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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6. 묵상글 (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 - “영적승리의 삶과 죽음(순교)”.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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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6.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의 전사
“영적승리의 삶과 죽음(순교)”
오늘은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입니다. 어제의 주님 성탄의 탄일에 이어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의 천상 탄일입니다. 거룩하게 살았던 이들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천상에서 주님과 함께 새 생명의 시작이라는 천상 탄일입니다. 초대교회 사도들에 의해 지명됐던 로마의 일곱부제중 한분이었던 성 스테파노입니다.
성 스테파노의 활약상은 사도행전 6장과 7장에서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특히 감동적인 부분은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에서 보다시피 자기를 순교에 이르게 한 박해자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그대로 예수님의 제자답게 예수님을 닮은 순교의 죽음이요 임종어입니다.
믿는 이들에게 삶은 영적전쟁의 여정입니다. 역시 혼자가 아닌 더불어의 여정이요 누구나 주님의 전사라는 신원을 지닙니다. 죽는 그날까지 싸워야 하는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 수도생활 초기부터 42년동안 한결같았던 제 소신이자 확신입니다. 지금도 아침 산책때 마다 김민기의 “늙은 군인의 노래”를 부르며 영적전의를 새로이 합니다. 일부 가사를 제 처지에 맞게 바꾸어 부릅니다.
“나 태어나 수도원에 수도자되어,
꽃피고 눈내리길 어언 42년,
무엇을 하였느냐, 무엇을 바라느냐,
나 죽어 수도원에 묻히면 그만이지.
아 다시 못올 흘러간 내청춘,
검은옷에 실려간 꽃다운 내청춘, 꽃다운 내청춘”
늘 불러도 늘 새로운 노래입니다. 늦깍기 34세에 시작한 수도생활이 42년이 흘러 지금은 76세이나 제대가 없는, 죽어야 제대인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입니다. 끝까지 영적전투에 충실하다가 전사함이 소원이겠습니다. 사고사나 병사, 객사가 아닌 전사戰死해야 전사戰士라는 제 소신은 여전합니다. 공부하다 죽던지 기도하다 죽던지 일하다 죽던지 셋중 하나인 순교적 죽음의 전사였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전사의 모범이, 영적전투의 모범이 성 스테파노입니다. 그대로 스승이신 예수님을 닮았습니다. 예수님만 아니라 사도들과 교회의 무수한 성인들이 영적전투의 빛나는 모범들이 되었고 오늘도 면면히 신자들을 통해 계승되고 있음을 봅니다. 오늘 복음은 영적전투의 현실을 보여줍니다. 역사는 반복된다 하는데 오늘날도 양상만 달리 할뿐 끊임없이 반복되는 영적전투의 현장입니다. “박해를 각오하라”는 제하의 오늘 복음중 각별한 대목을 나눕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가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바로 평생 영적전투에 성령이 최고의 조력자가 됨을 깨닫습니다. 성령으로 무장한 주님의 전사를 이길 자는 없습니다. 복음의 마지막 대목이 불후의 명언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끝까지 견디어내는, 버티어내는 인내가 얼마나 영적승리의 삶과 죽음의 순교에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주님께 궁극의 희망을 두고 끝까지 견디어 인내하는 자가 주님의 은총에 힘입어 영적승리자가 됩니다. 베네딕도 규칙 역시 수도공동생활에서 이런 인내를 강조합니다. 한 대목을 소개합니다.
“서로 존경하기를 먼저하고 육체나 품행상의 약점들을 지극한 인내로 참아 견디며 서로 다투어 순종하고...”
상호존경과 인내, 순종으로 이뤄진 얼마나 아름다운 주님의 전사들인 수도자들의 공동체 삶인지요! 혼자가 아닌 더불어의 영적전투인 것입니다. 오늘 사도행전의 성 스테파노를 보십시오, 악을 악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시종일관 선으로 대하며 싸웁니다. 성령과 지혜로 무장하여 싸우는, 은총과 능력이 충만한 성 스테파노를 그 누구도 당해내지 못합니다. 도저히 상대할 수 없자 온갖 중상모략과 거짓 증인들을 내세워 집중 공격합니다. 늘 지상에서는 영적전투의 삶이지만 성 스테파노의 영적시선은 늘 천상의 주님을 향하고 있음을 다음 대목이 입증합니다.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 있고,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 오른쪽에 계신 것이 보입니다.”
천상의 예수님과 하느님이 성령 안에서 늘 성 스테파노의 보이지 않는 배경이 되고 있음을 봅니다. 이어 사람들이 돌을 던질 때 스테파노의 유명한 임종어의 기도요 그대로 예수님의 임종어를 닮았습니다. 영적승리의 순교의 죽음을 의미하는 임종어입니다.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
기도한 후 무릎을 꿇고 큰 소리를 또 기도합니다.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그대로 주님이자 스승 예수님을 닮은, 폭력의 악순환을 끊어 버리는 용서를 위한 기도입니다. 바로 놀랍게도 순교의 죽음 그 자리에는 미래의 바오로 사도가 될 사울이 그 현장을 목격하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오묘한 섭리가 놀랍습니다. “순교자의 피는 믿음의 씨앗”이라는 순교자 성 테르툴리아노의 명언이 생각납니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한강 작가의 유명한 말이 생각납니다. “과거가 현재를 구할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에 우리 믿는 이들은 “그렇다!” 하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늘의 별들처럼 무수한 성인들을 보유한 가톨릭 교회의 살아있는 전통의 과거가 현재를 구하고, 거룩한 죽음을 맞이한 죽은 순교자들이 여전히 살아 있어 오늘도 앞으로도 역사가 계속되는 한 부단히 산자들을 구하여 주님의 전사들이 되어 영적승리의 삶을 살게 할 것입니다.
빛나는 가톨릭교회 전통의 역사가 그 생생한 증거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를 주님의 성령과 지혜로 무장한 주님의 전사가, 믿음의 전사, 평화의 전사, 희망의 전사가 되어 영적승리의 순교적 삶과 죽음을 살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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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6.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12.26 02:44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2023
“첫 순교자인 복된 스테파노의 천상 탄일에 거행하는 신비를 저희가 삶으로
드러내게 하시고 숨을 거두면서도 박해자들을 위하여 기도한
성 스테파노를 본받아 원수까지도 사랑하게 하소서.”
성탄절에 그리고 그것도 주님 성탄 바로 다음 날에
성탄과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순교자 축일을 지내고,
첫 순교자 스테파노 축일을 지내는지 그 의미가 오늘 본 기도에 잘 나와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세상에 태어나시고 스테파노는 천상에 태어나는 것이지요.
주님이 세상에 태어나심으로 스테파노를 포함해
우리 인간이 천상에 태어나게 됨을 뜻하는 겁니다.
주님의 모든 신비는 교환의 신비이고 성사입니다.
주님의 수난과 부활의 신비는
주님의 죽음으로 우리 인간이 부활하게 되고,
주님의 성탄과 육화의 신비는
주님의 땅으로 내려오심으로 우리 인간이 하늘로 오르게 되고,
주님의 성탄으로 우리 인간이 천상에 태어나게 되는 신비지요.
문제는 있습니다.
교환이 이루어지려면 그 교환에 동의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하늘과 땅을 교환하자고 하시며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시면
우리는 땅에서 하늘로 오르겠다고 동의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아무리 주님께서 땅으로 내려오셨어도
우리가 하늘로 오르는 것에 동의하지 않으면
주님의 성탄은 우리 구원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어 아무리 구원 열차에 오르라고 초대해도
우리가 그 열차를 타지 않으면 어쩔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런데 오늘 축일로 지내는 스테파노는 이 교환의 제의에
처음으로 응답하여 처음으로 천상에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이 스테파노에 대해 사도행전은 “은총과 능력이 충만한
스테파노”라고도 하고 “성령으로 충만하였다.”라고도 하는데,
사도행전을 보면 스테파노는 적대자들을 이렇게 초대합니다.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 있고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
물론 그들은 하늘을 보지 못하고,
그 초대에 응답도 하지 않지요.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고 분노로 가득 찼기에
하늘 대신 스테파노에게 증오의 눈길을 보냅니다.
스테파노가 오늘 우리에게도 같은 초대를 합니다.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 있고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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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6.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 하면 생각나는 것이 무엇입니까? 삼대 비판서인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 비판’입니까? 그의 책보다 아마 그의 삶이 먼저 생각나실 것입니다. 그는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길을 산책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래서 근처 이웃들이 칸트를 보고 집의 시계를 맞출 정도였다고 하지요. 그만큼 그가 정확한 사람이라는 것일까요?
뇌과학자들은 일체의 잡념을 없애려면 뇌에 어떤 변화를 주지 말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새로운 변화에는 뇌가 곧바로 반응하기 때문에, 집중해야 할 본질적인 것에 집중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칸트가 바로 그런 사람이 아니었을까요? 자기 학문에 집중하기 위해, 삶의 일상 안에서 늘 똑같이 살았던 것입니다. 우리도 어떤 잡념 없이 어디에 온전하게 집중하려면, 일상의 규칙적인 루틴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너무 많은 것에 신경 쓰는 우리입니다.
제게 많은 분이 기도하는데 잡념 때문에 힘들다고 하소연하십니다. 기도에만 집중하고 싶은데, 기도만 했다 하면 너무 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만큼 너무 많은 것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를 위해 자기만의 루틴이 필요합니다. 일주일에 한 번만 주일미사 참석하는 것으로 충분히 주님께 집중할 수 있을까요? 특별한 시간, 특별한 장소에만 가서 기도하면 잡념 없이 주님께 집중할 수 있을까요? 당연히 그렇지 않습니다. 신앙인이라는 것은 내 삶 전체가 신앙인답게 살아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야 주님께 제대로 집중하면서 그 안에서 참 기쁨의 시간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를 기념합니다. 성인은 초대 교회의 사도들이 뽑은 부제로, 식탁 봉사를 위한 일곱 봉사자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오로지 주님께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언제 어디서나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진리를 증언했습니다. 유다인들의 공격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자기를 죽일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주님께만 집중하고 있으니, 절대로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돌에 맞아 죽음으로써 교회의 첫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 10,22)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의 유혹을 도저히 이겨낼 수 없다면서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견디어 내면서 주님께 집중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만이 구원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랑만으로 충분하다고 했는데, 너무 많은 것에 관심을 두고 있어서 몸도 마음도 힘든 것이 아닐까요?
오늘의 명언: 인생을 살아가는 데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하나는 기적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모든 것이 기적이라고 보는 것이다(아인슈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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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6.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어제와 오늘, 우리는 이 개의 ‘두 탄생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제는 하느님의 지상탄생일이었고, 오늘은 인간의 천상탄일입니다. 아기 예수님의 지상탄생과 스테파노의 천상탄생, 이 ‘두 탄생 이야기’에는 하나의 공통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탄생이 ‘자기 비움’이라는 일종의 ‘죽음’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타인을 향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곧 구세주는 ‘인간을 위하여’ 자신을 내놓으셨으며, 스테파노는 ‘인간을 위하여 자신을 내놓으신 분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놓았습니다. 그러나 앞서 있는 하느님의 지상탄생 없이는 뒤에 있는 천상탄생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사실, 스테파노는 그리스도께서 살아가신 것처럼 살았고, 예수님이 죽으신 것처럼 죽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을 위한 사랑의 순교’로 죽으셨듯이, 스테파노는 ‘하느님을 향한 사랑의 순교’로 죽었습니다.
그는 죽어가면서 기도했습니다.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주십시오.”(사도 6,59)
마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카 23,26)라고 기도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돌을 던지는 이들을 위해서도 기도했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자신을 못 박는 이들을 위해,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루카 23,34) 하고 기도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사도 7,60)
이처럼, 그는 자신을 죽이려는 이들을 위해서도 불타는 사랑으로 기도했습니다. 자기를 죽이려는 이들을 위해 죽음으로써, 그들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사랑에 “하늘이 열리고”(사도 7,56), 하늘은 그를 받아들여 사랑의 순교자로 삼으셨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현실에서는 비록 목숨 바쳐 순교할 기회는 없을지 모르지만, ‘자신의 생각과 뜻을 버리고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일’이 바로 ‘순교’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순교’는 믿고 있는 자신을 증거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믿고 있는 분을 증거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자신의 생각대로 되지 않을 때, 짜증내거나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순간, 오히려 자신 안에 품은 하느님의 사랑을 퍼 올리면, 우리 안에서 ‘열리는 하늘’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 10,22)
이는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미움이나 배척에서 벗어나게 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미움과 배척을 통하여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미움과 박해를 벗어나게 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어려움’과 ‘인내’를 통하여, 구세주와 협력하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신기하게도, ‘어려움’과 ‘인내’에는 고통을 변화시켜 하느님과의 만남이 되게 하는 묘한 이법이 있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내 이름 때문에~”(마태 10,22)
주님!
제 안에 새겨 두신 당신 이름을 기억하게 하소서.
당신 이름으로 부어 주신 사랑을 기억하게 하소서.
당신 이름에 희망을 두오니 당신 이름에서 구원을 주소서!
당신 이름 때문에, 돌팔매질하는 이들을 위해서도 기도하게 하소서!
제 삶이 당신 이름을 증거 하는 순교가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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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6.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믿음을 지키는 일
죽음에 직면하면 두려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죽음이 아니라 어디가 조금 아파도 걱정하는 것이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두려움은 온전한 믿음을 통하여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믿음이 없는 자를 꾸중하십니다. “그렇게도 믿음이 없느냐? 왜 그렇게 겁이 많으냐?”(마태8,26).
성령이 충만한 스테파노는 죽음을 앞두고도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 있고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 오른편에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사도7,55). 하며 주님을 증언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돌을 던질 때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 하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사도7,59-60). 하고 외쳤습니다. 참믿음을 가진 사람만이 어떠한 처지에서든지 주님을 증거할 수 있고 자신을 처벌하는 자에게 용서를 베풀 수 있습니다. 스테파노가 걸었던 이 길은 바로 예수님이 걸으셨던 길이요, 오늘 우리가 걸어야 할 길입니다. “나는 비록 두 팔이 잘리고 두 눈을 빼앗기더라도 복수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주 예수님께서 자기를 못 박은 원수를 위해 기도하시고 용서하시기를 하느님 아버지께 청하지 않았느냐?”(성 에드몬드).
용서한다는 것이 말 같이 쉽지 않지만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실수와 잘못을 범할 수 있는 연약함을 지닌 이상 우리도 용서가 필요한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하고 그때 비로소 타인을 용서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주님이 걸으신 길을 걸음으로써 믿음을 증언하는 사람이 되시길 바랍니다.
복음은 제자들에게 박해를 각오하라는 가르침을 줍니다. 주님이 고난을 겪으셨으니, 제자가 또한 그 고난을 받는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언제나 진리의 길을 갈 것이고 그를 시기하는 자가 있다면 그들의 미움을 감당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 대비한 삶의 방법을 가르쳐 주시니 그대로 하면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것은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같이 양순해야”(마태10,16).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무른 것이 단단한 것을 이기고 부드러운 것이 굳센 것을 이긴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처지에 있든 믿음 안에서 부드러움으로 끝까지 견뎌야 합니다. 그러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마태10,22).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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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6.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첫눈, 첫발자국, 첫사랑, 처음 본당이 지니는 의미가 있습니다. 첫눈 오는 날 만나자는 약속을 하기도 합니다. 첫발자국은 새로운 시작을 알리기도 합니다.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지만, 첫사랑이 주는 감미로움과 애잔함이 있습니다. 처음 경험하는 것은 순수하기도 하지만, 어설프기도 합니다. 33년 전 사제서품 받고 처음으로 부임한 본당은 ‘중곡동’ 성당입니다. 본당 신부님과 저를 포함해서 2명의 보좌신부가 있었습니다. 선임 보좌신부님은 청년, 중고등부를 담당했고, 저는 초등부 주일학교를 담당했습니다. 제가 했던 일은 교사들의 교안을 확인하는 거였습니다. 교사 회합을 들어가는 거였습니다. 토요일에는 어린이 미사를 하였고, 주일에는 12시 미사를 하였습니다. 선임 보좌신부님이 미사 순서를 정하면 평일 미사를 하였습니다. 사람 좋아하는 저는 어른들과도, 청년들과도 만나면서 처음 본당을 순조롭게 시작했습니다. 본당 신부님은 자상하셨고, 선임 보좌신부님은 입학 동창이라서 친하게 지냈습니다.
미국으로 이민 오면 공항에서 만나는 사람의 직업을 많이 따라간다고 합니다. 야채가게 하는 사람이 마중 나오면 야채가게에서 일하게 되고, 세탁소 하는 사람이 마중 나오면 세탁소에서 일하게 되고, 마트를 하는 사람이 마중 나오면 마트에서 일하게 되고, 도넛 가게 하는 사람이 마중 나오면 도넛 가게에서 일하게 되고, 식당 하는 사람이 마중 나오면 식당에서 일하게 된다고 합니다. 물론 기술직이나, 전문직으로 왔으면 그 기술과 전문 분야를 찾아서 일할 수 있습니다. 사제 생활도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처음 만난 본당 신부님의 사목 방침과 사목 스타일을 배우게 됩니다. 꼼꼼하게 챙기고, 사목을 이끌어가는 신부님을 만나면 그렇게 배우게 됩니다. 운동을 좋아하고, 여행 가는 걸 좋아하는 신부님을 만나면 그렇게 배우게 됩니다. 책을 가까이하고, 강론을 성실하게 준비하는 신부님을 만나면 그렇게 배우게 됩니다. 성령 기도회를 이끌고, 영성이 깊은 신부님을 만나면 그렇게 배우게 됩니다.
제가 처음 만난 본당 신부님도 제게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미국에서 교포 사목하고 오신 신부님은 무척 자유로웠습니다. 기존에 보았던 본당 신부님은 엄격하셨고, 권위가 있었고, 가까이 하기에는 어려웠습니다. 신부님은 늘 먼저 제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스테이크를 구워주기도 하였고, 스키장을 가자고 하였고, 산책 가자고 하였습니다. 매주 화요일에는 성령 기도회 미사가 있는데, 같이 하자고 하였습니다. 단체들에도 힘을 실어 주었습니다. 신부님은 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거의 안 하였습니다. 보좌신부들이 하는 일도 간섭하지 않았습니다. 자유로운 신부님에게서 사제 생활의 기쁨을 볼 수 있었습니다. 신부님은 늘 기도하였습니다. 성당에서 성체조배 하였고, 신부님 방에는 따로 기도 방이 있었습니다. 신부님 방의 기도 초는 늘 눈물이 마르지 않았습니다. 신부님은 매일 복음 묵상 글을 만들었습니다. 신부님은 ‘2000년대 복음화’ 단체를 이끌었고, 저는 신부님을 따라서 몇 번 미사에 함께 했습니다. 신부님의 자유는 기도라는 뿌리가 있었기에 더욱 풍요로웠습니다. 사제 생활 길잡이가 되어준 신부님께 감사드립니다.
성탄의 기쁨이 있는 바로 다음 날, 우리는 교회의 첫 번째 순교자인 ‘스테파노 순교자’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신 이유를 늘 기억하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하느님께서 모든 권력과 능력을 포기하시고 사람이 되신 것을 의미합니다. 성탄으로 인해서 우리들은 구세주 예수님은 어떤 존재인지 묵상할 과제를 부여받습니다. 마구간이라는 가장 가난하고 낮은 자리에서 태어났음을 늘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태어날 때부터 가난하였고 ‘나는 머리 둘 곳조차 없다’라고 자신의 처지를 말한 적도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너희들의 것이다.’ 제자들을 파견하면서도 지팡이조차 들고 가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철저한 무소유와 자발적 가난의 모습만이 가장 제자다운 삶이 될 수 있다는 가르침이 성탄입니다. 많은 성인과 성녀가 있지만 스테파노 성인이 예수님을 믿으며 처음으로 순교하였고, 신앙을 증거하였습니다. 스테파노 성인의 뒤를 이어서 수많은 성인과 성녀들이 예수님을 믿으며 신앙을 증거하였고 천상에서 빛나는 별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스테파노를 통해서 신앙인이 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됩니다. 그것은 또한 예수님께서 이미 보여주신 길이기도 합니다. ‘제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맡기나이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스테파노는 죽음의 순간에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 위에서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죽음의 순간에서도 누군가를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순교란 단순히 목숨을 바치는 것만이 아닙니다. 순교란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나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이것이 신앙의 신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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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6.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주님께서는 사람들을 조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말씀 때문에 우리들이 끌려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또 한편으론 ‘걱정하지 마라.’라고도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말하는 이가 우리 자신이 아닌 우리 안에 있는 하느님의 영이기 때문입니다.
즉 하느님의 영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알려주고 계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은 하느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풀이해 줍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그 의미를 깨달았을 때 즐거움과 기쁨을 느끼는 것은 모두 성령의 활동입니다.
하느님의 영은 우리 신앙의 길이 더욱 기쁘고 즐거울 수 있도록 영적인 활력을 불어넣어 줍니다. 또한 우리 기도가 하느님 뜻에 맞게끔 우리를 인도합니다.
이 모든 것이 성령의 활동입니다. 이 지면에 적지 못하는 수많은 활동을 성령은 우리 가운데서 이루고 계십니다.
이런 성령, 즉 하느님의 영께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주님께서 다시금 들려주십니다. 그러니 이 신앙의 길을 걸을 때 걱정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고, 그저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을 실행하며 살라고 가르치고 계십니다.
지금 그대가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지금 그대가 걱정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혹시 그것이 우리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무엇입니까? 만약 그렇다면 그것을 온전히 하느님께 맡겨 보십시오. 성령을 통해서 말입니다.
우리가 그럴 수 있다면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서 활동하기 시작하실 것입니다. 무엇이 우리에게 다가오든 우리는 그 모든 것에 감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채움과 비움
‘채움과 비움’이라는 말이….
우리 인생 같습니다.
늘 무엇인가를 채우기 위해 살아가는 우리들
땀을 흘리고, 노력하고, 열정을 쏟아 넣습니다.
그런데 그런 채움이 있으면….
우리가 원하든 그렇지 않든
비움이 찾아옵니다.
어떤 것은 강제적으로 비워지기도 하고
어떤 것은 스스로 비워내야 하기도 합니다.
‘채움과 비움’은
들숨과 날숨 같은
인생 굴곡의 모습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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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6.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랑 아닌 미움 받기를>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제 잘난 사람에게
사랑 아닌 미움
받기를
속 검은 사람에게
사랑 아닌 미움
받기를
겉꾸미는 사람에게
사랑 아닌 미움
받기를
말만하는 사람에게
사랑 아닌 미움
받기를
움켜쥐는 사람에게
사랑 아닌 미움
받기를
썩어빠진 사람에게
사랑 아닌 미움
받기를
가르는 사람에게
사랑 아닌 미움
받기를
짓밟는 사람에게
사랑 아닌 미움
받기를
빼앗는 사람에게
사랑 아닌 미움
받기를
죽이는 사람에게
사랑 아닌 미움
받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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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6.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마태 10,18)
나를 위해 증언하여라
‘우리 때문에 아버지가 자식을 죽이고, 형제가 형제를 죽이고, 세상이 혐오스러운 것들로 가득 차는 것을 보고 어떻게 사람들이 믿음으로 오겠느냐?’고 따지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종류의 전쟁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우리를 파괴하는 마귀들 같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사람들 사는 곳에서 몰아내야 할 돌림병이나 재앙 취급 하지 않을까요? 친족끼리 싸우는 피로 물든 세상을 사람들이 보게 되지 않을까요? 비록 많은 갈등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우리의 유일한 목적은 그들의 집에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그 평화는 아름답습니다. 우리가 단지 12명이 아니라 아주 많다고 가정해 봅시다! 우리가 ‘배우지 못한 일자 무식쟁이’가 아니라, 아주 지혜롭고 수사학에 능통한 달변가라고 가정해 봅시다. 우리의 선포가 어떤 결과를 가져왔겠습니까? 우리가 엄청난 재산과 군대를 거느린 임금이라고 가정해 봅시다! 그런 것들이 평화의 나라를 선포하는데 더 효과적일까요? 왜 사람들은 우리가 우리 안전을 아랑곳 않을 때, 우리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갖는 걸까요?
그러나 제자들은 이런 것을 생각하지도 말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명령이 과연 실제적인 가치가 있는지 따져 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아무 말 않고 순종했습니다. 제자들이 이처럼 순종한 것은 그들이 도덕적으로 뛰어나서가 아니라, 스승께서 주신 은총의 선물 덕분이었습니다. 어떤 무서운 일이 닥친다 해도, 그들은 그것을 견뎌낼 수 있는 더 많은 은총을 받게 되어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고을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마태 10,15)라고 하십니다. 그런 다음 또 이렇게 경고하십니다.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몰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때문에 이런 일들을 겪음으로써 사람들을 꾸짖는 역할을 하게 되리라는 말씀은 결코 작은 경고가 아닙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4
하느님이 그대 안에서 하느님 되게 하라
하느님의 사랑은 이렇게 우리 가운데 나타났습니다(1요한 4,9)
어떤 사람이 천 년을 살면서 삶에게 “왜 사는가?" 라는 물음을 던진다면, 유일한 대답은 ”나는 살기 위해서 산다”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삶은 자신의 터에서 살고, 스스로에게서 솟구치기 때문입니다. 삶이 이유 없이 사는 것은 스스로 살기 위해서입니다.
엑카르트는 이유 없이 사는 삶을 다른 자리에서도 되풀이해서 설명한다. 그는 이유 없이 사는 삶이라는 주제로 아래의 대화를 상상하여 말한다.
“당신은 왜 하느님을 사랑합니까?’ “잘은 모르지만 … 하느님 때문입니다.”
“당신은 왜 진리를 사랑합니까”” “진리 때문입니다.”
“당신은 왜 선을 사랑합니까?” “선 때문입니다."
“당신은 왜 삽니까? “잘은 모릅니다! 하지만 나는 사는 게 즐겁습니다.”(303)
✝️ 목요일 성모님의 날✝️
<파티마의 성모 마리아와 목동 / 세 바르따스>
제 5 장 두 천사 세상을 떠나다
성체의 예수님과 함께 희생이 되다
어느 날 아침 학교 가기 전에 루치아는 잠깐 히야친따에게 들렸는데 그 날 아침따라 안색이 무척 나빴다.
“너 많이 아프구나."
“어젯밤은 너무 심해서 일 분도 잘 수가 없었어 . 게다가 난 몸을 뒤척 이지 않는 희생을 바치려 했었어."
그리고 혼자일 때는 자리에서 내려와 천사의 기도를 바친다는 것도 루치아에게 이야기했다.
“정말 속상해. 난 이제 방바닥에 엎드릴 수가 없어. 굽히려고 하면 넘어져 버려. 할 수 없이 꿇어서 기도해."
그 후 루치아는 우렘의 페레이라 본당 신부를 만났을 때 히야친따의 사정을 알려 드렸다. 친절한 신부는 루치아를 통해 다음과 같은 의견을 주었다.
“이제부터 히야친따는 일어나서는 안 되고 만일 기도해서 피로하지 않거든 이불 속에서 기도해라."
이 전갈은 곧 전해졌는데 병자는 반문했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이 흐뭇해하실까?"
“흐뭇해하시고 말고, 예수님은 우리가 신부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순종하는 것을 원하고 계셔."
“그래. 그럼 그렇게 해야지 뭐."
이것 또한 하나의 희생이요 그 어떠한 희생보다 뛰어난 순종의 희생인 것이다. (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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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6.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어제 예수님 탄생과 오늘 스테파노의 순교 /
박윤식 [big-llight] 241225. 20:42 ㅣNo.178773
구내식당에서 혼자 밥 먹을 때가 있다. 그럴 때 간혹 “어떻게 혼자 식사하고 있어요?”라는 인사를 종종 받는다. 혼자가 뭐 그리 이상한가? 여럿이 또는 혼자 먹을 수도 있는 것을. 오히려 혼자일 때, 누가 옆에 와 함께 이야기하다보면 자연 새로운 친구도 사귀리라. 그런데 한국에서는 혼자 먹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이들이 의외로 많다. 왜 그럴까? 왕따 문화가 존재하기에.
그것은 혼자이면 ‘외톨이가 된 것은 아닌가?’라는 나약한 마음이 자리 잡고 있기에. 또 혼자인 이를 왕따 시키려는 이상한 우리네 나쁜 문화가 있기 때문일 게다. 스스로가 왕따 당하고 있다고 느낀 적이 있는가? 스테파노는 그 죽는 순간까지 부활하시어 승천하신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며 기도하다가 끝내 왕따를 당했다. 그는 사람들이 돌을 던질 때에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면서, 자신의 이름의 뜻인 ‘화관’처럼 첫 순교자가 되었다.
일곱 봉사자로 뽑힌 스테파노에게는 그리스도가 삶의 전부로, 그에게는 주님 이외에는 그 어떠한 것도 의미가 없었으리라. 그렇기에 그는 그 죽는 순간까지 주님께 의지하며 기도할 수 있었고 목숨 바쳐 증언할 수 있었다. 그리고는 자기를 돌로 치는 이들을 위해 애타게 기도하였다. 그는 자기 이름이 나타내는 것처럼, 주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순교의 첫 월계관을 썼다.
“조심하여라.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 또 나 때문에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그때에 어떻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다 그분께서 그때에 일러 주실 것이다. 이처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닌, 아버지 영이시다. 또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이에게 미움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들은 구원을 받는다.”
사실 예수님 때문에 왕따로 고통 받으면서도 법 없이 사는 분들이 간혹 주위에 보인다. 어쩜 그들은 그런 차별을 자신은 물론 믿음을 더 깊이 이해하는 기회로 삼았다. 왕따 당했기에 이루어 낸 깊은 하느님 사랑을 생각해 보자. 고독한 왕따를 이겨 내는 이들을 둘러보자. 예수님만이 나의 구원자라고 고백하며 기도하다, 끝내 왕따 당한 스테파노의 순교 정신을 꼭 본받자.
이렇게 은총과 능력이 충만한 스테파노 순교자는 자신의 삶을 바꾸어 놓은 그 복음으로, 온갖 반대와 폭력에도 뜻을 굽히지 않고 그 어떤 위협에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믿음이 강한 그는 피를 흘리면서도 계속 복음을 증언하였다.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하느님께 자신의 영을 받아 주시고 그 박해자들을 끝까지 용서해 주시라고 청하였다. 그는 목숨을 잃는 희생의 순간까지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이렇게 복음을 증언하였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이에게 미움을 받는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면 구원 받을 것이다.’라고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이르셨다.
오늘은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의 거룩한 축일이다. 그는 이렇게 그리스도교 최초의 공식 순교자이다. 메시아이신 아기 예수 탄생 다음 날, 그의 순교를 기념한다는 것은 참으로 뜻깊다. 어제는 위대한 탄생을, 오늘은 그 반대의 거룩한 순교를 기념한다. 어제는 생명을 노래하였고 오늘은 그 끝의 죽음을 묵상한다. 어제는 하늘에서 땅으로 오신 그분을 생각했지만, 오늘은 땅에서 하늘로 가신 이분을 기린다. 이처럼 신앙의 눈으로 볼 때에, 딱 비교되는 어제와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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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6.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스테파노의 순교 장면은 십자가 위 예수님의 모습과 많이 닮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카 23,46)라고 기도하셨고,
스테파노는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사도 7,59) 하고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못 박은 이들을 위하여,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라고 기도하셨고,
스테파노는 자신에게 돌을 던지는 이들을 위하여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사도 7,60) 하고 기도합니다.
참된 믿음은 마치 스테파노가 살아 계신 예수님의 모습을 드러냈던 것처럼,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도, 이웃들을 대하는 것도,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도 예수님을 닮게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 안에 사시는 신비가 이루어지게 합니다(갈라 2,20 참조).
신앙생활은 예수님을 닮아 가는 여정입니다.
그분께서 사랑하셨던 것을 우리도 사랑하고, 그분께서 걸으셨던 그 길을 우리도 따라 걷습니다.
그 길을 걷다 보면 믿음 때문에 겪게 되는 어려움과 마주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용기를 내십시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마태 10,20).
예수님의 이 말씀처럼 성령께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주님의 말씀을 가까이하는 신앙인이 되십시오.
그분의 말씀은 우리의 믿음이 예수님을 만나고 배우며 닮게 해 줄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10,2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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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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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6.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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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6.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가 무엇을 말 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마태 10, 19)
성 스테파노의
여정에
함께하시는
성탄의
하느님이십니다.
성령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께
자신을 맡기는
최상의 평화를
우리들에게
알려주십니다.
모든 것을
내어맡기는
봉헌은
최고의
사랑이며
최후의
완성입니다.
성탄의 삶은
순교의
삶입니다.
삶이라는
한계상황에서
만나는
신앙의 뜨거운
진면목입니다.
순교의 사람은
비폭력의 길을
선택합니다.
비폭력의 실천이
바로 성탄의
실천입니다.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서
말씀하시는
성령께
맡깁니다.
이 시대의
성탄과
이 시대의
순교는
자신의 뜻을
내려놓고
아버지 하느님께
자신을 맡기는
봉헌입니다.
봉헌으로
더욱 빛나는
성탄이며
봉헌으로
더욱 뜨거워지는
사랑의 순교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아시는
하느님께
무엇을
내어맡기는지를
묻는 첫 순교자
축일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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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6.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환희와 기쁨은 언제나 고통이나 죽음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아기 예수님의 성탄 바로 그 다음 날, 첫 순교자 스테파노 성인의 축일이
대기하고 있습니다.
대축제 바로 다음 날, 셀 수도 없이 날아오는 돌팔매에 맞아 죽임을 당한 스테파노의 축일이 있다는 것, 오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큰 것 같습니다.
환희와 기쁨은 고통이나 죽음과 늘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 충만한 은총은 고통과 죽음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진리를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순교자들이 형장으로 끌려가는 장면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우리의 자랑스럽고 영광스러운 순교자들은 죽음의 길을 걸어가면서도, 그분들의 얼굴을 찬란한 빛으로 가득했고, 충만한 기쁨으로 가득했습니다.
그 비결이 과연 무엇일까요?
그들은 이 지상에서부터 천상을 살고 있었습니다.
언제나 주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고 있음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내면 안에 그 누구도 침해하지 못할 주님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세상의 박해가 점점 증폭될 때마다, 시시각각으로 죽음의 그림자가 짙어갈 때 마다 스테파노는 즉시 자신의 내면에 마련된 나만의 감실, 나만의 성탄 구유로 들어갔습니다.
거기서 지극히 겸손하신 하느님의 육화 강생의 신비를 오래도록 관상했습니다.
다시금 힘과 용기를 얻은 스테파노는 거리로 나가 당당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곧 하느님이심을
용감하게 선포했습니다.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 있고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 오른편에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사도행전 7장 56절)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 그 누구도 앗아갈 수 없는 굳건한 하느님의 지성소, 자신만의 감실을 마련했던 스테파노였기에 언제나 성령으로 충만할 수 있었습니다.
자신 안에 충만히 현존하면서 활동하신 성령의 은총에 힘입어 스테파노는 언제나 하느님 아버지를 눈앞에 뵙는 듯이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스테파노는 살기등등한 거짓증인들, 극악무도한 원수들 앞에서도 예수는 곧 그리스도임을 당당하게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적대자들이 던지는 무수한 돌팔매에 서서히 죽어가면서도 스테파노는 조금도 물러서거나 도망가지 않고 외칩니다.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사도행전 7장 59절)
스테파노는 하나 밖에 없는 자신의 청춘과 생명을 바쳐 교회의 첫새벽을 밝힌 등불이었습니다.
자신의 존재 전체를 봉헌하면서 그리스도를 증거한 스테파노의 생애는 교회의 발전을 위한 마중물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언제라도 죽을 각오로 하루하루를 살았던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하루살이' 스테파노의 삶은 이 성탄 시기 우리가 추구해야 할 롤모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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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6.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0,17-22: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아버지의 성령이시다
오늘은 성탄을 지낸 후 첫날인데 스테파노 성인의 순교를 기념하고 있다. 이것은 교회가 예수님과 복음을 위하여 교회 역사에서 첫 번째로 자신의 생명을 바쳐 주님의 사랑을 증거하신 스테파노 성인을 기념하는 날로 정하였다. 스테파노는 사도들을 도와 일했던 성령과 지혜로 가득 차 존경을 받던 일곱 부제 중의 한 사람이었다. 스테파노는 성령이 충만한 분으로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증거하였고, 주님의 수난을 몸으로 체험한 분이시다. 오늘 독서에서 들었듯이 “주 예수님, 제 영혼을 받아 주십시오!”(사도 7,59),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지우지 말아 주십시오!”(사도 7,60)라고 자신을 박해한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신 분이시다. 이리하여 스테파노 성인은 그리스도인의 표상으로 칭송을 받으신다.
그리스도인은 복음과 신앙 때문에 고발을 당하였고 죽임을 당하였다. 그들은 자신의 믿음과 순교를 통하여 그리스도 예수를 가장 완전하게 닮을 수 있다는 희망을 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순교를 통해서 그리스도와 가장 완전히 일치될 수 있고, 그분의 가장 완전한 제자가 될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그리고 순간순간을 항상 하느님 자녀의 자세를 잃지 않고, 모든 어려움에 무릎을 꿇는 것이 아니라, 용감히 이겨나가려는 굳센 의지로 하느님 안에 살려고 했기 때문에 순교할 수 있었다.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17절) 유다인들은 이렇게 하는 것이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한 일인 양, 회당에서 그들을 채찍질할 것이다. 기도와 찬양을 바치고 성경을 읽는 그곳에서 사도들을 박해하였다. 사도들이 겪은 고통은 하느님께 바치는 희생제물이었다. 이러한 삶 속에 성령의 도우심이 있다. 매 순간 구체적인 실천을 통하여 우리가 신앙과 복음을 깨닫게 된다면, 우리 안에서 모든 것을 함께 하셨던 성령께서 우리에게 하여야 할 말을 깨우쳐 주신다. 이것을 믿고 우리는 지금, 이 순간의 나 자신과 싸움을 충실히 해나가야 한다.
신앙은 연말에 크리스마스를 지내는 것같이 평화스러운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스테파노 순교 축일을 지내는 것으로 알려주듯이 강철과 같이 강해져야 함을 말하고 있는 오늘 축일의 의미를 우리는 깊이 생각하여야 한다. 하느님 나라로 가는 길은 많은 역경과 난관이 있으며, 이에 대처하는 우리 신앙인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알려주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하느님을 떠나도록 주위에서 온갖 방법으로 우리를 박해하고 있는 이것들을 잘 이겨나갈 수 있도록 깨어있는 삶을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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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6.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열린 하늘을 보는 사람의 특징: 세상 모두와 맞설 수 있는 진리가 있다.
저는 유학을 마치고 햇빛 알레르기 때문에 얼굴과 살이 붉게 올라오는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한방, 양방, 심지어 레이저로 굵어진 핏줄을 터뜨려봤지만, 다 헛수고였습니다.
그러다 문득 계면활성제 때문일 수 있겠다 싶어서, 비누를 쓰지 않았더니 그런 증상이 바로 사라졌습니다.
현재까지 10년 넘게 샴푸도 쓰지 않고 얼굴과 몸이 비누칠도 하지 않지만,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우리는 너무 살을 박박 긁어내고 그것을 보호하기 위해 또 크림을 바르곤 합니다.
저는 인간이 그렇게 창조되지는 않았을 것이라 믿었고 실험해 보니 정말 괜찮았습니다.
만약 제가 이 주장을 한다면 누가 좋아할까요?
이 세상에서는 아무도 없습니다.
이것이 보이면 당연히 의사들, 비누나 샴푸 회사, 그리고 비누와 샴푸를 쓰는 대부분 사람으로부터
박해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너나 그렇게 살아. 우리는 달라!”라고 말할 것입니다.
순교자들이 이와 마찬가지로 생겨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은 성 스테파노 순교자 축일입니다.
사도행전은 스테파노의 순교 순간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스테파노는 성령으로 가득 차 하늘을 우러러보며 하느님의 영광과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예수님을 보았다.”(사도 7,55).
스테파노가 본 하늘의 환시는 그의 궁극적인 운명을 드러냈고, 그가 고통 속에서도 인내와 희망을 품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알지 못하는 것을 안다는 말은 그들로부터 돌에 맞아
순교하게 될 것임도 알려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5,18-19에서 이렇게 경고하셨습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세상이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
너희가 세상에 속해 있다면 세상은 너희를 자기 사람이라고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세상에 속해 있지 않고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진리란 것이 내가 세상 모든 사람의 반대에 앞서서도 굽히지 않게 만드는 힘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아모스 예언자는 하느님의 계시를 보고 담대히 외쳤던 인물로, 세상으로부터
큰 반발과 박해를 받았습니다.
아모스는 부정한 행위를 일삼던 북이스라엘의 지도자들에게 하느님의 정의를 선포하며 그들의 죄를 고발했습니다.
그의 예언이 너무 날카롭고 불편했기 때문에, 베텔의 사제 아마츠야는 아모스에게 이렇게 말하며 그를 협박했습니다.
“선견자야, 유다 땅으로 도망쳐 가서 거기에서나 예언하며 거기에서나 먹고살아라.
그러나 다시는 베텔에서 예언하지 마라.
이곳은 임금의 성소요, 왕국의 성전이기 때문이다”(아모스 7,12-13).
그러나 아모스는 이에 굴하지 않고 담대히 답했습니다.
“나는 예언자도 아니고 예언자의 제자도 아니다. 나는 가축을 기르며 돌무화과나무를 가꾸는 사람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나를 데려다가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라고 명령하셨다.
이제 너는 주님의 말씀을 들어라.”(아모스 7,14-16).
아모스는 예언을 배운 적도 없고 공부한 적도 없습니다.
그러나 온 이스라엘의 반대에 맞설 용기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사람들이 볼 때 예언에 힘을 받게 합니다.
요나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들에게 죽을 것을 알면서도 자신들에게 와서 장차 있을 멸망에 대해 예언하는 것을 보고는 그들 생각이 변하여 회개하였습니다.
진리는 사는 사람은 그래서 이 세상에서 세상 모든 이들의 반대에 부딪혀도 굽히지 않는 신념이 있습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과학적 진리를 밝히며 세상의 반대에 부딪혔던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옹호하며, 당시 교회의 지배적 관점과 맞섰습니다.
그의 주장은 종교적 권위와 과학적 진실 사이의 긴장을 불러일으켰고, 그는 종교재판에서 자신의 연구를 철회하라는 압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갈릴레오는 결국 그의 연구를 통해 인류의 지식과 관점을 변화시켰으며, 과학혁명의 길을 열었습니다.
그는 끝까지 믿음을 잃지 않으며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 이것이 하늘이 열려있고 거기서 진리를 보는 사람의 삶입니다.
성녀 조안나 베레타 몰라는 임신 중에 자신과 아기의 생명 사이에서 선택해야 하는 순간에 직면했습니다.
그녀는 아기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그녀는 “어머니는 항상 아이를 첫 번째로 생각해야 합니다.”라고 말하며 끝까지 신앙 안에서 살았습니다.
이런 말은 낙태를 많이 하는 나라나 그런 것으로 돈을 버는 산부인과 의사가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렇더라도 그 모든 반대에 맞설 수 있었기 때문에 하늘을 보는 사람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강력하고 진실된 설교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며 부패한 지도자들과 맞섰습니다.
그의 용감한 설교는 세속 권력자들과의 갈등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그는 추방당하고 여러 차례 박해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절대로 물러서지 않았으며, “나는 하늘의 시민이다.
나를 어디로 보내든, 나는 하느님의 계획 안에
있다.”라는 그의 말은 그의 굳건한 신앙과 인내를 보여줍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인간이 하느님이 된다.”라는 말이나 “하느님은 한 분이 아니다.”라는 말을 계속할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여전히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겠지만, 이를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 확신은 세상의 모든 박해와도 타협할 수 없게 만듭니다.
이것이 내가 열린 하늘을 보는 행복을 주기 때문입니다.
나에겐 이 세상 모든 이에게 박해받아도 포기하지 않을 진리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열린 하늘을 보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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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6.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스테파노>
“스테파노는 성령이 충만하였다.
그가 하늘을 유심히 바라보니, 하느님의 영광과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예수님이 보였다.
그래서 그는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 있고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들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았다.
그리고 일제히 스테파노에게 달려들어, 그를 성 밖으로 몰아내고서는 그에게 돌을 던졌다.
그 증인들은 겉옷을 벗어 사울이라는 젊은이의 발 앞에 두었다.
사람들이 돌을 던질 때에 스테파노는,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 하고 기도하였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하고 외쳤다.
스테파노는 이 말을 하고 잠들었다(사도 7,55-60).”
스테파노 순교자는 우리 교회의 첫 순교자라는 점에서 중요한 인물이지만, 충실한 신앙인들이 들어가게 될 하느님 나라와 그 나라의 영광을 직접 목격하고 증언한 첫 증인이라는 점이 더 중요합니다.
여기서 “스테파노는 성령이 충만하였다.” 라는 말은, 그가 순교 직전에 목격하고 증언한 일은, 어떤 환각이나 착각에 의한 일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한 일이고, 하느님께서 내려 주신 계시를 받아서 증언한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의 증언은 ‘구원의 진리’에 속한 증언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보였다는 말은, 스테파노가 하느님을 직접 보았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묵시록에 있는 다음 말에 연결됩니다.
“도성 안에는 하느님과 어린양의 어좌가 있어, 그분의 종들이 그분을 섬기며 그분의 얼굴을 뵐 것입니다(묵시 22,3ㄴ-4ㄱ).”
신앙인들이 누리게 되는 행복 가운데에서 가장 큰 행복은 ‘하느님을 직접 뵙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그것을 ‘지복직관’이라고 표현합니다.>
또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예수님을 보았다는 것은, 예수님이 하느님과 동등한 위치에서 영광을 누리고 계시는 것을 보았다는 뜻입니다.
스테파노가 그것을 증언한 것은 ‘예수님은 하느님이신 분’이라고 믿는 신앙이 옳은 것임을 확증한 것입니다.
‘하늘이 열려 있다.’ 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나라와 당신의 모습을 스테파노에게 보여 주셨다는 뜻입니다.
스테파노가 순교 직전에 하느님과 예수님을 본 것은, 하느님과 예수님께서 스테파노를 마중 나오셨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마중 나오신 일 자체가 신앙인들에게는 대단히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이 상황에 대해서, “하느님과 예수님께서는 스테파노가 살해당하는 것을 내버려 두시다가(구경만 하시다가) 죽은 다음에야 마중 나오신 것인가?” 라고 물을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믿음 없는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믿는 우리는, 순교는 억울하게 살해당하는 일이 아니라, 목숨을 바쳐서 신앙을 증언하는 일이고, 하느님과 예수님은 그것을 구경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신앙인들이 끝까지 신앙을 지키고 증언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힘을 주신다고 믿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라고 약속하셨습니다(마태 28,20).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약속하신 대로 언제나 어디서나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늘 우리와 동행하시는 분, 우리가 아파할 때 우리보다 더 아파하시고, 우리가 슬퍼할 때 우리보다 더 슬퍼하시는 분, 우리가 당신 곁을 떠나도 우리 곁을 떠나지 않으시는 분, 우리가 한눈을 팔아도 우리만 바라보시는 분...>
“그들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았다.” 라는 말은, 박해자들이 스테파노의 증언을 ‘신성 모독 발언’이라고 생각해서 분노하면서 말을 막으려고 했고, 스테파노의 말을 안 들으려고 귀를 막았다는 뜻입니다.
스테파노에게 돌을 던져서 죽인 것은, 그를 ‘하느님을 모독한 죄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레위기에 있는 율법대로 한 일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모독한 자는 사형을 받아야 한다.
온 공동체가 그에게 돌을 던져야 한다. 이방인이든 본토인이든 주님의 이름을 모독하면 사형을 받아야 한다(레위 24,16).”
그런데 당시에 이스라엘은 로마제국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총독의 허락 없이는 율법대로 사형을 집행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경우에는 로마법의 절차대로 진행되었는데, 스테파노 순교자의 경우에는 그 절차가 모두 무시되었습니다.
아마도 총독이 개입하기 어려울 정도로, 거의 폭동과 같은 수준의 박해였을 것입니다.
여기서 ‘그 증인들’이라는 말은, 스테파노를 ‘하느님을 모독한 죄인’이라고 생각하고
남들보다 먼저 돌을 던진 박해자들을 가리킵니다.
겉옷을 벗어 사울이라는 젊은이의 발 앞에 두었다는 말은, 사울이라는 젊은이가 박해자들의 우두머리였음을 나타냅니다.
<‘박해자 사울’은 나중에 ‘사도 바오로’가 됩니다.
스테파노 순교자가 흘린 피가 ‘하나의 밀알’이 되어서 ‘사도 바오로’ 라는 열매를 맺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요한 12,24).>
스테파노의 마지막 모습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모습과 비슷하고, 그가 바친 기도도 예수님께서 바친 기도와 비슷합니다.
그것은 스테파노가 예수님을 본받아서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그대로 뒤따라갔음을 나타냅니다.
60절의 ‘무릎을 꿇고’ 기도한 다음에 ‘잠들었다.’는 말은, 기도 자세 그대로 숨을 거두었음을 나타냅니다.
<죽었다고 표현하지 않고 잠들었다고 표현한 것은, 순교자의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의 시작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라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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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6.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마태 10,17-22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어제는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탄생하신 것을 기념하는 성탄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가톨릭 교회는 교회의 첫 순교자인 스테파노 성인의 죽음을, 다시 말해 그의 천상 탄일을 기념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사람이 되시어 세상에 오신 주님의 사랑이 결코 헛되지 않도록, 우리도 최선을 다해 주님의 뜻을 실천하여 하느님 나라에 들어감으로써 하느님의 구원계획이 완성되게 하겠다는 의지를 되새기는 것이지요. 그런 이유로 성탄의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인 오늘 스테파노 성인의 순교를 기념하는 겁니다.
아기 예수님의 지상 탄생과 스테파노 성인의 천상 탄생, 이 두 탄생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 탄생이 ‘자기 비움’과 ‘순명’이라는 일종의 죽음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 죽음이 이웃을 향한 참된 사랑으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즉 구세주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낮추고 비워 인간이 되셨으며, 스테파노는 그런 주님을 위하여, 그분을 향한 자신의 믿음과 사랑 때문에 자기 목숨까지 바치며 순교한 겁니다.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무수한 돌덩이에 살이 찢기고 뼈가 부러지는 와중에도 스테파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정당한 이유 없이, 질투와 자격지심 때문에 자신을 죽이려 드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모습에서, 십자가 위에서 원수들을 위해 아버지께 기도하신 예수님의 모습이 겹쳐져 보입니다. 스테파노가 자신을 핍박하는 원수들을 용서하며 그들을 위해 목숨까지 바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평소에 주님의 뜻을 충실히 실천했기 때문입니다. 그 실천을 통해 이 세상에서 이미 하느님의 얼굴을 뵈었기에 미움과 원망, 분노와 복수처럼 주님 뜻에 어긋나는 것들은 실행할 수도 바랄 수도 없었던 겁니다.
“신앙의 자유”를 누리는 오늘 우리의 현실에서는 목숨 바쳐 순교할 일은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순교할 기회 자체가 없는 건 아닙니다. 자신이 가진 모든 걸 내려놓고 주님 뜻에 철저히 순명하며 따르는 것이 순교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순교는 주님의 뜻을 철저히 따르는 실천을 통해 내가 주님을 믿고 있음을 당당히 드러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살다보면 세상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당신 이름 때문에, 즉 당신의 뜻과 가르침대로 사는 과정에 따르는 미움과 차별, 핍박과 배척에도 불구하고 악을 악으로 갚지 않기 위해 끝까지 견디며 더 큰 사랑과 자비로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은 구원을 받을 거라고 말이지요. 우리는 지금 성탄의 기쁨을 나누는 축제의 기간을 지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가운데 사시는 주님과 함께하는 신앙생활은 마냥 기쁘고 즐겁기만 한 게 아니라 고통과 슬픔, 미움과 질투, 슬픔과 한숨까지 다 포함되어 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끝까지 걷기 위해 스테파노 성인의 믿음을 기리며 그분의 전구를 청하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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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6.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틈새도 없을 것 같은 유대인들 중에 그리스도를 사랑하며 순교할 수 있는 스테파노 같은 사람이
있다는 것은 인간적인 차원에서는 이해될 수 없는 일입니다.
사도행전은 유대인들과 논쟁을 벌이던 스테파노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스테파노의 말을 듣고 마음에 화가 치밀어 그에게 이를 갈았다. 그러나 스테파노는
성령이 충만하였다. 그가 하늘을 유심히 바라보니, 하느님의 영광과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예수님이 보였다.”(사도 7,54-55)
구약에서 신앙을 위해 불가마에 던져진 다니엘의 세 동료의 이야기에서 아자르야라는 인물이
불 한가운데서 기도하는 대목(다니 3,24-45)나 세 동료인 젊은이의 노래(52-90)에서 인간적인
모습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하느님 또는 성령의 표현은 없습니다.
또 유대교에서 금지하고 돼지고기를 거부하여 순교하는 엘아자르(2마카 6,18-31)나 한 어머니와
일곱 아들의 순교(2마카 7,1-42)의 이야기에서도 인간적인 율법정신이 강조되고 하느님과의 교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의 표현은 없습니다.
그런데 스테파노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고백합니다.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 있고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사도 7,56)
스테파노는 사람들이 던지는 돌에 맞아 죽으며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예수님처럼 기도하는 것입니다.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59절)
그리스도 신앙인도 사람들 앞에서 신앙 때문에 모욕을 당하거나 죽음의 위협을 받게 되면
인간적으로는 두려움이 앞서는 것은 당연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런 순간이 다가오면 인간적
으로는 회피하고 싶은 심정도 될 것입니다.
육이오 전쟁이 발발하자 북에서 온 군대의 지휘관은 동네에 들어서서 천주교 사제는
만나는 대로 재판도 없이 사살했습니다.
삼척의 성내리 본당에도 그런 아픔의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그곳 본당신부도 바로 사제관 앞에서 최후를 맞으셨던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들을 때에
그 사제의 최후의 고통이 순교의 자랑스러운 마음보다는
당장 그 사제의 죽음이 두려움으로 다가오는 것은 무엇일까요?
신앙인에게 있어서 한편으로는 약하지만 또 한편으로 보면 신앙의 강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이런 말씀을 해 주십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마태 10,19-20)
교회의 첫 순교자인 스테파노 축일을 지내며 우리의 신앙을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세상에 묻혀 살다보면 좁고 험한 길보다 넓고 편한 세상에 길들여 지기 쉽습니다.
그러다 보니 적당히 사는 것이 마치 세상을 사는 지침인 것으로 착각하고 살 수도 있습니다.
순교의 정신을 헤아리며 흐트러진 나의 모습을 세워야 하겠습니다.
머뭇거림 없이 수고의 어려움도 받아들이는 삶의 방향으로 나가야 하겠지요.
그러나 이모든 것의 원동력은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새겨야 하겠습니다.
아울러 오늘 하루 성탄의 기쁨을 나누며 첫 순교자의 축일을 함께 지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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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6.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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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6.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사랑
교회 전례는 성탄 축제의 기쁨으로 일렁이고 있는 우리를 마치 시기라도 하는 듯,
스테파노의 죽음의 현장으로 데려갑니다.
"그들은 스테파노의 말을 듣고 마음에 화가 치밀어 그에게 이를 갈았다"(사도 7,54).
초대 교회 때 일곱 봉사자 중 하나로 뽑힌 스테파노는 "은총과 능력이 충만"(사도 6,8)하여 "큰 이적과 표징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그의 적대자는 그런 스테파노를 당해낼 수 없어 결국 그에게 돌을 던져 목숨을 빼앗지요.
"그러나 그의 말에서 드러나는 지혜와 성령을 대항할 수 없었다"(사도 6,10).
"그러나 스테파노는 성령이 충만하였다"(사도 7,55).
스테파노의 순교 장면에서 재차 '성령'이 언급되고 있지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이후, 주님의 승천부터 사도들의 활동이 기술된 사도행전에서는 성령의 현존과 활동이 본격적으로 드러납니다.
천 년 전 성자의 강생으로 구약, 성부의 시대에서 신약, 성자의 시대로 넘어옵니다. 그리고 성자의 승천 이후 성령, 교회의 시대로 이어졌지요.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께서 교회 안에서 활동하시며 하느님 백성을 이끌고 계십니다. 교회 전례는 성령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제 우리가 맞이한 성탄 바로 다음 날에 교회 역사 초입의 사건을 조명하며 우리의 힘을 북돋아 줍니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마태 10,20).
제자들이 겪게 될 고난의 길을 예고하시면서 예수님께서 성령의 도움을 약속하십니다.
태초에 어둠과 혼돈의 물 위를 감돌던 영, 판관들과 예언자들을 일깨우시던 영, 성자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시고 그분 공생활 중에 함께하시던 영,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숨을 불어넣으시며 "성령을 받아라"(요한 20,22) 하신 그 영이십니다. 또 오순절에 한자리에 모여 있던 제자들에게 "불꽃 모양의 혀들"(사도 2,3) 모양으로 내리신 그 성령이십니다.
바로 하느님의 영께서 이제는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 안에서 힘차게 활동하고 계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걱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두려움과 걱정, 편협하고 경직된 사고가 그분의 자유로운 활동에 장애가 될 수도 있으니까요.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 10,22).
신앙생활을 진지하게 해 온 이라면 주님을 따르는 삶이 세속적인 꽃길만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걸 모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믿고 따르는 예수님께서 먼저 선택하신 것이 십자가인데 우리가 달리 무얼 욕망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박해와 미움, 죽음이 닥쳐오더라도 견디라고 하십니다. 인내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인간적 힘으로는 단 일 분 일 초도 못 견딜 일이지만 성령의 힘으로 인내가 가능합니다. 그리고 그 인내의 끝은 구원입니다.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사도 7,59).
스테파노는 자신의 영을 주님께 넘기고, 그가 방금 유심히 바라보았던 성부와 성자의 현존 상태, 곧 천상으로 들어갑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산화한 첫 순교자로서 스테파노는 사랑하는 성 삼위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갑니다.
이 지상에서 순례 여정을 걷고 있는 우리에게 고통은 피할 수 없으면서도 피하고 싶은, 피하고 싶지만 피할 수 없는 연 질긴 동반자입니다. 그런데 성령과 함께라면 동행이 영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구원은 이처럼 성령께 모든 걸 맡기고, 삶이 쏟아내는 고통의 파편들을 성령과 함께 묵묵히 견디어 나가는 동안 이루어지는 기적이고 신비일 겁니다.
성탄 팔일 축제 중 둘째 날인 오늘, 우리는 구유 속 연약한 한 아기와 첫 순교자 스테파노를 함께 바라봅니다. 세상 고통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에 찬 응답이 이 아기라면, 이 아기에 대한 믿음과 사랑의 응답이 스테파노의 증거입니다.
어제 미사를 봉헌하며 저마다 준비한 구유 예물을 봉헌하셨겠지만, 어쩌면 우리가 구유 안의 예수님을 경배하며 드릴 예물은 무엇보다 이 믿음과 사랑이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첫순교자 성 스테파노가 우리를 위해 기도합니다.
성 스테파노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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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6.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
인생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을 인정하는 삶
<2024.12.26> 아침을 여는 묵상 (시 114:1~8절)
❝인생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을 인정하는 삶❞
❚ 우리 인생에 개입하셔서 구속하여 주신 하나님을 날마다 찬양하고 경외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 하나님은 어느 곳에 개입하십니까?
➲ 역사 가운데 개입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1~2절).
시인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백성으로 탄생된 역사를 회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특별한 부름을 받았던 ‘이스라엘’, 즉 애굽에 내려갔던 야곱의 가족들이었습니다. ‘언어가 다른 민족’은 단순히 타지에서 살았다는 뜻이 아니라, 언어가 다른 민족에게서 압박과 설움을 당했다는 점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유다는 하나님의 성전이 되었고, 이스라엘은 그의 영토가 되도록 하셨습니다(2절). 즉,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그분의 임재의 장소이자 백성을 만나시는 거룩한 장소로 삼으셨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왕이 되어 다스리시는 통치의 영역으로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400년동안 겪었던 끔찍한 노예 생활에서 해방시켜 가나안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가나안으로 가는 길인 광야에서도 하나님은 백성을 입히시고 먹이셨으며, 추위와 더위에서 그리고 수많은 외적 침입으로부터 이스라엘을 보호하셨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하셨고, 그 땅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성소를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나타나셨고, 이스라엘을 다스리셨습니다. 이는 곧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시는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셨다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나라와 민족의 역사뿐 아니라 개인의 역사에도 분명 개입하셔서 다양한 방식으로 당신의 살아계심을 나타내십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에 깊숙이 개입하셔서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해 가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손은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 가장 강력하고 절대적인 손임을 기억하여 우리 인생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을 인정하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 자연 가운데 개입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3~6절).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지셔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가시기까지의 역사를 두 가지 대표적인 사건을 노래합니다. 하나는 출애굽 이후 홍해를 건넌 사건(출 14장)이고, 다른 하나는 약속의 땅에 입성하기 위해 요단 강을 건넌 사건(수 3장)입니다. 주님의 역사하심과 임재는 강물과 바다조차 놀라서 뒤로 돌아가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임재하실 때, 바다와 강뿐 아니라 산들은 숫양들과 같이 뛰놀며 작은 산들은 어린 양들같이 뜀으로 반응했습니다(4절).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확실한 증인들인 홍해와 요단 강과 산들에게 왜 그렇게 반응했는지를 묻습니다(5~6절).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역사하시면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을 막을 수 없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놀라운 행사 앞에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자연 가운데 개입하시는 것을 보고 하나님의 피조물인 우주 만물과 산천초목이 기뻐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을 최선의 방법으로 다스리십니다. 모든 것을 굴복시키시고 복종하게 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를 생각한다면 하나님을 경외하고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 인간 가운데 개입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7~8절).
시인은 온 땅을 향하여 야곱의 하나님 앞에서 떨라고 명령합니다. ‘야곱의 하나님’은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으로서 자기 백성의 기도를 들으시고 언제나 그들의 피난처가 되십니다. ‘땅이 두려워 떤다’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경배의 적극적인 행위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온 세상과 백성이 여호와 앞에 떨어야 하는 이유는 “그분은 바위를 연못이 되게 하신 분이요, 단단한 바위를 샘이 되게 하신 분...‘(8절,쉬운성경)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시는 능력의 주로서 메마른 광야와 같은 백성들에게 생수를 부어 주시되 그들로 하여금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하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필요를 채우시는 분이십니다. 목말라 할 때에 물을 주셨고, 배고파할 때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 주셨습니다. 당신이 사랑하시는 우리의 쓸 것을 예비하시고 채워주시는 분이십니다. 때로는 물질로, 때로는 건강으로 우리 각각의 필요에 맞게 채워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 인생들의 모든 필요를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필요를 구할 때 하나님은 결코 외면하지 않으시고, 기쁨으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속하심을 기억하여 날마다 그분을 찬양하고 경외하며, 우리 인생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셔서 채우시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도 나라와 민족의 역사뿐 아니라 우리 개인의 역사에도 개입하셔서 역사하신 하나님만을 더욱 신뢰하며 살아갈 뿐 아니라 왕 같은 제사장답게 성령의 언어로 말하고, 하늘의 지혜로 생각하여 어디서든지 하나님의 역사를 드러내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시 114:1~8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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