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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金弘道,1745년~1806년?)
추성부도(秋聲賦圖) 1805년
화면 우상(右上)에 유인(遊印)으로 부정형백문인(不定形白文印)‘일집초경반부서’라는 도서가 있고 그 아래 또 백문장방인(白文長方印)‘쟁산□□ □□□□’라는 도서를 찍었다. 나중의 것은 이인문(李寅文)의 <강산무진도(江山無盡圖)>에 보이는 것과 같은 것임이 주목된다. 화폭 말미에 구양수(歐陽脩:1007~1072)의 <추성부(秋聲賦)>전문이 적혀 있다. 그 첫머리의 유인(遊印)은 백문타원인(白文?圓印)‘경우방자’이고, 작가인은 백문방인 ‘김홍도인’ 과 주문방인이나 흐려서 판독이 불가능하다. 먼저 화제를 보면 다음과 같다. <추성부> 구양자가 밤에 책을 읽고 있다가 서남쪽에서 오는 소리를 들었다. 섬짓 놀라 기울여 들으며 말했다. "이상하구나!“ 처음에는 바스락바스락 낙엽지고 쓸쓸한 바람부는 소리같더니 갑자기 물결이 거세게일고 파도치는 소리같이 변한다. 마치 파도가 밤중에 갑자기 일고 비바람이 몰아치는 것 같은가 하면, 물건에 부딪혀 쨍그렁 쨍그렁 쇠붙이가 모두 울리는 것 같고, 또 마치 적진으로 나가는 군대가 입에 재갈을 몰고 질주할 적에 호령소리는 들리지 않고 사람과 말이 달리는 소리만이 들리는 듯 했다. 내가 동자에게 물었다. “이게 무슨 소리냐? 네 좀 나가 보아라” 동자가 말하였다. “별과 달이 밝게 빛나고 하늘엔 은하수가 걸려 있으며 사방에는 인적이 없는데 그 소리는 나무 사이에서 나고 있습니다.” 내가 말했다. “아, 슬프다. 이것은 가을의 소리로구나. 어찌하여 온 것인가? 저 가을의 모습이란, 그 색이 암담하여 안개는 날아가고 구름은 걷힌다. 가을의 모양은 청명하여 하늘은 드높고 태양은 빛난다. 가을의 기운은 살이 저미도록 차가와 피부와 뼛속까지 파고들며, 가을의 뜻은 쓸쓸하여 산천이 적막해진다. 그러기에 그 소리가 처량하고 애절하여 울부짖는듯 떨치고 일어나는 듯한 것이다. 풍성한 풀들이 푸르러 무성함을 다투고, 아름다운 나무들은 울창하게 우거져 볼만 하더니, 풀은 가을이 스쳐가자 누렇게 변하고, 나무는 가을을 만나자 잎이 떨어진다. 그것들이 꺾여지고 시들어 떨어지게 된 까닭은 바로 가을이라는 한 기운이 남긴 매서움 때문이다. 가을은 형관(刑官)이요, 때로 치면 음(陰)이요, 전쟁의 상(象)이요, 오행(五行)의 금(金)에 속한다. 이는 천지간의 정의로운 기운이라 하겠으나, 항상 냉엄하게 초목을 시들어 죽게 하는 본성을 지니고 있다. 하늘은 만물에 대해 봄에는 나고 가을에는 열매맺게 한다. 그러므로 음악으로 치면 가을은 상성(商聲)으로, 서방(西方)의 음을 주관하고, 이칙(夷則)으로 칠월의 음률에 해당한다. 상(商)은 상(傷)이란 뜻이다. 만물이 이미 노쇠하므로 슬프고 마음 상하게 되는 것이다. 이(夷)는 륙(戮)의 뜻이다. 만물이 성한 때를 지나니 마땅히 죽임을 당하는 것이다. 아! 초목은 감정이 없건만 때가 되니 바람에 날리어 떨어지도다. 사람은 동물 중에서도 영혼이 있는 존재이다. 온갖 근심이 마음에 느껴지고 만사가 그 육체를 수고롭게 하니, 마음 속에 움직임이 있으면 반드시 그 정신이 흔들리게 된다. 하물며 그 힘이 미치지 못하는 것까지 생각하고 그 지혜로는 할 수 없는 것까지 근심하게 되어서는, 마땅히 홍안이 어느새 마른 나무같이 시들어 버리고 까맣던 머리가 백발이 되어 버린는 것도 당연하다 할수 있다. 금석(金石)같은 바탕도 아니면서 어찌하여 초목과 더불어 번영을 다투려 하는가? 생각건대 누가 저들을 죽이고 해하고 하는가? 또한 어찌 가을의 소리를 한하는가?“ 동자는 아무 대답 없이 머리를 떨구고 자고 있다. 단지 사방 벽에서 벌레우는 소리만 찌륵찌륵 들리니, 마치 나의 탄식을 돕기나 하는 듯 하다. 을축년 동지 지난 후 3일에 단구가 그리다. 출처;http://danwon.org/main.htm (단원 전시관 홈페이지)
노매도(老梅圖)-1804년
60세되던 해인 1804년 겨울에 그린 것으로 지장기마도 기로세련계도 등과 더불어 그의 가장 늦은 작품 중의 하나이다. 극심한 생활고 속에서도 좋은 매화를 보면 돈을 아끼지 않고 사들였다고 전하는 만년에, 매화를 아끼고 사랑하는, 그의 마음을 실감케 해주는 의연한 모습을 한 늙은 매화나무 한 그루가, 화면을 압도하고 있다. 물기 배인 대담한 붓질과 거친 풍상을 견디고 늙은 매화 등걸의 고태를 잘 나타냈으며 눈서리를 무릅쓰고 맨 먼저 핀 꽃술은 노란 색채로 액센트를 주었다. 그리고 매화나무를 감도는 맑은 정기와 은은히 풍기는 꽃향기를 푸른 담채로 감싸놓았다. 거침없는 붓놀림이라든가 먹색과 담청의 어울림이 한껏 돋보이는 수작으로, 만년의 호방한 풍취를 보는 듯하다. 큰 각도를 이루며 굴곡진 매화둥치 아래 갑자동이라는 간기와 단구라는 별호를 썼으며, 그밑에는 농사옹을 자처하던 노년에 맞게 권농지가라는 백문방인을 찍어놓았다.
선상관매도(船上觀梅圖)
朱黃色 옷을 입은 老人이 童子와 함께 술상을 차려 놓은 작은 배에 비스듬이 앉아 멀리 산 중턱의 梅花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단원의 주상관매도(舟上觀梅圖)는 죽음을 앞 둔 두보(712~770)의 삶을 그린 그림이다. 그림은 크다. 164 x 76 cm이니 사람 크기이다. 높은 언덕에 매화가 피어 있고, 배를 탄 노인이 종자와 더불어 매화를 바라보고 있다. 매화는 이토록 큰 그림의 상단의 윗부분에 치우쳐 있고, 노인과 종자가 탄 배는 하단 오른쪽에 치우쳐 있다. 그림의 대부분은 텅 비어 있다. 그것도 가운데가 비어 있다. 가운데는 강물임이 분명하지만 거품이나 물결조차 없으니, 여백처럼 비어 있다. 그림을 이렇게도 그릴 수 있는가. 언밸런스에 상식이 흔들린다. 가운데를 여백으로 처리한 예를 아직까지 알지 못한다. 그림의 중앙에 7언시(七言詩)가 있다. 글자는 크다. 7언시는 중앙보다 조금 상단에 있다. 그림 앞에 썼을 때 가장 잘 보이는 자리이다. 그림 속의 인물과 영물(詠物)은 여백과 시를 위해 존재한다. 왜 이렇게 그렸을까. 더구나 그림은 옅고 글씨는 진하다. 시서화 삼절이라는 단원 김홍도는 그 중에서 시인으로 칭송받기를 바란 것일까. 화제(畵題) 右上의 두인(頭印)은 백문타원인 ‘心醉好山水(좋은 산수에 마음이 취하네)‘이고, 작가인 주문방인(朱文方印)’ ‘弘道‘와 백문방인 ’士能‘이다. 제시(題詩) ’老年花似霧中看‘은 아래 두보(杜甫)의 시에서 따온 것이다.
小寒食舟中作 - 한식 다음날 배 안에서 짓다 역자 - 송명호 佳辰强飮食猶寒(가신강음식유한) 이 좋은 봄날에 억지로 찬 술을 마셔야 하네 밥덩이는 더욱 차네 隱?蕭條戴?冠(은궤소조대할관) 은자(隱者)의 관(冠)을 쓰고 상에 기대니 쓸쓸함에 젖어드네 春水船如天上坐(춘수선여천상좌) 봄물에 뜬 배 하늘 위에 앉은 듯하고 老年花似霧中看(노년화사무중간) 노년에 보는 꽃은 가랑(안개)속인 듯 희뿌옇게 보이네 娟娟?蝶過閒?(연연희접과한만) 너울거리며 노는 나비 고요히 휘장을 片片輕鷗下急湍(편편경구하급단) 여기 저기 나는 갈매기 빠른 여울에 雲白山靑萬餘里(운백산청만여리) 흰 구름 푸른 산 만여 리 길이건만 愁看直北是長安(수간직북시장안) 바로 북쪽이 장안(長安)인 양 시름에 잠기노라 ◈소한식(小寒食) - 한식 다음 날이다. ◈가신(佳辰) - 한식과 한식을 전후한 좋은 봄날을 가리킨다. 청명은 대개 한식날이거나 한식 다음날이 된다. 두보가 이 시를 쓴 때는 청명 전 2일로서 금화(禁火) 3일에 해당된다. 아직 불을 때지 못하여 찬 술을 마시고 찬 밥을 먹어야 하였다. ◈은궤(隱?) - 의자에 기대다. 장자 제물론을 참조하라. <莊子> 南郭子???而坐. ◈할관(?冠) - 은자의 관(?者之冠) ◈무(霧) - 지금은 안개로 쓰나 ‘가랑’이 ‘안개’보다 고어이다. 가랑비는 안개비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시는 최근 소개돈 아래 김홍도의 시조의 전거(典據)이기도 하다. 봄물에 배를 띄워 가는 대로 놓았으니 물 아래 하늘이요 하늘 위가 물이로다 (春水船如天上坐) 이중에 늙은 눈에 뵈는 꽃을 안개 속인가 하노라(老年花似霧中看) 단원의 시조는 두보의 한시보다 훨씬 낫다. 소한식주중작(小寒食舟中作)의 첫 연과 마지막 두 연은 상투적이다. 애국시인 두보답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한식날 장안을 생각하는 두보의 마음에서 세속에의 미련을 끊지 못한 노추가 읽혀진다. 실제로 <구당서> 두보 열전을 읽으면 두보는 인간성이 형편없는 자로 기록되어 있다. 소한식주중작(小寒食舟中作)에서 1, 2, 3, 4연만 시정을 돋울 뿐 5, 6, 7, 8연은 시 전체의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다. 율시를 1연, 2연이라 하지 않고 수(首), 함(?), 경(頸), 미(尾)라 한다. 번거로워서 1연, 2연 등으로 표기한다. 이를 간파한 단원은 두보 시에서 압권인 3, 4연만 살려서 화룡정점을 찍었다. 시조의 초장에서는 욕심 없는 시인의 삶을 유유자적에 맡기고, 중장에서는 春水船如天上坐(춘수선여천상좌)보다 훨씬 뛰어난 시정을 그렸다. ‘물 아래 하늘이요 하늘 위가 물이로다’에서 죽음의 이미지를 재현하고 있다. 실제로 두보는 죽기 2년 전부터 수상가옥에서 살았다. 결국 물에 갇히어 고생하다 죽었다. 두보의 오랜 벗이자 후원자였던 엄무(嚴武)는 두보보다 1년 일찍 죽는다. 혈혈단신이 된 두보는 동정호 남쪽에 있는 강, 상수(湘水)를 거슬러 올라간다. <구당서>에는 폭수(暴水)에 갇히어 만나 열흘 동안 밥도 먹지 못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폭수(暴水)란 집중호우이다. 뇌양(?陽)의 관리가 이것을 알게 된다. 그는 스스로 노를 저어 두보를 찾은 후에 돌아온다. 그러나 두보는 소고기와 백주(白酒)를 마시고 죽고 만다. 현진건의 <운수좋은 날>처럼 말이다. 향년 59세였다. 단원의 그림과 시조는 <구당서> 두보 열전에서 두보가 폭수에 갇힌 모습을 연상케 한다. 두보는 죽음의 순간에서도 꽃을 바라보고자 하였다. 그래서 단원은 물인지 하늘인지 모르는 여백에다 매화를 그린 것이다. 두보가 바라본 꽃은 매화가 아니었다. 동정호와 상수, 뢰양은 북위 28도이다. 제주도보다 더 남쪽이다. 소한식은 양력으로 4월5일 경이다. 매화는 북위 38도인 서울에서 4월 5일 경에 핀다. 두보가 바라본 꽃은 서울에서는 5월에 피는 꽃이었을 것이다. 아무려면 어떠랴. 단원에게 두보는 대나무나 매화만 바라보아야 하리라. 하늘과 물이 구분되지 않는데 층암절벽만이 보인다. 매화는 소나무처럼 꼿꼿이 서서 꽃을 피운다. 두보의 율시에 등장하는 배는 수상가옥이다. 만(?)은 휘장이니 배에는 침실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휘장에 바람이 일지 않는다. 너울거리며 노는 나비의 날개짓을 느낄 만큼 고요한 봄날이다. 바람에 나부낄 필요가 없으니 한막(閒?)이 된다. 그러나 단원은 휘장과 무관한 나룻배를 그렸다. 배는 늙은 시인의 운명을 실은 듯 강물 속으로 잠길 듯하다. 시인 두보는 찬술과 찬밥에 병 많은 몸을 뎁히지도 못하였으리라. 이를 생각하면서 단원은 울었으리라. 더욱이 두보는 3연에서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것이 아닐까.
‘春水船如天上坐’의 하늘은 저승이 아닐는지. 그래야 아래 시구 ‘老年花似霧中看’과 짝을 이루어 비극이 심화된다. 단원도 이 시에 화답시를 썼다. 즉 <선상관매도>에서 제시(題詩)로 사용된 시구는 바로 시조의 종장과 연결되며, 그 앞 시구인 ‘春水船如天上坐(봄 물의 배는 하늘 위에 앉은 듯하고)‘는 시조의 초장과 중장의 바탕이 되고 있다. 이것은 전통 시가(詩歌)에서 말하는 ’점화(點化)‘라는 기법으로서, 남의 시문을 ?겨와서 슬쩍 바꾸어 쓰는 것이다. 물론 그대로 베끼는 것이 아니라 감족같이 뜯어맞추어 흔적없이 재구성하는 것이니, 우리는 전통회화에도 방(倣)이니 모(謨)니 하는 이러한 ’繪畵的 ?化技法‘이 있음을 알고 있다. 김홍도는 특히 위 시조의 “물알이한늘이오한늘우희물이로다”하는 부분에서 독자적인 공간 감각을 유감없이 드러내어 승화시켰다. 이렇게 두보(杜甫)의 시한수로부터 받은 김홍도의 감홍이 한편으로는 그림으로 형상화되고, 한편으로는 시조로 표현되었으니, 한 주제가 같은 작가에 의하여 두 장르에 걸쳐서 번안된 매우 흔치않은 작례이다. 화면 좌하에 산자락 끄트머리를 슬쩍 비치고 그 뒤로 조촐한 주안상을 차린 배안에 비스듬히 앉은 주인공과 동자를 그렸으며, 안개 가둑한 물 건너에는 얼비취는 언덕과 몇 그루의 꽃나무를 묘사하고 있다. 경물(景物)보다는 여백이 그림의 핵으로 작용하는, 아니 경물과 여백이 서로 긴밀하게 침투하는 김홍도 노년 특유의 시적인 공간감각을 보여준다. 출처;宋明鎬 (한학자, 『예기집설대전 1,2』 번역)
염불서승도(念佛西昇圖)
세상을 정리하고 구도자의 길을 가려고 면벽수도하는 해탈한 노승의 마음을 통해, 화가의 마음을 볼수 있습니다.
초원시명도(焦園試茗圖)
애내일성(埃乃一聲)
애내(?乃)는 노 젓는 소리, 혹은 어부의 노래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그림의 화제는 '어기어차 한 소리에 산과 물은 푸르도다'가 되겠지요. 그림도 시원하지만, 화제도 시원합니다. 김홍도 말기회화의 또 하나의 경향으로, 중국 당, 송8대가 등 명가들의 글을 적고 그 시제에 맞는 그림을 그린 것들이 있다. 물론,그것은 그 말년의 사경풍속이나 산수인물과 유사한 화재로, 그려지는 것이 상례이고 화법도 같다. 60대 이후에 사용하기 시작한 아호인 단구라고 서명한 이 그림은, 내일성산수록(시원한 뱃노래 소리에 강산은 더욱 푸르러진다)라는 당나라의 문장가이며, 시인인 유정원의 시구에 맞추어 그림으로 번안해 낸 것이다. 강 언덕의 암벽을 강하게 부각시키고, 그 아래로 수면 위에 두 척의 나룻배를 수평으로 그려 넣었으며, 뒤로는 폭포가 흘러내리는 모습을 엷게 표현하였다. 대각선식의 대담한 화면구성, 바위 주름과 잡목의 거친 필치와 시원한 담채 처리는, 마치 폭포소리에 지지 않는 애내일성의 흥취가 우렁찬 강 언덕의 분위기를 보는 듯하다. 그런데 막상 강변의 배 위에는 목청을 돋구는 인물들이 보이지 않고, 술독과 함께 만취된 어옹들이 적막한 표정으로 그려져서 산수의 힘찬 분위기와는 다른 의외의 대비이다. 이러한 시제의 해석과 화면의 연출은, 해학에 가득한 단원만이 지닐 수 있는 돋보이는 재치의 발상이다.
어부오수도(漁夫午睡圖)
후기산수화로 세속에서 벗어나 유유자적하는 삶을 잘 나타내고 있다. "멀리 앞여울까지 흘러가는 것도 모르고 있네"
조환어주(釣還漁舟)
시비는 고기를 낚는데 그치지 않고 영욕은 항상 벼슬아치를 따르네
월하취생도(月下吹笙圖)
월하취생도(月下吹笙圖)-김홍도 말년 천재 예술가의 고뇌와 외로움, 창작의 어려움 질그릇 술병과 사기 되사발, 그리고 흰족자 두 개, 벼루와 먹과 바닥에 나뒹구는 붓 두 자루. 어느 화가나 시인의 일상에 틀림없다. 그런데 그 옆에서 준수한 사내가 파초를 깔고 앉아 시서화(詩書畵)의 정취(情趣)를 마음껏 농하다가 그만 한병 술을 다 비운 취기로 인해 복받쳐 오르는 스스로의 심사를 달랠 길 없어 달빛 부서지느 방안에서 구슬프게 생황(笙簧)을 불고 있다. 그림보다 더 아름다운 제시(題詩)가 사내의 처절한 심사를 말하여 준다. 달빛어린 방안의 처절한 생황소리 용울음을 이기네 『전당시(全唐詩)』에 실린 나업(羅?)의 생황시(笙簧詩)를 화제로 택하여 그린 그림이다. 그러나 이는 바로 또 하나의 단원 자화상(自畵像) 같은 작품이라 생각된다. 단원은 어떤 화원화가보다도 자의식(自意識)이 강했고, 자화상 같은 그림을 많이 그렸기 때문이다. 1784년 <단원도(檀園圖)>에서는 거문고를 타는 의젓한 중년의 자화상을 그린 바 있고, 1796년경 전후의 <호귀응렵(豪貴鷹獵)>에서는, 매사냥을 즐기는 고을 원님의 호사스런 모습으로 그렸으며, 최구(崔鳩) 소장의 <포의풍류(布衣風流)>에서는, 고아(古雅)한 장년 풍류객의 자화상 같은 그림을 그린바 있다. 이 그림은 <포의풍류>와 유사한 시기에 비슷한 심정을 담은 그림이라 생각된다. 두 그림의 필치가 모두 유려하고 능숙하되 한편으로 숙(熟)을 넘어선 생(生)의 고미(苦味)를 띠고 있으며, 두 그림의 화의(畵意)가 모두 주인공의 일상 속에 비친 내면적 자의식(自意識)을 강조하고 있음은 물곤 제시(題詩)의 내용과 필치도 유사하기 때문이다. 다만 <포의풍류>에서는 “아름다운 창과 흙 벽, 종신토록 야인(野人)으로 그 속에서 읊조리리(縟窓土壁 終身布衣 嘯永 其中 )”라고 하여 자신의 지향처를 보다 직접적으로 표현하면서 그런 이상적 모습을 그려본 것이라면, 이 <월하취생>은 현실적으로 그런 꿈을 이룰수 없는 중인(中人) 직업화가(職業畵家)의 한계에서 폭발한 울분을 표현한 뒷모습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이 가까이에서 바라보며 전해주는 단원의 속마음과 그것이 폭발하는 뒷모습을 읽어보면 이런 해석이 전혀 억측이 아님을 미루어 짐작 할 수 있다. 지금 사능(士能)의 사람됨이 얼굴이 빼어나게 아름답고 마음이 툭터져 깨끗하니 보는 사람들이 모두 고아하고 탈속하여 거리의 용렬하고 좀스러운 무리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성품이 또한 거문고와 피리의 고아한 소리를 좋아하여 매번 꽃피고 달 밝은 밤이면 때때로 한두 곡조를 희롱하며 스스로 즐기었다. 사능은 한편으로 음악에도 통하여 거문고와 피리의 운사(韻事)가 그 오묘한 경지에 이르렀으며, 풍류가 호탕하여 매번칼을 치며 슬프게 노래하고 싶은 생각이나면 분개하거나 혹 많은 눈물을 흘리며 울기도 하였다. 사능의 마음은 본디 아는 사람만이 아는 것이 있다. 제시(題詩)의 앞 뒤에 ‘金弘道印’의 방형백문인(方形白文印)과 ‘一卷石山房’의 유인(遊人)을 찍었는데, ‘김홍도인’은 1795년의 《을묘년화첩(乙卯年畵帖)》에도 찍혀 있는 것이다. 가운데 접혔던 자국이 있어 화첩 그림이었던 듯 하나 지금은 이 그림만이 편화(片畵)로 전해진다.
☞주부자시의도(朱夫子詩意圖)-가가유름도(家家有凜圖 제8폭), 월만수만도(月滿水滿圖 제4폭) ※주부자시의도(朱夫子詩意圖)-1800년작품 김홍도가 1800년 정초에 정조(正朝)에게 진상한 8폭 병풍 가운데 여섯 폭으로 정조태왕은,이것들을 보고 크게 기뻐하였다고 한다. 제1폭 <사빈신춘도(泗濱新春圖)>와 제5폭 <백운황엽도(白雲黃葉圖)>는 전하지않는다. 정조의 어제문집(御製文集)인 홍재전서(弘濟全書)에 관련 기록이 여기서 정조는 이 작품에서 김홍도가 '주자(朱子)가 남긴 뜻을 깊이 얻었다'고 칭찬하고 화폭에 보이는 주자시마다 화운시(和韻詩)를 붙였다. 각폭에는 김홍도 자필로 주자(朱子)의 칠언절구(七言絶句)시 한 수씩과 성리학자 웅화(熊禾)의 주(註)가 적혀 있다. 묵서(墨書) 관지는 일체 없으나 도서(圖書) 3과(顆) 의 내용으로 작가가 확인된다. 즉 화제 우상(右上)의 두인(頭印)이 백문타원인(白文?圓印) '(좋은 산수에 마음이 취하네)'로서 김홍도의 도서이며, 작가인 주문방인(朱文方印)''와 백문방인(白文方印)''이다. 이 중 ''라는 도서(圖書)는 위 작품이 어람용()이었음을 말해 준다. 작품의 주제는 대학(大學) 경일장(經一章)의 '팔조목(八條目)이다. 팔조목이란 유교의 학문과 수양(修養)과 정치의 본령을 단계적으로 제시한 것이므로 곧 조선왕조의 치국 이념인 성리학 사상의 대강(大綱)을 다룬 것이라 하겠다. 소재는 주자(朱子)의 칠언절구 한시 내용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가가유름도(家家有凜圖 제8폭)
「석름봉, 원시(石凜峯)」 일흔 두 봉우리 모두 하늘을 찌를 듯한데 한 봉우리에 돌노적가리라는 옛 이름이 전하누나 집집마다 노적가리 있어 높기가 그만하니 참 좋은 사람 세상 쾌할한 세월일레 웅화가 말하기를 “백성이 부유하면 예의가 자리잡히니 천하가 태평하리라”했다. 작품은 주제의 쾌활함에 걸맞는 활달한 구도로 되어 있다. 즉 아래로부터 비스듬히 갈지(之) 자로 전개되면서 1.타작장면, 2. 집 뒤의 대숲에서 산기슭 윤곽선까지, 3. 아지랑이 낀 부분, 4. 석름봉을 비롯한 72봉우리 등이 삼각형으로 맞물려 있는 것이다. 72봉우리 등이 삼각형으로 맞물려 있는 것이다. 72봉은 뾰족한 암봉이 병기(兵器)를 늘어세운 듯 날카롭게 솟았고 그 앞에 노적가리 모양의 석름봉이 우뚝섰다. 그 아래는 아지랑이 여백으로 균형을 잡았는데 아랫 변에 산기슭 윤곽선을 진하게 긋고 수목을 열지워 세워 마감했다. 이 산기슭을 아지랑이로 처리한 수법은 <기로세연계도(耆老世聯?圖)>에 보이는 것과 같다. 그 아래 절벽 앞의 나무는 가지 굵기가 멋대로 넓었다 좁았다 하는 김홍도 만년의 특징적인 묘법을 보이는 평면적인 형태로서 맨 윗 가지가 직각으로 꺾인 사의적(寫意的)인 묘법은, <추성부도(秋聲賦圖)>의 그것을 연상시킨다. 그런가 하면 마을의 나무는 선묘 자체는 구불구불하지만, 가지가 무척 번다하게 묘사된 점에서 김홍도 초기 수지법(樹枝法)의 여운이 보인다. 아래는 한창 가을걷이로 바쁜 마을 풍경이다. 초가집과 담장으로 구획지어진 이곳에서는 마당에 멍석을 깔고 키를 높이 쳐들고 곡식을 까부르는 이, 허리 아래로 키질하는 이, 흩어진 낱알을 쓸어 모이는 이가 있고, 아기 젖먹이는 아낙, 어린애와 광주리 옆에서 일하는 아낙과 서 있는 아낙이 있다. 뒷집에서도 한 아낙이 아기를 안고 밖을 내다본다. 다시 右下 구석에는 창턱으로 얼굴을 내민 인물과 이야기하며 디딜방아를 찧는 사내와 아이의 도움을 받으며 절구 찧는 인물이 있다. 이처럼 많은 인물을 여기저기 요령있게 배치하여 추수의 흥겨운 분위기를 그려냈다. 특히 석름봉의 형태와 꼭 닮은 노적가리가 곳곳에 벌려 있어, 타작의 기쁨과 어울리는 운율감을 준다. 태평 천하를 이룩하려면 백성의 곳간을 채워야 함을 강조 한 것이다.
월만수만도(月滿水滿圖 제4폭)
「무이도가 넷째 굽이, 원시」 넷째 굽이 동서 양 편에 큰 암벽 솟았는데 암벽 꽃엔 이슬 달리고 푸르름이 드리웠네 금빛 닭 울음 그친 후에 보는 이가 없으니 빈 산에 달빛 차고 못엔 물이 가득하네 웅화가 말하기를 “정심(正心)이란 다만 어둡고 어리석지 않아 어지러움이 없음이라” 하였다. 무이도가(武夷棹歌)』는 1184년에 주자(朱子)가 제5곡(第5曲) 은병봉(隱屛峰) 아래에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짓고 살면서 지은 작품으로, 예로부터 시 속에 그림이 있고 붓 끝에 정이 묻어난다고 평가된 명시이다. 따라서 중국은 물론 조선에서도 수많은 작가들이 화운시를 제작했는데, 특히 대학자 주자를 흠모하는 유학자들이 즐겨 지었고 그 사적을 모방하여 자신의 거처를 구곡(九曲)으로 명명한 예도 많았다. 위 시는 그 중의 제4곡이다. 작품을 보면 아래쪽이 깎여들어간 대장봉(大藏峰)이 물가에 위태롭게 섰고 계곡 건너 선조대(仙釣臺)가 있어 동서로 마주하였다. 그 사이로 가는 폭포 물줄기가 아슴프레하다. 암벽에 매달린 꽃나무는 이슬을 머금었으며 위쪽에는 초목이 우거졌다. 원래 대장봉 암벽 아래에 굴이 하나 있어서 옛적에 그 안에서 닭이 울었으므로 금계동(金鷄洞)이라 했다. 그러나 이제 금계 울음소리는 들리지 않고 보는 이도 없어 다만 공산탱월(空山?月)과 심담한수(深潭寒水)만이 정막함을 도운다. <월만수만도>는 단순한 조형요소로 이루어낸 걸작이다. 우측 대장봉을 진하게 처리하고 맞은편 선조대와 폭포를 매우 아스라하게 처리하여 대비시켰다. 특히 좌측 암벽의 대부분을 거의 여백으로 비워 두고 아래쪽만을 약간의 윤곽선과 연록색 태점으로 묘사한 것은 놀라운 공간감각이다. 대조적으로 대장봉 아래편 바위는 강한 농묵선 윤곽에 농묵의 태점으로 든든하게 처리했다. 물 위로 솟은 바위 역시 유사한 형태로 다듬어 조화를 이룬다. 다만 물에 씻겨 좀더 둥글어진 형태이고 태점을 생략했다. 못의 물결은 사진으로는 잘 안 보일 만큼 흐린 선으로 가로 길게 긋고 담청색을 바림해서 깊고 잔잔한 느낌을 준다. 암벽 위쪽의 멀리 보이는 나무들은 연운에 맞닿았다. 원산은 단정한 윤곽선 위에 청색 선염을 베풀었고 보름달도 바깥을 담청으로 바림하여 맑고 깨끗한 느낌을 준다. 구도를 보면 두 암벽을 사이에 두고 위편의 보름달 뜬 하늘과 아래편 깊은 못물이 서로 조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밝은 달빛 가득한 빈 산, 빈 하늘과 깊은 못에 가득한 물의 고요하고 담담한 정경은, 곧 正心의 경지를 상징한다. 출처;단원 전시관 홈페이지 http://danwon.org/main.htm
서성우렵도(西城羽獵圖)-1796년
한정품국도(閒亭品菊圖)-1796년
화성팔경도(華城八景圖)인 서성우렵도(西城羽獵圖)와 한정품국도(閒亭品菊圖) 1796년 수원화성 완공으로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 편찬 할때 화성일대의 풍경을 그린작품 이 두 작품은 1796년(正祖 20) 8월 완공된 수원성(水原城)의 실경(實景)을 그린 것으로, 수원성의 축조보고서인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에 기록된 바 당시 행궁(行宮)에 비치했던 화성춘추팔경도병풍(華城春秋八景圖屛風) 2좌(坐) 중 추팔경도병풍(秋八景圖屛風)에서 떨어져 나온 것으로 보인다. 이는 두 작품 모두 좌상단에 예서체(隸書體)로 단정하게 전기(前記) 『화성성역의궤』에 기록된 그대로의 제목을 썼고, 그 아래 ‘신홍도(臣弘道)’ 취화사인(醉畵士印)‘이 단정하게 찍혀있는 데서도 지지된다. 작품을 보면 먼저 다섯 번째 폭이었던 서성우렵(西城羽獵)은 수원성(水原城) 서장대(西將臺) 밑과 화서문(華西門). 장안문(長安門) 북문(北門)밖 들판에서 사냥하는 모습을 담았는데, 실제경치를 지그재그식으로 배치하되, 서장대를 가장 중앙에 배치하고, 그 아래와 그 너머 들판에 사냥하는 장면을 배치하였다. 필치는 만년(晩年)에 보이는 하엽준(荷葉峻)의 모습이 일부 보이며 멀어갈수록 희미하고 가는 필치를 사용하여 시원한 조망감을 잘 표현하였다. 화성추팔경도병풍(華城秋八景圖屛風)의 일곱 번째 폭이었던 <한정품국(閒亭品菊)>은 수원 행궁(行宮)안의 미로한정(未老閒亭)을, 그리고 맨 아래 연무(烟霧)로 싸인 곳이 화서문(華西門)이 있는 곳이며, 좌측 큰 건물이 낙남헌(洛南軒)이다. 앞의 작품보다 비교적 한정된 지역을 담았으나 산사면(山斜面)의 계곡을 평행으로 배치하여 다소 원근감(遠近感)을 내었고, 무엇보다도 우하단을 연무가 자욱히 낀 것으로 처리하여 공간의 막힘을 피하고, 또 좌상단의 하늘과 멋진 조화를 이루었다. 화면의 구도.공간처리.필치 등 김홍도의 원숙기(圓熟期)의 기량이 잘 나타난 작품이다.
소림 명월도(疎林 明月圖)-1796년
가을밤에 환하고 밝은 보름달에, 나무사이로 바람이 불때 홀로 깨어,잠못 듭니다.
상산한담도(常山閑談圖)
은사(隱士)의 대명사로 유명한 상산(常山)의 사호(四皓)를 화제로 삼은 그림이다. 상산은 섬서성(陝西省) 상현(商縣)의 동쪽에 있는 산으로서 이곳에는 진시왕(秦始王) 말기의 난세(亂世)를 피하여 네 명의 노인이 은거하였다. 동원공(東園公)ㆍ하황공(夏黃公)ㆍ기리계(綺里季)ㆍ녹리선생(?里先生)이, 그들로서 머리와 수염이 모두 희었기 때문에 사호(四皓)라 불리었다. 난리가 끝난 뒤 한(漢) 고조(高祖)가 불렀으나 나오지 않았을 정도로 은거의 뜻이 깊었기 때문에 한고조가 항우(項羽)에게는 이겼으되 사호에게는 졌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리하여 고래로 소부(巢父) 허유(許由)와 함께 은사의 대명사로 불리며 그림의 화제로도 많이 그려졌다. 병진년화첩(丙辰年畵帖)》과 흡사하여 대략 유사한 시기의 50대 절정기 작품이라 생각된다
추림쌍치도(秋林雙雉圖)-1796년 병진년화첩(丙辰年畵帖)중에서 일부
가을수풀에서 어린 꿩 한쌍이 노니는 모습을 그린 그림으로, 마치 꿩색깔이 가을 단풍을 연상 시킨다.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있는 산속 계곡에 조용히 노니는 꿩 한쌍을 중심으로 그린 작품이다. 어린꿩들의 노는모습은 왠지 낯설지 않고 친근감있게 다가온다. `꿩 대신 닭`이라는 속담이 있듯이 꿩은 우리민족에게는 정감있는 새이다. 꿩은 흔한 텃새로 한국의 대표적 사냥새로 잡식성이지만 주로 곤충류를 잡아먹는다. 여름에는 산과 야산의 숲에 살지만, 가을과 겨울에는 낮은 지대로 옮겨 지낸다. 예로부터 매와 함께 꿩 사냥을 즐겨 할만큼, 왕과 모든백성이 꿩의 자태와 민족적인 새 때문에 다른새 보다도 더 좋아한다. 옛날 조상들이 제사에 적을 올릴 때는 치적제일(雉炙第一)이란 말이 있어서 적을 올릴 때는 반드시 꿩을 사용했다. 또 근래의 전통 혼례를 보면, 폐백상에는 닭을 사용하는데 예전에는 꿩을 사용했다고 한다. 꿩치(雉)라고도 하지만 폐백치라는 해설도 있다. 말하자면 우리 고유의 재래 미풍 양식으로 제사상의 적이나, 혼례시의 폐백이나 명절 설날의 떡국이나 모든 고기는 꿩고기로 사용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오늘날에는 농기(農旗)의 꼭대기나 무당의 모자에 꿩깃을 꽂아 신기(神氣)를 받들고 있다. 고구려에서는 개선장군의 머리에 꿩깃을 꽂아 주어 영광과 위용(威容)을 자랑하게 하였다. 조선시대 중기에는 꿩을 상서로운 새로 여겨서 초례(醮禮)를 지내는 상에 꿩을 놓고 교례하였으며, 폐백에 꿩고기 포(脯)를 놓았다. 또한 한국의 전승설화에 보은의 새로 자주 등장하며, 다급해지면 풀섶에 머리만 처박고 몸뚱이는 드러내는 꿩의 습성 때문에, 남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는, 외고집과 어리석은 행동을 빗대어 표현하기도 한다. <삼국사기>에 흰꿩을 왕에게 바쳤다는 기록이 있으며, <삼국유사>에는 김춘추가 꿩 아홉 마리를 먹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우리 나라에서는 예로부터 흰꿩을 귀하게 여겼고 꿩을 사냥해서 먹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속에서는 무당의 모자에 꿩깃을 꽂아 신(神)의 기운을 받는 매개체로 사용하였고, 고구려에서는 개선장군의 머리에 꿩깃을 꽂아 주어 영광과 위용(威容)을 자랑하게 하였다. 조선시대 궁중 복식에도 사용되었다. 꿩을 수놓은 까닭은 아름다움과 다양한 빛깔이, 곧은 절개와 덕(德)을 실천해야 함을 상기시키기 때문이라 한다. 꿩은 그 용모가 봉황에 비교될 정도로 화려하고, 품위 있는 성품 때문에 무늬로써 많이 그려졌고 사이좋은 한 쌍의 아름다운 새로 인식되어 여러 가지 생활 공예품 장식 무늬로 사용되었다. 복식에서는 조선시대 궁중 복식인 구장복에서 꿩 무늬를 찾아볼 수 있고, 적의에는 옷 전체에 표현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꿩은 암컷을 까투리 라하고,수컷을 장끼 라한다. 수컷은 "꿩꿩꿩" 하고 제법 큰 소리를 내나,암컷은 그보다 작게 "꽥꽥" 하는 소리를 낸다.
☞충청도 연풍 현감재직시(1791년~1794년)아들 김양기(金良驥) 단원유묵첩(檀園遺墨帖)에 수록 ▩ 병진년화첩 1)옥순봉(玉荀峯)-김홍도 4편에 사진 실림-1796년 2)사인암도- 김홍도 2편에 사진 실림-1796년 3)도담삼봉(島潭三峯)- 김홍도 4편에 사진 실림-1796년 4)또 다른작품;호귀응렵도(豪貴鷹獵圖)-1796년
적어도 현감이 사냥을 나가면 수십여명의 보조 인원들이 동행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이 그름에는 8명밖에 등장하지 않고 있다. ▶눈발날리는 초겨울의 계절성(김홍도가 삿갓아래 雪具를 썼음) ▶매가 막 꿩을 땅에 메어꽂는 모습 ▶ 매를 보고 짖어대는 사냥개의 사나운 모습 ▶그 와중에 딴청을 피우는 이방의 모습 등이 마치 동영상을 보듯 생동감있게 그려져 있다.
☞화성능행도병(華城陵行圖屛)은 총8폭으로 이중 하나인 시흥환어행렬도, 노량주교도섭도등을 <원행을묘정리의궤(園行乙卯整理儀軌)>의 머리에 첨가하도록 지시 시흥환어행렬도 (始興還御行列圖);제7폭-1795년
얼마나 장대하고 엄청났는지를 그림을 통해알수있음 한사람 한사람 세세하게 그리고 설명을 써 놓음
노량주교도섭도 (鷺梁舟橋渡涉圖);제8폭-1795년
첫째 날윤2월 9일 새벽에 창덕궁을 떠나다 노량행궁(용양봉저정)에서 점심을 들다 시흥행궁에서 하룻밤을 묵다
§ 행차의 마지막 날인 윤2월 16일, 노량진의 주교(배로 다리를 만들어)를 건너며 서울로 행궁하는 행렬장면을 용산쪽에서 바라보고 묘사한 것이다.
주교 가운데의 홍살문을 혜경궁 가마가 지나고 있으며 그 뒤에 정조의 좌마(座馬)가, 강 건너편에 보이는 용양봉저정 행궁 앞에는 두 군주의 가마가 보인다. 화려하고도 장엄한 행차의 모습도 인상적이지만, 구경 나온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들 또한 생생한 현장감을 더해 준다. ※김홍도 50대 초반의 작품
후불탱화(後佛幀畵)-삼세여래후불탱화(三世如來後佛幀畵)
경기도 화성시에있는 용주사의 후불탱화로 1790년완성 서양화의원근법과 투시법이 반영돼 입체감이 있어 사실적인화풍의 탱화 작품이다. 왼쪽부터;약사불,석가모니, 아미타불 밑에는 사대천황 묘사함
김홍도-일본 대마도 그림(1789년) 정조태왕의 명령으로 일본정세와 실정을 소상하게 그려 오라고함. -오세창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김씨가보에 기록됨 이형록(李亨祿)-책거리(冊거리)작품(사면척량화법)에서 -김홍도 4편에 사진 실림- ※김홍도는 서양의 사면척량화법인 이기법을 잘했다. 이 서양화법과 청나라연경에 가서 한달 동안 천주당성화를 보고 응용하여 후불탱화를 완성했다.(김홍도 4편에 사진 실림) 통도사 전경도 1789년 ※유재건(劉在建)-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에 김홍도와 김응환이 영남지방(1789년)과 금강산(1788년)을 두루 다니며 그렸다는 내용 기록 |
첫댓글 고전미술 공부에 역사공부에다 김홍도 연구까지 하니 일석삼조 입니다
시흥환어행렬도를 보니 청계천 벽에 그려진 화성행궁 행렬반차도 처럼 엄청난 규모군요
귀중한 문화재로 감사합니다.
언젠나 귀한 자료로...저의 모자라는 지식에 도움을 주시고 그림 감상 하는 안목을 향상 시켜주심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