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룻배와 행인(行人)
한용운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며 깊으나 옅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물만 건너면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가십니다 그려.
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아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날마다 낡아갑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시집 : 『님의 침묵』, 1926)
[작품해설]
이 작품도 만해의 다른 시들처럼 ‘님’에 대한 절대적 의미를 부여한 노래이다. 시적 화자는 자신을 ‘나룻배’에 비유하고 나룻배와 행인의 관계를 통하여 인내와 희생, 그리고 사랑에 대한 숭고한 의지를 노래하고 있다.
행인인 ‘님’은 나를 흙발로 짓밟지만, 나룻배로 나타난 시적 화자는 기쁨과 사랑을 느낀다. 왜냐하면 흙발로 짓밟히는 그 순간만이 그가 ‘님’을 만날 수 있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신, 곧 ‘님’을 맞기만 하면 나룻배, 곧 시적 자아는 깊으나 얕으나 급한 여울이나를 막론하고 기쁨에 넘쳐 강을 건넌다. 바람과 눈비를 맞는 고통 속에서 ‘밤에서 낮까지’ ‘님’을 기다리던 어느 날, 마침내 ‘님’은 나룻배를 탄다. 그러나 그 뿐, 나룻배인 그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그냥 사라져 버린다. 그러나 ‘님’이 반드시 올아올 것을 믿으며 또다시 ‘님’을 기다리며 날마다 외롭게 낡아간다.
이 작품에서 ‘님’을 기다리는 시간 동안 그로 하여금 절망하지 않게 하는 원동력은 바로 2연 3행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아요’에 나타나 있다. 이것은 ‘님’에 대한 절대적 믿음이다. 이 믿음은 「님의 침묵」의 ‘떠날 때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와 동일한 차원으로, 거자필반(去者必反)의 원리를 믿고 있기에 날마다 ‘님’을 기다리며 낡아질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이 작품의 기본 바탕은 욕된 일에 성내거나 원망하지 않고 참는 ‘인욕(忍辱)’과 자기 것을 남에게 아낌없이 주고 희생함으로써 탐욕을 이겨내고 사랑을 실천하는 ‘보시(布施)’의 불교 윤리 의식과도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흙발로 짓밟아도 원망하지 않고(인욕), ‘님’을 안아 물을 건너며(보시), ‘님’이 오실 때를 기다리는 헌신적 사랑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만해에게 있어서 ‘님’은 현실적으로 떠나고 없지만, 그 ‘님’과의 이별은 만남이라는 밝은 긍정을 전제로 하고 있는 차원 높은 이별이다. 소월의 ‘님’은 이미 죽었거나 돌아오지 않을 곳으로 떠나 버린 ‘님’이므로 그의 시가 비탄과 체념적인 어조를 띠고 있는 데 비해, 만해의 ‘님’은 반드시 돌아올 것을 확신하는 ‘님’이므로 그의 시는 항상 희망적이고 긍정적인 색채를 지닌다.
[작가소개]
한용운(韓龍雲)
본명 : 한정옥(韓貞玉)
1879년 충남 음성 출생
1896년 동학에 가입하였으나 운동이 실패하자, 설악산 오세암에 들어감.
1919년 3.1운동 민족 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
1927년 신간회(新幹會) 중앙 집행위원
1930년 월간지 『불교』 발행인
1944년 사망
시집 : 『님의 침묵』(1926), 『한용운 전집』(1973), 『한용운시전집』(1976)
첫댓글
님을 기다리며
감사합니다
무공 김낙범 선생님
댓글 주심에 고맙습니다.
오늘도 무한 건필하시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