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를 어머니집에 두고 목련식당에 있는 기훈이가 데리러 오길 기다린다.
마서 당산나무를 보고 있는데 동귀차를 태일선배가 운전하고 온다.
카니발 차 안에는 뒷좌석까지 사람이 가득찼다.
형문형 부친상 조문을 하는 자리에서 술을 많이 마시지 말라고 기훈이가 말한다.
대서로 다시 돌아와 희식이랑 같이 술을 마신다.
하은선배 등 형님들은 방안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술을 마시지않는다.
우리도 언젠가는 술을 멀리하고 이제 말로만 시간을 보내는 일이 일상이 될 수도 있을거다.
동귀는 선거관련 일로 벌교에 남더니 전화해도 오지 못한다.
술에 취해 기훈이가 데려다 줘 어머니한테서 잠잔다.
어머니도 사전투표를 하셨다.
어머니가 차려주신 아침을 먹고 무거운 머리를 달고 차를 끌고 나온다.
기훈이가 광주가자는데 난 팔영산에 가겠다고 한다.
광주로 가 바보차로 다시 오려고 맘먹었지만 녹동에서 민수가
자연산 농어를 주문해 두었다고 오란다.
바보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벌교 터미널 보광병원주차장에 차를 두고
과역가는 직행버스표를 산다.
9시가 지나 과역터미널 노인많은 대합실에 도착하니 팔영산쪽 가는 군내버스는
다 떠나 버리고 11시 반쯤에 있다.
고기 구경하자고 나가다가 택시기사한테 능가사가는 요금을 물으니 만원이란다.
기사가 시동을 거는데 난 수퍼에 들러 빵과 음료수를 산다.
고민하다가 막걸리 한병도 산다.
점암 지나 능가사 가는 길은 공사중이다. 우두에서 여수로 가는 섬들로
연결하는 도로의 굽이를 바로잡는 모양이다.
기사는 누가 이 길로 여수로 가느냐고 한다.
과역에서 순천지나 여수까지 40여분이면 간다고 한다.
군수 선거를 물어보니 전군수하고 한편인 사람을 또 해주면 안되어 바꿔야 한다고 한다.
고기를 물으니 녹동 여호 노일 등지에서 고기를 가져 오는데
여호고기가 더 맛있다고 한다.
득량만고기보다 여자만 고기가 맛있는 이유는 모르겠단다.
능가사 앞에 만원을 주고 내리니 10시를 지난다.
절 앞의 나무를 찍고 한자 현판도 찍어본다.
조계산인이 누군지 모른다. 커다란 사천왕상도 본다.
대웅전 넓은 마당을 지나는데 오른쪽 서어 느티 등 숲을 이루던 나무들이
다 베어져 사라졌다. 왜 나무들을 베어버린 것일까?
이 불가에서는 도법자연을 모르는 것일까?
난 대웅전의 건물도 좋지만 돌담장 사이의 이 숲이 좋았다.
팔영 봉우리는 구름을 이고 있다. 햇볕은 따가운데 바람이 부니 그늘은 시원한 편이다.
대웅전과 응진당의 글씨가 염재 송태회의 글씨다.
난 글씨의 멋도 모르면서 쓴 사람의 내공이나 특징도 모르면서 아는 척해 보려고 한다.
전각 속으로 들어간 사적비도 본다.
원음료 등 건물들도 바뀐 듯하고 템플스테이를 한다고 펼침막이 붙어 있다.
샘도 보이지 않는다. 공사 중인 후문을 나와 부도전쪽으로 오르는 길도 관광지처럼 변했다.
주차장 야영장 지나 소망탑 앞에서 버찌를 따 먹는다.
손바닥이 삘갛게 물든다. 입주둥이도 그럴 것이다.
숲으로 들어서니 상쾌하다. 계곡엔 물이 없지만 굳센 나무줄기가 좋다.
길 가의 싸리꽃도 보면서 까만 버찌도 따 먹으면서 천천히 걷는다.
힘이 없다. 국립공원이 되면서 길을 많이 손봤다.
1986년 3월 첫주쯤엔가, 재영이 왕삼이 창삼이의 안내를 받아
이 산에 오를 땐 길도 나뭇꾼이나 소뜯기는 흔적의 희미한 길이었고
봉우리 사이엔 계단이나 난간하나 없었다.
5학년 아이들을 데리고 가 세명의 길을 잃었는데, 난 그들을 몸둥이질했다.
한참 후 유치원생인 한결이도 이 바위를 잘만 올랐는데, 도립공원 국립공원으로 변하더니
산에 돈을 많이 쏟아부었다.
우리는 그만큼 편해진 것일까? 산 가는 이가 편하다는 건 가당키나 한가?
아무도 없느느 호젓한 돌숲길을 오르니 술독이 빠져나가는 것 같다.
혼들바위 정자 의자에 앉아 물 한모금 마시고 일어선다.
오른쪽길은 보지 않고 왼쪽 능선으로 오른다.
능선길도 계단도 두었고 친구들이 점오봉이랄고 부르는 쪽 길도 탐방로 아님 기둥을 세우고
밧줄로 막아두었다. 유영봉을 오른쪽으로 돌아 계단을 올라 유영봉에 닿는다.
선녀봉 쪽으로 하얀 구름이몰려가고 여자만도 반은 구름에 갇혔다.
득량만쪽과 육지로 이어지는 고흥반도의 조망도 맑지 않다.
오래된 삶은 계란은 팍팍하다. 물을 마시며 두개를 먹으니 힘이 난다.
건너편에 남녀 등산객이 큰 소리를 내며 봉우리를 오르고 있다.
시간여유를 부리며 한참을 놀다가 일어선다. 가파른 계단을 오르며 계단 아레
쇠발판과 그 사이 내가 손으로 움켜쥐었을 바위 사이를 들여다 본다.
편하게 올라간다. 6봉 두류봉에서 앞서간 팀을 추월한다.
아침에 부산에서 왔댄다. 칠성봉 봉우리 한쪽 끝에 앉아 양말을 벗는다.
배낭속에서 곰팡이 핀 컵을 두고 막걸리를 병나발 불며 마신다.
빵도 맛있다. 12시 반을 지나고 있다. 부산 팀이 와 사진을 찍어준다.
8봉 적취봉쪽엔 구름이 자주 지나는데 등산객들이 점차 많아진다.
신발이 미끄럽지만 바위 끝을 손가락으로 잡고 미끌리는 다리를 손으로 끌어 올리기도 하며
바위 끝부분을 걸어간다.
구름이 휩싸인 적취봉을 지나니 부산 울산에서 온 산악회 팀이 이어지고 일부는 식사 중이다.
녹동으로 술 마시러 갈 시간에 여유가 있어 깃대봉까지 걸어본다.
숲사이 구름 속으로 지나며 나무 기둥들을 찍어보는데 은현한 맛이 안난다.
깃대봉에 사람이 많아 기다리니 땀이 식으며 시원해진다. 깃대봉의 조망은 없다.
작은 꽃들을 보며 돌아와 적취봉 아래에서 탑재로 내려온다.
내가 처음 만난 편백숲의 묘목은 이제 하늘을 가렸다. 하긴 30년이 지났다.
능가사로 다시 내려오는 길도 생각보다 길다.
개울을 건널 무렵 다리 아프다고 업어달라던 한결이를 무등태우며 내려왔는데,
그도 어느새 서른살이 되어 나보다 크다.
능가사에 들러 장미도 보고 나와 공단직원에게 버스시각을 물으니
3시 40분이란다. 버스정류장에 앉아 30분 남짓 기다리니 40분 정각에
파란 군내버스가 온다. 차 안에는 군인 한명이 타 있다.
점암 지나 과역까지 한번도 쉬지 않는다. 대춘 용두를 지나며 그동네 살았던 아이들을 생각한다.
그들은 지금 어디에서 무얼하며 살고 있을까? 선생하는 자의 의무 중에 학생의 성장을
지켜보는 것이 있다는데, 난 거기에 많이 소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