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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시(馬山市)
경상남도 중남부에 위치했으며 통합 창원시에 편입된 도시.
경상남도 중남부 진해만 안쪽의 마산만에 있던 항만 공업도시였으며 인접한 창원시·진해시와 생활권이 같아 이른바 '마·창·진' 통합에 대한 논의가 이전부터 꾸준히 제기되어 오다가 2008년 이명박정부가 들어서면서 행정구역 통합이 가속화되었다.
2009년 마산·진해 시의회의 행정구역 자율통합 찬성에 이어 창원 시의회에서도 통합안이 가결된 데 이어 2010.3.2 국회에서 마산시, 진해시, 창원시 3개 시를 창원시로 통합하는 법안이 통과됨에 따라 같은 해인 2010.7.1 진해시·창원시와 통합하여 통합 창원시로 새롭게 출범하였다. 통합 창원시가 탄생함에 따라 기존 마산시의 북부 지역은 마산회원구로, 남부 지역은 마산합포구로 분구되었다.
역사
일찍부터 농경문화가 발달한 마산권역에는 서기전 3세기경에 이미 성읍 형태를 갖춘 취락이 형성된 것이 발굴 조사되었다. 이러한 취락이 발전하여 삼한시대에는 골포국에 해당하였다. 신라 때 이 지방은 굴자군(屈自郡, 지금의 창원)에 속하였는데 562년(진흥왕 23)에 대가야가 신라에 토평되면서 골포국의 중심이던 마산권은 신라가 지배하게 되었다. 신라시대에는 골포(骨浦)라 불렀고, 676년(문무왕 16)에는 굴자군에 속한 현이 되어 골포현(骨浦縣)이 되었다. 757년(경덕왕 16)에 굴자군이 의안군으로 개칭되고, 골포현은 합포현(合浦縣)으로 바뀌어 굴자군의 영현이 되었다.
고려시대에 이르러 982년(성종 1) 조창(석두창)을 두었고, 983년(성종 2) 12목을 설치하면서 마산권은 진주목에 속하였다. 동왕대에 조세미를 수송하기 위해 합포현에 조창(漕倉)인 석두창(石頭倉)을 설치하였다. 1018년(현종 9)에 지방 관제 개편에 따라 마산권역인 합포현은 의안군과 함께 금주(金州: 지금의 김해)에 영속되었다. 1274년(원종 15) 원나라가 합포에 정동행성을 설치하여 일본 정벌의 근거지로 삼았고, 1280년(충렬왕 6)에 정동행중서성(征東行中書省)을 합포에 설치하여 몽골군이 일본 원정을 위한 기지로 사용하였다. 이후 의안군은 1282년(충렬왕 8)에 병참기지로서 이바지한 공으로 의안이 의창현(義昌縣)으로, 합포는 회원현(檜原縣)으로 개칭, 각각 독립하여 현령이 파견되었다.
칠원군에는 1390년(공양왕 2)에 감무가 설치되었다.
조선시대에는 1408년(태종 8)에 의창현과 회원현을 합쳐서 창원부(昌原府)로 승격되고 1415년(태종 15)에는 다시 창원도호부로 승격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창원의 민·군이 합심하여 성을 지키고 한 사람도 적에게 항복하지 않았다.
이를 높이 평가하여 1601년(선조 34) 창원대도호부(昌原大都護府)로 승격시키고 표창하였다. 1661년(현종 2) 12월에 창원향교의 문묘에 봉안된 전패를 도난당해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670년(현종 11) 다시 창원대도호부로 환원되었다. 1663년(현종 4) 대동법이 시행됨에 따라 낙동강 하류 유역 일대 13군의 조공미를 서울로 조운하는 격납고인 조창(지금의 남성동 제일은행 지점 자리)이 설치되었다. 그리하여 이후 이 일대에 중성리·동성리·오산리·서성리·성산리·성호리 등 6개 이가 형성되면서 마산포(馬山浦)라 불리며 훗날 마산의 기반이 이루어졌다.
한편 조창 설치 이후 공관과 민가가 번성하면서 ‘산호포’(山湖浦: 일명 ‘午山津’이라 불림)라 불리었다. 그러나 그 당시 한때 전염병이 만연해 이 재해를 피하려고 午山(오산)의 ‘午’자는 ‘馬’자와 글자는 다르나 뜻은 같다 하여 마산이라 개칭하였다. 이것이 오늘날 ‘마산’이란 명칭의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조선 말기에는 러시아의 남진기지로 활용하기 위한 조차지로 지정된 적도 있다.
19세기 말인 1899년 마산포를 개항하면서 개화항으로 창원감리서(昌原監理署)를 설치하였고, 일본 영사관이 설치되었으며, 1906년 영사관을 이사청으로 개편하였다. 개항에 따라 신마산지역에 각 나라의 영사관 부지와 공동조계 등을 획정하였다. 1907년마산 최초의 은행인 일본계 제일은행 출장소(지금의 신마산 천주교 자리)가 진출하였다. 1911년에는 진해 군항 설치로 마산항이 폐쇄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마산은 마산부(馬山府)가 되었다. 이 때 인구는 약 2만3천 명이었다. 1919년 3·1운동 때는 애국청년 김용환을 중심으로 창신학교·의신학교 학생과 학부모 및 시민 약 3,4천명이 참가해 시위하였다.
-광복 후 1949.8.15 마산부가 마산시로 개칭되었다.
-6·25전쟁 때는 낙동강 전선의 병참기지 역할을 하였고, 1960년에는 3·15마산의거가 일어나 4·19혁명 되었다.
-1960년 부정선거에 항거하는 3·15 부정선거 규탄 시민시위가 두 차례나 일어나 많은 희생자를 냈다. 이 3·15 마산의거 운동은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어 전국적으로 파급되어 발전하였다.
-1970년대 이후 마산수출자유지역이 조성되어 경제발전을 견인하였다.
-1973년 창원군 일부가 편입되고,
-1979년에는 부산 지역과 더불어 유신체제에 항거하는 부마민주항쟁이 일어난 민주화운동의 발상지로 근현대사에 자취를 남겼으며,
-1980년 4월에는 창원지구출장소가 창원시로 분리 승격하였다.
-1987년 1월에는 마산항(구항 및 서항)이 매립되었다.
-1989년 5월 인구 증가에 따라 합포출장소와 회원출장소가 설치되었으며,
-1990년 7월 각각 합포구와 회원구로 승격하였다.
-1995년 1월 도·농통합에 따라 창원군 일부인 진전면·진동면·진북면·내서면·구산면이 마산시로 편입되면서 새로운 도농복합형 통합 마산시가 되었다.
-같은 해 3월내서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2000년 12월에 인구 감소에 따라 합포구와 회원구가 폐지되었다.
개관
동쪽은 진해만 안쪽의 마산만을 경계로 하여 창원시, 서쪽은 함안군·고성군, 남쪽은 남해, 북쪽은 함안군과 접하였다. 동경 128°21′∼128°40′, 북위 35°02′∼35°16′에 위치한다. 면적은 330.57㎢이고, 인구는 41만 1,078명(2008년 당시)이었다. 행정구역으로는 1개 읍(내서읍 內西邑), 4개 면(구산면 龜山面, 진동면 鎭東面, 진북면 鎭北面, 진전면 鎭田面), 27개 동, 184개 리가 있었다. 과거 시청은 경상남도 마산시 중앙동에 있었다.
면적은 330.6㎢이며, 동쪽으로 창원시·진해시와, 서쪽으로 진주시·고성군과, 북쪽으로 함안군과 접하고, 남쪽으로는 진해만에 면하였다. 지형은 무학산(767m)을 중심으로 한 화강암의 낮은 구릉성 산지가 병풍처럼 진해만을 에워싸고 동쪽 기슭 마산만 연안에 남북으로 길게 시가지가 형성되었다. 해안은 크고 작은 반도와 섬들이 흩어져 있는 리아스식해안으로 곳곳에 만입이 발달하였다.
자연 환경
저평지로는 창원시 및 진해시와 공유하는 마산만 및 진해만이 내륙 쪽으로 깊이 들어와 있는데, 이들 만의 연안지역이 평지부를 형성하며 동서간은 짧고 남북으로 긴 시가지를 형성하고 있다. 리아스식 해안인 진해만 안쪽에 위치한 마산만은 외해로부터 9㎞나 내륙 깊숙이 들어와 있어 수면이 호수처럼 잔잔하고 수심이 깊다. 그리고 돝섬(猪島)·모도(毛島) 등의 여러 섬들이 만 안 곳곳에 흩어져 있어 천연의 방파제 구실을 한다. 이렇듯 마산만은 자연적인 양항의 조건을 고루 갖추어 일찍부터 군사요새지로 이용되었다.
시가지의 중심에 무학산(舞鶴山, 761m)이 있고, 대곡산(大谷山, 516m)·대산(大山, 720m)·팔룡산(八龍山, 328m)이 시를 둘러싸고 있다. 시의 북부에는 백월산(白月山, 400m)·구룡산(九龍山, 434m)이 있다. 봉화산(熢火山, 649m)·베틀산(439m)·광려산(匡慮山, 720m)·서북산(西北山, 739m)·인성산(648m)·호암산(310m) 등은 서부지역에 해당되며, 이들 산들은 주로 남북의 외곽 지역을 둘러싸고 있어 함안군 및 고성군과의 경계를 이룬다. 이들 산지의 산기슭이나 구릉지역에 취락이나 경지지역이 발달해 있다
회원천·장군천·양덕천·수정천 등이 마산만으로 흘러들고 있다.
기후는 남해 난류의 영향을 받는 난대성기후로 연평균기온 13.8℃, 1월 평균기온 4.0℃, 8월 평균기온 26.6℃이다. 연강수량은 1,497.2㎜이고 여름철에 집중호우의 특징을 나타낸다. 상대습도는 평균 62.6%이다.(2007년 기준)
지질은 중생대 백악기에 형성된 경상계 지층이 대부분이고 불국사화강암이 산악부의 암층을 형성한다.
유물, 유적
불교 유적으로 진북면 인곡리의 의림사는 본래 이름이 봉국사였는데 사명대사가 승병을 이끌고 머물자 의병이 숲처럼 모여들었다 하여 의림사로 개명된 곳이다. 의림사 경내에는 의림사삼층석탑(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72호)이 있다. 그리고 광산사지는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하나 지금은 초석만 남아 있다.
또한, 구산면 수정리에 20여 기의 지석묘군, 반동리에 7기의 지석묘가 있으며, 청동검이 출토되었다. 이 외에도 진동면 진동리 지석묘군과 고현리 지석묘, 진전면 곡안리 지석묘군이 있다. 삼국시대의 유적으로 구산면 옥계리의 신촌고분군에서는 토광묘가 밀집되어 호·고배 등이, 수혈계 횡구식 석곽묘로 진동면 교동리고분에서는 대부장경호와 소도자 등이, 진북면 대평리고분군에서는 고배·호·창과 철촉이 각각 출토되었다.
이 밖에 진동면 다구리에 제말(諸沫) 장군의 묘(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26호), 현동에 한말 언론인 위암 장지연의 묘(葦庵張志淵墓,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94호)가 있다.
문헌으로는 진전면 시락리에 만력 34년 진해현호적(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40호)이 있다.
무형문화재 제6호인 마산농청놀이는 마산·창원지방의 오래된 유속인 삼한시대 “두레”의 유흥에서 연유한 원시 공동체에서 유래된 것이다. 여창가곡(무형문화재 제30호, 조순자)은 평조 5곡, 계면조 8곡, 평조·전·계면조 2곡으로 모두 15곡이 현재까지 전한다. 불모산영산재(무형문화재 제22호)는 석가모니가 영취산에서 법화경을 설법하는 모습을 재연한 불교의례 의식으로서, 진행할 때는 범패(梵唄)가 불리어진다.
청동기시대의 유적으로는 현동 청동기시대 주거지에서 갈판·석검편·석부·무문토기편과 진동면 진동리에서 고조선식 동검 1점, 마제석검 1점, 마제석촉 2점, 홍도편이 출토되었다. 진북면 신촌리에서는 석관묘와 주거지가 조사되었으며, 무문토기·단도마연토기·석검·석부·석촉 등이 출토되었다. 진동면 고현리·다구리, 진전면 금암리, 내서읍 안성리에서는 마제석검이 출토되었다.
진동면 교동리의 마산향교는 1414년(태종 14)에 진해현과 함께 설치되었다가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것을 영조 때 재건하였다. 현재 건물은 일제 강점기 때 철거된 것을 1990년에 복원한 것이다. 본래 진해향교였는데 1995년에 마산향교로 개칭되었다.
해운동의 월영대(月影臺, 경상남도 기념물 제125호)는 최치원이 합포만에 머물면서 제자들을 가르치던 장소로 규모는 1동이고 목조 기와집이다. 교방동의 관해정(觀海亭,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호)은 정구(鄭逑)가 초당을 지어 시서를 강론하던 곳에 세워진 정자이다. 진전면 오서리에 경행재(景行齋,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32호)가 있다.
성지로는 회현동에 이산성지(鯉山城址, 경상남도 기념물 제52호)가 있으며 포덕산성은 포덕산 정상을 따라 축조된 테뫼식 산성이다. 자산동의 회원성지(會原城址, 경상남도 기념물 제88호)는 포곡성의 토성으로 회원현의 치소가 있었던 곳이다. 그리고 합성동의 합포성지(合浦城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53호)는 배극렴(裵克廉)이 쌓은 우도병마절도사영의 터로 보인다.
진동면 진동리의 진해현 관아 및 객사유지(鎭海縣 官衙·客舍遺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44호)는 1832년(순조 32)에 형방소·사령청·삼문·객사·마방 등의 부속건물과 더불어 진해종헌으로 건립된 것이다. 자산동의 몽고정(蒙古井,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82호)은 1281년(고려 충렬왕 7) 원나라와 고려가 합세하여 일본을 정복할 때 군마의 식수를 공급한 우물이라 전한다. 이곳에 지름 1.4m의 원형 석물이 있다. 원래는 고려정이라 하였으나 1932년 일본인이 몽고정으로 개칭하였다.
진북면에는 창원인곡리모과나무(경상남도 기념물 제77호)가 있다. 그리고 진동면의 창원고현리공룡발자국화석(경상남도 기념물 제105호)에는 중회색의 셰일층리면에 공룡 20마리의 발자국 약 400개가 있다.
교육, 문화
조선시대 교육기관으로는 삼진(三鎭)지역에 진해향교(鎭海鄕校)가 있었고, 마산(馬山)회원(檜原) 지역의 유생들은 창원향교(昌原鄕校)에 소속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진해현(鎭海縣) 학교조에는, 조선 태종조 현감을 둔 이후로 현북 1리 지점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진동면 교동리에 1414년(태종 14)에 창건된 진해향교가 있었는데, 조선 말기에 진해현이 폐지됨에 따라 이 향교도 철폐되었다. 그 뒤 조선 영조 때 재건되고, 1990년에 복원되었다. 1995년에는 마산향교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사설교육기관으로는 회원서원(檜原書院)·월영서원(月影書院)·구암서원(龜巖書院)·회계서원(檜溪書院) 등이 있었다. 회원서원은 1634년(인조 12)에 무학산 계곡인 합포구 교방동에 정구가 강학하던 곳에 그의 높은 뜻을 기리기 위해 지방 사람들이 건립한 것이다. 1833년(순조 33)진전면 오서리에 회계서원이 설립되었다. 월영서원은 1846년(헌종 12)해운동 월영대 부근에 설립되었고, 구암서원은 1858년(철종 9)에 설립되었으나 고종 때 모두 훼철되었다.
근대교육기관으로는 1899년 마산포일어학교가 개교한 것을 시작으로 1901년 성호공립소학교가 설립되었다. 1906년 성호리 교회 안에 독서숙이 설치되어 신교육이 실시되다가 1909년 사립창신학교로 정식 인가를 받아 중등교육을 하였다. 1912년에는 이곳에 고등과를 병설하여 중학 과정도 가르쳤다. 1909년진동면 진동리에 지금의 진동초등학교 전신인 사립진명학교가 처음 개교하였고, 1913년 여학생만을 위한 의신여학교가 건립되는 등 이들 사립학교가 마산 주민의 신교육을 대부분 담당하였다. 8·15광복 후에 1956년합천에 있던 해인대학이 완월동으로 이전해 왔으며, 그 뒤 학교 이름이 경남대학교로 바뀌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68년에는 마산교육대학이 설립되었고 1984년 창원대학으로 바뀌어 창원시로 이전하였다. 2008년 현재 교육기관으로는 유치원 66개 원, 초등학교 40개 교, 중학교 24개 교, 고등학교 16개 교가 있다. 그리고 전문대학 1개(마산대학교), 일반대학교 2개(경남대학교, 창신대학교) 등이 있다.
문화행사로는 마산문화원이 매년 9월에 주관하는 향토축제인 만날제, 10월에는 성진대제가 있다. 진동면에서는 이 지역의 독특한 민속제전인 삼진민속문화제를 개최하고 있으며, 1985년부터는 향토민속경연대회도 실시하고 있다.
종교기관은 2007년 현재 불교 사찰 122개, 천주교 성당 22개, 개신교 교회 161개, 천도교 교당 3개, 원불교 교당 5개, 대종교 교당 1개, 기타 24개가 있다.
민속
이 고장의 민속놀이로는 윷놀이·널뛰기·연날리기 등의 정초놀이와 줄다리기·씨름·그네뛰기·활쏘기·쇠싸움·농청놀이 등이 있다. 줄다리기는 딴 고장과 같이 동·서편으로 하되 이긴 편에서는 “이겼네! 이겼네! 서역 양반이 이겼네! 썩었네! 썩었네! 대빈밀게가 썩었네!”라 노래하며 미녀를 태우고 시위하며, 진 편에서는 상복을 입고 상여를 앞세우고 행진하는 것이 특색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거의 하지 않는 실정이다.
마산의 농청(農廳)놀이는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6호로 지정된 것으로, 예로 부터 회원구 봉암동에 있는 상투바위에 백중날을 기해 자기의 농청기를 먼저 꽂음으로써 마을의 안녕과 풍작을 얻고자 벌이던 놀이이다. 각 마을 농청에서는 마을 앞에서 기제(旗祭)를 지내고 상투바위에 가면서 서로 기싸움을 벌인다. 이에 이기면 상투바위에 자기 마을 농청기를 꽂고 성신선고(聖神宣告)를 하여 축원한 다음 음복하며, 닭머리대기·몸통줄다리기 등의 여흥을 벌이고 마을로 돌아간다.
이 고장의 동제는 당산제·서낭제·목신제·입석제 등으로 불린다. 제일은 마을회의에서 정하는 것이 일반적이며 대체로 시월 상달과 섣달에 택일한다. 제관은 마을 사람 가운데 연로한 자 중 복덕이 있는 정인(淨人)을 택한다. 제관은 수일 전부터 목욕재계하고 여러 날 근신하며, 제사에 참석할 주민들도 몸을 깨끗이 한다. 제물 마련은 마을의 공동기금으로 하는 것이 보통이다. 동제의 순서를 보면, 먼저 제단 주변을 청소한 다음 황토를 깔고 금줄을 쳐서 제단에 제물을 차린다. 이어 분향·강신·참신·헌작·독축·재배 등의 순서를 거쳐 마을의 호수대로 소지축원한다. 제가 끝나면 주민들이 모두 모여서 음복하고, 지방에 따라서는 마을축제의 후속행사가 벌어지기도 한다. 이 때 풍악을 울리며 마을 사람들이 모두 흥겨운 잔치를 벌여서 주민의 화합을 다진다.
설화, 민요
이 고장에 전해 오는 설화는 지명과 기암(奇巖)에 얽힌 것이 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으로 「만날고개이야기」·「말이나 해보지고개 이야기」·「돝섬과 가락왕의 총비(寵妃)에 얽힌 이야기」 등이 있다.
만날고개는 합포구 월영동에서 내서읍 감천리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고려 말엽 마산포의 이씨 가문 중 편모슬하에 삼남매가 사는 집이 있었는데, 이 집은 어머니의 삯바느질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어느 날 어머니가 고질병에 걸려 눕게 되자 17세인 맏딸이 어머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가세의 회복을 위해 감천골에 사는 윤진사의 외아들에게 시집가면서 땅 얼마를 받아 친정에 넘겨주었다. 신랑은 반신불수에다 벙어리였고 사내구실도 못 하였다. 그런데도 시부모는 애를 못 낳는다고 학대가 심했으나 맏딸은 시부모와 남편을 극진히 섬겼다.
시집살이 3년 만에 근친을 청했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였다. 이를 눈치챈 남편이 함께 만날고개까지 와서 빨리 친정에 다녀오라 하고 기다렸다. 아내는 친정의 가세와 어머니의 병환이 회복된 것을 보고 안심하면서 시집에 가지 않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어머니의 호령으로 만날고개에 돌아와 보니 남편은 신체적 열등감을 이기지 못해 바위에 머리를 부딪쳐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남편은 아내에게 딴 곳으로 도망쳐 살라고 유언한 뒤 죽었다.
며느리는 20세에 청상과부가 되어 고된 시집살이를 하였다. 그러던 어느 해 음력 팔월 열이렛날 친정 소식이나 혹 들을까 하여 만날고개에 갔는데 친정어머니와 동생들도 같은 심정으로 고개에 마침 와 있다가 만나 보았다. 지금도 음력 팔월 열이렛날에는 만날고개에 수백 명씩 사람들이 모여들어 보고 싶은 이끼리 만나는 풍습이 남아 있다.
「말이나 해보지고개 이야기」 오누이가 함께 고개를 넘다가 여동생의 자태에 음심이 동한 오빠가 자신의 성기를 돌로 찧고 죽었다. 이를 원통히 여겨 여동생이 슬피 울면서 “말이나 해보지.”라는 말을 했다고 전하여 그 이후 이 고개 이름이 붙여졌다 한다.
돝섬은 마산 앞바다에 있는 작은 섬이다. 가락왕의 총비가 홀연 없어져 사방에 찾으니 골포(骨浦: 마산의 옛 이름)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부하들이 찾아가 환궁하기를 청했다. 그러나 금빛 돼지로 변해 두척산(일명 무학산) 바위틈에 숨어 버렸다. 화가 난 군사들이 바위를 포위하고 그 돼지를 살해하였다. 그 뒤 밤마다 돼지 울음소리가 처량하게 들려, 최치원이 돼지가 죽은 자리에 제를 지냈더니 울음이 그쳤다고 전한다. 이 밖에도 용마산은 말처럼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여기서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빌면 소원을 성취할 수 있다는 말이 전한다.
「삿자리고개이야기」는 옛날에 솜장수와 담배장수가 추운 겨울밤 밖에서 자다가 솜에서 잔 장수는 얼어죽고 담배에서 잔 장수는 살았다 하여, 솜보다는 보기에 엉성한 담배가 따뜻하다는 이야기이다. 홍수가 크게 나서 배가 고개를 넘었다는 「버드나무고개이야기」, 동네 처녀를 짝사랑하다 죽은 총각의 원혼이 뱀이 되어 처녀 배에 달라붙어 고개를 턱에 내민 모습이 된 「상사바위 이야기」가 전하며 범바위·말바위 등의 이야기도 전한다.
이 고장은 현재 도시화가 두드러져 농경지를 찾기 어렵다. 그러나 근대화 이전에는 대부분의 지역이 농경지였고 일부 지역은 어촌이었기 때문에 아직도 농·어촌의 노동요가 구전되며, 숫자는 적지만 의식요도 전한다.
「정자소리」라고도 하는 모내기 노래는 「모찌기노래」와도 넘나든다. “드러내자 드러내자/ 이 모판을 드러내자/ 때가 늦고 시간이 늦다/ 이 모판을 드러내자.”라는 사설은 특히 「모찌기노래」로만 불린다. 「모내기노래」는 때에 따라 다른 사설로 불리는데 비오거나 흐릴 때에 “저기가는 저구름에/ 비들었나 눈들었나/ 눈도비도 아니들고/ 소리명창 내들었네.”라고 하여 날씨에 따른 사설도 있다. 「논매기노래」는 “구나레∼/ 저 건너 갈미봉에/ 비가 우절성 묻어온다/ 유장(우장) 삿갓을 허리다가 둘러메고……”라는 「육자배기」의 본 사설을 부른다. 어업노동요로는 「노젓는 노래」·「얼기돌리기 노래」·「그물당기기 노래」 등이 불린다. “에이야”나 “에야”, “에야자” 등 뜻 없는 여음을 제창하여 노래라기보다 함성에 가까우나 「그물당기기 노래」는 일본식 곡조의 영향이 나타난다. 이 밖에 노동요로 「목도 소리」와 “(앞) 천근같은 무거운 망께는/ (뒤) 어이여라차아/ (앞) 천지지축은 올라갑니다/(뒤) 어이여라차아……”라는 「망께 소리」가 선후창으로 불린다. 의식요로서 정월에 지신밟기를 할 때 부르는 세시의식요는 「지신밟는 노래」가 있다.
장례의식요는 「상여노래」와 「달구노래」가 있는데, 「달구노래」의 뒷소리로 “얼럴럴 상사뒤야”를 사용하는 것이 특이하다. 이 밖에 “성아성아 사촌성아 시집살이가 어떻더노……”라는 「시집살이노래」가 있다.
산업, 교통
마산은 일찍부터 경상남도의 주요한 상공업 도시로 발전해 왔다. 조선 후기부터 조창과 어시장을 중심으로 상업과 유통업, 수산업이 발달하였고, 일제시대에는 좋은 기후와 수질을 이용한 주조, 양조업이 활발하였다. 1960년대 이후 한일합섬 등의 대규모 섬유 공장이 건설되어 섬유업이 크게 발달하였고, 1970년대에 부터 마산 자유 무역 지역과 창원 기계 공업 단지가 건설되면서 마산은 우리나라 산업화의 견인차 역할을 하는 대표적 공업도시가 되었다. 1990년대 들어 고용 인력이 감소하는 등 약간의 변화가 있었으나, 마산 자유 무역 지역의 첨단 산업 기지화, 마산 지방 산업 단지 조성, 마산항을 국제항으로서의 기능 강화 등을 추진하면서 공업도시로의 새로운 도약의 기회를 맞고 있다. 또한 21C 지식 정보화 시대를 맞이하여 마산밸리와 소프트웨어 단지를 조성하고 벤처기업의 창업 지원과 중소기업 육성을 통하여 경쟁력을 갖춘 미래형 산업 도시로 발전해 나갈 것이다.
이 시의 총경지면적은 3,649ha이며, 이 중 논이 2,164ha, 밭이 1,485ha이다. 각각의 점유비가 논 59.3%, 밭 50.7%로 되어 논이 밭보다 약간 비중이 큰 편이다. 이들의 경작은 주로 시 외곽지역에서 이뤄지고 있다. 농가호수는 4,525호이며, 농가인구는 1만 2967명으로 시 인구에 대한 농가인구 비율은 3.2%로서 농촌적 색채가 아주 적다. 농업 생산은 시 외곽지역에서 쌀을 위주로 생산하고 잡곡과 채소·과일 등도 생산하나 미미한 편이다. 더욱이 도시화가 진전됨에 따라 농촌적 토지 이용이 도시적 토지 이용으로 전환될 가능성이 높다.
산업구조의 특성을 보면 2008년 현재 이 시의 총사업체는 3만 603개 업체이고 종사자수는 11만 3031명에 이른다. 1차 산업에 속하는 농업·임업·수산업 관련 업체는 등의 2개 업체에 29명이 종사하고 있다. 2차 산업에 속하는 광업은 금속광구가 4개 있으나 1개 업체만이 활동하고 있다. 금 생산이 대부분이다. 제조업체는 2,360개 업체에 2만 2885명이 고용되어 있다. 음식료품제조업, 섬유제품제조업, 의복 및 모피제종업의 비중이 크다.
3차 산업인 서비스업은 마산시에서 가장 비중이 높은 산업으로서 3만 1368개 업체에 9만 6052명이 고용되어 있다. 숙박 및 음식점업, 도·소매업, 운수업, 기타 공공 수리 및 개인서비스업, 교육서비스업 등의 비중이 크다. 마산자유무역지역에 94개 업체가 입주하고 있으며 5,936명이 일자리를 가지고 있다. 진북신촌농공단지와 진북산업단지에 각각 18개 업체가 입주하고 있다.
상업활동으로 5일장이 서며, 진동면의 진동장이 4·9일, 진북면 지산장이 1·6일, 진전면 오서장이 3·8일에 열린다. 주요 거래품목은 미더덕·장어 등의 생선류와 조개류 등이다. 그리고 22곳의 상설시장과 2곳의 백화점이 있어 마산·창원의 주민 수요에 부응하고 있다.
시의 북쪽으로는 남해고속도로가 지나고 있으며 도심 북측 상단에는 구마고속도로가 지나고 있어 광역교통망의 주요 결절점을 형성하고 있다. 또한 국도 2호선과 14호선이 시내를 통과하여 진주, 진해, 통영 등으로 통하고 있으며 국도 5호선이 동서로 시 외곽으로 통과하고 있다. 시내의 내부 가로망 체계는 기존도심의 자연발생적 가로망과 내서지구 부도심의 계획적인 격자형 가로망에 의해 이원적 가로망 형태를 형성하고 있으며 이러한 가로망에 지역간 연결기능을 갖는 간선도로가 주요 교통축을 이루고 있다.
국도가 남북으로 고성·창원·함안 등지로 연결되고, 북부에는 남해고속도로가 동서로 지난다. 주요 교통축을 이루는 간선가로로는 기존 구도심을 형성하고 있는 해안로, 중앙로, 무학로를 중심으로 진동방면의 국도14호선, 창원, 진해방면의 봉암로, 팔용로가 있으며, 내서지구 부도심으로 교차하는 북성로와 창원생활권과 진해생활권을 연계하는 봉암로, 합성로가 주요 간선교통축을 형성하고 있다. 경전선 철도가 지나며, 마산항에서 부산·진해·통영 등으로 연안여객선이 운항된다.
관광
남해안의 중심도시이자 수려한 자연을 가진 관광지이다. 겨울철에는 기후가 따뜻해 우리나라 제일의 휴양지로도 잘 알려졌다. 마치 학이 날개를 뻗듯 시가지를 품 안에 안고 있는 무학산 꼭대기에 오르면 호수처럼 조용한 마산만과 크고 작은 포구, 해안선을 따라 전개되는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오는데, 한폭의 그림 같은 절경이다.
무학산의 서쪽 산기슭을 따라 내려가면 마산∼진주간의 국도변에 신라의 선학 최치원이 제자를 가르쳤다는 유서 깊은 월영대가 있다.
이곳에서 동쪽으로 1㎞ 지점에는 13세기 말 몽골과 고려의 연합군이 일본을 정벌할 때 군마에게 물을 먹였다는 몽고정이 남아 있다. 수질이 좋아 일찍부터 양조업이 발달하여 소주와 간장 등을 생산하는 대규모 공장이 있다. 그리고 시가지의 동쪽 해안매립지에 건립된 최초의 수출자유지역은 100여 개의 공장이 모인 우리나라 산업관광명소 중의 하나이다. 한편 마산만 한가운데 있는 작은 섬 저도는 큰 나무가 없고 푸르기만 하여 흔히 돝섬이라 불렀다. 이곳에 새로운 대규모 종합위락단지가 조성되어 국내 유일한 해상관광명소로 등장하고 있다. 이 밖에 마산시민들이 즐겨 찾는 가포유원지가 가포동에 있다.
매년 10월에 열리는 마산예술제는 예술인이 주축이 된 전문성을 가진 축제로서 높은 문화예술 수준을 축제를 통해 계승하고자 하는 행사이다. 1989년에 시작된 마산 국제연극제는 '마산을 세계로 연극도 세계로'란 슬로건을 내걸고 연극의 국제화를 통한 향토문화의 발전을 목표로 하고 있다. 매년 5월에 행사가 진행된다. 이외에도 매년 10월에 열리는 노산추모제, 마산 예술인 축제인 대동제 등이 있다.
마산시 개항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건립된 마신시립박물관은 추산동에 자리 잡고 있으며 상설전시실과 기획전시실, 야외전시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마산음악관은 마산 음악인들의 예술혼을 이어받아 지역문화 활성화에 이바지하고, 마산음악사의 정립과 음악을 통한 문화 실천의 장을 마련하고자 2005년에 문을 열었다. 추산동에 있는 문신미술관은 '문신예술 50년'을 맞이한 1994년 개관된 미술관으로서 '문신'선생의 작고이후 2003년마산시에 기증되었다.
양덕동에 위치한 마산종합운동장은 1980년에 준공되었으며 2만 1,474명을 수용하는 주경기장과 올림픽수영장을 갖추고 있다. 마산시 근로자복지회관 내에 있는 마산시근로자체육시설은 지역 근로자들의 체력증진과 복지향상을 위해 2006년에 정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