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회고록 42 - 최종화] 국민 과분한 사랑 받아…보답 위해 뭐든 하겠다
2021년 12월 30일 밤 11시경 서울구치소장이 사면장을 가지고 병실을 방문했다.
유영하 변호사가 대신 사면장을 수령했고 정확히 31일 0시가 되자 구치소 직원들이 인사를 하고
퇴실한 후 경호실 직원들이 병실을 경호하기 시작했다.
구치소 직원들이 병실을 떠나고 나서야 비로소 내가 석방되었다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경호실 직원 중에는 예전에 얼굴을 본 직원도 있어 반가웠다.
병실에 혼자 남게 되자 갑자기 병실이 넓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다음 날부터 가끔 병원 복도로 나와 걷기도 하면서 체력을 회복하려고 노력했다.
빨리 회복해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당시의 내 몸 상태로는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건강을 어느 정도 회복해 병원 밖으로 나오게 된 것은 2022년 3월 24일이었다.
이날 오전 8시30분쯤 남색 코트를 입고 나갔다. 공교롭게 5년 전 구속 때 입었던 것과 같은 옷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특별한 의미가 있었던 것은 아닌지 궁금해하는데, 사실은 입을 수 있는 옷이 그것 하나밖에 없었다.
내곡동 사저도 경매로 넘어갔고 내 옷을 제대로 챙길 형편이 아니었다.
이에 앞서 2022년 3월 5일 대선 사전투표에서도 이 옷을 입고 투표장에 갔었다.
3월 24일 오전 삼성서울병원 20층 병실에서 나와 현관까지 가는 길은 내 평생 잊기 어려운 장면이었다.
거대한 병원 안은 의사, 간호사 등 의료진과 환자, 그리고 보호자들로 가득 메워져 있었다.
그들이 나를 바라보면서 반갑게 손을 흔들어주는 따뜻한 모습에 나는 마음이 편안해졌다.
일부는 휴대전화를 들고 나를 찍기도 했다.
그런 것을 보면서 내가 바깥 세상으로 다시 돌아왔다는 것을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나도 경직된 표정을 풀고 최대한 밝은 표정을 짓고 눈인사로 화답했다.
사면 뒤 퇴원, 현관 나서자 쏟아진 시민 격려
2022년 3월 24일 서울 강남구 삼성서울병원에서 퇴원한 박근혜 전 대통령이 지지자들의 격려를 받고 있는 모습.
중앙포토
이윽고 현관을 나서자 카메라 플래시가 쏟아지면서 환호성과 함께 “대통령님 사랑합니다” “힘내세요” 같은
격려 목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탄핵 이후로는 처음 느껴보는 분위기였다.
병원 측 안내를 받아 나온 반대편 쪽에는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 조윤선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김재수 전 농림축산부 장관 등 재임 당시 같이 일했던 인사들과 국민의힘 박대출 의원, 서상기 전 의원 등이 있었다.
오랫동안 고생한 그들과 인사라도 나눴으면 좋았을 텐데,
취재진이 내 주변을 둘러싼 데다 대기하고 있는 차와 다른 방향이다 보니 제대로 인사를 나눌 수 없었다.
나는 대구 달성 사저로 가기에 앞서 서울 현충원에 있는 부모님 묘소를 찾아 참배했다.
2017년 1월 1일 이후 만 5년 만이었다. 사면 소식을 들었을 때 무엇보다 먼저 부모님을 뵙고 싶었는데
묘소에 선 순간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몇 년 만에 인사를 드릴 수 있게 되어 감회가 새롭고 기쁘면서도 대통령으로서 소임도 다 못하고
이렇게 부모님을 찾아뵙게 된 것이 무척 죄송스러웠다.
부모님께 인사를 마친 나는 사저로 들어갔다.
달성은 내가 1998년 보궐선거에서 당선된 이래 줄곧 나에게 힘이 돼준 곳이었다.
나는 사저에 들어가기에 앞서 지역 주민들에게 인사를 드리고 싶었다.
이 과정에서 갑자기 인파 속에서 소주병이 날아드는 불상사가 있기도 했으나,
경호원들이 잘 대처해준 덕분에 큰 소동 없이 인사를 마치고 귀가할 수 있었다.
특검팀 수사팀장이던 윤 당선인의 사저 방문
2022년 4월 12일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은 대구 달성군의 박근혜 전 대통령 사저를 방문했다.
중앙포토
집으로 돌아오고 약 20일가량 지난 4월 12일,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사저를 방문했다.
사실 당선 직후 찾아오고 싶다는 의사를 전해 왔었는데 당시 나는 병원에 있었고
코로나19로 인해 외부인이 병실로 면회를 오려면 PCR 검사도 받아야 하는 등 절차가 복잡했다.
그래서 내가 대구로 내려온 뒤 날을 다시 잡기로 했던 것이다.
윤 당선인은 내가 탄핵되는 과정에서 특검팀의 수사팀장이었고, 중앙지검장 시절에는 형집행정지를 불허하기도 했다.
세간의 기준으로 본다면 좋은 인연으로 시작된 관계는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면 구치소에 있을 당시 통증에 너무 시달렸기 때문에 하루하루가 힘들었던 처지라서 형집행정지가 불허될 때마다
또 이 통증을 참고 견뎌야 한다는 생각에 많이 아쉬웠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분이 대선 과정에서 내세운 국민 통합의 메시지에는 공감하고 있었고,
보수 정권이 들어서야 한다는 생각에서 지방선거나 총선과 달리 대선 때는 투표에 참여하기도 했다.
당시 여러 경로를 통해 투표는 꼭 해달라는 부탁을 받기도 했다.
그분은 나와 이명박 전 대통령의 사면 추진을 약속하는가 하면 나의 사면 발표 때는
“건강을 꼭 회복하셨으면 좋겠다”는 메시지를 전해 오기도 했다.
12일 오후 찾아온 윤 당선인과는 50여 분간 대화를 나눴다.
분위기는 차분했다.
그 분은 지난 과거 일에 대해 “참 면목이 없다. 늘 죄송했다”고 했고 나는 그저 담담히 듣기만 했다.
윤 당선인은
“(박근혜 정부의) 좋은 정책이나 업적이 제대로 알려지지 못한 부분을 굉장히 아쉽게 생각한다”면서
“박 전 대통령께서 하셨던 일에 대한 정책을 계승하고 널리 홍보하겠다.
명예를 회복하고 국민에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도록 하겠다”고 약속해 고마웠다.
그러면서 그는 대통령 취임식에 와달라고 부탁했고 나는 가능한 한 노력하겠다고 대답했다.
“꼭 참석하겠다”고 말하지 못한 것은 정말로 몸 상태에 대해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취임식서 만난 김건희 여사 “꼭 찾아뵙고 싶다”
2022년 5월 10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에서 열린 제20대 대통령 취임식이 끝난 뒤
윤석열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는 박근혜 전 대통령을 배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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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5월 10일 윤 대통령의 취임식이 열린 곳은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인데,
야외인 데다 쉴 만한 그늘이 없는 땡볕이다 보니 의사를 비롯해 주변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거기다가 장시간을 차로 이동하는 것도 아직까지는 자신이 없었다.
윤 대통령의 취임을 며칠 앞둔 2022년 4월 26일 취임식 준비위원장을 맡은 박주선 전 국회부의장이
대구까지 찾아와 윤 대통령의 친서와 초청장을 전해 주면서 참석을 간곡하게 부탁했다.
취임식 전날까지 참석 여부에 대해 결정을 하지 못하다가 그날 저녁 유 변호사에게 참석을 통보하라고 했다.
취임식 당일 오전에 나의 건강을 염려한 정부 측에서 열차를 보내주어 열차를 타고 취임식장으로 향했다.
취임식을 마치고 나를 배웅한 김건희 여사는 “꼭 한번 찾아뵙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2022년 대구로 돌아온 뒤 나는 특별한 활동 없이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냈다.
처음에는 건강 때문에 무척 힘들었다.
삼성병원에서 퇴원 당시 의료진이 재활을 강조하면서 필라테스를 꼭 해야 한다고 권유했다.
그러면서 병원 측에서 대구에 있는 필라테스 관계자를 소개해 주었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운동을 해오고 있다.
스스로 정한 일과표에 맞추어 내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해 운동을 하고 있다.
그 덕분인지 지금은 많이 회복되어 바깥 외출도 할 수 있는 몸 상태를 만들었다.
달성으로 돌아온 후 그동안 하지 못했던 짐 정리를 틈틈이 하면서,
내가 보관하고 있던 아버지와 어머니의 유품들을 정리해 아버지 기념사업회에 기증했다.
그리고 준비 없이 퇴임하고 이어 구치소로 들어갔던 탓에 아무렇게나 방치되다시피 했던 내 짐도 천천히 정리했다.
때로는 재임 시절의 사진과 메모 등을 보면서 당시 상황을 떠올리기도 했지만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회한만 더 깊어졌다.
함께 국정 이끌던 분들 노고, 역사가 기억할 것
2022년 3월 24일 한 시민이 박근혜 전 대통령이 퇴원을 앞두고 있는 서울 강남구 삼성서울병원 앞에서
꽃다발을 들고 기다리고 있다.
중앙포토
사실 그동안 과거 정치를 같이했던 분들이나 청와대에서 일했던 분들이 만나러 오겠다고 한 적도 있었다.
그중에는 오랫동안 나와 정치 인생을 함께했던 이들도 있다.
하지만 이제 과거 인연은 과거 인연으로 남겨두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지금 내가 누군가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눌 때 그것이 나의 생각과 다르게 포장되어 나가는 것이 부담스럽기도 하다.
과거에 몇 차례 비슷한 일을 겪은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건강이 호전돼 일상생활에 아무런 지장을 주지 않을 정도가 되면 지역에 계신 분들부터 차근차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그리 머지않은 날에 그렇게 되리라고 생각한다.
요즘은 과거에 나와 함께 국정을 맡아 일했던 분들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한다.
외교·안보·국방·경제·문화·복지 등에서 그분들은 참 열심히 일했고,
그랬기에 내가 이루고자 했던 정책들이 현실화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 자리를 빌려 정말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그분들의 노고와 열정은 역사가 기억할 것이다.
정말 파란만장했던 삶…국민 있어서 행복했다
대구시 달성군 유가읍 자택의 박근혜 전 대통령.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나는 오로지 국민이 걱정 없이 잘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정치를 시작했고,
국회에서부터 청와대에 들어가 대통령직을 수행한 마지막 날까지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비록 나는 개인적으로는 임기를 채우지 못했지만, 박근혜 정부 자체는 결코 실패한 정부는 아니었다고 믿는다.
내가 탄핵당한 이후 ‘적폐청산’이란 명분하에 매도됐던 박근혜 정부의 여러 정책이 정당한 평가를 받는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시간은 강물처럼 빨리 흘러가는 것 같다.
돌아보면, 나의 삶의 대부분은 공적인 삶이었고, 정말 파란만장한 삶이었지만,
한결같은 지지와 격려를 보내주시면서 함께 해 주신 국민 여러분이 있어서 행복했다.
하지만 달성 사저로 온 이후에도 전국 각지에서 많은 분이 여러 가지 생필품과 지역 특산품 등을 보내온다.
한 번도 만나지도 못했고, 이름 한 번 들어보지 못한 분들이지만 편지글을 동봉해 보내주시는 그 정성이 정말 고맙다.
나는 정치 일선은 떠났지만, 국민으로부터 받은 과분한 사랑에 보답하는 길이 있다면 무엇이든 하려고 한다.
지금 많은 분이 우리 앞에 놓여 있는 현실에 대해 걱정도 하고 불안을 갖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우리 국민이 단합해 다시 뛰기 시작하면 머잖은 장래에 국민 모두가 행복한 시대가 열리고,
대한민국이 세계사에 중요한 일원으로 우뚝 서는 희망찬 미래가 열릴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 도정에 앞으로 내가 조금의 기여라도 할 수 있다면 남은 삶의 소명으로 생각한다.
부족한 글을 끝까지 읽어주신 국민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고마움의 인사를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