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장달수의 한국학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樂民(장달수)
열린 마음으로 세계를 껴안다
[芝峰類說]
이수광(李晬光)이 지은 『지봉유설(芝峰類說)』은 조선시대 최초의 문화백과사전으로 평가를 받을 만큼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저자가 젊은 시절 틈틈이 기록한 내용들을 모아 책으로 엮은 것이다. 그는 무슨 이유에서 『지봉유설』을 썼던 것일까? 선조에서 인조에 이르는 조선시대 중기는 정치적, 사회경제적으로 큰 변화가 닥쳐오는 시기였다. 안으로는 본격적인 붕당정치가 시작되면서 정치세력간의 정쟁이 본격화되기 시작하였고, 밖으로는 1592년에서 1598년까지 이어진 임진왜란과 북방 여진족의 흥기로 말미암아 국제적인 세력판도가 점차 재편되어가는 시기였다.
이수광은 바로 이러한 시대에 태어나 학문을 연구하고 국가의 중흥을 위한 사회·경제적 정책을 수립하는 데 일생을 바친 인물이다. 그는 무엇보다도 실천, 실용의 학문에 힘썼다. 그 스스로 무실(務實)의 학문을 강조했을 뿐만 아니라 실생활에 유용한 다양한 분야의 학문을 섭렵하고 이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였다. 이러한 학문을 위해서는 옛 선현들의 지혜와 동서고금의 다양한 정보들이 필요하였다. 이수광은 선현들의 사적을 모으는 한편, 이를 현재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그의 저술 『지봉유설』은 바로 이러한 고민의 결과물이었다.
세상에 전하여야 할 사적들이 사라지는 것을 안타까워하면서 자신이 『지봉유설』을 쓰게 된 동기를 밝힌 서문을 보자.
우리나라는 예악(禮樂)의 나라로서 중국에 알려지고 박학(博學)하고 아존(雅尊) - 단아하고 존귀함 - 한 선비가 거의 뒤를 이어 나왔건만 전기(傳記)가 없음이 많고, 문헌에 찾을 만한 것이 적으니 어찌 애석하지 않은가? 대체로 역대의 소설(小說)이나 여러 가지 서적이 있는 것은 연고와 실상을 듣고 많은 사실을 고증하는 데 도움을 주고자 하기 때문이니, 또한 그 효용이 적다고 할 수 없다. 전조(前朝) - 고려시대 - 의 『보한집』, 『역옹패설』, 아조(我朝)의 『필원잡기』, 『용재총화』 등 열 두어 사람의 것이 있음에 지나지 않으며 그동안 세상에 전하여야 할 사적들은 거의 다 사라져 버렸다. 보잘 것 없는 지식으로 어찌 감히 망령되이 책을 저술하는 축에 들기를 흉내 낼 수 있겠는가마는 오직 한두 가지씩을 대강 기록하여 잊지 않도록 대비하려는 것이 진실로 나의 뜻이다. 일의 신비하고 괴이한 것에 이르러서는 일체 기록하지 않았으되, 옛 사람들의 시문에 대하여는 간혹 나의 좁은 소견을 적어 두었으니 본래부터 매우 외람되고 지나친 일임을 안다. 그러나 감히 나의 의견이 옳다고 하지는 않는다. 오직 안목과 식견이 높은 이가 가려주기를 바랄 뿐이다.
- 광해군 5년(1613년) 7월 중순, 이수광.
박학(博學)의 전통이 있었던 나라, 그러나 그 문헌들이 점차 사라져가는 현실, 이제부터라도 그 문헌들을 찾아 새롭게 고증하겠다는 법고창신(法古創新) - 옛 것을 모범삼아 새로운 것을 창출함 -, 이것이 『지봉유설』을 관통하는 정신이다.
이수광의 학문은 한마디로 '실(實)'을 강조하는 '실학'이다. 이수광은 비록 성리학자의 입지를 지켰지만 성리학에서 실용적, 실천적 요소를 찾는 것에 중점을 두었으며, 성리학 이외의 학문이라도 국부의 증진이나 민생의 안정에 유용한 것이라면 모든 학문을 폭넓게 수용하려는 개방성을 보였다.
이수광은 성리학을 이해하면서 실용, 실천의 측면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에 이론 탐구만을 고집하는 학풍이나 출세의 도구로 활용되는 성리학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다. 『지봉유설』 곳곳에는 학문을 하는 사람은 실천에 힘을 기울여야지 구담(口談)에만 치중하지 말 것을 강조하는 내용이 나타난다. 그리고 모든 학문을 폭넓게 섭렵하는 한편, 비록 이단사상이라 할지라도 미리 선입견을 갖지 않고 그것이 갖는 유용성에 가치를 두는 개방적이고 유연한 사고를 보여준다.
이수광은 성리학의 이념을 버린 방외인적인 사상가는 아니었다. 그가 1625년에 국가의 중흥을 위한 방책으로 올린 상소문에는 성리학의 이념에 입각하여 제도개혁을 추구하는 성리학자로서의 입장이 잘 나타나 있다. 이수광은 이 상소문에서 왜란으로 무너진 국가기강과 사회기강을 바로잡아 사족(士族)의 지배체제를 강화하면서 동시에 선비들의 철저한 자기반성과 도덕적 정화를 통해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정신이 명실 공히 관철되는 이상적 유교정치의 재건을 목표로 하였다.
기묘사화를 평가한 권15의 '인물부, 소인(小人)' 항목을 보면 사림파의 사상을 계승한 그의 입장을 알 수 있다.
기묘년의 당적(黨籍)은 자못 자세하다. 그러나 이것을 당적라고 하기에는 매우 온당치 못하다. 이것은 차라리 기묘년의 제현록(諸賢錄)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처럼 이수광은 기본적으로 사림파의 입지에 선 성리학자였다. 그러나 성리학의 모든 측면을 신념화하지 않고 성리학에서도 시대적 과제를 해결할 수 있는 부분들을 강조하는가 하면 성리학 이념을 보완할 수 있는 사상체계의 수용에 적극성을 보였다. 그가 양명학과 도가, 불교 등에 대해서도 개방적 입장을 취한 것은 이들 사상이 가지는 긍정적인 기능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권18의 '외도부(外道部) 선문(禪門)' 항목에는 이단사상에 대한 이수광의 입장이 잘 드러나 있다.
이단(異端)은 진실로 해롭지만 또한 취해서 얻을 만한 것이 있다. 도가의 무위(無爲)는 유위자(有爲者)의 경계가 되고 그 양생(養生)은 삶을 버리는 자에게 경계가 된다. 석씨(釋氏)의 견심(見心)은 곧 방심(放心)하는 자의 경계가 되고 그 살생을 경계하는 것은 곧 죽이기를 좋아하는 자에게 경계가 된다.
도가나 석가와 같은 이단사상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생활에 유용한 부분이 있으면 이를 수용하는 입장에서 이수광의 사상은 상당히 개방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수광은 의약과 점술에 대해서도 그 효용성을 인정한다. 권18, '기예부(技藝部) 방술' 항목을 보자.
의약과 복서(卜筮)는 함께 일컬어진다. 의원은 죽는 사람을 구하고, 살아 있는 사람도 구제한다. 점쟁이는 흉한 것을 피하고 길한 데로 나아가게 한다. 그 시초는 모두 성인(聖人)에게서 나온 것이다. 그러니 본래부터 작은 일이라고 여겨서는 안 될 것이다.
이수광은 '문장부'의 시인을 소개하는 항목에서도 사대부 학자뿐만 아니라 방외인·승려·천인·규수(閨秀)·기첩(妓妾) 등 신분이 낮은 사람들의 시까지 소개하는 신분적 개방성을 보이기도 하였다. 이수광과 동시대의 인물인 신흠이나 유몽인, 한백겸 등의 학풍에서도 성리학과 이단사상을 서로 절충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이러한 학자들의 존재에서 조선시대 중기의 사상계는 성리학 일변도의 경직된 분위기가 아니라 보다 폭넓고 다양한 사상이 공존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불랑기국(佛狼機國)은 섬라(暹羅)의 서남쪽 바다 가운데에 있으니, 서양의 큰 나라다. 그 나라의 화기(火器)를 불랑기라고 부르니, 지금 병가(兵家)에서 쓰고 있다. 또 서양포(西洋布)라는 베는 지극히 가볍고 가늘기가 매미의 날개와 같다.
- '제국부, 불랑기국'
남번국(南番國) 사람이 만력 계묘년간에 왜인의 배를 따라 우리나라에 표류하여 도착한 일이 있다. 그 사람을 보니 눈썹이 속눈썹과 통하여 하나가 되었고, 수염은 염소의 수염과 같았으며, 그가 거느린 사람은 얼굴이 옻칠한 것처럼 검어서 형상이 더욱 추하고 괴상하였다. ··· 왜인들은 그곳에 진기한 보물이 많기 때문에 왕래하면서 장사를 하고 있는데, 본토를 떠난 지 8년 만에 비로소 그 나라에 도착하곤 하였으니, 아마 멀리 떨어진 외딴 나라인 모양이다.
- '제국부, 남번국'
이수광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으로 포루투갈 - 불랑기국 - 과 네덜란드 - 남번국 - 의 모습을 위와 같이 기록하였다. 이처럼 서양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중국으로의 사행 경험이었다. 그는 뛰어난 외교력과 문장능력을 인정받아 28세 때 성절사의 서장관(書狀官)으로, 35세 때 진위사(陳慰使)로, 49세 때인 1611년(광해군 3)에 세 번째로 각각 중국을 다녀왔다. 당시 선진국이었던 중국으로부터 보고 배운 문화 경험과, 세 차례의 사행을 통해 오늘날의 베트남과 샴(Siam) 등의 사신들과 교유하면서 국제적인 안목을 키울 수 있었다. 『인조실록(仁祖實錄)』에 나오는 그의 졸기에는 "그가 중국에 사신으로 갔을 때 안남, 유구, 섬라의 사신들이 그의 시문을 구해보고 그 시를 자기 나라에 유포시키려까지 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이수광이 당대에 국제적인 경쟁력을 갖춘 인물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이수광은 성리학을 보다 탄력적으로 수용하고 이단에 대해 개방적 태도를 보였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당시까지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미지의 세계인 외국에 대한 인식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지봉유설』의 권2의 '제국부(諸國部) 외국'조에는 안남 - 베트남 - 으로부터 시작하여 유구, 섬라 - 샴(Siam) -, 일본, 대마도, 진랍국 - 캄보디아 -, 방갈자(榜葛刺) - 방글라데시 -, 석란산(錫蘭山) - 실론 - 등 동남아 국가들에 대한 역사, 문화, 종교에 대한 정보들과 함께 회회국(回回國) - 아라비아 - 및 불랑기국(佛浪機國), 남번국(南番國), 영길리국(永吉利國) - 영국 -, 대서국(大西國) - 이탈리아 - 등 유럽의 나라들에 대한 정보까지 소개되어 있다.
이 국가들에 대해서는 거의 모든 영역의 정보들을 가능한 한 객관적이고 실용적인 방향으로 서술하고 있음이 특징이다. 특히 포르투갈이나 영국에 대해서는 군함이나 화포에 관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어 임진왜란을 겪은 직후 이수광이 서양의 국방력에 깊은 관심을 보였음을 알 수 있다. 이탈리아에 대한 항목에서는 마테오리치가 중국에 들어와 『천주실의』를 소개했다는 내용이 주목을 끈다. 조선시대의 기록에서 최초로 천주교에 관한 내용이 등장하는 부분이다. 이수광 사후에 수많은 천주교 박해 사건이 일어났음을 고려하면 이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천주교에 관심을 가진 것에서 그는 분명 시대를 앞서간 선각자였음을 알 수 있다.
이수광은 명나라 사행을 통하여 외국의 문물을 보다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봉유설』을 통해서 외국의 많은 나라를 소개했던 까닭은 외국의 역사와 문화를 자신이 살고 있는 조선이라는 나라에 비추어 보고자 했기 때문일 것이다. 고립되고 폐쇄된 국가 조선이 아니라 진취적이고 개방적으로 발전해갈 조선을 상정하고 그 모델을 외국의 여러 나라에서 구해 본 것이었다.
외국에 대한 이수광의 개방적인 인식은 북학파를 비롯한 후대의 실학자들의 학문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그에게서 특징적으로 지적되는 박학풍과 개방적인 사상은 무엇보다 이것을 국가의 발전이나 백성의 삶에 도움이 되도록 실천하는 데 그 목표가 있었다. 그를 실학의 선구자로 공식적으로 위치지운 것은 일제시대인 1930년대의 국학자들이었다. 그러나 조선시대 후기의 대표적 실학자인 이익의 『성호사설』과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 등의 저술이 바로 『지봉유설』의 체제를 발전시킨 것을 감안한다면, 실학자들은 이미 이수광을 모범으로 삼아야 할 스승으로 인식했음을 알 수 있다.
『지봉유설』은 우리나라 최초의 문화백과사전으로 손꼽을 수 있는 책이다. 저자의 서문에 따르면 『지봉유설』은 저자의 나이 52세 때인 1614년(광해군 6)에 탈고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 저술은 일시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저자가 오랜 시일에 걸쳐 견문한 사실과 많은 자료들을 보고 체계적으로 정리한 기록들을 모아 편찬한 것이다. 이후 『지봉유설』은 1633년(인조 11) 그의 아들 성구와 민구에 의하여 『지봉선생집』과 함께 출간되었다. 『지봉유설』의 서두에는 벗인 김현성(金玄成)의 서문과 이수광 스스로 지은 서문, 편찬 원칙을 밝힌 3칙의 「범례」가 수록되어 있다.
「범례」에서 주목되는 것은 다루고 있는 항목이 3,435조에 달한다는 것, 가능한 전거를 밝혔다는 것과 인용된 서적이 348가(家)이며 유교경전에서 최신의 자료까지 활용했다는 것 등이다. 그만큼 자료 조사에 치밀성을 기하고 광범위하게 자료를 수집한 흔적이 나타나 있다.
『지봉유설』에서 다루고 있는 주요한 내용은 천문, 지리, 역사, 정치, 경제, 경학, 시문, 신형, 언어, 잡사, 기예, 외도, 궁실, 복용, 식물, 금충 등 인간이 갖추어야 할 인문적인 교양과 생활사 및 자연에 관한 것 등 거의 모든 내용이 망라되어 있다. 오늘날과 체제가 조금 다르지만 그야말로 문화백과사전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각 항목에 대해서는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대 사례를 중심으로 그 항목을 설명해가는 방식을 취하고 있으며 인용 자료를 최대한 활용하여 고증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물론 이수광은 성리학자인 까닭에 경서부나 문장부와 같은 항목들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러나 일반적인 성리학자들이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세세한 항목까지에도 세심한 배려를 한 대목이 우리의 눈길을 끈다.
다양한 소재를 다루고 있는 이 책에 우선적으로 나타나 있는 정신은 우리의 전통과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다. 그는 서문에서, "우리 동방의 나라는 예의로써 중국에 알려지고 박아(博雅)한 선비가 뒤를 이어 나타났으되 전기(傳記)가 없음이 많고 문헌이 찾을만한 것이 적으니 어찌 섭섭한 일이 아니랴"고 하면서, 『지봉유설』의 편찬 동기가 무엇보다 우리의 문화와 뛰어난 역사적 인물을 소개하는 데 있음을 밝히고 있다.
먼저 '본국'에서는 각종 자료를 이용하여 우리 역사에서 쟁점이 되는 부분을 서술한 후에 『산해경』 등의 저술을 인용하여 우리나라가 군자국이라는 점과 동방은 전통적으로 착한 품성을 가진 곳임을 강조한다. 고려라는 국호에 대해서도 '산고수려(山高水麗)'의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 하고 "중국인들은 고려국에 태어나서 금강산 보기를 원한다는 시가 있으며 금강산의 이름이 온 천하에 떨친 것은 오래다"는 내용을 소개함으로써 우리의 아름다운 강산에 자부심을 보였다.
그밖에도 '관직부, 사신'에서는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반열(班列)은 우리나라가 제일이고 안남과 유구 등 여러 나라의 사신은 모두 감히 우리와 나란히 서지 못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이러한 이유로 조선은 예의지국이며 시서(詩書)가 뛰어나기 때문이라고 자부하고 있다. 또한 "우리나라 사람의 일로서 중국 사람들이 미치지 못하는 것이 네 가지가 있다. 그것은 부녀의 수절, 천인의 장례와 제사, 맹인의 점치는 재주, 무사의 활쏘는 재주 등이다. 또 '언어부, 잡설'에서 "우리나라에는 나고 중국에는 없는 것이 네 가지가 있다. 그것은 경면지(鏡面紙), 황모필(黃毛筆), 화문석, 양각삼(羊角蔘) 등이다"고 하여 우리의 좋은 전통이나 물산에 대해 깊은 관심과 애정을 보여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내가 중국 북경에 갔을 때 안남과 유구의 사신들이 모두 말하기를, 귀국의 붓과 먹은 천하의 제일 좋은 물건이라고 하며, 이것을 얻기를 원한다"고 했다는 사실을 소개하기도 한다.
이수광은 실록의 보관을 위한 사고(史庫)의 설치에 대해서도 그 의미를 부여했는데, 권4의 '관직부(官職部), 사관(史官)' 항목에서 실록 보관에 만전을 기한 당대의 분위기를 전하고 있다.
아조(我朝)의 실록을 평시에 중앙에서는 춘추관에, 지방에는 충주, 성주, 전주 등의 각처에 나누어 보관하였다. 그런데 임진년의 병화(兵火)가 있은 뒤에 오직 전주에 감추었던 것만이 화를 면하게 되었으므로, 강화에 옮겨 놓았다가 계묘년(1603년)에 이르러 인서국(印書局)을 설치하고 여러 부를 베껴 내어서 나누어 강화와 묘향산, 태백산, 오대산에 수장하였다. 그것은 환란을 염려하는 마음이 더욱 깊은 것이다.
실제 『선조실록』의 선조 39년(1606년)의 기록에, "실록은 지금 봉심하고 분류하였습니다. 구건(舊件)은 그대로 강화(江華)에 보관하고 새로 인출한 3건은 춘추관(春秋館) 및 평안도 묘향산(妙香山)과 경상도 태백산(太白山)에 나누어 보관하며, 방본(傍本) 1건은 바로 초본(草本)인데 지금 보관할 만한 지고(地庫)가 없으나 그냥 버리기가 아까우니, 강원도 오대산(五臺山)에 보관하는 것이 마땅합니다"는 내용이 있어서, 이수광이 국가의 중대사인 실록 편찬과 보관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알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외에도 그는 생활의 곳곳에까지 자신의 견해를 들면서 많은 정보를 기록하고 있다. 문화백과사전의 성격을 분명히 한 것이다. '식물부, 주(酒)'에서는 "함부로 술을 마시는 사람치고 일찍 죽지 않는 사람이 드물다. 술이 사람을 상하는 것이 여색보다 심하다"는 등의 표현으로 술의 폐단을 언급한다. 그리고 '식물부 과일' 항목에서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과일로 거창의 감, 보은의 대추, 밀양의 밤, 충주의 수박, 회양의 해송자, 안변의 배를 들고 있다. 고양이에 대한 기록도 흥미롭다.
또한 '금충부(禽蟲部), 수(獸)'에서는 중국에 사신으로 갔을 때 고양이를 기르는 풍습을 본 경험을 기록한 내용이 있다. "고양이는 다른 동물을 해치는 짐승이다. 그런데 내가 중국에 갔을 때 사람의 집에 고양이 기르는 것을 보았다. 모두 꼬리를 잘랐고 그 성질이 매우 온순하였다. 병아리와 같이 거처하면서도 조금도 해칠 마음이 없어 보였다." 이어서 "『사문옥설(事文玉屑)』을 보면 고양이는 중국에서 난 것이 아니다. 서쪽 지방 천축국에서 난다. 쥐가 불경을 뜯는 것을 막기 위하여 승려들이 이것을 길렀다. 당나라 삼장이 서쪽 땅에 가서 불경을 얻어 올 때 고양이도 가지고 온 것인데 그 씨가 퍼진 것이다"고 하여, 고양이의 전래에 대한 재미있는 해석을 인용하고 있다.
권4의 '관직부 장수(將帥)' 항목에서는 상신(相臣), 장수(將帥), 학사(學士), 사관(史官), 사신(使臣) 등의 항목을 설정하여 역대의 중요 인물을 서술하고 있다. 재상 중에서는 황희를, 장수 중에서는 이순신을 역대의 인물로 거론하고 있는데, 특히 이순신에 대해서는 그를 천거하여 적재에 활용한 유성룡의 능력을 높이 사고 있음이 주목된다.
이순신은 무인 속에 있어서 이름과 칭찬이 드러나지 않더니 신묘년(1591년)에 유서애 - 유성룡 - 가 정승이 되어서 그를 쓸만한 인재라고 하여 정읍현감에서 차례를 뛰어넘어 전라좌수사를 제수하였다. 드디어 중흥의 제일 명장이 되었으니, 아아 지금 세상엔들 어찌 또한 이와 같은 인물이 없겠는가. 특히 인재를 알아 추천하는 자가 없을 뿐이다.
『지봉유설』은 전반적으로 우리의 전통과 문화, 인물에 대한 자부심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수광은 당대 제일의 국제적 감각을 갖춘 인물이었음에도 우리 문화에 대한 깊은 관심과 애정을 보였던 것이다.
『지봉유설』은 조선시대 문화백과사전의 시초를 이루는 저술로서 조선시대 지식인들이 자신이 살아간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고 국부의 증진과 민생 문제 해결을 위해 다양한 학문적 모색을 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자료다. 이수광은 순수 성리학을 지향하는 동시대의 학자들에 의해서는 '잡학'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사회문제가 보다 복잡하게 제기되는 조선후기 지식인들의 학문적 풍조에 큰 영향을 끼쳤다.
『지봉유설』의 뒤를 이어 저술된 이익의 『성호사설』, 이덕무의 『청장관전서』,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 등은 백과사전적인 학풍이 조선시대 후기 학자들에게 상당히 풍미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이러한 저술에서는 다양한 학문을 두루 탐구하는 박학풍과 함께 성리학 이외의 학문에 대한 포용성이 두드러진다. 또한 서양의 학문과 과학기술에 대해 별다른 거부감이 없는 점이 발견된다. 이 저술들은 실천적이고 실용적인 학풍, 즉 실학이 조선후기의 사상계에 일정하게 자리를 잡는 데 주요한 역할을 했는데 이러한 점에서 최초의 문화백과사전인 『지봉유설』은 실학적인 학문 풍조의 형성에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해준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지봉유설』을 통하여 적극적이면서도 외래문화에 탄력적이었던 조선시대 지식인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었다. 전란으로 나라가 혼돈에 빠지고 당쟁으로 정국이 어지러웠던 힘든 현실에서도 우리 문화의 긍지를 찾으려 했던 모습이나, 서양의 진보적인 측면에 주목하면서 그것의 수용에 앞장섰던 모습은 이수광을 조선시대 지성사의 중심에 우뚝 서게 하였다.
'서울 속의 산림'을 자처하면서 청빈한 생활을 했지만, 그는 결코 나약한 지식인이 아니었다. 다양한 학문을 섭렵하면서 한 줄 한 줄 정리해나갔던 『지봉유설』은 조선시대 중기 지식인의 저력을 다시 한번 보여주었고, 후대의 실학자들은 『지봉유설』을 계승한 저작들을 연이어 출간함으로써 이수광의 선구적인 모습에 보답을 하였다.
1. 『지봉유설』이라는 제목이 뜻하는 것은?
'지봉유설'의 지봉(芝峯)은 이수광의 호를 의미하며, 유설(類說)은 '분류별로 하고 싶은 말'이란 뜻이다. 즉, 유형별로 책을 편집했음을 말한다. 백과사전류의 책들은 이러한 방식으로 제목을 정하는 경우가 많은데, 반계 유형원의 『반계수록(磻溪隧錄)』에서 반계는 '붓가는 대로 따라서 쓴 기록'이라는 뜻이며, 성호 이익의 『성호사설(星湖僿說)』은 '성호가 쓴 보잘것없는 이야기'란 뜻이다. 이러한 책들은 제목에서부터 다양한 분야의 내용을 담겠다는 의지가 나타나 있다.
2. 『지봉유설』에는 담배에 관한 이야기도 나오나?
담배에 대해서는 식물부의 '약' 항목에서, "담파고(淡婆姑)라는 것은 풀의 이름이다. 또한 이것은 남령초(南靈草)라고도 한다. 근래에 와서 왜국에서 나는데, 잎을 따서 바싹 말리고 불에 태운 것을 병든 사람이 대통으로 그 연기를 빨았다가 곧 도로 내뿜는다. 그 연기는 콧구멍으로 내뿜는다"고 기록하여, 이수광 당대에 담배가 처음 들어와 보급되었던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담배를 '약' 항목에 분류하여, 현재 건강을 해치는 담배의 해악이 강조되는 것과 자못 대조를 이루고 있는 점이 흥미롭다.
3. 『지봉유설』에 나타난 외국문화 수용은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이수광은 외국의 문화 수용에 결코 인색하지 않았다. '외국'조에서 동남아시아와 서양 각국의 역사, 문화 등을 비교적 객관적으로 서술하고 서양의 과학이나 지도, 천주교에 대해서도 선구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지봉유설』의 저변에 우리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깔려 있음을 볼 때 이수광은 주체성을 바탕으로 외래문화의 수용에 적극적이었던 인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지봉유설』 (상·하), 이수광 지음, 남만성 옮김, 을유문화사, 19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