를 당나라 최고학부인 국학(國學:國子監)에 유학시켜 학문을 닦게 하였는데 신라에서는 이를 본
떠 최고교육기관으로서 국학을 두었으며, 고려도 이를 계승하여 국자감(國子監:후에 국학·성균관 등으
로 개칭)을 두는 등 학문 전수(傳授)와 고급관리 양성에 있어서도 당나라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五代十國
중국에서 당(唐)나라가 멸망한 907년부터, 960년에 나라를 세운 송(宋)이 전중국을 통일하게 되는 979
년까지의 약 70년에 걸쳐 흥망한 여러 나라와 그 시대. 그 중 5대는 화북(華北)의 중심지대를 지배하고
정통왕조(正統王朝)의 계열로 볼 수 있는 양(梁:後梁)·당(唐:後唐)·진(晉:後晉)·한(漢:後漢)·주
(周:後周)의 5왕조인데, 사가(史家)들이 그 이전에 존재하였던 같은 이름의 왕조와 구별하기 위해 앞에
후(後)자를 붙였다. 10국은 화남(華南)과 기타 주변 각 지방에서 흥망한 지방 정권으로, 오(吳)·남당
(南唐:江西·安徽·福建)·오월(吳越:浙江)·민(:福建, 뒤에 南唐에 병합)·형남(荊南, 또는 南平)·초
(楚:湖南)·남한(南漢:廣東·廣西)·전촉(前蜀)·후촉(後蜀:四川)·북한(北漢:山西)을 말한다. 이 밖에
도 단기간 독립을 유지하고 있던 연(燕:河北)·기(岐:鳳州)·주행봉(周行逢:建州) 정권 등이 있었다.
당나라 말기에 이르러 지방의 절도사(節度使:地方軍司令官)들은 군사·민사·재정 등 3권을 장악하여
군벌화(軍閥化)하고, 특히 875년의 왕선지(王仙芝)·황소(黃巢)의 난에 활약한 유적(流賊)이나 이민족
용병(傭兵) 출신자들은 자립해서 절도사를 칭하여 이들이 병탄(倂呑)을 되풀이한 결과 대체로 11개 세
력으로 갈라져, 후량(後梁)이 당의 제위(帝位)를 탈취한 것을 계기로 해서 각각 왕호(王號) 또는 제위
를 칭하게 되었다. 이들 나라의 지배체제는 절도사의 막부(幕府)를 확충한 형태의 것으로서, 그 지배자
들은 다투어 직할군단인 아군(牙軍)을 확대하고, 그 밖에도 세습화(世襲化)한 직업군인들의 반란을 방
지하기 위해 일찍이 양성해온 친위군(親衛軍) 조직을 두었으며, 행정의 모든 부문에도 심복의 무장(武
將)들을 앉혀 무인정치(武人政治)의 양상을 나타내었다. 이들 정권은 중원(中原)의 5대를 비롯해 모든
왕조들이 군인의 쿠데타로 성립된 것이었고, 하층계급 출신자가 권력의 정상에 뛰어오른 하극상(下剋
上)의 양상을 띤 것이었다. 당나라 말기의 극한상태에 다다른 사회적 혼란으로 생산체제는 일시 붕괴되
었으나, 각국이 부국강병(富國强兵)을 다투었기 때문에 점차 회복되어갔다. 5대에, 최초로 등장한 후량
(後梁)은 옛 당나라 귀족 세력의 숙청에 힘을 기울여, 이 때문에 중원에서 탈출한 귀족들이 촉(蜀)·남
당(南唐) 등에 당문화를 들여오게 되었다. 그 뒤 처음에는 진왕(晉王)이라 칭하였던 이씨(李氏)가 923
년 후당(後唐)이라 개칭하고 후량을 멸망시켜 화북을 거의 통일하였으며, 제도상으로도 새로운 통일 기
운이 태동하기 시작하였다. 후당은 당나라 때의 3성 6부(三省六部)를 중심으로 한 행정체계를 대신해서
민정을 관장하는 재상(宰相:同平章事)과 군정을 관장하는 추밀사(樞密使), 재정을 관장하는 삼사사(三
司使)가 중앙정부의 중심이 되고, 여기에 금군(禁軍:近衛兵) 장관인 시위친군도지휘사(侍衛親軍都指揮
使)를 더해서 정권의 4대핵이 되게 하였다. 한편 화남(華南)에서는 오(吳)를 무너뜨리고 뒤를 이은 남
당(南唐)을 중심으로 통일을 이루려는 움직임을 보였고 형남(荊南)·오월(吳越) 등이 화남·화북의 완
충지대적 존재로서 중개무역으로 나라를 보존하여 나갔다. 남한(南漢)은 남해무역(南海貿易)에 의존하
였으나 다른 나라들은 특산물을 개발(吳越의 窯業, 四川의 製紙 등)하여 지역분업(地域分業)을 배경으
로 해서 진(鎭)·시(市)·초시(草市) 등 소도시의 융성을 보게 되어 이는 뒤에 올 송(宋)의 재통일 아
래서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룩할 바탕이 되었다. 이 당시 농촌의 양세(兩稅)에 대해서 도시의 옥세(屋
稅)·지세(地稅)를 늘인 것도 이와 같은 경제발전에 대응한 것이었다. 그 사이 북방에서 발해(渤海)를
멸망시키고(923) 급격하게 강대해진 거란(契丹)은 후당에 반역한 후진(後晉)의 건국을 도와준 대가로
연운(燕雲) 16주(州)를 할양받고, 후진까지 멸망시켜 하북(河北)을 점령해서 폭정(暴政)을 하였다. 거
란에 대한 민족적 단결의 필요성과 함께 군사력·재정규모·영토 등 모든 면에서 분할되어 소규모화한
절도사는 중앙 의존적인 존재가 되고, 중앙정부에서 파견하는 관리 및 군대가 점차 지방에 침투하게 되
어 중앙집권적인 문신관료제도(文臣官僚制度)가 완성되어가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럴 즈음 후주(後
周)의 명군(明君)이라 일컬었던 세종(世宗)에 의해 통일의 기초가 거의 굳혀졌고, 마지막으로 후주의
근위군(近衛軍) 총사령관이었던 조광윤(趙匡胤)이 일어나 송(宋)을 세우고 안일(安逸) 속에 빠져 있던
남당(南唐)을 비롯한 여러 나라를 병합해서 통일을 완성하였다. 문화적으로 이 시대에는 촉(蜀)의 인쇄
술, 문학에서의 사(詞), 회화(繪畵)에서의 수묵화(水墨畵) 등 송문화의 기초가 이루어졌다.
遼
중국의 왕조(916~1125). 정복왕조의 하나이다. 창시자는 동호계(東胡系) 유목민인 거란족의 야율아보기
(耶律阿保機)이다. 거란족은 4세기 이후 네이멍구자치구[內蒙古自治區] 시라무렌강(江) 유역에서 유목
생활을 하다가 6~9세기경, 수(隋)·당(唐)의 영향을 받아 서서히 발전하였는데, 9세기 말 당이 쇠약해
진 틈을 타서 점차 발흥(勃興)하였다. 질라부(迭刺部)의 실력자 가문에서 태어난 야율아보기는 무공을
세워 기반을 구축하고 이주시킨 한인(韓人)의 협력을 얻어 거란제부(契丹諸部)의 통합에 성공하여, 군
장(君長)이 되었다가 916년에 즉위하여 중국식으로 황제라 칭하고 본거지였던 상경임황부(上京臨潢府:
遼寧省 巴林左旗)에 도읍을 정하였다. 그가 곧 요의 태조(太祖)이다. 태조시대에 서쪽으로는 탕구트·
위구르 등 제부족을 제압하여, 외몽골에서 동투르키스탄에 이르는 지역을 확보하였고, 동쪽으로는 발해
(渤海)를 멸망시켜 만주지역 전역을 장악하였다. 제2대 태종(太宗)은 중국 경략에 힘써, 후당(後唐)의
장군 석경당(石敬d)을 도와 후진(後晉)을 세우게 하였고, 그 보상으로 만리장성 이남의 연운16주(燕雲
十六州)를 할양받아 국호를 요라 하였다(946). 태종은 만리장성 이남으로 진출하여 후진을 멸망시키고,
대량(大梁:河南省 開封)으로 진출하였으나 한지(漢地) 지배에 실패하고 철수하였다. 제3대 세종(世宗),
제4대 목종(穆宗), 제5대 경종(景宗) 때에는 제위 계승을 둘러싸고 내분이 계속되어 남방진출은 어려웠
으나, 제6대 성종(聖宗), 제7대 흥종(興宗), 제8대 도종(道宗)의 3대 약 100년간의 전성기를 맞이하였
다. 특히 성종 때 가장 강성해져서 성종 스스로 군대를 이끌고 송(宋)을 공격하여 1004년 유리한 조건
으로 송과 화의를 맺었다(淵의 盟約). 이후 요는 송으로부터 획득한 세폐(歲幣)로 재정이 풍요해졌고,
송과의 무역에 의해 경제·문화상 많은 발전을 보게 되었다. 한편 동만주의 여진(女眞), 닝샤[寧夏] 지
역의 탕구트(후의 西夏) 등을 복속시켜, 그 세력은 중앙아시아로부터 페르시아 방면으로까지 미쳤다.
흥종 때에는 송과 서하와의 분쟁을 틈타 조약을 유리하게 개정하는 등 탁월한 솜씨를 보였으나, 성종이
국력 충실을 꾀하여 중국 체제를 많이 받아들인 결과, 국수적인 보수파(保守派)와 혁신파(革新派) 사이
에 마찰이 일어나, 흥종·도종 때에는 양파의 파쟁과 종실(宗室) 내부의 세력쟁탈이 결부되어 때때로
반란이 일어났다. 이 사이에 동부만주에서는 여진족의 완옌부[完顔部]가 점차 강대해져, 1115년 그 추
장 아구다[阿骨打]가 독립하여 제위에 올라(太宗) 국호를 금(金)이라 하였다. 이에 대하여 요의 토벌군
은 번번히 패퇴를 거듭하였으므로 요는 금과의 화친을 고려하여 사신을 파견하였다. 이에 대하여 금은
일찍부터 연운 16주 회복을 꾀한 송의 요청에 따라 대요협공조약(對遼挾攻條約)을 맺었으므로 요는 갑
자기 곤경에 놓이게 되었다. 이에 마지막 황제 천조제(天祚帝)는 연경(燕京:北京)과 다퉁[大同], 그리
고 서쪽의 협산(夾山:內蒙古 自治區)으로 도망가 금군의 추격을 피했으나, 25년 여도곡(余睹谷:山西省
朔縣下)에서 사로잡혀, 요는 멸망하였다. 이때 제실(帝室)의 일족이었던 야율대석(耶律大石)은 서쪽으
로 망명하여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서요(西遼)를 건국하였다.
【사회·경제】 요의 지배하에는 잡다한 민족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들은 지배민족인 거란 및 그 근
친관계인 해(奚) 등의 유목민과, 한인(韓人) 및 발해인(渤海人) 등의 농경민으로 대별된다. 유목민에
대해서는 부족제로써, 농경민에 대해서는 중국과 같이 주현제(州縣制)로써 통치하였다. 특히 요의 본거
지인 동(東)몽골에서는 당초부터 이주시켰던 한인을 위하여 주현을 만들어 이에 편입시키고 성곽을 세
워 거주시켰기 때문에 농경민과 유목민과의 거주지역이 혼합되었다. 이와 같이 국민을 그 생활양식에
따라서 둘로 나누었던 것이 요나라 사회의 특징이었다. 법률상으로 당(唐)의 법률을 계승하면서도 거란
고유의 법률을 보존한 것도, 관제(官制)에 있어서 북면·남면의 2중체제를 간직한 것도 모두 이 때문이
다. 농경민의 민정(民政)을 관장하기 위하여 남면관(南面官:최고관청은 南樞密院)을 두었으며, 유목민
의 군(軍)·민(民) 양정(兩政)은 이것을 북면관(北面官:최고관청은 北樞密院)에게 관할하도록 하였다.
남(南)추밀원에는 군정(軍政)을 맡기지 않고, 북(北)추밀원이 이를 통할하도록 하였고, 그 장관에는 원
칙적으로 거란인을 임명하였다. 이 2중체제로 말미암아 유목민이 농경민에 의하여 한화(漢化)되는 정도
는 극소수였으나, 양자의 융합은 잘 진척되지 않아, 그 대립 마찰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따라서 요의
경제에는 유목 생산적 경제와 농경 생산적 경제가 병존하였으나, 점차로 농경적 생산에 중점이 놓여지
게 되었다. 상업 무역은 전연(淵)의 맹약(盟約) 이후 현저히 발달하여, 국경의 몇 개소에 각장(場:다른
민족과의 교역을 위하여 국경에 설치된 관청)이 개설되어 교역이 활발하였고 국내에서도 유통경제가 발
달하였다.
【언어·종교·문화】 거란족의 언어는 퉁구스어(語) 등이 섞인 몽골어계(語系)의 언어로 알려져 있다.
이것을 문자로 표현하기 위하여 920년에 태조가 거란문자의 대자(大字)를 만들었으며, 이어 그 동생인
야율질라(耶律迭剌)가 거란 소자(小字)를 만들었다고 전한다. 거란 문자의 제작은 한(漢)문화에 대한
대항의식을 나타내는 민족적 자각의 소산(所産)이며, 인근 제민족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거란의 고
유한 종교는 샤머니즘이지만 국초(國初)에 농경민을 통치하기 위한 필요에서 불교를 받아들였던 바 점
차로 유행하였다. 한인과 발해인에서는 물론, 거란인 등의 유목민 사이에서도 불교가 흥행하여 성종·
흥종·도종의 3대에는 최성기에 달하였다. 요왕실의 불교열(佛敎熱)은 매우 왕성하였는데 사탑(寺塔)의
조영(造營), 기타 방대한 국비(國費)가 소비됨으로써 이것이 국력쇠퇴의 한 요인이 되었다.
宋
중국 역사상 당(唐)·오대십국(五代十國)에 이어지는 왕조(960∼1277). 처음 카이펑[開封]에 도읍하였
으나 1126년 정강(靖康)의 변(變)으로 강남(江南)으로 옮겨 임안(臨安:杭州)에 천도하였다. 카이펑시대
를 북송(北宋), 임안시대를 남송(南宋)이라 한다.
【개관】 오대(五代) 유일의 명군인 후주(後周)의 세종(世宗)이 죽은 뒤 그의 부장(部將)인 조광윤(趙
匡胤:太祖)이 근위병(近衛兵)의 추대를 받고 천자의 자리에 올라 960년 송나라를 건국하였다. 그는 오
대 부장들의 횡포에 혐오를 느껴 제위(帝位)에 오르자 군인을 억압하고 문관을 우대하여 문치주의를 채
택하였다. 한편, 모든 권한을 중앙정부로 집중시켜 독재권 확립을 도모하고 다음의 태종도 이 정책을
답습하여 송나라의 기초는 이 2대 왕 사이에 이루어져 일단은 독재정치기구가 확립되었다. 이 독재제도
는 그 후 청나라 때까지 이어졌다. 독재정치의 기반은 강력한 군대와 치밀한 관료제에 의하여 유지되는
것이나, 당초 군인을 억압한 결과 군대가 약화되었으므로 그 수를 늘려 독재권을 지속시키려 하였다.
군사비가 재정의 80 %를 차지하게 되어 종래의 양세(兩稅) 수입으로는 감당할 수 없어 차(茶)·소금·
술·백반 등 일용필수품의 전매수입으로 방대한 군사비를 염출하려 하였다. 이 신경제정책이 안으로는
밀매자(密賣者)를 자극하여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반란의 온상을 형성케 하였다. 밖으로는 외부민족을
자극하여 민족의식에 눈뜨게 하고 강력한 국가를 형성하여 송나라에 대항케 하는 결과가 되었다. 송나
라 300년의 역사는 이 두 가지 문제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태조시대에 강남(江南)·쓰촨[四川]에 할거
하던 여러 나라는 멸망하여 천하가 거의 평정되었으나 산시[山西]의 북한(北漢)은 거란(契丹)의 원조가
있어 그의 평정은 태종시대로 승계되었다. 때마침 거란의 북한에 대한 태도가 냉각된 것을 안 태종은
일거에 북한을 멸망시키고 그 여세를 몰아 후진(後晉) 때 거란에 넘겨준 연운(燕雲) 16주를 회복하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다음 진종(眞宗) 때, 거란이 대거 침입해 왔으나, 전연(淵)에서 맹약을 맺고 은
(銀)·비단 등의 세폐(歲幣)를 주어 화목하였으므로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 때문에 평화가 계속되
어 경제계는 호경기를 맞이했고, 국가 재정은 호전하였다. 진종은 전연에서의 굴욕적인 외교를 거짓 꾸
미고, 한편으로는 천자의 위엄을 과시하고자 풍부한 재정을 이용하여 일찍이 시황제나 한나라 무제가
행한 산둥[山東]의 명산인 타이산[泰山]에 제례를 지내 막대한 경비를 소모하였으나 그래도 재력은 아
직 여유를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다음 인종(仁宗) 때는 서하(西夏)와 수년간에 걸쳐 전쟁을 치렀다.
서하는 송나라의 소금 전매제의 확립으로 자국산 청백염(靑白鹽)의 수출이 금지되어 이미 태종 때부터
송나라에 반항하다가 인종 때 독립을 선언하고 대대적으로 침입하였다. 이 전쟁으로 서하도 큰 타격을
입었으나 송도 전쟁 뒤 경제공황에 빠져 재정은 적자에 허덕이고 실업자가 속출하여, 경제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동남지방에도 반란이 일어 바야흐로 위기에 직면하였다. 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하여 인종의
뒤를 이은 신종(神宗) 때는 왕안석(王安石)을 등용하여 신법(新法)을 실시하였다. 한편 서하와의 전쟁
은 농민의 중산계급을 몰락시켜 부호와 빈민이 대립하는 근세적 사회발전에 박차를 가하였다. 왕안석의
신법의 목적은 국가재정의 재건과 함께 빈농이나 영세상공업자를 구제하여 중산계급을 육성하는 데 있
었다. 신법은 왕안석의 재임중 상당한 성과를 올려 최소한 국가재정은 적자에서 흑자로 전환되고 송나
라의 위기는 해소되었다. 그런데 이 신법은 지주·관료·호상(豪商)·종친 등 기득권을 가진 계급의 이
익을 침해하였으므로 그들 계급의 강력한 반대를 받았다. 여기에서 신·구 양당의 분쟁이 발생하였고,
신종이 죽자 구법당(舊法黨)의 사마 광(司馬光) 등이 등용되어 신법은 폐기되고 인종시대의 구법으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구법당에게는 뚜렷한 정책방향이 없어 정치는 혼란에 빠지고, 신종의 아들 철종(哲
宗)이 성장하여 친정(親政)을 행하게 되자 구법당을 물리치고 신법당 관료를 등용하였다. 다음 휘종(徽
宗) 때, 중도정치를 행하고자 한때 구법당의 관리를 함께 등용한 일도 있으나 결국 북송 말기까지 신법
당이 정국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북송 말의 신법당 관리는 구법당 관리와 별로 다를 것이 없어 당쟁이
끊이지 않다가 마침내 만주에서 일어난 금나라(여진족)에 의하여 1127년 멸망하였다(靖康의 變). 남송
시대에는 신법당에 의하여 폐출되었던 철종의 후비(后妃) 맹씨(孟氏)가 고종(高宗)의 즉위를 인정하였
던 관계로 구법당계의 관리가 많이 등용되었다. 남송이 강남 땅으로 쫓기자 정치가·군인·학자 사이에
는 주전론(主戰論)이 강하였으나 문약한 송인(宋人)은 도저히 여진족에게 당할 수가 없었다. 싸울 때마
다 패하고 군사비는 늘어나 백성은 중세(重稅)에 허덕이고 반란이 그치지 않았다. 그리하여 고종 때,
재상(宰相) 진회(秦檜)는 악비(岳飛) 등 군벌을 누르고 금나라와 화의하였으나 금나라에 정변이 일어나
화평은 영속되지 못하였다. 두 나라의 화평은 자주 깨져, 몇 번이나 평화조약이 체결되었고, 남송 사회
는 항상 전시상태에 놓여 있어 군비를 마련하기 위한 지폐가 남발되었다. 이 때문에 물가는 앙등하고
무거운 세금과 함께 백성은 도탄에 빠지고 더구나 북송시대에는 서방에서 유입되던 은(銀)이 남송시대
에는 거꾸로 서방으로 유출되어 자금의 결핍으로 산업은 위축·침체되고 실업자가 증대하여 여러 곳에
서 반란이 일어났다. 한편 원풍(元豊)의 관제개혁(官制改革:1078∼85)으로 재상의 권한이 강화되어 남
송시대에는 진회·한탁주(韓5胄)·사미원(史彌遠)·가사도(賈似道) 등이 전권(專權)을 휘둘렀고, 이에
반하여 천자의 독재권은 형식화되어 통제력을 상실함으로써 관기(官紀)는 문란해졌다. 정치·경제·사
회 등 모든 것이 붕괴하려고 할 때 몽골군이 침입하였으므로 송나라는 마침내 그 무력 앞에 멸망하였
다.
【관제】 지금의 내각에 해당하는 중서(中書)에는 재상인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와 부재
상인 참지정사(參知政事) 수명이 있어 이들의 권한은 거의 같았으나 다만 직함만이 약간 아래일 뿐이
다. 또한 군사에는 추밀원(樞密院)이 있어 통수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병권(兵權)에는 통수권과 지휘권
이 있어 천자만이 이것을 통할하고 군사령관은 마음대로 군대를 움직일 수 없었다. 다만 추밀원을 통하
여 천자의 명령이 군사령관에게 전달되면 비로소 군대를 움직일 수 있었다. 추밀원에는 추밀사(樞密
使)·추밀부사 등이 있었고, 중서와 추밀원은 양부(兩府) 또는 2부(二府)라 불러 국정을 논하는 최고기
관이었다. 정무는 이들 수명의 합의에 의하여 행하여지고 천자는 최후의 결재를 하였다. 송대에는 재정
을 가장 중요시하였으므로 삼사(三司:재무부)의 권한은 컸고, 그 장관인 삼사사(三司使)는 천자에 직속
되어 있었다. 또한 송대 관제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특수 감찰기관의 발달이었다. 태조 때는 무덕사
(武德司)가 있어 관리나 백성을 감시하였으나 태종은 이것을 황성사(皇城司)로 고쳐 확장·정비하고 그
간부에는 외척(外戚)이나 환관(宦官) 등 심복 몇 명을 임명하고 그 밑에 수천 명의 밀정을 두어 수도
(首都)뿐만 아니라 전국으로 파견하여 관료의 행동을 감시시켰으므로 독재권이 신장(伸張)되었다. 지방
행정구역인 각 노(路)에는 감사(監司)를 두고 후에는 따로 제거상평사(提擧常平司)를 설치하여 상호 감
시하게 함으로써 권력의 집중을 방지하고, 주(州)에는 지주(知州:도지사)를 두는 한편 그 밑에 통판(通
判)을 두어 지주의 권한을 제한시켰다. 이렇게 하여 어떤 특정인에게 권한이 집중되는 것을 막고 모든
권한은 오로지 천자 한 사람에게로 집중시키는 조직이었다. 다만 이 같은 제도하에서는 천자가 모든 정
무에 관여하여 중요한 정무와 일반 정무와의 구별이 어려웠으므로 신종의 원풍(元豊) 연간에 당(唐)의
육전(六典)을 본떠 관제의 개혁을 단행하였다.
【사회와 경제】 오대(五代) 각국은 군비를 확장할 필요에서 재정의 기초를 굳히고자 산업을 장려하였
다. 이 때문에 각지에 특산물이 대량으로 생산되고 그 질도 향상됨으로써 자급자족하던 장원시대(莊園
時代)는 지나고 상품경제시대가 도래하였다. 이에 따라 상인의 수도 급속히 증가하였으나 오대 각국은
서로 분열되어 관세(關稅)의 장벽을 설치하고 있어 상품 유통에는 커다란 장애 요인이 되었다. 상인들
이 판로를 확대하려면 불가불 각국의 국경을 제거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천하를 통일하려는
독재군주와 상인과는 그 이해(利害)가 완전히 일치하였다. 상인은 독재군주의 보호 아래 더욱 더 발전
하고 독재군주는 상인에 의하여 그 재정적 기초를 굳혔다. 송대에 상세(商稅)가 지세(地稅)와 백중하였
던 사실은 이것을 단적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위를 거쳐 송의 통일이 이루어지고 평화가 도래
하자 모든 산업은 안정된 판로를 개척하여 급속히 발전하였다. 산업발달에 더욱 박차를 가한 것은 외국
무역의 번영이었다. 서쪽으로는 육지를 통하여 위구르인(人)이, 남해에서는 아랍인이, 또한 동쪽에서는
한국과 일본인이 비단·도자기, 기타 물자를 구하러 왔다. 그들은 금·은, 특히 다량의 은을 중국에 가
져왔다. 그것이 산업자금으로 투자되어 산업을 더욱 발전시켰다. 그 때문에 노동력의 수요가 갑자기 늘
어 이제까지 도둑의 무리에 가담하여 비밀결사에 투신, 사회불안을 조장하던 실업자들에게 직장이 주어
졌으며 호경기의 계속에 따라 국가의 세입도 크게 늘어 흑자의 건전재정이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북송
시대의 근세적 문화는 이러한 사회를 배경으로 탄생한 것이었다. 송의 산업이 발달하여 생산력이 증대
한 요인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그 하나는 분업(分業)의 발달이다. 지역적인 분업뿐만 아니라 생산과정
에서도 분업이 이루어져, 기업이 대규모로 되는 동시에 전문화하여 능률이 오르게 되었다. 둘째 요인으
로는 과학적 기술의 발달이었다. 그 구체적인 실례로서 화력혁명(火力革命)이 있다. 즉 석탄사용의 보
급에 따라 동(銅)·철 등의 제련 기술이 발달하여 다량의 동·철이 생산되었다. 동의 생산 증가는 동전
의 대량 주조를 가능케 하여 상업의 발전을 촉진시켰다. 철의 생산 증대는 병기의 발달을 가져와 국방
에 크게 기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여러 종류의 농기구 제조는 농산물의 생산력 증대에도 박차를 가하였
다. 이와 같은 화력혁명은 생산력 증대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도자기의 발달에도 크게
영향을 끼쳤다.
【문화】 송나라의 문화는 흔히 서양의 르네상스 문화와 비교되기도 하는데, 복고적(復古的)인 성격이
송대문화의 한 특징을 이루는 까닭이다. 예를 들어 문학, 특히 산문(散文)에 있어서 송나라는 하나의
뚜렷한 시대적 성격을 나타내고 있다. 당나라 말기부터 한나라의 고문(古文)으로 돌아가자는 이른바 고
문부흥운동이 고개를 들었으나 그 세력은 아직 미미하였다. 그러나 북송 중기부터 구양 수(歐陽修) 등
이 고문부흥운동을 다시 제창하면서 이 운동은 사대부들의 동조를 얻게 되고 마침내 문단의 큰 주류를
형성하게 되었다. 또한 송나라의 유학(儒學)은 주자학(朱子學)으로 대표되는데, 이것 역시 하나의 사상
부흥운동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이때까지의 유학은 훈고학(訓學)이 주류를 이루어 경전(經典)의 자구(字
句) 해석에만 천착하는 학문이었다. 그로 말미암아 유교는 정작 민중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고, 오히려
불교보다 열세에 놓인 느낌마저 있었다. 그와 같이 민중과 유리되었던 유교가 송대에 이르러서는 불교
의 자극을 받고 고대의 원시유교(原始儒敎)로 되돌아가 성현(聖賢)의 정신을 올바로 파악하려는 새로운
기운이 싹텄다. 그리고 이것이 곧, 주자학으로 열매를 맺게 되었다. 복고풍조는 각 분야에서 다양하게
개화되었으며 취미분야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가령, 당나라 이전의 중세기에는 정원을 꾸밀 때에도 정
원석(庭園石)에 채색을 하는 등 인공미(人工美)를 극도로 살린 화려한 조경(造景)이 환영을 받았으나,
송나라 때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원시적인 자연경관을 살린 정원을 매력있는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그
와 같은 풍조와 아울러 사대부의 생활 주변에도 고품(古品)을 아끼고 사랑하는 복고취미가 크게 유행하
였다. 고동기(古銅器) 같은 것이 발굴되면 사대부들은 그것을 서재에 장식하고 감상하는 것을 하나의
취미로 삼았다. 송나라 때 편찬된 《고고도(考古圖)》 《박고도(博古圖)》 등은 모두 고동기 발굴품을
수록한 책들로서, 학문적으로 귀중한 자료가 되는 것은 물론이지만, 당초의 편찬 동기는 취미생활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취미생활뿐만 아니라 의학분야에도 복고 또는 자연으로 돌아가려는 풍조가 파급되고
있었다. 당나라 때까지의 양생법(養生法)은 신체에 이상이 생기면 밖으로부터 약을 투입하여 치료하는
대증요법(對症療法)이 채택되고 있었다. 그러나 송나라 때에 이르러서는 이른바 온보(溫補)의 방법이
등장하여 일정한 기간 동안 환자의 체내에 질병에 대한 저항력을 길러줌으로써 질병을 자연 치유케 하
는 방법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옛날로 돌아간다는 것은 말하자면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의미이며, 꾸
밈이 없는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간다는 얘기이다. 송나라 이전의 문화를 그 원인이야 어디 있건 인간
본래의 개성이 몰각(沒却)됨으로써 어떤 한계점에 부닥친 문화라 특징짓는다면, 송나라 문화는 인간의
자각과 더불어 그 개성이 발굴되고 존중되는 풍토 위에 이루어진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송나라 문화의
또 하나의 특색은 서민문화의 발달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문화가 모든 백성에게 골고루 향유될 수 있
었던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한정된 계층, 곧 큰 도시에 사는 서민들의 생활 향상에 따라 발생한 현상
이었다. 송대에는 산업이 발달하고 생산력이 증대되면서 상거래가 활발해지자 상인들의 세력이 커지고
도시도 발달하였다. 도읍지인 카이펑[開封]은 인구가 100만 명에 달하였다고 하며 당시로서는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 이와 같은 대도시를 배경으로 하여 사대부들의 귀족문화가 발달하였다. 그리고 이
문화는 서민들의 생활이 향상되면서 자연히 서민층에도 확산되었다. 예컨대, 북송의 철종(哲宗) 연간에
는 오늘날의 난징[南京]에 전당포·주점·잡화상 등으로 구성된 시사(詩社)가 있었다. 그들의 시(詩)가
사대부의 시와 견줄 만한 수준에 미치지 못한 것은 물론이지만, 송대의 문화가 서민계층에까지 파급되
고 시작(詩作)의 저변이 확대되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며, 당나라 때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
던 현상이다. 송대에는 귀족문화의 서민층에 대한 침투와 아울러, 서민문화가 귀족층에 끼친 영향도 찾
아볼 수 있다. 도읍에는 구란(勾欄)·와자(瓦子)라는 오락시설이 있어서 잡극(雜劇)·재담(才談)·요술
따위 연희(演戱)가 서민들을 관객으로 하여 번창하였다. 잡극은 뒤에 더욱 발전하여 원곡(元曲)이 되고
사대부들도 그것을 창작하게 된다. 또한 속어(俗語)가 시문(詩文)에 사용되는 경향이 뚜렷해지는데, 이
것 역시 서민문화의 영향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처럼 귀족층이나 서민층의 문화가 발전할 수 있었던 이
면에는 송대에 이르러 서적 인쇄술이 비약적으로 발달함에 따라 누구나 책을 손쉽게 구할 수 있었다는
점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회화〉 육조시대(六朝時代)의 서(書), 당대의 시(詩), 송대의 화(畵)라 일컬어지듯이, 송대의 그림은
중국의 역대 예술을 통해서도 눈부신 발전을 이루어 동양화 내지 중국화의 확고한 전통을 수립하고 그
진가(眞價)를 발휘하게 되었다. 송대의 회화는 북송과 남송화로 나누어지는데 이 두 가지 유파 사이에
는 각각 두드러진 특징이 있다. 즉, 북송화는 궁정에 설치된 화원(畵院)을 중심으로 황실의 비호 아래
발달하였다. 당·오대(五代)에 볼 수 있었던 약동하는 묘선(描線)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감정을 억제한
냉철하고도 정확한 선을 구사하여 이지적인 화풍을 이루어 놓았다. 격조 높은 이 시대의 이상을 잘 표
출한 작품으로는 휘종(徽宗)이 그린 화조도(花鳥圖) 등을 들 수 있다. 처음에 휘종이 중심이 되어 그
진용을 정비한 화원이 큰 성과를 올리게 된 것은 남송 때에 이르러서였다. 화원의 화풍에만 얽매이지
않고 화가의 독창성이 자유로이 표현되는 회화작품이 활발히 제작되었다. 마원(馬遠)·하규(夏珪)로 대
표되는 수묵화를 비롯하여 이적(李迪)·이안충(李安忠) 등의 화조도에는 형식에 사로잡히지 않은 예술
적인 향취가 넘쳐 흐른다. 화원에 소속된 정통파 화가 외에도 비정통파로 불릴 수 있는 화가들의 활동
이 활발하였다는 사실은 송대 회화의 큰 특색이다. 특히 수묵화가 가운데는 목계(牧谿)·옥간(玉澗)과
같이 대담한 화법을 구사하면서 힘차고 청아한 화면을 구성한 화가들의 존재가 빛나고 있다. 또한 송대
에는 화론(畵論)에도 빼어난 것이 많이 나왔는데, 특히 삼원(三遠:高遠·深遠·平遠)을 이론적으로 확
립시킨 곽희(郭熙)와 그의 아들 곽은(郭恩)의 공저인 《임천고치(林泉高致)》는 그 대표적인 저술로서,
후대의 작화(作畵)나 화론 전개에 크나큰 영향을 끼쳤다.
〈조각〉 수(隋)·당(唐) 시대 조각의 특징은 국가의 불교정책에 힘입어 웅대한 불교의 세계관을 나타
내고 지배자의 권위를 과시한 대작들이 많은 데 비하여, 송대에는 불교가 일반 민중 속에 뿌리를 내리
게 됨으로써 조각의 규모는 축소될 수밖에 없었지만 오히려 인간미와 서민성을 풍기는 작품들이 나타났
다. 즉 수·당·오대에는 보살상(菩薩像)의 조영(造營)이 대부분이었지만, 송대에는 나한(羅漢)·관음
상(觀音像)을 활발하게 제작하였으며, 당나라 불상에서 볼 수 있는 심오한 예술성이나 유연함 같은 것
은 찾아볼 수 없을지라도 어딘가 친근감을 느끼게 하는 조촐한 작품들이 수없이 많다. 송대 이전에는
거대한 석굴사원(石窟寺院)의 조상(造像) 등에서 자연과 맞서는 신앙의 격렬함 같은 것을 발견할 수 있
으나, 이 시대에는 흙을 빚거나 나무를 다듬어서 만든 불상이 크게 유행한 것도 하나의 특징이라 하겠
다.
〈공예〉 오늘날 세계의 도자기 연구가들에게 송(宋)나라 도자기는 지금까지 인류가 만들어 놓은 공예
품 가운데서 가장 아름다운 물건의 하나라고 상찬되고 있다. 이와 같은 송나라의 도자기가 완성단계에
다다른 것은 대략 북송 중기 무렵이 되며, 그 이후부터는 차차 잡다한 요소가 섞이기 시작하면서 순수
한 송나라 도자기의 아름다움은 사라져 갔다. 송나라 도자기는 청자와 백자의 두 가지로 대표되는데,
간결한 가운데에도 강인한 인상을 풍기는 조형미와 구슬을 연상시키는 자기 표면의 촉감은 달리 그 유
례를 찾아볼 수 없는 걸작이다.
〈서예〉 태종(太宗) 치세에 《순화각첩(淳化閣帖)》이 편찬되고 왕희지(王羲之)·왕헌지(王獻之)의 글
씨를 비롯한 전통적인 명필들의 서법을 부흥시키려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이와는 달리 채양
(蔡襄)·소식(蘇軾)·황정견(黃庭堅)·미불(米? 등 4대가에 의해 지난날의 전통에서 벗어난 새로운 서
법이 나타나 틀에 박히지 않고 개성이 넘치는 신선한 서풍(書風)이 널리 일반의 환영을 받았다.
【고려와의 관계】 송나라가 일어난 960년 전후의 고려는 제4대 광종(光宗)의 치세(治世)로서 대외적으
로는 국경을 맞댄 중국 동북지방의 요(遼:契丹)와는 긴장관계를 지속하고 중원(中原) 국가로서는 후주
(後周)와 우호 관계를 유지하여 오다가 후주가 송나라에 멸망하자 962년 광평시랑(廣評侍郞) 이흥우(李
興祐)를 송나라에 사신(使臣)으로 보내 이로부터 양국의 교류가 시작되었다. 양국은 이후 사절(使節)·
예물 교환, 유학생 파견, 송상(宋商)의 출입 등으로 정치적·문화적 관계가 밀접하게 되나, 송과는 남
서로 대립되어 적대관계를 가지게 되고 고려와는 남북으로 국경을 맞대어 침략세력으로 도사리고 있던
요(遼)가 고려와 송의 국교에 변수(變數)로 작용하게 되었다. 979년 요를 침공하였다가 대패한 송은 고
려에 우호적 손길을 뻗쳐 986년(성종 5) 다시 대규모의 정토군(征討軍)을 일으키면서 고려에도 원병(援
兵)을 청하여 군사를 발하였으나 역시 패하여, 요는 이로부터 더욱 고려와 송의 연합적 동태를 주시하
면서 고려의 서북면(西北面:평북)에 압력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993년(성종 12) 거란의 제1차 침략을
받은 고려는 거란과 강화를 맺고 994년부터 요의 연호(年號)를 사용하고 이 해 6월에 성종은 요에 보복
코자 사신을 송에 보내 원병을 청하였으나 출병을 거부하자 30년 만에 국교를 단절하였다. 목종(穆宗)
이 즉위한 뒤 999년(목종 2)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이후 양국은 소극적이나마 교류를 하였으나 고려
는 송을 거란 배후 견제세력으로 이용하려 한 것에 대해 송은 고려·요와의 문제에 개입을 회피하고 중
립을 견지하였다. 거란의 제2차 침략(1010)을 거쳐 제3차 침략(1018)을 받은 고려는 거란과의 관계를
정상화하고 요의 압력에 따라 목종 이래 재개하였던 송과의 국교를 다시 단절하였다. 그러나 국교의 단
절에도 여상(麗商)과 송상(宋商)에 의한 무역거래는 활발하여, 특히 송나라 상인들의 빈번한 내왕은 고
려에 세계의 이질적인 문화요소를 전달하여 주었는데, 이 당시 아랍[大食國] 상인이 수삼차 고려에 내
왕할 수 있었던 것도 송상의 중개에 의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 후 송나라에서는 신종(神宗)이 즉
위(1067)하면서 연려대요책(聯麗對遼策)이 대두되어 고려에 국교재개를 요구하여 왔고 고려에서는 송나
라의 문화를 깊이 흠모하였던 문종(文宗)이 즉위한 뒤 매우 친송적(親宋的)이어서 1071년 양국은 약 반
세기 동안 단절하였던 국교를 다시 텄다. 양국의 국교는 서로 요나라의 자극을 꺼려야 하는 입장이어서
정치·군사적인 관계보다는 경제·문화적인 측면으로 기울었으나, 이 또한 요나라의 이목을 피해야 했
기 때문에 왕래하는 항로도 동로(東路)에서 서로(西路)로 변경하여야 할 정도였다. 여하튼 양국의 무역
거래는 1078년 송나라에서 새로 건조한 거선 2척에 막대한 예물을 싣고 고려에 보낸 이래 절정기를 맞
았다. 당시 송은 무역장려책과 더불어 고려에 친선책을 써서 고려사신과 고려상인에 대하여는 극진한
우대를 하여 이들이 통과하는 연로(沿路)에는 고려관을 세워 숙식을 제공하였다. 고려에서는 예성강(禮
成江)∼자연도(紫燕島:仁川)∼마도(馬島:海美)∼고군산(古群山)∼죽도(竹島)∼혹산도(黑山島)∼중국 명
주(明州:浙江省密波府)에 이르는 항로를 송선이 오고갈 때 관리를 항구에 보내 이를 영송(迎送)케 하였
다. 또한 야간에는 송선이 통과하는 항로 연변의 산정(山頂)에 순차로 봉화를 올려 예성강까지 인도하
는 등 접대에 정성을 다하였다. 고려와 송나라는 이와 같이 국교의 단속(斷續)에 구애됨이 없이 공사무
역(公私貿易)을 통해 막대한 수량의 물물을 교류하였는데, 특히 고려는 송나라의 서적을 수집하는 데
많은 힘을 기울여, 국초 이래 구경(九經)을 비롯하여 제자서(諸子書)·사서(史書)·역서(曆書)·형법서
(刑法書)·의서(醫書)·도가서(道家書)·불서(佛書) 등 광범위하게 수입해서 이를 재소화(再消化)하는
작업을 게을리하지 않아 문화적인 부(富)를 축적하였다. 또한 송의 사악(詞樂)이 들어와 고려에서 송악
(宋樂)이 떨쳤고, 1116년(예종 11)에는 휘종(徽宗)이 《대성아악(大晟雅樂)》을 보내와 이로부터 우리
의 음악은 종래의 향악·당악에 아악이 새로운 음악으로 첨가되어 국악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요
의 동태를 주시하며 국교관계를 유지한 고려와 송은 1115년(예종 15), 요군을 격파하고 쑹화강[松花江]
이동의 땅을 장악한 여진 완안부(完顔部)의 아구타[阿骨打]가 황제를 칭하고 금국(金國)을 세움으로써
다시 그 관계는 흔들리게 되었다. 금나라가 일어나자 송은 금과 연합해서 1125년 요를 멸망케 하였으나
2년 후에는 송나라 자신도 금에게 수도를 빼앗기고 휘종·흠종이 납치되어 북송시대는 막을 내리고(靖
康의 變) 임안(臨安:杭州)의 남송시대가 열린다. 이를 전후해서 송은 고려에 자국의 위급을 알리고 금
을 협공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금에 사대정책(事大政策)을 결정한 고려는 이를 거절하여 양국의 관
계는 소원한 사이가 되었다. 송나라는 1142년 금에 세공을 바치고 신(臣)을 칭하게 되었고, 이후 고려
도 주로 금나라와의 외교에 주력하게 되었다. 고려와 송나라가 주로 문화적인 교류를 하면서 서로 많은
귀화인을 맞이하여 고려에서는 이들에게 벼슬을 주어 우대하였는데, 이 중에는 문예·음률로써 이름을
떨친 사람도 많고, 남송이 멸망할 무렵에는 많은 송나라 사람이 고려에 귀화하였다.
금(金)
퉁구스족(族) 계통의 여진족이 건립한 중국의 왕조(1115∼1234). 중국의 정복왕조의 하나로, 창건자는
완안부(完顔部)의 추장 아구다[阿骨打]이다. 여진족은 본래 10세기 초 이후 거란족이 세운 요(遼)의 지
배를 받고 있었으나, 12세기 초 북만주 하얼빈[哈爾濱] 남동쪽의 안추후수이[按出虎水] 부근(지금의 松
江省) 아청[阿城]에 있던 완안부의 세력이 커지자, 그 추장인 아구다가 요를 배반하고 자립하여 제위
(帝位)에 올라, 국호를 금(金)이라 하였다. 그가 곧 금나라 태조(재위 1115∼23)이다. 금나라는 그들의
근거지에 도읍을 정하였는데, 이곳은 후에 상경회령부(上京會寧府)라 하였다. 금이라는 국호는 근거지
인 안추후수이에서 금이 많이 산출된 점에 연유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태조는 요군(遼軍)을 격파
하여 그 영토를 넓혀나갔으며, 1120년에는 송(宋)나라와 동맹을 맺고 요를 협격하여 만주지역으로부터
요의 세력을 몰아내는 데 성공하였다. 이어 태조는 산시성[山西省]의 다퉁[大同], 허베이성[河北省]의
연경(燕京:지금의 베이징)으로 진출하였으며, 25년 제2대 태종(太宗:재위 1123∼35) 때에는 요를 멸망
시키고 서하(西夏)·고려(高麗)를 복속시켰다. 금나라는 아구다가 완비한 행정·군사 조직으로 300호를
1모극(謀克)으로 하여 100명의 병사를 내고, 10모극을 1맹안(猛安)으로 하여 그 장을 세습시켜 부민을
통치하게 하는 맹안모극 제도로 군사적·행정적 제도를 실시하고, 요나라에 이은 중국의 정복왕조로서
의 체제를 정비하였다. 금나라는 송(宋)나라와의 사이에 불화가 발생하자 송나라 수도였던 허난성[河南
省]의 카이펑[開封]을 공격하여 27년 송나라의 상황(上皇) 휘종(徽宗:재위 1101∼35)·황제 흠종(欽宗)
등을 사로잡고 송나라를 강남으로 밀어냈다. 이로써 금은 만주 전역과 내몽골[內蒙古]·화베이[華北]
지역 등에 걸친 대영토를 영유하게 되었다. 제3대 희종(熙宗:재위 1135∼49) 때에 화이수이[淮水]·산
시성[陝西省]의 대산관(大散關)을 잇는 지대를 국경으로 정하고, 남송의 황제는 앞으로 신례(臣禮)를
갖추어 금의 황제를 대하며, 또한 은(銀) 25만 냥과 견포(絹布) 25만 필을 세폐(歲幣)로 바친다는 조건
으로 화의를 체결하였다. 그러나 이 무렵부터 금나라는 정치·경제·문화 등 각 방면에서 송나라의 영
향을 강하게 받기 시작하였으며, 특히 이런 경향은 제4대 해릉왕(海陵王:재위 1149∼61) 때에 더욱 두
드러져, 마침내 53년에는 금의 창업근거지였던 상경회령부를 버리고 연경(燕京)으로 천도, 그와 함께
여진인을 화베이지방으로 대거 이주시켰다. 해릉왕은 다시 남송을 쳐서 멸망시키고 전국을 통일하려는
뜻을 고집하여 반대를 무릅쓰고 남벌(南伐)을 감행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또한 만주에 남아 있던 여진인
과 발해인들의 세력에 눌려 61년 제위에서 밀려나고, 제5대 세종(世宗:재위 1161∼89)이 즉위하게 되었
다. 그 후 해릉왕은 한 부장에게 살해되었다. 세종은 남송과의 국교를 조정하여 해릉왕의 남벌로 인한
재정난을 타개하고, 이후 29년에 걸쳐 금의 전성기를 이룩하였다. 따라서 이 시기를 소요순(小堯舜)이
라 한다. 또 세종은 그때에 표면화된 여진인의 나약함과 빈곤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썼으며, 점차 잊
혀져가는 여진어·여진문자 사용을 장려하는 등 국수주의(國粹主義) 정책을 취하였다. 제6대 장종(章
宗:재위 1189∼1208)은 무계획적이고 산만한 재정정책을 취한데다, 황허강[黃河] 범람 후의 치수(治水)
공사와 북방 몽골계 유목민에 대한 경략 등에 지나치게 국비(國費)를 소비하였고, 더욱이 실지회복에
나선 남송의 도전을 받아 한층 더 심각한 재정난에 빠졌다. 제7대 위소왕(衛紹王:재위 1208∼13) 때는
몽골군의 침입을 받아 근거지인 만주를 잃었으며, 남송과 서하(西夏)로부터도 침입을 받았다. 제8대 선
종(宣宗:재위 1213∼23)은 1214년 몽골군의 강습(强襲)을 받고 이를 피하여 도성을 연경에서 카이펑으
로 옮겼으나, 함께 옮겨온 여진인과 토착 한인 사이에 식량문제를 둘러싸고 처참한 싸움이 벌어졌다.
제9대 애종(哀宗:재위 1223∼34)은 카이펑에서 안주할 수 없게 되어 32년, 이곳을 탈출하여 허난성의
각지를 옮겨다니다가 34년 차이저우[蔡洲]에서 몽골·남송 연합군의 추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자살함
으로써 금은 건국 120년 만에 멸망하였다.
【사회】 여진인을 중핵으로 한 이 사회는, 거란인·발해인·한인 등 여진인의 10배가 넘는 타민족 인
구를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진인의 우월을 지키면서 피지배민의 불만을 사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
를 기울일 필요가 있었다. 건국 전년인 1114년에 태조 아구다가 완비한 맹안모극 제도를 지키려고 노력
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이 편제는 평시에는 농업과 수렵 등의 생업에 종사하다가 전시에는 병사로 종
군하게 되어 있었다. 금은 이 맹안모극 제도를 통한 병력을 근간으로 하여 국력발전을 이룩하였다. 그
러나 세종 때에 중원으로 이주한 맹안모극민(民)이 태만하고 나약해져 궁핍화가 두드러졌으며, 여진인
의 보호를 위하여 지나치게 힘을 기울인 결과, 한인의 반감을 사 이로부터 한인과 여진인의 반목·대립
은 더욱 심각해졌다.
【경제】 희종 때인 1142년에 남송과 강화가 성립된 이후 남송과의 국경선 수 개소에 각장( 場)이라는
관설(官設) 무역장을 설치하고 무역을 시작하여, 차·향료·약품·상아·서각(犀角)·견직물·목면·목
재·쌀 등을 수입하였고, 송나라에서는 진주·모피·인삼·감초·견직물(산둥·허난 지방 제조품)·말
등을 수입하였다. 그러나 무역의 수지(收支)에서는 항상 수입초과였으며, 따라서 경제적으로 금나라는
남송과 대항하기 어려운 상태에 있었다. 특히 해릉왕의 남벌 때문에 재정난이 심각해져서 원상회복이
몹시 곤란한 상태였다. 이때에 세종이 단행한 것이 물력전(物力錢), 즉 재산세의 징수였다. 국민의 재
산상태를 조사하여 그 다과에 따라 과세하였다. 이것은 주로 한인을 대상으로 하였기 때문에 한인의 세
부담은 더욱 과중하게 된데다, 징세관리는 증수(增收)를 목적으로 과중부과를 하였으므로 한인의 불평
은 날이 갈수록 심하여졌고, 그들을 금왕조로부터 이반(離反)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금나라는 동전의
부족으로 해릉왕 때부터 지폐인 교초(交)를 발행하였다.
【언어·종교·문화】 지배민족인 여진족은 알타이어계(語系)의 퉁구스어에 속한 여진어를 사용하였으
며, 그것을 기록하기 위하여 여진문자를 만들어 썼다. 그러나 여진인의 화베이지방 이주 후에는 점차
한화(漢化)되어 세종의 적극적인 장려에도 불구하고 여진어·여진문자는 점차 잊혀져갔다. 여진 고유의
종교는 샤머니즘이었으나, 영토가 확장됨에 따라 발해·요나라 등으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였으며, 화베
이지방 영유 후로는 남송의 불교를 계승하였다. 한편 이와 같은 무렵에 금나라의 지배에 불만을 품은
화베이의 한인사회를 배경으로 도사(道士) 왕중양(王重陽)이 도교에 혁신적인 기풍을 불어넣어 전진교
(全眞敎)를 창립하기도 하였다. 문학에서는 한인은 말할 것도 없고, 여진인의 상류층도 송나라 문화,
특히 문학에 심취하였으므로 북송문화의 주류는 그대로 금나라에 인계되었다. 특히 장종(章宗)은 훌륭
한 문화정책을 펴 금왕조에서 가장 융성한 문운시대(文運時代)를 출현하게 하였다.
원(元)
13세기 중반부터 14세기 중반에 이르는 약 1세기 사이, 중국 본토를 중심으로 거의 동(東)아시아 전역
을 지배한 몽골족의 왕국(1271∼1368).
【개관】 13세기 초, 칭기즈칸에 의해 구축된 몽골제국(蒙古帝國)은 유러시아 대륙의 북방초원에 정치
적 기지를 두고, 대륙남방의 농경지대를 그 속령(屬領)으로 삼아 지배한 유목국가(遊牧國家)로, 속령으
로부터의 가혹한 수탈과 부정기적인 약탈로써 경제적 욕구를 충족하였다. 그러나 유목제왕(遊牧帝王)과
그를 둘러싼 유목봉건영주층(遊牧封建領主層), 또는 유목민 지배층과 농경민 피지배층 사이에 정치적·
경제적 모순이 발생하여 제국은 끊임없이 동요되었다. 이와 같이 유목제국에 잠재된 근본적인 결함을
극복하려고 유목과 농경이 공존할 수 있는 중간의 아건조지대(亞乾燥地帶)에 새로운 정치적 기지를 찾
아서 강대하고 집권적인 제국(帝國)을 영위하려 한 것이 칭기즈칸의 손자인 쿠빌라이칸[世祖]이었다.
그는 형 몽케칸[憲宗]를 계승하려 하였던 막내동생 아리크부카를 제거하고 북방의 초원에 웅거한 유목
봉건세력의 진출을 막아, 수도를 몽골 고원의 캐라코럼에서 화북(華北)에 가까운 상도(上都)와 화북 안
에 있는 대도(大都:北京)로 옮겨 화북의 건조농경지대를 중심으로 한 중국식 집권적(集權的) 관료국가
의 확립을 꾀하였다. 그가 시도한 정치적 사업이 거의 완성단계에 이른 1271년 《역경(易經)》의 ‘大
哉乾元’을 따서 국호를 대원(大元)이라 하고 중국 역대왕조의 계보를 잇는 정통왕조임을 내외에 선언
하였다. 이어 74년에서 79년에 걸쳐 화이허강[淮河] 이남 지역에 있던 남송(南宋)을 평정해서 명실공히
중국전토를 영유하게 되었는데, 이에 멈추지 않고 일본·베트남·미얀마·자바 등지에도 침략군을 보냈
다. 원나라는 쿠빌라이칸이 다스리는 동안에 동아시아 전역의 대제국이 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쿠빌라
이칸은 몽골제국의 종주권(宗主權)도 계승한 것이라며 서방의 한국(汗國)들(킵차크·차가타이·오고타
이·일 한국 등) 위에도 군림하려 해서, 유목적 전통을 고집하는 한국들은 그를 마땅치 않게 여겨 원나
라의 종주권을 부인하고 대항하였다. 특히 오고타이한국의 왕 카이두는 이웃 차가타이·킵차크 한국의
왕들을 설득해서 반(反)쿠빌라이 동맹을 결성하여 원나라 북서변의 요지를 공략하여 쿠빌라이 정권을
위협하였다. 항쟁은 쿠빌라이칸이 죽은 뒤에도 계속되었는데, 1301년 카이두가 사망함으로써 전운(戰
雲)이 가셨다. 이로부터 원나라는 한국들과 친교를 맺고 제국(帝國)의 종주권을 회복하였다. 아시아 전
역에는 이른바 ‘몽골족 지배하의 평화’가 찾아와 동·서의 문물이 자유롭게 교류하게 되어 국제무역
이 번창하였다. 그러나 원나라 내부의 국정이 해이해지기 시작하여 사회적 여러 모순들이 심화되어 갔
다. 이에 편승해서 여러 지방에서 크고 작은 폭동이 일어났는데도 중앙에서는 권신(權臣)들이 정쟁(政
爭)에 여념이 없었다. 폭동은 확대되어 한족(漢族)에 의한 민족적 반란으로까지 발전하여 주원장(朱元
璋:洪武帝)에 의한 명조(明朝)정권이 출현하였다. 68년 원나라는 수도 대도를 명나라의 군대에 빼앗겨
순제(順帝:토곤 테무르)가 몽골 본토에 쫓김으로써 원나라의 중국지배는 끝이 났다. 그뒤 몽골본토에
터를 잡은 원군은 얼마 동안 명군과 항쟁을 계속하였으나 쇠퇴하여 내분(內紛)으로 소멸되었다. 이를
북원(北元)이라 한다.
【정치】 원나라의 최고 주권자는 쿠빌라이칸과 그 적계(嫡系) 자손에 한정되어 그 권한은 초월적인 것
이었다. 정치적 권력을 대표하는 중앙의 주요한 정치기구는 당시 성(省)·원(院)·대(臺)로 약칭되었던
3대 관청인 중서성(中書省)·추밀원(樞密院) 및 어사대(御史臺)였다. 중서성은 황제의 명령인 법령을
입안(立案)·기초하는 기관으로 그 아래에 이(吏)·호(戶)·예(禮)·병(兵)·형(刑)·공(工)의 행정 6
부를 두고 그 법령의 시행을 맡았다. 중서성의 장관인 중서령(中書令)은 가장 영예로운 관직으로, 황태
자가 이를 겸하였으며, 그 아래에 우승상(右丞相)·좌승상·평장정사(平章政事) 등의 재상(宰相)과, 참
지정사(參知政事)·우승(右丞)·좌승 등의 부재상을 두어, 중요한 정무는 모두 재상·부재상들의 합의
에 따라서 결정되었다. 추밀원은 군사조직을 통할하는 기관으로, 이것 역시 황태자가 겸하는 장관인 추
밀원사(樞密院事) 아래에 지원(知院)·원사(院使)·동지(同知)·부사(副使) 등의 여러 관직을 두었는
데, 이 밖에 특히 중대한 군사기밀사항을 심의하기 위해 중서성에서 평장정사 한 사람이 파견되었다.
마지막으로 어사대는 관료기구의 숙정과 쇄신을 이루기 위한 감찰기관으로, 장관인 어사대부(御史大
夫), 차관인 중승(中丞) 아래에 많은 감찰어사를 두어 끊임없이 여러 행정기관들을 순찰해서 부정을 적
발하고 또한 민간의 풍기 유지, 교육의 진흥을 맡았다. 이상의 3대 관청 외에 재무를 맡아보던 제국용
사사(制國用使司), 뒤에 승격해서 상서성(尙書省)으로 개칭한 특수관청이 있었는데, 이는 비상시 국가
재정의 어려움을 타개하려 임시적으로 두었던 것으로 목적이 이루어지면 폐지되었다. 성·원·대의 3관
청은 원래 상도(上都)·대도(大都)를 포함한 직례지(直隷地)를 직접 관할하였으며, 그 밖의 지역에는
이를 대행할 출장기관으로 행중서성(行中書省:약칭 行省)·행추밀원(行樞密院:行院)·행어사대(行御史
臺:行臺)를 두었는데, 뒤에 점차 정리되어 상설관청이 되었다. 그러나 군정(軍政)은 일원화의 필요성에
서 비상시가 아니면 행원(行院)을 두지 않고 모두 중앙의 추밀원이 관할하였다. 지방의 행성 및 행대는
비록 중앙의 성(省)·대(臺)에 비해서 지위는 낮았으나, 모두 황제에 직속되는 관청으로서 절대적인 권
한이 부여되어 있었다. 이들 대관청의 아래에 소속되는 지방행정 관청으로 선위사(宣慰司)가, 지방재무
청으로는 전운사(轉運司), 지방감찰청으로는 숙정염방사(肅政廉訪司)가 있었다. 또한 이들 관청 아래에
는 노(路)·부(府)·주(州)·현(懸)·사(司)의 지방행정관청을 두었다. 지방행정관청의 수령은 대개 그
지방의 지식인을 임명하였으나 지방행정을 점검하는 정치감찰관으로 다루가치라는 관직을 두어 반드시
몽골인이나 색목인(色目人)을 임명하였다. 이와 같은 현지 출신 관리에 대한 감시제도는 정복(征服)왕
조였던 원나라의 특징이었다. 한편 몽골의 군사제도는 처음에 몽골 귀족의 자제로써 조직된 케시쿠타이
라 하는 궁정조직이 있어서 황제의 신변주위에서 호위를 하던 친위군(親衛軍)의 역할을 하였으나 원나
라에 이르러서는 의장병(儀仗兵)의 존재로 변하여 그 대신 일반몽골인·한인(漢人), 또는 서방 투르크
계 유목민의 정예로써 선발 조직된 시위군단(侍衛軍團)이 군의 중핵을 이루어 황제의 신변과 수도 근교
의 경비를 담당하였다. 경사(京師)의 외곽을 이루는 화북일대에는 일반 몽골군으로 편제된 4개의 몽골
도만호부[蒙古都萬護府]라는 병단(兵團)이 요지에 주둔하였다. 이를 둘러싸는 양쯔강[揚子江] 주변에는
강남(江南)에 22익(翼), 후광[湖廣]·쓰촨[四川]에는 6익씩 주로 한인(漢人)으로 구성된 한군만호부(漢
軍萬護府)를 진수(鎭守)시켜 원나라 정권의 거점인 직례(直隷)지역을 이중삼중으로 방위하게 하였다.
그럼에도 이들 병단의 편제에 있어서 처음부터 남송(南宋)의 유민을 배제하였던 것은 역시 정복왕조로
서의 경계심을 보인 것이라 하겠다.
【사회·경제】 원나라는 많은 이민족(異民族)문화를 수용하고 있던 다민족국가였고, 복합적 사회였으
며, 거기에 지배민족인 몽골인 사회는 근각(根脚:혈통)을 존중하는 봉건적 신분제사회였다. 따라서 통
치에 있어서도 신분제 의식에 좇아서 이를 규제하려 하였다. 먼저 몽골인을 국족(國族), 서방계의 투르
크·이란·유럽인을 색목인(色目人), 금국(金國)의 유민 즉 화북의 백성을 한인(漢人), 강남에 사는 남
송의 유민을 남인(南人)이라 불러서 구별하였다. 이 가운데 원나라의 황실을 비롯해서 유목영주층·몽
골귀족층이 사회의 최상층을 차지하고 있었음은 물론이다. 그들은 북방의 초원에 광대한 유목지를 소유
하고 케린코라 불린 다수의 가내노예를 사역하였으며, 중국의 내지(內地)에도 여러 곳에 식읍(食邑)을
급여하여, 이른바 ‘투하(投下)’된 백성을 지배하는 권력층이었다. 다음 계층은 몽골제국 또는 원나라
정권의 성립에 훈공을 세운 색목인 및 한인(漢人)으로, 여기에는 대개 군벌(軍閥) 출신자가 많았다. 그
다음의 중간층은 하급의 이원(吏員) 출신자나 무인(武人) 출신자로, 폭넓게 원나라정권을 받쳐주었던
계층이라 할 수 있다. 최하위층은 이들 특권적 신분에서 완전히 배제된 한인(漢人)·남인(南人)의 대중
들이었다. 원조(元朝)에서는 호적상 이들 신분층을 계관호(係官戶:帝國의 臣民)와 투하호(投下戶:領
主·귀족에게 私屬되어 있던 백성)로 크게 나누었다. 계관호는 민(民)·군(軍)·장(匠)외에 참(站:驛
傳)·조(:製鹽)·차(茶:栽培·摘茶)·유(儒)·승(僧)·도(道)·회회(回回:이슬람)·야리가온(그리스도
교)·음양(陰陽)·의(醫)·복(卜) 및 공과부담(公課負擔) 종교와 전문업종에 따라 세부적으로 구분하였
다. 이 가운데 민호(民戶) 즉 농민 가족의 부담이 가장 무거워, 화북에서는 세량(稅糧:田租)과 과차(科
差:銀 또는 紙幣 및 生系稅와 그 밖의 夫役)를, 강남에서는 하세(夏稅:華北의 科差에 해당)와 추량(秋
糧:華北의 稅糧)이 부과되었다. 군호(軍戶)에는 군역(軍役)을, 장호(匠戶:수공업 기술자의 戶)에는 장
역(匠役)을, 참호(站戶)에는 역전(驛傳)을 과차(科差) 대신으로 부과하였고, 세량에 있어서도 민호보다
적었다. 또한 유·승·도나 그 밖의 종교인은 특히 우대하여 과차면제의 특혜를 베풀었다. 이들은 모두
양민층(良民層:평민층)에 속하였으나 이 아래에 구구(驅口)라 불리던 노예층이 있었다. 이들은 오랜 전
란의 결과로 생긴 계층으로, 이들 노예층의 증대는 양민층의 호구를 감소시키는 것이어서 정부당국은
공과부담자를 증가시켜야 할 필요성에서도 이들을 해방시켜 양민층으로 흡수하려 하였다. 이상 각종 민
족사회를 호구상으로 살펴보면 몽골·색목인층 등 최상층은 40∼50만 호(200∼300만 명)에 불과하였던
데 비해 한인(漢人)은 200만 호(1,000만 명), 남인은 이보다 많은 1,200만 호(6,000만 명)에 이르러,
지배민족층은 피지배민족사회로부터 큰 압박감을 받았기 때문에 원나라 조정은 한인·남인의 사회적 진
출을 억제하고자 이 네 개의 종족사회에 법제적인 차별을 두었다. 즉 임관(任官)이나 형법의 적용에 있
어서는 몽골인을 제1계층으로 해서 우대하였고, 그 다음 색목인·한인·남인의 순으로 차별을 두었던
것이다. 또한 원나라에서는 한인·남인에게는 무기의 휴대·소유도 엄금하였다. 원나라의 경제정책은
중국 역대왕조들의 중농적(重農的) 시책과는 달리 현저한 중상주의적(重商主義的) 경제시책을 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 해도 쿠빌라이칸은 유자(儒者)의 견해를 존중해서 권농정책(勸農政策)을 취하여 관
찬(官撰)의 농업기술서를 민간에 배포해서 농업생산력의 향상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뒤 정부당국자들
은 재정정책의 중심을 국내의 상업이나 국제무역의 진흥, 특히 소금·차(茶)·술 등의 전매익금(專賣益
金)의 증대 방향으로 전환하였다. 당시 상업이 성행하였던 간선(幹線)은 수도인 대도(大都)와 강남의
항저우[杭州]를 잇는 대운하선(大運河線)으로 그 선의 유역에는 많은 도시가 번영하였고, 수공업품의
생산이나 판매로 번창하였다. 북서쪽은 육상으로 대도에서 몽골초원을 거쳐 톈산남로[天山南路] 또는
톈산북로로 이어졌고, 남동(南東)은 항저우에서 해로(海路), 경원(慶元:寧波)·천주(泉州:福建)·광둥
[廣東]으로 통하였고, 다시 남해항로로 이어졌다. 이처럼 원나라의 국내 상업로는 당시의 유라시아 대
륙을 한 고리로 하는 국제무역선에 직접 이어져 있었기 때문에 역사상 유례 없는 번영을 누렸다. 원나
라는 교초(交)라 불리던 정부 신용의 지폐를 발행하였다. 이에는 중통초(中統)와 지원초(至元)의 두 종
류가 있었는데 여러 액면표시의 지폐가 다량으로 발행되어 중국전역에서 유통되었다. 그러나 해외무역
에서는 모두 은전(銀錢)에 의한 거래를 하였다.
【문화·사상】 몽골인들은 원래 샤머니즘의 신봉자로서 문자를 갖지 않고, 따라서 문헌(文獻)도 갖지
않아서 그 풍부한 구비전승(口碑傳承)을 기록할 방도를 몰랐다. 그러나 그만큼 다른 고도의 문화를 지
닌 민족과 접촉을 하였을 때에는 그 종교·문화·습속에 대해 극히 관대하였고, 오히려 기꺼이 이를 수
용하였다. 그들의 문학에 있어서는 위구르 문자나 파스파 문자의 창제로써 그들의 구비문학(口碑文學)
을 자유롭게 쓸 수 있게 되어 오늘날에도 전하여지는 《원조비사(元朝秘史)》와 같은 일대 걸작품도 나
왔고, 중국 고전(古典)을 몽골어로 번역하게도 되었다. 한편 중국에서는 유교가 쿠빌라이칸의 열성적인
장려로 번성하여 특히 주자학이 풍미하였고 이 가운데 화북의 허형(許衡)·유인(劉因), 강남의 오징(吳
澄) 등이 특히 유명하였다. 도교(道敎)는, 화북에서는 칭기즈칸으로부터 존경을 받던 장춘진인(長春眞
人) 계통의 전진교(全眞敎)가 전성기를 맞이하였고, 강남에서는 태일교(太一敎)·정대도교(正大道敎)
등이 이와 맞섰다. 불교는 원나라의 황실, 몽골인 귀족층의 열렬한 비호 아래, 티베트로부터 도래한 라
마교가 번영하였고 그 밖에는 특히 선종(禪宗)이 교세를 떨쳤다. 그리스도교는 몽골궁정이나 일부 왕족
사이에서 신앙되어온 네스토리우스파(派)의 그리스도교가 한때 크게 떨쳤으나, 새로이 들어온 로마 가
톨릭교의 기세에 눌려 이윽고 그 안에 흡수되어 버렸다. 그러나 이와 같이 다채로운 외래종교의 활발한
활동의 그늘에서 백련교(白蓮敎)·두타교(頭陀敎) 등으로 불린 비밀결사적 민간종교가 하층민의 구심점
이 되었는데, 이는 이민족(異民族)왕조인 원나라에 대한 민족적 반항심을 불러일으켰다.
【미술】 〈회화〉 이 시대의 회화를 대충 살펴보면 송시대 양식의 계승과 그 반동으로 볼 수 있는 문
인화(文人畵)의 발흥이라 할 수 있겠다. 원나라는 광대한 판도(版圖)를 영유하여 동·서의 교통은 활발
하게 되었으나, 위정자들이 회화에 마음을 쓸 여유가 없어서인지 화가의 대부분이 송나라를 계승한 한
민족(漢民族)의 피를 이었으나, 송나라 때와 같은 화원(畵院) 제도는 설치하지 않았다. 송나라 때의 화
풍을 계승한 화가에는 안휘(顔輝)·왕진붕(王振鵬)·손군택(孫君澤)·장원(張遠)·하명원(夏明遠)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안휘는 인물화가로서, 당대 제일로 꼽았으며, 생생하고 괴기(怪奇)에 찬 도석인물(道
釋人物)을 잘 그렸고, 채색법(彩色法)에도 새로운 기교를 구사하였다. 손군택을 비롯한 산수화가는 남
송(南宋)의 대가(大家)인 마원(馬遠)·하규(夏圭)의 화풍을 본받은 데 불과하여 새로운 맛이 결여되어
있다. 그러나 송화(宋畵)의 영역에서 탈피하여 독자적인 화풍의 경지를 연 화가로 조자앙(趙子昻)이 있
다. 그의 그림 그리기는 여기(餘技)인데, 그럼에도 전문화가에는 없는 자유스러운 경지로 화필을 전개
하여 뒤에 가서 문인화(文人畵)가 일어나는 바탕을 마련하였다고 할 수 있다. 문인화가 회화(繪畵)의
양식으로 확립되어 그 화류(畵流)는 중국화 가운데서 커다란 위치를 차지하게 되는데, 그 모체가 된 것
이 원나라의 4대가이다. 그들은 오진(吳鎭)·황공망(黃公望)·예찬(倪瓚)·왕몽(王蒙)의 4명으로, 이들
은 거의 같은 시대에 화단에 등단하였고, 출신지는 장쑤[江蘇]·저장[浙江]의 두 성(省)이다. 이들이
작품제작에 몰두한 곳은 모두 둥팅호[洞庭湖] 근처여서 자연 관조(觀照)를 통해 그림을 그렸으므로, 초
속고매(超俗高邁)한 정신이 작품 속에 표현되었다. 문인화, 또는 남화(南畵)의 본령(本領)은 이 4대가
에 의해 형성되어 후세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 밖에 화조화(花鳥畵)를 잘 그린 전선(錢選)이 있다. 그
는 사생(寫生)을 중시한 송나라의 원체풍(院體風)과 같이 장식적인 화면의 구성이나 채색을 연구하여
일가(一家)를 이루었고, 그의 화풍은 명(明)나라의 화조화에 계승되었다.
〈조각〉 수(隋)·당(唐)의 뒤를 이어 오대(五代)에서 송(宋)·원(元)나라에 이르는 동안 조각은 쇠미
(衰徵)의 내리막길만 걸어 특히 원나라 때는 그 이전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떨어졌다. 다만 새
로 들어왔던 라마교에서 불교와는 다른 조각작품을 남긴 것이 주목을 받을 정도이다.
〈서도〉 이 시대에 있어 서도의 제1인자는 회화에서 언급한 바 있는 조자앙(趙子昻)이다. 그는 송나라
의 대가인 소식(蘇軾)·황정견(黃庭堅)·미불(米? 등의 반정통파에 맞서 고서(古書)를 널리 연구해서
복고주의(復古主義)를 제창하였다. 그래서 왕희지(王羲之) 이래의 전통적인 서도의 풍격(風格)을 새로
이 살려 한 시대에 획을 그었다.
〈도예〉 원나라의 도예는 작품도 적고 문헌자료도 아주 적어서 그 실정을 밝히기는 어렵다. 단지 송나
라에 이어져 장시성[江西省]의 징더전요[景德鎭窯], 저장성[浙江省]의 룽취안요[龍泉窯], 허베이성의
치저우요[磁州窯]가 주로 활동을 계속한 듯 한데 적은 유품을 통해서 보더라도 송에서 명으로 옮아가는
과도적인 경향을 엿볼 수 있어 송의 도자기가 지닌 순수한 미는 거의 없어졌다.
〈건축〉 몽골인은 유목민이어서 스스로의 건축양식은 갖지 않고 중국건축을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라마
교 사원 등은 인도·티베트 등의 형식을 그대로 따랐다. 이밖에 유교·불교신도도 많아서 도관(道觀)·
불교사원이 세워졌는데, 송시대의 양식을 그대로 이은 것이 많다. 불탑은 금(金)나라 때의 팔각, 또는
육각의 차양(遮陽)이 많은 탑이 세워졌다. 또한 동·서 교통의 성행에 수반해서 이슬람교도가 이주해서
세운 이슬람교 사원도 볼 수 있다.
【고려와의 관계】 1216년(고려 고종 3) 몽골제국에 멸망한 금(金)나라에 딸려 있던 거란(契丹)의 유민
들이 고려에 침입하여 이후 3년 동안 충청·전라·경상도 등 남부지방을 제외한 북방지역을 유린하였
다. 이에 칭기즈칸은 ‘거란을 토멸하고 고려를 구한다’고 성명하고 몽골과 동진국(東鎭國)의 연합군
을 파군하여 함경도 지방에 걸쳐 있던 거란군의 거점을 차례로 부수고 거란의 주력이 웅거한 강동성(江
東城)으로 향하였다. 이에 고려에서도 군량미를 보내어 지원하고 고려군도 합세하여 강동성에 남아 있
던 거란의 마지막 세력을 평정하였다. 이를 계기로 몽골은 19년(고종 6) 개경(開京)에 사신을 보내 칭
기즈칸의 조서(詔書)를 전하고 정식으로 수호(修好)를 청하였는데 이것이 몽골과의 정식 국교의 시작이
었다. 그러나 몽골은 거란의 토멸이 고려에 큰 은혜를 베푼 양 해마다 상례로 과중한 공물(貢物)을 받
아갔으며, 25년에는 공물을 요구하러 고려에 왔다가 돌아가던 몽골의 사신이 국경지대에서 암살된 사건
이 발생함으로써, 몽골은 이를 빙자하여 고려 정벌을 단행하였다. 31년(고종 18) 제1차 고려침략을 시
작한 이래, 몽골은 제2차(32), 제3차(35∼38), 제4차(51), 제5차(54), 제6차(55), 제7차(57)의 침략군
을 보내 고려를 유린하였다. 제1차 몽골의 침략을 받은 이듬해인 32년 고려는 수도를 개경에서 강화도
로 옮겨 장기 항쟁태세를 갖추어 한편으로는 싸우고, 한편으로는 그들의 조건인 국왕의 입조(入朝)와
강화도로부터의 출륙(出陸)을 들어주는 듯이 화의를 하여 철군하게 하였으나 끝내 이를 실행하지 않고
28년간 항쟁을 계속하였다. 그것은 우리가 고래로 중국 역대강대국과 외교상 부득이 사대주의를 취하여
온 것은 사실이나 국왕이 친조(親朝)한 예는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7차에 걸친 몽골의 침략으로
인명·재산·문화재 등의 피해로 국토는 초토가 되고 백성은 도탄에 빠져, 마침 1258년 무신정권의 최
종 집권자인 최의(崔?가 김준(金俊)에게 피살되자 정세는 강화(講和) 쪽으로 기울게 되었다. 59년(고종
46) 고려는 왕의 출륙과 입조를 약속하고 태자 전(k:元宗) 등 40여 명을 보내는 한편 강화도의 성들을
헐어버림으로써 고려는 28년의 항쟁 끝에 몽골에 굴복하였다. 그러나 고종은 몽골에의 입조를 않고 강
화도의 궁성이 헐린 6월에 죽었으며, 이듬해 인질로 갔던 태자가 귀국해서 즉위하여 원종이 되었다. 그
는 즉위한 이듬해에 태자 심(諶:忠烈王)을 몽골에 인질로 보내어 이로부터 고려의 왕태자는 국내의 왕
이 죽어 이를 계승하게 될 때까지 몽골에 머무는 것이 상례가 되었고, 원종 자신도 64년 몽골의 요구에
따라 연경(燕京:北京)에 가서 쿠빌라이칸에게 알현함으로써 최초로 중국황제에게 친조한 왕이 되었다.
그러함에도 원종은 개경에 새로 짓는 궁궐의 핑계를 대고 강화도에서 출륙을 않다가 70년에야 개경으로
환도하였고 이를 전후해서 무신(武臣)들을 중심으로 한 반원(反元) 세력은 한때 원종을 폐위하고, 동조
세력인 삼별초군(三別抄軍)은 대원(對元)항쟁을 74년까지 계속하는 등 오랫동안 고려의 일각에서는 원
나라에 강한 적대의사를 보였다. 고려는 원종 이후 충렬왕·충선왕·충숙왕·충혜왕·충목왕·충정왕
및 공민왕에 이르는 약 1세기 동안 정치적으로 유례 없는 간섭을 받아 자주성을 잃게 되었고 왕실은 부
마국(駙馬國:사위 나라)이 됨으로써 왕통은 혼혈화하였으며, 중앙의 정치제도는 그들의 강압에 의하여
수시로 개변(改變)하였다. 또한 함경도의 서북면에는 그들의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 평양에는 동녕부
(東寧府)를 두어 황해도의 자비령(慈悲嶺)을 두 나라의 국경을 삼는 등 국토도 유린하였다. 더구나 원
나라는 1274년(원종 15)과 81년(충렬왕 7) 두 차례에 걸쳐 고려를 강압하여 일본을 정벌하려다 실패함
으로써 고려는 큰 타격을 받았다. 원나라가 쇠퇴할 시기에 즉위한 공민왕은 고려에 남아 있는 원나라의
잔재를 없애기 위해 자신의 몽골 머리를 고치고, 원나라 순제 황후의 오빠로서 고려에서 권세를 부리던
기철(奇轍)을 죽이는 한편, 동북면에 군사를 보내 쌍성총관부를 몰아냄으로써 실지(失地)를 회복하는
등 점차 원의 예속으로부터 벗어났다. 몽골지배하의 약 1세기 동안 문화적으로는 문물과 인물의 교류가
잦아 복식(服飾)을 비롯한 생활양식 등에 몽골풍의 유행을 일으키는 등 많은 변화를 가져오기도 하여
그 유풍은 조선 초까지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서방문화와의 교류에 힘쓴 원나라의 영향으
로 천문·역법(曆法)·의학·수학 등이 전래되었다.
명(明)
한족(漢族)이 몽골족이 세운 원(元)나라를 멸망시키고 세운 통일왕조(1368∼1644). 한족의 지배를 회복
한 왕조로, 뒤에 만주족(滿洲族)이 세운 청(淸)나라에 멸망되었다. 명대(明代)는 중국이 근대화하는 시
기와 직접 접속되는 시대로서 중요한 성장·변혁기였다.
【정치】 14세기 중엽, 몽골지상주의(至上主義)를 표방하고 약 100년에 걸쳐 압정(壓政)을 펴온 원조에
항거한 한족 중 가장 큰 집단을 이루었던 홍건적(紅巾賊)에 가담하여 두각을 나타낸 주원장(朱元璋)은
백련교도(白蓮敎徒)의 뒷받침으로 세력을 펴 양쯔강[揚子江] 하류의 곡창지대를 점령하여 군웅(群雄)을
정복하고, 1368년 금릉(金陵:南京)에서 즉위하여 국호를 ‘명’, 연호를 ‘홍무(洪武)’라 하였다. 그
가 명의 태조(太祖:洪武帝)이며, 처음으로 일세일원제(一世一元制)를 채택하고 시정(施政)의 기본방침
을 ‘한족의 부흥’으로 삼았다. 같은 해 가을에는 원나라의 수도인 대도(大都:北京)를 함락하여 원의
세력을 북쪽으로 몰아내고, 71년 쓰촨[四川]을 평정하여 전국토를 정복함으로써 사상(史上) 강남(江南)
에서 일어나 전국토를 통일한 최초의 왕조가 되었다. 또한 외몽골로 쫓겨 북원(北元)을 세운 몽골민족
의 재기(再起)에 대비하여, 다시 둥베이[東北]의 요동(遼東)을 경략하여 몽골과 고려의 연결을 단절하
고, 81년 윈난[雲南]을 평정하여 몽골과 티베트의 제휴를 막았다. 88년 남옥(藍玉)을 파견해 지금의 노
몬한 부근에서 몽골군을 대파하였고, 그 뒤에도 거듭 이를 경략하여 북원을 쇠망시켰다. 이와 같은 건
국사정으로 그의 행정은 몽골적 요소의 제거와 한족 사회에의 적응을 목표로 하고 권력이 일부 관료에
집중하는 것을 피하여 호유용(胡惟庸)·남옥 이하 노련한 공신(功臣)들을 대거 숙청(胡藍의 獄)하였다.
또한 중앙행정관청인 이(吏)·호(戶)·예(禮)·병(兵)·형(刑)·공(工)의 6부를 각각 독립시켜 이를 황
제직속으로 하였고, 군사는 오군도독부(五軍都督府), 감찰은 도찰원(都察院)을 거쳐 황제에 직결되도록
하는 등 3권을 분립시켰다. 지방에 있어서도 행정은 포정사사(布政使司), 군사는 도지휘사사(都指揮使
司), 감찰은 안찰사사(按察使司)에서 관장하게 하여 3권이 동등한 권한으로 중앙에 직속되었다. 이와
함께 궁중제도도 간소하게 정비하고 특히 환관세력의 팽창을 억제하였다. 이로써 송(宋)나라 이래의 황
제 독재권은 더욱 강화되고 율령(律令)·병제(兵制)도 모두 이러한 방향으로 개정되었다. 당(唐)나라
때 집대성된 율령을 형식·내용 등에서 면목을 일신하여 《명률(明律)》 《명회전(明會典)》을 공포,
근대법전의 시행기까지 존속된 법전의 기초를 만들었다. 병제는 당나라 이래의 모병제(募兵制)를 개선
하여 징병할 군호(軍戶)를 정하고 위소제(衛所制)를 채택하였다. 이에 따라 도지휘사사 밑에 전국의 요
소(要所)에 위(衛)·소(所)를 설치, 여기에 군호의 장정을 분속시켰는데, 1위의 군인은 5,600명이고, 1
위는 5개의 천호소(千戶所), 천호소는 10개의 백호소(百戶所)로 구성되어 이를 지휘사·천호·백호 등
이 관장하였다. 그러나 이 새로운 제도 가운데 특징을 이룬 것은 몽골의 남침에 대비해서 태조의 아들
등 24명을 왕으로 삼아 요지(要地)에 배치하여 이를 봉건제후(封建諸侯)와 같이 대우한 일이다. 태조는
이들을 교묘하게 조정하여 일단 혈연에 따른 정권보전은 달성하였으나, 북변(北邊)의 왕들에게는 병권
(兵權)도 부여하였기 때문에 그 세력이 강대해져서, 특히 베이징[北京]에 있던 넷째 왕자인 연왕(燕王)
은 병력을 강화하여 그의 기반을 지방정권화하였다. 태조가 죽고 그의 손자 혜제(惠帝)가 16세로 즉위
하여 중앙집권 강화책으로 왕들의 세력을 감축하기 시작하자 연왕은 반란(靖難의 變)을 일으켜 4년 뒤
즉위하였는데, 그가 성조(成祖:처음에는 太宗) 영락제(永樂帝)이다. 그는 대(對)몽골 전략상, 또한 전
통적 적대세력의 중심지인 난징[南京]을 피해 베이핑[北平]을 베이징[北京]이라 개칭하여 천도하고 경
제적 중심지인 강남지방과의 연결을 위해 대운하(大運河)를 개수하여 대규모 조운법(漕運法)을 확립,
재정적 기반을 굳혔다. 그러나 ‘정난의 변’에 대한 논공행상(論功行賞)에 따라 환관을 중용하여 밀정
정치(密偵政治)를 시행하였기 때문에 이것이 뒤에 화근이 되었다. 그는 내란으로 동요된 외정(外政)을
바로잡기 위해 몽골·만주를 여러 차례 공략하여 헤이룽강[黑龍江]까지 위세를 떨쳤고, 구이저우[貴州]
를 내지화(內地化)하였으며, 티베트·윈난을 정복하고 안남(安南:越南)을 병합하였으나, 큰 업적은 남
해의 원정이었다. 1405∼24년 사이 정화(鄭和)·왕경홍(王景弘)에게 선박 60척, 선원 3만을 주어 전후
6회에 걸쳐 인도양안(印度洋岸)에서 아프리카 동안(東岸)까지의 여러 나라에 파견하여 국위(國威) 선양
과 무역진흥에 힘써 30개국에서 입공(入貢)하고 한인(漢人)들에게 해외를 보는 눈을 뜨게 하였다. 명나
라의 기반은 이 2대 사이에 확립되어 15세기 중반 이후는 내정(內政)에 힘을 기울여 왕들의 세력 감축
에 성공하였으나 외정에서는 수세(守勢)에 몰렸다. 1449년 몽골의 한 부족인 오이라트부(部)의 남침으
로 친정(親征)에 나선 영종(英宗)이 포로가 되고(土木의 變), 수도도 포위되어 명신(名臣) 우겸(于謙)
의 책략으로 멸망의 위기는 벗어났으나, 이후 장성(長城)을 수축하고 9변진(邊鎭)을 설치하여 다수의
병력을 배치하는 등 방위에 힘을 기울였다. 16세기에 들어서 즉위한 무종(武宗:正德帝)은 환관 유근(劉
瑾)에게 전권(專權)을 맡김으로써 그의 치세는 내란으로 일관하였다. 다음의 세종(世宗:嘉靖帝)은 도교
(道敎)를 광신하였기 때문에 여러 대에 걸쳐 축적한 국고를 탕진하여 재정궁핍 속에 30년간 알탄이 이
끄는 몽골족에게 수도 근교까지 침탈되었고, 남동해안 지방에는 왜구(倭寇)가 횡행하여 ‘북로남왜환
(北虜南倭患)’에 시달렸다. 16세기 말에 이르러 신종(神宗:萬曆帝)은 명조의 퇴세를 만회하기 위해 장
거정(張居正)을 등용해 내정개혁을 단행하였다. 그는 전국적으로 토지를 측량·검사하고, 이미 지방에
서 시행하던 전세(田稅)와 정세(丁稅)를 일원화하여 은납세법(銀納稅法:一條鞭法)을 확립해서 재정을
건전화하고 화이허강[淮河]·황허강[黃河]의 치수공사를 진행하는 등 치적을 쌓았으나 시정 10년 만에
장거정이 죽자 환관을 중용하여 내정은 다시 문란해졌다. 이와 함께 발배(拜)·양응룡(楊應龍)의 난 및
임진왜란에 따른 조선에의 원병(援兵)으로 국가재정이 악화되어 이를 광산개발에 의한 상세(商稅)의 증
수(增收)로 보충하려 했으나 그것은 단지 주구(誅求)의 구실에 지나지 않았다. 또한 이 당시 일어난 만
주족(淸)의 정토비(征討費)로서 요향(遼餉)이라는 부가세를 두었으며 초향(剿餉)·연향(練餉) 등 갖은
명목의 부가세를 징수함으로써 민폐는 극에 달했다. 한편 정계에서는 재야의 비판세력인 동림당(東林
黨)과 정신(廷臣)과의 당쟁(黨爭)이 태자 책립문제로 첨예화하여 암흑의 권력투쟁 속에 내외정치는 파
탄 직전에 이르렀다. 1627년 의종(毅宗:崇禎帝)이 즉위한 후 환관 위충현(魏忠賢) 일파를 제거하여 당
쟁을 수습하였으나 기근농민의 반란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특히 산시[陝西]의 이자성(李自成) 등은 명
나라의 수도를 함락, 의종이 자살함으로써 명나라는 멸망하였다(1644). 이자성은 급거 귀환한 명장(明
將) 오삼계(吳三桂)와 청군에게 토멸되고, 명의 왕들은 청군에 항거하여 화중(華中)·화남(華南)에서
싸웠으나, 61년 영명왕(永明王)이 버마에서 잡힘으로써 잔존세력의 항쟁도 종식되어 전국토는 완전히
청나라의 세력권이 되었다. 이 44∼61년 명의 잔존세력을 남명(南明)이라고 한다.
【사회·경제】 태조는 민생안정을 위해 인구과밀한 강남에서 황폐한 강북으로 농민을 이주시키고, 부
유층을 수도로 불러들여 경제부흥에 주력하였다. 이로써 사상 최초로 남에서 북으로의 인구이동현상이
일어나고, 윈난·구이저우의 호구도 늘어나서 총인구는 처음으로 6,000만을 넘어섰다. 이 호구를 군호
(軍戶)·민호(民戶)·장호(匠戶)·조호(戶) 등 4종류로 구분하여 각각 군사·농상(農商)·장작(匠作)·
제염(製鹽)에 종사하게 하였다. 이 호구는 그 대부분이 민호로서, 주현(州縣)의 이갑제(里甲制)라는 자
치조직에 편성되었다. 이갑제는 110호를 1리로 하고, 이 가운데 부유호(富裕戶) 10호를 이장호(里長戶)
로, 나머지 100호를 갑수호(甲首戶)로 해서 10호씩 10갑으로 나누어 1년 교대로 이장 1명과 갑수 10명
이 출역(出役)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이들이 주로 맡은 일은 부(賦)와 역(役)의 공평한 부과였다. 당시
전토(田土)에는 관전(官田)과 민전(民田)이 있었고, 국유지인 관전은 조(租:소작료)를, 민유지인 민전
은 세를 바쳤다. 또한 관전에는 학전(學田)·직전(職田)·황장(皇莊), 제왕(諸王) 공신의 장전(莊田)
및 둔전(屯田)이 있었으며, 둔전은 다시 군둔(軍屯)·민둔(民屯)·상둔(商屯)의 구별이 있었다. 태조는
중국 역사상 최초로 전국 토지의 실지측량을 시행하여 ‘어린도책(魚鱗圖冊)’이라는 토지대장을 만들
고, 이장으로 하여금 부역황책(賦役黃冊)이라는 조세(租稅) 겸 호적대장을 만들게 하였다. 이장 및 갑
수(甲首)는 이를 바탕으로 부(賦)는 전토(田土)를, 역(役)은 16세부터 60세까지의 성정(成丁)을 대상으
로 부과하였다. 또한 이(里)에서 덕망 있는 연로자를 뽑아 이를 이노인(里老人)이라 하여 이민(里民)의
교화 및 쟁송(爭訟)을 맡도록 하고, 육유(六諭)라는 교육강령을 공포하여 사학(社學) 등을 세워 교육시
켰다. 태조는 권농(勸農)에도 힘써 처음에 곡물의 자급생산을 주로 한 농업도 후에는 상업적 작물의 생
산으로 발전시켰다. 특히 목화(木花)는 전국적으로 보급되었으며, 면직공업은 송강부(松江府)를 중심으
로 발달되어 전국적 시장을 형성하였고, 도시에는 고급품도 출하하였다. 또한 뽕나무 재배도 장쑤[江
蘇]의 타이후호[太湖] 주변과 쓰촨 등지에서 성행하였고, 면직물공업도 쑤저우[蘇州]·항저우[杭州] 등
에서 발달하였다. 이 밖에 장시[江西]의 도자기, 푸젠[福建]·저장[浙江]의 칠기(漆器), 광둥[廣東]의
철기, 후광[湖廣]의 쌀, 광둥·푸젠·장시의 설탕, 푸젠의 쪽[藍] 등 지방의 특산물이 상품으로 생산된
것이 특징을 이루었다. 이 특산물은 북방 및 내륙의 쌀·보리·무명 등과 교환되기도 하고 수도와 구변
진 등 큰 소비지에도 유통되었다. 이들 상품의 중개자는 산시[山西]와 신안[新安]의 상인들로, 이들은
16세기 후반 이후 중국의 상권(商圈)을 양분(兩分)한 형태로서 동향(同鄕)의 동업자가 결합하여 요지
(要地)에 설치한 회관·공소(公所)를 거점으로 활약하였다. 활발한 상품유통에 대해서 정부는 전국 수
백 개소에 세과사국(稅課司局)을 설치하여 과세를 하고, 특히 보초(寶:紙幣)의 유통을 위해 수도의 성
문이나 대운하의 연안에 초관(關)을 설치하여 보초로써 징세(徵稅)하였다. 보초는 주요 통화이고 동전
은 보조통화였으나, 불환지폐인 보초는 유통이 잘 안 되고 민간에서는 은(銀)을 많이 사용하여 1436년
에는 조세의 은납(銀納)도 공인되어 금화은(金花銀)이 유통되기 시작하였으며, 16세기에는 요역(役)의
은납도 시행되어 은의 화폐적 기능이 확립되었다. 대외무역은 처음에 배외(排外)·국수정책(國粹政策)
에 따라 거의 단절되었으나 영락제의 외정(外征) 및 정화(鄭和)의 서정(西征) 이후 여러 나라와의 조공
무역(朝貢貿易)이 열려, 북변에서는 마시(馬市)·목시(木市)가 번창하였고, 남동연해에서는 닝보[寧波:
浙江]·취안저우[泉州:福建]·광저우[廣州:廣東]·운둔(雲屯:越南)에 시박사(市舶司)를 설치하여 일본
과 류큐[琉球] 및 남해 여러 나라와 교역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무역은 모두 정부통제하의 이민족 회유
책의 색채가 짙었고, 왜구의 방해도 있었으며 이익을 정부가 독점한 것 등으로 쇠퇴하였다. 15세기 후
반 이후에는 이에 대신해서 저장·푸젠·광둥 등의 향신(鄕紳:퇴직관리) 등에 의한 밀무역이 정부의 통
제무역·해금책(海禁策)에 저항하면서 번영하였고, 그 저항은 중소 상인과 고용인 등에까지 파급되어
1567년 해금령을 해제하였다. 이에 앞서 17년 이후 포르투갈인(人)이 내항하여 마카오에 무역근거지를
잡고, 이보다 조금 늦게 에스파냐도 마닐라시(市)를 건설하여 극동 무역을 시작하게 되어 명의 생사(生
絲)·견직물·면포·자기·철기 등이 많이 수출되고, 대신 대량의 은이 수입되었다. 이러한 상공업의
발달에 따라 도시도 새로이 일어나고 경제도시라 할 수 있는 것도 주로 강남을 중심으로 속출하였는데,
대도시 가운데에는 상공업 노동자만 수만에 이르는 곳도 있었다. 이와 같은 현상은 농촌에서의 부역(賦
役)이 은납제(銀納制:一條鞭法)로 바뀜에 따라 부역황책(賦役黃冊)이 무용지물이 되고 이갑제도 붕괴되
어 농촌노동력이 도시로 유출되었기 때문이다. 이갑제에 대신해서 10호를 단위로 연대책임을 지는, 부
락의 자경조직(自警組織)인 십가패법(十家牌法)이 채택되고, 이것은 다시 부락의 상호부조·수양 등을
목적으로 하는 향약(鄕約)과 함께 보갑법(保甲法)으로 발전하였다. 한편 전토(田土)는 도시에 사는 상
인·관료 등 부재지주에 많이 점유되고, 전호(佃戶:소작인)들은 생존권을 위한 항조운동(抗租運動)을
전개하고 고공(雇工)·용공(傭工) 등 고용노무자와 결합해서 노변(奴變)을 일으키는 일도 많았다. 또한
도시의 수공업 노동자들도 민변(民變)이라 불린 반세운동(反稅運動)을 일으켰는데, 노변·민변은 15세
기 후반 등무칠(鄧茂七) 등이 일으킨 농민반란과 함께 하층민이 농공일체가 되어 사회적 자각을 표출한
것으로 시대의 전환을 암시하는 현상이기도 하였다.
【문화】 문화정책은 처음에는 복고국수주의(復古國粹主義)·몽골색 불식에 힘을 기울였으나 뒤에는 경
제발달, 서민생활의 향상, 도시의 번영, 교육의 보급에 따라 대중적 색채가 짙어졌다. 또한 유럽의 과
학사조가 들어와 그 영향도 받았다. 먼저 사상면에서는 몽골인에 압박을 받은 유학(儒學)의 전통적 지
위를 회복하고자 영락제 때에는 송나라 주자학(朱子學)의 부흥에 힘써 송학(宋學)을 집대성해서 《성리
대전(性理大全)》 《사서대전(四書大全)》 《오경대전(五經大全)》의 주석서(注釋書)를 칙찬(勅撰)하였
는데, 이것은 과거(科擧)의 참고서가 되어 사상통제적 경향이 나타났다. 그러나 중기에 왕수인(王守仁:
陽明)이 송나라 육구연(陸九淵)의 학설을 계승하여 실천을 중시하는 인격주의의 이상철학(理想哲學)을
주창, 유학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은 뒤 그 학설은 양명학(陽明學)으로서 크게 번져 명말에는 사상계
를 주도하였다. 불교는 원대(元代)에 라마교(敎)가 성행하여 침체에 빠졌으나 명대에는 국가적 보호를
받아 대장경(大藏經)도 간행되었다. 뒤에 도교(道敎)가 보호를 받아 불교는 강력한 압력을 받았으나,
침잠(沈潛) 속에 사상적으로는 활기를 띠어 교의상(敎義上) 각 종파를 통합하려는 혼융불교(混融佛敎)
가 주창되었으며 또한 유·불·도 3교의 조화설도 발달하였다. 도교도 크게 성행하여 《도장(道藏)》을
집성하였고, 가경제(嘉慶帝)의 열광적 신앙에 힘입어 전성기를 이루었으나 일반적으로는 미신적 형태로
민간에 보급되었다. 학문 숭상의 기풍도 짙어 성조(成祖) 때는 방대한 백과사전인 《영락대전(永樂大
典》 등 많은 칙찬서(勅撰書)가 간행되고, 민간에서도 저장[浙江] 범씨(范氏)의 천일각(天一閣), 장쑤
[江蘇] 모씨(毛氏)의 급고각(汲古閣)과 같은 대장서가(大藏書家)가 나와 역대의 정사(正史)가 합각(合
刻)되어 남감본(南監本)·북감본(北監本)·급고각본(汲古閣本) 등이 간행되었다. 또한 《사기평림(史記
評林)》 《한서평림(漢書評林)》 《십팔사략(十八史略)》 《당송팔대가문(唐宋八大家文)》 《당시선(唐
詩選)》 등 계몽서도 유행되어 학문은 민간에 널리 보급되었고, 《천하일통지(天下一統志)》 《광여도
(廣輿圖)》 《직방지도(職方地圖)》 등 지리서와 각 지방지(地方志)도 많이 간행되었다. 그러나 특히
이채를 띤 것은 경세실용학(經世實用學)과 유럽 학술의 유입이었다. 전자는 양명학이 좌·우 2파로 갈
라진 뒤 우파가 제창한 실학주의(實學主義)에서 나온 것으로, 고염무(顧炎武)·황종희(黃宗羲) 등은 공
소(空疎)한 양명학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입장에서 정치와 사회에 실제적으로 도움이 될 학문을
확립하였는데, 이 학파는 후에 청대에서 성행한 고증학(考證學)의 선구가 되었다. 후자는 특히 예수회
의 선교사가 포교수단으로 전한 유럽의 과학이다. 마테오리치[利瑪竇]·아담샬[湯若望] 등의 천문·역
법(曆法)·수학·지리학·포술학(砲術學)은 환영받았으며 그 중에서도 포술은 청군과의 싸움에서도 활
용되었다. 또한 그리스도교의 세례를 받고 그 학문을 배운 서광계(徐光啓)·이지조(李之藻) 등 지식인
들은 재래의 학문이나 종교에 자극을 주었다. 서광계의 《농정전서(農政全書)》 《기하원본(幾何原
本)》, 이시진(李時珍)의 《본초강목(本草綱目)》, 송응성(宋應星)의 농공업을 도해(圖解)한 《천공개
물(天空開物)》, 조사정(趙士禎)의 총포구조를 기술한 《신기보(神器譜)》 등은 모두 유럽 과학의 많은
영향을 받은 저서이다. 또한 리치가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를 소개하자 중화사상(中華思想)을
믿고 있던 한족에게 미지의 세계를 알려 줌으로써 세계관에 영향을 끼쳤다. 문학에서는 복고조(復古調)
의 시문, 서민적인 색채가 짙은 소설과 희곡이 특징을 보여 사회계층의 상·하 구별 없이 문화적 융합
을 이루었는데, 특히 소설과 희곡은 대표적인 명대문학으로, 한(漢)의 문(文), 당(唐)의 시(詩), 송의
사(詞), 원(元)의 곡(曲)과 견줄 만하다. 이 중 소설은 문어체(文語體)보다는 백화체(白話體)의 장편
(長篇)이 주류를 이루어 사대기서(四大奇書)라 일컫는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 《수호전(水滸傳)》
《금병매(金甁梅)》 등은 모두 명대에 완성된 것이고, 《금고기관(今古奇觀)》은 송·원·명 3대의 단
편명작 40편을 집성한 것이다. 이 소설들은 모두 유·불·도 3교의 사상이 융합되어 있는 점이 특징이
다. 희곡은 처음에 북곡(北曲:雜劇)이 성행하였으나 남곡(南曲:傳奇)에도 고명(高明)의 《비파기(琵琶
記)》와 같은 명작이 있었다. 중기 이후에는 남곡의 노래양식과 악기를 통일한 곤곡(崑曲)이 만들어져
남곡은 만력(萬曆) 때 전성기를 맞아 탕현조(湯顯祖:臨川)는 당대 제일의 걸작 《옥명당사몽(玉茗堂四
夢:還魂記·紫釵記·南柯記·邯鄲記)》을 만들었으며, 그 중 <환혼기>는 <모란정환혼기(牡丹亭還魂記)>
라는 별칭으로 후세에 전래되어 인기를 얻었다. 회화는 명대에 들어 급속히 복고운동이 진전되어 원대
에 폐지된 화원(畵院)을 재건하여 궁중화가를 양성하고 화가를 우대하여 작품활동도 활기를 띠었다. 특
히 선덕제(宣德帝) 이후 많은 유명화가가 활약하여 마원(馬遠) 계통의 예단(倪端), 하규(夏珪) 계통의
주문정(周文靖), 후에 절파(浙派)의 개조(開祖)가 된 대진(戴進) 및 이재(李在) 등이 당시의 화단을 주
도하였다. 절파의 화풍은 마원·하규의 송나라 원체화(院體畵)에다 원나라 초에 화승(畵僧)들이 즐겨
그린 수묵체(水墨體)를 배합한 거친 필법으로 다룬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내용이
빈약하고 형식에 치우쳐 퇴색하였다. 한편 당초에는 화원의 후원자였던 명나라의 황제들은 예술을 이해
하지 못하고 화가의 자유를 속박하였기 때문에 화가의 활약도 점차 침체되었다. 이러한 화원의 어용화
가(御用畵家)와는 달리 재야의 화가들이 점차 두각을 나타내 명대의 화단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었는
데 그 중 손꼽히는 화가는 구영(仇英)이다. 그는 남송화원(南宋畵院)의 화가 진각(陳珏)을 개조로 하는
원파(院派)에 속하여 그 정통화풍을 계승하면서도 이당(李唐)·마원·하규와 문인화가인 심주(沈周)의
그림양식을 배합하여 원파의 영역을 벗어나 일가를 이루었다. 재야 화가 속에서 문인화(文人畵)가 크게
발흥한 것도 이 시기이다. 화원이 쇠퇴하고 원파의 형식화가 굳어져 가자 이에 대항해서 문인화가들이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 선두에 나선 것은 심주와 그 제자인 문징명(文徵明)으로 이들은 원대의 4대가
(黃公望·吳鎭·倪讚·王蒙)와 북화(北畵)의 필법을 조화해서 명대 남화를 부흥하는 기초를 닦았다. 그
러나 이들은 원대의 4대가에 비해 기술·기백에서 매우 뒤졌다. 가정제(嘉靖帝) 이후 17세기 중엽까지
문인화는 전성기를 맞아 많은 문인화가를 배출하였으나, 뛰어난 작품을 남기지 못하였다. 문징명 이후
의 문인화가로는 문백인(文伯仁)·동기창(董其昌)·예원로(倪元) 등이 알려졌다. 조각은 남북조·수당
(隋唐) 때와 같은 불교조각의 전통은 거의 소멸되고, 부처·보살의 조상(造像)보다는 관음(觀音)·나한
(羅漢)의 조상이 눈에 띄게 되었다. 명초에는 원대의 흐름을 이어 천의관음상(天衣觀音像)과 같은 목상
(木像)도 보였으나, 산시성[山西省] 타이위안[太原] 진츠전[晉祠鎭]의 봉성사(奉聖寺)에서 조상한 나한
상(羅漢像)에 이르러서는 명대의 특색이 나타나 나한상 군상형성(群像形成)의 원형을 볼 수 있다. 이
밖에 베이징 시산산[西山]에 있는 와불사(臥佛寺)의 청동석가열반상(靑銅釋迦涅槃像)과 벽운사(碧雲寺)
의 좌불오존상(座佛五尊像)을 들 수 있으나 모두 양감(量感)은 있어도 조각으로서는 생동감이 떨어진
다. 도자기는 송대까지 성행한 양질(良質)의 청자·백자·천목(天目:찻잔의 일종) 종류는 쇠퇴하고, 화
려한 무늬를 입힌 청화백자(靑華白磁)·적회(赤繪)·진사(辰砂) 종류를 만들게 되었다. 명초에 육조(六
朝) 이래의 유명한 자기 생산지인 징더전[景德鎭]에 어기창(御器廠:官窯)을 설치하여 명대의 자기를 대
표하는 명품은 거의 이곳에서 만들어냈는데, 청화백자·진사는 선덕제 때에, 적회는 가정시대에 각각
그 일품(逸品)이 생산되었다. 칠공(漆工)은 송·원시대의 기교를 더욱 발전시켜 도안(圖案)에도 산수·
인물·화조(花烏) 등 변화를 보였다. 건축은 명초에 난징[南京]에 축조한 황성·궁성이 지금은 없어졌
으나 이를 본뜬 베이징의 궁성이 남아 있어 현재도 베이징 경관(景觀)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또한 하
늘에 제사지내는 천단(天壇)도 이 시대에 축조되었고, 불교건축으로는 부다가야 대탑(大塔)의 형식을
본뜬 금강보좌(金剛寶座)가 세워져 대정각사(大正覺寺:五塔寺)의 탑(1473 건립)이 그 유구(遺構)로 남
아 있다.
【고려·조선과의 관계】 약 1세기 동안 원나라의 간섭을 받아온 고려 조정은 명이 건국을 선포한 1368
년(공민왕 17) 이후에도 원의 잔존세력 때문에 친원(親元)·친명(親明) 양파로 갈려 확고한 외교정책을
펴지 못하고 그 후 20년 동안 대명(對明) 관계는 혼미(昏迷)를 거듭하였다. 공민왕은 즉위 초에 원나라
의 쇠퇴한 기미를 알고 자신의 몽골풍 머리(剃頭髮)를 고치고, 1356년에는 원나라 기황후(奇皇后)의 오
빠인 기철(奇轍) 등 원나라에 붙어 악행을 저지른 자들을 죽이고, 북방의 실지(失地) 일부를 찾았으며,
원의 연호를 폐지하는 등 진취적인 정책을 취하였으나 압력을 받아 다시 원의 연호를 사용하기도 하였
다. 그러나 69년 명으로부터 개국을 알리는 사신을 보내오자 이를 환영하고 성준(成准) 등을 처음으로
명나라에 보내어 명태조의 성절(聖節:생일)을 축하하였고, 앞서 일시 정지한 원의 연호 지정(至正)을
다시 폐지하였다. 70년, 고려는 명의 홍무(洪武) 연호를 쓰기로 결정하고, 이성계(李成桂)로 하여금 원
의 동녕부(東寧府)를 치게 하여 원과 절교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 사이 북원(北元:1368년 이후 원을 북
원이라 함)에서도 꾸준히 고려에 사신을 보내 회유를 계속하였고, 74년 공민왕이 죽고 우왕(禑王)이 즉
위한 뒤 정권을 장악한 시중(侍中) 이인임(李仁任)은 친원(親元)으로 급변, 이 해 고려에 왔다가 돌아
가던 명나라 사신 채빈(蔡斌)은 고려의 호송관 김의(金義)에게 살해되고, 북원은 고려에 사신을 보내
왕을 책봉하는 등 고려와의 관계를 회복하였다. 그러나 날로 강성해가는 명의 세력도 무시할 수 없어
고려는 명·북원에 등거리 외교로 대처하다가 85년에 이르러 명사(明使)가 와서 고려와의 통교(通交:通
聘)를 통고하고, 공민왕에게 시호를 추증, 왕을 책봉함으로써 두 나라 관계는 정착되었으며, 87년에는
원복(元服)을 폐지하고 명제(明制)로 바꾸었다. 그러나 이렇게 정착된 양국관계도 수년 후 고려왕조의
붕괴로 끝났다. 92년 조선왕조를 세운 이태조는 즉위 직후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고려권지국사(高麗
權知國事) 자격으로 새로운 왕조의 개창을 보고하여 승인을 받고 또 국호의 정정을 요청하였으나 국호
와 국왕의 칭호는 허락하지 않았다. 93년 태조는 말 9,800필을 보내고 고려 때 명으로부터 받았던 고려
국왕의 금인(金印)을 반환하였으나 명은 여진(女眞) 및 세공(歲貢)문제 등을 이유로 조선국왕의 인신
(印信)을 쉽사리 보내 주지 않다가 태종이 즉위한 1400년에 조선국왕의 고명(誥命:왕위승인문서)과 인
장을 보내와 대명(對明) 외교관계는 조선왕조 수립 후 8년 만에 정상화되었다. 1408년에는 이태조가 죽
자 명은 고려 공민왕 이후 처음으로 ‘강헌(康獻)’이라는 시호를 보내와 이후 조선은 역대의 국왕이
즉위하면 반드시 명에 주청(奏請)하여 ‘책봉(冊封)’이라는 승인을 받았고, 국왕의 사후에는 이를 고
하여 시호를 받는 것을 정례화하였다. 또 명의 연호를 사용하고 국가의 주요 대사를 보고하여 그 의견
을 듣는 등 ‘사대(事大)’ 형식을 취하였으나 실제에 있어서는 내정·외교에 근본적인 제약이 없고 자
주적이었다. 따라서 조선과 명의 관계는 대등한 관계는 아니었으나 종주·종속관계도 아니고, 명은 명
목상 종주적 위치를 유지하였다고 할 수 있다. 명에의 세공문제(歲貢問題)는 처음에 금 150냥, 은 700
냥의 과중한 부담이 포함되어 있어 이를 다른 토산물로 대체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이를 듣지 않다가 29
년(세종 11) 이를 면제하고 우(牛)·마(馬)·포(布)로 대신하게 하였다. 대체로 이후부터 조선과 명은
경제·문화의 교류가 본궤도에 올라 그 후 200년간 별다른 변동 없이 그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외교
에 있어서도 명나라는 특별한 일이 있을 때 수시로 사절(使節)을 보내왔으나 조선에서는 원단(元旦)에
보내는 정조사(正朝使), 황제부부의 탄일에 보내는 성절사(聖節使)와 천추사(千秋使), 동지에 보내는
동지사(冬至使) 등 정례적으로 연 4차 사행(使行)을 보냈다. 이 밖에 사은사(謝恩使)·주청사(奏請
使)·진하사(進賀使)·진위사(陳慰使)·변무사(辨誣使) 등을 수시로 보냈는데, 사행일행은 40여 명이
공인된 인원이었다. 이 사행에 따르는 조공은 일종의 공무역(公貿易)으로 예물과 답례물 형식으로 물물
교환되었으며, 이와 별도로 사행일행이 가지고 간 물화에 의해 사무역(私貿易)이 성행하였는데, 북경에
서는 조선사신이 머무는 회동관(會同館)이, 서울에서는 명사가 머무는 태평관(太平館)이 사무역의 중심
지였다. 명에서 제정한 명률(明律)은 조선 초에 《대명률직해(大明律直解)》라는 이름으로 번역[吏讀
文]되어 조선의 기본법인 《경국대전(經國大典)》의 창제에 많은 도움을 주었고, 《경국대전》의 <형전
(刑典)>을 운용하는 데 그 해당조문이 없을 때는 456개조로 되어 있는 《대명률》의 <형률>을 적용하도
록 하는 등 법률운용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조선은 국초부터 특히 해마다 명나라로부터 많은 서적을
구입하고 이를 재간행하여 그 문화를 수입하는 데 적극적이었으나, 한편으로는 명의 견포(絹布) 등 고
급물품을 들여와 사치풍조를 조장하고 국내의 생산을 위축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선·명 관계에 있
어 특기할 사항은 무엇보다도 조선의 임진왜란 때 명이 3차의 원군(援軍)을 파병하여 조선을 도왔다는
사실이다. 명은 이 무렵 말기적 증세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여 도처에서 반란이 일고 재정적으로도 어
려운 형편이었으나 조선원정을 단행하여 경제적 부담이 막대하였고, 이 틈에 만주의 청세력은 더욱 팽
대해져 조선은 정묘호란·병자호란 등 국난을 겪게 되고 명나라는 청나라에 멸망되었다.
청(淸)
명(明)나라 이후 만주족(滿洲族) 누르하치[奴兒哈赤]가 세운 정복왕조(征服王朝)로서, 중국 최후의 통
일왕조(1636∼1912). 중국의 근대사는 이 왕조 말기부터 시작된다.
【정치과정의 개관】 만주인은 수렵·어로를 주된 생업으로 하는 퉁구스족의 일파로서 본래 여진(女眞)
또는 여직(女直)이라 불리었다. 그 일부는 12세기에 화베이[華北]로 진출하여 금(金)왕조를 세웠으나,
만주에 잔류한 대부분은 점차 정착농업을 영위하였으며, 명조 말기에는 해서(海西)·건주(建州)·야인
(野人)의 3부로 나누어져 명나라의 간접통치를 받고 있었다. 명나라는 여진족의 여러 부족에 대하여 시
종 분열정책을 취하였으나, 조선의 임진왜란(1592∼98)을 전후하여 만주에 대한 명나라의 통제력이 이
완된 틈을 타서 건주좌위(建州佐衛)의 수장(首長) 누르하치가 여진의 여러 부족을 통일하고 1616년 스
스로 한(汗)의 위(位)에 올라 국호를 후금(後金)이라 하고, 선양[瀋陽]에 도읍하였다. 이 사람이 청나
라의 태조이다. 명나라는 이를 제압하려 하였으나 오히려 사르후의 싸움에 대패하여(1619) 랴오허강[遼
河] 동쪽을 잃었다. 이어 일어난 황타이지[皇太極:太宗]는 먼저 명과 조선의 연합을 막기 위해 두 번에
걸쳐 조선에 침입하였다(1627·36). 또 내몽골로 진출하여 차하르부(部)를 정복하여 대원전국(大元傳
國)의 새(璽)를 얻음으로써 36년 새삼스레 황제의 위에 올라 국호도 대청(大淸)으로 고쳤다. 이 시기에
명왕조의 사회적 모순은 궁정의 당쟁과 농민반란으로 집중되어 나타났는데, 44년 이자성(李自成)을 지
도자로 하는 농민군은 드디어 베이징[北京]에 진입, 명나라를 멸망시켰다. 이때 농민군을 두려워한 지
배계급은 청군과 강화(講和), 산하이관[山海關]을 지키고 있던 오삼계(吳三桂)는 자진하여 청군을 관내
로 안내하여 베이징을 회복시켰다. 태종의 아들 순치제(順治帝)는 재빨리 이자성 토벌의 주도권을 장악
하고, 그를 후베이[湖北]로 몰아내 궁사(窮死)시킴과 동시에 중국 본토 지배의 대의명분을 획득하였다.
이민족 지배에 대한 저항은 그 후 복왕(福王)·노왕(魯王)·당왕(唐王)·계왕(桂王) 등 구왕족 소위 남
명(南明)의 움직임으로 나타났는데, 농민군을 적대시하여 제휴하지 않았으므로 그 명운이 짧아 대세를
회복시키지는 못하였다. 오히려 청조의 중국 통일에 있어서의 적은, 중국 정복에 협력한 평서왕(平西
王) 오삼계, 평남왕(平南王) 상가희(尙可喜), 정남왕(靖南王) 경중명(耿仲明)의 3번(三藩)이었으며, 수
년에 걸친 3번의 난의 진압과, 거의 때를 같이하여 명나라 최후의 유신(遺臣) 정성공(鄭成功)의 자손이
귀순함으로써 청나라는 제4대 황제 강희제(康熙帝)에 이르러 비로소 전중국을 통일하였다. 더구나 강희
제는 1689년 러시아제국과 네르친스크조약을 맺음으로써 19세기 중엽까지, 러시아제국이 동진(東進),
남하하는 것을 억제하였다. 또 간간이 분쟁이 일던 조선과의 경계도 정하여 백두산에 정계비(定界碑)를
세웠다(1712). 또 계속되는 옹정(雍正)·건륭(乾隆)의 3대에 걸쳐 중앙아시아의 중가르부(準部)를 토벌
하고 이에 따라 칭하이[靑海]의 속령화(屬領化)와 티베트 보호와 평화를 촉진시키면서 1759년에는 중가
르부·위구르(回紇:후의 新疆省)의 지배를 확립하였다. 이리하여 이 3대에 걸쳐 청왕조는 오늘날의 중
국 영토의 조형(祖型)이 되는 중국 사상 최대의 판도를 확립함과 아울러, 동아시아 거의 전역을 그 위
령(威領)하에 두었고, 내정의 충실에도 힘입어 그 극성기(極盛期)를 가져왔다. 그러나 건륭 말년, 이미
변경에서 조짐을 보이고 있던 이슬람교도·먀오족[苗族] 등의 여러 반란은, 얼마 안되어 가경(嘉慶) 연
간에 이르자 백련교(白蓮敎)의 후베이[湖北] 등 5개 성에서 대반란으로 폭발하였다. 백련교의 난은 10
년(1796~1804)에 걸쳐 진행되었는데, 이를 통하여 국가권력의 지주인 8기(八旗:軍隊)의 무력함이 폭로
되었으며, 거기다 권신(權臣) 화신(和?의 미증유의 수회사건이 상징하듯, 관료정치의 부패로 인하여 청
왕조의 지배는 뿌리부터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더욱이 유럽 자본주의의 세계 지배의 파두(波頭)가 중국
에 들이닥침으로써 결정적인 청왕조의 쇠퇴를 가져왔다. 이미 건륭 연간의 매카트니, 가경 연간에 애머
스트 등 두 차례의 특사(特使)를 통해 산업자본의 판로 개척을 기도하다가 거절당한 영국은, 1840년 아
편문제로 발단된 분쟁을 계기로 무력에 의해 중국을 개국시켰으며(아편전쟁), 프랑스·러시아·미국도
그 뒤를 따랐다. 이후 열강의 청조 지배는 중국에 대한 반식민지적 지배의 매체로서의 성격을 짙게 하
였고, 따라서 열강의 자본주의(제국주의)에 대한 직접·간접의 저항이 중국사 전개의 원동력이 되기에
이르렀다. 아편전쟁을 발화제로 발발한 중국 사상 최대의 농민전쟁인 ‘태평천국(太平天國)의 난’에
서, 홍수전(洪秀全) 등이 봉건적 제관계의 폐기를 지향하여 싸우면서, 궁극적으로는 청왕조를 예속시킨
외국 세력과 대결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이미 그러한 상황을 뜻하는 것이다. ‘태평천국의 난’은
청왕조의 정규군이 아닌, 사실상 증국번(曾國藩)·이홍장(李鴻章) 등 지방의 한인(漢人) 관료가 조직한
개인집단, 즉 향용(鄕勇:湘軍·淮軍)의 힘에 의존하여 진압되었는데, 이 때문에 지방분권적 경향이 강
화되고 후의 군벌(軍閥) 할거의 소지를 만듦과 동시에 관계(官界)에서의 한인의 지위를 높이는 결과를
낳아, 그들이 주체가 되어 위로부터의 중국 근대화의 최초의 시도인 ‘양무운동(洋務運動)’이 추진되
었다. 그러나 그것은 전통적 체제를 옹호하고 보수(保守)하기 위한 군사공업의 이식을 주안으로 하였을
뿐만 아니라 양무파 관료가 기업을 사물화(私物化)하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 오히려 민족자본주의의
발전을 저해하였다. 청·일전쟁에서의 패배는 이같은 양무파 노선의 파산을 결정적으로 만들었다. 한
편, 제국주의시대로 이행(移行)해 가는 심각한 위기감은, 단순히 유럽 선진국의 기술 이식뿐 아니라,
전통체제 그 자체를 변혁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캉유웨이[康有爲] 등의 변법자강운동(變法自强運動)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광서제(光緖帝)까지 동조한 변법자강운동도 서태후(西太后) 등 수구파의 반대로
겨우 100일 유신(維新)으로 막을 내렸고, 의화단(義和團)운동을 계기로 한 외국 군대의 베이징 진주로
수구파가 최종적으로 몰락하였을 때는 입헌안(立憲案)을 비롯한 여러 개혁안이 처음으로 채용되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어서 중국 민중의 동향은 혁명의 기운으로 향해 달려가고 있었으며 멸만흥한(滅滿
興漢)의 민족주의는 화교·유학생·민족자본가의 반(反)봉건주의와 합류, 쑨원[孫文]이 주도하는 중국
혁명동맹회(中國革命同盟會)에 결집되어 신해혁명(辛亥革命:1911)을 성공으로 이끌었으므로 1912년 선
통제(宣統帝) 푸이[溥儀]의 퇴위와 함께 청왕조는 종말을 고하였다. 그것은 또한 중국 민중의 전제군주
제와의 결별이기도 하였다.
【행정】 뒤떨어진 소수민족이었던 만주인이 광대한 중국을 제압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민족을 개병(皆
兵)으로 만들어 압도적인 군사력을 바탕으로 하는 한편, 재래 중국사회의 계급지배 위에 타고 앉아 그
것과 기본적으로 유착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8기의 병제와 중요한 관직에 있어서의 만한병용(滿漢
倂用) 정책을 제외하고는 청나라는 명왕조의 관제를 거의 그대로 답습하였다. 우선 중앙에 최고 정무기
관인 내각 대학사(內閣大學士), 그 집행기관인 6부·5시(寺) 및 감찰기관인 도찰원(都察院)을 두어 각
각 황제 직속으로 하였으나, 얼마 안되어 중가르부 토벌 때에 용병의 신속과 군사기밀 보장을 위해 내
각의 실권자를 선발, 군기처(軍機處)가 신설되자 실권은 그 곳으로 넘겨졌으며, 건륭 초기에는 독립된
기관으로서 군사·국무의 최고 권한을 겸유하기에 이르렀다. 또 이번원(理藩院)이 신설되어, 몽골·신
장[新疆]·시짱[西藏] 등 소위 번부(藩部)의 일을 관장하였다. 서양 제국과의 교섭도 당초에는 그 밑에
서 조공국(朝貢國)과 같은 대우로 전락했으나, 말엽에 이르자 업무의 확대와 제국의 압력에 따라 총리
각국사무아문(總理各國事務衙門)이 설치되었고, 곧 이어 1901년에는 외무부로 승격하였다. 말기 몇 년
동안에는 이 밖의 관제개혁도 시행되었으나, 만인(滿人) 중심의 집권주의는 한인(漢人) 관료의 이반을
초래하여, 오히려 붕괴를 재촉하기만 하였다. 지방 관제에서는, 최고 행정구획인 성(省) 밑에 부(府)가
있고, 부는 다시 주(州)·현(縣)·청(廳)으로 나누어졌으며, 별도로 성 직속의 주·청이 있었다. 성에
는 포정사(布政使)·안찰사(按察使)가 있어 민정(民政)·감찰을 분담하였으며, 전대(前代)에 임시 관직
으로 나타났던 총독·순무(巡撫)를 최고의 지방관으로서 두었는데, 총독을 1, 2개 성에 1명, 순무를 거
의 1개 성에 1명씩 둔 것은 청왕조의 특색이었다. 성에는 또한 제독(提督)·총원(總員)·학정사(學政
使)·도원(道員) 등이 있어서 각각 군사·교육·성 내의 업무를 분담 처리하였다. 부·주·현에는 지부
(知府)·지주(知州)·지현(知縣)이 있었으며, 이들 밑에 백성은 주로 보갑제(保甲制)로 조직되어 있었
다. 백성으로부터 수탈을 일삼던 정부는 커다란 역사적 변화로서 재래의 인두세(人頭稅)와 같은 계보의
정은(丁銀)을 폐지하고, 토지의 단일체계, 즉 지·정은제(地丁銀制)가 옹정(雍正) 초년을 계기로 거의
전국적으로 이루어졌다. 이것은 왕조가 전통적인 일군만민(一君萬民) 체제를 사실상 폐기하고, 기초과
정에 있어서의 지주제(地主制)의 진전을 용인한, 그 위에 기초를 둔 것을 의미한다. 지·정은이 국가
세입 전체에 차지하는 비중은 건륭 연간에는 거의 70 %에 달하였으나, 이에 버금가는 주요 세목인 염과
(鹽課:제염업자와 그 상인에 대한 과세)·관세(關稅:통과세)의 2가지가 점차로 증가하였는데, 특히 청
말에는 관세가 현저히 늘어났다. ‘태평천국의 난’ 진압의 군비로 신설되어, 양무운동(洋務運動)의 재
원으로도 쓰던 이금(釐金)도 이 일종이다. 이와 같은 국가재정의 수탈을 가능케 하는 경제외강제(經濟
外强制)의 기초를 이루고 이민족 지배를 지탱케 한 것은 청왕조 특유의 병제인 8기(八旗)였다. 즉 만주
인을 모두 병사로서 홍(紅)·백(白)·황(黃)·남(藍) 및 그것에 테두리가 달린 8가지 기색(旗色)으로
나눈 세습적인 단체로 편성하였다. 뒤에는 만주인뿐만 아니라 몽골·한군(漢軍)의 8기까지 더하여 합계
24기(旗)로, 기적(旗籍) 20만에 이르렀으나, 그래도 광대한 영토를 경략(經略)·수비하기에 부족하였으
므로, 한인만으로 편성된 녹영(綠營:綠旗)을 설치하고 총독과 순무에 의해 통솔되었다. 팔기의 구성원,
즉 기인(旗人)에게는 기지(旗地)가 지급되어 경제적 자급이 배려되었다. 그러나 경작자로는 한인이 진
출, 빈궁해진 기인(旗人)은 기지를 전당잡히거나 팔아넘기는 일이 많아짐으로써 8기제도는 붕괴되기 시
작하였고, 그 무력함은 백련교의 난에서 백일하에 드러났다. 이 때 민간의용군인 향용(鄕勇)이 나타났
는데, 이들은 태평천국의 난에서 큰 역할을 하였다. 그 후 청왕조도 뒤늦게나마 연군(練軍:8기와 녹영
에서 선발)과 서양식으로 편성한 신군(新軍)을 양성하였으나, 연군과 신군 사이에서 혁명파의 반란이
일어나 신해혁명의 발단이 되었다.
【사회·경제】 청대의 사회는 소수의 기인(旗人) 및 지배계급인 관료층(鄕紳 포함)과 피지배계급인 양
민(良民:農工商 기타)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경제적으로 볼 때 관료층은 거의 모두 지주였으며, 양민
가운데 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은 자작농(自作農)과 전호(佃戶:小作農)로 나뉘어 있었다. 이 가운데 지
주와 전호가 기본적 계층이었으며, 양자 사이의 봉건적 관계가 사회구성의 기축(基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전제국가 체제하에서는 지주층도 또한 지배당하는 존재이며, 관료체계 속에 파고들 수 있
느냐 없느냐에 따라 특권의 유무가 생겼고, 명왕조 말엽 이래의 상품화폐경제의 전개와 때맞추어 재지
(在地) 중소 지주층의 몰락과 관료지주·상인지주의 부재지주로서의 발전이 두드러졌다. 이같은 지주의
존재 형태의 변화는 전호에 대한 통제력을 약화시킴과 함께, 원래 그것이 전호측에서 지주에게 의존하
지 않고 그들이 서로 협력·제휴함으로써 재생산 가능한 체제를 만들어냈다는 변화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기 때문에, 전호층의 계급투쟁, 즉 항조(抗租)의 발생을 용이하게 하였다. 이미 강남(江南) 일대의
농촌에는 명나라 말 이래로 목면·비단[絹]을 중심으로 하는 섬유공업과 기타 수공업이 발달하여, 중국
의 기본 경제지대가 되고 있었는데 이에 따르는 쌀의 부족을 보충하기 위하여 청왕조 초에는 후난[湖
南]·쓰촨[四川] 지방이 새로운 곡창지대로 등장하였다. 또 푸젠[福建]의 사탕수수 재배에 대하여 ‘만
주’의 콩깻묵이 비료로서 강남·푸젠으로 이입되는 등, 각지의 특산적 상품생산을 통하여 일종의 지역
적 분업이 성립되기에 이르렀다. 강남의 면직물은 국내 시장뿐만 아니라 ‘난징[南京]목면’의 이름으
로 널리 해외로도 수출되었다. 이같은 수공업은 대부분 전호층의 영세한 부업경영이었기 때문에 유통과
정은 상인 자본의 손에 들어가 있었다. 그 중에서도 산시[山西]상인과 신안[新安]상인의 2대 동향(同
鄕)상인단은 전국 시장을 양분하여, 서로 동업조합으로서의 회관(길드)을 만들어 중간적 이익을 옹호하
였다. 화폐경제의 침투와 상품생산의 전개는 전호층의 자립화를 지탱하는 한편, 농촌에 있어 새로운 무
산자(無産者)를 탄생시키기도 하였다. 그들은 인구가 희박한 변경으로 이주하거나, 만몽(滿蒙)의 봉금
지(封禁地)를 잠식하고, 또는 해외로 이민하여 화교(華僑)가 되거나 혹은 비밀결사에 들어가 반사회적
행동을 하였는데, 그 일부는 백련교의 난을 비롯한 청나라 말의 여러 반란에서 일정한 혁명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청왕조는 처음에 엄하게 해금(海禁)하여 외국무역은 광저우[廣州]항 한 곳에 한하였고, 공
행(公行)이라 불리는 특허상인의 조합에 독점을 허가했다. 무역은 차·생사 수출을 주로 하는 편무역
(片貿易)으로서 19세기 초에는 연간 4,500만 달러의 은이 유입되었다. 이 형세를 역전시킨 영국의 인도
산 아편 밀수입은 중국 경제를 혼란에 빠뜨렸는데, 아편 그 자체의 해악은 물론, 아편전쟁의 직접 원인
이 되었다. 아편전쟁의 패전에 따라 강제로 개국을 하게 된 중국에는 면제품을 비롯한 영국 산업자본의
제품들이 밀려들어왔으나, 계속 아편수입과 은의 유출은 중국 경제를 피폐시켰을 뿐만 아니라, 농업과
결합하여 놀랄 만한 경제성을 지닌 견고한 가내공업제품이 저항하였기 때문에, 산업자본의 근본 의도는
어긋났다. 그렇지만 흥륭기의 자본주의는 장기적 경쟁을 통하여 점차 중국 가내공업을 압도, 농민경영
을 파괴하고 대량의 무산 대중을 낳게 하였다. 1880년대에 이르자 면제품의 수입은 결국 아편을 능가하
였고 거꾸로 면화가 수출 초과로 바뀌어 쌀의 수입이 급증하는 등 무역구조는 명료하게 원료 식민지적
인 형태를 나타내었다. 그 무렵, 양무파(洋務派)는 군사공업뿐만 아니라 상하이[上海]에 기기직포국(機
器織布局) 등을 설치, 민수기업에도 진출하였으나 민간기업을 압박할 뿐이었다. 한편 청·일전쟁 후 제
국주의 단계로 들어간 구미(歐美) 열강의 대중(對中) 침입은 차관(借款), 철도 이권의 획득, 기업의 직
접 진출의 형태로 강화되면서, 중국은 완전히 반(半)식민지화하였다. 의화단의 저항을 계기로 하여 청
왕조도 겨우 식산흥업(殖産興業) 정책을 취하여, 제국주의 침략과 혁명세력의 대두에 대비하였으나, 그
지배체제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 사이에 지방 향신층(鄕紳層)이 앞장선 기업의 설립(방적·성냥제조
등)과 이권회수 운동은 신해혁명을 지향하여, 부르주아적 성격을 떠받치고 있었다.
【문화】 청왕조의 학문을 대표하는 것은 고증학(考證學)인데, 이것의 지나친 발달은 이민족 지배를 유
지하기 위하여 청왕조가 취한 사상통제의 산물이었다. 처음에 강희제(康熙帝)는 반만(反滿)사상을 억압
하고, 민심 수습을 위하여 명왕조에 이어 주자학(朱子學)을 정통적인 관학(官學)으로 삼았으며, 스스로
도 여러 학문을 익히고 한문화(漢文化)에 친숙해졌으나, 명왕조 말 이래의 학자 고염무(顧炎武)·황종
희(黃宗羲) 등 야(野)에 있으면서 반만적인 민족의식이나 정치관을 가득 담은 《일지록(日知錄)》 《명
이대방록(明夷待訪錄)》 등을 저술하였다. 청왕조는 얼마 안 있어 그 지배가 확립됨과 동시에 이들에
대하여 엄격한 태도로 임하였으니(‘文字의 獄’, 禁書), 그로 인하여 반만사상은 지하로 숨어들었고,
고염무에게서 시작되는 고전의 실증적·비판적 연구는, 고전이 지녔던 격렬한 경세(經世)의 염을 잃고
학술의 주류가 되었다. 대진(戴震)·단옥재(段玉裁)·전대흔(錢大昕) 등의 학자가 배출되었고, 《사고
전서(四庫全書)》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 등의 편찬이 잇따라 이루어졌다. 고증학은 중국 학
술사상의 한 정점이었다. 또한 근대과학정신에 대한 싹도 보호·육성되었으나, 곧 그 비실천성에 대한
비판은, 도광제(道光帝) 이후 청왕조의 쇠퇴와 중국 전체의 위기 가운데서 공양학(公羊學)의 발흥으로
나타났으며 그것은 공자진(自珍)·위원(魏源)·캉유웨이[康有爲]·량치차오[梁啓超]로 이어지면서, 드
디어 변법자강의 실제운동을 불러일으키기에 이르렀다. 한편 고문학파(古文學派)에서도 실천성을 강조
하는 증국번(曾國藩)·장즈둥[張之洞] 등이 나타나서 송학(宋學)을 재흥시켰다. 그들을 중심으로 하여
수행된 양무운동 사상은 ‘중체서용론(中體西用論)’으로 특징지어지는데, 장즈둥의 《권학편(勸學
篇)》은 그 대표적인 저작이다. 이들은 모두 청왕조 체제를 옹호하는 것이었으나 이에 반하여 옌푸[嚴
復] 등은 유럽 근대사상을 본격적으로 소개했고, 이에 입각한 새로운 사회기반에 지탱된 쑨원[孫文]은
기성의 틀을 벗어난 독특한 시야에서 독자적인 혁명사상을 고취했는데, 그 사상이 민족·민권(民權)·
민생(民生)으로 집약되는 3민주의(三民主義)였다. 그 내용은 다소 유동적인 것이지만 청왕조 말기 제계
급의 동향과 위기의식을 가장 심각하고 포괄적으로 반영한 사상이 되었다. 청대의 문학은 원(元)·명
(明)에 이어 희곡·소설의 발달이 뚜렷한데, 희곡에서는 《장생전(長生殿)》 《도화선(桃花扇)》이 2대
명작으로 손꼽히고, 소설에서는 《요재지이(聊齋志異)》 《부생육기(浮生六記)》 외에 《유림외사(儒林
外史)》 《홍루몽(紅樓夢)》의 2대 장편이 당시의 사대부나 관료귀족의 생태를 폭로하여 쌍벽을 이루었
다. 또 청나라 말에는 임서(林) 등을 통하여 유럽의 근대소설이 소개되어, 계몽사조의 일환을 짊어짐과
동시에 《관장현형기(官場現形記)》 《노잔유기(老殘遊記)》 《20년목도지괴현상(二十年目睹之怪現
狀)》 등 관계의 부패를 폭로한 정치소설이 나타나 소설의 역할에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였다.
【미술】 청왕조 미술의 특징이 가장 명료하게 나타난 것은 회화이다. 그것은 명왕조 회화의 연장이지
만, 명대뿐만 아니라 중국 4000년 회화사의 종장(終章)을 장식하기에 알맞은 것으로써, 오랜 전통을 보
유한 정통파가 이민족의 정복하에서도 그대로 화계(畵系)를 바꾸어나가, 양상을 변화시키며 최후의 빛
을 발하면서 지평선 너머로 꺼져가는 듯한 느낌이다. 그 최후의 빛을 발한 화가로 석도(石濤)와 주탑
(朱A)이 있다. 이들은 명왕조의 왕실 출신으로, 명왕조 멸망 후 출가하여 선승(禪僧)이 되었으나 마음
속에 불타는 치열한 저항정신으로 화필을 구사, 기성 화가와는 전혀 다른 자유롭고 독특한 중국 문인화
의 예술을 쌓아올렸다. 이들과 같은 시대인 청초(淸初), 왕시민(王時敏)·왕감(王鑑)·왕휘(王)·왕원
기(王原祁)·오력(吳歷)·운수평(5壽平:南田) 등 소위 4왕오운(四王吳5) 등은 한 파를 형성하고 당시
화단을 이끌었는데, 석도·주답에 비하면 형식의 틀에 얽매여 예술적 감동은 적다. 청왕조 화원(畵院)
은 궁정화가를 거느리고, 양식에 통일이 없이 송원화(宋元畵)·남화(南畵) 혹은 서양화까지 끌어들였으
나 화단(畵壇)의 구석으로 밀려난 듯, 권위도 실력도 없었다. 중기에 이르자 상업도시 양저우[揚州]에
문인화를 전문으로 하는 일단이 나타나 남화의 전통을 이어 개성의 표현에 주력, 이단적인 존재로서 주
목을 받았으나 너무 주관에 치우쳐서 신경지를 개척하지는 못하였는데, 화암(華,:新羅山人)·김동심(金
冬心)만은 확실히 별격의 존재라 할 수 있다. 청나라 초의 《개자원화전(芥子園畵傳)》은 명왕조 판화
의 흐름을 받은 금릉(金陵:南京)의 출판이지만, 금릉판화가 청대에 와서 쑤저우[蘇州]로 진출, 훌륭한
판화의 성행을 보게 되자 서양화의 원근법과 음영법(陰影法)을 받아들여 서민예술로서 뿌리를 내리기에
이르렀다. 청왕조 공예의 대표는 도자기인데, 강희·옹정·건륭의 3대, 백 수십 년간에 징더전요[景德
鎭窯]를 비롯하여 여러 곳의 관요(官窯)에서 제작된 도자기는 일품으로서 서유럽 여러 나라에 수출되었
다. 칠공예(漆工藝)로는 건륭·가경(嘉慶) 연간에 궁정 용구로서 대소 갖가지의 제품이 만들어졌으나
명왕조 작풍(作風) 답습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였는데, 기교를 부리고 의장(意匠)도 부질없이 번거로
운 방향으로 기울어졌다. 인간의 재능이라고는 볼 수 없을 만큼 섬세한 기법으로 정성들여 만든 칠공예
품은 유럽 각국으로 수출되어 진중히 간직되었다. 그 밖에 중국 특산의 옥(玉)이나 비취(翡翠)를 가공,
옥기와 세공물을 만들었으며, 이와 관련 있는 것으로는 유리를 재료로 한 화병·공기·향로 등도 만들
었는데, 그 중에서도 ‘건륭유리[乾隆硝子]’라 불리는 작품은 특히 유명하다.
【한국과의 관계】 한반도 북변에 할거하면서 17세기 초 중국 본토에 진출하여 통일왕조 청(淸)을 세운
여진은 조선 개국 초부터 북방개척에 힘을 기울였던 조선 정부의 가장 부심(腐心)거리로 등장하여 때로
는 무력으로, 때로는 회유책을 써서 이들의 조공(朝貢)·귀화(歸化)를 권장하였다. 조선 정부는 이들이
노략질하는 동기의 하나가 생활 필수품의 결핍에 있음을 감안하여 함경도의 경성(鏡城)과 경원(慶源)에
무역소를 설치하고 그들이 필요한 물건을 바꾸어 가도록 하였으며, 여진 추장들에게는 중추원지사(中樞
院知事)를 비롯하여 호군(護軍)·사직(司直)·만호(萬戶)·천호(千戶) 등의 명예 군직(軍職)을 주기도
하였다. 특히 청을 일으킨 건주여진은 1467년(세조 13) 남이(南怡) 등이 이끄는 조선군의 정벌을 당해,
추장 이만주(李滿住) 부자가 살해되어 그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으나, 임진왜란으로 명나라와 조선의 힘
이 만주에 미치지 못하는 틈을 타서 세력을 크게 확장하여 조선 선조가 의주(義州)에 피란하였을 때 건
주 여진의 추장 누르하치는 조선에 구원병을 보내겠다고 제의하기도 하였으나 조선 정부는 그 속셈을
알 수 없어 거절하였다. 그 후 후금을 세운 누르하치의 아들 태종은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
亂)을 일으켜 조선과 형제의 맹약을 맺고, 36년(인조 14)에는 다시 병자호란을 일으켜 조선의 항복을
받음으로써 종래의 수직 또는 수평 관계는 전도(顚倒)되어 청나라가 조선의 종주국이 되었다. 이로부터
조선은 약 250년간 해마다 정기·부정기적으로 사절과 조공품을 보내어 사대(事大)의 예를 하였으나,
조선은 내정의 간섭을 받지 않고 대체로 독자성을 유지하여 청나라의 종주국 행세는 극히 형식적인 것
이었으며, 양국 관계도 별 어려움이 없이 무난하게 보냈다. 1842년 난징조약[南京條約]으로 조선에 앞
서 개국한 청나라는 조선이 일본과의 강화도조약으로 쇄국의 둑이 무너지자, 82년(고종 19) 조선과 미
국의 통상을 권유하고 조미·조독 수호통상조약을 돕는다는 구실로 마건충(馬建忠)·정여창(丁汝昌)이
군함을 끌고 들어와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였다. 또한 같은 해에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군함 3척에 4,500
명 병력을 끌고 와서 흥선대원군을 납치하였고, 청나라의 북양대신(北洋大臣) 이홍장(李鴻章)은 독일인
묄렌도르프 및 마건충 등을 조선 정부의 정치·외교·세관 등의 고문으로 앉게 함으로써 청나라의 통제
를 받게 되었다. 84년 갑신정변을 계기로 청·일 양군이 충돌해 톈진조약[天津條約]을 맺자 위안스카이
[袁世凱]를 주조선 총리로 임명해 정치·경제 등 모든 분야에 걸쳐 간섭하는 등 종주국 행세를 하였다.
청나라는 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군대를 파견하여 동학군을 진압하는 데 협력하였으나, 이를 계
기로 일본과 충돌하여 청·일전쟁을 일으켰는데 이 전쟁에서 패함에 따라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하였다. 조선은 96년 250년간 사용하여 온 청나라의 연호를 버리고 ‘건양(建陽)’을 연호로 사용
함으로써 최초로 자체의 연호를 쓰기 시작하였으며, 97년에는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쳐 청나라와 대등
한 황제국임을 선포하였다. 조선 사회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는 동안에 ‘숭명배청(崇明排淸)’의
모화사상(慕華思想)이 더욱 일어 당시의 학자는 물론 일반 민중에까지 뿌리깊이 스며들었는데, 학자로
서는 송시열(宋時烈)에 이르러 그 극에 달하였다. 이는 중국 본토의 ‘중화(中華)’만이 문화·가치이
고 일본·베트남·거란·몽골·흉노 및 여진[淸]은 야만의 ‘이(夷)’이니 비문화·비가치(非價値)라는
화이론적(華夷論的) 세계관의 소산이어서, 중국 변두리의 오랑캐 여진족이 형성한 청나라의 문화는 배
척되고, 주자학(朱子學)만이 국가사회 유지의 규범으로 정치와 결합되어 숭상되었다. 그러나 주자학이
형식적·관념적·배타적인 면만이 강화되어 학문으로서의 자유로운 비판을 거부하자, 그 반동으로 실학
(實學)이 일어났고, 영조·정조 때에는 청나라 고증학(考證學)의 직접적인 영향으로 박학(樸學)이 일어
나서 정약용(丁若鏞) 등 실학파에 영향을 주었다. 또한 청나라를 경유하여 서학(西學:유럽의 자연과학
과 천주교)이 유입되어 과학기술과 종교에 큰 영향을 끼쳤는데, 특히 전성기를 맞이한 강희∼건륭 연간
(1662~1795)에 부연사(赴燕使) 일행에 끼어 청나라의 물질문명을 보고 돌아온 박지원(朴趾源)·박제가
(朴齊家) 등은 청나라의 문화를 들여와 문화를 개발하고 산업을 일으키자는 ‘북학(北學)’운동을 벌였
다. 이와 같이 청나라의 근대문화는 조선의 학자들을 자극하여 그 고증학적 방법과 과학사상을 바탕으
로, 역사학·지리학·언어학·금석학(金石學) 및 천문학·지도제작 등에 많은 역작이 나왔고, 이와 같
은 학문의 방법은 백과사전파에도 영향을 끼쳐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1770)가 편찬될 정도로
근대문학의 발달을 가져왔다.
1. 유교
제자백가(諸子百家)
중국 전국시대(BC 5세기∼BC 3세기)에 활약한 학자와 학파의 총칭. 제자(諸子)란 말은 제선생이란 뜻이
고, 백가란 수많은 파벌을 의미하는 말이다. 《한서(漢書)》의 <예문지(藝文志)> 중에서 옛 서적을 분
류했을 때의 명칭으로, 그 제자의 파벌은 유가(儒家)·도가(道家)·음양가(陰陽家)·법가(法家)·명가
(名家:論理學派)·묵가(墨家)·종횡가(縱橫家:外交術派)·잡가(雜家)·농가(農家) 등 9류에다가 또 소
설가를 부록으로 한 것이다. 이 중에서 공자의 유가가 가장 먼저 일어나서 인(仁)의 교의를 수립하였
고, 그 다음으로 묵적(墨翟:墨子)이 겸애(兼愛)를 주창하여 묵가를 일으켰으며, 이윽고 노자·장자 등
의 도가와 기타 제파가 나타나서 사상계는 제자백가의 시대라고 할만큼 극히 활발한 상황을 나타냈다.
중국사에서도 특색이 있지만 또 고대 그리스의 철학계와도 비교된다. 그 발흥된 이유는 역시 사회적인
기운(機運)에 의한 것으로서 주왕조(周王朝)의 가족제가 붕괴되어 혈연의 일족에게 수호되어오던 영주
가 농민과 경지를 확보하여 실력을 지니고 있는 신흥 지주계층에게 권력을 빼앗겨 가는 사회적 혼란 속
에서 시대는 도리어 실력본위의 자유로운 활력에 넘친 유능한 인재의 발흥을 촉구하였다. 제자백가의
대부분은 그러한 상황하에서 태어난 것으로, 수십대의 수레를 이어놓고 제후에게 유세한 맹자와 같은
호화로운 집단으로부터 형제가 농구를 메고 유랑하는 자까지 그 생태는 가지가지였다. 또한 집단을 이
루어서 전승(傳承)한 것은 유(儒)·묵(墨)의 2가뿐이고 기타는 그때그때의 개별적인 자유사상가로 보아
야 한다.
유학(儒學)
공자의 가르침을 근본으로 삼는 학문. 통상 유교와 같은 뜻으로 해석되나 원칙적으로는 유교를 성립시
키는 학문이며 교학적(敎學的) 의미가 짙다. 실천적 도의(道義)에 입각하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
의 실현을 본지(本旨)로 삼아 사서오경(四書五經)을 준봉(遵奉)하는 학문이다. 공자가 죽은 후 맹자는
인의(仁義)를 내세워 성선양기(性善養氣)를 설하는 동시에 인정(仁政)의 필요성을 주장하였고, 순자(荀
子)는 예(禮)를 주장하여 성악설을 내세우는 동시에 권학(勸學)의 필요성을 주장하였으나 전국 시대 말
기에 이르러 이 학문은 쇠퇴하였다. 다시 진시황(秦始皇)의 분서갱유(焚書坑儒)로 소멸하는 듯하였으나
한무제(漢武帝)에 이르러 다시 부흥하여 교학으로서의 태세를 갖춤으로써 유학이 성립되었다. 국학으로
채택되어 정치적으로 지지를 받는 체제 속에서 유지되어온 학문으로 전한(前漢)시대에는 경세치용(經世
致用:정치적 실용)의 학문으로, 후한(後漢)시대에는 훈고학(訓學)으로 발달하였고, 당(唐)나라 때에는
정의(正義)의 학으로, 송(宋)나라 때에는 성리학(性理學:朱子學)으로, 명(明)나라 때는 심학(心學), 청
(淸)나라 때는 실사구시(實事求是)에 바탕한 고증학(考證學)으로 변천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유교(儒敎)
공자를 시조(始祖)로 하는 중국의 대표적 사상. 공교(孔敎)·공자교(孔子敎)라고도 한다. 인(仁)을 모
든 도덕을 일관하는 최고이념으로 삼고, 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의 실현
을 목표로 하는 일종의 윤리학·정치학이며, 수천 년 동안 중국·한국·일본 등 동양사상을 지배하여
왔다.
【원시유교】 춘추시대 말기에 태어난 공자는 대성(大聖)이었으나 고국인 노(魯)나라에서는 뜻을 이루
지 못하고 15년간 여러 나라로 돌아다니며 ‘선왕(先王)의 도(道)’를 역설하였으나 끝내 그 이상을 펴
지 못하였다. 만년에는 고향으로 돌아와 사학(私學)을 열어 많은 제자를 가르치는 한편 《시(詩)》
《서(書)》의 2경을 정리하고 예(禮)·악(樂)을 선정하였으며 《춘추(春秋)》를 저술하고 또한 《역
(易)》을 좋아하여 그 해석서라 할 수 있는 《십익(十翼)》을 저술하였다. 그러나 그의 사상의 진수(眞
髓)는 그가 죽은 후, 제자들이 수집 편찬한 그의 언행록인 《논어(論語)》에서 잘 나타난다. 공자는 인
을 가장 중시하였으며, 인은 곧 효(孝)이며 제(悌)라 하여 인의 근본을 가족적 결합의 윤리에서부터 시
작하여 육친(肉親) 사이에 진심에서 우러나는 애정을 강조하는 한편, 그것을 인간 사회의 질서 있는 조
화적 결합의 원리로 삼고, 정치에도 전개시켰다. 그것은 춘추시대 말기의 인간주의적 풍조의 영향을 받
아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도덕성에 주목하고, 거기서부터 현실사회의 혼란을 구제하려 하였다. 공자는
훌륭한 정치를 행했던 주(周)의 예악(禮樂)을 끌어들여 그 실행을 강조하면서, 예는 전통적·관습적인
사회 규범이며 그것은 곧 인의 사회성·객관성을 보증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 후 맹자가 나타나 인의
실천을 위한 의(義)의 덕을 내세워 인의(仁義)를 병창(倂唱)하였으며 또한 인간의 본성은 선(善)이라
하여 내면적인 도덕론을 펴고, 선한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덕치(德治)로서의 왕도론(王道論)을 주장하였
다. 맹자에 의하여 유교는 뚜렷하게 내면적으로 심화되고 또 정치론으로도 정비되었으며 한편 오륜(五
倫)도 이 무렵에 시작되었다. 얼마 후 순자(荀子)가 나타나 맹자의 내면화에 반대이론을 내세웠다. 그
는 인간의 본성은 악(惡)이므로, 외면적·객관적인 예에 의해서만 수양이 완성된다고 생각하여 예를 강
조하였다. 또 공자와 맹자가 존중하던 불가지(不可知)인 하늘의 존재를 추방하고 인간의 독자적 입장을
주장하였다.
【한대 유교】 진(秦)나라가 천하를 통일하자 유교는 분서갱유(焚書坑儒)의 대박해(大迫害)를 받아 한
때 소멸하는 것도 같았으나 한(漢)나라 무제(武帝)에 이르러, 동중서(董仲舒)의 건의를 받아들임으로써
유교는 국가적 교학이 되어 그 지위를 굳혔다. 공자를 존숭하고, 정치계급은 오경(五經:역경·서경·시
경·예기·춘추)을 읽도록 요청하여 유교는 왕조의 체제를 지탱하는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전한(前漢)
때는 어떤 1경(經)에만 치중하는 학풍이 일더니 후한시대에는 여러 경서를 종합 검토하고 그것을 주석
(註釋)하는 훈고학(訓學)이 성행하여 이것이 당대(唐代)로 계승되었다.
【신유교】 신유교(新儒敎)란 도학(道學)·주자학(朱子學)·양명학(陽明學) 등을 이르는 말이다. 후한
말기에 전래한 불교와, 노장사상(老莊思想)에 바탕을 둔 도학은 육조시대에 융성하여 서로 항쟁하는 가
운데, 유교는 침체상태를 보였으나 당나라 때 도학의 선구자인 한유(韓愈)가 유교의 도통을 밝히고 숭
유척불(崇儒斥佛)의 기치를 들었다. 이어 북송(北宋)에 이르러 주돈이(周敦)·정호(程顥)·정이(程) 등
이 나와 과거 훈고에만 치중하던 유교를 형이상학적인 면에서 다루어 크게 부흥시켰고 이어 남송의 주
자(朱子)는 이들 학설을 집대성하여 주자학을 확립시켰다. 그는 5경(經)에 대신하여 4서(四書:대학·논
어·맹자·중용)를 존중하고 이에 대한 《사서집주(四書集註)》를 저술하여 명성을 남겼으며 그 밖에도
《역본의(易本義)》 《시집전(詩集傳)》 등 많은 저술활동을 하였다. 주자는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에
입각하여 이(理)와 기(氣)를 구분하고, 이를 만물의 근본이 되는 형이상의 도(道)라 하였으며, 기를 만
물의 도구(道具)가 되는 형이하의 기(器)라 하였다. 그러나 주자와 거의 같은 시대의 육상산(陸象山)은
견해를 달리하여 ‘심즉리(心卽理)’의 일원론(一元論)을 주장하였다. 그의 육학(陸學)은 심학(心學)이
라고도 하였으며 이것은 명나라의 왕양명(王陽明)에게로 계승되어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양명학이 정립
되었다.
【유교의 몰락】 청대(淸代)에 이르자 유교는 실사구시(實事求是)를 표방하는 고증학(考證學)이 대두하
여 공허한 이론에만 치중하는 송학(宋學:주자학·양명학)을 물리치고 고정(考訂)·교감(校勘)·훈고를
통하여 고전(古典)의 참뜻을 이해하려 하였다. 그러나 19세기 중반, 아편전쟁을 계기로 중국의 유교는
종말기를 맞이하였다. 열강의 침략, 청조(淸朝)의 부패에 궐기한 중국인은 많은 개혁안을 제출하였으며
그 중에서 공양학파(公羊學派)인 캉유웨이[康有爲] 등은 유교의 변법자강책(變法自强策)을 주장하여 근
대국가로의 탈피를 꾀하였으나 수구파(守舊派)의 탄압으로 실패하고, 그 후 유교는 밀려드는 근대과학
에 자리를 양보하였다. 특히 신해혁명(辛亥革命) 이후 전개된 근대화운동은 봉건체제의 모든 것을 부정
하여, 유교도 그 정신적 지주였다는 뜻에서 적대시하기에 이르렀다. 그 후 운동의 열기가 식고 평정을
되찾으면서 전통문화가 재검토되었고, 그 결과 유교도 앞으로의 문화창조에 기여할 수 있는 요소가 있
음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중국이 공산화된 이후 유교는 탄압되고 많은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한국의 유교】 유교가 한국에 전래된 연대는 기록이 없어 확실하지 않으나 삼국시대 때, 당(唐)나라
의 학제인 국학(國學)을 받아들인 때를 그 기원으로 삼는다. 즉 고구려는 372년(소수림왕 2)에 태학(太
學)을 세웠으며, 백제는 국학을 세운 기록은 없으나 285년(고이왕 52)에 이미 왕인(王仁) 박사가 《논
어》와 《천자문》을 일본에 전한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부터 유학이 전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에
도 오래 전부터 전래된 것 같으나 국학의 건립은 훨씬 늦어 682년(신문왕 2)에야 실시되었다. 그 후 신
라에서는 당나라에 유학생을 보내 학문을 장려하고 최치원(崔致遠)은 당나라 과거에 급제하여 이름을
떨쳤으며 설총(薛聰)은 이두(吏讀)를 창시하여 구경(九經)을 해석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유교는 유능한
관리를 양성하는 데 목적이 있었고, 부차적으로는 지도계급으로 하여금 경사(經史)에 통하게 하고 사부
(詞賦)와 문장을 능하게 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태조의 숭불정책(崇佛政策)으로 유교가
한때 부진하였다가 992년(성종 11)에 비로소 국자감(國子監)을 세웠고 문종 때는 최충(崔沖)이 9재(齋)
를 설치하고 학도를 가르쳤다. 그러나 무관의 발호와 계속된 전란으로 유교는 240년간이나 다시 침체상
태에 빠졌다가 제25대 충렬왕 때 안향(安珦)이 왕을 따라 연경(燕京)에 다녀오면서 《주자전서(朱子全
書)》를 입수해 온 후 정부에 건의하여 국학을 세우고 대성전(大成殿)을 건립하여 공자를 존숭하는 등
유교 부흥에 힘썼다. 그는 또한 한국에 주자학(朱子學:性理學)을 처음 수입하였으므로 주자학의 시조로
일컬어진다. 그의 문하에는 백이정(白正)·우탁(禹倬)·권부(權溥) 등이 있어 모두 주자학 부흥에 힘썼
으며, 그 학통은 고려 말의 이제현(李齊賢)·이색(李穡)·이숭인(李崇仁)·정몽주(鄭夢周) 등에게로 전
승되었다. 특히 그 중에서 정몽주는 성리학에 정통하고 도덕과 경륜(經綸)에도 일가를 이루어 동방 이
학(理學)의 조(祖)라 불린다. 조선시대에는 개국 초부터 태조의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으로 유교가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 유교의 기초를 처음으로 확립한 학자는 정도전(鄭道傳)이다. 그는 《불씨잡변
(佛氏雜辨)》 등의 논설을 통하여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숭상할 것을 주장하였으며, 같은 시대의 유
학자 권근(權近)도 많은 저술로 이에 동조하였다. 한편 고려의 유신(儒臣) 길재(吉再)의 학통을 이어받
은 김종직(金宗直)은 당대의 유종(儒宗)이 되었고, 그의 문인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은 가장
유명하였으나 무오사화(戊午士禍)로 희생되었다. 다시 조광조(趙光祖)가 유도(儒道)의 정치를 펴려 하
였으나 기묘사화로 실패하고 많은 사류(士類)도 함께 화를 입었다. 이어 을사사화에는 이언적(李彦
迪)·노수신(盧守愼) 등의 거유(巨儒)가 유적(流謫)되었으며 거듭되는 사화로 유학자들은 차차 벼슬을
단념하고 산림(山林)에 숨어 오로지 학문과 후진양성에 전념하게 되었다. 서경덕(徐敬德)·조식(曺
植)·김인후(金麟厚) 등은 그 대표적 인물이라 할 수 있으며, 특히 서경덕은 종래 답습하여 오던 주자
의 이기이원론에 대하여 중국 장횡거(張橫渠)의 태허설(太虛說)을 이어받아 기일원론(氣一元論)을 주장
함으로써 한국 주기론(主氣論)의 선구자가 되었다. 그 후 명종·선조 때에는 많은 유학자가 배출되어
한국 성리학의 전성시대를 이루었다. 그 중에서도 이황(李滉:퇴계)·이이(李珥:율곡)가 가장 뛰어나 이
황을 ‘동방의 주부자(朱夫子)’, 이이를 ‘동방의 성인(聖人)’이라 할 만큼 그 학풍은 후대의 학자에
게 큰 영향을 끼쳤다. 이황은 4단 7정(四端七情)의 이기이원론을 주장하여 많은 저술로써 이를 확립하
였고, 그 학설은 일본에 전해져 야마자키 안사이[山崎闇齋]를 비롯한 여러 주자학자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쳐 동양사상에서 한국의 성리학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하였다. 그의 문하에서는 조목(趙穆)·유
성룡(柳成龍)·김성일(金誠一)·정구(鄭逑) 등 저명한 학자가 배출되었다. 한편 이이는 주기설(主氣說)
을 확립시켰으며 그 학설은 김장생(金長生)·이귀(李貴)·조헌(趙憲) 등을 거쳐 김집(金集)·송시열(宋
時烈) 등에게 이어졌다. 이황의 학통은 이상정(李象靖)·이진상(李震相) 등이 적극 발전시켰으며, 송시
열의 문인 권상하(權尙夏)의 제자 이간(李柬)과 한원진(韓元震)은 인(人)·물(物)·성(性)에 대한 이론
을 달리하여 낙론(洛論)과 호론(湖論)으로 갈리어, 이 무렵부터 유교는 별다른 발전을 보지 못하고 오
히려 당쟁(黨爭)과 예송(禮訟)의 소인(素因)이 되었다. 그리하여 공리공론만 거듭되는 순리학파(純理學
派)를 대신하여 실사구시(實事求是)의 학문을 주장하는 실학파(實學派)가 대두하였다. 그 대표적 인물
로는 유형원(柳馨遠)·이익(李瀷)·박지원(朴趾源) 등이 있다. 그러나 이 학파는 때마침 동점(東漸)한
서학(西學)에 물들었다는 혐의로 조정의 탄압을 받아 끝내 탁월한 경륜을 펴지 못하고 쇠퇴하였다. 그
후 성리학이 부흥하는 기세를 보였으나 이들은 여전히 여러 학설로 갈리어 자기 학파의 학설만 주장하
였다. 조선 후기의 이같은 유학자들의 지나친 형식과 체면에 집착하는 완고와 고집은 한국 개화에 커다
란 장애가 되었으며 다만 일제의 침략으로 국세가 위급하자 송병선(宋秉璿)·최익현(崔益鉉)·조병세
(趙秉世)·민영환(閔泳煥)·이준(李儁)·안중근(安重根) 등의 유학자가 앞장서서 애국의 대의를 펼쳤
다. 8·15광복 후 전국 유림의 조직체인 유도회(儒道會)를 결성하고 성균관대학을 창립, 유교정신에 의
한 새로운 민주교육이 실시되었다.
공자<孔子(BC 552∼BC 479)>
중국 고대의 사상가·유교의 개조(開祖). 노(魯)나라 창평향 추읍(昌平鄕邑:지금의 山東省曲阜의 남동)
출생. 자는 중니(仲尼). 이름은 구(丘). 공자의 ‘자(子)’는 존칭이다.
【생애】 은(殷)왕족의 혈통을 이어 춘추시대 말기에 태어났다. 아버지의 성은 숙량(叔梁), 이름은 흘
(紇)이며 어머니는 안씨(顔氏) 집안으로, 이름은 징재(徵在)이다. 아버지는 제(齊)나라와의 싸움에서
군공(軍功)을 세운 부장(部將)이었으나, 공자가 3세 때 별세하여 빈곤 속에서 자랐다. 그러나 그는
“吾十有五而志于學 三十而立”이라고 스스로 말했듯이 공부에 힘썼다. 노나라의 창시자로 주왕조(周王
朝) 건국의 공신이기도 했던 주공(周公)을 흠모하여 그 전통적 문화습득에 노력했으며, 수양을 쌓아 점
차 유명해졌다. 처음에는 말단 관리였으나, 50세가 지나서 노나라의 정공(定公)에게 중용(重用)되어,
정치가로서의 탁월한 수완을 발휘하였다. 그의 계획은 노나라의 실력자인 3중신의 세력을 눌러 공실(公
室)의 권력을 회복하고, 주공의 정신을 살린 질서있는 문화국가를 건설하려는 것이었다. 그의 계획이
드러나 BC 497년, 56세 때 실각하고 그 후 14년간 문하생들을 데리고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유세
(遊說)를 계속하며 이상실현을 꾀하였으나, BC 484년, 69세 때 그 불가능함을 깨닫고 고향에 돌아가 제
자들의 교육에 전념하였다. 이 무렵 아들 이(鯉)와, 고제자(高弟子) 안회(顔回) 및 자로(子路)가 잇달
아 죽는 불행을 겪었고, 74세로 자공(子貢)·증삼(曾參) 등 뛰어난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타계하였
다. 제자는 모두 3,000명이며, 특히 육예(六藝:禮·樂·射·御·書·數)에 통한 문인(門人)이 72명이라
고 한다. 그는 ‘敎人不倦’이라고 술회했던 것처럼, 이상을 미래에 건 위대한 교육자였다. 그의 언행
은 《논어(論語)》를 통해서 전해지고, 그의 사상을 알아보기 위한 확실한 자료도 《논어》밖에 없으며
이는 제자나 제자의 제자들이 기록한 것이지 공자 자신의 저술은 아니다. 오경(五經)을 편찬하였다고
전하나, 이는 교육목적에 따라서 《시경(詩經)》 《서경(書經)》 등의 고전을 정리했던 것으로 생각된
다.
【사상】 춘추 말기, 주나라의 봉건질서가 쇠퇴하여 사회적 혼란이 심해지자, 공자는 주왕조 초의 제도
로 복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위정자는 덕이 있어야 하며 도덕과 예의에 의한 교화가 이상적인
지배방법이라 생각했다. 이러한 사상의 중심에 놓인 것이 인(仁)이다. 공자는 최고의 덕을 인이라고 보
고 인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그리스도교의 사랑이나 불교의 자비와는 다른, 부모
형제에 대한 골육의 애정 곧 효제(孝悌)를 중심으로 하여 타인에게도 미친다는 사상이다. 모든 사람이
인덕(仁德)을 지향하고, 인덕을 갖춘 사람만이 정치적으로 높은 지위에 앉아 인애(仁愛)의 정치를 한다
면, 세계의 질서도 안정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수양을 위해 부모와 연장자를 공손하게
모시는 효제의 실천을 가르치고, 이를 인의 출발점으로 삼았으며, 또 충(忠) 즉, 성심을 중히 여겨, 그
옳고 곧은 발로인 신(信)과 서(恕)의 덕을 존중했는데, 이러한 내면성(內面性)을 중시하고 전승(傳承)
한 것이 증자(曾子) 일파의 문인이다. 그러나 공자는 또한 인의 실천을 위해서는 예(禮)라는 형식을 밟
을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 예란 전통적·관습적 형식이며, 사회규범으로서의 성격을 가진다. 유교에서
전통주의를 존중하고 형식을 존중하는 것은 바로 이 점에 입각한 것이며, 예라는 형식에 따름으로써 인
의 사회성과 객관성이 확실해진 것이다. 이처럼 공자의 사상은 사회적·정치적 인간을 위한 도덕이 중
심을 이루고 있는데, 그 보편성을 보증하는 것으로서 하늘의 존재도 생각하고 있었다. 공자로서는 하늘
이 뜨거운 종교적 심정으로 받들어지는 불가지(不可知)의 존재였지만, 이는 인간적인 활동을 지원하는
신(神)일지언정, 인간을 압박하는 신은 아니었다. 공자의 사상은 어디까지나 인간중심주의였다고 할 수
있다.
【영향】 공자는 많은 제자들을 교육하여 인의 실현을 가르치는 한편, 자기자신도 그 수양에 힘써,
“종심소욕불유구(從所心欲不踰矩)”라고 술회할 정도의 인격에 도달했기 때문에, 생전에도 커다란 영
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사후에는 제자들이 각지에서 그 가르침을 전파하였으나, 제자백가(諸子百家)가
일어남으로써 교세가 약해졌다. 이를 다시 일으킨 사람이 맹자(孟子)였으며, 또 전국(戰國) 말기에 순
자(荀子)가 이파(異派)의 사상도 받아들여 집대성하였다. 그 후 한(漢)나라의 무제(武帝)가 유교를 국
교(國敎)로 택함에 이르러 공자의 지위는 부동의 것이 되었으며, 사실은 각 시대의 유교 내용에는 큰
변화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공자 자체는 이 가르침의 비조(鼻祖)로서 청조(淸朝) 말까지 계속 존경을
받았다. 한국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민국혁명(1912) 후 우위[吳虞]와 루쉰[魯迅]은 공자를 중
국의 봉건적 누습(陋習)의 근원이라고 공격하였다. 이 논법은 인민중국에도 계승되어 ‘비림비공(批林
批孔)운동’(73)에서 절정에 이르고 4인조 실각 후 진정되었다.
논어『論語』
중국 유교(儒敎)의 근본문헌(根本文獻). 유가(儒家)의 성전(聖典)이라고도 할 수 있으며, 사서(四書)의
하나로, 중국 최초의 어록(語錄)이기도 하다. 고대 중국의 사상가 공자(孔子)의 가르침을 전하는 가장
확실한 옛 문헌으로, 공자와 제자와의 문답을 주로 하고, 공자의 발언과 행적, 그리고 고제(高弟)의 발
언 등 인생의 교훈이 되는 말들이 간결하고도 함축성있게 기재되었다.
【명칭과 편자】 《논어》라는 서명(書名)은 공자의 말을 모아 간추려서 일정한 순서로 편집한 것이라
는 뜻인데, 누가 지은 이름인지는 분명치 않다. 편자에 관해서는 숭작참(崇爵讖)의 자하(子夏) 등 64제
자설(六四弟子說), 정현(鄭玄)의 중궁(仲弓)·자유(子游)·자하(子夏)설, 정자(程子)의 증자(曾子)·유
자(有子)의 제자설, 그 밖에 많은 설이 있으나 확실치 않다. 현존본은 <학이편(學而篇)>에서 <요왈편
(堯曰篇)>에 이르는 20편으로 이루어졌으며, 각기 편 중의 말을 따서 그 편명(篇名)을 붙였다. <학이편
>은 인간의 종신(終身)의 업(業)인 학문과 덕행을, <요왈편>은 역대 성인의 정치 이상을 주제로 한 것
처럼, 각 편마다 주제가 있기는 하나, 용어가 통일되지 않았고 같은 문장의 중복도 있다. 특히 전반(前
半) 10편을 상론(上論), 후반을 하론(下論)이라고 하는데, 그 사이에는 문체나 내용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
【성립】 《맹자(孟子)》나 《순자(荀子)》 등 옛 문헌에는 공자의 말이 ‘공자왈’ ‘중니왈(仲尼
曰)’ ‘전왈(傳曰)’이라고 인용되었으나, 그것이 논어에 기재된 것과 반드시 같은 것도 아니며, 또
논어가 성립되었다는 것을 제시하는 기술(記述)도 없다. 그러나 한(漢)나라 때에는 제(齊)나라 학자의
<제론(齊論)> 22편, 노(魯)나라 학자의 <노론(魯論)> 20편이 전해졌고, 따로 공자의 옛 집 벽 속에서 <
고론(古論)> 21편이 나왔다. 한(漢)의 장우(張禹)는 제·노 양론을 교합(校合)하여 <장후론(張侯論)>
20편을 만들었고 이어 후한(後漢)의 정현(鄭玄:127~200)은 이 세 가지와 고론을 교합하였다. 이 정현본
(鄭玄本)을 바탕으로 위(魏)의 하안(何晏)이 《논어집해(論語集解)》라는 주석서(註釋書)를 저술함에
이르러 현존본의 원문이 결정되었다. 근대에 와서 내외의 학자들이 공자의 가르침의 근본을 추구하여,
여러 각도로 논어의 문헌을 비판하고, 논어성립까지의 전승계통(傳承系統)을 탐색하는 한편 한(漢)나라
까지의 증보(增補)의 경과를 더듬는 등 많은 가설(假說)을 내세우고 있으나 아직 정설(定說)은 수립되
지 않았다.
【내용】 엄밀히 말하면 어느 정도로 공자 본래의 가르침을 전하는가가 문제이지만, 이것을 이해하는
데에는 논어가 불가결한 문헌임에는 틀림없다. 논어의 문장은 간결하면서도 수사(修辭)의 묘를 얻어 함
축성이 깊고 문장간의 연계가 없는 듯하면서도 깊이 생각해보면 공자의 인격으로 귀일(歸一)되어 있다.
공자의 불요불굴(不撓不屈)의 구도(求道)의 태도, 관용(寬容) 중에서도 사람을 이상선(理想善)인 ‘인
(仁)’으로 이끌고야 마는 교육, 그리고 공자를 중심으로 하여 겸허(謙虛)한 안연(顔淵), 직정(直情)의
자로(子路), 현명(賢明)한 자공(子貢), 그 밖의 제자들의 각기 개성에 따른 상호간의 독려 등, 중국에
서는 처음으로 인도주의(人道主義) 사상과 자각자율(自覺自律)의 도덕설(道德說)을 제시한 공자학단(孔
子學團)의 활동이 잘 묘사되었다. 모든 내용이 인생 경험의 깊은 영지(英智)의 결정(結晶)으로 음미할
수록 가치가 있는 교훈들이다.
【전래】 유교의 경서는 많지만, 그 중에서 논어는 효경(孝經)과 더불어 한(漢)나라 이후, 지식인의 필
수 서책이며, 그 해석의 전거(典據)가 된 것은 《논어집해(論語集解)》(古註라고도 한다)이다. 송(宋)
나라 때에는 유교의 공맹사상(孔孟思想)에 의한 집주 통일화(集註統一化)가 이루어졌고, 특히 주희(朱
熹:1130~1200)가 《사서(四書)》로 추존(推尊)하고, 이를 통일하여 《논어집주(論語集註)》(新註라고도
한다)를 저술한 후에는 이것이 고주에 대체되었다. 중화민국 초기에는 구문화(舊文化) 개조를 위하여
공교(孔敎)·논어 비판이 행하여졌고, 그 후에도 계속되고 있으나, 연구가 지속되는 것에는 변함이 없
다. 한국에도 일찍부터 도래(渡來)되어 한학(漢學)의 성행으로 널리 보급되고 국민의 도덕사상 형성의
기본이 되었다. 구미(歐美) 각국에도 연구서나 번역서가 많으며, 최근에는 미국에 특히 많다.
맹자 孟子(BC 372?∼BC 289?)>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유교 사상가. 성명 맹가(孟軻). 자는 자여(子輿) 또는 자거(子車)라고 하지
만 확실하지 않다. 지금의 산둥성[山東省] 쪼우셴현[鄒縣]에 있었던 추(趨) 출생. 공자의 유교사상을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의 문하생에게서 배웠다. 어릴 때 현모(賢母)의 손에서 자라났으며 맹모삼천
지교(孟母三遷之敎)는 유명한 고사이다. 제후가 유능한 인재들을 찾는 전국시대에 배출된 제자백가(諸
子百家)의 한 사람으로서 맹자도 BC 320년경부터 약 15년 동안 각국을 유세하고 돌아다녔으나, 자기의
주장이 채택되지 않자 고향에 은거하였다. 제후가 찾는 것은 부국강병(富國强兵)이나 외교적 책모(策
謀)였으나, 맹자가 내세우는 것은 도덕정치인 왕도(王道)였으며, 따라서 이는 현실과 동떨어진 지나치
게 이상적인 주장이라고 생각되었다. 만년에는 제자 교육에 전념하였고, 저술도 하였다고 한다. 《맹
자》 7편은 맹자의 말을 모은 후세의 편찬물이지만, 내용은 맹자의 사상을 그대로 담은 것이다. 주자학
(朱子學) 이후로 《맹자》는 《논어》 《대학》 《중용》과 더불어 ‘사서(四書)’의 하나로서 유교의
주요한 경전이 되었다. 맹자의 사상을 알 수 있는 유일한 책이며, 또 전국시대의 양상을 전하는 흥미있
는 내용으로 가득차 있다. 문장은 변론조이며, 예부터 명문으로 여겨진다.
【사상】 맹자의 사상은 인의설(仁義說)과 그 기초가 되는 성선설(性善說), 그리고 이에 입각한 왕도정
치론(王道政治論)으로 나누어진다. 공자의 인(仁)의 사상은 육친 사이에 생기는 자연스러운 친애(親愛)
의 정을 널리 사회에 미치게 하려는 것이며, 이 경우, 소원한 쪽보다 친근한 쪽으로 정이 더 간다는 것
은 당연시되었다. 가족제에 입각한 차별애(差別愛)인 것이다. 맹자는 이를 받아들여, 한편으로는 보편
적인 인애(仁愛)의 덕(德)을 주장하고, 한편으로는 그 인애의 실천에 있어서 현실적 차별상(差別相)에
따라 그에 적합한 태도를 결정하는 의(義)의 덕을 주창하였다. ‘인은 사람의 마음이요, 의는 사람의
길’로서, 의는 인의 실천에서 준거할 덕이며, 유교사상은 이로부터 도덕사상으로서의 준엄성을 가지게
되었다. 성선설은 그러한 인심(仁心)이 누구에게나 갖추어져 있음을 강조한 설이다. 인간의 본성으로서
는 악(惡)에 이르는 욕망도 사실은 존재하지만, 맹자는 그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도덕적 요청으로서 본
성이 선(善)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모든 사람의 도덕에 대한 의욕을 조장하려고 하였
다. 따라서 사람으로서의 수양은 ‘욕심을 적게’ 하여 본래의 그 선성(善性)을 길러내는 일이었다. 왕
도정치는 그러한 인심에 입각한 정치이다. 군주는 민중에 대한 사랑을 바탕으로 정치를 해야 한다고 주
장하고, 또 경제적으로 넉넉하게 한 다음 도덕교육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불인(不仁)한 군주는 쫓
아내어야 한다는 주장도 했다. 당시의 제후가 맹자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유교는
맹자에 의하여 비로소 도덕학(道德學)으로서 확립되고, 정치론으로서 정비되었다. 그 후 유교의 정통사
상으로서 계승되어 유교를 ‘공맹지교(孔孟之敎)’라고 부를 정도로 중시되었다.
맹자『孟子』
중국 전국 시대의 사상가 맹가(孟軻)의 저술. 그의 문인들이 스승이 죽은 후에 정리한 것이라는 견해들
도 있으나, 수미 일관된 체제 등을 들어 일반적으로 맹자의 직접 저술로 인정하고 있다. 송대의 유학자
인 주희(朱熹) 등에 의해 유학의 기본 경전인 사서(四書)의 하나로서 흔들리지 않는 권위를 지니게 되
었다. 후한(後漢) 말기의 조기(趙岐)와 주희가 붙인 주석이 가장 수준 높은 해설서로 통용된다. 양혜왕
(梁惠王)·공손추(公孫丑)·등문공(文公)·이루(離婁)·만장(萬章)·고자(告子)·진심(盡心)의 7편으로
구성되었다. 양(梁)의 혜왕에게 ‘이(利)’를 구하는 잘못을 지적하고 “왕께서는 오직 인의(仁義)를
말씀함에 그칠 것이지 하필 이익을 말씀하십니까”라는 어구로 쐐기를 박은 첫머리의 기사가 전체 저술
의 개요를 이루는데, 공자의 인(仁)에 대해 의(義)를 더하여 왕도정치의 바탕으로 삼은 것이다. 그것은
다시 본성이 선하다고 전제하여 인간을 적극적으로 신뢰하는 성선설(性善說)과 민의(民意)에 의한 폭군
의 교체를 합리화한 혁명론(革命論)을 중심 기둥으로 삼고 있다. 정의에 따른 사회 생활을 강조하고 그
물질적 기반을 매우 중시하였으나, 대인(大人)의 일과 소인(小人)의 일을 구분하여 육체 노동자에 대한
정신 노동자의 지배를 합리화하였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현대사회에서는 그 전체적인 사회·정치
이론을 받아들일 수 없게 되었지만, 크게는 ‘성선설’로부터 구체적으로 ‘호연지기론(浩然之氣論)’
에 이르는 견해들은 시대를 뛰어 넘어 인간 생활의 한 지침이 되고 있다. 빈틈없는 구성과 논리, 박력
있는 논변으로 인해 《장자(莊子)》 및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과 더불어 중국 진(秦) 이전의 3대
문장으로 꼽히는 등 문장 교범으로서도 높은 평가를 받아왔으며 한문 수련의 필수적인 교재이다. 또
‘오십보백보’ ‘알묘조장(苗助長)’ 등의 절묘한 비유를 통해 독자의 흥미를 돋우고 논지를 철저히
이해시켜 준다.
중용『中庸』
중국 유교 경전의 하나. 공자(孔子)의 손자인 자사(子思)의 저작이라 알려졌다. 오늘날 전해지는 것은
오경(五經)의 하나인 《예기(禮記)》에 있는 <중용편(中庸篇)> 이 송(宋)나라 때 단행본이 된 것으로,
《대학(大學)》 《논어(論語)》 《맹자(孟子)》와 함께 사서(四書)로 불리고 있으며, 송학(宋學)의 중
요한 교재가 되었다. 여기서 ‘中’이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다는 것, ‘庸’이란 평상(平常)
을 뜻한다. 인간의 본성은 천부적(天賦的)인 것이기 때문에 인간은 그 본성을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본성을 좇아 행동하는 것이 인간의 도(道)이며, 도를 닦기 위해서는 궁리(窮理)가 필요하다. 이
궁리를 교(敎)라고 한다. 《중용》은 요컨대 이 궁리를 연구한 책이다. 즉 인간의 본성은 한마디로 말
해서 성(誠)일진대, 사람은 어떻게 하여 이 성으로 돌아가는가를 규명한 책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한편
주자(朱子)는 《중용장구(中庸章句)》라고 하는 주석서(注釋書)를 지었는데, 여기서 주자는 자사가 도
학(道學)의 전통을 위해 《중용》을 썼다고 말하였다.
대학『大學』
유교(儒敎) 경전에서 공자(孔子)의 가르침을 정통(正統)으로 나타내는 <사서(四書)> 중 중요한 경서(經
書). 본래 《예기(禮記)》의 제42편이었던 것을 송(宋)의 사마 광(司馬光)이 처음으로 따로 떼어서
《대학광의(大學廣義)》를 만들었다. 그 후 주자(朱子)가 《대학장구(大學章句)》를 만들어 경(經) 1장
(章), 전(傳) 10장으로 구별하여 주석(註釋)을 가하고 이를 존숭(尊崇)하면서부터 널리 세상에 퍼졌다.
주자는, 경은 공자의 말을 증자(曾子)가 기술(記述)한 것이고, 전은 증자의 뜻을 그 제자가 기술한 것
이라고 단정하였다. 경에서는 명명덕(明明德:명덕을 밝히는 일)·신민(新民:백성을 새롭게 하는 일)·
지지선(止至善:지선에 머무르는 일)을 대학의 3강령(三綱領)이라 하고,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
(誠意)·정심(正心)·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의 8조목(八條目)으로 정리
하여 유교의 윤곽을 제시하였다. 실천과정으로서는 8조목에 3강령이 포함되고, 격물 즉 사물의 이치를
구명(究明)하는 것이 그 첫걸음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평천하의 궁극 목적과 연결된다는 것이 대학의
논리이다. 전은 경의 설명이라는 뜻이다. 주자는 본문에 착간(錯簡)과 오탈(誤脫)이 있다 하여 교정하
고, 또 ‘격물’의 전을 보충하였다. 명(明)의 왕양명(王陽明)이 주자학을 비판하면서부터 주자의 《대
학장구》, 특히 그 보전(補傳)은 유학자간의 논쟁(論爭)의 중심문제가 되었다. 왕양명은 대학고본(大學
古本)에 의거하여 대학고본방석(大學古本旁釋)을 지었다.
예기『禮記』
중국 고대 유가(儒家)의 경전. 49편(編). 오경(五經)의 하나로, 《주례(周禮)》 《의례(儀禮)》와 함께
삼례(三禮)라고 하며 《의례》가 예의 경문(經文)이라면 《예기》는 그 설명서에 해당한다. 그 성립에
관해서는 분명치 않으나, 전한(前漢)의 대성(戴聖)이 공자(孔子)의 제자를 비롯하여 한(漢)시대에 이르
는 많은 사람들의 손으로 된 《예기》 200편 중에서 편찬한 것으로 알려졌다. 곡례(曲禮)·단궁(檀
弓)·왕제(王制)·월령(月令)·예운(禮運)·예기(禮器)·교특성(郊特性)·명당위(明堂位)·학기(學
記)·악기(樂記)·제법(祭法)·제의(祭儀)·관의(冠儀)·혼의(婚儀)·향음주의(鄕飮酒儀)·사의(射儀)
등의 제편(諸篇)이 있고, 예의 이론 및 실제를 논술한 것이다. 사서(四書)의 하나인 《대학(大學)》
《중용(中庸)》도 이 중 한 편이다. 《예기정의(禮記正儀)》는 후한(後漢) 정현(鄭玄)의 주(注), 당
(唐)나라 공영달(孔穎達)의 소(疏)로 되었으며, 《예기》의 주석서로 통용된다.
순자<荀子(BC 298?∼BC 238?)>
중국 전국시대 말기의 사상가. 성 순(荀). 이름 황(況). 조(趙)나라 사람. 순경(荀卿)·손경자(孫卿子)
등으로 존칭된다. 《사기(史記)》에 전하는 그의 전기는 정확성이 없으나, 50세(일설에는 15세) 무렵에
제(齊)나라에 유학(遊學)하고, 진(秦)나라와 조나라에 유세(遊說)하였다. 제나라의 왕건(王建:재위 BC
264∼BC 221) 때 다시 제나라로 돌아가 직하(稷下)의 학사(學士) 중 최장로(最長老)로 존경받았다. 그
러나 훗날, 그곳을 떠나 초(楚)나라의 재상 춘신군(春申君)의 천거로 난릉(蘭陵:山東省)의 수령이 되었
다. 춘신군이 암살되자(BC 238), 벼슬 자리에서 물러나 그 고장에서 문인교육과 저술에 전념하며 여생
을 마쳤다.
【사상】 순자의 사상은 공자(孔子)·자궁(子弓)을 스승으로 하고 유가(儒家)의 실천 도덕을 바탕으로
하지만, 그들보다 한층 합리적이며, 더욱이 전국사상(戰國思想)의 여러 유형을 지양한 체계적이고 종합
적인 것이었으므로 그의 사상사적(思想史的) 위치는 서양 철학사(哲學史)상의 아리스토텔레스에 비교된
다. 순자는 인간을 공동체 ‘군(D)’ 안에서의 존재로 규정하고, 인간 궁극의 실천목적을 묵가(墨家)의
사상을 취하여 그 공동체, 즉 윤리적 질서체(秩序體)의 이념에 둔다. 그 질서는 법가적(法家的)으로,
개인의 ‘분수’ 를 타율적으로 규정하는 것으로 보나, 다시 그것을 초월하여 유기적·합목적적 격률
(合目的的 格律) ‘성왕(聖王)의 제(制)와 예의’의 존재를 인정한다. 이리하여 객관적 규범에 의한 실
천적 합리론(合理論)이 형성된다. 전통적인 종교 관념 ‘하늘[天]’에 대하여서도 비판적이고 현실적이
며, 유명론적(唯名論的)인 명가사상(名家思想)에 대하여서 역시 비판적이다. 그리하여 실념론적(實念論
的) 입장에서 개념 종속 관계와 범주론(範疇論)을 거론하는 진보된 논리적 사고를 나타내며, 오직 명사
(名辭)의 타당성은 합목적사회관습(合目的社會慣習) ‘왕제(王制)’에 의하여 정해지는 것이 특징적이
다. 노장(老莊)의 변증적(辨證的) 사변(思辨)의 영향을 받은 것도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 사상과는 가장
대조적이며,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욕(欲)과 지(知)가 있는 자주적 목적체(自主的目的體)로 보는 유가
(儒家) 부동(不動)의 바탕에 선다. 동시에 원존재(原存在)와 의의활동(意義活動)을 구별하고, 특히 후
자의 적극적이고 현실적인 합리적 인위(人爲)인 ‘위(僞)’ 주의를 주장하였다. 종래 한동안 순자는
‘성(性)은 악(惡)이고, 선(善)한 것은 위(僞)’라는 성악론자(性惡論者)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이
것은 맹자처럼 인간성의 직접 확충(擴充)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생득적(生得的)인 의욕
을 악한 것이라 부정함으로써 선한 의의활동이 있다(이 점은 제나라의 유심론적 영향이라 하겠다)는,
즉 인간의 정신은 주관적으로는 다면(多面)으로 작용하나 그것을 부정하여 객관적 규범에 귀일(歸一)함
으로써 후자의 목적으로 전환하고, 더구나 자주적인 자율과 타율, 개인과 공동체와의 일치된 합리적 실
천이 완수된다고 하는 주장이다. 그리하여 예의의 ‘학(學)’적 수련과 정신의 심화(深化)에 의하여 규
범목적의 터득과 인륜의의(人倫意義)의 충족 정도에 따라 사(士)와 군자(君子)의 인격의 진보가 있고,
실천 목적과 질서 이념의 완전 일치는 마침내 성인(聖人), 왕자로서 인륜의 완전체(完全體)를 영위한다
고 한다. 그의 정치 사상은 강력한 예치주의(禮治主義)를 취한다. 순자의 사상은 하나의 유가사상(儒家
思想)의 완전체를 나타내는 것으로 후대에 끼친 영향이 크다. 송대(宋代) 학자들의 비난은 순자의 맹자
비판과 성악설(性惡說)의 오해에 의한 것일 뿐 본질적인 것은 아니다. 또 순자의 유가경전(儒家經典)을
전한 공적이 인정된다. 한비(韓非)·이사(李斯)가 순자의 제자였다는 설은 의심스럽다. 그 사상의 획일
성과 현실적 요구에서 진(秦)·한(漢)의 제국주의가 편승하기 쉬운 점이 있었음은 사실이지만, 진·한
초(秦漢初)에 그의 학파가 활동한 것을 보아도 오히려 전제주의에 대한 비판이 되는 것이었다. 한갓 순
자의 사상은 전국시대의 주관적 실천설에서, 《여씨 춘추(呂氏春秋)》가 미숙하기는 하나 계승을 나타
내고 있듯이 합리적 윤리 사상으로의 전환의 거보(巨步)를 내딛고 있는 것인데, 아직 전통에의 의존과
실천합목적관(實踐合目的觀)의 제한에 불철저함이 있었던 것이다. 순자의 저술은 당시 이미 성문(成文)
부분이 있었으나, 현존의 《순자》 20권 32편은 한나라의 유향(劉向)이 당시 있었던 322편을 편집하여
《손경신서(孫卿新書)》 32편으로 편찬한 것을, 당(唐)나라의 양량(楊倞)이 편(編)의 순서를 바꾸고 주
(註)를 붙여 《손경자(孫卿子)》라 하였고, 후에 간단히 《순자》라 불리게 된 것이다. 한 부분은 순자
의 문인(門人)의 설(說)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또 《순자》에는 부(賦) 10편의 저작이 있
으며 지금은 2편으로 줄여서 수록되어 있다.
순자『荀子』
중국 주(周)나라 때의 유학자 순자(荀子:荀況)의 사상(思想)을 집록한 책. 처음에는 《손경신서(孫卿新
書)》라고 하였다. 현본은 20권 33편으로 되어 있으나 원래 12권 322편이던 것을 한(漢)의 유향(劉向)
이 중복을 정리하여 32편으로 만들고, 다시 당(唐)나라 때 양량(楊倞)이 20권 32편으로 개편, 주(注)를
달고 서명을 《손경자(孫卿子)》라 개칭하였다가 후에 《순자》라고 간략히 불리게 되었다. 문헌학적
(文獻學的)으로는 편(篇)의 순서에 따라 수신파 전승(修身派傳承)이 6편, 치국파(治國派) 9편, 이론파
(理論派) 6편, 나머지는 순자 문인들의 잡록(雜錄)으로 유별할 수 있으며, 내용적으로는 권학(勸學)·
예론(禮論)·성악론(性惡論)이 중심을 이룬다. 공자(孔子) 이후 맹자(孟子)에 의하여 정비된 유교는 내
면적·주관적인 입장만이 강화되었으므로 순자는 이에 반대하여 공자의 예(禮)의 사상을 내세워, 제자
백가(諸子百家)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받아들이면서 객관적 입장에서 유교를 재정비하였다. 먼저 공자나
맹자에서 도덕의 기초를 이루는 것으로 생각되어 온 천(天)의 권위를 부정하고 하늘은 인간의 도덕적
활동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자연의 천공(天空)에 불과한 것이라 하여 ‘하늘과 사람과의 분리’를 선
언하였다. 그것은 자연으로부터의 인간의 독립선언으로서는 귀중한 뜻을 지녔으나 유교의 전체적 역사
에서 볼 때는 이단적(異端的)이었다. 독립된 인간의 존엄성은 예에 의해서만 유지되는 것으로, 예는 순
자의 경우 성인(聖人)이 정한 사회규범(社會規範)으로 뚜렷한 객관적 형식이었으며, 그에 따르는 것만
이 인간의 사회생활에서 질서와 평화가 유지되는 것이라 하였고, 따라서 만물의 영장인 인간의 가치도
발휘된다고 하였다. 인간의 수양(修養)은 맹자와 같이 인간의 심성(心性)을 선(善)으로 보아 그 선을
발전시키는 방향이 아니며 예의 형식에 의하여 외부로부터 후천적으로 쌓아 올리는 것이라 하였다. 즉,
‘인성(人性)은 악(惡)’이며 ‘날 때부터 이(利)를 좋아하고’ ‘질투하고 증오하는’ 것이므로 그대
로 방치하면 쟁탈(爭奪)과 살육이 발생하기 때문에 악이라는 본성을 교정(矯正)하는 ‘사법(師法)의 가
르침과 예의의 길’인 위(僞:人爲)에 의해서만 치세(治世)를 실현할 수 있다 하여, 여기에서 맹자의 성
선설(性善說)에 반대하는 성악설(性惡說)이 태어났다. 송대(宋代) 이후 이 성악설과 천(天)·인(人) 분
리설로 인하여 이단시되어 왔으나 그 논리학이나 인식론을 포함한 사상의 과학적 성격은 한대(漢代) 유
교에 크게 기여한 역사적 의의와 함께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묵가(墨家)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초기의 사상가 묵자(墨子)를 계승하는 학파. 그 사상과 학설은 《묵자》 53편
(編)에서 찾아볼 수 있다. 상현(尙賢)·상동(尙同)·겸애(兼愛)·비공(非攻)·절용(節用)·절장(節
葬)·천지(天志)·비락(非樂)·명귀(明鬼)·비명(非命)등 10론(論)의 주장은 그 하나하나가 매우 이색
적이고, 전국시대의 세상에서 중앙집권적 체제지향과 실리적인 지역사회의 단결을 주장하여 유가(儒家)
와 대립한 유력 학파였다. 이 집단은 거자(巨子)를 지도자로 하여 강력한 단결을 자랑하였으며, 그 기
반은 지연공동체적인 농촌에 있었다. 묵가의 사적(事績)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나 역대의 거자로서 금
활리(禽滑釐)·맹승(孟勝)·전양자(田襄子) 등의 이름이 전한다. 《한비자(韓非子)》의 현학편(顯學編)
에 의하면 묵가는 전국 말기에 3파로 분립되었다고 하는데, 《묵자》 10론 하나하나에 내용이 대동소이
한 상·중·하편(編)이 있는 것은 그 흔적이 아닌가 생각된다. 진(秦) 시황제(始皇帝)의 탄압을 받은
이후 쇠미해지다가 전한(前漢) 무제(武帝)에 의한 유교일존(儒敎一尊) 정책으로 완전히 소멸하였다.
묵자<墨子(BC 480∼BC 390)>
중국 전국시대 초기의 사상가. 이름은 적(翟). 그의 행적은 분명하지 않다. 묵자 및 그의 후학인 묵가
(墨家)의 설을 모은 《묵자(墨子)》가 현존한다. 《묵자》는 53편이라고 하나, 《한서(漢書)》 지(志)
에는 71편으로 되었다. 최종적으로 성립된 것은 한(漢)의 초기까지 내려간다고 추정된다. 그 내용은 다
방면에 걸쳤으나, 중심이 되는 것은 상현(尙賢)·상동(尙同)·겸애(兼愛)·비공(非攻)·절용(節用)·절
장(節葬)·천지(天志)·명귀(明鬼)·비악(非樂)·비명(非命)의 10론(十論)을 풀이한 23편이다. 겸애란
사람은 ‘자신(自身)’ ‘자가(自家)’ ‘자국(自國)’을 사랑하듯이 ‘타인(他人)’ ‘타가(他家)’
‘타국(他國)’도 사랑하라는 것이다. 비공론(非攻論)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유가(儒家)의 인(仁)이
똑같이 사랑[愛]을 주의(主意)로 삼으면서도 존비친소(尊卑親疎)의 구별이 있음을 전제로 하는 데 반하
여, 겸애는 무차별의 사랑인 점이 다르고, 또한 사랑은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이윽고 자
신도 이롭게 한다는 ‘겸애교리(兼愛交利)’를 풀이한 것이었다. 절용은 사치를 삼가고 생산에 힘쓰며
소비를 줄이라고 설파하는데, 구체적으로는 장례를 간소하게 치르라는 절장론(節葬論)과 음악(音樂)을
허식이라 하여 물리치는 비악론(非樂論)으로 전개된다. 한편, 정치에 대해서는 상동론(尙同論)이 있으
며, 그 기초로서 천지론(天志論)이 있다. 천지론은 절대적·종교적이라고 할 수 있는 천의(天意)의 존
재와 거기에 따르거나 거역했을 때의 상벌을 강조한다. 상동이란 아랫사람[下]은 윗사람[上]에게 순종
하라는 것이다. “사람이란 일인일의(一人一義) 십인십의(十人十義)이므로 방치하면 사회의 질서를 유
지하지 못한다. 그래서 부락민은 이장에게, 이장은 면장에게, 점차 아래에서 위로 상동(尙同)하여 그
정점에는 최고의 현자(賢者)로서 하늘의 뜻을 받드는 천자(天子)가 있다”는 것이다. 명귀론(明鬼論)은
하늘의 대행자로서 상벌을 내리는 귀신의 존재를 주장하였고, 비명론(非命論)은 이른바 운명을 부정하
지만, 그 참뜻은 명(命:운명론)에 현혹되어 일상의 일을 게을리하지 말도록 타이르는 것이었다. 요컨대
《묵자》는 유가가 봉건제도를 이상으로 하고 예악(禮樂)을 기조로 하는 혈연사회의 윤리임에 대하여,
오히려 중앙집권적인 체제를 지향하여 실리적인 지역사회의 단결을 주장한 것이다. 더욱이 10론 이외에
일종의 논리학을 풀이하는 편(編)과 비공론(非攻論)에서 출발한 방어술(防禦術)·축성술(築城術)에 관
한 편도 있다.
법가(法家)
법치주의를 제창한 중국의 정치 사상가. 전국시대 제자백가의 한 유파로 그 계통을 이은 일군(一群)의
정치 사상가에 대한 총칭이다. 특히 유가(儒家) 사상과의 대립·항쟁 과정에서 발달하였으며, 전국시대
의 전제적 지배를 지향한 군주에게 채용되어, 진(秦)·한(漢)나라의 통일제국 성립을 뒷받침한 중요한
사상이 되었다.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 의하면, 신상필벌(信賞必罰)의 질서 있는 정치를
주장한 장점이 있고, 오로지 형법(刑法)에 의거하여 때로는 육친의 정까지도 저버린 것이 단점이라는
평도 있다. 위(魏)나라의 문후(文侯)를 받들어 부국강병의 실적을 올린 이회(李:BC 455?∼BC 395?), 진
(秦)나라의 재상으로 국내개혁을 달성한 상앙(商:?∼BC 338), 저서를 통하여 진시황(秦始皇)을 감탄시
킨 한비자(韓非子:?∼BC 233), 진(秦) 통일제국의 기초를 구축한 이사(李斯:?∼BC 210), 전한(前漢)의
중앙집권화에 힘쓴 조조(錯:?∼BC 154), 무제(武帝) 때의 유능한 경제관료 상홍양(桑弘羊:?∼ BC 80)
등이 법가의 대표자들이다. 현대에 와서 중국은 유가들이 노예주인 귀족층의 세습적 권리를 옹호한 것
에 대하여, 법가들은 새로운 봉건 지주계급을 대표하여 국내통일에 공헌하였다는 평가를 한다.
한비자<韓非子(BC 280?∼BC 233)>
중국 전국시대 말기의 사상가. 한(韓)의 왕족으로, 젊어서 진(秦)의 이사(李斯)와 함께 순자(荀子)에게
배워 뒷날 법가(法家)의 사상을 대성하였다. 이사가 간지(奸智)에 뛰어난 변설가(辯說家)인 반면, 한비
는 타고난 말더듬이였으나 두뇌가 매우 명석하여, 학자로서는 이사가 도저히 미칠 바 못 되었다. 진의
시황제는 한비의 고분(孤憤)·오두(五)의 논문을 보고 “이 사람과 교유할 수 있다면 죽어도 한이 없겠
다”고까지 감탄하였다 한다. 한의 세력이 약해지는 것을 염려하여 누누히 왕에게 간언하였으나 받아들
여지지 않았고, 끝내 진의 공격을 받자 화평의 사신으로서 진나라로 갔다. 시황제는 한비를 보자 크게
기뻐하여 그를 아주 진에 머물게 하려 하였으나, 이사는 내심 이를 못마땅히 여겨 시황에게 참언하여
한비를 옥에 가두게 한 후, 독약을 주어 자살하게 하였다. 유저에 《한비자(韓非子)》가 있다.
한비자『韓非子』
중국 전국(戰國)시대 말기 한(韓)나라의 공자(公子)로 법치주의(法治主義)를 주창한 한비(韓非:280?∼
BC 233)와 그 일파의 논저(論著). 55편 20책에 이르는 대저(大著)로, 원래 《한자(韓子)》라 불리던 것
을 후에 당(唐)나라의 한유(韓愈)도 그렇게 불렀기 때문에 혼동을 막기 위하여 지금의 책이름으로 통용
되어 왔다. 이 책은 한비가 죽은 다음 전한(前漢) 중기(BC 2세기 말) 이전에 지금의 형태로 정리된 것
으로 추정된다. 내용은 거의가 법의 지상(至上)을 강조하는데, 55편을 크게 나누면 다음과 같이 성질이
다른 6군(群)으로 나눌 수 있다. ① 한비의 자저(自著)로 추정되는 <오두(五)> <현학(顯學)> <고분(孤
憤)> 등이다. 이들 논저는 먼저 인간의 일반적 성질은 타산적이고 악에 기우는 것으로 설혹 친한 사이
에 애정이 있다 해도 그것은 무력(無力)한 것이라 하였고, 따라서 정치를 논할 기초가 될 수 없다고 하
였다. 또 이 세상은 경제적 원인에 의하여 끊임없이 변화진전하기 때문에 과거에 성립된 정책이 반드시
현세에 적용되지는 않는 것이며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유가(儒家)나 묵가(墨家)의 주장은 인간사회를
너무 좋도록 관찰하여 우연성에만 의존하는 공론(空論)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군주는 그러한 공론에 귀
를 기울이지 말고, 끊임없이 시세(時世)에 즉응(卽應)하는 법을 펴고, 관리들의 평소의 근태(勤怠)를
감독하여 상벌을 시행하고 농민과 병사를 아끼고 상공(商工)을 장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때 군주는
측근·중신·유세가(遊說家)·학자·민중들에게 좌우되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② 한비 일파의 강
학(講學)·토론으로 추정되는 편(編)으로, <난(難)> <난일(難一)∼난사(難四)> <난세(難勢)> <문변(問
辨)> <문전(問田)> <정법(定法)> 등이 있다. 사상 내용은 한비의 사상과 거의 같다. 이 중에서 주목할
것은 <난세>와 <정법>으로, 유가의 덕치론(德治論)은 물론 법가(法家)에 속하는 신자(愼子)·신자(申
子)·상자(商子)의 설까지도 비판하고 수정한다. 이 책을 법가학설의 집대성이라고 일컫는 연유도 여기
에 있다. ③ 한비 학파가 전한 설화집 <설림(說林)> <내외저설(內外儲說)> <십과(十過)> 등의 제편(諸
編). 상고(上古)로부터의 설화 300가지 정도를 독특한 체계에 의하여 배열하고, 그들 이야기의 흥미를
통하여 법가사상을 선전하였다. 소화(笑話)의 유(類)도 섞여 있으나 고대 단편소설로서의 측면도 지닌
다. ④ 전국시대 말기부터 한대(漢代)까지의 한비 후학(後學)들의 정론(政論)으로 추정되는 제편(諸
編). 편수(編數)는 가장 많으며 그 중 <유도(有度)> <이병(二柄)> <팔간(八姦)> 등은 오래된 것이고, <
심도(心度)> <제분(制分)> 등은 새로운 설이다. 후학들의 주장에서 한비의 사상은 현저하게 조직화되었
고, 특히 군신통어(群臣統御:刑名參同)나 법의 운용(運用:法術)에 관한 술책이 세밀하게 고찰되었다.
그러나 군권강화(君權强化)와 엄벌주의를 주장하는 점만이 농후하고, 법의 최고 목적이 분명하게 밝혀
지지 않았다. ⑤ 도가(道家)의 영향을 받은 한비 후학들의 논저인 <주도(主道)> <양각(揚)> <해로(解
老)> <유로(喩老)> 등의 4편. 유가의 덕치를 부정하고 법치를 제창한 법가는, 덕치와 법치를 모두 부
정하는 도가와는 근본적으로 입장을 달리하고 있어, 현실적으로 <육반(六反)> <충효> 등에서는 강력한
반대를 나타낸다. 그러나 군주는 공평무사를 본지(本旨)로 하여 신하(臣下)에 대하여는 인간적 약점을
보이지 않는 심술(心術)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점에서 법가 중에도 도가의 허정(虛靜)의 설을 도입한
일파가 있다. 위의 4편은 이들 일파의 논저로서, 전(前) 편은 정론(政論)이고, 후 2편은 편명 그대로
《노자(老子)》의 주석(注釋) 또는 해설편이다. ⑥ 한비 학파 이외의 논저인 <초견진(初見秦)> <존한
(存韓)> 등 2편 모두 한비의 사적(事蹟)에 결부시켜 책 첫머리에 편입되어 있으나 전자는 유세가의 작
품이고, 후자는 한비의 작품을 모방한 상주문(上奏文)이 포함된 것으로 그다지 중요하지는 않다. 한비
와 그 학파의 사상은 일반적으로 편견적인 인간관 위에 성립된 것으로 지적되며, 특히 유가로부터는 애
정을 무시하는 냉혹하고도 잔인한 술책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확실히 급소를 찌르는 적평(適評)이라 하
겠으나, 그들이 유가·법가·명가(名家)·도가 등의 설을 집대성하여, 법을 독립된 고찰대상으로 삼고
일종의 유물론과 실증주의에 의하여 독자적인 사상체계를 수립함으로써 진·한의 법형제도(法刑制度)에
강력한 영향을 끼친 점, 또 감상(感傷)을 뿌리친 그들의 간결한 산문이나 인간의 이면을 그린 설화가
고대문학의 한 전형을 이룬 점에 있어 커다란 문화적 사명을 다하고 있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여러
가지 간행본이 있으나 절강서국(浙江書局)의 22자본(子本)이 좋은 간본이라고 한다.
음양오행(陰陽五行說)
우주나 인간의 모든 현상을 음·양 두 원리의 소장(消長)으로 설명하는 음양설과, 이 영향을 받아 만물
의 생성소멸(生成消滅)을 목(木)·화(火)·토(土)·금(金)·수(水)의 변전(變轉)으로 설명하는 오행설
을 함께 묶어 이르는 말. 즉, 음양이란 사물(事物)의 현상을 표현하는 하나의 기호(記號)라고 할 수 있
다. 음과 양이라는 두 개의 기호에다 모든 사물을 포괄·귀속시키는 것이다. 이는 하나인 본질(本質)을
양면으로 관찰하여 상대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는 것을 표현하는 이원론적(二元論的) 기호라고도 할 수
있다. 한편 오행은 우주만물을 형성하는 원기(元氣), 곧 목·화·토·금·수를 이르는 말인데, 이는 오
행의 상생(相生)·상극(相剋)의 관계를 가지고 사물간의 상호관계 및 그 생성(生成)의 변화를 해석하기
위해 방법론적 수단으로 응용한 것이다. ① 오행상생(五行相生):오행의 운행에 따라 서로 다른 것을 낳
는 관계이며, 곧 목생화(木生火)·화생토(火生土)·토생금(土生金)·금생수(金生水)·수생목(水生木)이
된다. ② 오행상극(五行相剋):상극에는 억제(抑制)·저지(沮止)의 뜻이 내포되었고, 그 상호관계는 목
극토(木剋土)·토극수(土剋水)·수극화(水剋火)·화극금(火剋金)·금극목(金剋木)으로 되었다.
【한방의학과 음양오행학설】 〈한방의학의 철학적 배경〉 음양오행학설은 한방의학의 중요한 기초이론
이다. 한방의학의 자연관(自然觀)과 인체의 생리(生理)·병리(病理)에 대한 원리·진단·치료·약물 등
에 대한 이론은 모두가 이 음양오행으로 설명된다. 이는 한방의학의 발상지인 중국의 고대 의학자들이
음양오행학설을 응용하였기 때문이다.
〈인체와 음양〉 음양을 인체에 적용시켜 보면 외(外)는 양이고 내(內)는 음이며, 장(臟)은 음에 속하
고 부(腑)는 양에 속한다. 인체의 생리기능상 혈압상승, 분비액의 증가 등은 양적(陽的) 현상이며, 혈
압강하·분비액의 저하 등은 음적(陰的) 현상이다. 인체에서 이 음양의 조화가 깨어지면 병적인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 한방의학은 양과 음의 과다(過多)와 부족을 조화시켜 깨어진 음양의 균형을 되찾도록
해주는 치료학이라 하겠다.
〈인체와 오행〉 한방의학에서는 오행의 생극(生剋)의 이치를 운용하여 인체에 있는 내장(內臟)의 상호
자생(相互資生)·상호제약(相互制約)의 관계를 설명하며, 오행의 귀납법(歸納法)으로 인체의 각 부위간
(部位間)의 상호연관을 설명한다. 인체는 오장(五臟), 즉 간(肝)·심(心)·비(脾)·폐(肺)·신(腎)과,
육부(六腑) 즉 담(膽)·위(胃)·소장·대장·방광·삼초(三焦),오체(五體) 즉 피모(皮毛)·기육(肌
肉)·혈맥·근(筋)·골수(骨髓), 오관(五官) 즉 귀·눈·입·코·혀 등으로 이루어졌으며, 인체 외부의
자연환경이란 계절의 변화(春·夏·秋·冬), 오기(五氣:風·暑·寒·濕·燥), 오색(五色:靑·赤·黃·
白·黑), 오미(五味:酸·苦·甘·辛·鹹) 등을 가리킨다. 한방의학에서는 이러한 체내·체외의 복잡한
관계를 설명하기 위하여 이들을 오행의 고유한 특성에 맞추어 분류하고, 그 속성(屬性)이 같은 부류에
속하는 것을 각각 오행에 배속시켰다. 오장을 예로 들면 간(肝)은 목(木)에, 비(脾)는 토(土)에, 심
(心)은 화(火)에, 폐(肺)는 금(金)에, 신(腎)은 수(水)에 각각 배속시킨다. 인체를 오행과 결합시키는
데는 오장을 위주로 하고, 이를 통해서 육부·오체·오관·오색 등과 결합시키며, 여기에 일련의 관계
가 형성된다. 즉, 일례를 들면 봄철과 간(肝)은 목(木)이므로 이 관계에 의해 담(膽)·목(目)·근
(筋)·산(酸)·청(靑)·풍(風)·생(生)과 일련의 발전과정이 성립된다. 이와 같이 오행에 연관지어진
계절의 변이를 통해서 오기의 변화와 발전과정, 그리고 오미·오색 등을 결합시켜 이들 자연현상과 속
성을 인체의 오관에 비유하고 있으며, 다시 육부·오체 등을 연결시켜 자연 현상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
과 인체 장기(臟器) 간의 생리적인 현상을 계통적으로 해석·관찰한다. 간에 관해서 좀더 설명한다면
간은 담과 표리관계(表裏關係)이며, 심장과 상호자생의 관계에 있다(木[肝]生火[心]의 관계이므로). 한
방의학에서는 이렇듯 오행생극(五行生剋)의 제약(制約)과 화생(化生)의 작용을 운용함으로써 장부(臟
腑) 사이의 생리적인 상호협조와 제약관계 및 그 평형현상을 설명하며 또 장부의 병리변화(病理變化)를
추정·해석한다. 따라서 오행설은 질병의 한방적 치료 및 진단에 중요한 준거이론(準據理論)이라 할 수
있다.
훈고학(訓誥學)
언어(言語)를 연구함으로써 문장을 바르게 해석하고 고전(古典) 본래의 사상을 이해하려는 학문. 중국
의 경서(經書) 연구로부터 일어났으며, 좁은 의미로는 한(漢)·당(唐) 및 청대(淸代)의 훈고학을 일컫
는다. ‘訓’은 언어라는 뜻, ‘誥’는 옛 언어를 말한다. 어느 나라에서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 고전은
어려워지게 마련이지만, 특히 중국에서는 진(秦)의 시황제(始皇帝)의 분서갱유(焚書坑儒:BC 213∼BC
212) 사건과, 한초(漢楚)의 흥망(BC 209∼BC 202), 그리고 진(秦)에서 한초(漢初)에 걸쳐 한자(漢字)의
일대 변혁이 있어 짧은 기간 동안 문학상의 큰 단절이 있었다. 그래서 한 시대 전의 서적을 읽는 데도
어려움을 느끼게 되어, 전한(前漢:BC 202∼AD 8)에서는 1경전문(一經專門)의 훈고학이 생겼다. 《시경
(詩經)》의 <모전(毛傳)>은 그 대표적인 예이며 《이아(爾雅)》는 자전(字典)의 원시적인 것으로서 문
자의 학문인 소학(小學)의 전문서이다. 후한(後漢:25∼220)에서는 폭넓은 연구가 이루어져 마융(馬
融)·정현(鄭玄)·가규(賈逵) 등이 나타났고, 허신(許愼)의 《설문해자(說文解字)》는 소학의 기초를
구축하였다. 이와 같은 한의 훈고학의 흐름은 삼국·육조(六朝)를 거쳐 당나라의 공영달(孔穎達) 등이
칙명을 받아 《오경정의(五經正義)》를 편집하므로(640) 일단 큰 성과를 올렸다. 그 후 유심적(唯心的)
경향이 강한 송학(宋學)의 유행으로 훈고학은 일시 쇠퇴하였으나 청(淸:1644∼1911)에 이르러는 서양과
학의 영향도 받게 되어 실증적인 고증학(考證學)이 일어났으며, 한학 부흥을 목표로 내걸었다. 청의 훈
고학 특징은 《설문해자》를 기초로 하는 소학을 존중한 점에 있으며, 대진(戴震)·단옥재(段玉裁)·왕
염손(王念孫)·왕인지(王引之)·유월(兪) 등이 그 대표적인 학자이다.
동중서<董仲舒(BC 170?∼BC 120?))
중국 전한(前漢) 때의 유학자. 허베이성[河北省] 광촨현[廣川縣] 출신. 일찍부터 《춘추공양전(春秋公
羊傳)》을 익혔으며 경제(景帝) 때는 박사가 되었다. 장막(帳幕)을 치고 제자를 가르쳤기 때문에 그의
얼굴을 모르는 제자도 있었다. 3년 동안이나 정원에 나가지 않았을 정도로 그는 학문에 정진하였다. 무
제(武帝)가 즉위하여 크게 인재를 구하므로 현량대책(賢良對策)을 올려 인정을 받고, 전한의 새로운 문
교정책에 참획(參畵)하게 되었다. 오경박사(五經博士)를 두게 되고, 국가 문교의 중심이 유가(儒家)에
통일된 것은 그의 헌책(獻策)에 힘입은 바가 크다. 그러나 뒤에 자신의 학설로 말미암아 투옥되는 등
파란 많은 생애였다. 저서에 《동자문집(董子文集)》 《춘추번로(春秋繁露)》 등이 있다.
성리학(性理學)
중국 송(宋)·명(明)나라 때 학자들에 의하여 성립된 학설. 도학(道學)·이학(理學)·성명학(性命學)
또는 이것을 대성시킨 이의 이름을 따서 정주학(程朱學)이라고도 한다. 유학(儒學)은 중국 사상의 주류
를 이루는 것으로, 그것이 성립되던 상대(上代)에는 종교나 철학 등으로 분리되지 않은 단순한 도덕사
상이었으며, 그 대표적 인물에 공자(孔子)와 맹자(孟子)가 있다. 공자는 춘추시대(春秋時代)의 어지러
운 사회를 바로잡으려고 천하를 주유(周遊)하면서 인(仁)과 예(禮)를 설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아 고
향에 돌아와 육경(六經:詩·書·禮·樂·易·春秋)을 제자에게 가르치며 도리(道理)를 후세에 전하였
다. 선진시대(先秦時代)에 이르러 유학은 도덕 실천의 학으로서 크게 일어났으나, 시황제(始皇帝)의 분
서갱유(焚書坑儒)로 큰 시련을 겪은 다음 한·당대(漢唐代)에는 경전(經典)을 수집·정리하고, 그 자구
(字句)에 대한 주(注)와 해석을 주로 하는 소위 훈고학(訓學)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송·명 시대에 이
르러 유학은 정치적 또는 종교적 사회체제의 변화에 따라 노불(老佛) 사상을 가미하면서 이론적으로 심
화되고 철학적인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즉, 북송(北宋)의 정호(程顥)는 천리(天理)를 논하였고 그 아
우 정이(程)는 ‘성즉이(性卽理)’의 학설을 폈으며, 그 밖에 주돈이(周敦)·장재(張載)·소옹(邵雍)
등이 여러 학설을 편 것을 남송(南宋)의 주희(朱熹:朱子)가 집성(集成)·정리하여 철학의 체계를 세운
것이 성리학으로, 일명 주자학(朱子學)이라고도 한다. 한편, 이와는 달리 육상산(陸象山)은 ‘심즉이
(心卽理)’를 주장하였는데, 이것을 왕양명(王陽明)이 계승하여 육왕학(陸王學)을 정립, 이것 역시 성
리학이라 하나 대개의 경우는 성리학이라 하면 주자학을 가리킨다. 성리학은 이(理)·기(氣)의 개념을
구사하면서 우주(宇宙)의 생성(生成)과 구조(構造), 인간 심성(心性)의 구조, 사회에서의 인간의 자세
(姿勢) 등에 관하여 깊이 사색함으로써 한·당의 훈고학이 다루지 못하였던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
내성적(內省的)·실천철학적인 여러 분야에서 새로운 유학사상을 수립하였다. 그 내용은 크게 나누어
태극설(太極說)·이기설(理氣說)·심성론(心性論)·성경론(誠敬論)으로 구별할 수 있다.
【태극설】 태극이라는 말은 성리학 이전에도 《주역(周易)》 <계사전(繫辭傳)>에 나오는데, 그것에 의
하면 태극을 만물의 근원, 우주의 본체로 보고 “태극은 양의(兩儀:음양)를 낳고, 양의는 사상(四象)을
낳고, 사상은 팔괘(八卦)를 낳고 팔괘에서 만물이 생긴다”고 하였다. 이 우주관을 계승하고 여기에 오
행설(五行說)을 가하여 새로운 우주관을 수립한 것이 북송의 유학자 주돈이의 《태극도설(太極圖說)》
이다. 《태극도설》은 만물 생성의 과정을 ‘태극―음양―오행―만물’로 보고 또 태극의 본체를 ‘무
극이태극(無極而太極)’이란 말로 표현하였다. 그 본체는 무성무취(無聲無臭)한 것이므로 이를 무극이
라 하는 동시에 우주 만물이 이에 조화(造化)하는 근원이므로 태극이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주자는
이것을 해석하여 태극 외에 무극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여, 만일 무극을 빼놓고 태극만을 논한다
면 태극이 마치 한 물체처럼 되어서 조화의 근원이 될 수 없고, 반대로 태극을 빼놓고 무극만을 논한다
면 무극이 공허(空虛)가 되어 역시 조화의 근원이 될 수 없다고 하였다. 이같이 무극과 태극은 떼어 생
각할 수 없는 것으로, 유(有)가 즉 무(無)이며, 절대적 무는 절대적 유와 동일하다는 것이다. 소옹은
태극이 곧 도(道)라 하였다. 만물의 근원적 이치가 도 또는 도리(道理)라 한다면 태극은 곧 태초부터
영원까지, 극소에서 극대까지 어디에나 존재하는 이치라 하였으니, 다시 말하면 공간적으로 대·소가
있을 수 없고, 시간적으로 장(長)·단(短)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자는 천지도 하나의 태
극이요 만물 하나하나가 모두 태극이라 하였고, 이 태극에서 음양으로의 이행(移行)은 태극의 동정(動
靜)에 의하는 것이며 동정은 곧 음양의 두 기운을 내포하고 있어, 만물의 근원적인 생성(生成)이 전개
된다고 하였다.
【이기설】 이기설은 우주·인간의 성립·구성을 이(理)와 기(氣)의 두 원칙에서 통일적으로 설명하는
이론이다. 이 이·기라는 말은 성리학이 성립되기 이전에도 있었으니, 《역경(易經)》에서는 천지만물
을 음양 2기의 활동에서 성립된 것이라 하여 이·기의 개념을 말하였다. 송대에 이르러 주돈이는 그의
《태극도설》에서 모든 근원인 태극이 2기를 낳고, 2기에서 수·화·목·금·토의 5행을 낳고, 5행에서
남·녀가 생겨 거기에서 만물이 화생(化生)하였다고 논하였다. 장재는 우주의 본체를 태허(太虛)라 하
였고 그 작용으로서 음양의 2기가 있어 여기에서 천지만물이 만들어졌다는 기일원론(氣一元論)을 폈으
며, 정호도 기의 통일체로서의 건원(乾元)을 내세웠으나 그의 아우 정이는 기의 세계에서 출발하면서도
기와는 별도로 이의 세계를 생각하여 이와 기를 확실히 구별함으로써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의 단서를
열었다. 《역경》에 “일음일양(一陰一陽)을 도(道)라 한다”는 구절이 있는데, 정이는 이 도를 ‘음양
의 원인이 되는 것이 도’라고 보았다. 즉, 형이상(形而上)의 도를 형이하의 기에서 구별하여 도를 기
의 현상(現象) 속에 존재하는 원리로 하여 새로운 우주관을 세운 것이다. 이 도가 곧 이이다. 그러나
이와 기는 서로 밀접한 관계에 있어, 그 어느 것이 빠져도 존재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이·기 양자
는 동시존재이며 다만 그 질(質)을 달리할 뿐, 경중(輕重)의 차는 없는 것이나, 기는 항상 변화하는 데
대하여 이는 법칙성을 지니고 부동(不動)한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 자연히 경중이 부여된다. 특히 그것
이 윤리(倫理)에 관련될 경우 이러한 경향이 더욱 뚜렷하다. ‘천(天)은 이(理)이다’ ‘마음은 이이
다’라고 하는 이면(裏面)에는 이가 법칙적 성격이 부여된 데 대하여 기는 항상 물적(物的)인 것, 그리
고 자칫하면 이의 발현(發現)을 방해하는 것이라는 해석이 내재하게 된다. 이것을 일방적으로 말하자면
종래의 성선설(性善說)에 명확한 설명을 붙이는 결과가 되었으니, 즉 ‘성은 이이다(性卽理)’라는 입
장이 그것이다. 이와 같은 정이의 이기철학은 주자에게로 계승되어 이·기의 성격은 더욱 확연하게 구
별되었다. 주자는 이에 ‘소이연(所以然:존재론적 의미를 가진다)’과 ‘소당연(所當然:법칙론적 의미
를 가진다)’이라는 두 가지 성격을 부여하는 동시에 그것은 기의 내부에 항상 존재하는 것으로 보았
다. 기가 형질(形質)을 지니고 운동하는 것에 대하여, 이(理)는 형질도 없고 운동도 하지 않고, 그 실
재는 기를 통하여 관념적으로 파악되는 것이라 하였다. 즉, 기가 형질을 갖고자 할 때, 또는 운동을 일
으키려 할 때, 이가 거기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기의 이러한 작용은 전혀 불가능하며, 기의 존재 자체도
불가능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주자는 이것을 윤리에 적용시켰을 때, 이·기에 경중을 두면서도 기를
악(惡)으로만 단정하지 않고, 기의 청탁(淸濁)에 의한 결과에서 선악을 인정하려 하였다. 인간의 신체
나 희노애락(喜怒哀樂)의 정(情)은 기에서 성립되고, 그것이 도덕적으로 선(善)한 성(性)은 이(理)가
마음에 내재화(內在化)된 것으로 보았다. 이 이기설은 그 후 오랫동안 철학자들에게 계승되어 윤리적
입장에서 기에 중점을 두느냐, 이에 중점을 두느냐의 차이일 뿐, 우주관 자체는 부동의 것이 되었다.
【심성론】 이기설이 우주를 논한 것이라면 심성론은 인생에 관한 문제를 다룬 것이다. 인간은 우주 내
에 존재하는 것이므로 이기설과 심성론은 상호 관련성을 갖게 된다. 중국 유학에서는 맹자 이후 인간의
성(性)이 선(善)이냐 악(惡)이냐에 대하여 여러 가지 설이 분규를 거듭하였고 오랫동안 중국 철학의 큰
문제로 되어 왔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맹자는 성선설을 주장하였고, 순자(荀子)는 성악설을 주장하였
으나 송대에 이르러 순자의 성악설은 배척되고 성선설은 당시 새로 대두된 성리학자들에 의하여 다시
의리(義理)의 성과 기질의 성으로 나누어져, 전자는 본래 완전한 선이라 하고 후자는 기질의 양부(良
否)에 따라 선악으로 갈린다는 성리학설이 정립되었다. 즉, 정이는 이(理)가 인간에 들어와 성(性)이
되고 기는 인간에 들어와 재(才)가 된다고 하였다. 이는 만물의 본체이므로 순선(純善)하고, 따라서 사
람의 성은 모두 선하여 악한 것이 없으며, 기에서는 청탁과 정편(正偏)이 있다 하였고, 그 때문에 사람
의 재에는 지혜(智慧)와 우둔(愚鈍)이 있고, 현명(賢明)과 불초(不肖)가 있는 것이라 하였다. 정호는
《주역》을 인용하여 형상(形狀)이 없는 것을 도리(道理)라 하고, 형상이 있는 것은 기(器)라 하여 하
늘의 도리는 음·양이요, 땅의 도리는 유(柔)·강(剛)이요, 인간의 도리는 인(仁)·의(義)라 하여, 비
록 천·지·인의 삼재(三才)가 음양·강유·인의로 다른 것 같으나 도리에 이르러서는 모든 것이 귀일
된다고 하였다. 주자는 인간의 심성을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으로 나누어 설명하였
다. 본연지성은 이(理)요, 선(善)이라 하였고, 기질지성은 타고난 기질에 따라 청탁과 정편이 있어 반
드시 선한 것만은 아니고 때로는 악하게도 된다 하였다. 정(情)은 반드시 악한 것만은 아니지만 때로는
선하지 못할 수도 있으니, 즉 기질을 맑게 타고난 사람은 그 정이 선하게 되지만 이것을 탁하게 타고난
사람은 그 정이 악하게 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사람에 따라 청탁·지우(智愚) 등 여러 차별이 있으
나, 이 정은 불변이 아니므로 인간의 노력과 수양에 따라 우(愚)가 지(智)로도 변하고 탁함을 청으로
만들 수도 있는 것이니 여기에 인간의 윤리성 및 도덕성이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그리하여 인간이 지켜
야 할 규범으로서 성리학자들은 성(誠)·경(敬)을 공통의 진리로 파악하였다.
【성경론】 인간이 자연의 진리와 진정한 자아를 추궁하여 근원적 도리에 도달하는 요체로서 주돈이는
이것을 정(靜)에 두었고, 정호는 성(誠)에 두었으며 정이와 주자는 경(敬)에 두었다. 정이는 “수양에
는 경이 필요하며 학문의 발전에는 치지(致知)가 중요하다”고 하였으니, 이들 성리학자들의 정(靜)·
성(誠)·경은 필연코 인(仁)과 의(義)로 귀일되는 것이다. 즉, 인·의의 인식 파악은 성·경에 의하여
비로소 가능함을 말하였다. 성리학은 주자 생존시에는 이것을 위학(僞學)이라 하여 박해를 받았으나 송
나라 멸망 후 원대(元代)에 이르러 관학(官學)으로 채택되고 과거(科擧)의 교재로 사용되면서 크게 번
성하였다. 청대(淸代)에 이르러 고증학(考證學:實學)이 대두되면서 귀족의 학문이니 실속 없는 공론(空
論)이니 하여 배척되었으나 교과 과목으로서의 성리학은 여전히 그 지위가 높았다.
【한국】 한국에 성리학이 들어온 것은 고려 말기, 충렬왕을 호종하여 원(元)나라에 갔던 안향(安珦)이
《주자전서(朱子全書)》를 가져와 연구하기 시작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 후 성균관의 유학자들에게 수
용되어 합리적이고 윤리적인 사상으로서 새로운 학풍을 이루게 되었으며, 그 대표적 인물로서 이색(李
穡)·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정도전(鄭道傳) 등을 들 수 있다. 이색·정몽주·길재 등은 불교의
폐단을 지적하고 유교를 숭상할 것을 주장하는 데 그쳤고, 또 신왕조에 협력하지도 않았으나 정도전·
하륜(河崙)·권근(權近) 등의 성리학자는 불교의 폐단뿐만 아니라 교리(敎理) 자체를 논리적으로 변척
(辨斥)하는 동시에 이태조를 도와 법전(法典)의 제정과 기본정책의 결정을 통하여 유교를 국시(國是)로
삼는 조선조가 성립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한편 정몽주의 학풍을 이은 길재는 의리학(義理學)의 학통을
세웠고, 그 학통은 김숙자(金叔滋)·김종직(金宗直)·김굉필(金宏弼) 그리고 조광조(趙光祖)로 이어지
면서 기묘사화·을사사화 등의 희생을 겪었으나 도학의 의리정신은 면면히 계승되었다. 그러나 성리학
이 전성기를 맞이한 것은 16세기에 들어서였으며, 송대의 성리학이 이 땅에 전래된 지 300년 가까이 되
어서였다. 즉, 이때 한국 유학의 쌍벽인 이퇴계(李退溪)와 이율곡(李栗谷)이 태어났으며, 서화담(徐花
潭)·이항(李恒)·김인후(金麟厚)·기대승(奇大升), 그리고 성혼(成渾) 등도 모두 같은 시대의 성리학
자들이다. 그들은 성리학을 우리의 것으로 소화함에 있어 자연이나 우주의 문제보다 인간 내면의 성정
(性情)과 도덕적 가치의 문제를 더 추구하였으니, 이퇴계와 기대승 및 이율곡과 성혼의 사단 칠정(四端
七情)에 관한 논변(論辨)이 바로 그것이며, 그들은 이 논변을 통하여 ‘이기성정론(理氣性情論)’을 활
발히 전개시켰다. 한편, 내면적 도덕원리인 인성론(人性論)은 송익필(宋翼弼)·김장생(金長生) 등에 의
하여 유교의 행동규범인 예설(禮說)로 발전하였다. 이퇴계와 이율곡에 앞선 서화담은 그 이론이 송나라
장재와 같은 기일원론(氣一元論)이라 할 수 있으니, 곧 “태허(太虛)는 맑고 무형(無形)이나 이름하여
선천(先天)이라 한다. 그 크기가 바깥이 없으며, 거슬러 올라가도 시작이 없다”고 하며 기(氣)의 본체
를 말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화담은 이러한 기 가운데 “갑자기 뛰고 흘연히 열림이 있으니 이것은 누
가 시키는 것인가? 저절로 그렇게 되며 또한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으니 이것이 곧 이치(理
致)가 시간으로 나타남인 것이다”라고 기의 작용을 말하였다. 그리하여 화담은 기라는 것이 모든 존재
의 근원이며, 현상으로 존재하는 것은 오직 기만 있을 뿐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이에 반하여 퇴계는 이
를 절대적인 것으로 본 학자였다. 그는 정통 정주학의 계통을 따라서 항상 이우위설(理優位說)의 입장
을 강력하게 견지하였으며, 이의 구극성(究極性)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무릇 옛날이나 오늘날의
학문과 도술(道術)이 다른 까닭은 오직 이 이를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것은 지극히 허(虛)하지만
지극히 실(實)하고 지극히 없는 것(無) 같지만 지극하게 있는 것(有)이다. …능히 음양·오행·만물·
만사(萬事)의 근본이 되는 것이지만 그 속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다. 어찌 기와 섞어서 하나가 될 수
있겠는가?” “이것은 만유(萬有)를 명령하는 자리요, 어느 것에서 명령을 받는 것이 아니다”. 퇴계는
이와 기를 엄격히 구별하여 그 혼동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태극 또는 이로 표현되는 것을 다름 아닌
인간의 선한 본성의 궁극적 근원으로 보았던 것이다. 성리란 곧 인간의 본성을 이루는 것이며, 인간은
그것을 확충하고 발휘함으로써 인간이 인간된 소임을 다하게 되는 것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그것은 신
체적·물질적 조건에서 유래하는 것과는 엄격히 구별하여야 한다고 보았다. 퇴계는 당시에 사화(士禍)
가 연달아 일어나서 올바른 선비들이 죽임을 당하는 부조리한 사회현실에서 진실로 선악과 정사(正邪)
를 밝히고 올바른 진리를 천명함으로써 사람들이 나아갈 바 표준과 방향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퇴계의
이같은 성리학설은 후세에 깊은 영향을 주었고, 일본으로 전해져 일본 유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퇴계
보다 35년 후에 태어난 이율곡도 퇴계와 마찬가지로 정통 성리학파의 입장을 견지하였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성리학만을 고수한 것이 아니라 불교와 노장철학(老莊哲學)을 위시한 제자(諸子)의 학설과 양명
학(陽明學) 등 여러 학파의 사상도 깊이 연구하였다. 그러면서도 율곡은 유학의 본령(本領)을 들어 그
기본정신에 투철하였으며, 이를 철학적으로 전개하였을 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현실문제에까지 연결시켰
던 것이다. 그는 논하기를 “성리학은 형이상학적 성격을 지녔다 하더라도 공자가 가르친 효제충신(孝
悌忠信)이라든지 인의(仁義)와 같은 일상적으로 인간이 행할 도리를 떠나서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개
별적인 규범(規範:所當然)만을 알고 근본원리[所以然]를 알지 못하면 그 행위가 결과적으로 선행(善行)
에 합치한다 하더라도 도학이라 말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여, 자애(慈愛)와 효도와 충성과 우애라
하더라도 그것을 행하는 이유를 추구하는 의미에서 형이상학이라 할 수 있다고 하였다. 즉, 율곡성리학
의 요령은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사실(경험성)에 근거하여 그 까닭을 추구함(논리성)에 있어 논리적인
모순이나 비약을 배제하고 그 본원성(本源性)을 체계적으로 나타내는 철학사상이라 할 수 있다. 율곡은
진정한 학문이란 내적(內的)으로 반드시 인륜(人倫)에 바탕을 둔 덕성(德性)의 함양과 외적으로 물리
(物理)에 밝은 경제의 부강(富强)을 겸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당시의 피폐한 현실을 역사적 갱장기
(更張期)로 파악하고 국방력의 강화, 경제적 부강, 사회정의의 확립 등을 주장하는 동시에 이러한 실리
를 주장하다 보면 의리(義理)에 어긋나고 의리를 추궁하다 보면 실리를 망각하기 쉬우므로 이러한 모순
을 원만히 타결해 나갈 수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즉, 권능(權能)과 의리가 상황에 따라서 창의적으로
그 마땅함[宜]과 알맞음[中]을 얻는다면 의(義)와 이(利)는 그 가운데 융화된다고 하였다. 이상과 같은
퇴계·율곡의 성리학은 인간성의 문제를 매우 높은 철학적 수준에서 구명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공허한 관념을 벗어나 역사적·사회적인 현실과 연관을 가지고 영향을 주었으며, 후세에 실학사상(實學
思想)으로 전개되는 하나의 계기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
만물의 존재가 이(理)와 기(氣) 두 요소로 이루어졌다고 설명하는 성리학의 이론. 정이(程)가 주창하였
고 주희(朱熹)가 완성하였다. 성리학의 발생시기는 불교의 폐해가 노출되어 여러 가지 사회문제를 야기
시켰던 당나라 말기였다. 한유(韓愈)는 오륜(五倫) 등을 강조하는 유교의 사회철학적 입장에서 사회성
이 결여된 불교의 폐단을 지적하고 배척하였으며, 이고(李)는 불교의 장점인 해탈의 논리를 유교의 이
론으로 재구성함으로써 불교의 필요성을 부정하였다. 이고가 재구성한 유교적 해탈의 논리는 인간 속에
내재해 있는 초월적이고 불변적인 요소인 성(性)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성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성은 자신의 마음 속 깊이 존재하는 주관적인 것이어서 인식하기
어렵다. 이고를 계승한 송나라의 주돈이(周敦)는, 바깥의 사물에 존재하는 불변자와 자신의 성이 일치
한다는 전제 하에, 자신의 성을 인식하기 위하여 바깥 사물에 내재하는 불변자를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방법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주돈이는 음양오행으로 구성된 만물의 내면에는 무극(無極)과 태극이라고
하는 불변자가 있음을 확인하였고, 뒤를 이은 장재(張載)는 기(氣)가 잠시 모여서 형성된 형태가 만물
의 현상태이고 기가 흩어진 상태인 태허(太虛)가 만물의 본질태라 파악함으로써 만물의 불변적인 본질
을 확인하였다. 그 뒤 정이는 만물의 현상태인 음양오행 등을 기로 수렴하고 무극, 태극, 태허 등의 불
변하는 만물의 본질을 이(理)로 수렴함으로써 이기론을 완성하였는데 이 이기론은 주희에게 그대로 계
승되어 성리학의 중심적인 이론이 되었다. 정이와 주희에 의하여 완성된 이기론은 원래 인간의 불변적
본질인 성을 인식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개된 것이므로 만물의 변하는 요소인 현상태를 대변하는 기와
불변하는 요소인 본질태를 대변하는 이를 이원적으로 파악하는 이원론적 성격을 갖는 것이다. 만물의
물질적 존재와 삶의 작용, 인간의 감정 등 인식가능하며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모든 요소는 기이
다. 기의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존재의 본질로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며 인식의 직접적인 대상이 아니
며 궁극적으로 하나로 귀일되는 요소는 이이다. 따라서 인간이 자신의 존재의 본질이 이라는 사실을 확
인하여 이의 입장에서 삶을 영위할 수 있다면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이 유교철학을 통하여 실현되는 것
이다. 한국의 성리학에서는 기본적으로 이기이원론을 수용하지만, 퇴계 이황(李滉)을 중심으로 하는 수
양철학에서는 존재의 본질을 회복하여야 하는 입장 때문에 이를 중시하였고, 율곡(栗谷) 이이(李珥)를
중심으로 하는 실천철학에서는 현실을 개혁해야 하는 입장 때문에 존재의 현실적 요소인 기를 강조하였
다.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
성리학의 이기론에서 만물의 본질적 존재인 이(理)와 만물의 현상적 존재인 기(氣)가 분리되어 따로 존
재하는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하나로 연결되었다고 주장하는 이론. 이기론에서는 일반적으로 이와 기의
관계를 “이와 기는 서로 뒤섞이지 않으며(理氣不相雜), 이와 기는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理氣不相
離)”는 말로 정리한다. 존재의 본질 회복을 목적으로 하는 수양철학에서는 이를 중시해야 하므로 전자
의 입장에 비중을 두는 경향이 있고, 현실의 개혁에 치중하는 실천철학에서는 기를 중시해야 하므로 후
자의 입장에 비중을 두는 경향이 있다. 전자에만 치중하면 이기이원론으로 발전하고 후자에만 치중하면
이기일원론으로 발전한다. 이기일원론적 입장에서는 이가 기보다 먼저 존재하며 이가 기를 낳는다고 하
는 이기이원론적 주장을 거부한다. 명나라 때의 학자 나흠순(羅欽順)은 이기일원론적 입장을 강화하였
고, 청나라 때의 학자 대진(戴震)은 “이는 기의 조리에 불과한 것”이라고 명언함으로써 이의 초월성
과 불변성을 부정하였다. 한국의 성리학에서는 이기일원론의 입장이 일부 수용되었다. 서경덕(徐敬德)
은 “기 밖에 이가 없으며 이는 기를 주재하는 것”이라 하여 이기일원론적 입장을 취하였다. 이이(李
珥)는 기본적으로는 이기이원론을 계승하면서도 “이와 기는 혼연하여 사이가 없고 서로 떨어지지 않으
므로 다른 물건이라 할 수 없다”고 함으로써 이기일원론적 입장에 비중을 두었다.
주자<朱子(1130∼1200)>
중국 송대(宋代)의 유학자. 자 원회(元晦)·중회(仲晦). 호 회암(晦庵)·회옹(晦翁)·운곡산인(雲谷山
人)·창주병수(滄洲病)·둔옹(遯翁). 이름 희(熹). 푸젠성[福建省] 우계(尤溪) 출생. 선조는 대대로 휘
주무원(徽州깃?安徽省)의 호족으로 아버지 위재(韋齋)는 관직에 있다가 당시의 재상(宰相) 진회(秦檜)
와의 의견충돌로 퇴직하고 우계에 우거(寓居)하였다. 주자는 이 곳에서 14세 때 아버지가 죽자 그 유명
(遺命)에 따라 호적계(胡籍溪)·유백수(劉白水)·유병산(劉屛山)에게 사사하면서 불교와 노자의 학문에
도 흥미를 가졌으나, 24세 때 이연평(李延平)을 만나 사숙(私淑)하면서 유학에 복귀하여 그의 정통을
계승하게 되었다. 그의 강우(講友)로는 장남헌(張南軒)·여동래(呂東萊)가 있으며, 또 논적(論敵)으로
는 육상산(陸象山)이 있어 이들과 상호 절차탁마(切琢磨)하면서 주자의 학문은 비약적으로 발전 심화하
여 중국사상사상 공전(空前)의 사변철학(思辨哲學)과 실천윤리(實踐倫理)의 체계를 확립하기에 이르렀
다. 그는 19세에 진사시에 급제하여 71세에 생애를 마칠 때까지 여러 관직을 거쳤으나, 약 9년 정도만
현직에 근무하였을 뿐, 그 밖의 관직은 학자에 대한 일종의 예우로서 반드시 현지에 부임할 필요가 없
는 명목상의 관직이었기 때문에 학문에 전념할 수 있었다. 그의 학문을 저서를 통해서 관찰해 보면 46
세까지를 전기, 이후 60세까지를 중기, 61세 이후를 후기로 하는 3기(三期)로 대별할 수 있다. 주자연
보(朱子年譜)에 의해 전기 저서를 순차적으로 열거하면 《논어요의(論語要義)》 《논어훈몽구의(論語訓
蒙口義)》 《곤학공문편(困學恐聞編)》 《정씨유서(程氏遺書)》 《논맹정의(論孟精義)》 《자치통감강
목(資治通鑑綱目)》 《팔조명신언행록(八朝名臣言行錄)》 《서명해의(西銘解義)》 《태극도설해(太極圖
說解)》 《통서해(通書解)》 《정씨외서(程氏外書)》 《이락연원록(伊洛淵源錄)》 《고금가제례(古今家
祭禮)》로 이어져 《근사록(近思錄)》의 편차(編次)로 끝맺었다. 이 전기는 북송의 선유(先儒)인 주염
계(周濂溪)·장횡거(張橫渠)·정명도(程明道)·정이천(程伊川)의 저서교정과 주례에 전념하고, ‘논
어·맹자’ 등은 차기(次期)의 예비사업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즉, 주자의 학문적 기초가 확립된 시
기로서 그것이 《근사록》에 집약된 것으로 보인다. 그후에 논적이었던 육상산 형제와의 아호사(鵝湖
寺) 강론에서 존덕성(尊德性)에 대해 도학(道學)의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중기에는 《논맹집주혹문(論
孟集註或問)》 《시집전(詩集傳)》 《주역본의(周易本義)》 《역학계몽(易學啓蒙)》 《효경간오(孝經刊
誤)》 《소학서(小學書)》 《대학장구(大學章句)》 《중용장구(中庸章句)》 등이 있으나 가장 중요한
것은 ‘사서(四書)의 신주(新註)’가 완성된 점이다. 60세 때는 《중용장구》에 서문을 붙여 상고(上
古)에서 후대까지 도학을 전한 성현(聖賢)의 계통을 밝혀 도학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후기에는 오경(五
經)에 손을 대어 《석존예의(釋尊禮儀)》 《맹자요로(孟子要路)》 《예서(禮書:儀禮經傳通解)》 《한문
고이(韓文考異)》 《서전(書傳)》 《초사집주후어변증(楚辭集註後語辨證)》 등이 있다. 더욱이 71세로
생애를 마치던 해 3월, 《대학》의 ‘성의장(誠意章)’을 개정(改訂)한 점으로 미루어 그의 《사서집주
(四書集注)》에 대한 지정(至情)이 어느 정도이었는지 엿볼 수 있다. 주자의 정치에 대한 의견은 <임오
응조봉사(壬午應詔封事)>나 <무신봉사(戊申封事)>에 나타나 있으며 또 절동(浙東)의 지방관으로 있을
때 대기근(大飢饉)을 구제하였다는 실적도 있으나 만년에는 권신의 미움을 사 그의 학문이 위학(僞學)
이라 하여 많은 박해를 받았으며, 해금(解禁)이 있기 전에 죽었다. 그후 그의 학문이 인정되어 시호가
내리고 다시 태사(太師)·휘국공(徽國公)이 추증(追贈)되었다. 그의 유언을 수록한 것으로는 주자의 막
내아들 주재(朱在)가 편찬한 《주문공문집(朱文公文集)》(100권, 속집 11권, 별집 10권)이 있고, 문인
과의 평생문답을 수록한 여정덕(黎靖德) 편찬의 《주자어류(朱子語類)》 140권이 있다.
사서(四書)
《대학(大學)》 《논어(論語)》 《맹자(孟子)》 《중용(中庸)》의 네 가지 경서. 《대학》과 《중용》
은 원래 각각 《예기(禮記)》 속의 한 편(編)이었으나, 유교 교설의 뛰어난 개론으로서 주목되어 주자
(朱子)가 그것을 빼내어 《논어》 《맹자》와 함께 사서라 부르고, 사서야말로 공문(孔門)의 사제전수
(師弟傳授)의 도통(道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주자가 여기에 베푼 주석 가운데 《대
학장구(大學章句)》 《논어집주(論語集注)》 《맹자집주(孟子集注)》 《중용장구(中庸章句)》는 그의
다른 여러 주석과 함께 신주(新注)로 불리며, 한(漢)·당(唐)의 고주(古注)에 비해 새로운 학문의 전개
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당(唐) 이전의 오경(五經)을 대신해서 주자 이후에는 사서가 유학의 중심
을 차지하고 유행되어, 나중에 한국에서는 사서오경이라 하면 중국의 고전 및 문화의 상징으로서 받아
들여졌다.
양명학(陽明學)
중국 명나라 중기에 태어난 양명(陽明) 왕수인(王守仁)이 이룩한 신유가철학(新儒家哲學). 송대에 확립
된 정주이학(程朱理學)과는 대립된 성격을 가지고 있어 육상산(陸象山)의 철학과 함께 심학(心學)으로
도 불린다. 왕양명은 초기에 이학(理學)을 공부하다가 주자(朱子)의 성즉리(性卽理)와 격물치지설(格物
致知說)에 회의를 느끼고 육상산의 설을 이어 심즉리(心卽理)·치양지(致良知)·지행합일설(知行合一
說)을 주창하고 나왔다. 즉 원리와 원리 실현의 소재[氣]를 엄격히 구별하여, 마음은 기이고 마음이 갖
춘 도덕성 등의 이치는 이(理)라고 한 주자의 견해에 대하여, 만물일체와 불교의 삼계유심(三界唯心)의
입장에서 마음이 곧 이라고 주장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서 객관세계에 실재하는 사물의 이치를 탐구하
여 지식을 이룩하는 이론적 방법으로도 대학의 격물치지를 해석한 주자의 입장에 반대하고, 외재사물
(外在事物)을 문제삼으려면 이미 마음이 발동해야 하므로 물(物)을 마음이 발동하여 이룩한 사(事)로
해석하고, 밖에 있는 이치의 파악 이전에 파악하는 주체로서 마음의 선천적인 앎의 능력인 양지(良知)
를 이룩하여 사물을 바르게 하는 방법으로 양명은 확정했다. 따라서 그에게는 인식과 실천이 둘이 아니
라 하나일 수밖에 없었으며 《전습록(傳習錄)》 권2에 의하면 “앎의 진정한 독실처(篤實處)가 곧 행
(行)이요, 행함의 명각정찰처(明覺精察處)가 곧 앎이니, 앎과 행함의 공부는 분리할 수 없다”는 지행
합일설(知行合一說)이 제출된 것이다. 양명학은 중국에서는 귀적파(歸寂派)·수정파(修正派)·현성파
(現成派)로 삼분(三分)되어 발전되었으며, 한국에서는 정주학파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의 계곡
(谿谷) 장유(張維), 지천(遲川) 최명길(崔鳴吉), 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 등이 연구하였으며 특히
일본에 많은 영향을 주어 나카에 도쥬[中江藤樹]가 이를 연구 발전시켰다. 양명학의 성격을 한마디로
말하면 맹자의 선천적인 도덕심과 마음의 발양을 통해 타인을, 나아가 인간세계와 우주를 성실하고 바
르게 하자는 이상을 형이상학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선가적(禪家的)인 색채 때문에 청대
실학자(實學者)들에 의해 비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연구·계승되는 유가철학으로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고증학(考證學)
중국의 명(明)말~청(淸)초에 일어난 실증적(實證的) 고전 연구의 학풍 또는 방법. 중국에서는 고거학
(考據學), 또는 박학(朴學)으로 많이 불린다. 이 학풍이 일어난 배경은 현실 문제는 접어두고 이기(理
氣)니 심성(心性)이니 하는 공허한 형이상학, 이른바 송학(宋學)에 대한 반발과 반청(反淸)감정, 시대
의식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일어났다. 송학이란 이름에 맞서서 이를 한학(漢學)이라고도 불렀다.
학문 방법은 매우 치밀하고 꼼꼼하게 글자와 구절의 음과 뜻을 밝히되 고서(古書)를 두루 참고하여 확
실한 실증적 귀납적 방법을 택하여, 종래의 경서 연구 방법을 혁신하였다. 고증학을 5가지로 나누어 ①
훈고학(訓學) ② 음운학 ③ 금석학 ④ 잡가 ⑤ 교감학(校勘學)으로 분류한다. 이 학풍이 중국에 끼친
영향을 보면 이른바 경세치용(經世致用)을 주장하여 정치·민생(民生)이 우선이란 이론을 제공했고 학
문 연구는 정확한 음운과 뜻[訓], 역사적 고증이 있어야 하는 새로운 학문풍토를 정착시켰다. 대표적인
학자는 염약거(閻若Q)·호위(胡謂)·모기령(毛奇齡)·만사대(萬斯大)·만사동(萬斯同) 등이다. 이 학파
가 극성기에 오파(吳派)와 환파(派)로 분파하였는데 오파에서는 혜동(惠棟)이 영수가 되고 환파에서는
대진(戴震)이 영수였는데 오파는 순수한 한학(漢學)을, 환파는 음운·훈고·수학·천문학·지리학·수
리학(水利學)을 연구했다. 대진의 제자엔 단옥재(段玉裁)와 왕염손(王念孫) 부자(父子)가 있다. 이 고
증학은 영·정조 때 일어난 한국 실학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유형원(柳馨遠)의 《반계수록(磻溪隨
錄)》, 이익(李瀷)의 《성호사설(星湖僿說)》, 정약용(丁若鏞)의 《목민심서(牧民心書)》 《경세유표
(經世遺表)》 《흠흠신서(欽欽新書)》, 안정복(安鼎福)의 《동사강목(東史綱目)》, 유득공(柳得恭)의
《발해고(渤海考)》, 김정호(金正浩)의 《마과회통(麻科會通)》, 박세당(朴世堂)의 《색경(穡經)》, 서
유구(徐有")의 《임원경제십륙지(林園經濟十六志)》, 신경준(申景濬)의 《훈민정음운해(訓民正音韻
解)》, 홍대용(洪大容)의 《담헌서(湛軒書)》, 이덕무(李德懋)의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박지원
(朴趾源)의 《연암집(燕巖集)》 등 각 분야의 실학적인 저작들이 쏟아져 나왔다.
공양학(公羊學)
구경(九經) 가운데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을 중시하여 연구하는 학문. 서한(西漢) 초기에 생긴 금
문학파(今文學派)는 공자(孔子)를 정치가로, 그가 편성한 육경(六經)을 공자의 정치이론서라고 생각하
였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춘추공양전》에 그 핵심 사상이 들어 있다고 생각하여 서한의 대학자 동중
서(董仲舒)와 공손룡(公孫龍)이 중심이 되어 이 공양학을 창설하였다. 또 중국은 하나라는 사상인 이른
바 대일통(大一統)사상이 공양전 속에서 강조되자, 이 학문 정치에 큰 도움이 되겠다고 판단한 한나라
무제가 정치이론서로 선택하고 또 공손홍을 승상으로 등용하자 공양학은 매우 번창하였다. 후한(後漢)
때는 학자 하휴(何休)가 《춘추공양해고(春秋公羊解)》 《공양묵수(公羊墨守)》 《좌씨고황(左氏膏)》
《곡량폐질(穀梁廢疾》 등을 지어 더욱 발전시켰는데, 이 학문이 극성기를 맞은 것은 청(淸)대였다. 청
대에 강소(江蘇), 절강(浙江)지방에서 이 학문이 다시 번창하여 장존여(莊存與)와 장유가(莊有可) 등이
상주학파(常州學派)를 결성하여 정치이론학으로 더욱 발전시켰다. 청말엔 추평(平)·캉유웨이[康有
爲]·담사동(譚嗣同)·양계초(梁啓超) 등이 공양학을 정치이론으로 크게 발전시켰다. 또 1891년에 캉유
웨이가 간행한 《신학위경고(新學僞經考)》는 고문파의 경학을 호되게 비판한 금문경학(今文經學)의 집
대성으로 평가된다.
변법자강운동(變法自彊運動)
청나라 말기 캉유웨이[康有爲], 량치차오[梁啓超] 등이 중심이 되어 진행한 개혁운동. 무술변법(戊戌變
法)이라고도 한다. 청·일전쟁 패전과 그에 따른 제국주의 열강에 의한 중국 분할로, 젊은 독서인층(讀
書人層)은 망국의 위기감을 절감하였다. 그들은 패전의 경험에서, 유럽의 무기·기술만을 도입하려는
양무운동(洋務運動)의 한계를 깨닫고, 전통적인 정치체제·교육제도 개혁으로서 부국강병을 실현해야만
중국이 근대세계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음을 주장하였다. 헌법제정, 국회개설, 과거제(科擧制) 개혁과
양식학교(洋式學校) 설립, 산업의 보호육성 등을 구체적 목표로 정하고, 주요도시에 학교를 설립하고,
신문을 발행하여, 관료나 독서인층을 대상으로 계몽·선전활동을 펼쳤다. 외국인 선교사와 일부 고관들
중에도 그것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어, 고관들의 후원으로 캉유웨이는 황제에게 의견을 구신할 기회를
얻었다. 황제는 그의 의견에 공명하여 량치차오·담사동(譚嗣同) 등 변법파(變法派)를 등용하여 그들의
주장을 실행하였다. 그러나 이 운동은 서태후(西太后)의 쿠데타로 좌절되고, 캉유웨이와 량치차오는 망
명하였다. 20세기에 헌법제정·국회개설을 목표로 한 입헌(立憲)운동이 전개되었으나, 청조타도(淸朝打
倒)·공화국 수립을 목표로 한 쑨원[孫文] 등의 혁명운동이 활발해졌다.
2. 도가(道家)
중국사상(中國思想)의 여명기인 선진시대(先秦時代) 이래 유가(儒家)와 함께 중국 철학의 두 주류를 이
루었던 학파. 도가라는 일컬음은 이 사상의 개조(開祖)라 할 수 있는 노자(老子)가 우주 본체를 설명하
면서 사용한 도(道)와 덕(德)의 개념에서 비롯되어 도덕을 논하는 일련의 학자들을 도덕가라고 호칭하
다가 뒤에 이를 약하여 도가로 부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호칭이 선진시대부터 나타난 것도
아니며, 전한대(前漢代) 유흠(劉歆)과 사마 담(司馬談) 부자가 중국사상의 내원(來源)을 설명하는 가운
데 구가(九家) 또는 육가(六家)로 분류한 데서 일반화되었다.
〈도가의 연원(淵源)과 사상〉 도가라고 할 때, 넓은 뜻으로는 노자를 교조(敎祖)로 하여 뒤에 성립하
는 종교형태인 도교(道敎:Taoism)도 포함하지만, 일반적으로는 도교와 구별하여 노자·장자(莊子)·열
자(列子)·관윤(關尹) 등이 중심이 되는 철학파를 가리키며, 좁은 뜻으로는 노장철학(老莊哲學)을 가리
키기도 한다. 그리고 시대적으로 보면 노자와 장자, 양주(楊朱)·열자를 중심으로 한 선진도가(先秦道
家)뿐만 아니라 위진시대(魏晉時代)의 왕필(王弼)과 향수(向秀)·곽상(郭象) 등을 주로 하는 현학파(玄
學派)와 명리학파(名理學派)도 도가에 속한다. 도가사상은 노자에서 비롯하였기 때문에 그 연원도 노자
사상을 이해하면 될 것이다. 반고(班固)의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 보면 “도가자류(道家者
流)는 사관(史官)에서 나왔다”고 한 것 또는 《사기(史記)》에서 “노담(老聃)은 주(周)나라의 수장실
지리(守藏室之吏)였다”고 한 것처럼 노자는 사관 출신이었고, 사관은 역사와 전통적인 학술사상과 지
혜를 이어받은 해박한 지식인이었다. 그러므로 노자는 한편으로는 서주(西周)의 예악제도(禮樂制度)와
그 문화에 대하여 철저하게 이해하고 있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당시의 전화(戰禍)와 도덕의 붕퇴(崩
頹), 사상의 분란 및 정치적인 암흑상황을 가장 심각하게 감지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영일(永逸)의 방
법을 구하되 눈앞의 고통을 제거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가져온 근원으로서 서주문화 자체를 비판적으로
검토해서, 본래 상태로 돌아가려는 ‘반박귀진(反樸歸眞)’의 사상을 이루게 된 것이 도가이다. 도가는
이러한 배경을 가지고 부정적 사변법(思辨法)을 사용하여 유가(儒家)의 가치도덕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론적 본체관념(本體觀念)으로서 ‘道’와 ‘德’의 이론을 제시하였다. 도가의 도덕은 인위조작(人
僞造作)하지 않으면서도 어김없이 전개되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며, 이에 따라
인생론에서도 무욕과 허무의 방법 등 부정적 방법을 통하여 자연대도(自然大道)에 순응하는 삶을 이상
적인 것으로 제시하였고, 지식과 가치의 문제에서는 시비(是非)가 양행(兩行)하는 상대주의(相對主義)
와 반지주의(反知主義)를 주창하게 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장자(莊子)의 개체(個體)의 절대자유·절대
평등의 사상으로 이어지기도 하였다.
노장사상(老莊思想)
도가(道家)의 중심인물인 노자(老子:BC 580?∼480?)와 장자(莊子:BC 370?∼280?)의 사상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좁은 뜻의 도가철학을 뜻하는 말. 그러나 그들의 사상이 도가사상을 실질적으로 대표하므로 노
장사상을 일반적으로 도가사상과 같은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 당시 노자와 장자는 몰락한 주(周)나라
의 문물제도가 지닌 허위성과 형식성을 문제삼는 반문명적(反文明的) 사상을 키우면서 나타났다. 그러
므로 그들의 사상은 공자와 맹자의 가치철학(價値哲學)과 상반적일 수밖에 없었고 부정(否定)과 역설
(逆說)의 논리를 전개할 수밖에 없었다. 즉 그들은 유가(儒家)와는 달리 반형식(反形式), 탈가치의식
(脫價値意識)을 가지고 일체의 인위조작(人爲造作), 예를 들면 대사회적(對社會的)인 가치체계나 제도
및 형식에 그치지 않고 그 근원으로서의 내적(內的) 도덕성에 대한 철저한 분석과 비판을 통하여, 어떻
게 궁극적으로 자유자재하는 자아해탈(自我解脫)의 상태와 자연무위(自然無爲)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
을 것인가 하는 문제를 다루었다.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한편으로는 가치(價値)에 물들지 않은 사
물(事物)의 세계와 그 사물의 근원에 대한 탐구로서의 존재론적 본체론(本體論)과, 다른 한편으로는 인
문세계를 구축하는 가치욕구(價値欲求)를 배제하고 생(生) 자체를 본체의 세계로 개방시키려는 실천적
노력으로서의 무욕양생(無欲養生)의 인생론이라는 고유문제를 다루었다고 할 수 있다. 존재론의 경우,
그들은 도(道)와 덕(德)을 본체와 만물의 기본원리로 삼았는데, 도는 보편원리를, 덕은 특수원리를 의
미한다. 그런데 노자가 ‘도생일, 일생이, 이생삼(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유생어무(有生於無)’
와 같이 도에서 만물이 이루어지는 생래과정(生來過程)에 치중하였다면, 장자는 본체즉현상(本體卽現
象)의 입장에서 ‘일기취산(一氣聚散)’과 같이 만물이 운용되는 운행과정에 관심을 두었다. 사실 중국
사상에서 공통적으로 견해를 같이하는 본체론의 중요 개념들[氣·陰陽]은 노·장에 의하여 정립되었다
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편, 인생론의 경우 인의예지(仁義禮智) 등 사회에서 필요한 질서 형식을 비
판함으로써 결국 집단이나 전체중심적 태도로부터 개체중심적 태도로 전환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개체
및 개인의 조화일기(造化一氣)처럼 자유자재하면서도 장구(長久)한 것을 인생의 이상으로 삼고, 그 방
법으로서 무욕물화(無欲物化)할 것을 주장하였다. 즉 노자는 일체의 욕구를 극소화시킴으로써 시비(是
非)·피아(彼我)를 구별함 없이 병생(竝生)하는 장생(長生)을 이상상태라 주장하였고, 장자는 신체적
장생에서 한 걸음 나아가 인생을 어떤 경지로 고양(高揚)시키는 양생과 달생(達生)을 주장하였다. 특히
장자는 이런 경지에 도달하는 방법으로서 무정(無情)과 복성론(複性論)을 제시하였다. 이것이 바로
‘수성반덕이복초론(修性反德而複初論)’이며, 장자 내편(內篇)의 소요유(逍遙遊)와 제물론(齊物論),
양생주(養生主) 등은 이러한 수양의 경지와 방법적 차서(次序)를 보여준 것이다. 노자와 장자는 지식문
제에서는 회의론(懷疑論)과 상대주의의 입장이어서, 궁극적으로는 반지주의(反知主義)를 통하여 현학적
(玄學的) 초월지(超越智)를 이상적인 것으로 제시하였으며, 한편 사회정치론에서는 소국과민(小國寡民)
등 방임주의적 이론을 제시하였다.
道
동양의 도덕이나 예술에서 그 중심을 흐르는 것으로 생각되어온 가장 근원적인 원리·원칙. 도에서 벗
어나는 것은 부도덕(不道德)이며, 예술작품으로서도 불완전하다고 생각하였다. 본래 사람이 걷는 길이
라는 뜻을 가진 이 글자가 추상적인 의미로 바뀌어 인간의 행위에 꼭 따라야 할 기준과 원칙의 의미로
되었다. 도덕적으로는 유교(儒敎), 예술적으로는 노장사상(老莊思想)이 그 발달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
다. 어느 경우나 도는 우주 인생을 가로질러 세계 속의 만물을 질서정연하게 하는 것으로 생각되었으
나, 유교의 정통사상에서는 천명(天命)인 인간의 선(善), 즉 본성에 따라 인의(仁義) 등의 덕목(德目)
을 실천하는 것이 도의 실현이라 하였다. 인간도덕으로서의 ‘인도(人道)’를 밟고 행하는 것이 그대로
‘천도(天道)’의 실현이 된다고 생각하는 데에 유교도덕의 도덕으로서의 깊이가 있다. 그러나 노장(老
莊)에서는 ‘사람’의 입장을 버리고 형상의 밑바닥에 숨는 것으로 생각한 자연의 ‘도’에 합일하는
것이 이상(理想)이라 하였다. 그 길은 만물을 만들어 내는 모체(母體)로서의 실재임과 동시에 잡다한
현상을 가로질러 만물을 그것으로서 존재하게 하는 법칙이기도 하였다. 세계의 진리는 거기에 있고 현
상은 이 도의 발현으로서 뜻이 있게 된다고 생각하였다. 사람은 이 도와 하나가 됨으로써 현실의 피상
적인 차별이나 변화를 떠나 절대불변의 입장에서 참다운 자유를 얻게 되고 예술의 세계는 거기서부터
열리게 된다. 이렇게 해서 훌륭한 예술작품도 이 도의 구현으로서 비로소 태어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노자<老子(?∼?)>
중국 고대의 철학자·도가(道家)의 창시자. 성 이(李). 자 담(聃). 이름 이(耳). 노담(老聃)이라고도
한다. 초(楚)나라 고현(苦縣:河南省鹿邑縣) 출생. 춘추시대(春秋時代) 말기 주(周)나라의 수장실사(守
藏室史:장서실 관리인)였다. 공자(BC 552~479)가 젊었을 때 뤄양[洛陽]으로 노자를 찾아가 예(禮)에 관
한 가르침을 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주나라의 쇠퇴를 한탄하고 은퇴할 것을 결심한 후 서방(西方)으
로 떠났다. 그 도중 관문지기의 요청으로 상하(上下) 2편의 책을 써 주었다고 한다. 이것을 《노자》라
고 하며 《도덕경(道德經)》(2권)이라고도 하는데, 도가사상의 효시로 일컬어진다. 그러나 이 전기에는
의문이 많아, 노자의 생존을 공자보다 100년 후로 보는 설이 있는가 하면, 그 실재 자체를 부정하는 설
도 있다.
【사상】 노자는 도(道)의 개념을 철학사상 처음으로 제기하였으며, 이 도는 천지만물뿐만 아니라 상제
(上帝)보다도 앞서 존재한다고 하였다. 그것은 형상과 소리가 없어서 경험할 수도 없고 언어로 표현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그것은 무(無)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천지만물은 그로 말미암아 존재하고 생성
소멸한다. 그러한 측면에서 보면 그것은 무가 아니라 유(有)이다. 천지만물과 달리 도는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실체이다.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존재한다는 면에
서 보면 그것은 ‘자연(自然)’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것도 간섭·지배하지 않는다는 면에서
보면 그것은 무위(無爲)하다고 할 수 있다. 통치자가 만약 이러한 무위자연을 본받아 백성들을 간섭·
지배하지 않고 그들의 자발성에 맡긴다면 세상은 저절로 좋아진다. 노자에 의하면 일체 사물·사건들은
그들 자신과 상반하는 대립자들을 지니고 있다. 유(有)가 있으면 무(無)가 있고 앞이 있으면 뒤가 있
다. 이들 대립자들은 서로 전화한다. 화는 복이 되고 흥성한 것은 멸망한다. 이러한 대립전화(對立轉
化)의 법칙을 알고 유(柔)를 지키면 강(剛)을 이길 수 있다. 이를 귀유(貴柔)사상이라고 한다.
【전개】 노자사상은 열자(列子)와 장자(莊子)에게 계승되었다고 한다. 한(漢)나라 초기에 성행하였던
황노(黃老)사상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한고조(漢高祖)는 오랜 전란에 시달려온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
주고 파괴된 생산력을 회복하기 위하여 노자의 무위자연사상을 정치이념으로 삼았다. 동한(東漢) 말엽
에 도교를 창도한 장도릉(張道陵)이 노자를 교조(敎祖)로 추존(追尊)하고 노자오천문(老子五千文)을 신
도들이 외우고 익혀야 할 경전으로 받들어 노자사상은 도교의 교리가 되었다. 위진시대(魏晉時代)에 하
안(何晏)이 도덕론을 짓고 왕필(王弼)이 노자주(老子注)를 저술함으로써 노자사상은 위진 현학의 기본
사상이 되었다. 또한 인도에서 들어온 불경을 해석하는 데 노자의 용어와 이론이 활용되어 격의(格義)
불교 형성에 이바지하였다. 한국에서는 상고시대 이래의 신선사상이 삼국시대에 이르러 도가사상과 결
합, 풍류를 숭상하는 기풍을 조성하였다. 고려시대에는 국가의 재난을 없애고 복을 기원하는 과의(科
儀)도교가 성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산림(山林)을 찾아 신선처럼 살고자 하는 선비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老子道德經』
중국의 사상가 노자(老子)가 지은 것으로 전하는 저서명. 《노자(老子)》 또는 《도덕경(道德經)》이라
고도 한다. 약 5,000자, 상하 2편으로 되어 있다. 성립연대에 관해서는 이설(異說)이 분분하나, 그 사
상·문체·용어의 불통일로 미루어 한 사람 또는 한 시대의 작품으로 보기는 어렵다. BC 4세기부터 한
초(漢初)에 이르기까지의 도가사상의 집적(集積)으로 보여진다. 선진시대(先秦時代)에 원본 《노자》가
있었던 모양이나, 현행본의 성립은 한초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그 후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에 상편
37장, 하편 44장, 합계 81장으로 정착되어 오늘날에 이른다. 노자 사상의 특색은 형이상적(形而上的)인
도(道)의 존재를 설파하는 데 있다. ‘무위(無爲)함이 무위함이 아니다’라는 도가의 근본교의, 겸퇴
(謙退)의 실제적 교훈, 포화적(飽和的) 자연관조 등 도가사상의 강령이 거의 담겨 있어 후세에 끼친 영
향이 크다. 《노자》는 흔히 말하는 도(道)가 일면적·상대적인 도에 불과함을 논파하고, 항구 불변적
이고 절대적인 새로운 도를 제창한다. 그가 말하는 도는 천지(天地)보다도 앞서고, 만물을 생성하는 근
원적 존재이며, 천지간의 모든 현상의 배후에서 이를 성립시키는 이법(理法)이다. 다시 말하면, 대자연
의 영위(營爲)를 지탱하게 하는 것이 도이며, 그 도의 작용을 덕(德)이라 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도와
덕을 설파하는 데서, 《노자》의 가르침은 도덕(오늘날의 도덕과는 다름)으로 불리어 《도덕경》이라는
별명이 생기게 되었다. 그러나 노자사상의 중심은 오히려 정치·처세의 술(術)로서의 무위를 설파함에
있고, 형이상적인 도의 논설은 그 근거로서의 의미를 지님에 불과하다. 노자는 하는 일만 많으면 도리
어 혼란을 초래하고, 공을 서두르면 도리어 파멸에 빠지는 일이 흔한 세상에 비추어, 오히려 무위함이
대성(大成)을 얻는 방법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우선 의도하는 바는 아무런 작위(作爲)가 없고, 게
다가 그 공업(功業)은 착실절묘하다고 설파하였다. 이 도를 본으로 하여 무위함에서 대성을 기대할 수
있다고 설파하며, 이 점에서 형이상의 도와 실천적인 가르침이 관련된다. 무위의 술(術)이란 구체적으
로는 유약·겸손의 가르침이 되고, 무지·무욕의 권장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상징으로서는 물[水]·영
아(兒). 여성에의 예찬이 된다. 유가가 말하는 인의예악(仁義禮樂)이나 번잡한 법제금령(法制禁令)은
말세의 것으로 배척하고, 태고(太古)의 소박한 세상을 이상으로 삼는다. 그러나 그 가르침은 궁극적으
로는 세속적인 성공을 쟁취하는 데 있었다. 따라서 그 논법에는, ‘도는 언제나 무위하면서도 무위함이
아니다’ ‘대공(大功)은 졸(拙)함과 같다’,‘그 몸을 뒤로 하여 몸을 앞세운다’와 같이 역설(逆說)
이 많은 점이 두드러진다.
장자<莊子(BC 369∼BC 289?)>
중국 고대의 사상가. 제자백가(諸子百家) 중 도가(道家)의 대표자이다. 성은 장(莊). 이름은 주(周).
송(宋)의 몽읍(蒙邑:河南省商邱縣 근처) 출생. 정확한 생몰연대는 미상이나 맹자(孟子)와 거의 비슷한
시대에 활약한 것으로 전한다. 관영(官營)인 칠원(漆園)에서 일한 적도 있었으나, 그 이후는 평생 벼슬
길에 들지 않았으며 10여 만 자에 이르는 저술을 완성하였다. 초(楚)나라의 위왕(威王)이 그를 재상으
로 맞아들이려 하였으나 사양하였다. 저서인 《장자》는 원래 52편(篇)이었다고 하는데, 현존하는 것은
진대(晉代)의 곽상(郭象)이 산수(刪修)한 33편(內篇 7, 外篇 15, 雜篇 11)으로, 그 중에서 내편이 원형
에 가장 가깝다고 한다.
【사상】:인간의 마음은 일정한 시대·지역·교육에 의하여 형성되고 환경에 의해 좌우된다. 이 마음
이 외부 사물들과 접촉하여 지식이 생긴다. 이러한 지식은 시대·지역, 그리고 사람들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보편타당한 객관성을 보장할 수 없다. 장자는 이러한 지식에 입각한 행위를 인위(人爲)라고 한
다. 물오리의 다리가 짧다고 하여 그것을 이어주거나 학의 다리가 길다고 하여 그것을 잘라주면 그들을
해치게 되듯이 인위는 자연을 훼손할 수 있다. 장자는 노자(老子)와 마찬가지로 도(道)를 천지만물의
근본원리라고 본다. 도는 일(一)이며 대전(大全)이므로 그의 대상이 없다. 도는 어떤 대상을 욕구하거
나 사유하지 않으므로 무위(無爲)하다. 도는 스스로 자기존재를 성립시키며 절로 움직인다. 그러므로
자연(自然)하다. 도는 있지 않은 곳이 없다. 거미·가라지·기왓장·똥·오줌 속에도 있다. 이는 일종
의 범신론(汎神論)이다. 도가 개별적 사물들에 전개된 것을 덕(德)이라고 한다. 도가 천지만물의 공통
된 본성이라면 덕은 개별적인 사물들의 본성이다. 인간의 본성도 덕이다. 이러한 덕을 회복하려면 습성
에 의하여 물들은 심성(心性)을 닦아야 한다. 이를 성수반덕(性脩反德)이라고 한다. 장자는 그 방법으
로 심재(心齋)와 좌망(坐忘)을 들었다. 덕을 회복하게 되면 도와 간격 없이 만날 수 있다. 도와 일체가
되면 도의 관점에서 사물들을 볼 수 있다. 이를 이도관지(以道觀之)라고 한다. 물(物)의 관점에서 사물
들을 보면 자기는 귀하고 상대방은 천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도의 관점에서 사물들을 보면 만물을
평등하게 볼 수 있다. 인간은 도와 하나가 됨으로써 자연에 따라 살아갈 수 있으며 자유를 누릴 수 있
다. 이러한 자유는 천지만물과 자아 사이의 구별이 사라진 지인(至人)이라야 누릴 스 있다. 이 지인은
사람들과 조화를 이루고 천지만물들과도 사이좋게 살아갈 수 있다. 장자의 사상은 대부분 우언(寓言)으
로 풀이되었으며, 그 근본은 노자(老子)의 무위사상(無爲思想)을 계승하는 것이지만, 현세와의 타협을
배제하는 점에서는 더욱 철저하여, 바로 그와 같은 면에서 장자의 분방한 세계가 펼쳐진다.
【영향】:이러한 장자사상은 위진현학(魏晉玄學)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으며 남북조 시대에 성행한 반
야학(般若學)과 당나라 때 융성한 선종(禪宗)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현종(玄宗)은 그에게 남화진인(南
華眞人)이라는 호를 추증하였으므로, 《장자》는 《남화진경(南華眞經)》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읽혔다.
송(宋)·명(明) 이학(理學)은 유학을 위주로 하면서도 내면적으로는 장자철학을 수용하였다. 장자의 이
러한 초탈사상은 자연주의 경향이 있는 문학 예술에도 영향을 주었다. 한국에서는 조선 전기에 이단(異
端)으로 배척받기도 하였으나 산림(山林)의 선비들과 문인들이 그 문장을 애독하였다.
장자『莊子』
중국 전국시대의 사상가 장자(莊子:莊周)의 저서. 당나라 현종(玄宗)에게 남화진경(南華眞經)이라는 존
칭을 받아 《남화진경(南華眞經)》이라고도 한다. 내편(內編) 7, 외편(外編) 15, 잡편(雜編) 11로 모두
33편이다. 그 중 내편이 비교적 오래되었고 그 근본사상이 실려 있어 장자의 저서로, 외편과 잡편은 후
학(後學)에 의해 저술된 것으로 추측된다. 장자는 노자(老子)의 학문을 깊이 연구하였으며 그의 사상의
밑바탕에 동일한 흐름을 엿볼 수 있다. 진(秦)의 시황제(始皇帝) 분서(焚書)의 화를 입기도 하고, 한
(漢) 때 분합(分合)·재편성되기도 하다가 진(晉)의 곽상(郭象) 이후 오늘의 33권으로 정해졌다. 이 곽
상주(註)가 완본으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기본자료이다. 그 후에도 당(唐)나라 성현영(成玄英)의
《주소(註疏)》, 송(宋)나라 임희일(林希逸)의 《구의(口義)》 등 많은 주가 나왔다. 《장자》의 문학
적인 발상(發想)은 우언우화(寓言寓話)로 엮어졌는데, 종횡무진한 상상과 표현으로 우주본체(宇宙本
體)·근원(根源), 물화현상(物化現象)을 설명하였고, 현실세계의 약삭빠른 지자(知者)를 경멸하기도 하
였다. 그의 심현한 철학사상서이자 우수한 문학서인 이 《장자》는 위(魏)·진(晉) 때에 널리 읽히고
육조시대(六朝時代)까지 그 사상이 유행하였다. 양(梁)나라 도홍경(陶弘景)이 그를 진령(眞靈)이라 하
여 제3급에 올렸다.
제물론(齊物論)
《장자(莊子)》의 내편(內篇) 7편 중의 제2편. 세상 모든 종류의 진위시비(眞僞是非)를 가리는 논쟁을
모두 상대적인 것으로 보고, 잡론(雜論)을 한결같이 하나로 귀속시킴을 말하며, 이를 통해 장자 사상의
전모를 엿볼 수 있다. 그에 따르면 현상(現象)은 모두 연관성을 지닌 하나의 전체(全體)이며, 인간의
희로애락(喜怒哀樂)도 진군(眞君:天地의 主宰者)의 작용에 의한 것이라 하였다. 따라서 만물은 일체(一
體)이며, 그 무차별 평등의 상태를 천균(天均)이라 하는데, 이러한 입장에서 보면 생사(生死)도 하나이
며 꿈과 현실의 구별도 없다. 이와 같은 망아(忘我)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야말로 수양의 극치라고 하
였다.
황로학(黃老學)
도교(道敎)를 달리 이르는 말. 노자(老子)를 시조로 하는 학문을 말하며 거기에 전설상의 제왕인 황제
(黃帝)의 이름을 덧붙인 명칭으로 한(漢)나라 초기에 주창되었다. 무위(無爲)로써 다스린다는 정치사상
을 내용으로 하고 있어 한비자(韓非子)의 법치주의(法治主義) 사상과 그 도달점이 비슷하다고 할 수 있
으나 그 방법이 음험(陰險)하지 않은 점이 법치주의와 다르다. 황로라는 말은 《사기(史記)》와 《한서
(漢書)》에서 나온 말이다.
도교(道敎)
중국의 대표적인 민족종교. 황제(黃帝)와 노자(老子)를 교조로 삼은 중국의 토착종교로, 노자와 장자
(莊子)를 중심으로 한 도가(道家)사상 과 구별된다. 도교는 후한(後漢)시대에 패국(沛國)의 풍읍(豊邑)
에서 태어난 장도릉(張道陵)이 세웠다고 전하며, 지금도 타이완[臺灣]·홍콩[香港] 등지에서 중국인 사
회의 신앙이 되어 있다. 장도릉은 초기에 오경(五經)을 공부하다가 만년에 장생도(長生道)를 배우고 금
단법(金丹法)을 터득한 뒤 곡명산(鵠鳴山)에 들어가 도서(道書) 24편을 짓고 신자를 모았다. 이때 그의
문하(門下)에 들어가는 사람들이 모두 5두(斗)의 쌀을 바쳤기 때문에 오두미도(五斗米道) 또는 미적(米
賊)이라고도 불렸다. 장도릉이 죽자 아들 형(衡)과 손자 노(魯)가 그의 도술을 이어 닦았다.
【교리의 체계화】 장도릉 등이 도교를 일으킨 초기에는 그 신도들이 대부분 어리석었던 탓으로 종교라
기보다도 일종의 교비(敎匪)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도교가 일반 민중뿐만 아니라 상류 지식층 사이
에도 널리 전파되자 체계적인 교리와 합리적인 학설·교양의 뒷받침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필
요에 따라 도교가 하나의 종교로서 이론체계를 갖추기 시작한 것은 3∼4세기 무렵 위백양(魏伯陽)과 갈
홍(葛洪)이 학술적인 기초를 제공하면서부터였다. 그리고 구겸지(寇謙之)가 전래 종교인 불교의 자극을
받아 그 의례(儀禮)의 측면을 대폭 채택하고 도교를 천사도(天師道)로 개칭함으로써 종교적인 교리와
조직이 비로소 정비되었다.
【제신과 경전】 도교에서 받드는 신들은 매우 잡다(雜多)할 뿐 아니라 시대에 따라서 그것은 새로이
생기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가장 널리 제사 지내는 신에는 원시천존(元始天
尊) 또는 옥황상제(玉皇上帝)가 있고 이는 다시 무형천존(無形天尊)·무시천존(無始天尊)·범형천존(梵
形天尊)으로 변신하기도 한다. 그리고 교조인 노자, 곧 노군(老君)도 원시천존의 화신(化身)이라고 믿
는다. 그 밖에도 현천상제(玄天上帝:北極星)·문창제군(文昌帝君)·후토(后土)·서낭신[城隍神]·조군
(君:五祠 중의 한 神)·화합신(和合神)·삼관(三官)·재신(財神)·개격신(開格神)·동악대제(東嶽大帝:
泰山神) 등 수많은 신들을 제사지낸다. 한편 도교의 경전을 통틀어서 도장(道藏)이라고 한다. 그 내용
을 분류하면 신부(神符:부적)·옥결(玉訣:秘試)·영도(靈圖:鬼神像)·보록(譜錄:敎法의 연혁)·계율(戒
律:修道의 율법)·위의(威儀:齋戒 등의 의식)·방법(方法:귀신을 쫓는 術策)·중술(衆術·鍊丹類)·기
전(紀傳:老子 등의 전기)·찬송(讚頌:神典의 偈)·표주(表奏:귀신에게 奏上하는 祈願文) 등으로 이루어
졌다.
【도교의 방술】 금주(禁呪)나 부록(符) 등 방술을 행하는 것도 이 종교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즉 특정
한 날과 시간에 목욕재계하면 치아가 튼튼해진다든지, 명경(明鏡)이나 호부(護符)를 차고 다니면 요괴
(妖怪)를 피할 수 있다는 따위가 방술이다. 또한 도교에서는 장생불사(長生不死)를 염원하면서 이를 이
룰 수 있다는 여러 가지 방법을 실천하는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① 태식법(胎息法)으로 충화기(沖和氣)
를 받아들여 장생하는 수련인 내단(內丹), ② 황금·수은과 약물들을 복용하거나 몸에 주입하는 외단
(外丹), ③ 음기(陰氣)를 취해서 양기(養氣)를 충만하게 하는 방중술(房中術) 등이다. 도교에서는 이러
한 수련 결과, 상자(上者)는 허공에 올라가 우주에 소요하는 천선(天仙)이 되고, 중자(中者)는 36동천
(洞天)과 72복지(福地)에서 사는 지선(地仙)이 되며, 하자(下者)는 혼백이 육체로부터 분리되어 시선
(尸仙:人仙)이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전적으로 이와 같은 연단술(鍊丹術)만을 닦는 것이 아니라 적덕
행선(積德行善)하고 계율을 지켜야 진선(眞仙)이 된다고 하여 도덕적 측면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한국의 도교】 도교가 중국에서 한국으로 전래된 것은 삼국시대(624:고구려 영류왕 7년)이다. 신라와
백제에도 비슷한 시기에 전래되었으나 도교신앙은 고구려에서만 성행하였다. 그것은 천제(天祭)·무속
(巫俗)·산악(山岳) 신앙 등 지리적 여건으로 종교적 의식이 강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정책적으로 국
가에서 적극 수용 권장한 데 그 원인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백제와 신라에서는 종교적 신앙보다는 노자
(老子), 장자(莊子)의 서적을 통한 무위자연(無爲自然)사상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자체사상과 융합하
면서 선도(仙道)·선풍(仙風) 의식을 심화시켜 나가는 양상을 보였다. 그러나 신라가 통일한 이후에는
당(唐)나라 유학을 하고 돌아온 사람들 중에 양생(養生) 보진(眞)을 도모하는 사람이 있어 단학(丹學)
의 성격을 가지는 수련(修鍊)도교의 양상을 드러내는 현상도 없지 않았다. 도교가 가장 성행했던 시기
는 고려시대라고 할 수 있다. 중세에 해당하는 고려시대는 신앙의 시대, 종교의 시대라고 할만큼 신
(神) 중심의 나라였다. 불교가 그 중심 종교이기는 했지만 귀신·영성(靈星)·산신(山神), 그리고 무속
(巫俗)과 더불어 도참(圖讖)사상이 병존하여 모든 것이 기복(祈福)종교의 현상을 띄는 것이 이 시대의
특색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도교 역시 여러 민간신앙과 잡유(雜)되면서 불교 도참사상과 함께 하
여 현세이익(現世利益)을 희구하는 양재기복(禳災祈福)의 기축(祈祝)행사가 성해, 그 풍습이 민간생활
에까지 뿌리를 내렸다. 국가적으로는 호국연기(護國延基)를 바라는 재초(齋醮:도교 제사)행사가 크게
행하여졌으며, 특히 예종(睿宗:1105~1130)은 복원궁(福源宮)이라는 도관(道觀:도교 사원)을 건립하는
등 도교를 크게 진작시켜 불교보다 더 중시하기도 하였다. 예종은 복원궁을 건립하기 이전에도 그의 즉
위 2년에 연경궁(延慶宮) 후원에 있는 옥청정(玉淸亭)에 도교의 최고신인 원시천존상(元始天尊像)을 모
시고 달마다 초제(醮祭)를 지냈고 청연각(淸燕閣)에서 노자 도덕경을 강론토록 하였다고도 한다. 이러
한 도교의 성행은 민간에 수경신(守庚申)이라는 도교습속(道敎習俗)까지 낳게 하여 그 풍습이 오늘에
이른다. 조선시대로 넘어 오면서도 재초 중심의 도교는 그대로 이어졌으나 중종(中宗:1506~1544) 때에
이르러서는 조광조(趙光祖:1482~1519) 등의 유학 선비들의 상소로 소격서(昭格署:재초 등 도교행사를
관장하던 관청)가 혁파(革罷)되는 등 점차 위축되어 갔으며, 임진왜란(1592) 이후에 초제를 행하는 의
식도교의 모습은 완전히 없어졌다. 그러나 궁중이나 민간에 뿌리내려진 수경신 등의 도교풍습은 그대로
존속하여 왔고 식자층에서는 노자·장자에 대한 철학적 이해와 더불어 양생 보진의 수련도교에 종사하
는가 하면 참동계(參同契) 용호비결(龍虎秘訣) 등의 도서(道書)를 주해 및 연구 저술하는 사람들이 있
어 도교의 사상적 측면은 계속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의 도교는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이후 크게
의식도교와 수련도교의 두 맥을 이루면서 종교사상은 물론 문학·예술 등 생활 전반에 걸쳐 많은 영향
을 끼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공과격(功過格)
중국에서 민중도덕의 실천을 권장하는 권선징악적인 선서(善書). 금욕주의적인 일상생활로 현상타파를
하려 한 것인데, 이러한 생각이 명나라 말기 이후 격변기의 사회상을 반영하여 보급되었다. 일상적인
행위를 선악(善惡), 즉 공과(功過)로 나누고, 그 정도의 차이를 수량화하여 구체적으로 산정(算定)·분
류한 책이다. 월일(月日)을 단위로 나날의 행위 결과를 집계하여 자기비판의 자료로 삼는 것이었다. 그
기원은 한(漢)나라에까지 소급되지만, 명나라 이후에는 공과를 상쇄하여 산정하는 것, 내용이 대폭적으
로 민중화한 것, 어느 특정한 종교에 치우치지 않게 한 것이 특색이었다. 공과격대로의 전형적인 생활
을 한 예로는 원황(袁黃)을 들 수 있는데, 그의 공과격은 그 이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청담(淸談)
중국의 위(魏)·진(晉)·육조(六朝) 시대에 유행한 철학적 담론(談論). 후한(後漢) 때 당고(黨錮)의 화
(禍)로 많은 고절(高節)의 선비가 횡사한 이래 귀족적 지식인들은 난세에 생명을 부지하고자 세속(世
俗)에서 도피, 예절의 속박을 버리고 정치적 비판, 인물 평론을 중심으로 한 청의(淸議)를 일삼았다.
위(魏)나라에 들어와 정치적 언론탄압(言論彈壓)과 유학(儒學)의 쇠퇴를 계기로 노장(老莊)의 공리(空
理)에 바탕한 철학적 담의(談議)로 발전, 청언(淸言)이라고도 하였다. 죽림7현(竹林七賢)을 대표로 하
는 탈속적 지식인들의 사교계의 산물에 지나지 않으나 당시의 청담가로서는 위나라의 하안(何晏)과 왕
필(王弼), 서진(西晉)의 왕연(王衍)·악광(樂廣) 등이 유명하다. 동진(東晉)시대에는 이 때 퍼지기 시
작한 불교의 교리까지도 청담의 대상으로 하여, 한때는 세속적인 정신에 저항, 참되고 영원한 것을 구
하려는 면도 보였으나, 이것이 귀족의 사교장에서 발생된 것이었기 때문에 역시 전체적으로는 오락적
분위기를 벗어날 수 없었다. 남북조시대에 와서는 청담의 형식도 바뀌어 오히려 공개토론회 같은 성격
을 띠게 되었으나 귀족적 오락이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었다. 이러한 풍조는 불교의 성행으로 결국 쇠퇴
하고 말았으며, 이 시대의 청담을 모은 책으로는 남송(南宋)의 유의경(劉義慶)이 저술한 《세설신어(世
說新語)》가 있다.
죽림칠현(竹林七賢)
중국 위(魏)·진(晉)의 정권교체기에 정치권력에는 등을 돌리고 죽림에 모여 거문고와 술을 즐기며 청
담(淸談)으로 세월을 보낸 일곱 명의 선비. 완적(阮籍)·혜강(康)·산도(山濤)·향수(向秀)·유영(劉
伶)·완함(阮咸)·왕융(王戎) 등으로서 그들은 개인주의적·무정부주의적인 노장사상(老莊思想)을 신봉
하여 지배권력이 강요하는 유가적 질서나 형식적 예교(禮敎)를 조소하고 그 위선을 폭로하기 위하여 상
식에 벗어난 언동을 감행하였다. 루쉰[魯迅]은 그들의 도피적 처세술이나 기교(奇矯)한 행동이 정치적
압력에 대한 소극적 저항을 표시하는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들이 그룹을 형성한 것은 일시적인 것
이고 결국 집권자에게 죽음을 당하거나, 타협하여 관계로 돌아가거나 하여 모두 흩어졌지만, 그 풍부한
일화는 그 후 《신설신어(新說新語)》 등 인물평론이나 회화의 좋은 제재가 되었다.
3. 불교
인도철학<印度哲學(Indian philosophy)>
인도에서 성립·발전한 철학·종교·사상의 총칭 및 그것을 연구대상으로 하는 학문. 여기서 말하는 철
학은 다르샤나(darsana:知見)로서, 세계와 인생에 관한 사변(思辨)의 체계를 가리킨다. 인도에서는 고
대로부터 철학이 줄곧 종교와 친연관계(親緣關係)에 있어서 그 지적(知的) 탐구도 미망(迷妄)으로부터
해탈(解脫)을 목적으로 하며, 인도철학은 이와 같은 탐구의 역사적 전개를 내용으로 하기 때문에 정확
하게는 인도철학사(哲學史)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러나 서(西)유럽의 철학사와는 달리, 여러 체계들
은 서로 교섭하고 병행하면서 발전하는 경우가 많다. 다만 연대는 추정의 범위를 벗어날 수 없으나 사
상 전개의 경향성(傾向性)으로 보아 다음과 같이 ① 고대(서력기원 초까지), ② 고전시대(7세기경까지
로 불교를 비롯한 모든 철학사상이 상당히 체계화되었다), ③ 중세(8세기 이후, 베단타학파가 주류를
차지한 후부터 15세기경까지), ④ 근대(15세기 이후 약간의 과도기를 거쳐 18세기 이후까지)로 구분할
수 있다. 고대의 사유(思惟)는 신화적 요소를 많이 포함하고 그 연원(淵源)도 BC 13세기까지 거슬러올
라갈 수 있으나, 주된 것으로는 베다의 종교, 브라마나의 세계관 및 고(古)우파니샤드의 철학이 있다.
베다의 종교는 다신교(多神敎)로, 신들의 대부분은 자연신(自然神)이었으나 점차 인격화되어 갔다. 4종
류의 베다 본집(本集) 중에서는 《리그베다》가 가장 오래되었고, 그 철학적 찬가 속에는 우주창조의
최고신(最高神)과 궁극원리로서의 유일자(唯一者) 등이 탐구되었다. 브라마나는 베다이래의 제식(祭式)
에 관한 규정이나 해석을 집성한 문헌이다. 여기서는 제식의 연구나 실행이 인간생활을 포함한 우주의
모든 현상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생각되고, 제사를 직접 주관하는 바라문족(族)은 우주를 지배
하는 힘, 즉 브라만[梵]을 가졌다 하여 점차 상류계급을 형성하였다. 또한 최고신을 프라자파티라고 하
고 세계의 창조자·지배자라고 생각하였다. 우파니샤드란 가까이 앉는다란 뜻에서 전화(轉化)되어 사제
간(師弟間)에 구전(口傳)되는 비의(秘義) 및 그 문헌의 총칭이며, 각각 독립된 철인(哲人)이 대화형식
으로 철학적 사색을 전개하는 점에 그 특색이 있다. 샨딜리아(BC 7세기∼BC 6세기)는 우주의 통일 원리
를 브라만이라 부르고 이것을 본래의 자기인 아트만[我]과 동일시하였다. 이것을 범아일여(梵我一如)라
고 하다. 우달라카 아루니(BC 7세기∼BC 6세기)는 만물의 근원을 유(有)라 부르고 이에 입각하여 현상
의 개전(開展)을 유물론적으로 설명하였다. 이에 비하여 인식주체(認識主體)로서의 아트만은 부정적으
로 밖에 표현할 수 없다. 즉 네티 네티(neti neti:…이 아니고, …이 아니다)로서, 여기에 바탕을 두고
전존재(全存在)를 관념론적으로 통일하려던 사람이 야지냐발키아(BC 8세기경)였다. 또한 후세에 와서
각종 우파니샤드가 만들어졌으나, 고(古) 우파니샤드에는 이미 독특한 업(業)과 윤회(輪廻)의 사상이
담겨 있다. 고대의 종교단체로는 불교와 자이나교가 유력하다. BC 5세기경 도시가 발달하여 왕족과 상
공업자의 실권이 강화되면서 바라문족의 권위가 약화되고 많은 자유사상가가 나타났다. 이들을 불교측
에서는 육사외도(六師外道)라 부르는데, 석가(BC 563?∼BC 483?)는 여기서 혁신적 종교운동을 일으켜
불교를 창시하였다. 그는 극단적인 쾌락주의와 고행주의(苦行主義)를 버리고 중도(中道:八正道)를 택하
여 어디까지나 인생의 진실을 구하였다. 또한 형이상학적 문제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키고, 무아설(無我
說)에 입각하여 인간적 현실을 직시하며 진실의 지혜에 눈뜰 필요가 있다고 역설하였다. 특히 인간의
평등과 자비의 정신을 강조하는데 교설(敎說)의 주요 내용은 오온(五蘊)·사제(四諦)·십이인연(十二因
緣) 등에 나타나 있다. 불교는 그 후 대승(大乘)과 소승(小乘)으로 나뉘고, 대승과 소승에서는 다시 여
러 분파가 생긴다. 소승에서는 다원론적(多元論的)·실재론적(實在論的)인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와
현상론적(現象論的)인 경량부(經量部)가 주류를 차지하였다. 대승에서는 중관(中觀)과 유가유식(瑜伽唯
識) 양파가 2대 사조(二大思潮)를 이루는데, 전자인 나가르주나(Nagarjuna 龍樹:150?∼234)는 공관(空
觀)에 의해 대승불교 사상의 기초를 다지고, 후자의 아상가(Asanga 無著:310?∼390?)와 그의 동생인 바
수반두(Vasubandhu 世親:320?∼400?)가 보살의 실천을 매개로 한 현실세계의 구조를 관념적으로 체계
화하였다. 자이나교는 마하비라(Mahavira 大雄:BC 448∼BC 376?)가 시작한 것으로 불교와 마찬가지로
비(非) 바라문적인 사문(沙門)의 흐름에 그 연원을 두고 해탈(解脫)을 목표로 한다. 그 극단적인 고행
주의(苦行主義)와 상대적인 관찰법은 별도로 치고, 세계관·유정관(有情觀) 실천규정 등에서는 불교와
유사한 것을 찾아볼 수 있다. 기원 후 얼마되지 않아 성립된 집권적(集權的) 국가를 배경으로 모든 철
학사상이 정비되었으며, 정통(正統) 바라문교에서는 6개의 학파가 각각 수트라(古典)를 정비하여 차례
로 주석서(註釋書)를 만듦으로써 학설을 발전시켰다. 이것을 육파철학(六派哲學)이라고 한다. 카필라
(Kapila:BC 350?∼BC 250?)를 개조(開祖)로 하는 상키아학파는 우다라카의 유론(有論)의 비평적 개혁을
통해 성립되어, 푸르샤(순수정신)와 프라크리티(根本原質)의 두 원리에 의해 우주의 창조와 개전(開展)
을 설명하고, 또한 요가의 실천을 통해 고뇌의 종식을 지향한다. 요가학파는 기초이론을 상키아학파로
부터 이어받으면서 신비적이며 금욕적인 실천을 체계화하였으나 그 태도에서는 주지적(主知的)이었다.
아크사파다(50?∼150?)를 개조로 하는 니아야학파는 고대로부터 내려온 논증방법(論證方法)을 정리하면
서 논리학과 지식론(知識論)에 전념하여 혁신적인 불교논리학을 성립케 하였다. 일반적으로 인도의 논
리학은 복잡다양하여 서유럽의 논리학과 비교 연구하는 데 좋은 소재를 제공하였다. 니아야학파와 자매
관계에 있는 바이세시카학파의 개조는 카나다(Kanada:BC 150?∼BC 50?)인데 실체·성질·운동·보편·
특수·내속(內屬)의 6가지 원리를 설정하고 실재론적인 자연철학을 전개하였다. 그 범주론(範疇論)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그것과 대비한다는 것만으로도 특수한 의의가 있다. 미망사학파는 자이미니
(Jaimini:BC 2세기경)에 의해 확립되었으며, 베다 성전(聖典)에 규정된 제사의례의 연구와 실천을 인간
생활의 의무라 생각하고, 베단타학파와 더불어 정통 바라문 철학의 중핵(中核)을 이루었다. 그들의 언
어철학은 특히 뛰어났다. 8세기 이후 불교가 밀교화(密敎化)하고 이슬람교의 침투로 점차 세력을 잃어
갔으나 바다라야나(BC 100?∼1?)를 개조로 하는 베단타학파는 특히 상카라(700?∼750?) 이후, 다른 학
파나 불교의 사상을 섭취하여 인도 철학계의 패권을 장악하였다. 이 학파는 베다 성전의 근본사상인 우
파니샤드의 철학을 철저히 연구하여 브라만으로 귀일(歸一)하는 한편, 내부의 논쟁을 통하여 불이일원
론(不二一元論)·제한불이론(制限不二論)·다원론적 실재론(多元論的實在論)·불일불이설(不一不異說)
등 다채로운 사상을 발전시켰다. 뿐만 아니라 14세기경부터 인도의 민간신앙을 받아들여 광범한 사상적
생명력을 유지시키는 단서를 마련하여 힌두교의 이론적 지주(支柱)로 삼았다. 힌두교는 바라문교에서
전화(轉化)된 새로운 형태이며, 주요한 것으로는 비슈누파와 시바파가 있다. 각각 독자적인 교의(敎義)
를 가지며, 많은 종파(宗派)로 갈리어 있으나, 기본적으로는 업(業)과 윤회에서 해탈할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러나 15세기 이후 이슬람교와의 접촉이 빈번해지면서 인도의 모든 철학 학파는 이슬람교와 융
합하는 양상을 나타냈고 독창적인 사상이 무시되었다. 오히려 라마난다(1400?∼1470?), 카비르(1440∼
1518), 나나크(1469∼1538) 등에 의한 전통사상의 개혁이 점차 표면화되었다. 그래서 이 시기를 중세에
서 근대로 넘어가는 과도기라고 한다. 18세기 이후부터는 서유럽 사상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종래의
인도철학이라고 하기에는 이미 부적합하게 되었다. 그러나 라마크리슈나(1834∼86), 비베카난다(1862∼
1902) 등에 의한 전통사상의 재생운동이 인도 독립운동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는 것을 빠뜨릴 수 없
다. 간디의 진리 파악, 타고르의 생명관도 그 근본에서는 인도의 전통적 철학과 종교에 뿌리를 두고 있
다. 현대의 인도철학은 라다크리슈난을 비롯한 여러 학자들이 비교철학에 역점을 두고 있다.
브라만교(婆羅門敎, Brahmanism)
고대 인도에서 불교보다 먼저 브라만 계급을 위주로 《베다》를 근거로 하여 생성된 종교. 특정 교조
(敎祖)를 갖지 않는다. 바라문[婆羅門]교라고 한자로 음사(音寫)한다. 《리그베다》 《사마베다》 《야
주르베다》 《아타르바베다》의 4베다와, 베다의 주석 및 제사에 관한 규칙을 기록한 《브라마나[梵
書]》 《아란야카[森林書]》, 그리고 철학서 《우파니샤드[奧義書]》 등을 계시성전(啓示聖典:Sruti)이
라고 한다. 그 외에 6종의 보조학(Vedanga:音聲·祭式·文法·語源·韻律·天文), 《마하바라타:
Mahabharata》와 《라마야나:Ramayan》의 2대 서사시, 그리고 《마누법전(法典)》 등의 성전문학(聖傳
文學)이 전해지고 있다. 브라만교는 인도 아리아인(人)이 BC 1500년경에 인도에 침입한 이후 신봉하였
던 민속종교로, 넓게는 힌두교(인도교)에 속한다. 최고의 베다 시대에는 자연현상의 배후에 어떤 지배
력이 있는 것으로 상정(想定)하고 그것을 인격적 주체로 구체화하여 천신(天神)·태양신·새벽의 신·
뇌신(雷神), 폭풍의 신 등의 신격뿐만 아니라, 추상적 관념을 신격화한 무한신(無限神)·공간의 신 등,
그리고 제사의 구성 부분을 신격화한 화신(火神)·주신(酒神)·언어신(言語神) 등 많은 신격들이 상정
되고 이들을 숭배의 대상으로 하였다. 이 시대의 신관(神觀)은 맥스 뮐러가 지적한 바와 같이 다신교
(多神敎)에서 교체신교(交替神敎)를 거쳐 단일신교로 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으며, 후기에는 인도
철학의 근본사상이라 할 일원론(一元論)에 대한 탐구가 시작되고 있다. 후대에 첨가된 것으로 보이는
《리그베다》 제10장에는 기도주(祈禱主:기도의 힘을 신격화한 것으로 冶工과 같은 역할)·황금태(黃金
胎:부모의 생산능력에 비유)·조일체자(造一切者:木工의 건조에 비유)·원인(原人:그 신체의 각 부분으
로부터 세계가 유래) 등의 유일신적 창조신이 나타나는데, 특히 ‘비유비무가(非有非無歌)’에서는 창
조가 최고신의 2분(二分)에 의한 자기생식(自己生殖)으로 기술되고 있다. 이것은 창조자와 피조물(被造
物) 간의 동질성(同質性)을 말하는 것으로 일원론적 사유의 원형이다. 브라마나 시대(BC 1000∼BC 800)
에 이르러 브라마나[婆羅門:司祭族]·크샤트리야[刹帝利:王·武士族]·바이샤[毘舍:농공상의 평민족]·
수드라[首陀羅:노예족]의 바르나, 즉 4성제도(四姓制度:Caste)가 확립됨에 따라 브라만족에 의한 제
사·학문 등의 문화가 크게 발달하였다. 브라만족은 다른 계급에 대한 자기들의 우월성을 강조하였고,
그것은 베다 천계주의(天啓主義), 브라만 지상주의(至上主義), 제식만능주의(祭式萬能主義)로 나아가는
역작용을 낳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형식적이고 획일적인 브라만 계급의 횡포에 반감을 품고 자각 반성
한 브라만 또는 크샤트리야들이 나타나 모은 사물의 근원적 힘으로서 브라만[梵]을 상정하였는데, 그것
은 또한 인간에게 내재하는 불가설(不可說)·불가촉(不可觸)의 형이상학적 실체인 아트만[我]과 하나인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것이 우파니샤드 철학에 일관하는 ‘범아일여(梵我一如)사상’이다. 브라만교에
는 민중적인 기도·제사의 면과 고도의 철학적 면이 있다. 제사와 사회제도 등의 실천적인 면은, 후에
《가정경(家庭經)》 《대계경(大啓經)》 《법경(法經)》 등의 경서를 낳았고, 철학적 면은 이른바 6파
철학(六派哲學)으로 발전하였다. 이들은 모두 베다의 권위를 인정하는 정통파로서, 이것을 부정하는 불
교와 자이나교 등과는 대립관계에 있다. 브라만교에서는 바르나 아슈라마라는 특이한 제도가 있는데,
바르나 구성원이 한평생에 반드시 거치는 단계(생활기:asrama)가 설정되어 있다. 즉 학생기·가장기(家
長期)·임서기(林捿期)·유행기(遊行期)의 4단계로 되어 있다. 브라만교는 후에 민간신앙을 받아들여
인도 국민 일반에 널리 교세를 떨치려 하였는데, 이것을 힌두교라고 한다.
베다(Veda)
인도에서 가장 오래 된 신화적 제식문학(祭式文學)의 일대 집대성. 베다란 ‘지식’ 또는 ‘종교적 지
식’을 의미하는데, 현재 남아 있는 베다 문헌은 《리그 베다:Rgveda》 《사마 베다:Samaveda》 《야
주르 베다:Yajurveda》 《아타르바 베다:Atharvaveda》의 4종류가 있다. 이 4종류의 구별은 고대 인
도의 침입민족인 아리아인(人)이 제식(祭式)을 지낼 때 제관(祭官)의 역할에 따라 구분한 데 유래한다.
《리그 베다》는 제신(諸神)을 제장(祭場)으로 불러들이는 권청(勸請), 《사마 베다》는 제장에서의 가
창(歌唱), 《야주르 베다》는 제사의 진행과 관계가 있고, 《아타르바 베다》는 재앙 제거, 조복(調伏)
등의 주술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BC 1500∼BC 1000년경에 이루어졌다. 출생·결혼·장례 등 인생에 있
어서의 통과의례(通過儀禮), 조상 공양이나 신월제(新月祭)·만월제(滿月祭)·계절제(季節祭)·공수제
(供獸祭), 또는 신주(神酒)를 신에게 바치는 소마제(祭) 등, 인사백반(人事百般)에 걸친 제식에 관한
복잡한 규정과 그에 관한 신화적 의의가 부여되어 있다.
우파니샤드(Upanisad)
고대 인도의 철학서. 바라문교(波羅門敎:Brahmanism)의 성전 베다에 소속하며, 시기 및 철학적으로 그
마지막 부분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베단타(Vedanta:베다의 말미·극치)라고도 한다. 현재 200여 종이
전해지는데, 그 중 중요한 것 10여 종은 고(古)우파니샤드로 불리며, BC 600∼AD 300년경, 늦어도 기원
전후에 성립된 것이다. 그후 10수세기에 이르기까지 만들어진 것을 신우파니샤드라고 하며, 모두 산스
크리트로 씌었다. 우파니샤드의 원뜻은 사제간에 ‘가까이 앉음’이라는 의미에서, 그 사이에 전수되는
‘신비한 가르침’도 의미하게 되었으며, 옛날부터 천계문학(天啓文學:sruti)으로서 신성시되었다. 인
도의 정통 바라문철학의 연원으로서, 그 후 철학·종교 사상의 근간·전거(典據)가 되었다. 개개의 우
파니샤드는 통일된 사상을 한 사람의 작자가 일정한 형식으로 서술한 것이 아니라, 긴 세월에 걸쳐 편
집·정비하였다고 생각되며, 베다 및 브라마나의 제식만능주의에 대한 반발을 담은 것으로 해석되기 때
문에 불교흥기를 촉진한 사상적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그 중에는 신·구의 잡다한 사상이
섞여 있으며 전체로서의 통일이 결여되었지만 그 근본 사상은 만유의 근본원리를 탐구하여 대우주의 본
체인 브라만(Brahman:梵)과 개인의 본질인 아트만(Atman:我)이 일체라고 하는 범아일여(梵我一如)의 사
상으로 관념론적 일원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상의 형성 배경에는 창조관과 동치(同
置:upasana)의 논리를 들 수 있다. 창조의 의미로 사용되는 스리스티(srsti)는 최고신의 2분에 의하여
자신의 일부를 방출(esrj )함으로써 창조자와 피조물이 동질적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우주적 실재
와 개인의 구성요소를 대응시켜 불사(不死:amrta)를 탐구하였던 동치의 논리는 범아일여사상의 원형적
인 사고를 보여 주는 것이다. 인간은 업(業)에 의해 윤회를 반복하지만 선정(禪定:dhyana)·고행(苦
行:tapas)을 투철히 하여 진리의 인식(brahma-vidya)에 도달함으로써, 윤회에서 해탈하여 상주·불멸의
범계(梵界:brahma-loka)에 이르는 것을 이상으로 한다. 우파니샤드의 대표적인 사상가로서는 아트만을
만물에 편재하는 내재성으로서의 유(有:sat)로 주장하는 우달라카 아루니(Uddalaka Aruni)와 아트만을
인식주관으로서 불가설·불가괴(不可壞)한 것으로 주장한 야지나발키아(Yaj뻕valkya) 등이 있으며, 전
자의 ‘네가 그것(아트만)이다(tat tvam asi)’, 후자의 아트만은 부정적으로밖에 표현되지 않는다는
뜻의 ‘그렇지 않다. 그렇지 않다(neti, neti)’ 등의 말은 유명하다.
힌두교(Hinduism)
인도에서 고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브라만교가 복잡한 민간신앙을 섭취하여 발전한 종교. 인도교(印度
敎)라고도 한다. 힌두교를 범인도교라 함은 힌두(Hindu)는 인더스강의 산스크리트 명칭 ‘신두(Sindhu:
大河)’에서 유래한 것으로, 인도와 동일한 어원을 갖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BC 2500년경의
인더스 문명에까지 소급될 수 있으며, 아리안족의 침입(BC 2000∼BC 1500?) 이후 형성된 바라문교를 포
함한다. 그러나 좁은 의미로는 아리안 계통의 바라문교가 인도 토착의 민간신앙과 융합하고, 불교 등의
영향을 받으면서 300년경부터 종파의 형태를 정비하여 현대 인도인의 신앙 형태를 이루고 있다. 이같이
오랜 세월에 걸쳐 형성되었기 때문에 특정한 교조와 체계를 갖고 있지 않으며, 다양한 신화·성전(聖
典)전설·의례·제도·관습을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다양성을 통일하여 하나의 종교로서의 구체적인
기능을 가능케 하는 것은 카스트 제도이다. 이의 기원은 바라문에 규정된 사성(四姓:브라만·크샤트리
아·바이샤·수드라) 제도이지만, 역사적으로 다양하게 변천하여 현대의 카스트 제도에는 종족·직업·
종교적인 제조건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따라서 인도인의 종교생활과 사회생활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인도인은 힌두교로 태어난다고 하며 카스트 제도에는 엄격하지만 신앙에는 상당히 관용
적이다. 고대 바라문교와의 차이점으로는, 바라문교가 베다에 근거하여 희생제를 중심으로 하며 신전이
나 신상(神像)이 없이 자연신을 숭배하는 데 비하여, 힌두교에서는 신전·신상이 예배의 대상이 되고
인격신이 신앙된다는 점이다. 또한 공희(供犧)를 반대하여 육식이 금지되고 있다. 힌두교의 근본 경전
은 베다·《우파니샤드》이며 그 외에도 《브라마나》 《수트라》 등의 문헌이 있는데, 이 모든 것들은
인도의 종교적·사회적 이념의 원천이 되고 있다. 또한 경전에 준하는 것으로 《마하바라타》 《라마야
나》(라마의 기행)의 2대 서사시가 유명한데, 특히 전자의 일부인 《바가바드 기타》는 널리 애창되고
있다. 이 외에 《푸라나》 《탄트라》 《아가마》 《상히타》 등이 힌두교 각 파에서 존중되고 있다.
힌두교는 바라문교에서 많은 신관(神觀)·신화를 계승하고 있기 때문에 다신교 같아 보이지만, 신들의
배후에 유일한 최고자를 설정하고 그 신들을 최고신의 현현(顯現:權化)이라고 하여 교묘히 통일시키고
있는 점에서 일신교적 형태를 취하고 있다. 《푸라나》 문헌 등에 나타나는 트리무르티(三神一體)가 그
좋은 예이다. 이는 별도의 기원에 속하는 우주창조신 브라마, 유지신(維持神) 비슈누, 파괴신 시바의
세 신을 일체로 하여 최고의 실재원리로 삼는 것이다. 그 중 비슈누와 시바를 숭배하는 사람들이 힌두
교의 대종파를 형성하였다. 비슈누파는 학문적 성격이 강하며, 비교적 사회의 상층부에 속한다. 비슈누
는 인간과 동물의 모습으로 지상에 출현하는 것으로 신앙되고, 비슈누의 10권화(權化) 중의 라마와 크
리슈나는 2대 서사시의 영웅이며, 이에 따라 비슈누파는 라마파와 크리슈나파로 나뉘었다. 비슈누파에
비하여 시바파는 사회 하층부에 세력이 있으며, 수행자의 고행·주술, 열광적인 제의(祭儀)가 특색이
다. 또한 인도에서는 예부터 신비(神妃) 숭배가 성하여 브라마에게는 시라스바티(辯才天), 비슈누에게
는 라크슈미(吉祥天)가 배우 여신으로 간주되며, 시바신의 배우 여신으로는 두르가·파르바티·우마·
칼리 등 많은 이명이 있다. 이들 여신을 샤크티(여성적 창조력)라고 하며, 이들을 숭배하는 샤크티파도
있다. 힌두교의 특징적인 사상은 윤회(輪廻)와 업(業), 해탈(解脫)의 길, 도덕적 행위의 중시, 경건한
신앙으로 요약할 수 있다. 윤회와 업 사상은 민간신앙을 채용한 것으로 이미 고(古)우파니샤드에 보이
며, 《마하바라타》에 이르러 특별히 강조되고 있다. 이러한 사상은 인도인의 도덕관념을 키웠지만, 한
편으로는 숙명론을 심어줌으로써 사회발전을 저해하는 한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또한 인간의 사후 운
명에 대해서도 깊은 성찰이 있었다. 신들도 업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은 곤란한 일이었다. 그러한 속
박에서 해탈하는 방법으로서, 출가 유행(遊行)의 생활과 고행 또는 요가가 교설되었다. 고행은 주로 육
체의 수련이며, 요가는 정신의 통일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었다. 힌두교 사회에 있어 도덕관념의 기초는
바라문교의 법전에 규정되어 있는 달마(법·의무)이다. 4성(계급)제도와 4생활기(學生·家住·林住·遊
行期)가 중심으로서, 자기가 소속하는 카스트에 따를 의무의 수행이 강조되었다. 최고신에 대한 바크티
(信愛)와 그 은총은 능력·성별·직업·계급 여하에 관계없이 일반 민중의 구제를 위하여 가르쳐진 것
이다. 또한 힌두교는 이슬람교 및 그리스도교와 접촉하여 여러 가지 영향을 받아, 근세에는 브라마 사
마즈(1828년 창립), 아리아 사마즈(1875년 창립) 등의 종교개혁운동이 일어났다. 특히 비베카난다(186
3∼1902)에 의한 라마크리슈나 교단(1897년 창립)은 모든 종교가 하나로 귀일(歸一)한다고 하여 보편주
의적 종교관을 보여주고 있으며, 세계적으로 많은 신자를 가지고 있다.
자이나교(Jainism)
인도에 현존하는 유서깊은 종교. 자나교라고도 한다. 불교와 마찬가지로 비정통(非正統) 브라만교에서
발생한 출가주의(出家主義) 종교이다. 불전(佛典)에서 니간타(Nigantha:尼乾陀)라고 전하는 종교를, 석
가와 같은 시대의 마하비라(Mahavira)가 재정비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최고의 완성자를 지나(Jina:勝
者)라 부르고, 그 가르침이라 하여 지나교 또는 자이나교라는 호칭이 생겼다. 불타에서 연유하여 ‘불
교’라는 호칭이 생긴 것과 같은 이치이다. 교조(敎祖)의 출신과 인간형성, 지리적·문화사적 배경, 교
단 성립의 경위도 불교와 유사한 점이 많다. 인도에서 하나의 종교로 성립된 이후 불교·힌두교와 더불
어 커다란 영향을 미쳐왔으므로, 인도의 전통적 문화와 그 유형 무형의 유산에 관해서 자이나교를 무시
하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불교와 교단간의 밀접한 교섭은 양종교의 원시 경전에서도 여실히 엿볼 수
있다. 전승(傳承)에 의하면, 1세기 말경 공의파(空衣派)와 백의파(白衣派)로 분열되고, 다시 여러 지파
(支派)가 생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 원시 경전에서는 비교적 상세한 교의(敎義)가 정립되어 있으나, 그
이후로는 불교만큼 다채로운 발전을 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후세에 와서 인식론이나 논리학은 불교
의 영향이 현저한데, 오랫동안 산일(散佚)되어 있던 불교의 작품들이 최근 자이나교의 승원에서 많이
발견되고 있다. 현재 교도 수는 인도 전역에 걸쳐 180만 정도밖에 되지 않으나 상호부조적(相互扶助的)
인 성격이 강하고 상인이나 금융업자가 태반을 차지하고 있어 경제적 영향력 또한 막강하다. 그 실천생
활상의 특색으로서 승려를 통하여 불살생(不殺生:ahinsa)이 엄격하게 지켜지고 있다. 교의로는 정신과
물질의 이원론(二元論)을 주창한다. 즉 생명(jiva)과 비생명(ajiva)으로 이루어져 있고, 비생명은 다시
공(空:운동의 원리)·비공(非空:정지의 원리)·물질재료·허공·시간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본다. 이 형
이상학적 원리에 입각하여 다음 7종 또는 9종(선·악을 포함하여)의 실천론적 계열이 모든 가능태(可能
態)로 제시된다. 즉 생명·비생명·선·악·누(漏)·박(縛)·차(遮)·멸(滅)·해탈(解脫)이 바로 그것
이다. 생명이 외적 대상의 영향을 받아, 물질재료가 생명 속에 누입(漏入)하고[漏], 그것이 물질적 업
(業)을 형성하여 생명을 속박한다[縛]. 그리고 외적·내적인 수단을 사용하여 업물질(業物質)의 누입을
정지시키고[遮], 또한 이 업물질을 멸(滅)한다. 이 멸한 상태가 해탈이다. 해탈에 이르게 하는 덕목(德
目)으로는 정견(正見)·정지(正知)·정행(正行)으로 요약되거니와, 구체적으로는 불교의 오계(五戒)에
해당하는 오금서(五禁書:브라다), 신(身)·구(口)·의(意)의 삼업(三業)에 해당하는 삼기율(三紀律:구
프티), 오용심(五用心:사미티)이 특히 요구되고 있다.
육사외도<六師外道(Sad-darsama)>
석가 당시 인도 지방에서 가장 세력이 컸던 6인의 철학자·종교가의 유파. 6파철학이라고도 한다. 인도
브라만교에서 정통으로 인정하는 철학의 대(大)유파 6종이다. 《베다》 문명에 기인(起因)하는 인도 사
상계는 《우파니샤드》 철학을 탄생시켜 인도종교의 기조를 형성하였다. 거기에서 인생관·세계관·우
주관 등 여러 사상·학설이 태동하여 이른바 6대철학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이 학설들은 브라만의 근본
경전인 《베다》 《우파니샤드》 등과 서로 용납될 수 없는 점이 있으므로 외도(外道)라는 말이 붙여졌
다. 더군다나 이 외도란 불교측에서 붙인 호칭이다. ① 푸라나카사파[富蘭那迦葉]:선악의 행위와 그 보
응을 부정하는 외도, ② 마칼리고살라[末伽梨拘梨子]:운명론. 불교에서 말하는 사명외도(邪命外道), ③
산자야벨라지푸타[刪耶毘羅子]:궤변론·회의설, ④ 아시타케사캄발라[阿耆多翅舍欽婆羅]:유물론·쾌락
설, ⑤ 필구타카자야나[迦羅鳩馱迦延]:유물론적인 주장, ⑥ 니간타나타푸타[尼咤若提子]:기나교(耆那
敎) 등이다. 이들 육사(六師)는 한결같이 《베다》의 권위를 부인하고 브라만교에 반항하였다. 그들은
신흥도시의 왕후·귀족·부호들의 정치적·경제적 원조 밑에 활약하였다. 이들 각 유파의 형성은 그 기
원·성립연대가 다른데, BC 5세기~BC 3세기 사이로 추정되고 있다.
불교<佛敎(Buddhism)>
석가모니(釋迦牟尼)를 교조로 삼고 그가 설(說)한 교법(敎法)을 종지(宗旨)로 하는 종교. 불교라는 말
은 부처(석가모니)가 설한 교법이라는 뜻과(이런 의미에서 釋敎라고도 한다) 부처가 되기 위한 교법이
라는 뜻이 포함된다. 불(佛:불타)이란 각성(覺性)한 사람, 즉 각자(覺者)라는 산스크리트·팔리어(語)
의 보통명사로, 고대 인도에서 널리 쓰이던 말인데 뒤에는 특히 석가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불교는
석가 생전에 이미 교단(敎團)이 조직되어 포교가 시작되었으나 이것이 발전하게 된 것은 그가 죽은 후
이며, 기원 전후에 인도·스리랑카 등지로 전파되었고, 다시 동남아시아로, 서역(西域)을 거쳐 중국으
로, 중국에서 한국으로 들어왔고, 한국에서 일본으로 교권(敎圈)이 확대되어 세계적 종교로서 자리를
굳혔다. 그러나 14세기 이후로는 이슬람교에 밀려 점차 교권을 잠식당하고 오늘날에는 발상지인 인도에
서는 세력이 약화되었으나, 아직 스리랑카·미얀마·타이·캄보디아, 티베트에서 몽골에 걸친 지역, 한
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지역에 많은 신자가 있으며, 그리스도교·이슬람교와 함께 세계 3대 종교의
하나이다. 다른 여러 종교와 비교하여 불교가 지니는 중요한 특징은 다음과 같다. ① 신(神)을 내세우
지 않는다. 불타가 후에 이상화(理想化)되고 확대되어 절대(絶對)·무한(無限) 및 그 밖의 성격이 부여
되고, 각성과 구제의 근거가 되고 있으나 창조자·정복자와 같은 자세는 취하지 않는다. ② ‘지혜(智
慧)’와 ‘자비(慈悲)’로 대표된다. ③ 자비는 무한이며 무상(無償)의 애정이라 할 수 있어, 증오(憎
惡)나 원한을 전혀 가지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일반적으로 광신(狂信)을 배척하고 관용(寬容)인 동시
에 일체의 평등을 관철하고자 한다. ④ 지혜의 내용은 여러 가지로 발전하는데, 일체를 종(縱)으로 절
단하는 시간적 원리인 ‘무상(無常)’과, 일체를 횡(橫)으로 연결하는 공간적 원리인 ‘연기(緣起)’가
중심에 있어, 이것은 후에 ‘공(空)’으로 표현된다. ⑤ 현실을 직시(直視)하는 경향이 강하다. ⑥ 모
든 일에 집착과 구애를 갖지 않는 실천만이 강조되고 있다. ⑦ 조용하고 편안하며 흔들리지 않는 각성
(覺性:解脫)을 이상의 경지(境地)로 삼아 이를 ‘열반(涅槃)’이라 한다. 그 교의(敎義)는 석가의 정각
(正覺)에 기초를 둔다. 그러나 8만 4000의 법문(法門)이라 일컫듯이 오랜 역사 동안에 교의의 내용은
여러 형태로 갈라져 매우 복잡한 다양성을 띠게 되었다. 불(佛)도 본래는 석가 자체를 가리켰으나 그의
입적(入寂) 후 불신(佛身)에 대한 논의가 일어나 2신(身)·3신 등의 논, 또는 과거불·미래불, 또는 타
방세계(他方世界)의 불, 보살(菩薩) 등의 설이 나와 다신교적(多神敎的)으로 되었다.
【인도불교】 〈원시불교〉 창시기(創始期)의 불교를 말하며, 경전들은 석가의 생애 중의 가르침을 스
승이 죽은 후에 제자들이 수집·정리한 것이지만, 그 중에서 석가가 직접 설한 교법을 판별하기는 곤란
하다. 교단도 이미 발족되어 석가 입적 후 약 100년 동안은 완전한 통일이 유지되었다. 불(佛)·법
(法)·승(僧)의 3보(寶)는 불교를 구성하는 기본요소인데, 승(僧:敎團)은 출가신자(出家信者)인 비구·
비구니와 재가신자(在家信者)인 우바새(優婆塞)·우바이(優婆夷)로 이루어져 계율(戒律)로 규제되며 부
처를 중심으로 모여 그 법을 실천한다. 이 재가신자는 단가제도(檀家制度)에서의 신자와는 달리 3보에
의 귀의(歸依)를 서약할 뿐 아무런 속박도 없으며 그 대신 출가신자에 대한 의식(衣食)의 재정적 지원
을 맡았다. 석가는 태자(太子) 시절의 물질적으로 풍족하던 생활에서도, 출가 후의 고행(苦行)에서도
만족을 얻지 못하고 고뇌하였으나, 그 두 극단의 고뇌를 버림으로써 중도(中道)를 깨닫고 불타가 될 수
있었다. 중도란 일체 편견(偏見)에 구애되지 않는 자세이며, 올바른 견해·결심·언어·행위·생활·노
력·사념(思念)·명상(瞑想)의 팔정도(八正道)를 말한다. 5온(蘊)의 일체는 고(苦:苦諦), 그 고의 기원
(起原:集諦), 고의 초극(超克:滅諦), 초극에 이르는 길, 즉 도제(道諦)라는 4개의 진리(四諦)에 의하여
뒷받침되는 것이 팔정도이지만, 그 중 도제의 내용이야말로 팔정도 바로 그것이며 그 실천에 의해서만
중도가 얻어진다. ‘일체는 고이다(一切皆苦)’라는 말에서 생각해 보아도 5온의 이합(離合)은 항상 변
천(變遷)하는 것이며(諸行無常), 존재하는 것에는 상일(常一) 주재(主宰)하는 입장은 없는 것으로(諸法
無我), 전변(轉變) 무상한 세계에서 상(常)을 구하기 때문에 고가 생기는데, 팔정도의 실천에서 각성이
열리고 열반의 세계에 도달할 수 있다고도 설한다. 이러한 사고방식이 원시불교의 사상이다.
〈부파불교〉 불멸(佛滅) 후 100년까지 교단은 착실하게 확대·발전을 이루어, BC 3세기에는 마우리아
왕조의 아소카왕[阿育王]이 귀의하여 불교는 거의 인도 전체에 퍼져 교세는 비약적으로 커졌다. 그러나
교단의 확대에 따라 내부에 의견의 대립이 나타나 불멸 후 100년이 지난 무렵부터 교단은 보수적인 상
좌부(上座部)와 혁신적인 대중부(大衆部)의 두 집단으로 분열되었다. 또한 불멸 후 200년 무렵에는 대
중부 속에서 재분열이 일어나, 먼저 일설부(一說部)·설출세부(說出世部)·계윤부(鷄胤部)로 갈리고,
이어서 다문부(多聞部)·설가부(說假部)가, 또 제다산부(制多山部)·서산주부(西山住部)·북산주부(北
山住部) 등으로 분파되었다. 한편 상좌부도 불멸 후 300년 무렵부터 분열이 시작되어 먼저 설일체유부
(說一切有部)·설산부(雪山部)로 갈리고, 설일체유부에서 독자부(犢子部)가, 독자부에서 법상부(法上
部)·현주부(賢胄部)·정량부(正量部)·밀림산부(密林山部)가 분출(分出)되고, 또 설일체유부에서 화지
부(化地部)가, 화지부에서 법장부(法藏部)가, 다시 설일체유부에서 음광부(飮光部)가, 이어서 경량부
(經量部)가 분출되었다. 이들 20개의 부파는 소승 20부(小乘二十部)라고도 부르며 이들을 총칭하여 부
파불교(部派佛敎)라고 한다. 상좌부·대중부 사이에는 근본적 차이는 별로 없으나 혁신적인 대중부에는
후일 대승불교(大乘佛敎)로 발전할 기미가 엿보인다. 또한 상좌부 불교는 남방불교로서 오늘에 전한다.
〈대승불교〉 출가신자(승려) 중심인 종래의 불교에 대항하여 기원 전후부터 재가신자를 포함하는 신앙
으로의 탈피를 원하는 대승(大乘)의 운동이 인도 각지에서 일어났다. 그 밖에 불탑을 중심으로 모여 불
탑에 예배함으로써 불타에 대한 신앙을 높이는 재가신자의 집단인 보살단(菩薩團)이 있어, 이것도 대중
운동에 합체하여 초기 대승불교가 성립되었다. BC 1세기부터 AD 2세기에 걸쳐 《반야경(般若經)》 《법
화경(法華經)》 《유마경(維摩經)》 《화엄경(華嚴經)》 《무량수경(無量壽經)》 등의 대승경전이 차례
로 성립되어, 이것들은 3세기 전후에 나가르주나(Nagarjuna:龍樹)에 의해 이론적 근거가 부여되면서 대
승불교의 확립을 보았다. 용수는 《중론(中論)》에서 모든 존재는 연기에 의하여 생기는 것으로 단독으
로 존재하는 일은 없으니, 이것을 깨달으면 진공중도(眞空中道)의 정관(正觀)을 얻을 수 있다는 반야공
관(般若空觀)을 설하였는데, 이 설에 기초를 둔 학파를 중관파(中觀派)라고 한다. 또 미륵(彌勒)이 시
작하고 무착(無着)·세친(世親) 등이 전개시킨 학파를 유가파(瑜伽派) 또는 유식파(唯識派)라고 한다.
이 학파는 용수의 반야공관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관상(觀想) 등에 의한 수행(修行)인 유가행(瑜伽行),
외계(外界)의 실재한다고 생각되는 것은 다만 심식(心識)의 투영이며, 심식만이 실재한다는 유식설(唯
識說), 불성(佛性)은 중생도 본래부터 갖추고 있는 것으로 중생 모두가 여래(如來)가 될 수 있다는 여
래장연기(如來藏緣起) 등을 설하고 있다. 이 두 학파가 중기 대승불교를 형성하였으며 그 후 세친의 학
통을 이은 진나(陳那) 등에 의하여 인명(因明:불교논리학)이 확립되었다. 후기 대승불교에 이르면 인도
교 등의 영향을 받아 다라니(陀羅尼)나 진언(眞言)을 중심으로 하는 밀교(密敎)가 주류를 이루어 점차
타락의 길을 걷다가 이슬람교의 인도 침입으로 13세기에 쇠멸하기 시작했다. 대승불교의 근본사상은 모
든 존재에 실체(實體)·아(我)와 같은 것은 없다고 하는 ‘공(空)’의 사상이다. 또 보살(각성을 구하
는 사람)의 실천윤리덕목으로서 보시(布施)·지계(持戒)·인욕(忍辱)·정진(精進)·선정(禪定)·지혜의
육바라밀(六波羅蜜)을 내세우는데, 그 첫째가 보시로 되어 있어 이타행위(利他行爲)를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대승불교는 주로 북쪽으로 퍼져 중국과 한국·일본 등에 전해졌다.
【남방불교】 스리랑카·미얀마·타이 등 동남아시아에 전파된 불교를 남방불교라 한다. 이 지역으로
불교를 전파하는 기지가 된 곳은 스리랑카이며 BC 3세기 중엽, 아소카왕의 왕자 마힌다(Mahinda)가 파
견되어 상좌부 불교를 전한 것이 효시가 된다. 이 불교는 팔리어(語) 경전을 믿기 때문에 팔리불교라고
도 한다. 5세기에는 불음(佛音)이 인도로부터 건너와 팔리어 경전의 주석(注釋)을 집대성함으로써 상좌
부 불교의 기초가 굳어지고 활기를 띠게 되었다. 미얀마와 타이에는 이 스리랑카의 상좌부 불교가 전해
졌다. 5세기에 미얀마로 건너간 상좌부 불교는 그 후 밀교[大乘]로 바뀌었다가 11세기 파간조(朝)의 전
(全)국토통일과 함께 재흥되었고, 후에 본가인 스리랑카불교가 쇠퇴하자 상좌부 불교가 스리랑카로 역
수입되었다. 한편 타이에는 8세기 무렵에 밀교가 전해져 번창하다가 후에 미얀마로부터 상좌부 불교가
진출하였고, 13세기 말에는 스리랑카의 상좌부 불교가 전해져, 그 후 왕조의 보호 밑에 발전하여 지금
은 이 지역 제1의 불교국이 되었다. 자바에는 8세기경 인도로부터 밀교가 전해져 번창하였으나 후에 이
슬람권으로 바뀌었다. 캄보디아·라오스는 13세기 말부터 타이족의 침입으로 상좌부 불교가 전해져 오
늘에 이른다. 인도차이나반도의 또 하나의 지역인 베트남은 옛날부터 중국과의 교섭으로 6∼7세기경 대
승불교가 전해져 선종(禪宗)을 중심으로 번영하였다.
【티베트·몽골의 불교】 티베트·몽골의 불교는 라마교라고도 한다. 티베트에는 일찍이 네팔 등의 불
교가 들어온 것으로 생각되는데 토속적 샤머니즘인 분교(敎)가 성행하여 교세를 넓히지 못하였다. 6∼7
세기 인도에서 공식적으로 불교가 들어왔고, 8세기경에는 다시 인도로부터 밀교와 중관계(中觀系) 대승
불교가 전해졌고, 경전의 티베트어 번역도 진척되면서 불교는 널리 전파되었다. 10세기에 한때 쇠퇴하
였으나 11세기에 다시 일어나 밀교를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15세기 초 종객파(宗喀巴)가 나와 종풍(宗
風)을 쇄신, 교세를 크게 높였으며, 이후 그 법계(法系)는 대대로 다라이라마(‘큰 라마’라는 뜻)가
되어 종교와 정치의 실권을 잡았다. 한편 몽골에는 13세기 파스파(’Pags-pa:八思巴)가 티베트불교를
원(元)나라 조정으로 전해왔고, 그 후 각지로 퍼져 청(淸)나라 때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중국불교】 처음 불교가 전해진 연대에 관해 여러 설이 있으나, 대체로 1세기 중엽 한(漢)나라 때 서
역(西域:티베트)지방을 경유하여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서역지방은 옛날부터 인도와 중국을 연결하
는 요로에 있어 양쪽 문화의 접촉장소가 되어왔으므로 인도의 불교가 재빨리 서역에 전해지고 다시 중
국으로 전래되었다. 서역지방에도 독특한 불교문화가 개화하였는데, 그 서역불교의 발자취는 둔황[敦
煌]을 비롯한 여러 곳의 유적에서 엿볼 수 있다. 초전기(初傳期)에서 4세기까지를 중국불교의 제1기라
할 수 있으며, 이 시대에는 서역방면으로부터의 내입승(來入僧)의 활약이 눈에 띈다. 즉 안세고(安世
高)·지루가참(支婁迦懺)·축법호(竺法護)·불도징(佛圖澄) 등이며 그들은 대승·소승의 경전을 번역하
여 불교에 대한 중국인의 이해를 넓히는 데 노력하였다. 중국인 불도(佛徒)로 주사행(朱士行)·도안(道
安)·혜원(慧遠) 등이 나왔고, 특히 도안·혜원 등은 학문적이고 이론적이었던 불교를 실천으로써 이해
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불교가 무조건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며 고래의 사상과의 유사점 때
문에 받아들여지는 일도 있었다. 불타가 황제(黃帝)·노자(老子)와 나란히 제향되는 예가 그것이며, 4
세기 무렵부터는 불교의 ‘공(空)’을 노자의 ‘무(無)’로 해석하려는 격의불교(格義佛敎)도 생겨났
다. 401년 구마라습[鳩摩羅什]이 장안(長安)에 들어와 대승경전의 번역을 시작한 때부터 중국불교는 제
2기에 들어선다. 구마라습은 여러 경전의 뛰어난 한역(漢譯)을 행하여, 그 한문경전에 의한 불교 본래
의 교리연구가 진행되었고, 중국인의 불교에 대한 이해도 넓어져, 이후 중국불교의 사상적 발전의 기틀
을 마련하였다. 또 그 문하생은 3,000여 명이라 하며 그 계통은 일대 교세를 이루고 제2기 불교의 중심
세력이 되었다. 구마라습 외에도 각현(覺賢) 담무참(曇無讖)·보리류지[菩提流支]·진제(眞諦) 등이 도
래하여 경전의 한역을 행하고, 그 경전 연구에 따라 삼론(三論)·사론(四論)·성실(成實)·법화(法華)
등 많은 학파가 발생하였다. 또 우발적으로 전래된 여러 경전을 본래의 역사적 발전의 순서로 정리하고
체계를 세우기 위한 교판(敎判:敎相判釋)도 성행하게 되어 교학연구는 더욱 진전하였다. 수(隋)·당
(唐)시대에는 전대의 교학연구를 기초로 소의(所依)의 경론(經論)에 의한 종파가 확립되어 국민의 올바
른 이해와 실천에 입각한 불교의 성립을 보았으며, 이 시대는 중국불교의 황금시대가 되었다. 수나라
때는 우선 지의(智)가 《법화경》에 의하여 천태종(天台宗)을 개종(開宗)하고, 이어서 길장(吉藏)은 용
수의 삼론(三論)에 의한 삼론종(三論宗)을 확립시켰다. 당대(唐代)에는 화엄종·선종(禪宗)·정토종(淨
土宗)·법상종(法相宗)·율종(律宗)·밀교의 각 파가 성립하였다. 화엄종은 《화엄경》 소의(所依)의
종파로 법장(法藏)이 그 교학의 대성자이며, 선종은 이전부터 달마(達磨)에 의하여 전해져 오다가 5조
(祖) 홍인(弘忍)에 이르러 크게 발전하였고, 다시 그 제자인 혜능(慧能)과 신수(神秀)에 의하여 남종·
북종의 2대 분파가 생겼다. 특히 남종파는 임제(臨濟)·위앙(仰)·조동(曹洞)·운문(雲門)·법안(法眼)
과 임제에서 분파된 양기(楊岐)·황룡(黃龍) 등 이른바 5가(家) 7종(宗)이 나와 크게 번영하였다. 정토
종은 담란(曇鸞)·도작(道綽)·선도(善導) 등에 의하여 확립되었는데, 부처의 명호(名號)를 외우며 오
로지 아미타불에 귀의하라는 간단한 교의(敎義)로써 민중 사이에 널리 퍼졌다. 법상종은 현장(玄)이 인
도에서 가져온 유식론(唯識論) 관계의 경전을 기초로 그의 제자 규기(窺基)가 개종하였고, 율종에서는
도선(道宣)의 계통, 즉 남산종(南山宗)이 번창하였다. 밀교도 선무외(善無畏)·금강지(金剛智)·불공
(不空) 등에 의하여 인도에서 전래되었다. 수·당의 황금기를 지난 중국불교는 그 후 쇠퇴하기 시작하
여 몇 차례의 파불(破佛)을 겪고 또 명(明)나라 때는 중앙에서 통제가 가해지는 등, 활발한 불교활동은
차차 자취를 감추고 다만 선종과 정토종만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지금의 중국 본토에서는 불교활
동이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일본불교】 일본의 불교는 538년 백제 성왕(聖王) 때 도장(道藏)이 불상과 경전을 가지고 일본에 건
너가 성실종(成實宗)의 개조가 된 때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백제는 일본과의 접촉이 빈번하여 관륵(觀
勒)은 역법(曆法)·천문·지리·술수(術數) 등을 일본에 전하였고, 혜총(惠聰)·도림(道琳)·담혜(曇
慧)·혜미(慧彌) 등 많은 고승이 일본에 건너가 불교와 문화에 크게 공헌하였다. 일본에 전해진 불교는
여러 호족(豪族)들의 지지를 얻어 마침내는 쇼토쿠 태자[聖德太子]가 불교장려책을 쓰게 됨으로써 공식
적인 지위를 굳혔다. 나라[奈良] 시대에는 불교가 국가와의 연관을 더욱 굳혀 고쿠분사[國分寺]의 제도
도 이 무렵의 산물이다. 이 시대는 중국불교가 황금시대를 이룬 때였으므로 그들의 여러 종지(宗旨)가
차례로 건너와 삼론(三論)·법상·성실·구사(俱舍)·율·화엄 등 이른바 남부6종(宗)이 성립하였다.
헤이안[平安] 시대에 이르러 불교는 천태(天台)·진언(眞言)의 2종이 중심이 되어 전개된다. 천태종의
사이초[最澄], 진언종의 구카이[空海] 등은 모두 입당(入唐)하여 새로운 불법을 구한 개조들이다. 남부
6종은 이들 2개 종파의 발전에 따라 점차로 그 세력을 잃게 되었고, 특히 사이초가 대승계단(大乘戒壇)
을 개설하고 그가 죽자 이것이 국가의 공인을 얻음으로써 남부6종의 몰락은 결정적으로 되었다. 또 헤
이안불교는 귀족들의 열성적인 귀의와 보호를 받아 귀족불교라 일컬어졌는데, 귀족들은 조정의 본을 떠
조사(造寺)·조탑(造塔)에 힘쓰는 한편 기도(祈禱)와 법회를 자주 열어 그 권세를 자랑하였다. 한편 이
렇게 귀족들과 깊은 관련을 갖게 된 승려들은 세속적 권위와 결탁하게 되었고, 절은 귀족으로부터 기부
받은 토지를 지키기 위하여 승병(僧兵)을 두게 됨으로써 많은 폐단을 낳게 되는 근원이 되었다. 일본불
교가 민중 속에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은 가마쿠라[鎌倉] 시대이다. 말법사상(末法思想)을 배경으로 일어
난 정토종이, 아미타불의 명호를 외우는 일만이 정토왕생(淨土往生)의 정정업(正定業)이라고 설하면서
급속히 교세를 넓히다가 기성종파의 반감을 사고 박해를 받게 되었다. 정토종을 확립한 겐쿠[源空:法
然]의 문하에는 많은 인재가 모여 여러 종파로 분립되었으나, 그 중에서도 가장 주목되는 것은 정토진
종(淨土眞宗)을 개설한 신란[親鸞]이다. 그도 스승과 마찬가지로 유형에 처해졌으나 그는 유형지에서
저술과 포교에 주력하였다. 한편 에이사이[榮西]·도겐[道元] 등에 의하여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선종
(禪宗)은 계율에 엄격한 수양의 교법으로서 무사계급과 결부되어 발전하였다. 가마쿠라불교의 최후를
장식한 것은 니치렌종[日蓮宗]이다. 니치렌은 처음 진언밀교(眞言密敎)를 배우고 이어 천태(天台)를 배
워 《법화경》의 진리를 깨닫고 니치렌종을 개종하였다. 이 종파는 천태 이외의 종파를 부정하는 도전
적인 언동 때문에 자주 법난(法難)을 받았다. 그러나 후에 민중들 사이에 교세가 확장되어 지금은 진종
(眞宗)과 나란히 대종파를 이루고 있다. 무로마치[室町] 시대 이후 불교는 점차 쇠퇴하다가, 오다 노부
나가[織田信長]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천하를 통일하자 완전히 교세가 꺾였으며, 에도[江
戶] 시대에는 정권의 도구로 타락하였다. 이렇게 침체·부패한 불교에 대하여 비난·배척의 운동도 자
주 일어났으나,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후 뜻있는 불제자들에 의하여 혁신의 기운도 높아지고 여러 종
파의 부흥운동도 추진되어 근대적 종교로서의 불교발전이 이룩되었다.
【한국불교】 〈삼국시대〉 한국에 불교가 전파된 것은 372년(고구려 소수림왕 2) 6월 진(秦)나라의 순
도(順道)와 아도(阿道)가 불경과 불상을 가지고 들어와 초문사(肖門寺)·이불란사(伊弗蘭寺) 등을 창건
하고 설법을 시작한 것이 그 시초이다. 이들의 설법과 전도를 공허(公許)한 고구려에서는 그 후 평양
(平壤) 9사(寺)와 반룡사영탑(盤龍寺靈塔) 등을 짓는 한편 불교 전파에도 힘써 많은 고승이 배출되었
고, 열반종(涅槃宗)·삼론종(三論宗)·천태종(天台宗)·살바다종(薩婆多宗) 등의 종파가 이루어졌다.
의연(義淵)은 불교역사 연구를 통하여 많은 업적을 남겼고, 혜자(惠慈)·운총(雲聰)·혜편법사(惠便法
師)·담징(曇徵)·법정(法定) 등은 일본에 불교를 전파하였고, 도림(道琳)·덕창(德昌)·혜량(惠亮)·
신성(信誠) 등은 호국불교를 위한 실력배양에 많은 힘을 기울였다. 백제는 384년(침류왕 1) 인도의 승
려 마라난타(摩羅難陀)가 동진(東晉)을 경유하여 입국, 왕의 우대를 받고 궁중에 머물다가 이듬해 남한
산(南漢山)에 절을 짓고 포교를 시작하였다. 그 후 왕흥사(王興寺)·미륵사(彌勒寺)·한산불사(漢山佛
寺)·경복사(景福寺)·수덕사(修德寺) 등 많은 사찰이 건조되고 교파도 삼론종·계율종·성실종(成實
宗)의 세 종파가 성립되었다. 백제불교는 일본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 많은 고승들이 일본에 건너가 불
교 전파에 큰 공헌을 하였는데, 일본 성실종의 개조가 된 도장(道藏)을 비롯하여 혜총(惠聰)·도림(道
琳)·혜미(惠彌)·도흔(道欣)·담혜(曇慧)·도령(道寧)·상휘(常輝)·의각(義覺)·방제(放濟)·다상(多
常) 등이 있다. 이 밖에도 백제 멸망 후 그 재건을 위해 궐기하였던 승장(僧將) 도침(道琛), 인도에 유
학하고 귀국 후 《율부(律部)》 72권을 번역한 겸익(謙益) 등도 유명하다. 신라는 삼국 중에서 불교가
가장 늦게 전파된 나라로 527년(법흥왕 14) 이차돈(異次頓)의 순교가 있은 후 비로소 공인되었는데 그
후 급속히 발전하여 국가적 종교로 존숭되고 승려와 사원이 국가의 두터운 보호를 받게 되었다. 많은
구법승(求法僧)이 인도와 당나라에 유학하였고 그들에 의하여 당나라의 13종(十三宗:成實宗·三論宗·
俱舍宗·地論宗·攝論宗·天台宗·法相宗·涅槃宗·念佛宗·密宗·禪宗·華嚴宗·律宗)이 도입되어 발
전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선종은 독자적으로 발전하여 이른바 9산선문(九山禪門)의 분파를 이루었다.
국가 안태(安泰)와 왕실의 번영을 비는 호국불교로서의 신라불교는 사상·정치·문화·외교·국민생활
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건축·공예 방면에도 찬란한 예술의 꽃을 피웠다. 황룡사(皇
龍寺)·사천왕사(四天王寺)·봉성사(奉聖寺)·감은사(感恩寺)·봉덕사(奉德寺)·망덕사(望德寺)·법주
사(法住寺)·통도사(通度寺)·화엄사(華嚴寺)·월정사(月精寺)·부석사(浮石寺)·불국사(佛國寺)·장안
사(長安寺)·해인사(海印寺)·보현사(普賢寺)·범어사(梵魚寺)·쌍계사(雙磎寺) 등 명찰을 창건하였고,
탑·종·불상 등의 공예가 발달하여 불국사의 석가탑과 다보탑, 정혜사(淨惠寺)의 13층탑, 화엄사 쌍
탑, 감은사 쌍탑, 무량사탑(無量寺塔), 동화사(桐華寺) 쌍탑, 금산사(金山寺)의 석탑 및 6각다보탑, 화
엄사 사리탑 등을 비롯하여 석굴암 석불, 황룡사 장륙금상(丈六金像), 봉덕사 종, 금산사 부도(浮屠),
감산사(甘山寺)의 2불상, 백률사(栢栗寺)의 약사상(藥師像), 사천왕사의 사천왕상, 화엄사 석등 등은
귀중한 문화재로서 전승된다. 한편 수많은 고승이 배출되어, 원광(圓光)과 같은 대학승(大學僧)은 세속
5계(世俗五戒)로 국민도의를 확립하였고, 자장(慈藏)은 문물제도를 수립하였으며, 의상(義湘)은 실천적
인 수행(修行)과 사찰의 건립을 통하여 화엄의 교리를 널리 펴는 한편 많은 학승을 양성하였고, 원효
(元曉)는 80여 부의 논소(論疏)를 지어 불교의 대중화를 꾀하는 한편 통일불교 창조에 정력을 쏟았다.
의상과 원효는 그 학통이 중국과 일본에도 널리 알려졌으며, 원측(圓測)은 유식설(唯識說)에 통달하여
독특한 견해를 가졌고, 그 때문에 중국의 법상종 정통파에게는 비난을 받았으나 그의 저술 《해심밀경
소(解深密經疏)》는 티베트어로 번역되어 전한다. 혜초(慧超)는 인도에 건너가 불적(佛蹟)을 순례하고
육로로 중앙아시아를 거쳐 귀국한 다음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을 저술하여 귀중한 자료를 남
겼다. 그 밖에 신라시대의 고승들로는 도증(道證)·경흥(憬興)·지통(智通)·표훈(表訓)·명랑(明朗)·
승전(勝詮)·대현(大賢)·도의(道義)·신행(信行)·체징(體澄)·지증(智證)·혜소(慧昭)·현욱(玄昱)·
개청(開淸)·낭공(朗空)·범일(梵日)·무염(無染)·원랑(圓郞)·진경(眞鏡) 등을 들 수 있으며 이들은
모두 당나라와 일본까지 이름이 알려졌다.
〈고려시대〉 고려의 불교는 신라불교를 그대로 계승하는 한편 송(宋)나라의 영향 아래 독자적인 발달
을 이루었다. 태조 왕건(王建)은 불교를 국교로 정하고 새로 승과(僧科)를 제정하여 승려를 우대하였
다. 연등회(燃燈會)·팔관회(八關會) 등을 연중행사로 개최하는 등 태조의 숭불정책은 고려 전반에 걸
쳐 계승되면서 사상적 지주가 되었다. 당시에 건립된 사찰로는 개성의 왕륜사(王輪寺)·법왕사(法王寺)
를 비롯한 16사(寺)와 봉은사(奉恩寺)·진관사(津寬寺)·부석사(浮石寺)·관음사(觀音寺)·숭교사(崇敎
寺)·석왕사(釋王寺)·영명사(永明寺) 등이 있으며, 공예품으로는 관촉사(灌燭寺) 석등, 부석사 조사전
벽화(祖師殿壁畵), 대흥사(大興寺)의 종 등 우수한 예술품을 낳았다. 특히 문종(文宗) 연대에는 고려판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간행하여 한국불교문화의 대표작을 남겼다. 고려는 불교를 국교로 삼았음에
도 이름난 고승은 많이 배출되지 못하였다. 그 중에서 체관(諦觀)은 천태종을 재흥시켰고, 대각국사(大
覺國師) 의천(義天)은 문종의 아들로 일찍이 11세 때 승려가 되어 송나라에 유학한 후 교장도감(敎藏都
監)을 설치, 속장경(續藏經) 4,740여 권을 간행한 것은 특기할 만하며, 또 문하생이 1,000명이 넘었다
고 한다. 그 밖에 중기에 이르러 지눌(知訥)·수기(守其)·균여(均如), 말기의 나옹(懶翁)·보우(普
愚)·보조(普照)·백운(白雲) 등은 이름을 떨친 고승들이었다. 고려의 불교종파는 신라의 종파가 계승
되었다가 말기에 다소 분화되어 조계종(曹溪宗)·천태법사종(天台法師宗)·천태소자종(天台疏子宗)·화
엄종·총남종(摠南宗)·자은종(慈恩宗)·신인종(神印宗)·남산종(南山宗)·도문종(道門宗)·중신종(中
神宗)·시흥종(始興宗)의 11종이 성립되었으며 그 중 화엄·자은·총남·중신·시흥의 5종을 5교(敎),
조계·천태의 2종을 양종(兩宗)이라 하여 5교 양종의 종파를 이루었다.
〈조선시대〉 조선시대에 이르러 조정의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으로 인하여 불교는 미증유의 수난기
(受難期)를 맞이하였으니 도첩제(度牒制)를 실시하는 한편, 함부로 승려가 되는 것을 금하고 사전(寺
田)에도 과세를 하였으며 승려의 궁중출입과 도성(都城) 내 출입을 금하였다. 또한 연산군 때는 승과
(僧科)를 폐지하고, 삼각산의 여러 절의 승려를 몰아내어 그곳을 놀이터로 삼았으며 원각사(圓覺寺)의
불상을 옮기고 그곳을 기관(妓館)으로 삼는가 하면 선종(禪宗)의 본산인 흥덕(興德)·흥천(興天) 두 절
을 없애고 여승은 궁중의 노비(奴婢)로 삼고 승려들도 모두 환속(還俗)시켰다. 중종(中宗)은 경주(慶
州)의 동불상(銅佛像)을 녹여 병기(兵器)를 만들고 원각사를 헐어 그 재목은 민가를 짓는 데 나누어 주
었다. 그러나 이러한 강압에도 불구하고 불교신앙 자체를 말살하지는 못하였으며, 특히 상류층 부인의
신앙을 저지하기는 어려웠다. 더구나 역대왕 중에는 호법왕(護法王)도 있었으니, 태조는 석왕사·태고
사·해인사 등에 비판(婢板)을 하사하였고, 세종·세조 때는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설치, 불경을 간행
하였다. 특히 세종은 불교종파의 정비를 단행하여 조계·천태·총남의 3종을 선종(禪宗)으로, 화엄·자
은·시흥·중신의 4종을 교종(敎宗)으로 통합하여 선·교 양종을 성립시켰다. 이름 높은 명승도 많이
배출되어 무학(無學)·함허(涵虛)·보우(普雨) 등과 임진왜란 때의 승장 서산(西山)·사명(四溟)·처영
(處英)·영규(靈圭) 등은 특히 유명하다. 그 후 한국불교는 일제강점기에 사찰령(寺刹令)에 따라 31개
본사와 1,200개의 말사(末寺)로 구분되었고, 3·1운동 때는 많은 승려가 가담하였으며, 한용운(韓龍
雲)·백용성(白龍成) 등은 33인의 한 사람이 되었다. 8·15광복 후 전국불교대회를 열어 교구제(敎區
制)를 정하고 중앙에는 총무원, 각 도에는 교무원을 설치, 종헌(宗憲)에 따라 조직을 강화하였다. 6·
25전쟁 후에는 파괴된 100여 개의 사찰을 수축하는 한편 불교의 대중화운동을 전개하였고, 고아원의 설
립, 동국대학·해인대학·경기대학과 해동(海東)·용인(龍仁) 등 10여 고등학교 및 20여 개의 중학교를
운영, 문화사업에도 기여하고 있다. 1954년 이래 비구(比丘)·대처(帶妻) 두 파의 분쟁으로 분열된 후
여러 개의 종단으로 갈라졌다. 현재 교육부에 등록된 종파는 조계종을 비롯하여 태고종(太古宗)·법화
종(法華宗)·미륵종(彌勒宗)·법상종·보문종(普門宗)·일승종(一乘宗)·용화종(龍華宗)·불입종(佛入
宗)·원효종(元曉宗)·천태종·화엄종·정토종(淨土宗)·진각종(眞覺宗)·총화종(總和宗)·진언종(眞言
宗)·천화불교(天華佛敎)·한국불교법화종 등 18개 종파가 있다. 사찰수는 5,700여 개소이며, 승려가 2
만여 명, 신도수 1,300만여 명이라고 알려져 있다. 《불교신문》을 비롯하여 각 종파·단체들에서 정기
간행물도 30여 종이 나오고 있다.
석가<釋迦(Sakyamuni, BC 563 ?∼BC 483 ?)>
불교의 개조. 석가모니(釋迦牟尼)·석가문(釋迦文) 등으로도 음사하며, 능인적묵(能仁寂默)으로 번역된
다. 보통 석존(釋尊)·부처님이라고도 존칭한다. 석가(Sakya)는 민족의 명칭이고 모니(muni)는 성자라
는 의미로, 석가모니라 함은 석가족(族) 출신의 성자라는 뜻이다. 본래의 성은 고타마(Gotama:瞿曇),
이름은 싯다르타(Siddhartha:悉達多)인데, 후에 깨달음을 얻어 붓다(Buddha:佛陀)라 불리게 되었다. 또
한 사찰이나 신도들 사이에서는 진리의 체현자(體現者)라는 의미의 여래(如來:Tathagata), 존칭으로서
의 세존(世尊:Bhagavat)·석존(釋尊) 등으로도 불린다.
【출생】 현재의 네팔 남부와 인도의 국경부근인 히말라야산(山) 기슭의 카필라성(Kapilavastu:迦毘羅
城)을 중심으로 샤키야족[釋迦族]의 작은 나라가 있었다. 석가모니는 그 나라의 왕 슈도다나
(Suddhodana:淨飯王)와 마야(Maya:摩耶) 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샤키야족은, 그 왕호가 정반왕, 그리
고 정반왕의 동생이 백반(白飯)·감로반(甘露飯) 등으로 불리고 있는 점에서 미작(米作) 농경생활과 깊
은 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석가모니는 크샤트리야 계급출신이라고 하지만, 샤키야족 내부에
카스트의 구별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또한 그가 순수한 아리아인(人)이라는 것도 확실하지는 않으
며, 오히려 네팔계(系) 민족에 속하는 종족이라는 추측도 있다. 그러나 압도적인 아리아 문화의 영향하
에 있었던 것만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마야 부인은 출산이 가까워짐에 따라 당시의 습속대로 친정에
가서 해산하기 위해 고향으로 가던 도중 룸비니(Lumbini) 동산에서 석가를 낳았다. 이는 아소카왕[阿育
王]이 석가모니의 성지를 순례하면서 이 곳에 세운 석주(石柱)가, 1896년에 발견·해독됨으로써 확인되
었다. 전설에 따르면 석가모니가 태어났을 때, 히말라야산에서 아시타라는 선인(仙人)이 찾아와 왕자의
상호(相好)를 보고, “집에 있어 왕위를 계승하면 전세계를 통일하는 전륜성왕(轉輪聖王)이 될 것이며,
만약 출가하면 반드시 불타가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고 한다. 그의 생몰연대에 관하여는 이설(異說)
이 많으나, 그 중 유력한 것은 스리랑카의 《도사(島史) Dipavamsa》 《대사(大史) Mahavamsa》에 근거
하여 불교학자 W.가이거가 주장한 BC 563∼BC 483년 설이다. 이 설은 중국의 《역대삼보기(歷代三寶
紀)》에 전하는 중성점기(衆聖點記), 즉 불멸(不滅) 후 최초의 율장(律藏)이 결집되었을 때 제1점을 치
기 시작하여 매년 1점씩 쳐서, 제(齊)나라의 영명(永明) 7년(AD 490)까지 975점에 이르렀으므로 불멸이
BC 485년이라는 설(BC 565∼BC 485년)과도 대략 일치된다. 그 외에 BC 624∼BC 544년설, BC 463∼BC
383년설 등이 있으나, 한국에서는 전자를 채용하고 있다.
【출가와 성도】 석가모니는 생후 7일에 어머니 마야 부인과 사별하였다. 그것은 석가모니에게는 슬픈
일이었다. 그 후 이모에 의하여 양육되었는데, 왕족의 교양에 필요한 학문·기예를 배우며 성장하였다.
그 생활은 물질적으로는 매우 풍부하였을 것이다. 당시의 풍습에 따라 그는 16세에 결혼하였다. 부인은
야쇼다라[耶輸陀羅]라고 하며, 곧 아들 라훌라[羅羅]도 얻었다. 이같이 안락하고 행복한 생활을 보내던
중 석가모니는 인생의 밑바닥에 잠겨 있는 괴로움의 문제와 직면하게 되었다. 이러한 점은 전설적으로
새가 벌레를 잡아 먹는 모습, 또는 생로병사(生老病死)와 사문(沙門)을 목격한 이른바 사문출유(四門出
遊), 또는 사문유관(四門遊觀)으로써 설명된다. 석가모니는 29세 때 고(苦)의 본질 추구와 해탈(解脫)
을 구하고자, 처자와 왕자의 지위 등 모든 것을 버리고 출가하였다. 남쪽으로 내려가 갠지스강(江)을
건너 마가다국(國)의 왕사성(王舍城:Rajagrha)으로 갔다. 여기에서 알라라칼라마와 우다카 라마푸타라
는 2명의 선인(仙人)을 차례로 찾아,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이라는
선정(禪定)을 배웠다. 그것은 일종의 정신통일에 의하여 하늘에 태어나 보려는 것이었는데, 석가모니는
그들의 방법으로써는 생사의 괴로움을 해탈할 수 없다고 깨닫자, 그들로부터 떠나 부다가야 부근의 산
림으로 들어갔다. 여기에서 그는 당시의 출가자의 풍습이었던 고행(苦行)에 전념하였으나, 신체가 해골
처럼 되었어도 해탈을 이룰 수는 없었다. 고행은 육체적인 면의 극소화를 통하여 정신의 독립을 구하는
2원적 극단론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6년간의 고행 끝에 고행을 중단하고, 다시 보리수(菩
提樹:Bodhi-tree) 아래에 자리잡고 깊은 사색에 정진하여 마침내 깨달음을 얻었다. 이 깨달음을 정각
(正覺:abhisambodhi)이라고 한다. 그 깨달음의 내용에 대하여 《아함경(阿含經)》에는 여러 가지로 설
명하고 있다. 사제(四諦:苦·集·滅·道의 네 진리, 즉 현상계의 괴로움과 그 원인 및 열반과 그에 이
르는 길)·십이인연(十二因緣)·사선삼명(四禪三明) 등을 깨달았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기본적으
로는 선정에 의하여 법(法:dharma)을 깨달았다고 하겠다. 즉 선정은 강렬한 마음의 집중이며, 여기에서
생긴 지혜는 신비적 직관(直觀)이 아니라 자유로운 여실지견(如實知見:있는 그대로 옳게 봄)이다. 이
지혜가 진리를 깨달아 진리와 일체가 되어 확고부동하게 되었는데, 공포에도 고통에도, 나아가서는 애
욕에도 산란을 일으키지 않는 부동(不動)의 깨달음이라 할 것이다. 이것은 마음이 번뇌의 속박에서 해
방된 상태이기 때문에 해탈(解脫:moksa)이라고 하며, 이 해탈한 마음에 의하여 깨우쳐진 진리를 열반
(涅槃:nirvana)이라고 한다. 현대적 의미에서의 해탈은 참 자유, 열반은 참 평화라고 할 수 있다.
【설법】 석가모니는 성도 후 5주간을 보리수 아래에서 해탈의 기쁨에 잠겨 있었는데, 범천(梵天)의 간
절한 권청(勸請)이 있어 설법을 결심하였다. 악마의 유혹, 설법주저(중생이 이해 못할 것을 염려), 범
천권청 등은 마음속의 일을 희곡적으로 표현한 것으로도 보이나, 깊은 종교적 의미가 담겨 있다. 석가
모니는 베나레스 교외의 녹야원(鹿野苑:Mrgadava)에서, 일찍이 고행을 같이 하였던 5명의 수행자에게
고락의 양 극단을 떠난 중도(中道)와 사제에 관하여 설하였다. 이것을 특히 초전법륜(初轉法輪)이라고
하는데, 그들은 모두 법을 깨달아 제자가 되었다. 여기에 최초의 불교 교단(samgha:僧伽)이 성립되었
다. 이렇게 하여 불교는 그의 설법을 통하여 세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 후 석가모니는 적극적으
로 설법을 계속하여, 그 교화의 여행은 갠지스강(江) 중류의 넓은 지역에까지 미쳤다. 제자의 수도 점
차 증가하였으며, 각지에 교단이 조직되었다. 그의 가르침은 《아함경》 《율장》 등의 원시불교 경전
을 통해 전하여지고 있다. 구전(口傳)되어 오던 것을 후세에 편집한 것이지만, 후세에 정형화된 다음의
교설을 통하여 석가모니의 가르침의 원형 또는 그 핵심을 알 수 있다. 삼법인(三法印:一切皆苦·諸行無
常·諸法無我 또는 一切皆苦를 빼고 涅槃寂靜을 넣기도 한다)·사제·팔정도(八正道:正見·正思·正
語·正業·正命·正精進·正念·正定)·무기(無記:일체의 형이상학적 질문에 대답하지 않음. 실천을 지
향함을 말한다)·법(法:모든 존재를 일관하는 보편적 진리)·오온(五蘊:色·受·想·行·識의 다섯 가
지 존재의 구성요소)·육근(六根:법의 분류로서 眼·耳·鼻·舌·身·意의 주체. 이에 대응하는 色·
聲·香·味·觸·法의 객체, 즉 6境을 더한 十二處와, 거기에 眼識 등의 6식을 추가하여 十八界를 말하
기도 한다)·연기(緣起:존재는 독립된 실체가 아니라 다른 것과의 관계에 의하여 성립함을 말함. 12연
기가 특히 유명하다)·열반·일체중생의 평등 등이 그것이다.
【입멸(入滅)】 혹서의 중부인도(印度) 각지를 45년의 긴 세월에 걸쳐 설법·교화를 계속한 석가모니
는, 80세의 고령에 이르렀다. 여러 차례의 중병에도 불구하고 교화(敎化)여행을 계속하였다. 이때 자신
의 죽음을 예견하고 여러 가지 유언을 하였다고 한다. “자신을 등불로 삼고 자신을 귀의처로 하라. 법
을 등불로 삼고 법을 귀의처로 하여 수행하라” 또한 자기가 죽은 뒤에 “교주(敎主)의 말은 끝났다.
우리의 교주는 없다고 생각하여서는 아니된다. 내가 설한 교법(敎法)과 계율이 내가 죽은 후 너희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 등이 그것이다. 마침내 쿠시나가라(Kusinagara)의 숲에 이르렀을 때, 석가모니는
심한 식중독을 일으켜 쇠진하였다. “나는 피로하구나. 이 두 사라수(沙羅樹) 사이에 머리가 북쪽으로
향하게 자리를 깔도록 하라”고 말하자, 제자들은 석가모니의 운명이 가까웠음을 알고 눈물을 흘렸다.
석가모니는 “슬퍼하지 마라. 내가 언제나 말하지 않았느냐. 사랑하는 모든 것은 곧 헤어지지 않으면
아니되느니라. 제자들이여, 그대들에게 말하리라. 제행(諸行)은 필히 멸하여 없어지는 무상법(無常法)
이니라. 그대들은 중단없이 정진하라. 이것이 나의 마지막 말이니라”고 설한 후 눈을 감았다. 석가모
니의 사후 그의 유해는 다비(茶毘:화장)되고, 그 유골[舍利:sarira]은 중부 인도의 8부족에게 분배되어
사리탑에 분장(分藏)되었다. 이 사리탑은 중요한 예배대상으로 되어 후에 불탑신앙으로 발전하였다. 특
히 대승(大乘)불교에서는 불타에 관한 철학적 고찰이 가해져 불타에는 법신(法身:진리로서의 불타)·보
신(報身:보살의 願·行에 의하여 성취된 불타)·응신(應身:중생구제를 위하여 상대방에 상응하게 나타
나는 불타)의 3신이 있다고 말한다. 이에 따르면, 석가모니불은 2,500여 년 전의 인도라고 하는 특정의
지역·시대에 나타난 응신의 불타로서, 시방삼세제불(十方三世諸佛)의 일부가 되고 있다. 그러나 신앙
의 입장에서 석가모니불은 위의 3신을 모두 갖추고 있는 분으로 숭배되고 있다. 그의 탄생지 룸비니 동
산, 성도지 부다가야, 최초의 설법지 녹야원, 입멸지 쿠시나가라는 4대 영지(靈地)로서 중요한 순례지
가 되고 있다. 석가모니의 탄생·성도·입멸의 월·일에 관하여 최고(最古)의 문헌에는 기록이 없으나,
중국·한국 등지에서는 탄생을 4월 8일, 성도를 12월 8일, 입멸을 2월 15일로 한다. 또한 남방불교에서
는 탄생·성도·입멸이 모두 바이샤카월(Vaisakha 月:4∼5월)의 보름날의 일이라고 하여, 이 날 성대한
기념식을 거행한다. 중국·한국 등지에서는 석가모니의 전기를 8시기로 구분하여 팔상(八相:兜率來儀
相·毘藍降生相·四門遊觀相·踰城出家相·雪山修道相·樹下降魔相·鹿苑轉法相·雙林涅槃相)이라고 부
르는데, 회화나 조각의 소재가 되기도 하였다.
연기<緣起(patityasamutpada)>
모든 현상은 무수한 원인(因:hetu)과 조건(緣:pratyaya)이 상호 관계하여 성립되므로, 독립·자존적인
것은 하나도 없고, 모든 조건·원인이 없으면 결과(果:phala)도 없다는 설. 나아가 일체현상의 생기소
멸(生起消滅)의 법칙을 연기라고 한다. 그 간단한 형태는 “이것이 있으면 그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면
그것이 생긴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하면 저것도 멸한다”는 등으로 표현된다. 이같
이 중생이 생사·유전(流轉)의 고통을 받는 경우의 연기를 유전연기, 수행하여 해탈로 향하는 연기를
환멸(還滅)연기라고 한다. 원시불교 이래의 사제설(四諦說:네 가지 근본진리)도 일종의 연기설로서 고
(苦)·집(集)의 2제는 유전연기, 멸(滅)·도(道)의 2제는 환멸연기를 나타낸다. 연기설의 일반적 형태
는 무명(無明)·행(行)·식(識)·명색(名色)·육입(六入)·촉(觸)·수(受)·애(愛)·취(取)·유(有)·
생(生)·노사(老死)의 12종이 순차적으로 발생·소멸하는 것을 나타내는 십이연기이다. 《아함경(阿含
經)》에서 연기를 보는 자는 법(法:진리)을 보고, 법을 보는 자는 연기를 본다고 한 말이나, 연기를 보
는 자는 불(佛)을 본다고 설(說)한 것과 같이 연기는 법과 동일한 것으로 불교의 중심사상이 된다. 따
라서 연기에 관하여 원시불교 이래 대승·소승 불교에서 여러 가지 이론이 제시되었다. 업감(業感)연
기·아뢰야식(阿賴耶識)연기·진여(眞如)연기·여래장(如來藏)연기·법계(法界)연기 등이 그것이다. 부
파불교(部派佛敎)에서는 업설(業說)이 부가되어 십이연기의 12지(支)를, 우리의 과거·현재·미래의 삼
세(三世)에 걸쳐 있다고 생각하여 삼세양중인과(三世兩重因果)로 설명하였다. 이는 시간적인 생기(生
起)를 중심으로 연기설을 해석한 것이다. 이러한 해석을 타파한 것이 대승불교운동인데, 특히 그 최초
에 등장한 《반야경(般若經)》류는 일체개공(一切皆空)을 주장하였다. 이는 인도의 승려 용수(龍樹)에
의해 연기와 밀접히 관련지어져 ‘연기 → 무자성(無自性) → 공(空)’의 해석이 확립되었다. 즉 일체
는 다른 것에 인연하여 현상계에 존재하는 것으로서 상호의존하고 있는 상인 상대(相因相待)의 관계라
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각각은 자성을 갖고 있는 존재의 실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공(空)
의 사상이다. 중기 대승불교의 하나에 일체의 현상을 마음의 활동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는 유식설(唯識
說)이 있는데,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성유식론(成唯識論)》 등에서는 외계의 일체 현상은 말나
식(末那識)의 활동과 이 말나식을 내포하고 있는 아뢰야식에 내장되어 있다고 한다. 그 또 하나가 모든
중생 속에는 깨달음의 가능성, 즉 여래의 인자가 있다고 하는 여래장(如來藏) 사상이다. 여기에서는 본
래의 청정한 마음[自性淸淨心]을 둘러싼 외계의 번뇌[客塵煩惱]에 의해 생사에 유전하는 연기를 설명하
고 있다. 여래장 사상은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등의 진여연기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또한 《화
엄경》 법계연기는, 모든 연기를 이상세계로서의 법계의 전개라고 보고 일체의 사물은 일즉다 다즉일
(一卽多多卽一)의 중중무진(重重無盡)의 관계에 있다고 한다. 이를 연기무애문(緣起無門)이라고도 한
다.
사성제<四聖諦(Catvari-arya-satyani)>
인생문제와 그 해결방법에 관한 4가지의 진리. 제(諦:satya)는 진리·진실의 의미이며, 그 진리가 신성
(arya)한 것이라 하여 사성제(四聖諦)·사진제(四眞諦)라고도 한다. 미혹의 세계와 깨달음의 세계의 인
(因)·과(果)를 설명하는 불교의 기본적인 교리 조직으로 고제(苦諦:dubkha)·집제(集諦:samudaya)·멸
제(滅諦:nirodha)·도제(道諦:marga)의 네 가지 진리를 말한다. ① 고제:현실세계의 참모습을 나타내는
것으로 범부(凡夫)의 생존은 괴로움이라는 진리이다. 인생의 고(苦)는 생·노·병·사(生老病死)의 4고
로 표시되며, 또는 여기에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괴로움(愛別離苦), 미워하는 사람과 만나야 하는
괴로움(怨憎會苦), 원하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 괴로움(所求不得苦), 그리고 이러한 괴로움의 근본인
오온(五蘊)에 집착하는 괴로움(五取蘊苦, 五陰盛苦:생존에 대한 집착)의 넷을 더하여 8고라고 한다. 여
기서 자연현상으로서의 생·노·병·사가 괴로움이 아니라 자신에게 일어나는 생·노·병·사가 괴로움
인 것이다. 그럼에도 생·노·병·사는 인생에 있어 피할 수 없는 것이며, 자기존재의 기반이다. 그러
므로 이를 가리켜 고제라고 한다. ② 집제:괴로움의 원인을 나타내는 말이다. 자기가 취하는 생존이 바
로 고가 되는 것은 마음 깊이 갈애(渴愛)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모든 욕망의 근저가 되는 욕망이며
채워지지 않는 욕망이다. 갈애에는 욕애(慾愛:감각적 욕망)·유애(有愛:생존의 영속을 바라는 욕망)·
무유애(無有愛:생존의 단절을 바라는 욕망)의 세 가지가 있다. 행복을 구하는 것도 욕망의 일종이지만
갈애는 그것과는 달리 욕망의 근본에 있는 불만족성을 말한다. 이것이 인간의 불행을 일으키는 원인이
다. 그러므로 집제라는 것은 갈애를 근본으로 하는 여러 가지 번뇌이며, 괴로움의 원인이다. 따라서 집
제와 고제는 미망의 원인과 결과를 표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괴로움의 원인을 외부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부에서 발견하는 데에 불교의 태도가 잘 나타나 있다. ③ 멸제:이 갈애가
남김 없이 없어진 상태를 말하며, 이것은 이상적 경지로서 열반(涅槃)이라고 말한다. 또한 마음이 갈애
의 속박에서 벗어난 것이기 때문에 해탈(解脫)이라고도 한다. 결국 갈애에 물들지 않고 행동하는 마음
의 자유로운 상태이며 이것이 참된 즐거움이다. 열반은 멸(滅)로도 번역되기 때문에 열반을 허무로 이
해하는 사람도 있으나 멸은 갈애의 멸이지 마음 그 자체의 멸은 아니다. 갈애가 멸함에 따라 올바른 지
혜가 나타나며, 그 지혜에 의하여 알게 되는 부동의 진리가 열반이다. ④ 도제:이 고(苦)와 집(集)의
멸을 실현하는 길을 도제라고 한다. 이 수행방법은 8정도(八正道) 또는 팔성도(八聖道)로 표시된다. 8
정도란, 정견(正見)·정사(正思)·정어(正語)·정업(正業)·정명(正命)·정정진(正精進)·정념(正念)·
정정(正定)의 8가지 실천사항을 말한다. 정견은 올바른 견해로서, 있는 그대로 보는 여실지견(如實知
見)이다. 이에 의하여 자기와 세계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 즉 연기(緣起)의 도리를 알게 된다. 정견에
기초하여 올바른 사유가 생긴다. 나아가 이 생각에 의하여 올바른 말, 올바른 행동, 올바른 생활, 올바
른 노력이 행해진다. 이것은 일상생활이 정견에 기초하여 진리를 실천하는 생활이 이루어짐을 말한다.
이들에 의하여 정념이 확립된다. 정념은 올바른 주의력, 올바른 기억으로 마음을 줄곧 올바른 상태로
유지하는 마음의 힘이다. 마지막의 정정은 정견~정념에 기초하여 실현되는 마음의 통일, 즉 올바른 선
정(禪定)을 말한다. 이상의 8정도는 서로 유기적인 관련성을 가지고 있다. 올바른 선정에서 올바른 지
혜가 생기며, 또한 정견은 올바른 지혜, 즉 정견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8
정도는 점진적인 수행 단계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유기적으로 수행하는 길이다. 이러한 사제
설은 석가가 녹야원(鹿野苑)에서 다섯 비구(比丘)에게 설한 최초의 설법[初轉法輪] 내용으로 전해지고
있다.
팔정도(八正道)
중생이 고통의 원인인 탐(貪)·진(瞋)·치(痴)를 없애고 해탈(解脫)하여 깨달음의 경지인 열반의 세계
로 나아가기 위해서 실천수행해야 하는 8가지 길 또는 그 방법. 이것은 원시불교의 경전인 《아함경(阿
含經)》의 법으로, 석가의 근본 교설에 해당하는 불교에서는 중요한 교리이다. 고통을 소멸하는 참된
진리인 8가지 덕목은 ① 정견(正見):올바로 보는 것. ② 정사(正思:正思惟):올바로 생각하는 것. ③ 정
어(正語):올바로 말하는 것. ④ 정업(正業):올바로 행동하는 것. ⑤ 정명(正命):올바로 목숨을 유지하
는 것. ⑥ 정근(正勤:正精進):올바로 부지런히 노력하는 것. ⑦ 정념(正念):올바로 기억하고 생각하는
것. ⑧ 정정(正定):올바로 마음을 안정하는 것이다.
삼법인(三法印)
불교의 세 가지 근본 교의(敎義). 인(印)이란 인신(印信)·표장(標章)의 뜻으로 일정불변하는 진리를
가리키는 표지이다. ① 제행무상인(諸行無常印):온갖 물(物)·심(心)의 현상은 모두 생멸변화(生滅變
化)하는 것인데도 사람들은 이것을 불변·상존하는 것처럼 생각하므로, 이 그릇된 견해를 없애주기 위
하여 모든 것의 무상을 강조하는 것. ② 제법무아인(諸法無我印):만유의 모든 법은 인연으로 생긴 것이
어서 실로 자아인 실체가 없는 것인데도 사람들은 아(我)에 집착하는 그릇된 견해를 가지므로, 이를 없
애주기 위하여 무아라고 말하는 것. ③ 열반적정인(涅槃寂靜印):생사가 윤회(輪廻)하는 고통에서 벗어
난 이상의 경지인 열반 정적의 진상을 강조하는 것. 이 세 가지 법으로써 부처의 말씀과 마군(魔軍)의
말을 관장하는 인(印)으로 삼는다.
중도<中道(madhyama-pratipad)>
단멸(斷滅)·상주(常住), 유(有)·무(無), 고(苦)·낙(樂) 등 두 가지 대립·집착을 떠나 올바르게 판
단하고 행동하는 것으로, 즉 불교의 근본적 입장으로서 대승·소승을 통하여 중시되어온 사상. 석가의
깨달음도 최초의 설법도 이 중도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한다. 원시·부파(部派)불교에서는 고·낙
의 이변(二邊)을 떠난 실천인 팔정도(八正道)를, 또한 단·상, 유·무 등의 편견을 떠난 십이연기(十二
緣起)의 이치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인간은 고를 피하고 낙을 구한다. 안락은
고와 대립하면서 인생의 이상으로서 지고의 선이다. 여기에 고의 멸과 낙의 초월의 ‘이중부정(二重否
定)’이 있다. 이 이중부정에 의하지 않고는 진실·절대가 현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중관파에서는 성
멸(成滅)·단상(斷常)·일이(一異)·거래(去來)의 여덟 가지 대립적인 견해에서 떠날 것을 말하는 팔불
(八不) 중도를 가리킨다. 결국 공(空)을 말한다. 법상(法相)·유식(唯識)에서는 비유비공(非有非空)을,
천태종에서는 실상(實相)을, 화엄종(華嚴宗)에서는 법계(法界)를 중도로 해석한다.
열반<涅槃(nirvana)>
불교에서 수행에 의해 진리를 체득하여 미혹(迷惑)과 집착(執着)을 끊고 일체의 속박에서 해탈(解脫)한
최고의 경지. 열반이란, 산스크리트의 ‘니르바나’의 음역인데, 니원(泥洹)·열반나(涅槃那) 등으로
음역하기도 하며 멸도(滅度)·적멸(寂滅)·원적(圓寂), 또는 무위(無爲)·부작(不作)·무생(無生) 등으
로도 의역한다. nir(out)+?a?to blow)의 어원으로 해석되는 열반의 본뜻은 ‘불어서 끄는 것’ ‘불어
서 꺼진 상태’를 뜻하며, 마치 타고 있는 불을 바람이 불어와 꺼버리듯이, 타오르는 번뇌의 불꽃을 지
혜로 꺼서 일체의 번뇌·고뇌가 소멸된 상태를 가리킨다. 그때 비로소 적정(寂靜)한 최상의 안락(安樂)
이 실현된다. 현대적인 의미로는 영원한 평안, 완전한 평화라고 할 수 있다. 남방의 팔리 불교에서는
조림(稠林)이 없는 것으로, 이 경우에도 번뇌의 숲이 없어진 상태를 열반이라고 한다. 부파불교(部派佛
敎)에 이르러서는 석가불의 이상화·신격화에 따라 열반에 대한 생각도 변하여, 수행자가 아무리 노력
을 하여도 이 세상에 생존하는 동안에는 완전한 열반을 체득하기란 어려운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이 세상에 생존하는 동안에 얻어진 열반은 불완전한 것(有餘涅槃)이며, 사후에 비로소 완전한 상태에
들어간다(無餘涅槃)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석가불과는 달리 열반의 경지가 아니라 아라한
(阿羅漢:궁극의 깨달음을 얻은 사람)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대승불교에서는 유여·무여
열반 외에 본래자성 청정열반(本來自性淸淨涅槃)·무주처열반(無住處涅槃)을 주장하였다. 전자는 일체
중생의 심성(心性)이 본래 청정하다는 것으로, 진여(眞如:있는 그대로의 진리) 그 자체임을 달관하여
안심의 경지에 이르는 것을 말하며, 후자는 대승불교에서 이상으로 여기는 열반으로서 생사에도 머물지
않고 열반에도 머물지 않는 것, 즉 열반 비지원만(悲智圓滿:자비와 지혜가 원만함)·임운무작(任運無
作:아무런 조작 없이 있는 그대로 운용됨)의 불·보살의 상태를 말한다. 결국 열반이 어떤 특별한 경지
로서 실재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범부(凡夫)의 미혹이며, 열반은 유(有)도 무(無)도 아닌 공(空)으
로서 윤회나 열반이나 어떤 구분도 없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세상에서의 보살의 활동이 강조되었다.
윤회(輪廻)
생명이 있는 것, 즉 중생은 죽어도 다시 태어나 생이 반복된다고 하는 불교사상. 산스크리트의 삼사라
(samsara)를 번역한 말로, 전생(轉生)·재생(再生)·유전(流轉)이라고도 한다. BC 600년경 《우파니샤
드[優波尼沙土]》의 문헌에서 비롯되어 대중에게 전파되었다. 불교에서는 윤회하는 세계에 지옥·아귀
(餓鬼)·축생(畜生)·아수라(阿修羅)·인간·천상(天上)의 6도(六道:六趣)가 있다고 말한다. 이에 따르
면 현재 우리들 앞에 있는 축생, 예를 들어 파리나 모기 등도 전생에는 인간이었던 것이 바뀌어 태어났
는지도 모르며, 또 장차 우리들이 저승에서 파리·모기로 태어날 수도 있다는 것이다. 6도 중 어느 세
계에 태어나느냐 하는 것은 우리들 자신의 행위와 그 행위의 결과와의 총체인 업(業)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라 하며, 또한 이 업은 이승에 있는 우리들의 상식을 초월하여 판정되어, 선업(善業)에 의하여 선
의 세계에, 악업에 따라 악의 세계에 태어난다고 한다. 한편 부분적이기는 하나 소크라테스 이전의 그
리스 사상가 중에도 이 윤회전생(輪廻轉生)을 말한 이가 상당수 있었다. 예를 들면 니체의 영겁회귀(永
劫回歸)사상 등은 그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한다.
원시불교(原始佛敎)
석가 시대부터 아소카왕[阿育王:재위 BC 272?∼BC 232?] 시대까지의 불교. 초기불교라고도 한다. 석가
의 연대론에는 약 100년의 차이가 나는 두 개의 설이 있어, 이 시대를 약 100년간 혹은 200년간으로 보
고 있다. 대체로 석가의 2대 법손(法孫) 또는 그 다음 세대까지를 가리키는데, 이 시대에 석가가 교리
를 펴고 그가 죽은 뒤에 그의 가르침을 모아 이것을 포교할 제도가 확립되었다. 현재 그에 관한 자료
가운데는 신·구의 여러 가지 책들이 뒤섞여 있어 이것들을 모두 불설(佛說)이라고 말할 수는 없으나,
이른바 ‘5부(五部) 4아함(四阿含)’의 경장(經藏)과 율장(律藏)은 그 대부분이 이 시대에 만들어졌다.
불설을 거의 그대로 준봉(遵奉)하여 교단의 결속이 굳혀져 점차 교세를 넓혀 중인도 일대에서 활약하게
되었는데, 보수와 진보의 두 파로 갈라지면서, 부파불교(部派佛敎) 시대로 옮겨갔다.
소승불교<小乘佛敎(Hinayana)>
사람들을 인도하여 해탈(解脫)을 얻도록 하는 불교 유파(流派). 소승은 열소(劣小)한 수레라는 뜻으로
많은 사람이 함께 타고 피안(彼岸)에 이를 수 있는 큰 수레가 아니라고 한다. 인도의 불교사를 보면,
첫째로 석가모니 재세(在世)의 BC 6∼BC 5세기의 근본불교와, 둘째, 석가모니 멸후(滅後), 갠지스강 유
역에 교단을 넓히고 《아함경(阿含經)》 등의 원시경전이 성립된 약 2세기 간의 원시불교(여기에는 근
본불교도 포함시키는 경우도 있다), 셋째, 아소카 왕의 불교 귀의(歸依)로 불교교단이 급속히 발전 확
대됨과 동시에 교단분열이 일어났던 부파(部派)불교, 넷째, BC 2∼BC 1세기경에 대두되기 시작한 대승
불교로 대별된다. 대승불교는 부파 중에서 진보적·혁신적이었던 대중부(大衆部) 및 재가신자 집단, 즉
보살중(菩薩衆)이 중심이 되어, 그 당시까지 우세한 세력을 유지하던 전통적·보수적 불교에 대항하였
던 종교운동이며, 그때 스스로를 대승(大乘)으로 자칭하고 기성불교를 소승으로 낮추어 불렀다. 따라
서, 후자가 스스로를 소승으로 자칭하는 일은 없다. 그 기원에서 소승불교는 원시불교를 포함하여 말하
는 경우와 직접 대승운동의 상대방이 되었던 보수적인 모든 부파만을 일컫는 경우의 두 가지 용법이 있
다. 부파는 처음 불멸(佛滅) 100여 년 후 상좌부(上座部)와 대중부의 2파(根本·部)로 나뉘고, 그후 약
1세기 동안에 대중부 계통이 계속하여 그후 약 1세기 동안에 상좌부 계통이 분열하였다. 이 분열의 사
정과 명칭은 제전(諸傳)이 일치하지 않으나, 북전(北傳)의 《이부종륜론(異部宗輪論)》의 기록에 따르
면 [표]와 같다. 이 [표]에서 새로이 성립한 18부파(枝末十八部)를 근본 2부와 합해 ‘소승 20부’
라 한다. 그러나 남방소전의 《도사(島史)》에서는 불멸 후 약 100년 동안에 상좌대중부의 근본분열이
있고, 그후 약 100년 동안 대중부 계통의 5부, 상좌부 계통의 11부로 분열하여 도합 18부의 부파를 전
하고 있다. 각 부파는 자파의 권위와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해 각각의 입장에서 종래의 성전을 편집 집
대성하였는데, 이로써 경장(經藏)과 율장(律藏)이 성립되었다. 또한 이에 대한 해석·주석이 이루어지
고, 나아가 깊은 이해에 의해 체계화되어 논서가 성립하였다. 이를 아비달마(阿毘達磨)라고 부르며, 논
장(論藏)으로 총칭한다. 경·율·논의 3장은 각 부파에 의해 정비되었지만, 현재 전하는 것은 주로 스
리랑카상좌부의 3장과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에 속하는 논장에 지나지 않는다. 부파 중 가장 유력하였
던 설일체유부는 《아비달마발지론(阿毘達磨發智論)》에 의해 일체의 법이 실유(實有)라고 주장하며(法
體恒有), 그 법은 과거·현재·미래에 걸쳐 실재한다(三世實有)고 하였다. 또한 법의 체계를 5위(位)
75법(法)으로 정비하였으며, 동시에 계율을 철저히 지키고, 자기 일신의 정진, 덕목의 실천에 전념하였
다. 또한 그 수행의 단계를 세분하였을 뿐 아니라 열반(涅槃)을 유여(有餘)·무여(無餘) 열반으로 2분
하여 수행의 구극에 도달한 아라한(阿羅漢)도 유여열반에 이를 뿐이라 하였다. 이러한 설일체유부의 번
쇄한 교학은 《아비달마대비바사론(阿毘達磨大毘婆沙論)》에서 집대성되었다. 비바사는 광해(廣解)의
뜻으로 당시의 학자 또는 학파의 다수의 이견(異見)을 열거하여, 소승불교의 모든 문제를 망라하고 있
는 것으로 후에는 불론의 연구·정리가 이 학파의 주된 과제가 되고 있다. 그 외 경량부(經量部)는 설
일체유부의 삼세실유설에 대하여 과미무체설(過未無體說)을, 법체실유설(法體實有說)을 부정하고 가유
설(假有說)을 주장하였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종자설로서 종자는 식물의 종자가 발아의 능력을 내장하
고 있는 것과 같이, 우리의 업력(業力)을 업과(業果)로 이끄는 힘을 말한다. 우리의 업과를 일으키는
종자가 현세에서 내세까지 멸하지 않고 존속할 때, 이것을 세의식(細意識) 또는 일미온(一味蘊)이라 하
며, 이것이 윤회의 주체로 간주되는 것이다. 이러한 종자·훈습(熏習)은 후세의 아뢰야식(阿賴耶識) 사
상의 원류가 되는 것으로 주목된다. 또한 무루(無漏)의 종자는 범부(凡夫)에게도 내재하며, 이것이 계
발되면 불타가 된다고 하는 것은 대중부의 심성본정설(心性本淨說)에 통하며, 대승불교의 불성론(佛性
論)의 원류가 되고 있다. 이러한 경량부 계통에서 발달한 것이 하리바르만[訶梨跋摩]의 《성실론(成實
論)》 및 바수반두[世親:320∼400?]의 《아비달마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이다. 특히 후자는 그후 인
도·티베트에서도 깊이 연구되었으며, 소승불교의 전형적인 대표작으로 인정되었고, 중국에 전래되어서
는 ‘구사종’이라는 일파를 형성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경량부는 설일체유부의 설을 비판적으로 수
정하여 실유의 범위를 한정하였지만, 대개 상좌부의 실재론적인 법의해석(人無我·法有)과 실천의 자기
중심적 경향[自利]은 부정할 수 없다. 따라서 대승불교의 공격도 완전히 이 두 가지에 집중되어 각각
법무아(法無我)에서 공(空)으로, 이타(利他)에서 자비(慈悲)로 발전하였으며, 보살(菩薩)사상이 형성되
었다. 성불(成佛)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이 보살에 대해 소승불교에서는 성문(聲聞:석존의 가르침을
직접 들어 열반에 이르는 성자)과 연각(緣覺:스스로 깨달아 열반에 이르는 성자)이 이상적인 인간상이
되고 있다. 소승불교 중, 상좌부 계통은 스리랑카·미얀마·타이·라오스 등에 전해져 현재에도 민중
속에 확고한 기반을 잡고 있다. 한편 대중부 계통은 후에 대승불교로 발전하여 중국·한국·일본 등 북
방에 널리 유포되어 현재에 이르기까지 종교철학사상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아라한<阿羅漢(Arhan)>
소승(小乘)의 수행자들, 즉 성문승(聲聞乘) 가운데 최고의 이상상(理想像). 나한(羅漢)이라고도 한다.
아라한은 본래 부처를 가리키는 명칭이었는데, 후에 불제자들이 도달하는 최고의 계위(階位)로 바뀌었
다. 수행결과에 따라서 범부(凡夫)·현인(賢人)·성인(聖人)의 구별이 있는데, 잘 정비된 교학(敎學)에
서는 성인을 예류(預流)·일래(一來)·불환(不還)·아라한(阿羅漢)의 사위(四位)로 나누어 아라한을 최
고의 자리에 놓고 있다. 아라한과(果)는 더 이상 배우고 닦을 만한 것이 없으므로 무학(無學)이라고 하
며, 그 이전의 계위는 아직도 배우고 닦을 필요가 있는 단계이므로 유학(有學)의 종류로 불린다.
아쇼카왕(Asoka,?∼?)
인도 마우리아왕조의 제3대 왕(재위 BC 272?∼BC 232?). 한역불전(漢譯佛典)에는 아육왕(阿育王)·아수
가(阿輸迦)로 기록되어 있다. 그의 조부 찬드라굽타 시절에 이룩한 인도의 대부분과 아프가니스탄 남부
에 미치는 광대한 영토를 이어받아 지배자로 군림하였다. 그는 정치 이념을 내걸고 그 이념 실현에 정
열을 기울였다. 이와 같은 사실은 영역 내의 석주(石柱)나 암석에 새겨진 그의 조칙(詔勅)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이 가운데에는 아프가니스탄의 칸다하르에서 발견된 그리스어나 아마르어로 새겨진 것도 있
다. 이 조칙의 내용에는 그가 왕위에 오른 지 9년째 되던 해 인도의 남동부, 오리사 해안의 칼링가 지
방을 정복했는데, 그 전쟁의 참상을 반성하고 불교를 신봉하게 되었으며, 그 후로는 무력에 의한 정복
을 중지하였다. 그리고 모든 인간이 지켜야 할 윤리인 다르마(dharma:法)에 의한 정치를 이상(理想)으
로 삼고 이를 실현하는 데 진력하였다. 부모·어른에의 순종, 살생을 삼가는 등의 윤리를 백성들에게
장려하고, 지방관이나 신설된 관리에게 명령하여 백성들이 윤리를 철저히 지키도록 하였다. 또 도로·
관개(灌漑) 등의 공공사업을 전개하는 등 많은 치적을 남겼다. 당시 인도에는 그에게 대항하는 세력이
없었고, 북서 국경의 그리스 세력도 그들 내분 때문에 다른 지방을 침략할 힘이 없었다. 이와 같은 정
세에서 제반 생활양식이 다른 광대한 영토를 현실적으로 지배하기 위해서는 그가 취한 정책이 매우 현
명했던 것으로 볼 수 있으며, 그 이면에는 원시불교의 영향이 있었다. 또한 그의 정치이념은 인근 제국
이나 제민족에게까지 전파되어 그의 사절(使節)이 이집트·마케도니아에 이르렀다. 이와 같은 왕의 정
책은 36년 통치 후에는 점차 쇠퇴하였으나, 그의 치세(治世) 중에는 불교를 비롯한 갠지스강 유역의 고
도의 문화가 다른 지방에 급속히 퍼져 문화의 발달을 촉진시켰다. 또한 불교도들은 그를 이상적 군주로
추앙하였고, 많은 설화를 탄생시킨 주인공이 되었다.
대승불교<大乘佛敎(Mahayana)>
대승의 교리를 기본이념으로 하는 종파(宗派)의 총칭. 삼론종(三論宗)·법상종(法相宗)·화엄종(華嚴
宗)·천태종(天台宗)·진언종(眞言宗)·율종(律宗)·선종(禪宗) 등이 이에 속한다. 석가 입멸(入滅) 후
500년경(BC 100년?) 인도에서 일어난 새로운 불교운동은 그때까지 여러 파로 갈라져 자파(自派)의 주장
만이 최상의 것이라고 고집하여 온 불교의 자세를 맹렬히 비판하고, 재래불교를 소승(小乘:Hinayana)이
라 폄하(貶下)하는 한편, 대승이라고 칭하면서 이타적(利他的)인 세계관을 바탕으로 활발하고 폭넓은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대승’의 어원은 큰(maha) 수레(yana), 즉 많은 사람을 구제하여 태우는 큰
수레라는 뜻으로, 일체중생(一切衆生)의 제도(濟度)를 그 목표로 하였다. 이 운동은 종래에 출가자(出
家者:승려)만의 종교였던 불교를 널리 민중에게까지 개방하려는 재가자(在家者)를 포함한 진보적 사상
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났던 것으로,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불교 유적인 스투파(stupa:墳墓)를
관리하고 있던 사람들이 중심이 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새로운 불교운동은 그때까지 석가에게만
한정하던 보살(菩薩)이라는 개념을 넓혀 일체중생의 성불(成佛) 가능성을 인정함으로써 일체중생을 모
두 보살로 보고, 자기만의 구제보다는 이타(利他)를 지향하는 보살의 역할을 그 이상(理想)으로 삼고
광범위한 종교활동을 펴 나갔다. 이 불교운동의 전거(典據)로는 대승불교의 경전이 속속 이루어진 데
있었다. 먼저 《반야경(般若經)》이 나왔다. ‘공(空)’의 사상을 강조하는 《반야경》은 종래의 고정
관념을 타파함과 동시에, 일체의 집착(執着)으로부터의 해탈(解脫)을 실천의 중심으로 삼았다. 이어 일
체를 포함하여 ‘일승(一乘)’을 교설(敎說)하고 구원(久遠)의 본불(本佛)을 세우는 《법화경(法華
經)》, 광대한 불타[毘盧遮那佛]의 세계를 교설하는 《화엄경(華嚴經)》, 재가거사(在家居士)인 유마
(維摩)가 오히려 출가자(出家者)를 교설하는 《유마경(維摩經)》, 서방정토(西方淨土) 아미타불(阿彌陀
佛)의 세계를 찬탄하며 일체중생의 구제를 약속하는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 등이 이루어져 종래의
불교를 일신하는 이 새로운 불교운동을 뒷받침하였다. 이 경전들은 오랜 세월에 걸쳐 대승이 불교의 중
심세력이 되어가는 과정 속에서 이루어졌거니와, 2∼3세기에는 용수(龍樹)가 출현하여 이 대승불교의
사상적 기반을 확립하였다. 이어 일체중생에 불성(佛性)을 인정하는 여래장(如來藏)을 교설한 《승만경
(勝經)》 등의 경전이 이루어졌고, 또한 일체를 마음의 흐름에 응집(凝集)시키는 유식(唯識)사상의 대
두에 이어 5∼6세기에는 불교논리학인 《인명(因明)》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한편 대승불교 초기부터
일반민중의 교화를 위해 만들어진 《다라니(陀羅尼)》를 외우고 주법(呪法)을 교설하는 밀교(密敎)가
성하여 7세기 이후 불교활동의 중심이 되었는데, 밀교는 ‘대승’보다는 ‘금강승(金剛乘)’이라는 이
름으로 불리었다. 대승불교는 한(漢)나라 때 중국으로 건너가 몽골·티베트·한국·일본 등 이른바
‘북방불교(北方佛敎)’의 주류를 이루었다. 한국에는 고구려 문자왕(文咨王:재위 491∼518) 때 용수
(龍樹)의 《중관론(中觀論)》 등 삼론(三論)을 비롯한 천태(天台), 열반(涅槃) 등의 교법이 들어와 대
승불교에 대한 연구 및 교화가 활발하였다. 또한 길장(吉藏)은 삼론을 바탕으로 삼론종(三論宗)을 개종
(開宗)하는 등 한국에서의 대승불교는 마침내 독자적인 노력에 힘입어 발전의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불타<佛陀(Buddha)>
‘깨달은 자’를 뜻하는 산스크리트어 ‘붓다’의 음역. 약칭은 불(佛). 불타(佛馱)·부타(浮陀)·부도
(浮屠)·부두(浮頭)라고도 한다. 한국에서는 예로부터 부처라고 하였다. 의역(意譯)하면 깨달은 사람
(覺者), 환히 아는 사람(知者)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부처, 즉 불타는 BC 6세기쯤에 인도 카필라국
에서 출생하여 태자(太子)의 지위를 버리고 출가하여 일체의 번뇌를 끊고 우주의 참진리를 알아서 깨달
음을 이루어 중생을 위해 설법하고 깨우쳐 주었던 석가세존을 존경하여 일컫는 것이다. 그러나 불타는
깨달은 사람, 아는 사람이라는 뜻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불타 즉 부처는 석존에게만 국한된 절대
적인 명칭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불타는 일체법(一切法), 즉 우주 만법의 참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고
알아서 더할 수 없는 진리를 체득한 대성자(大聖者)를 의미하는 것이며, 그러한 대성자가 석존이기 때
문에 그를 불타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나 석존처럼 우주 인생의 진리를 정확하게 관찰하고 진
실되게 이해하여 실천 파악하고 자기화시켜, 자율적이고 자주적인 인격을 완성한 이를 가리킨다. 《대
반야경(大般若經)》 《선견율비바사(善見律毘婆沙)》 《과거현재인과경(過去現在因果經)》 《좌선삼매
경(坐禪三昧經)》 《대지도론(大智度論)》 등의 여러 경전에서 “일체지(一切智)를 얻었으므로 부처라
한다. 일체제법(一切諸法)을 알므로 부처라 한다”라는 것을 많이 보게 된다. 《대품반야경(大品般若
經)》에 “제법(諸法)의 실의(實義)를 알았으므로 부처라 하고, 제법의 실상(實相)을 얻었으므로 부처
라 하며, 다시 실의에 통달하고 참된 그대로 일체법을 알았으므로 부처라 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것
은 모두 앞에서 본 불타의 뜻과 같은 말들이다. 또 《보살본행경(菩薩本行經)》의 앞부분에 보면 “부
처[佛]란 제악(諸惡)을 완전히 끊어버리고 제선(諸善)을 모두 체득하여, 또 모든 허물이 없이, 제욕(諸
欲)이 모두 없어진 것이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번뇌와 어리석음과 어둠을 부수고 정각(正覺)을 체득
하여 이루면 불타가 된다고 하는 것은 모든 불교경전에서 볼 수 있다. 이러한 부처의 이름[名號]에는
여러 가지가 있어서 여래(如來)·응공(應供)·정변지(正遍智)·명행족(明行足)·선서(善逝)·세간해(世
間解)·무상사(無上士)·조어장부(調御丈夫)·천인사(天人師)·불(佛)·세존(世尊)의 여래십호(如來十
號)를 비롯하여, 대자비자(大慈悲者)·일체지자(一切智者)·일체견자(一切見者)·개도자(開道者)·대사
문(大沙門)·대성인(大聖人)·양족존(兩足尊)·천중천(天中天)·인중인사자(人中人獅子) 등으로 많으
며, 경전에 따라서는 60가지, 108가지, 또는 270가지나 있다. 이러한 것은 모두 부처의 위대함을 찬양
하여 표현한 이름들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불타관(佛陀觀)은 시대와 종파에 따라 일정하지 않았다. 초
기의 석존시대에는 불타라 하면 석존을 가리켰고, 그 제자들에게서 불타는 오직 석존뿐이었다. 그러다
가 나중에 대승불교 시대로 이르는 동안 불타관에도 적지 않은 변화를 가져 왔다. 불타는 보통 사람으
로서는 얻을 수 없는 덕상(德相), 즉 신체적 특성으로서 32상(相) 80종호(種好)를 갖추고 정신적인 특
수성으로서의 덕성인 십력(十力)·사무외(四無畏)·삼념주(三念住)·18불공법(十八不共法:불타 외에는
아무도 같을 수 없는 불타만의 특수한 18가지 덕성)을 성취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불타는 생신(生身)
과 법신(法身)으로 나눌 수 있는데, 부처의 육신(肉身)을 생신불(生身佛)이라 하고, 부처가 얻은 부처
의 본성인 진리[法]를 법신불(法身佛)이라고 하여, 2,500여 년 전에 80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 역사적
불타인 석존은 생신(육신)불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불타라고 할 때에는 보통 법신불을 말
하는데, 이 법신불은 늙지도 병들지도 죽지도 않는 상주불멸(常住不滅)의 존재라는 것이다. 이러한 불
신관(佛身觀)에 의하여 삼신설(三身說), 즉 법신(法身)·보신(報身:應身)·화신(化身)이 나타났다. 실
제에서 불타로서 인류 역사상에 나타나기는 오직 석존뿐이지만, 많은 불교경전에는 석존의 이전에 이미
비바시불(毘婆尸佛)·연등불(燃燈佛) 등 과거의 부처와 미륵불(彌勒佛) 등 미래의 부처와 그리고 아축
불(阿축佛)·아미타불(阿彌陀佛) 등 현재의 부처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이와 같이 많은 부처들은 모
두 역사상의 불타인 석존을 기준으로 한 것으로서, 즉 과거의 여러 부처들은 석존이 인위(因位:부처를
이루기 위해 수행하는 자리)에서 수행을 쌓을 때 받들어 공양하고 수기(授記)를 얻은 데에 관련이 되
고, 또 장래의 부처인 미륵불을 비롯한 미래의 많은 부처들은 석존이 이미 세상을 떠났으나 그 실제의
몸은 오히려 온세계에 나타나서 교화를 쉬지 않는 모습을 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일체 중생이 모두
부처의 성품[佛性]을 지녔으므로 과거부터 부처의 성품을 개발하여 성불(成佛)한 이가 많았을 것이고,
또 미래의 헤아릴 수 없는 동안에 발심수행(發心修行)하여 마땅히 성불할 자도 많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거·현재·미래와 온세계에 모래알같이 헤아릴 수 없는 부처들이 출현한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많은 부처가 출현하지만 이는 모두 큰 법신불일 뿐이다. 그리고 모든 부처
는 세 가지의 공통된 것이 있으니, 어느 부처를 막론하고 모두 수행을 쌓는 것이 같고, 법신이 같고,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 같다. 부처(불타)는 스스로 깨닫고, 남을 깨닫게 하여, 깨달음의 활동이 언제나
가득하여 부족함이 없이 원만무애(圓滿無碍)하다. 즉, 자기도 깨닫고 남도 깨우치는 온전한 인간상이
다.
아미타불(阿彌陀佛, Amitayus Buddha)
대승불교에서, 서방정토(西方淨土) 극락세계에 머물면서 법(法)을 설한다는 부처. 아미타란 이름은 산
스크리트의 아미타유스(무한한 수명을 가진 것) 또는 아미타브하(무한한 광명을 가진 것)라는 말에서
온 것으로 한문으로 아미타(阿彌陀)라고 음역하였고, 무량수(無量壽)·무량광(無量光) 등이라 의역하였
다.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에서는, 아미타불은 과거에 법장(法藏)이라는 구도자(보살)였는데, 깨달음
을 얻어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원(願)을 세우고 오랫동안 수행한 결과 그 원을 성취하여 지금부터 10겁
(劫) 전에 부처가 되어 현재 극락세계에 머물고 있다는 것이다. 이 부처는 자신이 세운 서원(誓願)으로
하여 무수한 중생들을 제도하는데, 그 원을 아미타불이 되기 이전인 법장보살 때에 처음 세운 원이라고
하여 본원(本願)이라고 한다. 모두 48원(願)인데, 이 48원의 하나하나는 한결같이 남을 위하는 자비심
에 가득한 이타행(利他行)으로 되어 있어 대승보살도(大乘菩薩道)를 이룩하고 있는 이 부처의 특징을
말해주고 있다. 그 가운데 13번째의 광명무량원(光明無量願)과 15번째의 수명무량원(壽命無量願)은 아
미타불의 본질을 잘 드러내 주고 있으며, 18번째의 염불왕생원(念佛往生願)은 “불국토(佛國土)에 태어
나려는 자는 지극한 마음으로 내 이름을 염(念)하면 왕생(往生)하게 될 것”이라고 하여, 중생들에게
염불(念佛)을 통한 정토왕생의 길을 제시해 주고 있다.
아축불(阿축佛, Aksobhya-Buddha)
사방현재불(四方現在佛)의 하나. 동방의 현재불, 남방 보상불(寶相佛), 서방 무량수불(無量壽佛), 북방
미묘성불(微妙聲佛)과 더불어 사방 현재불을 이룬다. 아축비(阿?·아추비야(阿芻耶)·아축바(阿몹? 등
으로도 음역하며, 무동(無動)·부동(不動)·무노불(無怒佛) 등이라 의역한다. 불교의 붓다(부처)관(觀)
으로서 붓다는 역사적 인물인 석가 이외에 과거·현재·미래에 걸쳐 무수한 붓다가 있어 각각 설법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아축불국경(阿멓擄覲?》에 의하면 아축은 과거 동방의 아비라타[阿比羅提] 나라
의 대일여래(大日如來) 아래에서 발심(發心)을 하였다. 어떠한 사물에도 마음이 동요하지 않고 절대로
화내지 않겠다는 무진에(無瞋)의 서원을 하고 그 수행에 따라 동방세계에서 성불(成佛)하여 아축불이
되었으며, 현재도 설법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법화경(法華經)》의 화성유품(化城喩品)에는 대통지승
불(大通知勝佛)의 16왕자 중 제1왕자인 지적(智積)이 동방세계에서 성불하였다고 쓰여 있다. 또한 《비
화경(悲華經)》에서는 미타(彌陀)의 전신인 무쟁념왕(無諍念王)의 1,000명의 왕자 중 제9왕자가 아축으
로서 동방 묘락국(妙樂國)에서 성불하였다고 한다. 아축불국이란 곧 이 동방세계를 가리킨다. 밀교에서
는 그를 금강계(金剛界) 5불의 하나로서 대원경지(大圓鏡智)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한다.
미륵신앙(彌勒信仰)
이상적인 복지사회를 제시하는 미래불로서의 미륵을 믿는 신앙. 크게 미륵보살이 주재하는 도솔천에 태
어나기를 원하는 도솔천 상생신앙과, 말세적인 세상을 구제하러 미륵이 하생하기를 바라는 미륵하생신
앙의 2가지 흐름으로 나누나 근본적으로는 이상세계를 제시하는 미륵의 대승설법이 이루어지는 복지사
회에의 염원에서 나온 불교적 이상사회관으로 볼 수 있다. 먼저 인도에서는 현재까지 남아 있는 미륵보
살상을 통해 간다라 미술의 유입기인 BC 2세기경부터 모든 중생의 이익을 원하는 미륵상이 조성되었음
을 알 수 있고, 중국의 경우 현재 남아 있는 룽먼[龍門]석굴의 미륵상들을 통해 6세기 북위 불교의 미
륵신앙 열기를 추정할 수 있다. 불교 경전에 등장하는 여러 보살들에 대한 신앙 중에서 미륵보살에 대
한 신앙이 가장 오래되었고, 또한 미륵의 명칭은 초기 경전에서 후기 경전까지 끊이지 않고 나오기 때
문에 대중들에 대한 영향도 깊다. 특히 말세사상과의 연관은 정치사회적으로 소외된 민중들에게 부각되
어 사회 모순을 해결짓는 구세주로서의 미륵을 갈구하는 사회개혁 이념으로서의 역할도 하였다. 한국의
초기 불교 수용에서부터 전래된 미륵신앙은 특히 신라와 백제에서 국가 통치 이념으로서 응용되어 백제
의 무왕은 익산 미륵사의 창건으로 왕권을 강화하며, 신라 진흥왕은 왕자의 이름을 금륜과 동륜으로 지
어 전륜성왕(轉輪聖王)의 이상적인 치세를 흠모하는 정치를 펼치며, 신라의 화랑 또한 미륵의 화현(化
現)인 국선(國仙)을 따르는 청년집단으로 결성되어, 고대 이상세계를 건설하는 주체로 형성되었다. 또
한 미륵경전에서 강조된 10가지 착한 행위는 참회를 통해 지난 죄업을 소멸하는 수행을 낳게 되며,
《삼국유사》에 나오는 노힐부득(努p夫得)의 현신성도(現身成道) 설화는 대중 구제적인 방편과 함께 자
신을 연마하는 미륵신앙의 정점을 보여준다. 후삼국시대 궁예의 경우는 말세적인 민심을 이용하여 자신
이 미륵이라 하여 일시적인 대중의 호응을 얻기도 하는데 이 또한 미륵하생의 원용이다. 근세 한국에서
일어난 증산교 및 용화교 등도 사회 갈등기에 일어나는 민중의 소망을 사회구제적인 미륵신앙을 통해
해결하고자 하는 종교운동이다.
보살<菩薩(Bodhisattva)>
산스크리트 보디사트바의 음사(音寫)인 보리살타(菩提薩陀)의 준말. 보디(bodhi)는 budh(깨닫다)에서
파생된 말로 깨달음·지혜·불지(佛智)라는 의미를 지니며, 사트바(sattva)는 as(존재하다)를 어원으로
생명 있는 존재, 즉 중생(衆生)·유정(有情)을 뜻한다. 보살의 일반적인 정의(定義)는 ‘보리를 구하고
있는 유정으로서 보리를 증득(證得)할 것이 확정된 유정’ ‘구도자(求道者)’ 또는 ‘지혜를 가진 사
람’ ‘지혜를 본질로 하는 사람’ 등으로 풀이할 수 있다. 보살이 모든 사람을 뜻하게 된 것은 대승불
교(大乘佛敎)가 확립된 뒤부터이지만, 그 용어와 개념의 시초는 BC 2세기경에 성립된 본생담(本生譚:석
가의 前生에 관한 이야기)에서였다. 본생담은 크게 깨달음을 얻은 석가를 신성시하고, 그 깨달음의 근
원을 전생에서 이룩한 갖가지 수행에서 찾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살은 구도자로서의 석가를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특히 연등불수기(燃燈佛授記:석존이 연등불로부터 불타가 될 것이라는 예언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계기로 하여 석가를 깨달음을 구하는 사람, 즉 보살이라 일컫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같이
단수로서 석가만을 가리키던 보살이 복수로서 중생을 뜻하게 된 것은 본생담의 석가가 출가(出家) 비구
(比丘)에 국한되지 않고 왕·대신·직업인·금수(禽獸)이기도 하였으며, 나아가 과거·현재·미래세계
에 다수의 부처가 있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석가보살과 같은 특정의 보살만이 아니라,
누구든지 성불(成佛)의 서원(誓願)을 일으켜 보살의 길로 나아가면 그 사람이 바로 보살이며, 장차 성
불(成佛)할 것이라는 이른바 ‘범부(凡夫)의 보살’ 사상이 생겨났다. 이러한 보살사상은 공(空) 사상
과 결합하여 하나의 절대적 경지에 이르렀으며, 육바라밀(六波羅蜜)·사무량심(四無量心:慈·悲·喜·
捨)·무생법인(無生法忍) 등의 실천을 근간(根幹)으로 대승불교의 기본적인 축(軸)이 되었다. 대승불교
의 보살사상 중 기본적인 두 개념은 서원(誓願)과 회향(回向)이다. 그것은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서원이
며, 자기의 쌓은 바 선근공덕(善根功德)을 남을 위해 돌리겠다는 회향이다. 보살은 스스로 깨달음을 여
는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 머물러 일체중생을 먼저 이상세계[彼岸]에 도달하게 하는 뱃사
공과 같은 자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보살도 그 수행단계에 의하여 몇 가지 계위(階位)로 분류할
수 있다. 즉 초발심(初發心:최초단계로서의 진리를 추구함), 행도(行道: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려고 수
행함)·불퇴전(不退轉:도달한 경지에서 물러나거나 수행을 중지하는 일이 없음)·일생보처(一生補處:한
생이 끝나면 다음에는 부처가 됨)의 4단계가 있는데, 후에 《화엄경》에서는 십지(十地:歡喜·離垢·發
光·焰慧·難勝·現前·遠行·不動·善慧·法雲地)로 정리되기도 하였다. 보살의 개념이 확대되어 미륵
불(彌勒佛)이 탄생하였다. 미륵불은 미래에 성불할 자로서, 현재는 도솔천(兜率天)에 미륵보살로서 거
주한다는 미래지향의 미륵신앙이 나타났다. 또한 정토사상과 관련하여 아촉불(阿멓?아촉보살)·아미타
불(阿彌陀佛:法藏 보살)의 관계가 성립되었다. 그리고 자비와 절복(折伏)의 신앙대상으로 관음(觀音)보
살과 대세지(大勢至)보살, 《반야경》 계통의 문수(文殊)보살, 《화엄경》 계통의 보현(普賢)보살이 성
립되고, 이어 지장(地藏)보살 등 수많은 보살들이 나타났다. 또한 보살은 실재했던 고승(高僧)이나 대
학자에 일종의 존칭과 같이 사용되어 인도의 용수(龍樹)·마명(馬鳴)·제바(提婆)·무착(無着)·세친
(世親) 등도 보살이라 불렀으며, 중국에서는 축법호(竺法護)가 돈황(敦煌)보살로, 도안(道安)이 인수
(印手)보살로, 그리고 한국에서는 원효(元曉) 등이 보살의 칭호를 받았다. 나아가 ‘범부(凡夫)의 보
살’은 재가(在家)·출가(出家)를 불문하고 모든 불교도 전체로 확대되었는데, 특히 중기 대승불교 이
후 성했던 여래장(如來藏)·불성(佛性)사상과 표리관계를 이루며, 불─보살─일체중생(산천초목도 포
함)의 활동은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위로는 보리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제도한
다)’‘자미도 선도타(自未度 先度他:자신보다는 다른 사람을 먼저 제도한다)’라는 말을 낳았으며, 불
교활동의 중요한 추진력이 되었다.
6바라밀<六波羅蜜(Sadparamita)>
생사(生死)의 고해를 건너 이상경인 열반(涅槃)의 피안에 이르는 여섯 가지 덕목(德目). 보살이 수행하
는 6가지의 바라밀법을 말한다. ① 보시(布施), 즉 단나바라밀(檀那波羅蜜):재시(財施)·무외시(無畏
施)·법시(法施) 등 널리 자비를 베푸는 행위, ② 지계(持戒), 즉 시라(尸羅)바라밀:재가(在家)·출가
(出家)·소승·대승 등의 일체 계행(戒行), ③ 인욕(忍辱), 즉 찬제(:提)바라밀:여러 가지로 참는 것,
④ 정진(精進), 즉 비리야(毘梨耶)바라밀:항상 수양에 힘쓰고 게으르지 않는 것, ⑤ 선정(禪定), 즉 선
나(禪那)바라밀:마음을 고요하게 통일하는 것, ⑥ 지혜(智慧), 즉 반야(般若)바라밀:사악한 지혜와 나
쁜 소견을 버리고 참지혜를 얻는 것이다.
중관파<中觀派(Madhyamika)>
중도(中道)를 지향하는 인도 대승불교의 중요한 학파. 용수(龍樹)의 《중론(中論)》(중관론의 약칭)을
근저로 하여 반야 공관(般若空觀)을 선양한 학파로서 후에 유식(唯識)을 설하는 유가행파(瑜伽行派)와
함께 인도 대승불교의 2대 사상이 되었다. 《중론》의 설은 모든 존재가 연기성(緣起性)이기 때문에 그
자체의 고유한 자성(自性)이 없으므로 공(空)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공은 유·무의 극단이 없는 것이
므로 중도라는 것을 올바르게 관찰하는 데에 깨달음이 있다고 한다. 용수의 제자 제바(提婆)는 《백론
(百論)》 등을 저술하여 외도(外道)와 소승의 교의를 논파하고, 제바의 제자 나후라발타라(羅羅跋陀羅)
는 《중론》의 팔불(八不)의 의의를 주석하였다. 그러나 중관파가 학파로서 명확한 형태를 취한 것은
불호(佛護) 시대부터인데, 고학의 근본은 무에 집착하는 일이 없는 공의 입장이다. 불호 이후 공의 인
식방법에 대한 의견이 엇갈려 2파로 나뉘었는데, 불호의 계통인 필과성공파(必過性空派) 또는 귀류논증
파(歸謬論證派)와 청변(淸辨)으로 대표되는 자립논증파(自立論證派)이다. 전자로부터는 월칭(月稱)이
나와 중론의 주석서 《Prasannapada》를 쓰고, 《중관에의 입문》을 저술하였는데, 그의 사상은 티베트
에 널리 유포되었다. 후자에는 같은 시기에 관서(觀誓)가 나오고, 또한 이어서 적천(寂天)도 《대승집
보살학론(大乘集菩薩學論)》 《입보리행론(入菩提行論)》 등의 중요한 논서를 저술하였다. 8세기에는
적호(寂護), 연화계(蓮華戒)가 중관파와 유가행파를 종합한 입장에서 중관파를 발전시켰다. 또한 그 계
통은 티베트로 전파되어 번영하였는데, 그 대표자가 아티샤(982∼1055)이고, 중국에서는 용수의 《중
론》 《십이문론(十二門論)》, 제바의 《백론》을 소의(所依)로 하는 삼론종(三論宗)이 발전하였다.
반야사상<般若思想(prajna)>
반야경전을 근본으로 사물의 실상을 파악하고자 하는 대승불교 사상. 초기 《도행(道行)반야경》의 성
립에서 시작된 반야바라밀의 강조는 초기 불교 경전에 나타나는 반야 개념의 정립과 함께 깨달음을 구
하는 보살의 6가지 덕목 중 하나로 시작되었으나, 반야의 인식론적 중요성이 공(空)사상의 대두와 함께
부각되어 본래 자성(自性)이 없는 공관(空觀)의 체득을 위해서는 반야바라밀의 수행이 필수적이라 하였
다. 사물에 대한 분별심 없는 직관을 통해 보다 그 사물을 있는 그대로 파악할 수 있다고 보는 반야사
상은 그 후 발전되어 염불 내지 신주(神呪)·진언(眞言)에도 응용되어 대표적인 밀교경전인 《이취경
(理趣經)》 《대일경(大日經)》 《금강정경(金剛頂經)》의 근본사상이 되었으며, 《반야경》이 중국에
전래되어서는 반야의 오묘한 이치가 중국 도교의 근본과 비슷한 점이 많아 중국에 반야사상이 유행할
수 있는 기반이 되기도 하나, 한편으로는 중국적으로 반야사상을 이해하는 격의(格義)불교를 일시동안
낳기도 한다. 《반야경》을 주석한 형태인 중관불교는 공사상으로 표현되는데, 유식사상과 함께 인도
대승교학의 2대 흐름을 하나로 중국 선불교의 6조 혜능의 깨우침도 반야사상에 입각한 《금강경》을 독
송을 듣고 이루어졌음을 볼 때 중국 불교의 경우는 교학뿐만 아니라 실천수행에도 반야사상이 근간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공<空(sunya)>
공·영(零)·무(無) 등을 뜻하는 범어 ‘수냐’의 한역어(漢譯語). 순야(舜若)·순야다(舜若多) 등으로
음역(音譯)되는데, 3가지 의미로 쓰인다. 인도 수학에서 수냐는(sunya)는 영(零)을 의미하는 말로, 없
는 것, 비어 있는 것, 결핍되어 있는 것을 가리킨다. 둘째 불교, 특히 대승불교(大乘佛敎)에서 반야사
상(般若思想) 계통의 중심사상이 된 말이다. 즉, 모든 존재는 인연(因緣)에 의하여 생겨난 것이므로,
고정된 실체(實體)는 없으며, 연기(緣起)에 의하여 존재하는 연기적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을 뜻한다.
셋째, 부정사(否定詞)로서 없다[無]는 의미로 사용될 때 이것은 존재 자체의 부정을 나타내는 것이 아
니고, 존재하는 것은 자체(自體)·실체·아체(我體)·본체(本體)라고 할 만한 것이 없음을 나타낸다.
즉, 아(我)나 세계를 구성하는 것의 영구적 항존성을 인정하는 견해를 잘못된 것으로 부정한다. 말하자
면 고정적 실체의 부정이다. 이러한 공(空)의 사상은 원시불교에서부터 있었으나 대승불교, 특히 용수
(龍樹:Nagarjuna)의 반야사상에서 핵심이 되었다.
용수<龍樹(Nagarjuna, 150?~250?)>
인도의 불교학자. 원이름 나가르주나(나가:용, 아가르주나:나무 이름). 남인도 출생. 북인도로 가서 당
시 인도의 사상(思想)을 공부하고, 불교 특히 신흥 대승불교(大乘佛敎)사상을 연구, 그 기초를 확립하
였다. 때문에 제21의 서가(書家), 8종(八宗)의 조사(祖師)라고 일컫는다. 《중론(中論)》에서 전개한
공(空)의 사상은 그 이후의 모든 불교사상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즉, 실체(實體:自性)를 세우고, 실체
적인 원리를 상정(想定)하기 위한 바람직한 자세를, 철두철미한 비판을 가하면서, 일체의 것이 다른 것
[他]과의 의존·상대·상관·상의(相依)의 관계[緣起] 위에서만 비로소 성립된다고 주장하였다. 그 상
관관계는 긍정적·부정적·모순적 상태 등 여러 형태로 나타나는데, 어느 것에서도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고 공의 상태에 이를 수 없는 반면, 구극(究極)의 절대적 입장[眞諦·第一義諦]은 우리의 일상적
진리[俗諦 즉, 世俗諦]로만 성립할 수 있으며, 이를 초월해서는 논의의 대상이나 표현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공의 입장에서 본다면 어느 한 쪽에도 치우침이 없는 중도적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후
세에 그의 학파를 가리켜 중관파(中觀派)라고 불렀다. 주요 저서에 《중론》(4권) 외에 《회쟁론(廻諍
論)》 《광파론(廣破論)》 《십주비바사론(十住毘婆沙論)》 《공칠십론(空七十論)》 등이 있으며, 《대
지도론(大智度論)》(100권) 《십이문론(十二門論)》 등은 그의 저작설에 의문점이 있다.
유식학파<唯識學派(vijuaptimatravadin)>
인도 대승불교의 한 학파. 6파철학의 일파이기도 하다. 수행방법으로서 유가행(瑜伽行), 즉 유가(요가)
를 중요시하므로 유가행파(派) 또는 유가파라고도 한다. 파조는 파탄잘리. 대승불교의 다른 한 파인 중
관파(中觀派)와 대립하면서 300∼700년간에 발전·변천하였다. 이 학파의 초기 경전은 《해심밀경(解深
密經)》과 《대승아비달마경(大乘阿毘達磨經)》이고 그 성립연대는 300년경으로 추정된다. 그 후 미륵
(彌勒)이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중변분별론(中邊分別論)》 《대승장엄경론송(大乘莊嚴經論
頌)》 등을 지어 그 학설을 발전시켰다. 미륵의 가르침을 받은 무착(無著)은 《섭대승론(攝大乘論)》
《현양성교론(顯揚聖敎論)》 등을 저술하고, 아뢰야식(阿賴耶識)을 근본으로 하는 인간의 의식구조 및
유식무경(唯識無境), 유식관의 실천에 대한 조직적인 학설을 정립하였다. 무착의 동생이며 제자가 된
세친(世親)은 미륵·무착의 논서들을 주석하여 많은 저작을 하였으며, 또한 종래의 여러 사상을 집성하
여 《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을 지어 유식사상을 대성하였다. 세친 이후는 《유식삼십종》의 해석을
중심으로 학파가 발전하였다. 덕혜(德惠)의 뒤에 안혜(安慧)가 나와 많은 주석서를 썼는데, 그 계통에
서 조복천(調伏天)이 나왔다. 또한 안혜와 거의 같은 계통의 진제(眞諦)는 중국에 들어가 많은 경·론
을 번역하였는데, 특히 《섭대승론》과 석(釋)을 번역·강의하여 그 문하에서 섭론종(攝論宗)이 성립·
발전하였다. 한편 진나(陳那)는 논리학[因明]을 대성하였는데, 그 계통에서 무성(無性)·호법(護法)이
나왔으며, 호법은 《성유식론(成唯識論)》 등을 지어 유식설을 발전시켰는데 이것이 계현(戒賢)에 의해
계승되었다. 구법(求法)차 인도에 갔던 현장(玄)은 계현에서 공부하고 귀국하여 《성유식론》 및 그 외
의 많은 유식학파의 경·론을 번역하였다. 그의 문인(門人) 규기(竅基)는 법상종(法相宗)을 개창하였으
며, 또한 유식학파에는 난타(難陀)·승군(勝軍)의 계통도 있으며, 논리학 계통으로는 상갈라주(商羅
主)·법칭(法稱) 등이 있다.
선(禪)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통일하여 무아정적(無我靜寂)의 경지에 도달하는 정신집중의 수행(修行)방법.
선은 팔리어(語) 자나(jhana)의 음역어로, 완전한 음사인 선나(禪那)의 준말이다. 산스크리트의 디야나
(dhyana)는, 타연나(馱衍那)로 음역한다. 이를 정(定)·정려(靜慮)·기악(棄惡)·사유수(思惟修) 등으
로 의역하며, 음사와 의역을 합하여 선정(禪定)이라고도 한다. 선사상(禪思想)이 인도에서 발생한 것은
아리아인(人)이 인도에 침입하기(BC 1300년경) 이전으로 생각된다. 인도 원주민의 것인 인더스문명(BC
2800∼BC 1800년경)의 유적지 모헨조다로에서 발굴된 인장(요가 수행을 하고 있는 시바신의 문양이 새
겨져 있음. BC 2500년경)이나 석제의 흉상(선정에 들어가 있는 요가 수행자의 모습. BC 2000년경)이 이
를 말해준다. 따라서 아리아인의 요가[瑜伽]사상은 이를 수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아리아인의 경전
《리그 베다》(BC 1200∼BC 800 편찬)에 보이는 요가라는 말은 후대에서와 같은 수행방법의 의미로는
사용되지 않았지만, 《우파니샤드》에 이르러서는 초자연적 신통력을 얻기 위한 방법으로서 요가가 실
천되는 경향이 나타났다. 요가는 심사(深思)·묵상(默想)에 의해 마음의 통일을 구하는 방법으로서, 정
신과 육체의 이원론의 입장에서 육체를 괴롭힘으로써 정신의 자유를 얻으려는 고행(苦行)사상과 결부되
어 특이하게 발전하였다. 이러한 사상이 체계화되어 《카타카 우파니샤드》 및 《마이트라야나 우파니
샤드》 등에서는 브라만(brahman:우주의 원리)과 아트만(atman:개인의 원리)을 인식하는 수단, 브라만
과 일치되기 위한 실천으로 제시되고 있다. 이러한 요가사상은 불교에서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아니
었으나 불교에서는 불교 특유의 선사상을 발전시켰다. 석가모니가 출가한 후 처음에는 두 선인에게서
당시의 최고의 선정을 배웠지만, 선정은 육체에 고통을 주어 사후의 해탈(解脫)을 구할 뿐, 현세에서의
해탈을 이룰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되어, 이를 버리고 홀로 명상에 잠겨 깨달음을 얻었다는 사실이 그
러한 상황을 입증해준다. 즉 선정은 신심일여(身心一如)의 입장에서 일상생활 속에 해탈의 생활을 실현
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선정설은 원시불교 이래 매우 중요한 덕목이 되어 왔다. 불교인이 기본
적으로 수행해야 할 삼학(三學:戒·定·慧), 사무량심(四無量心:慈·悲·喜·捨), 사념처(四念處:身·
愛·心·法의 네 염처), 그리고 사제(四諦:苦·集·滅·道의 네 진리), 팔정도(八正道:正見·正思·正
語·正業·正命·正精進·正念·正定) 등이 모두 선(禪)수행 방법의 하나로 간주되고 있다. 이러한 선
정을 설명하는 형식으로 원시불교는 사선(四禪:초선·제2선·제3선·제4선), 팔등지[八等至:사선+四無
色定(空無邊處·識無邊處·無所有處·非想非非想處)], 구차제정(九次第定:사선+사무색정+滅盡定)을
들고 있다. 부파(部派)불교에서는 선정을 학문적으로 조직·해설하고 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은 상
기한 원시불교의 9종 이외에, 삼등지(三等持:空등지·無相등지·無願등지), 식염관(食厭觀), 계차별관
(界差別觀), 오정심관(五停心觀:不淨觀·慈悲觀·因緣觀·界分別觀·數息觀) 등인데, 그 공통의 특색은
‘실재관(實在觀)’에 의해 고정화되었다는 점과, 또한 현실생활로부터 격리된 승원(僧院) 중심의 선정
이 행해지는 경향이었다. 그러나 대승불교에서는 이러한 경향을 비판하고, 이타(利他)의 정신에 입각한
행위로서의 선바라밀(禪波羅蜜)이 강조되어 선정이 능동적인 것으로 되었다. 이러한 점은 지(止)와 관
(觀)이 동시에 수행되어야 한다는 점에 잘 나타나 있다. 원래 ‘지’는 선정을, ‘관’은 지혜, 즉 반
야(般若)를 의미한다. 그러나 특히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서는 진여연기(眞如緣起)에 근거한 자
리(自利)·이타(利他)를 삼매(三昧)의 체험으로 파악하고 있다. ‘지’는 자리를 철저히 하는 것이며,
‘관’은 이타·교화의 활동을 철저히 하는 것이다. 전자에서는 소승적 선관을 답습하면서도, 후자에서
생사의 고해에 빠진 중생을 관조하여 대비관(大悲觀)을 갖고, 그들을 구제하려는 서원(誓願)을 세운다.
한편, 대승불교에서는 선정의 단계를 여러 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대지도론(大智度論)》의 외도선(外
道禪)·성문선(聲聞禪)·보살선(菩薩禪), 《능가경(楞伽經)》의 우부소행선(愚夫所行禪:외도·성문·연
각의 선)·관찰의선(觀察義禪:法無我, 반야경의 空, 즉 객체는 모두 실체가 없다는 의미를 관찰하는
선)·반연여선(攀緣如禪:모든 분별을 떠남)·여래선(如來禪:일체중생의 구제에 전념하는 선정) 등과,
《선원제전집도서(禪源諸詮集都序)》의 외도선·범부선(凡夫禪)·소승선·대승선·최상승선(最上乘禪)
등으로의 구분이 그것이다. 이같은 대승불교의 선사상이 중국에 전래되어 새로운 중국사상으로서의 선
사상이 형성되어, 현재 일반적으로 선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사상이 완성되었다. 명상하는 수행방법으
로서의 선이 인도에서 중국에 전해진 것은 후한시대(後漢時代:25∼220)로 보이지만, 북위시대(北魏時
代:386∼534)의 달마(達磨)에 의해 전해진 선은 《능가경》에 의한 이타적·능동적 선이었다. 달마의
사상은 그의 저서인 《이입사행론(二入四行論)》에 나타난 바와 같이 벽관(壁觀)으로 유명하다. 이것은
외부로부터의 객진(客塵:번뇌)과 작위적 망념(作爲的妄念)이 침입하지 않는 것을 벽에 비유한 것으로
서, 본래의 청정한 마음을 직관(直觀)한다는 것이다. 석가의 계통은 불타의 제자 마하가섭(摩訶迦葉)
이래 28조가 상승되어 달마에 이르렀는데, 중국에 전래되어 달마 → 혜가(慧可) → 승찬(僧璨) → 도신
(道信) → 홍인(弘忍) → 혜능(慧能)으로 이어졌다. 중국의 선은 중국인의 강한 현실중심주의 위에 지
관·여래선 등의 영향으로 일상생활 속에 실현되어야 하는, 이른바 행(行)·주(住)·좌(坐)·와(臥)의
생활선(生活禪)으로 전개되었다. 중국선의 근본기치인 불립문자(不立文字)·교외별전(敎外別傳)·직지
인심(直指人心)·견성성불(見性成佛)은 이러한 입장에서 생겨난 것이다. 또한 선체험을 설명하기 어려
운 점, 개별성을 중시하는 입장에서 중국 선종에서는 사자(師資:스승과 제자) 관계가 매우 중시되었다.
그리하여 조사(祖師)의 권위는 어떤 경우 여래(如來) 이상으로 중시되어 조사선(祖師禪)으로 불리기까
지 하였으며, 조사의 언어·행동을 금과옥조로 하고, 그것을 수단으로 하여 좌선의 목적을 달성하려 하
였다. 이것이 정형화(定型化)되어 많은 공안(公案, 또는 話頭)을 낳았는데, 이를 간화선(看話禪)이라고
한다. 선은 이와 같이 그 원류는 인도이고 인도에서 발전한 것이지만 꽃은 중국에서 피웠다. 선사상은
중국사상과 접촉하여 송학(宋學)과 같은 철학이 생겨나는 원인이 되었으며, 예술·문학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신라 때에 한국에 전래되어, 고려시대에는 9산선문(九山禪門)으로 발전하였고, 지눌(知訥)과
같은 고승을 낳았다. 오늘날의 한국 불교도 크게 보아 선종이라 할 수 있다.
달마<達磨(Bodhidharma, ?∼528 ?)>
중국 남북조시대의 선승(禪僧). 중국 선종(禪宗)의 창시자. 범어(梵語)로는 보디다르마이며 보리달마
(菩提達磨)로 음사(音寫)하는데, 달마는 그 약칭이다. 남인도(일설에는 페르시아) 향지국(香至國)의 셋
째 왕자로, 후에 대승불교의 승려가 되어 선(禪)에 통달하였다. 520년경 중국에 들어와 북위(北魏)의
뤄양[洛陽]에 이르러 동쪽의 쑹산[嵩山] 소림사(少林寺)에서 9년간 면벽좌선(面壁坐禪)하고 나서, 사람
의 마음은 본래 청정하다는 이(理)를 깨달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이 선법(禪法)을 제자 혜가(慧可)에게
전수하였다. 그의 전기는 분명하지 않으나, 최근 둔황[敦煌]에서 출토된 자료에 따르면, 그의 근본사상
인 ‘이입사행(二入四行)’을 설교한 사실이 밝혀졌는데, 오늘날의 학계의 정설로는, 달마는 《사권능
가경(四卷楞伽經)》을 중시하고 이입(二入)과 사행(四行)의 가르침을 설파하여 당시의 가람불교나 강설
불교(講說佛敎)와는 정반대인 좌선을 통하여 그 사상을 실천하는 새로운 불교를 강조한 사람이다.
혜능<慧能(638∼713.8)>
중국 당(唐)나라의 승려. 중국 선종(禪宗)의 제6조로서, 육조대사(六祖大師)라고도 한다. 속성 노(盧).
시호 대감선사(大鑑禪師). 난하이[南海] 신싱[新興] 출생. 집이 가난하여 나무를 팔아서 어머니를 봉양
했는데, 어느 날 장터에서 《금강경(金剛經)》 읽는 것을 듣고 불도에 뜻을 두어, 무진장(無盡藏) 비구
니가 《열반경(涅槃經)》을 듣고 곧 그 뜻을 이해하자, 치저우[州] 황메이[黃梅]로 제5조인 홍인(弘忍)
을 찾아가 노역에 종사하기를 8개월, 그런 다음에야 의법(衣法)을 받았다. 676년 난하이 법성사(法性
寺)에서 지광(智光)에게 계(戒)를 받고, 이듬해 사오저우[韶州] 차오치[曹溪]에 있는 보림사(寶林寺)로
옮겨 법을 넓혔으며, 그 곳의 자사(刺使) 위거(韋據)의 청을 받고 대범사(大梵寺)에서 설법하였다. 신
수(神秀)와 더불어 홍인 문하의 2대 선사로서, 후세에 신수의 계통을 받은 사람을 북종선(北宗禪), 혜
능의 계통을 남종선(南宗禪)이라고 하였는데, 이른바 오가칠종(五家七宗)은 모두 남종선에서 발전하였
다. 사법(嗣法)의 제자에 하택 신회(荷澤神會)·남양 혜충(南陽慧忠)·영가 현각(永嘉玄覺)·청원 행사
(靑原行思)·남악 회양(南岳懷讓) 등 40여 명이 있었다. 그의 설법을 기록한 것을 《육조단경(六祖壇
經)》이라고 한다.
간화선<看話禪>
화두(話頭)를 근거로 수행하는 참선법. 화(話)란 화두의 준 말이며, 회두란 고칙(古則) 공안(公案)의
첫마디를 화두 하나로 해결하면 차례로 다음 화두를 들어 그것을 해결하며, 철저한 큰 깨달음을 목표로
하는 선풍을 말한다. 묵조선(默照禪)이라는 평을 받은 조동종(曹洞宗)의 선풍에 대한 임제종(臨濟宗)의
선풍이 그것이다. 송(宋)나라 때 조동종의 굉지 정각(宏智正覺)이 묵조선을 표방하고 나오자, 임제종의
대혜 종고(大慧宗) 일파가 그것을 비난하면서 화두를 참구(參究)함으로써 평등일여(平等一如)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묵조선(默照禪)
불교에서 묵묵히 좌선(坐禪)하여 영묘(靈妙)한 마음의 작용을 일으킨다는 선풍(禪風). 간화선(看話禪)
과 대비되는 표현법으로, 조동종(曹洞宗)의 선법이다. 이 명칭은 남송(南宋) 임제종파(臨濟宗派)의 종
고(宗)가 조동종(曹洞宗) 정각(正覺)이 《묵조명(默照銘)》을 펴낸 뒤, 수행자들이 면벽좌선(面壁坐禪)
함을 야유조로 이같이 불렀던 데서 유래한다. 이는 본래 자성청정(自性淸淨)을 기본으로 한 수행법으
로, 갑자기 대오(大悟)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속에 내재하는 본래의 청정한 자성에 절대로 의뢰
하는 선이다. 이에 반해 간화선은 큰 의문을 일으키는 곳에 큰 깨달음이 있다고 하여, 공안(公案)을 수
단으로 자기를 규명하려 하는 선법이다. 대혜(大慧)종교는 묵조선을 사선(邪禪)이라 공격하였지만, 결
국 양자의 차이는 본래의 면목(面目)을 추구하는 방법의 차이이다. 굉지(宏智)정각은 《묵조명》을 통
하여 묵조선이 불조 정전(佛祖正傳)의 참된 선이라고 주장하였다.
돈오점수(頓悟漸修)
불교에서 돈오(頓悟), 즉 문득 깨달음에 이르는 경지에 이르기까지에는 반드시 점진적 수행단계가 따른
다는 말. 이에는 그 이전에 점수과정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과, 돈오 후에 점수한다[先悟後修]는 주장이
있다. 당(唐)나라 신회(神會)의 남종선(南宗禪) 계통은 후자를 강력하게 주장하여 이후의 선종은 주로
‘선오후수(先悟後修)’의 입장을 취하였다. 고려시대 지눌(知訥)의 ‘돈오점수론’도 그의 영향을 받
았는데, 그는 ‘오(悟)’를 햇빛과 같이 갑자기 만법이 밝아지는 것이고, ‘수(修)’는 거울을 닦는 것
과 같이 점차 밝아지는 것과 같다는 비유를 들면서, 만일 깨우치지 못하고 수행만 한다면 그것은 참된
수행이 아니라 하여 선오후수의 입장을 강조하였다.
돈점2교(頓漸二敎)
석가의 설법을 연차적, 내용적으로 분류하는 교판(敎判)의 하나인 돈교(頓敎)와 점교(漸敎). 순서를 거
치지 않고 일시에 깨달음에 도달하는 가르침을 돈교, 순서를 거쳐 점차적으로 오랜 수행으로 깨달음을
얻는 것을 점교라고 한다. 또 설법의 형식으로는 처음부터 갑자기 깊은 내용을 설하는 것을 돈교, 얕은
내용에서 점차 깊은 내용을 설해 가는 방법을 점교라고 한다. 천태종(天台宗)에서는 《화엄경(華嚴
經)》을 돈교, 《아함경(阿含經)》 《방등경(方等經)》 등을 점교라고 한다. 선종에서는 신회(神會)가
신수(神秀) 이후의 북종선(北宗禪)을 공격하며, 혜능(慧能)을 개조로 하는 남종선(南宗禪)이 돈교의 가
르침이라고 하는 데 대하여 북종선은 점오(漸悟)의 열등한 가르침이라고 비난했다. 이를 가리켜 남돈북
점(南頓北漸)이라고 한다.
천태종(天台宗)
중국 수(隋)나라의 천태대사(天台大師) 지의(智)를 개조(開祖)로 하는 불교의 한 종파. 후난성[湖南省]
남부 화룽현[華容縣] 출신의 지의는 광주(光州) 대소산(大蘇山:河南省 남단)에서 혜사(慧思)에게 사사
하여 선관(禪觀)을 닦고 《법화경(法華經)》의 진수를 터득한 뒤, 진릉[金陵:南京]에서 교화활동을 하
여 많은 귀의자를 얻었지만, 575년 38세 때 저장성[浙江省]의 천태산(天台山)으로 은둔하여 사색과 실
수(實修)를 닦았다. 이것이 천태종 성립의 단서가 되었으며, 지의는 《법화경》에 따라 전불교를 체계
화한 《법화현의(法華玄義)》, 천태의 관법(觀法)인 지관(止觀)의 실수를 사상적으로 정립한 《마하지
관(摩訶止觀)》 《법화경》을 독자적인 사상으로 해석한 《법화문구(法華文句)》의 이른바 <법화삼대부
경(三大部經)>을 편찬하였다. 이것은 중국·한국·일본을 일관하는 천태교학의 지침서가 되었을 뿐 아
니라, 인도 전래의 불교를 중국 불교로 재편하는 계기도 되었다. 그의 문하인 장안(章安) 관정(灌頂)을
필두로 지위(智威)·혜위(慧威)·현명(玄明)을 거쳐 제6조 담연(湛然)으로 교학이 전승되었다. 그들은
지의의 삼대부경에 상세한 주석을 가하여 《석첨(釋籤)》 《묘락(妙樂)》 《보행(輔行)》을 저술, 천태
교의를 선양하였고 초목도 성불할 수 있다는 초목성불설(草木成佛說)까지 전개하였다. 당나라 말기에
쇠했던 불교가 북송 때에 부흥하여 12조인 의적(義寂)과 그의 동문 지인(志因)의 양계통에서 많은 학승
이 배출되었는데, 전자를 산가파(山家派), 후자를 산외파(山外派)라고 한다. 의적의 제자 의통(義通),
그 문하 지례(知禮)의 계통이 송대에 융성하여 천태종의 주류가 되었으며, 남송(南宋) 대에는 선월(善
月)·지반(志盤) 등이 강학에 뛰어났고, 원대(元代)에는 불교 전반의 교학적인 쇠퇴와 함께 쇠하였지
만, 명대(明代)에 다시 부흥하여 선(禪)과 정토(淨土)와의 융합이 이루어지고, 명 말기에는 지욱(智旭)
이 교학을 진흥시켰다. 지의는 《법화경》의 정신을 근거로 전불교 경전에 의의를 부여하여 오시(五時:
華嚴時·鹿苑時·方等時·般若時·法華涅槃時)의 교판, 화의사교(化儀四敎:頓敎·漸敎·密敎·不定敎)
및 화법사교(化法四敎:藏敎·通敎·別敎·圓敎)로 구분하였으며, 공(空)·가(假)·중(中)의 삼관(三觀)
을 교의의 중심으로 하였다. 또한 일상심(日常心)의 일념 가운데 지옥으로부터 부처의 경지가 내재한다
는 일념삼천(一念三千)의 사상과 일체가 원융(圓融)한 실상(實相)을 주장하였다. 한국에서 천태종이 하
나의 종파로 성립된 것은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에 이르러서였지만, 그 교학이 전래된 것은 훨
씬 이전이다. 신라의 현광(玄光)은 지의에게 법을 전한 혜사(慧思)에게서 법화삼매(法華三昧)를 배웠으
며, 신라의 연광(緣光), 고구려의 파약(波若) 등은 직접 지의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특히 고려 제관
(諦觀:960년 중국에 감)의 《천태사교의(天台四敎儀)》는 천태학의 입문서로서 크게 성행하였다. 의천
의 문하에 교웅(敎雄)·계응(戒膺)·혜소(慧素) 등이 유명하며, 그 후에도 덕소(德素)·요세(了世)·천
인(天因) 등이 교세를 떨쳤다. 이와 같이 천태종은 고려 일대를 통하여 크게 성하였으나 조선시대에 이
르러 척불정책으로 쇠퇴하였다.
법화경(法華經)
일승(一乘)불교 사상을 설한 경전.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이라고도 한다. 이 경은 불탑신앙을 하
는 집단에 의해 성립된 대표적 대승경전으로 삼승(三乘)을 한데 모아 일승(一乘)의 큰 수레로 일체 중
생을 구제한다는 정신에서 여래는 큰 인연으로 세상에 나와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부처의 경지에 들어
가게 하는 데 근본목적이 있으며, 삼승은 단지 방편으로 설해졌을 뿐이고, 이러한 여래는 상주 불멸하
여 이미 여래는 오래전에 성불하였으며 단지 방편으로 세상에 나와 성도의 모습을 보였을 뿐이며 여래
의 수명은 무량하다고 하였다. 한역본으로는 3가지가 있는데 축법호(竺法護)가 번역한 《정법화경(正法
華經)》 10권 27품, 구마라습(鳩摩羅什)이 번역한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7권 28품, 사나굴다와
달마굽타가 공역한 《첨품법화경(添品法華經)》 7권 27품이 있다. 산스크리트 원본이 네팔·티베트 등
에서 발견되어 편집정리된 것이 3가지 있으며 그 외 중앙아시아어역·영역·불역 등이 이루어져서 이
법화경에 대한 연구는 기독교 교리와의 비교 등 실로 세계적인 범위에 미치고 있다.
화엄종(華嚴宗)
중국 당(唐)나라 때에 성립된 불교의 한 종파. 《화엄경》을 근본 경전으로 하며, 천태종(天台宗)과 함
께 중국 불교의 쌍벽을 이룬다. 동진(東晉) 말 북인도 출생의 승려 불타발타라(佛陀跋陀羅)가 《화엄
경》을 한역한 이래 《화엄경》 연구가 활발해졌으며, 특히 511년 인도의 논사(論師) 세친(世親)의 저
서 《십지경론(十地經論)》을 모두 완역한 것을 계기로 지론종(地論宗)이 성립되었는데, 이는 화엄종
성립의 학문적 기초가 되었다. 한편 《화엄경》을 사경(寫經)·독송(讀誦)하는 화엄 신앙과, 이 신앙에
근거하는 신앙 단체인 화엄재회(華嚴齋會)도 발생하여 화엄종 성립의 기반이 성숙되었다. 이러한 배경
아래 두순(杜順)은 종래의 화엄에 대한 교학적 연구보다 실천적·신앙적 입장을 선양하여 화엄종의 제1
조가 되었다. 새로이 중국에 전해진 현장(玄)의 유식설(唯識說)을 채용하면서 종래의 지론종 학설을 발
전시킨 사람이 화엄종의 제2조인 지엄(智儼)이며, 이 지엄의 학문을 계승하여 화엄종 철학을 대성시킨
사람이 현수(賢首)이다. 그 후 징관(澄觀)·종밀(宗密)이 나와 화엄종을 계승하였으나, 선종의 발흥과
함께 일시 쇠퇴하였다. 그러나 송(宋)나라의 자선(子璿)·정원(淨源) 등이 화엄의 맥을 이었으며, 그
후 많은 선사(禪師)들의 사상에도 화엄사상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한국에서는 화엄사상을 신라
의 원효(元曉)·의상(義湘) 등이 크게 선양하였는데, 원효의 《화엄경소》는 현수의 《탐현기(探玄
記)》에 인용될 만큼 영향을 끼쳤다. 특히 의상은 두순에게서 화엄 교학을 배운 적이 있고, 부석사(浮
石寺)를 창건(676)하여 화엄의 종지(宗旨)를 널리 편 이래 해동화엄종을 개창(開創)한 사람으로 숭앙되
고 있다. 그의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는 방대한 《화엄경》의 정수를 요약한 것으로 화엄
학 연구에 큰 영향을 끼쳤다. 또한 신라의 심상(審祥:?∼740)은 당나라 도선(道璿)과 함께 일본으로 건
너가 화엄학을 전달하기도 하였다. 통일신라시대에는 ‘화엄십찰(十刹)’이라 하여 화엄학 연구의 중요
한 사찰을 헤아리기도 하였다. 통일신라 말 화엄학은 부석사를 중심으로 하는 희랑(希朗)과, 화엄사를
중심으로 하는 관혜(觀惠)의 북악(北岳)·남악의 두 파로 갈라져 논쟁이 치열하였다. 고려에 이르러 균
여(均如)는 이를 조화시켰으며,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은 고려 불교의 통합이라는 관점에서 화
엄·선(禪)·천태(天台)를 융합하였다. 그 후 어느 종파에 속하더라도 화엄학 연구는 필수적인 것이 되
었다. 화엄종 교리의 중심은 전세계가 일즉일체(一卽一切)·일체즉일(一切則一)의 무한의 관계를 갖는
원융무애(圓融無)를 설하는 법계연기관(法界緣起觀)이다. 그 원융무애한 모습은 십현(十玄) 연기를 설
하며, 그 이유로써 육상(六相:總·別·同·異·成·壤) 원융의 논리를 전개하였다. 요컨대, 화엄종은
일체의 천지만물을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의 현현(顯現)으로 보며, 불타의 깨달음의 경지에서 전우주
를 절대적으로 긍정하는 통일적 입장에 서 있다.
화엄경(華嚴經)
불교 화엄종(華嚴宗)의 근본 경전. 원이름은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 한국 불교전문강원
의 교과로 학습해 온 경전이기도 하다. 산스크리트 완본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대승불교 초기의
중요한 경전으로 한역본은 불타발타라(佛陀跋陀羅)가 번역한 60권본(418∼420), 실차난타(實叉難陀)역
의 80권본(695∼699), 반야(般若)역의 40권본(795∼798)이 있는데, 상기 2본 중 최후의 장인 입법계품
(入法界品)에 해당하는 것이다. 티베트어역은 80권본과 유사한 완본이 있다. 본경은 <60화엄>이 34장,
<80화엄>이 39장, 티베트어역이 45장이지만, 실은 처음부터 현재의 형태로 성립된 것이 아니고 각 장이
독립된 경전으로 유통되다가 후에 《화엄경》으로 만들어졌는데, 필경 중앙아시아에서 4세기경 집대성
된 것으로 추측된다. 각 장에서 가장 일찍 성립된 것은 십지품(十地品)으로, 그 연대는 1~2세기경이라
고 한다. 산스크리트 원전이 남아 있는 것은 이 십지품과 입법계품이다. 본경은 불타의 깨달음의 내용
을 그대로 표명한 경전이며,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교주로 한다. 60권본은 7처(處)·8회(會)·34품
(品)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적멸도량회(寂滅道場會:제1·2품)와 제2보광법당회(普光法堂會:제3∼8품)
는 지상, 제3도리천회(利天會:제9∼14품)·제4야마천궁회(夜摩天宮會:제15∼18품)·제5도솔천궁회(兜率
天宮會:제19∼21품)·제6타화자재천궁회(他化自在天宮會:제22∼32품)는 모두 천상이며, 설법이 진행됨
에 따라 회좌의 장소도 점차 상승하고 있다. 제7은 다시 지상의 보광법당회(제33품), 제8도 지상의 서
다림회(逝多林會, 즉 祇園精舍:제34품)이다. 제1회는 불타가 마가다국(國)의 깨달음을 완성한 곳에서부
터 시작한다. 그때 불타는 비로자나불과 일체가 되어 있다. 따라서 많은 보살이 차례로 불타를 찬양하
는 노래를 읊는다. 긴 찬양의 노래가 이어진 다음, 이 아름다운 세계가 불타의 신력(神力)으로 크게 진
동하고, 향기롭고 보배로운 구름이 무수한 공양구(供養具)를 비오듯 뿌린다. 이러한 세계를 연화장 장
엄세계해(蓮華藏莊嚴世界海)라고 한다. 제2회에서 불타는 적멸도량에서 멀지 않은 보광법당의 사자좌
(師子座)에 앉아 있다. 문수(文殊)보살이 사제(四諦:苦·集·滅·道의 네 진리)를 설하며, 또한 10인의
보살이 각각 10종의 심원한 법을 설한다. 제3회부터는 설법의 장소를 천상으로 옮기고 여기서는 십주
(十住:보살이 가져야 할 마음가짐·생활방식, 즉 初發心住·治地住·修行住·生貴住·具足方便住·正心
住·不退轉住·童眞住·法王子住·灌頂住)의 법을 하며, 제4회에서는 십행(十行:보살이 행해야 할 열
가지 행위, 즉 歡喜行·饒益行·無恙恨行·無盡行·離癡亂行·善現行·無著行·尊重行·善法行·眞實
行), 제5회에서는 십회향(十廻向:수행의 공덕을 중생에게 돌리는 보살의 열 가지 행위), 제6회에서는
십지(十地)를 설명하고 있는데, 십지는 보살의 수행단계를 10종으로 나누는 것으로 《화엄경》 중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그것은 즉 제1은 환희지(歡喜地)로서 깨달음의 눈이 뜨여 기쁨으로 가득 차 있
는 경지, 제2는 이구지(離垢地)로서 기본적인 도덕으로 직심(直心)을 일으켜 나쁜 죄의 때를 떨쳐버리
는 경지, 제3명지(明地)에서는 점차 지혜의 빛이 나타나, 제4염지(地)에서 그 지혜가 더욱 증대되고,
제5난승지(難勝地)에서는 어떤 것에도 지배되지 않는 평등한 마음을 가지며, 제6현전지(現前地)에서는
일체는 허망하여 오직 마음의 활동에 지나지 않음을 깨달으며, 제7원행지(遠行地)에서는 열반에도 생사
에도 자유로 출입하고, 제8부동지(不動地)에서는 지혜가 다시는 파괴될 수 없는 경지에 다다른다. 그리
하여 목적에 사로잡히지 않고, 제9선혜지(善慧地)에서는 불타의 비밀의 법장(法藏)에 들어가 불가사의
한 대력(大力)을 획득하고, 제10법운지(法雲地)에서는 무수한 여래가 대법(大法)의 비를 뿌려도 이를
다 증득(證得)하며, 스스로 대자비심을 일으켜 중생의 무명·번뇌의 불길을 꺼버린다. 따라서 십지 전
체를 통하여 보살은 자신을 위하여 깨달음을 구하는 동시에, 다른 사람도 깨달음으로 향하게 한다는 이
타행(利他行)을 닦는 것이 중요하다. 제7회에서는 지금까지의 설법이 요약되어 설명되고 있으며, 제8회
에는 선재(善財)라는 소년이 차례로 53명을 찾아가서 법을 구하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그 53명 중에는
보살만 아니고, 비구·비구니·소년·소녀·의사·뱃사공·신·선인·외도(外道)·바라문 등도 포함되
어 있다. 이는 구도심에서는 계급도 종교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정신이 담겨 있다. 사상적으로 《화
엄경》은 현상세계는 상호 교섭·활동하여 무한한 연관관계를 갖는다는 사사무애(事事無)의 법계연기
(法界緣起) 사상에 근거한다. 이 《화엄경》을 전거로 하여 후에 중국에서는 화엄종이 성립되었으며,
그 주석서로는 60권본에 대한 현수(賢首)의 《탐현기(探玄記)》, 80권본에 대한 징관(澄觀)의 《대소초
(大疏)》가 가장 유명하다. 또한 《탐현기》의 선구로서 지엄(智儼)의 《수현기(搜玄記)》 《공목장(孔
目章)》 등이 있다. 인도에서는 《십지경》에 대한 세친(世親)의 《십지경론》 등이 있다.
오교십종(五敎十宗)
중국 화엄종(華嚴宗)에서의 교리학 분류방법의 하나로, 불교의 모든 교설을 분류·비판한 교판(敎判).
5교는 화엄종을 창시한 당나라의 두순(杜順)의 교판을 법장(法藏)이 발전·체계화한 것으로, ① 소승교
(小乘敎):사제(四諦:苦·集·滅·道의 네 가지 진리), 십이연기(十二緣起)를 설하는 《아함경(阿含
經)》의 가르침, ② 대승시교(大乘始敎):공(空)을 설하는 《반야경(般若經)》과 유식(唯識)을 설하는
《해심밀경(解深密經)》의 가르침, ③ 대승종교(大乘終敎):진여(眞如)·여래장(如來藏)을 설하는 《대
승기신론(大乘起信論)》 등의 가르침, ④ 돈교(頓敎):곧바로 깨달음에 들어간다고 하는 《유마경(維摩
經)》 등의 가르침, ⑤ 원교(圓敎):일승(一乘)을 설하는 《화엄경(華嚴經)》의 가르침을 말한다. 이들
5교를 그 이론적 측면에서 분류한 내용을 가리켜 10종이라고 한다. 10종은, ① 아법구유종(我法俱有
宗):아(我) 및 만유의 실유(實有)를 주장하는 파, 즉 불교에서도 가장 낮은 가르침으로 부파(部派)불교
의 독자부(犢子部) 등을 가리킨다. ② 법유아무종(法有我無宗):아는 실재하지 않지만, 만유의 실유자는
아유법공(我有法空)을 주장하는 부파불교의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의 교학(敎學), ③ 법무거래종(法無
去來宗):설일체유부의 만유 삼세실유(三世實有)의 주장에 대해 아는 실재하지 않으며, 만유도 현재에만
존재하고 과거·미래에는 공이라고 주장(現在實有 過未無體)하는 부파불교 대중부(大衆部) 등의 교학,
④ 현통가실종(現通假實宗):만유는 현재에 있어서 실유인 것도 있고, 가유인 것도 있다고 하는 부파불
교 설가부(說假部)·성신론(成實論) 등의 주장, ⑤ 속망진실종(俗妄眞實宗):세속의 제법은 허망하며,
출세간(出世間)의 법, 즉 불교의 근본 진리만이 참되다는 부파불교 설출세부(說出世部)의 주장, ⑥ 제
법단명종(諸法但名宗):세속·출세 속의 법은 근본적으로 가명이며, 실체가 없다는 부파불교 일설부(一
說部)의 주장, ⑦ 일체개공종(一切皆空宗):초기 대승불교 《반야경》 등의 가르침으로, 5교(五敎) 중
공시교(空始敎)에 해당한다. ⑧ 진덕불공종(眞德不空宗):진여의 본성은 공이 아니라고 설도 대승종교에
해당한다. ⑨ 상상구절종(相想俱絶宗):객관의 대상[相]도 주관의 인식(想)도 함께 진여의 현현으로 언
설을 끊어, 불가설(不可說)·불가사의하다고 설하는 《유마경》 등의 대승 돈교에 해당한다. ⑩ 원명구
덕종(圓明俱德宗):사사무애(事事無)·법계연기(法界緣起)·중중무진(重重無盡)의 도리를 말하는 화엄의
대승 원교에 해당한다. 이 10종과 5교와의 관계는 ①∼⑥까지가 소승교, ⑦이 대승시교, ⑧이 대승종
교, ⑨가 돈교, ⑩이 원교에 해당한다. 여기에서 일체의 사물은 서로 방해함이 없이 중중무진(重重無
盡)하며, 모든 공덕을 갖추고 있음을 설하는 《화엄경》의 가르침이 최고의 가르침이라고 한다.
중국불교(中國佛敎)
중국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전한(前漢) 애제(哀帝) 원수(元壽) 1년(BC 2)이라는 설이 유력하지만 다른
설도 많다. 그러나 1세기에는 불교가 전래해 있었음이 확실하다. 초기에는 도교와 함께 신봉되었는데,
사상적으로도 불교의 공(空)사상을 노장(老莊)의 무(無)에 대비해 해석하려 하였다. 이러한 노장사상과
의 결합은 후에까지도 중국 불교를 형성하는 강한 요소로 작용하였다. 불교가 전개되어 온 과정을 시대
적으로 대별하면 다음과 같다. 400년까지는 경전의 번역과 중국사상에 바탕을 둔 이해의 시기로 격의
(格義) 불교시대라고 한다. 다음은 구마라습(鳩摩羅什)의 한역을 계기로 하는 불교 본래의 사상연구의
시기이고, 그 다음은 수·당 시대에 들어와 불교에 대한 중국인의 이해와 실천에 있어 불교 본래의 모
습을 실현한 시기이다. 이때 삼론(三論)·천태(天台)·화엄(華嚴)·법상(法相)·밀교(密敎)·율(律)·
선(禪)·정토(淨土) 등의 종파가 확립되었다. 끝으로 당(唐)나라 말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는 《대장경
(大藏經)》이 출판되는 등 일상생활에 불교적 사유(思惟)가 침투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