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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글 코너 스크랩 수필 부석사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 옆에 서서
황종원(중앙대) 추천 0 조회 76 07.11.07 10:15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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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량수전은 어느 건물인가. 교과서에 나오는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인가. 초등 학교 때 상식 말고 또 기억나는 이야기가 있다.

 

역사의 시절을 몸으로 보여주는 영주 부석사의 무량수전은 더하고 뺄 것 하나 없는 완벽하다. 문창살 하나, 문지방 하나에도 천년을 살아 숨 쉬는 상쾌한 균형과 절제. 경북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고려 11세기·국보18호)에 대한 한 미술사학자의 예찬이다.

 

그 말에 홀려서, 나와 아내는 얼마나 이곳을 오고 싶었나.

봄이면 봄이라 꽃이 피기에 그랬고 가을이면 가을에 낙엽이 지기에 그랬다.

벼루다가 일을 냈다. 월요일 아침에 잠실에서 떠나는 영주 부석사로 가는 버스에 아내와 처가 식구들과 함께 떠났다.

 

들판을 달려라 산을 넘어라

하늘 높이 신라의 달이 비치던 밤에 첫풍경소리

천년 사직 지킨 불심이 새로운데

신라는 어디가고

배흘림기둥에 안긴 무량수전 아미타불 모신 곳에

켜켜한 세월아 내월아 신라야

주승의 목탁 소리가 유정하건만

옛사람 자취만 기둥에 남았어라

 

부석사의 자취를 담은 기록은 비석에 쓰인 몇 문자나 절을 재건한 기록, 보수한 기록 등만이 내려온다.

부석사가 세워지기까지에 '삼국사기'에는 고승 의상이 임금의 뜻을 받들어 부석사를 창건했다하고 '삼국유사'에는 "의상이 태백산에 가서 조정의 뜻을 받들어 부석사를 세우고 대승교(대승불교)를 포교하니 영감이 많이 나타났다"고 이른다.

 

그리하여 신라 문무왕 16년(676) 2월에 의상대사가 문무왕이 뜻을 받들어 창건했다고 이른다. 처음 절이 생겨날 때는 의상의 영정이 있는 조사당을 중심으로 초가집이 몇 채 있는 아주 단출한 모습이었을 게다.

 

의상의 제자인 신림 이후 부석사는 인적 물적 측면에서 차츰 커졌다. 신림의 문하에서 훌륭한 제자를 많이 나와 부석사의 화엄종을 크게 키웠다.

 

또한 규모가 커져 현재 부석사의 기본 구조라고 할 수 있는 대석단과 석등, 석룡, 장대석, 석탑 등이 경문왕 무렵에 건립되었다.

 

대석단은 불국사, 원원사, 망해사 등에서 볼 수 있듯 신라 하대 이후에 세워진 사찰들에서 나타나는 특징적인 양상이다. 무엇보다도 국보 제 17호인 석등이 경문왕때(861∼874)에 만들어진 점이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한다. 대규모 사찰 건립이 가능했던 것은 신림이 배출한 수많은 화엄대덕들이 국가로부터 상당한 물질적인 지원을 받았기 때문이리라.

 

예컨대 부석사에서는 신라왕의 상을 그려서 벽화로 걸어 놓고 있을 정도였다. 후삼국 시기에 궁예가 이곳에 이르러 벽화에 그려진 신라왕의 상을 보고 칼을 뽑아 내쳤는데 그 흔적이 고려 때까지 남아 있었다고 한다.

 

부석사가 위치한 태백산은 신라 오악 가운데 중사를 지내던 곳으로 흔히 북악(北岳)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따라서 의상의 법손들을 북악파라고도 하였다. 화엄종의 본찰인 부석사는 신라 하대에는 대석단 위에 세워진 거대한 가람으로 많은 대중들이 생활하는 곳으로 변하였고 승려가 되기 위해 처음 출가하는 곳으로 유명해졌다.

 

이곳의 주지로 있으면서 대장경을 인쇄하였고 그 일부를 부석사와 안국사에 봉안하였다. 따라서 지금 부석사에 전해지는 화엄경판은 원융 대덕 때 이루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구한말 민속학자인 이능화선생의 화엄경판고란 책에 의하면 "고려 초에 태백산 부석사에서 2종의 화엄경을 목판에 각했다"고 하였다. 부석사에 현존하는 원융대덕의 비문에 의하면 그의 성은 김 씨이고 자는 혜일이었다.

 

12세에 용흥사에서 출가하여 복흥사에서 수계하고, 28세에 대덕이 되었다. 정종 때 왕사, 문종 때는 국사가 되었다. 그가 귀산사에 유행하였을 때, 꿈에 미륵보살이 나타나서 "네 품속에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해요, 다른 하나는 달이다"고 말하는 순간 홀연히 깨달음을 얻었는데 이 일이 있은 뒤 자를 혜일이라 하였다고 한다. 그는 정종 7년(1041)에 부석사에 들어가 화엄종통을 이어받았다. 1053년 부석사에서 세수 90세, 법랍 78세로 입적하자 왕은 원융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부석사 동쪽 언덕에 있는 원융국사비의 건립 연대는 명문의 마멸이 심하여 확인할 길이 없으나 입적 이듬해인 고려 문종 8년 (1054)으로 추정된다. 비문에는 의상 당대의 부석의 모습과 그의 법손들이 줄곧 이곳에 주석해 온 것을 알려 주는 귀중한 내용이 담겨있다.

기타 고려 때 많은 부석사의 건물들이 중창되거나 창건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 부석사를 중수한 기록은 자주 발견된다.

조선 성종 21년(1490)에 조사당을 중수하였고 성종 24년(1493)에 조사당에 단청을 하였다.

 

명종 10년(1555)에 화재로 인해 안양루가 소실되었으며 선조 6년(1573)에는 조사당 지붕을 개수하였다.

 

선조 9년(1596)부터 11년까지 석린 스님이 안양루를 중건하였다. 조사당 아래의 취원루는 사명대사 등 여러 선객들의 수도처로 유명했다고 한다.

 

광해군 3년(1611)에는 폭풍우로 인해 무량수전의 중보가 부러져 중수하였고 경종3년(1723)에는 무량수전 본존불의 금색을 다시 했다.

 

영조 22년 (1746)에 화재로 승당, 만월당, 서별실, 만세루, 범종각 등이 소실되었으나 그 이듬해에 중수하였고 영조 44년(1765)에는 무량수전 본존불의 금색을 다시 했다.

 

일제 강점기인 1916년에 무량수전과 조사당을 해체 수리하였는데 이때 허리 부분이 잘린 석룡(石龍)이 노출되었다고 한다. 또한 무량수전 서쪽에 있던 취원루를 동쪽으로 옮기고 취현암이라 한 것도 이때라고 한다.

 

1967년에 부석사의 동쪽 옛 절터에서 쌍탑을 옮겨 범종각 앞에 세웠고 1969년에는 무량수전 번와 불사를 하였으며 1977년부터 1980년에 걸쳐 전체 절전역을 정화하면서 일주문, 천왕문, 숭당 등을 신축하였다.

 

부석사 가는 길은 은행나무 길이다. 뒤로는 빨간 사과 주렁주렁 매달린 사과 과수원이다.

주차장에서 500m 정도를 걸으니 매표소와 일주문을 지나며 은행나무길이 펼쳐진다.

서울은 아직 은행나무 잎이 아직 덜 노란데 남쪽 여기는 산이라서 그런지 샛노랗다. 숨이 가쁘지 않은 오르막 흙길은 세상의 끝에서 극락으로 가는 길이다.

은행나무길 을 따라 오르다 보면 천왕문이 나온다. 못 미쳐서는 왼쪽에 부석사중수기념탑과 당간지주가 있다.

 

은행나무길 의 끝에 천왕문이 열린다. 사천대왕께서 죄있는 자를 벌하시려는 듯 눈을 부라리고 계시다. 겁을 먹고 지나면 단아한 모습의 범종각이 보인다.

 

범종각을 사이에 양쪽에 석탑과 오른쪽의 유물전시관에서 숨을 돌릴만하다.

범종각 밑을 지나니 안양루(安養樓)로 들어선다.

 

안양루 밑의 좁은 돌계단을 밟고 올라가야 비로소 무량수전와 만난다. 대가람의 무량수전에 닿는 마지막 길을 이렇듯 좁은 누대 밑을 지나야 한다니 겸손하고 고개를 숙이게 하는 절묘한 배치다.

 

무량수전은 얼마 전까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로 알려졌는데, 안동 봉정사의 극락전이 더 오래된 목조건물임이 밝혀지니 두 번째로 오래된 목조건물이다.

 

불가의 건물들은 워낙 소실과 중창을 거듭한다. 건물의 연령을 어떤 기준으로 산정하는지를 정확히 모른다. 두 건물이 얼마나 건립연도의 차이가 있는지는 잘 모르나 봉정사의 극락전은 규모나 형태면에서는 무량수전을 따르지 못한다.

이 무량수전은 우리나라 팔작지붕의 시원(始原)으로 알려져 있고, 주심포 기둥이 절묘한 배흘림기둥인 것으로도 유명하다.

 

아는 것이 있어야 보이게 마련, 무지한 내 눈에는 예찬자의 글만 떠오른다. 겸손이 아니오 무지다.

무량수전에 홀리게 해준 무량수전에 올린 이의 글을 찾아보자.

 

사뿐히 고개 쳐든 지붕의 추녀 곡선, 그 추녀와 기둥의 조화, 간결하고 절제된 주심포(柱心包·처마의 무게를 받쳐주기 위해 기둥머리에 짜맞춰댄 나무장식) 의 진정한 비밀은 ‘착시(錯視)로 인한 사물의 왜곡’을 막아내는 절묘한 생각이다.

안허리곡(曲), 기둥의 배흘림 안쏠림 귀솟음 등이 놀랍다.

안허리곡은 건물 가운데보다 귀퉁이의 처마 끝을 더 튀어나오도록 처리한 거다. 귀솟음은 건물 귀퉁이 쪽의 기둥을 가운데보다 높게 처리한 거다. 건물의 귀퉁이쪽 처마와 기둥은 실제 높이보다 밑으로 처져보인다. 사람의 착시다. 안허리곡 귀솟음은 바로 착시를 막기 위한 절묘한 고안이다.

 

안쏠림은 기둥 위쪽을 내부로 기울어지게 세우니 안허리곡의 시각적 효과를 높여준다. 또한 안허리곡 귀솟음과 함께 절묘한 곡선을 만들어 건물의 앞면을 마치 오목거울처럼 휘어져 보인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곡선이 살아 움직인다. 곡선의 환상적인 율동은 한순간 보는 이의 넋을 빼앗는다. ‘직선’의 목재가 창출해낸 ‘곡선’의 완벽한 춤사위에 아름다움이다.

 

기둥 중간부분을 약간 튀어나오게 한 배흘림기둥 또한 무량수전의 볼거리다. 중간을 볼록하게 함으로써 기둥 머리 부분이 넓어 보이는 착시현상을 막아준다. 또한 건축물의 무게가 기둥의 중간에 집중된다는 건축구조역학을 고려한 것이리라.

 

무량수전의 아름다움은 외부뿐이 아니다. 흔히 불전(佛殿)은 내부 정면에 불상이 놓여있다. 그러나 무량수전의 불상(소조여래좌상·국보45호)은 왼쪽 끝에서 오른쪽을 바라보고 앉아있다. 특이한 배치다. 불상을 정면에 배치하면 거리가 너무 가까워 공간감각을 확보할 수 없다. 반면 무량수전은 왼쪽 끝에 불상을 배치, 먼 거리의 공간감각을 만들어낸다. 또한 그 불상 앞에 늘어선 기둥(열주·列柱)과 겹쳐짐으로써 보통 불전에서는 느낄 수 없이 장엄하다. 옛대 장인의 뛰어난 비균형속의 균형 감각이다.

 

내부 천장 또한 볼만하다. 무량수전의 천장은 열려있다. 뚫려있으니 내부가 더욱 크게 보인다. 길고 짧고, 굵고 가는 여러 부재들은 간결 견실하게 절제됐다. 기둥 대들보 서까래의 정갈한 조화는 고저장단(高低長短)의 음률이다.

 

무량수전, 그 안팎을 돌아가며 보고 또 보아도 싫증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책 한 권을 쓴 작가의 그 마음을 알 것 같다.

나는 무량수전을 보고 싫증이 나지 않는다는 이의 글을 떠올리며 짐짓 무량수전 배흘림기둥 옆에 선다. 그리고 말없이 기둥을 쓰다듬는다.

옛 어른의 감각이 내게 전이할 리 없건만 그 정신이 느껴지는 듯하다.

 

부석사의 무량수전에 대한 말만하고 절 마당에 으레 있는 탑을 본다.

무량수전 동쪽에 세워져 있는 석탑으로,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이다.

 

기단에는 각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는데, 아래층 기단은 가운데에 2개씩의 조각을 두고, 위층 기단에는 하나씩을 두었다.

탑신의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있는데, 몸돌은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조각하였으며,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5단으로 통일신라의 전형양식을 따르고 있다.

 

무량수전을 뒤로 하고 삼층석탑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오르면 조사당이 나온다. 고려 시대의 건물이다. 안에는 삼면으로 모사품 벽화가 있다. 진짜 그림은 떼어내 범종각 아래에 있는 유물전시관에 전시되어 있다.

 

조사당 건물 앞에 유리와 철망으로 가려진 곳에 있는 갇힌 나무가 '선비화'라 불리는 나무이다. 전설 따라 들리는 말에 부석사를 창건한 의상대사가 지팡이를 꽂아놓은 것이 나무가 되었단다. 이 선비화의 잎을 달여 마시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에 나무가 죽을 판이라 유리와 철망으로 막아 놓았는데, 나무는 유리와 철망 때문에 죽을 노릇이다. 나무의 전설을 따라 철망에 눈을 들이대도 나무가 보이지 잘 보이지 않는다. 나무 이름은 선비화가 아니라 골담초며 크기는 그리 크지 않다.

 

부석사의 부석(浮石)은 우리말로 '뜬 돌'이다.

돌이 떠 있다하는 말처럼 무량수전의 왼쪽 뒤로 부석이 있다. 돌이 실제로 떠 있을 수는 없으니 아래 돌과 틈이 벌어져 있다.

 

이 부석에 대해 말하려면 우선 선묘라는 여인의 이야기를 해야 한다. 선묘는 중국 여인으로 의상대사가 중국에 있을 때 의상 대사를 몹시 사모했다 한다. 그러다 의상대사가 고국인 신라로 돌아오자 바다에 몸을 던져 죽고 말았다.

그 뒤 의상대사가 부석사 자리에 절을 지을 때, 이 자리를 도적들이 차지하고 있어 애를 태웠는데, 죽은 선묘 아가씨가 돌을 띄우는 영험을 보여 도둑들이 도망가다 이 자리에 부석사를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해서 절의 이름도 부석사가 되었고, 아직도 무량수전 오른쪽 뒤편에 선묘각이 있고, 선묘각 안에 선묘의 초상화가 있으며, 조사당 내에도 선묘의 초상화가 있다.

 

아내는 앞서 간다.

"버스 타고 따라다니는 여행이라 바쁘다. 다음에 차를 끌고 와서 조용히 봐요. "

떠나면서 다시 오고 싶은 절집이다.

노란 은행잎과 빨간 단풍과 주렁주렁 빨간 사과의 흙길에서

우리는 과수원 아줌마에게 사든 사과를 어적 어적 씹는다.

하도 싱싱하여 이빨이 잘 안 들어가다가 정작 사과 살이 나오면 과일집이 물처럼 흐른다.

 

 

다음에도 사과가 열리는가을에 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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