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두려움에서 자유하려면 사41:10-13, 요일4:16-21
미국 한 대학의 심리학 연구팀이 불안과 공포의 실태에 대하여 조사했는데,
미래에 대한 공연한 불안이 40%, 지나간 것에 대한 불안이 30%,
남의 일에 대한 불안이 12%, 질병에 대한 불안이 10%,
걱정할 만한 것에 대한 불안이 8%라는 통계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통계로 조사할 수 없는 이유 없는 두려움이 더 많다는데
그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살면서 부딪치는 많은 문제들을 대하면서
두려움 속에 살고 있습니다.
성공이론가인 나폴레옹 힐이라는 사람은 두려움은 모든 논리를 무력하게 만들고,
모든 상상을 파괴하며, 모든 자신감을 꺾어버리고, 모든 열성을 지워버리고,
모든 의욕을 없애 버리는 힘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사람들을 나태와 비참한 상태로 이끌고 간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이처럼 무익한 두려움에서 자유하게 되어 담대함과 어떠한 상황을 만나도
평안 가운데서 살 수 있는 길이 무엇일까요?
“두려움에서 자유하려면”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두려움에서 자유하려면,
1.하나님과의 깊은 신뢰와 사랑의 관계를 이루며 사는 것입니다.
요일 4:16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사랑할 때
하나님이 내 안에 내가 하나님 안에 거하게 됩니다.
사랑할 때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나의 하나님이 되어 주십니다.
그러면 모든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사 41:10에 "두려워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했습니다.
얼마나 든든한 보장이 되는 말씀입니까?
어떤 사람이 공동묘지 근처에서 뛰어노는 꼬마를 만나 물었습니다.
"여기가 공동묘지 근처인데 무섭지 않느냐?"
그러자 "아뇨" 하면서 오히려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보았습니다.
"왜 무섭지 않지?" 그러자 꼬마는 "우리 아빠가 이 묘지 관리인이거든요."
아버지만 있어도 든든한데 천지를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면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사랑을 받기에 합당한 행위와 조건을 갖추어야 되는데,
나의 모습을 보면 그렇지 못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것은 마치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머니가 자식을 잉태했을 때 자식은 뱃속에서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방긋 웃는 모습을 보인 적도 없고, 어머니를 기쁘게 한 일도 없고,
착한 일을 한 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잉태한 아이로 인해 힘들고 입덧하며 음식을
잘 먹지 못하는 고통이 있는데도 어머니는 이미 그 자식을 깊이 사랑하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출산 후에도 자식이 예쁘면 사랑하고, 공부를 잘하면 사랑하고,
속 썩이지 않으면 사랑하고, 효도하면 사랑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아이가 예쁘지 않아도, 공부를 좀 못해도, 지체 부자유 자로 태어나도 사랑합니다.
하물며 하늘 아버지는 더 말할 필요 없이 육신의 부모 이상으로 사랑하십니다.
눅 15장에 보면 아버지와 두 아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유산을 미리 받아 집을 떠나 스스로 성공해보려 했지만
다 탕진하고 굶어죽게 될 지경에 처했습니다.
그가 살 수 있는 길은 단 하나 아버지께 돌아가는 길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가 한 어리석은 일 때문에 집에 들어 갈 면목이 없었습니다.
다시 아버지께로 갈지라도 이제는 아버지의 사랑은 다시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며,
품꾼 중 하나처럼 여겨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멀리서 아들을 보자마자 달려가 얼싸안고 입을 맞추고
기쁨으로 맞아 이웃을 초청하고 잔치를 벌입니다.
그 깊은 아버지의 사랑을 알고 나서야 아버지를 바로 알고 신뢰하며
아버지의 사랑 안에 거하여 아버지를 깊이 사랑하며 사는 아들이 됩니다.
한 편 집에 있던 첫째 아들은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아들을 위해
살진 송아지를 잡고 잔치를 하고, 집에서 아버지를 도와 열심히 일한 자기를 위해서는
염소 세끼 한 마리 잡아준 일이 없는 아버지에 대해 불평합니다.
아버지의 것이 다 자기의 것인 줄을 모르고 불평합니다.
그 역시 아버지를 바로 알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 무지하고 어리석습니다. 연약하고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본문에 하나님께서 ‘버러지 같은 너 야곱아!’라고 부릅니다.
그러시면서 내가 너와 함께 하니, 나의 오른 손으로 너를 붙들리니 놀라지 말고,
두려워 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의 하나님을 바로 알고 믿는 것과 모르고 믿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로 알고 믿을 때 신뢰가 형성 되고 사랑의 관계에 흔들림이 없어
모든 두려움이 사라지고 담대해집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과 깊은 신뢰와 사랑의 관계를 가지고 살면서
두려움을 이길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2.이웃과 사랑의 관계를 맺으며 사는 것입니다.
본문 10절에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했습니다.
우리는 마치 자석에 붙은 쇠붙이와 같은 존재입니다.
우리 자신에게는 사랑의 성품이 없습니다.
우리의 기질은 욕심과 안일과 교만, 시기와 질투, 미움 등 이런 것들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되면 하나님께로 난자가 되어
하나님의 성품을 받아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아 알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여 살면서 그 사랑을 배워 그 사랑을 나타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11절에는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고 알았으면 너희도 그와 같이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요 13:34에서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내 제자인줄 알리라.”하셨습니다.
가족 간에, 교우 간에, 이웃 간에 사랑의 관계를 맺고 살면 아름다운 관계가
이루어지게 되고, 허물도 덮어주게 되고, 배려하는 마음이 생기게 되고,
행복한 마음이 자리하게 됩니다.
우리의 믿음을 보여주는 모습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주일을 성수하는 것, 열심히 기도 하는 것, 봉사 하는 것, 사랑 하는 것, 전도 하는 것,
감사 하는 것, 물질로 구제하고 섬기는 것 등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귀한 것은 사랑입니다.
주일 성수나, 기도나, 봉사 등은 사랑이라는 토대 위에서 행해질 때 비로소 가치가 있고,
빛을 발하게 됩니다.
고전 13:1-3에 보면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믿음 소망 사랑은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 제일은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성도는 사랑이 체질화 되어 그 사랑이 자연스럽게 흘러 나와야 합니다.
한 아버지가 회사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는데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들이
평소와는 달리 아버지를 끌어안고 ‘수고하셨습니다.’하는데,
좀 어색한 모습이었지만 기분이 좋았습니다.
다음 날 집에 왔는데, 여느 때처럼 본체만체 해서 얘, 왜 오늘은 어제처럼 안 하느냐
물으니 히! 하며 어제는 선생님이 엄마 아빠를 포옹해주라는
숙제를 해오라 했기 때문에 숙제를 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 믿으면 사랑을 해야 한다 하니 사랑하는 척 하려니 어딘가 어색합니다.
질병 중에 ‘마라스머스’라는 이상한 병이 있는데, 이 병은 주로 전쟁고아나 고아원에서
외롭게 자라는 어린이들에게 나타난다고 합니다.
증상은 신체발육이 부진하고 온몸에 힘이 빠지면서
환자는 결국 시름시름 앓다가 죽고 맙니다.
이 병은 영양부족이나 병균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그 원인은 사랑의 결핍입니다.
치료법은 자주 안아주면서 사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랑의 말 한마디가 최상의 묘약입니다.
우리 모두 사랑이 체질화 되어 이웃과 사랑의 관계를 맺으며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3.죄를 회개하고 성결하게 살면서 마귀를 대적하는 것입니다.
본문을 기록한 다윗은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인 밧세바를 범하는 죄를 지은 후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듣고 회개하면서 이렇게 간구합니다.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시51:11-12) 마음에 죄를 품고 있으면 즐거움도, 평안도, 담대함도 사라지게 되고
대신 두려움이 옵니다.
그리고 거룩함과 화평함이 없이는 주를 만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죄가 있으면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께서 명하신 명령을 어기고 금하신
선악과를 먹은 후부터 하나님 만나기가 두려워 동산 나무 뒤에 숨게 되었습니다.
여리고성을 정복할 때도 아간이 하나님 명령을 어기고 도적질했기 때문에
함께 하시지 않아 실패했습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주의 백성들이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두려움은 사람들을 파괴시키고 병들게 하기 때문입니다.
딤후 1:7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 했습니다.
두려움은 사단이 주는 마음입니다.
사단은 사람들을 미혹해 죄를 짓게 만들어 하나님과 멀어지게 해
멸망에 빠지게 만듭니다.
마음속에 두려움과 염려라는 가라지를 뿌려놓습니다.
그러므로 마귀를 대적하고 두려움과 염려를 몰아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칭찬하는 동방의 의인이라 불리는 욥은 하나님을 잘 섬겼고
많은 복을 받았고 범사에 형통했고 행복이 가득했습니다.
그런 욥에게 어느 날부터 두려움이 생겨 이 모든 것 잃는다면 어찌하나?
하는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욥은 사단이 자기 안에 넣어둔 두려움을 몰아내지 않고 그냥 방치해두고 있다가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재산과 자식을 다 잃고 자기는 온 몸에 악창이 생겼습니다.
그 때 욥이 이렇게 말합니다.
욥기 3:25-26에 "나의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나의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 했습니다.
사단은 두려움을 먼저 욥의 마음에 심은 다음 그 두려움이 현실이 되도록 한 것입니다.
이처럼 두려움은 행복을 앗아가고 인생을 파괴시켜 불행하게 만드는 적입니다.
사단은 틈만 있으면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어 소심하게 만들고
움츠려들게 만들고 자신감을 앗아가고 실패의식을 자꾸 불어넣습니다.
과거 우리가 주님을 알지 못했을 때 두려움의 종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죄 가운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를 통해 죄 사함을 받고
의롭다함을 얻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두려움의 종이 되어서는 안 될 뿐더러
두려움과 불안을 주는 마귀를 대적해야 합니다.
로마서 8:15-16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는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예수 이름 권세로 사단을 대적하고
성결한 성도로 사시기를 기원합니다.
“두려움에서 자유하려면”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두려움에서 자유하려면,
◎.하나님과의 깊은 신뢰와 사랑의 관계를 이루며 사는 것입니다.
◎.이웃과 사랑의 관계를 맺으며 사는 것입니다.
◎.죄를 회개하고 성결하게 살면서 마귀를 대적하는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