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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비자(韓非子) 해제(解題)
한비자(韓非子)의 사상(思想)의 재조명(再照明)
봉건제도(封建制度); 고대 중국의 정치 제도는 봉건제도였다. 봉건 제도라는 것은 임금이 자기의 친족과 공신들에게 국토(國土)의 일정한 지역을 떼내어 주어서 그들로 하여금 그곳을 다르시게 하는 간접 통치의 방식이다. 중앙의 임금을 천자(天子)라 하고, 땅의 분봉을 받은 자를 제후(諸侯)라고 한다. 천자는 기전(畿甸)이라는 일부의 직할지역(直轄地域)을 제외하고는 모든 국토를 제후에게 나누어주는 것이었다. 천자는 제후를 통솔하고, 제후는 자기 영역의 인민을 통치한다. 그러니 봉건이란 말은 땅을 분봉(分封)하여 제후의 나라를 세운다는 뜻이다. 한 번 세운 제후는 세습(世襲)하여 그 땅을 다스린다. 봉건제도는 주(周)나라에 이르러 가장 완비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이 붕궤(崩潰)된 것도 또한 주(周)나라 때였다. 세대(世代)가 오래됨에 따라 제후의 종주국(宗主國)에 대한 충성심과 혈연(血緣)으로서의 친애감은 점차 희박해지게 마련인 것이다. 봉건제도의 질서가 이미 이러한 도의적 유대에 기대할 수는 없었다. 제후들은 오직 종주국의 힘에 복종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주(周)나라는 그 말기에 들어서면서 용렬한 군주가 거듭되고 정치는 문란하여 민심은 흩어지고 이민족(異民族)의 침노를 입어 국력은 쇠약하여졌다.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 종주국인 주(周)나라가 천하의 제후를 통솔할 능력을 상실하게 되니 제후들 가운데서 강성한 자가 나타나 스스로 패자(覇者)가 되었다.
패자(覇者)는 실력으로 여러 제후들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면서 스스로 맹주(盟主)가 되는 것이었다. 누구나 강성하기만 하면 패자(覇者)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제후들은 서로 패자(覇者)가 되기를 다투었다. 이 시대를 통틀어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라고 한다. 주(周)나라가 그 수도를 호(鎬)에서 낙양(洛陽)에 옮긴 때로부터 진(秦)나라의 시황(始皇)이 천하를 통일하기까지의 약 500년 사이를 말한다.
이 기간을 춘추시대(春秋時代)와 전국시대(戰國時代)로 나눈다. 춘추시대는 사서(史書)『춘추(春秋)』에서 다루어진 시대를 일컫는 것으로서 약 300년 간이다. 전국시대는 사서(史書)『전국책(戰國策)』에서 다루어진 시대를 일컫는 것으로서 약 200년간이다. 춘추시대의 초기에는 제후의 패자(覇者)는 오히려 존주양이(尊周攘夷)의 기치를 들고 나와서 종주국인 주실(周室)을 높이고 이민족의 침입을 물리친다는 것을 겉으로나마 구호로 삼았었다. 그러나 후기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형식적인 구호마져 포기하였다. 그야말로 명분(名分)도 의리(義理)도 없었다. 그저 약육강식(弱肉强食)을 위한 힘의 대결이 있을 뿐이었다. 전쟁과 살벌(殺伐)만이 되풀이되었다. 서로 치고 싸우는 동안에 백 수십 개나 되었던 나라들은 전국시대의 말기에는 드디어 한(韓), 위(魏), 제(齊), 연(燕), 조(趙), 초(楚)의 7대 강국으로 줄어들었다. 이 일곱 나라들은 자기의 생존을 위하여, 또 천하를 제패하기 위하여 피의 각축(角逐)을 전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하면 자기의 나라를 부강하게 할 것인가? 어떻게 하면 만을 굴복시킬 수 있을까? 하는 것이 그들의 염원이었다. 그들에게는 인재(人材)가 필요하였다. 남달리 뛰어난 이론과 종횡무진(縱橫無盡)한 역량을 가진 인재를 갈구(渴求)하였다. 군주가 인재를 간절하게 바란 것은 고금을 통하여 이때 보다 더한 때는 아마 없었을 것이다.
백가쟁명시대(百家爭鳴時代); 이러한 시대적 배경은 드디어 백가쟁명(百家 爭鳴)의 상태를 빚어내었다. 누구나 자기의 정치사상이나 경륜을 어느 군주에게 진언(進言)하여 그것이 받아들어지기만 하면 당장에 부귀를 누릴 수 있고 자기의 사상이나 포부를 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세 치의 혀를 휘둘러 6국의 동맹을 주장함으로써 한낱 가난한 웅변가가 하루아침에 6국의 정승이 된 소진(蘇秦)의 이야기도 그때의 것이고, 진(秦)나라
를 위하여 6국의 동맹을 유세(遊說)로써 깨뜨리고 몸이 부귀를 누린 장의(張儀)의 이야기도 그때의 일이다.
드디어 많은 사상가(思想家)가 배출(輩出)되었으니 그들을 제자백가(諸子百家)라 하고, 그들이 서로 다투어 자가(自家)의 설을 주장하였기 때문에 백가쟁명(百家爭鳴)이라고 한 것이다. 이들의 설의 중요한 것을 들어보면, 유가(儒家), 도가(道家), 음양가(陰陽家), 명가(名家), 묵가(墨家), 종횡가(縱橫家), 법가(法家) 등등이다. 이중에서 가장 정치사상(政治思想)으로서 비중이 크고 또 서로 첨예한 대립을 보인 것은 유가(儒家)와 법가(法家)이다. 유가(儒家)는 공자(孔子), 증자(曾子), 자사(子思), 맹자(孟子)에게로 전해 내려오는 인의(仁義)를 중심으로 하는 정치사상(政治思想)이고, 법가(法家)는 상앙(商鞅), 관중(管仲), 신불해(申不害)를 거쳐 한비(韓非)에게 계승된 법(法)을 유일한 방법으로 하는 정치사상(政治思想)이다.
한비(韓非)의 정치사상(政治思想); 한비(韓非)의 정치사상은 한마디로 법(法)과 술(術)로 요약된다. 법(法)이란 법령을 말하는 것이다. 정치의 유일한 방법은 법으로써 다스리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소위 법을 만능(萬能)으로 보는 정치사상이다. 한비(韓非)의 주장에 따르면 사람이란 철두철미(徹頭徹尾)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인간의 본성(本性)이 선(善)이란 설은 믿을 수 없다. 어떤 사람이고 간에 그 속의 속마음을 파헤쳐 보면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고자 하는 본성이 가슴 깊숙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의 이익은 항상 상반되기 마련이다. 군주(君主)의 이익과 신하의 이익은 일치하지 않으며, 군주의 이익과 백성의 이익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극단의 경우에는 남편과 아내, 형과 아우 사이에도 이해는 상반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서로 각자의 노리고 추구하는 이익이 일치하지 않는 인간 관계에 있어서, 특히 임금과 신하는 본래부터 각자의 이익을 위하여 이루어진 남과 남의 사이이며, 임금과 백성의 사이는 지배와 피지배의 힘에 의한 관계이다. 그러한 신하들에게, 백성들에게 충성심만을 기대하는 정치란 성립할 수 없으며, 그러한 신하와 백성들을 인의(仁義)니 도덕(道德)이니, 인정(人情)이니 은애(恩愛)니 하는 것으로써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들을 다스리는 최선의 방법은 법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이다. 법을 바르게 세우고 그것을 잘 운용 한다면 천하의 신민(臣民)들은 법의 궤도 안에 매이게 되어 나라의 질서는 저절로 정연(整然)하게 될 것이다. 법이 잘 지켜지게 하기 위하여는 형벌을 엄하고 중하게 해서 백성으로 하여금 두려워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법을 잘 운용한다는 말은 법을 그야말로 만민에게 평등하게 적용하여 어떤 경우에도 추호만큼의 사(私)도 두지 말아야 하며, 조금의 관용(寬容)이나 온정(溫情)도 개입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법의 정치사상(政治思想)이다. 그럼 술(術)이란 무엇인가? 술(術)이란 사람을 조종하는 술책(術策)이다. 한비(韓非)는 기존의 법의 사상과 술(術)의 이론(理論)을 통합하여 하나의 법술(法術)의 이론을 완성하였다.
법이 아무리 정비되었다 하더라도 결국 그것을 운용하는 것은 사람이다. 그런데 임금 된 자 혼자서 천하를 다스릴 수는 없다. 그래서 만조(滿朝)의 백관(百官)들과 나라 안에 많은 관리들을 배치하고 있다. 그들로 하여금 법을 실지로 운용하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임금과 신하는 그 이익이 상반된다. 신하들은 틈만 있으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려고 노리고 있다. 그러니 임금 된 자는 그들을 자기가 바라는 대로 오직 임금의 이익을 위하여 움직여 주도록 신하들을 잘 부려야 할 것이다. 그 신하를 잘 부리는 데는 술(術)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군주 된 자 그 신하의 조종법(操縱法)만을 잘 알고 있으면 천하는 군주를 위하여 잘 다스려진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유의해야 할 것이 있다. 한비(韓非)가 말한 이른바 법이란 것은 오늘의 국민을 주(主)로 하는 현대 민주주의의 법과는 다르다는 점이다. 그때의 법이란 군주의 지배를 위한 수단이며 방법인 것이다. 그러니 법과 술을 아울러 사용하면 군주의 지배는 더욱 완벽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비(韓非)가 말한 술(術)의 중요한 몇 가지를 들어보자. 임금은 술(術)을 가슴 속에 감춰둔 채 절대로 남에게 눈치 채게 해서는 안 된다. 임금은 자신의 의사를 발표하여서는 안 된다. 좋아하는 것, 미워하는 것, 바라는 것, 싫어하는 것을 발표하여서는 안 된다. 그것을 발표하면 신하들은 그것에 영합하여 파고들 틈을 찾아낸다는 것이다. 또 임금은 언제나 알고도 모른 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신하에게 물으면 신하의 본성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때로는 속마음과는 다른 말로 신하를 시험하여 본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신하의 잘못이나 비행을 하나도 모른 것이 없도록 천하에 첩보망을 벌여 놓으라는 것이다. 결국 인금은 신하의 모든 것을 알고 있어야 하고, 신하는 임금의 정체를 전연 파악하지 못하게 하여 신하의 적나라한 모습을 살피라는 것이다.
그렇게 한 다음 신하에게 그의 의견에 따라 일을 맡기고 철저하게 일의 성과에 대하여 상벌(賞罰)을 단행한다. 그 상벌은 일의 성과가 처음의 말과 일치하면 상을 준다. 말보다 성과가 낮으면 벌할 뿐 아니라 성과가 지나치게 좋아도 벌한다. 그것은 말과 성과가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하면 신하가 감히 거짓말을 하거나 함부로 그 자리에 좋도록 말하는 불건실한 행동을 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상필벌(信賞必罰)을 엄격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상이 한비(韓非)의 법과 술의 정치사상의 골자이다.
한비(韓非)와 진시황(秦始皇); 한비(韓非)는 한(韓)나라의 공자(公子)였다. 한비(韓非)는 전국시대의 7국 가운데 가장 미약한 위치에 있는 조국(祖國) 한(韓)나라의 위태로운 운명을 바라보며 여러 번 의견을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때문일까 그는 비분(悲憤) 강개(慷慨)한 심정으로「고분편(孤憤篇)」을 비롯한 여러 편의 글을 지었다.
그의 저서「고분편(孤憤篇)」과「오두편(五蠹篇)」이 진왕정(秦王政)(뒷날의 진시황(秦始皇))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 진왕정(秦王政)은 크게 감동하여 “아아 이 글의 저자 한비(韓非)를 만나보았으면 나는 죽어도 한이 없겠다.” 고 하였다. 여기에서 진왕정(秦王政)은 총신(寵臣) 이사(李斯)의 계략에 좇아 한(韓)나라를 정벌하였다. 한(韓)나라는 과연 한비(韓非)를 사자(使者)로 보내어 강화를 청하였다. 이러한 경위로 한비(韓非)는 진왕정(秦王政)을 만나게 되었다.
그런데 진왕정(秦王政)의 유일한 근신(近臣)인 이사(李斯)는 실은 옛날 함께 순자(荀子)의 문하에서 글을 배운 한비(韓非)의 동문(同門)이었다. 그 동문인 이사는 만일 한비(韓非)가 진왕정(秦王政)에게 등용되면 자신의 지위가 위태할 것을 염려하여 진왕정(秦王政)에게 참소하여 한비를 옥에 가두게 하고, 몰래 그에게 독약을 마시게 하여 죽게 했다. 그리하여 한비(韓非)와 그의 포부는 끝내 고분(孤憤) 속에서 비참한 최후를 마쳤다.
그러나 한비(韓非)는 진(秦)나라에서 죽었지만 한비(韓非)의 정치사상(政治思想)은 진(秦)나라에서 꽃을 피우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 뒤 진왕정(秦王政)의 정치하는 방법은 하나에서 열까지 한비(韓非)의 법술(法術)을 본받지 않은 것이 없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는 6국을 병탄(倂呑)하고 천하를 통일하여 봉건제도를 버리고 중앙 집권제도를 세웠으며, 천하를 군현(郡縣)의 제도로 고치고 까다롭고 혹독한 법을 세워 한 손으로 천하를 지배하였다. 특히 진시황(秦始皇)이 모든 서적을 불사르고 유생(儒生)들을 생매장한 일은 실은 한비(韓非)의 말을 액면 그대로 실천한 것이라고 하겠다. 한비(韓非)는 일찍이「오두편(五蠹篇)」에서 “현명한 군주의 나라에는 서적은 없다. 법으로써 가르친다.(明主之國, 無書簡之文, 以法爲敎.)” 라고 하였으며, 또 “유학자(儒學者)는 선왕의 도라고 일컬으면서 인의(仁義)에 빙자하여 얼굴빛과 복식을 성대하게 하고 변설(辨說)을 꾸며 가지고 당세의 법을 의심하여 임금의 마음을 두 가지로 만든다.” 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유학자를 나라를 좀먹는 다섯 가지의 좀벌레의 가장 해독이 큰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극력 배척한 바 있었기 때문이다.
한비자(韓非子)에 대한 비판(批判); 법(法)과 술(術)만을 유일무이(唯一無二)의 방법으로 하는 한비자(韓非子)의 정치사상은 그 사상 자체에, 시행의 과정에서, 또 결과에 있어서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할 점이 많다. 인간을 그 본성은 철두철미(徹頭徹尾) 이익만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규정한 것은 유교(儒敎)에서 말하는 성선설(性善說)과는 너무나 상반된 견해이다. 아마 한비(韓非)의 성악설(性惡說)의 유래는 그의 스승인 순자(荀子)의 영향이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순자(荀子)는 유교의 견지에서 사람은 성악(性惡)이니 수양을 쌓아서 선(善)으로 고쳐야 한다고 주장하였음에 반하여 한비(韓非)는 인성(人性)이 선(善)으로 고쳐질 가능성에 대하여는 전연 언급이 없다. 이것은 불가능하다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전면적으로 인간을 불신(不信)하는 생각이다. 이것이 세도인심(世道人心)에 악영향을 미침이 지대하다는 것을 변호할 여지는 없다. 이 점 비판 받아야 당연할 것이다.
또 인의(仁義)니 도덕이니 관용(寬容)이니 온정(溫情)이니 하는 것을 일고의 여지도 없이 배격하였으니 그것은 인간 사회를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를 너무나 냉담하고 비정하고 서로의 감시와 적대(敵對)의 냉전장(冷戰場)으로 보게 한다. 실상은 인간이란 반드시 그렇게 서로 노려보고만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경험에서 알고 있다. 또 인간에게 본래부터 그러한 비정한 일면이 있는 것은 부정하지 못한다면 그것을 선(善)으로 유도하여 인간 사회를 따뜻한 것으로 만들어 살맛이 있게 하여야 할 것이다. 적어도 그렇게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때문에 정치가 존재하고 지도자가 필요하고 교화(敎化)라는 것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한비(韓非)의 정치사상은 어떻게 하면 군주의 지배를 완벽하게 할까 하는 것만을 생각하고 국민 생활을 따뜻하고 행복한 것으로 만들려는 노력을 포기한 것이 된다. 국민의 참마음에서 나오는 협력을 기대하지 않고 힘만을 편중하고 마음의 소중한 것을 살피지 않은 정치라고 하겠다. 이 점 비판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다.
힘만의 정치는 오래 유지 못한다. 진왕정(秦王政)은 한비(韓非)의 정치사상을 채용하여 한때 부국강병을 이룩하고 천하를 힘으로 통일하여 천자가 되었었다. 그는 유명한 폭군(暴君) 진시황(秦始皇)이 되어 위에서 말한 것처럼 분서갱유(焚書坑儒)를 감행하고, 냉혹하고 까다로운 법을 세웠으며, 만리장성을 쌓고, 천하의 쇠붙이를 죄다 모아 거대한 쇠 사람을 만들어서 다른 사람이 병기(兵器)를 만들 여지를 없애려고 하였다. 그러나 진(秦)나라는 겨우 이대(二代)만에 멸망하였다. 후일 한패공(漢沛公)이 처음 관중(關中)에 들어갔을 때, 제일 먼저 부로(父老)들과 약속한 것이 약법삼장(約法三章)이었다. 즉 한패공(漢沛公)이 천자가 되면 모든 까다로운 진(秦)나라의 법을 버리고 간략한 법 삼장(三章)만을 세우겠다는 것이다. 그때의 백성들이 얼마나 까다로눈 법에 괴로워하였던가를 알 수 있다. 또 법가(法家)인 한비(韓非) 자신을 비롯하여 상앙(商鞅), 이사(李斯) 등이 모두 비명(非命)의 죽임을 당하였던 것도 우연한 일은 아니다.
서적『한비자(韓非子)』는 세상에서 악서(惡書)라는 지적을 받아 일반의 열람(閱覽)이 금지되기까지 하였던 문제의 책이다. 그러나 그러한 비난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월 갈수록 그리고 국가, 사회가 복잡하여질수록『한비자(韓非子)』는 더욱 높이 평가되고 있다. 무슨 까닭인가?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 이후의 중국의 정치사상은 실로 유가사상(儒家思想)과 법가사상(法家思想)의 대결이며 각축(角逐)이었다. 인의(仁義)와 법(法)의 대결이었다. 봉건제도에의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유가(儒家)와, 중앙집권의 권력 집중 제도를 신봉하는 법가(法家)와의 대결이었다. 유교의 사상은 역대 국가의 특별한 보호 밑에 있으면서도 실은 정치사상으로서는 법가사상(法家思想)에 압도외어 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도덕이나 인의는 권장하고 칭찬할 일이기는 하나 그것은 마음에 속한 일이고 선행(善行)에 속한 일이니 강요할 수는 없다. 그러나 많은 인간의 공동생활을 가누어 나가는 데에는 일정한 질서가 없을 수 없다. 서로가 공동으로 지키지 않아서는 안 될 일들이 많다. 그 지켜야 하고 지키지 않는 자에게 지키도록 강요해야 할 일정한 표준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법이다. 법이 없이 국가, 사회의 질서는 상상할 수 없다. 이 국가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바로 정치인 것이다. 비록 치우친 점은 있었으나 한비(韓非)가 법을 주장한 것은 역시 현명하였던 것이다.
한비자(韓非子)의 현대적(現代的) 평가(評價); 인의(仁義)나 도덕(道德)만에 의존하여 현대의 국가사회의 질서를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현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 중에는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공소(空疎)한 인의(仁義)니 도덕(道德)이니 하는 설교보다는 우리는 선미(善美)하고 적절한 법이 세워지고 그것이 그야말로 만민에게 공정하게 되어지기를 바란다. 국민을 다스리는 방법은 법으로 정하고 법으로 설정해야 한다는 한비(韓非)의 법치사상(法治思想)은 현대인의 사고에 공감을 준다. 더구나 그것이 2천 수백 년 전의 옛사람이 주장하였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머리가 숙여지기까지 한다.
또 한비(韓非)가 인간의 본성(本性)은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주장한 것은 세도인심(世道人心)을 살펴 볼 때 유감이기는 하나 그것을 “아니다!” 라고 전적으로 부정할 수는 없다. 우리는 인간의 본성이 선인지 악인지, 백지(白紙)인지 단언하지 못한다. 우리는 그것이 본성이고 아니고가 문제가 아니다. 실지로 그러한 점이 있는 것은 있는 대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인성(人性)이 그렇게 악하기만 하다고도 우리는 보지 않는다. 사람의 심리를 살피는 눈이 비정하게 예리하다. 그러나 그의 설(說)은 항상 치우친다. 한비(韓非)는 자신의 설(說)에 굳은 신념을 가졌기 때문에, 혹은 그의 불우한 환경 때문일까, 그의 말은 언제나 과격하고 한쪽으로 치우친다. 우리는 법의 사상을 외친 한비(韓非)의 현명함을 존경하면서도 한비(韓非)의 숱한 많은 단점에는 비판의 눈을 돌려야 할 것이다.
그의 주장과는 달리 도덕과 법률을 병존할 수 있는 것이며,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에는 불신(不信)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차라리 믿음성이 더 많이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사람을 조종하는 술(術)이란 것이 인간의 허점을 찔러 빈틈이 없는 것을 탄복하게 한다. 그러나 그러한 술(術)보다는 성의와 신의와 선의로 대하는 것이 남의 공감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아닐까.
결국 이러한 점들을 염두에 두고, 이 책을 읽어가면 현대인인 우리와 고전 『한비자(韓非子)』사이에 무엇인가 대화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1976년 중하(仲夏), 무학산장에서, 남만성(南晩星)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