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age to Catalonia. pp.92-95
Homage to Catalonia. pp.92-95
CHAPTER VIII
북부 버마에서 당신은 기차로 만달레이Mandalay에서 샨 고원Shan plateau의 가장자리에 있는 지방의 산간 휴양지hill-station(특히 아시아 남부 지방의) 산간 피서지 마을인 마이묘Maymyo까지 여행할 수 있다. 그것은 썩 기이한 경험이다. 당신은 맹렬한 태양과 먼지투성이의 야자 잎사귀, 생선과 향신료, 마늘냄새, 물컹거리는 열대과일, 그리고 헤엄치는 까만 얼굴의 인간들의 동방도시의 전형적인 분위기에서 출발하고 당신이 그것에 썩 익숙하기 때문에 말하자면 당신은 그 분위기를 다치지 않은 그대로 당신의 객차에 그대로 가져간다. 해발 4000피트가 넘는 마이묘에 열차가 설 때 까지 당신은 정신적으로 아직 만달레이에 있다. 하지만 객차에서 내리면 당신은 다른 반구로 걸어들어 간다. 순간적으로 당신은 영국과 같은 시원하고 달콤한 공기로 숨 쉬고 당신 주변은 푸르른 잔디, 검은 전나무, 딸기 바구니를 파는 분홍색 볼을 한 고원의 여인들로 둘러싸일 것이다.
석 달 반 후 전선에서 바르셀로나로 돌아가서 나는 이것을 떠올렸다. 그것은 똑같이 갑작스럽고 경이로운 분위기의 변화였다. 바르셀로나로 가는 기차 안에서 내내 전선의 분위기가 이어졌다. 흙먼지, 소음, 불편함, 걸레조각이 된 옷, 결핍감, 동지애와 평등. 이미 의용군으로 가득 찬 바바스트로를 출발한 기차는 노선의 모든 역에서 점점 야채다발이나 그들이 머리를 아래로 꺾어 놓은 가금류를 가진 농민들에게 침공 당했고, 온 바닥을 몸부림치며 휘돌아다니는 보자기 속에는 살아있는 토끼들이 들어있는 것이 밝혀졌으며, 객차 안으로 상당히 많은 양떼를 몰아넣어서 모든 빈 공간마다 틀어박혔다. 의용병들이 부르는 혁명가에 기차의 덜커덕 거리는 소리는 묻혀 버렸고 줄에 맞춰 선 모든 아름다운 소녀들은 그들의 손으로 손 키스를 날리거나 붉고 검은 손수건을 흔들었다. 포도주와 아니스anisaniseed로 맛을 낸 스페인·라틴 아메리카의 독한 술병, 독한filthy 아라곤의 독주가 손에서 손으로 여행을 하였다. 스페인의 염소가죽 물통으로 당신은 열차의 객실을 똑바로 가로질러 분출하는 와인을 당신 친구의 입에 쏘아 넣어서 많은 수고를 덜 것이다. 내 옆의 열다섯 살 된 검은 눈의 소년은 입을 벌리고 듣고 있는 거친 얼굴을 한 두 농부에게 나는 의심하지 않지만, 완전히 사실이 아닌 그의 위업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곧 농부들은 그들의 꾸러미를 풀어서 걸쭉하게 검붉은 포도주를 우리에게 주었다. 모두들 진정으로, 내가 전할 수 있는 것 보다 더욱 진정으로 행복하였다. 하지만 기차가 사바델을 통과하고 바르셀로나에 도착하였을 때, 우리는 파리나 런던에서 그랬던 것보다 더 우리와 우리의 종족에게 외계인과 거의 같은 적대적인 분위기 속으로 들어갔다.
전쟁 중에 몇 달 간격으로 바르셀로나를 두 번 방문한 모든 사람들은 그곳의 특별한 변화에 대해 언급하였다. 그리고 무척이나 신기하게도 그들이 8월에 처음 그곳에 가고 또 1월에 가거나, 나처럼, 12월에 처음 간 다음 4월에 다시 가거나 상관없이 그들이 말하는 것; 혁명적 분위기가 사라졌다는 것은 항상 같았다. 거리에서는 피가 겨우 마르고 의용군들이 멋진 호텔을 숙소로 차지하고 있을 때인 8월에 그곳에 있었던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의심의 여지없이 12월의 바르셀로나는 부르주아지처럼 보였을 것이며, 영국에서 금방 온 내게는 내가 생각할 수 있었던 어떤 것보다 더욱 노동자의 도시 같았다. 이제 썰물이 되었다. 전쟁으로 약간은 파리해지고 깨어졌지만 다시 한 번 평범한 도시였고, 노동계급이 우세하다는 외적으로 드러나는 표시는 없었다.
군중의 양상의 변화는 놀라웠다. 의용군의 제복과 푸른 멜빵바지는 거의 다 사라졌다. 다들 스페인 의복 전문점에서 깔끔한 여름옷을 맞춰 입게 된 것처럼 보였다. 잘 나가는 뚱보 아저씨, 우아한 여인, 날렵하게 생긴 자동차들이 어디에나 있었다. ( 아직 자가용은 없는 것으로 드러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인물anyone’인 사람은 차를 통제할 수 있는 것처럼command a car 보였다. 내가 바르셀로나를 떠날 때는 거의 없던 새로운 인민군 장교들은 놀라운 숫자로 몰려다녔다. 인민군은 병사 열 명에 장교 한 명의 비율로 통솔되고 있었다. 그 장교들 중의 특정한 일부는 의용군에서 복무하다 기술교육을 받기 위해 돌아왔지만 대부분은 의용군에 합류하기보다는 전쟁학교로 가는 젊은이들이었다. 그들의 부하들과 그들의 관계는 부르주아의 군대와 썩 같지는 않았지만, 보수와 제복의 차이에 의해 확실한 사회적 차이가 드러났다. 부하들은 거친 갈색의 멜빵바지를 입었고 장교들은 영국군 장교들의 제복과 비슷하게 허리에 딱 맞춘 우아한 카키색 제복을 입었다. 나는 그들 스무 명중 한 명도 전방에 있어본 적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지만, 그들 모두는 자동권총을 벨트에 달고 있었다. 전방에서 우리는 사랑이나 돈으로도 권총을 구할 수 없었다. 우리가 길을 따라 올라가면서 나는 사람들이 우리의 지저분한 외모를 쳐다보는 것에 주목하였다. 물론 전선에 몇 달 씩 있었던 사람들 모두처럼 우리는 끔찍한 모습이었다. 나는 허수아비처럼 보일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나의 가죽 윗도리는 너덜너덜 했고, 나의 모직 모자는 그 형태가 망가져서 한쪽 눈 위로 계속 미끄러져 내렸으며, 나의 장화는 윗부분만이 겨우 남아 있을 뿐 이었다consisted very little beyond splayed-out uppers. 우리 모두는 더도 덜도 말고 다 똑같은 상태였으며, 게다가 우리는 지저분하고 면도도 안 해서 사람들이 우리를 주시하는 것은 이상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다지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고, 지난 3개월 동안 몇 가지 기이한 일들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음 며칠 동안 나는 셀 수 없이 많은 징조로 나의 첫 인상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마을에 심각한 변화가 들이 닥쳤다. 다른 모든 것의 요점이 되는 두 가지 사실이 있었다. 하나는 사람들- 시민들civil population이 전쟁중에 상당한 그들의 이익을 잃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부자와 가난한 사람, 상류층과 하층계급의 정상적인 사회적 분할이 그 자체로 재주장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