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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원문보기 글쓴이: 하늘호수♡마리아
▪루카 10,38-42
예수님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빕니다.
오늘 복음은 참 재밌는 복음이에요.
마르타와 마리아 이야기 나오죠.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다가 마르타, 마리아, 라자로가 사는 집에 들르십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건 죽음을 앞두고 올라가시는 거예요.
그러니 그 심정이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편한 집에 들어가신 거예요. 편한 집
집은 분명히 편한 집이 있고요, 불편한 집이 있습니다.
편한 집은 어떤 집이에요?
비록 다 쓰러져 가는 학고방이라 하더라도 따뜻하고, 평화가 있고, 기쁨이 있는 집이 있어요.
그런 집에는 오래 머물고 싶어요.
반면 불편한 집도 있어요.
아무리 호화스러운 저택이라 하더라도 차갑고, 가족들 얼굴이 다 교만해요.
식구 몇 안 되는데도 서로 말하는 것 보면 다 네 탓이야.
감사할 줄 모르는 그런 집 불편해요.
본당 신부 하면서 가정 방문을 다녀보면, 정말 어떤 집은 아파트 문을 열면 따뜻해요.
어떤 집은 추워요. 으리으리한데도 추워요.
따뜻한 집은 일단 기도하려고 고상 앞에 서보면 예수님을 아주 정기적으로 목욕시켜 드리는 것처럼 깨끗해요.
성모님도 얼마나 정갈하게 모셔놓았는지.
초도 보면 이 사람이 기도하는 사람인지 아닌지 알아요.
기도 안 하는 집구석은 초에 성냥개비 부러진 거 파묻혀 있고, 파리 죽은 거 한 세 마리 들어가 있고,
생전 깎지 않는 거야.
그런데 기도하는 사람들은 깎으면서 기도하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깨끗할 수밖에 없어요. 불이 밝죠.
그런데 그 안에 더러운 것이 들어있으면, 불을 켜도 그을음밖에 안 나.
같은 성당의 성물방에서 모셔온 똑같은 예수님 고상인데도 따뜻한 집에서는 예수님 얼굴은 웃고 계셔,
성모님도 웃고 계셔.
같은 성물방에서 산 것인데도 분명히 편한 집이 있고 불편한 집이 있어요.
오늘 예수님은 편한 집 들어가신 것 같아요, 불편한 집 들어가신 것 같아요?
편한 집에 들어가신 거예요.
예수님에게 편한 집은 사제들에게 편한 집이에요.
그리고 모든 이들에게도 편한 집이 될 수밖에 없어요.
이것은 사람 차별이나 집 차별이 아니라 그냥 쉬고 싶은 집이 있어요.
많지 않았지만, 지나가다 차 세우고 들어가서 ‘라면 하나 끓여줘’ 하고
기다리는 동안 TV 보게 되는 아주 편한 집도 있죠.
그런 집은 왔다가도, 가서 한숨을 자고 가도 말이 안나요.
사제가 들어가서 편안하게 낮잠을 즐길 수 있다면, 예수님도 들어와서 편한 집이에요.
여러분들 집은 어떤 집입니까?
사제가 들어가면 빨리 일만 해주고 나가고 싶은 집입니까?
아니면 ‘바쁘신데 빨리 가셔요.’ 해도 조금 더 있다 가면 안 되냐 묻는 집입니까?
오늘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다가 마르타, 마리아, 라자로 집에 들르셨는데
그 집은 불편한 집이 아니라 편한 집이었죠.
아무튼 이 세 사람은 예수님이 특별히 사랑하셨던 사람임에는 분명합니다.
그래서 오빠 라자로가 죽었을 때, 슬피 우시면서 부활까지 시켰잖아요.
예수님이 우신 것이 딱 두 번이에요.
라자로가 죽었을 때 우셨으니, 얼마나 사랑했던 자매요, 형제였냐 이거죠.
아마 예수님이 이 집에 들르셨던 이 날은 너무나 피곤하셔서
몇 시간만이라도 사람들과 떨어져서 쉬고 싶으셨을 거예요.
밖에서 말 많이 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집에서는 말수가 적을 수밖에 없어요.
당연하겠죠. 저도 충분히 이해가 가요.
저도 피정을 많이 다니다 보면 정말 사제관에 와서는 말 한마디 하기가 싫을 때가 많아요.
그런데 어떤 식복사들은 신부님이 화났나 하는데, 그게 아니거든요.
나 말하기 힘들어서 안 하는 거야 나 자매한테 화난 거 아니라 해도 서운한 것 같아요.
어제 같은 경우(마천동성당 피정 지도)에도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5시간을 떠들고 나니 몸이 파김치가 됐죠.
사제가 문 열 때는 정말 간신히 기어들어 오는 거예요.
사람들이 그거 몰라요.
그래서 예수님의 마음이 이해돼요.
얼마나 인간들한테 시달렸습니까?
그냥 붙들고 그냥 끌어안고.
그래도 마리아, 마르타, 라자로가 사는 집은 몇 시간이라도 쉴 수 있는 집이라는 마음으로 들어오신 거죠.
여러분, 대구 경북방 분들도 이런 마음으로 사제관에 오신 거지요.
여기에 머물면서 치유되고, 힐링되고, 또 사제의 강론을 통해 말씀으로 양육되려고 오신 거지요.
그래서 선택받은 사람들이라고 저는 늘 이야기해요.
겉으로 보면 차 타고 온 것 같지만, 아니죠.
하느님이 이 자리에 불러놓지 않으면 절대 못 와요.
이 미사만이 아니라, 피정에 오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왜냐? 우리들의 존재 그 시작은 세례입니다.
그리고 세례도 내가 선택하여 천주교 신자가 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하느님의 역사 안에 내가 들어가 있었어요.
우리들의 삶 자체가, 천주교 신자의 출발점 자체가 부르심이었기 때문에,
우리들이 하는 모든 하느님의 일은 부르심 때문에 이루어지는 일이에요.
그것이 만남이에요. 만남.
예수님은 너무 피곤하셔서 쉬고 싶어 들어왔는데, 예수님의 이러한 마음을 마르타는 알아채지 못했던 거예요.
마르타는 그저 오시니까 반갑고 기뻐서 대접해 드릴 음식을 장만하느냐 부산을 떱니다.
예수님 좋아하시는 삼겹살도 해드려야 하고, 녹두부침개도 해드려야 하고,
우리 밀 막걸리도 한 잔 드셔야 하고, 광어회는 또 어느 집이 잘 뜨나,
머릿속에 온통 예수님께 배부르게 맛있게 해드리려는 마음만 있었죠.
그것도 사랑이에요. 맞죠.?
아무튼 자기 딴에는 정성을 다해서 준비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우리들이 정말 지혜롭고 현명하게 판단해야 할 것은 자기중심으로 친절을 베풀려고 할 때는
어떤 경우에는 상대편이 엄청나게 부담스러워해요.
‘왜 내 마음을 몰라주고 저러지, 나는 먹으러 온 게 아닌데’ 하며, 그 자체가 상처가 될 때도 있어요.
제가 교우 가정을 방문할 때 분명히 주보에다도 내요.
‘한 집에서 딱 20분, 그 이상 안 머무릅니다. 하루에 30집을 정도 방문해야 하는데,
가서 교적 보고 잠시 이야기하고 성수 뿌려주고 필요하면 물 달라고 할게요.’
그런데 과자뿐 아니라 잡채도 준비해놓아요.
바쁜데 언제 먹고 가라고요.
하지만 그 마음을 알기에 한 숟가락이라도 떠먹고 와야 해요.
이렇게 자기 위주의 친절, 자기중심이 밑바탕 된 사랑은 상대편을 불편하게 할 때가 사실은 많아요.
내가 자식에게 사랑을 줬는데 자식은 힘들어할 때가 있잖아요?
왜 아버지 엄마는 왜 나한테 강요를 하지?
아이들은 그것을 강요로 느끼거든요.
자기중심의 사랑이 있고, 자기중심의 봉사가 있고, 자기중심의 용서가 있어요.
자기 혼자 용서한 거야, 상대편은 용서받을 아직 준비도 아직 안 돼 있어.
혼자 ‘오늘부터 너 용서할게.’
이러면 용서된 겁니까?
시간이 필요한 거죠.
내가 편하여지려고 오늘 용서했어. 아이고 속 시원하다.
상대편은 너무 힘들어. ‘뭐지? 왜 날 용서해 준다는 거지? 나는 아직도 속에 분노가 있는데,
아직도 할 말이 많은데?’
이렇게 마르타는 자기중심의 사랑을 예수님께 정성을 다해서 보이고 있는데,
마르타가 동생 마리아를 보니 한마디로 싸가지가 없어.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무슨 공주인 양 아주 우아하게 주님 앞에 턱 이렇게 괴고 주님의 발치에 앉아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게 아니었겠습니까?
부엌에서 보니까 부하가 치미는 겁니다.
여러분 같아도 치밀겠죠?
‘나는 손이 두 개밖에 없어서 지금 정신이 하나도 없는데, 저거는 저기 앉아서, 진짜 아주 우아하게 앉아 있네.’
그래서 오늘 성경에 보면 예수님한테 다가갔다고 그랬어요.
마르타는 차마 소리는 못 지르고, 예수님한테 다가가 예수님께 같은 편이 돼 달라고 부탁하죠.
‘주님, 제가 바빠 죽겠는데 마리아가 나 안 도와주고 저러니까 주님이 한마디 좀 해주세요.’
당연히 예수님이 ‘아, 그래. 마리아, 언니 바쁜데 너도 나가서 같이 일해.’ 이럴 줄 알았죠.
그런데 그러지 않으셨어요.
사실 예수님은 너무 지치고 힘들어서 입맛 밥맛 혀 맛 다 떨어져 있는 상태였고
그냥 조용히 대화를 나누고 싶었던 겁니다.
그래서 역성을 들어주기는커녕 오히려 마르타가 듣기에 정말 서운한 말씀을 하셨죠.
‘마르타, 마르타 너는 많은 일에다 마음을 쓰며 걱정하지만, 실상 나에게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야.
그 한 가지를 마리아는 선택한 거야. 참 좋은 몫을 택했다. 그것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
이 말을 했을 때 마르타가 예수님의 말귀를 알아들었을까요?
그건 모르겠어요. 절대 못 알아들었을 것 같아요.
오히려 부엌에 가서 ‘아유, 예수님도 한패야. 짜증 나, 정말 저 양반 왜 저래? 나만 쪽팔리게 뭐야.
이게 괜히 얘기했어. 저 마리아는 더 기가 살아서 아주 의의 양양하네.’ 했을 수도 있어요.
그리고 아마 이날 만든 음식은 절대 맛이 없었을 거예요.
여러분들 아시죠?
화가 난 상태, 분노의 상태에서 음식을 만들면 손에서 어두운 기가 들어가요
그것은 음식에 독이 되는 거예요.
정말 음식을 만들 때는 성호 긋고 정성을 다해서 기쁜 마음으로 가족들에게 음식을 만들어줘야 해요.
화가 나고 서운한 마음, 짜증스러운 마음으로 억지로 만들면,
그 음식 먹고 절대로 남편과 자식들에게 피가 되고 살이 안 돼요. 그건 독이 되는 거예요.
모르긴 몰라도 예수님 그 음식 먹고 분명히 체했을 거야.
물론 성서엔 안 나와요. 나중에 죽으면 다 확인해 볼 거지만. (웃음)
지금 이렇게 제가 이야기하듯이 풀이하니까 이제 머릿속에 떠오르죠?
마르타의 입장도 충분히 이해되고, 또 마리아의 입장도 언니한테 저렇게 별의별 소리를 들으면서도
끝까지 예수님 발 앞에서 떠나지 않는 마음도 우리가 충분히 이해돼요.
2천 년 동안 교회는 오늘 이 복음을 가지고 많은 해석을 합니다.
마르타를 활동하는 사람의 상징으로 나타내기도 하고, 마리아를 기도하는 사람으로 여기기도 해요.
다시 말하면 활동 수도원이 있고 봉쇄 수도원이 있죠.
교회는 이 두 사람의 모습이 다 필요합니다.
어떤 사람은 몸이 약해서 마음과는 다르게 활동을 못 해.
그러나 제일 잘하는 게 기도예요.
그러면 ‘저는 기도로 대신 할게요.’
또, 앞장서서 팔 걷어붙이고 일할 사람 필요해요.
하지만 한 개인에게는 분명히 순서가 있어요.
어느 것이 먼저일까요?
먼저 마리아처럼 기도하는 사람이 되고 난 후에 마르타처럼 행동으로 열매를 맺어야 해요.
기도하는 인간이 되고 난 후에 그 기도를 통해서 받은 힘이 이웃에게 흘러넘쳐야 합니다.
제가 가끔 얘기하죠.
꽃동네에 봉사자들이 와서 불쌍한 사람들 도와줘야겠다는 마음으로 몇 달은 버텨요.
그런데 기도를 안 해. ‘나 오늘 세 시간 똥 쳤는데 기도한 것과 똑같아.’
이것이 마귀 소리예요.
‘나 오늘 3시간 성당 일했어. 그러니 3시간 기도한 것과 똑같지.’ 하면서 기도 멀어지기 시작하고
묵주 놓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어둠이 들어오기 시작해요.
처음에 꽃동네 와서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예수님처럼 떠받들던 그 인간들이 기도 안 하고
미사 참석 안 하고 하다 보니까 어떻게 돼요.
마른 논바닥처럼 쫙쫙 갈라지죠.
처음에 들어와서는 고무장갑 안 껴도 할아버지 할머니들 기저귀 갈아 채워주고 똥이 묻어도 더럽지 않았어.
왜? 사랑이 있으니까.
하지만 몇 달 지나고 난 다음에 그게 다 사라져 버리죠.
고무장갑 세 개를 껴도 더럽고, 그다음부터는 이불 뒤집어 씌어놓고 패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활동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먼저 기도해야 해요.
만일에 ‘신부님, 저는요, 능력이 없어서 둘 중 하나밖에 선택을 못 해요.’ 하면, 저는 100이면 100 똑같은 답을 해요.
‘기도부터 해라. 기도해야 그다음에 활동에 하느님의 은혜가 내려간다.’
거듭거듭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지만, 기도가 밑바탕이 되어 있지 않은 교회 활동은 오래가지 못하고
끌려다니면서 체면 때문에 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먼저 마리아처럼 예수님 곁에서 머물면서 듣고 묵상하면서 나 자신을 먼저 은총으로 적셔져야만,
그다음에 마르타처럼 예수님을 위하여 봉사를 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러시아의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가장 이상적인 인간형은 고독하면서 동시에 사회적이라 했어요.
고독하다는 얘기는 바로 기도하는 인간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고독만 하면 안 되죠.
고독을 통하여 얻은 에너지를 가지고 이웃을 위해서 어떤 방법으로든지 써야 한다.
여러분들 사시다 보면 머릿속에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 갖고 계시지요?
그것 해결하는 길은 오늘 예수님이 뭐라 그랬어요?
‘마르타야,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왜 그렇게 머릿속이 네 머릿속이 복잡하냐. 한 가지다 그게 뭐예요.
‘내 곁에 머물러라. 기도해라 세상 방법 쓰기 전에 먼저 기도해라.’
머리 복잡해지고 힘들 때 걱정은 백날 해봐야 마귀만 들끓어요.
그러나 기도하면 기적이 일어나요.
마귀는 어떻게 해서든지 걱정만 하게 걱정에만 머물게 만들어 기도까지는 못 가게 만들죠.
왜냐하면 기도하면은 기적이 일어나거든요, 해결되거든요.
걱정만 하게 하는 것! 마귀가 우리 기도 못 하게 하는 방법이에요.
마르타는 부엌에서 걱정만 했어요.
하지만 마리아는 예수님 앞에 바짝 다가서서 귀 쫑긋 세우고 예수님 말 한마디 한마디
그분의 얼굴표정 하나 안 놓치려고 애썼어요.
그게 바로 관상이에요.
저도 여러분에게 평일 강론할 때마다 늘 관상을 해요.
2천 년 전에 바로 그 시간으로 돌아가서 예수님 앞에서 묵상해요.
그리고 그것을 끄집어 내와 제 입으로 설명을 해드려요.
그래서 제 강론을 들으면 마치 여러분들이 타임머신을 타고
2천 년 전 마르타와 마리아 집에 들어가 있는 느낌이 들 거예요.
그것이 사제들이 교우들에게 베풀어야 할 영적 서비스죠.
그래서 사제들이 관상을 안 하면 절대로 좋은 강론이 나올 수가 없다는 얘기죠.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얘기로서 끝을 맺고자 합니다.
‘인간은 기도로써 강해지고 하느님은 기도로써 약해지십니다.’
♣2022년 연중 제16주일 (7/17)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강론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