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체 모집인가, 강제징용인가
서울시장 선거를 앞두고 돌연 일제하 '조선인 강제징용' 건이 불거졌습니다. 발단은 최근 '음주방송'으로 물의를 빚은 신지호 한나라당 의원 때문입니다. '박원순 저격수'로 불리는 신 의원은 11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박원순 후보의 작은 할아버지는 사할린으로 강제징용 간 것이 아니라 기업체에 모집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신 의원은 부산고등법원 판결문을 근거로 제시하며 일제의 조선인 인력동원은 1939~41년엔 기업체 모집, 42~43년엔 조선총독부 알선, '영서'(영장)에 의한 징용은 44~45년에 이뤄졌다고 밝혔습니다. 즉, 박 후보의 작은 할아버지의 경우 기업체 모집에 응한 것이지 강제징용은 아니라는 겁니다. 이는 박 후보 측이 병역 면탈을 위해 호적을 옮긴 것을 해명하기 위해 '작은 할아버지의 강제징용'을 거짓으로 꾸며냈다는 얘기인 셈입니다.
앞서 박원순 후보측은 박 후보가 작은 할아버지 양손 입적에 따른 '호적 쪼개기' 논란이 일자 "1941년 박 후보의 할아버지에 대한 징용 영서가 날아와 작은 할아버지가 장남인 할아버지를 대신해 사할린으로 강제징용을 갔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결국 논란의 핵심은 박 후보 작은 할아버지의 '1941년 사할린행'이 돈벌이를 위해 스스로 간, 즉 '자발적 징용'인지, 아니면 총독부 당국의 조선인 강제동원인지입니다. 따라서 엄밀히 말해 이 사안은 법원보다는 관련 자료와 당시 피해자들의 생생한 증언을 토대로 역사법정에서 판단하는 것이 오히려 적절해 보입니다.
|
▲ 징용대상자가 징용장을 받는 모습. 뒤편에 '국민징용'이라고 쓴 현판이 보인다. |
ⓒ 자료사진 |
| |
우선 일제가 조선인 징용, 즉 강제동원을 실시한 것은 언제부터이며, 또 어떤 배경(목적)에서였을까요? 국내 역사학계에 따르면, 조선인 징용이 시작된 시기는 1937년 중일전쟁 이후부터이며, 그 목적은 부족한 인적 자원 보충차원에서였습니다.
1937년 말 일제는 당시 중국의 수도 남경(南京)을 함락하면 조만간 전쟁이 끝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장개석 국민정부가 '백년항전'을 선언하고 전쟁을 장기전으로 끌고 가자 예상치 못한 상황에 직면하게 됐습니다.
이에 일제는 전쟁의 장기화에 따른 인력과 물자 동원을 위해 이듬해(1938년) 4월 1일 법률 제55호로 '국가총동원법'을 제정, 공포했습니다. 이는 일제말기 전시 동원체제를 총괄하는 기본 골격이자 각종 동원의 법적 근거가 되었습니다.
국가총동원법 제정(1938)을 기점으로 조선인 강제동원
그런데 국가총동원은 일본에만 국한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조선을 비롯해 대만·사할린 등 식민지 전역에도 적용되었는데, 조선에서는 한 달 뒤인 5월 4일자로 시행되었습니다. 이에 근거하여 일제는 '국민징용령'을 비롯해 '가격통제령' '조선징병령' '식량관리령' '농지관리령' 등을 잇따라 발포(發布)했습니다.
이로써 총독부는 사람이면 사람, 물자면 물자, 토지면 토지, 즉 그들이 필요하다고 인정될 경우 그 어떤 것이든 마음대로 조선에서 동원하고 또 징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당시 '국가총동원법'은 모든 법률에 우선하여 적용되었고 또 이를 어길 경우 형벌로 처벌할 수 있는 규정까지 두고 있어서 조선인들에겐 사상범 탄압용인 '치안유지법'과 함께 가장 두려운 법이었습니다.
이같은 연유로 국내 역사학계는 물론 관련 국가기관에서도 조선인 강제동원 시점을 국가총동원법이 제정된 때를 기점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일제하 강제동원 피해자 보상 등을 위해 지난 2007년에 제정된 '태평양전쟁 전후 국외 강제동원희생자 등 지원에 관한 법률' 제2조(정의) 1항은 '강제동원 희생자'를 '1938년 4월 1일부터 1945년 8월 15일 사이에 일제에 의하여 군인·군무원 또는 노무자 등으로 국외로 강제동원되어 그 기간 중 또는 국내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사망하거나 행방불명된 사람'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보도에 따르면, 문제의 발언을 한 신지호 의원은 이 법안의 발의자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하는데 그가 이런 사실조차 몰랐다는 건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다분히 정치공세의 성격이 짙어 보입니다.
|
▲ 징용 영장 한 징용대상자에게 1945년 1월 13일 오전 9시까지 대전부청 공회당에 출두하라고 명령하고 있다. |
ⓒ 독립기념관 소장 |
| |
지원자 적자 할당량 정해 강제 연행... 응하지 않으면 처벌
다음으로 조선인 강제동원의 실태는 구체적으로 어떠했을까요? 즉 강제 동원된 전체 인원은 대략 얼마나 되며, 또 그들은 강제노역 현장에서 어떤 대접을 받았을까요?
징용 대상자들에게도 군 입대자처럼 영서(令書), 즉 영장(令狀)이 발부되었습니다. 일본 본토의 경우 후생대신(厚生大臣)이, 조선(한국)에서는 일왕의 대리권자인 조선총독이 발급했습니다. 초창기 징용은 조선인의 반발을 우려해 지원 형식을 취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상보다 신청자가 적어 필요한 숫자를 채우지 못하게 되자 총독부는 할 수 없이 동네별로 할당량을 정해 목표를 채우도록 강요했습니다.
당시 징용 영장을 받은 자는 지정된 사업장에 가서 복무하도록 돼 있었는데, 이에 응하지 않을 경우 '국가총동원령'에 따라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해졌습니다. 이 과정에서 친일파나 지역유지 등 힘있는 자들은 대부분 빠졌고, 예나 지금이나 힘없는 서민들이 그 머릿수를 채우곤 했습니다.
한편 효율적인 노동력 동원을 위해 일제는 1939년 1월 7일자로 '국민직업능력신고령'을 공포했는데 조선에서는 6월 1일부터 시행되었습니다. 이어 그해 7월 일본 내무성과 후생성은 '조선인 노무자 내지(內地) 이주에 관한 건' 발표를 통해 조선인 노동자 강제연행의 근거를 마련하였는데, 총독부가 9월 1일에 각 도지사 앞으로 '조선인 노동자 모집 및 도항취체요강(要綱)'을 통보함으로써 공식 발효되었습니다.
이 계획에 따라 조선총독부는 단계별로 '모집'(1939.9~1942.1), '관(官)알선'(1942.2~ 1944.8), '강제징용'(1944.9~1945.8) 등으로 나누어 조선인 노무자 동원을 실시하였습니다. 시기적인 차이는 있지만 이 모두는 사실상 강제동원이었고, 또 노동력을 수탈했다는 점에서 흔히 '강제연행'으로 통칭되고 있습니다.
조선인 전체 인구의 20%가 강제징용으로 끌려가
1965년 한일협정 체결 당시 한국정부는 일제하 노동자·군인·군속 등으로 강제 동원된 한국인 피해자는 103만 2684명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대해 일본측은 배상 대상자인 사망자 숫자 2만 1919명(군인 6178명, 군속 1만 5741명)만 밝혔을 뿐 전체 강제동원 숫자와 명부는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그간 국내에서 알려져 온 바로는 "한반도에서 600여 만 명이 강제동원되었으며, 이들 가운데 70여만 명이 해외로 강제연행됐다"는 정도였습니다. 그러다가 지난 1990년 4월 당시 노태우 대통령의 방일을 계기로 일본정부는 강제연행자 명부 일부를 공개하였는데, 그 숫자는 7만1476명으로 실제 인원수와는 한참 거리가 멀었습니다.
결정적이고 구체적인 자료가 발굴된 것은 그 이듬해 1991년초의 일입니다. 동경제대 재학중 1944년 1월 학도병으로 끌려갔던 정기영씨(전 '1.20동지회' 부회장, 작고)는 학도병 출신자들의 모임인 1.20동지회 <회보> 제32호(1991.1.20)에서 1947년 일본 대장성 관리국에서 작성한 '일본인의 해외활동에 관한 역사적 자료'라는 문건을 입수해 공개했습니다.
이에 따르면 1934년부터 패전 직전까지 노무자 송출 등 조선인 징용자는 총 612만 6180명으로, 당시 조선인 전체 인구의 20%에 해당하는 숫자입니다. 이 가운데는 도내동원(1938~1945)이 536만여 명으로 가장 많았으며, '관(官)알선'(1934~1945) 42만2397명, 현원징용 26만145명, 국민징용 4만3679명, 군요원 3만3861명 등으로 나타났습니다. (여기에 징병, 학도병, 일본군위안부까지 합칠 경우 전체 강제동원 피해자 숫자는 거의 800만명에 육박)
이들 가운데 '도내동원', 즉 조선 내 동원자를 제외한 나머지는 일본 본토를 비롯해 사할린, 동남아, 심지어 남양군도까지 강제로 끌려갔습니다. 북해도로 징용된 박원순 후보의 작은 할아버지도 이들 가운데 한 명인 셈입니다. 일본으로 끌려간 징용자들의 경우 대개 탄광이나 군수공장 등에서 강제노역에 동원되었으며, 군속으로 차출된 경우 일본이 침략한 동남아 지역의 군사기지 건설이나 철도 공사에 동원되었습니다.
특히 군속의 경우 전후 재판에서 B·C급 전범(戰犯)으로 몰려 희생되기도 했습니다. 특히 사할린 징용 조선인들의 경우 냉전으로 인해 한동안 고국으로 돌아올 수도 없었으며, 이마저도 살아남은 자들의 경우이며 죽은 자들은 아직도 타국땅에서 고혼으로 떠돌고 있는 실정입니다.
|
▲ '어머니 보고 싶어' 조선인 탄광 징용노동자가 지하 갱 벽에 고향과 가족을 그리며 쓴 글씨 |
ⓒ 자료사진 |
| |
구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을 '성노예'라고 일컫는다면 징용 피해자들은 '노동노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극도로 비참한 작업환경에서 힘든 강제노역을 감내해야 했으며, 게다가 이들 대다수는 임금도 제대로 받지 못했습니다. 재일사학자 박경식(작고)씨가 1965년에 펴낸 <조선인 강제연행의 기록>은 일제하 조선인 강제징용에 대한 최초의 보고서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책에는 일본 북해도(北海道, 홋카이도)에 끌려가 탄광노동자로 강제노역을 당한 김영선씨의 생생한 증언이 실려 있습니다. 그 중 한 대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아침에는 4시에 일어나 5시 반에 갱에 들어갔다. 오후 7~8시가 되어야 겨우 숙소에 돌아왔다. 9시 정도가 되어 잠이 드는데 방에 들어가면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모두 외출하는 것을 막아 마치 형무소와 같았다. 아니 훨씬 혹독했다. 한 달에 세 번 쉬었지만 밖에 나갈 수 없었기 때문에 항상 방에서 빈둥거렸다. 하루에 5엔 준다고 해 놓고는 실제는 3엔도 주지 않았다. 3엔을 받아도 갱을 들고 날 때 신는 신발 빌리는 값 1엔15전, 짚신값 30전, 이부자리 값 35전, 식비 1엔20전 이밖에 담배값을 빼고 월말 정산하면 1~2엔을 받는 것이 고작이었다. 오히려 빚을 지는 일이 많았다. 그 때 신을 것이 없어서 갱을 들고 날 때 신는 신발 위에 짚신을 신었는데, 이것도 하루밖에 신지 못해 맨발로 일할 때가 많았다. 식사는 아침에는 소금국에 콩밥 한 공기 밖에 없었다. 점심 때 먹을 도시락을 아침에 먹어 점심을 굶었다. 간부들은 흰쌀밥에 된장국, 생선반찬으로 식사를 했지만…."
김씨의 경우 하루 14시간의 노동에 시달리면서도 휴식시간도 제대로 갖지 못했으며, 일과 후에도 '우리'에 갇힌 가축처럼 지내야만 했습니다. 당시 조선인 징용노동자들은 죄수의 유치장 노역에 버금갈 정도의 힘든 노동에다 최악의 주거환경과 불량한 식사 등 개·돼지만도 못한 취급을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때문에 강제징용에 대한 조선인들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소극적인 방법으로는 작업장에서의 탈주나 작업 거부는 물론 적극적으로는 파업이나 폭동 봉기로 맞서기도 했습니다. 또 더러는 작업장 내에서 항일조직을 결성하여 비밀리에 운동을 전개한 경우도 적지 않았습니다. 일본 내무성 조사에 의하면, 1939년~1942년 사이에 일본에 강제 동원된 조선인 가운데 25만7907명이 탈주를 시도했던 것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강제동원 피해자들, 한일 양국에서 '찬밥' 신세
마지막으로 해방 후 강제동원 피해자들에 대한 한국정부와 일본정부의 배상 및 지원활동은 어떠했을까요? 결론부터 앞세우면 이들은 한일 양국 모두에서 '찬밥' 신세였습니다. 핵심은 한일 양국 정부가 1965년에 체결한 '한일협정' 때문입니다. 당시 양국 정부는 대일청구권 문제를 '무상 3억 달러, 유상차관 2억 달러'로 일괄 타결했는데, 피해 당사자들과는 일언반구 상의도 없이 밀실에서 진행했습니다. 그러면 과연 이 돈은 강제연행 피해자들을 위해 제대로 사용되었을까요?
|
▲ 일본 국립공문서관에서 발견된 조선인 노동자 임금 미지불 공탁금 내역서 |
ⓒ 이국언 |
| |
한국정부는 1971년 '대일 민간청구권 신고에 관한 법률'을, 74년에는 '대일 민간인청구권 보상에 관한 법률'을 제정해 피해자 보상에 나섰습니다. 71년 5월 16일부터 이듬해 3월 사이에 대상자 신고를 받아 1977년 6월까지 보상금 지급을 실시했는데, 사망자의 경우 1인당 30만 원씩 지급되었습니다.
구체적인 보상금 지급내역을 보면, 재산보상금은 66억 2209만 원(7만4967건), 사망자(유족) 보상금은 25억6560만원(8552명)이었습니다. 당시 미화 1달러가 300원이었으니 사망자 보상금은 총 855만 달러로 이는 대일청구권 자금 중 '무상 3억 달러'의 0.0285%에 불과한 액수였습니다. 당시 희생자 유족들은 "차라리 다 떼어 먹으라"며 강하게 반발했지만 버스는 이미 떠난 뒤였습니다(대일청구권 자금의 일부는 포항제철(현 포스코) 건립자금으로 쓰였습니다).
이들의 억울한 사정은 지금도 여전한 실정입니다. 일본정부는 한일협정 체결 당시 대상에 빠졌던 '일본군 위안부'에 대해 최근까지도 대화조차 거부하고 있습니다. 매정하기는 한국정부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난 2009년 외교부는 일제 징용 피해자들이 미불임금 공탁금 환수를 추진하고 나서자 이마저 길을 막고 나섰습니다. 이유인즉 한일협정 때 받은 무상 3억 달러 가운데 다 포함됐다는 것인데 이는 일본정부의 주장과 똑같습니다.
현재 일본에 공탁 형태로 보관돼 있는 강제동원 노무자와 군인·군속의 미불임금은 액면가로 각각 2억1500만엔, 9100만엔 등 총 3억600만엔(한화로 3조∼4조 원 규모) 정도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하기 나름으로는 내일이라도 당장 찾아올 수 있는 돈인데도 한국 외교부는 '한일협정'을 신주단지처럼 받들며 피해자들의 요구를 외면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신지호 의원, 정중히 사과하세요
조선인 강제징용과 관련해 필자에게는 지금도 잊히지 않는 '사건'이 둘 있습니다. 하나는 언젠가 접한 가족 사진 한장에 관한 얘깁니다. 현 소장자는 독립기념관인데 원 소장자는 일본 큐우슈우 지역의 한 탄광에 강제징용됐다가 사망한 한 조선인 노동자의 품에서 나온 것이라고 합니다.
시골집 낡은 사진곽에서나 본듯한 이 흑백사진은 여러 군데가 구겨져 있는데 이는 소장자가 품에 넣어뒀던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사진에는 당시 20대 후반 내지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성이 세 아이들을 앞세우고 찍은 모습인데 아마 일가족 같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세 자녀를 고향에 둔 채 낯선 일본 탄광으로 끌려와 가혹한 노역을 견디다 못해 숨져갔을 무명의 조선인 노동자. 그를 떠올리면 가슴이 미어지는 듯합니다. 일제의 강제징용이 없었다면 그 역시 남들처럼 단란한 가정을 꾸리며 살았을 것입니다.
|
▲ 두고 온 아내와 세 아이들 일본 큐우슈우 후쿠오카현 치쿠호(筑豊) 탄광에 강제연행돼 혹사당한 끝에 사망한 한국인 노동자의 품에서 나온 가족사진 |
ⓒ 독립기념관 소장 |
| |
90년대 중반 필자는 일본 나가노현(長野縣) 마쓰시로(松代)에 있는 이른바 '마쓰시로 지하호(壕)'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이 지하호는 태평양전쟁 말기 일제가 대본영 및 황실 피난용으로 암산 지하에 만든 방공호인데 이 지하호 공사에 조선인 7000여 명이 강제동원 됐으며 이들 가운데 최대 650명 이상이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그런데 당시 필자가 현지 주민들에게 들은 바로는 조선인 2000명이 동원됐으며, 그 가운데 절반 정도가 작업중 사망했다는 것이었습니다. 한 마을 주민은 조선인 노무자 유골이 묻힌 언덕을 가리키며 "1미터 정도만 파면 유골이 나온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나라 잃은 백성으로 이국땅에 강제로 끌려온 것도 서러운데 죽어서도 유골조차 수습하지 못한 것을 생각하니 안타깝기 그지없었습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일제하 조선인 인력동원이 모집-관알선-강제징용 등의 형태를 취하긴 했지만 본질적으로는 '강제동원'이었다는 점은 이미 역사학계가 공인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설사 개인적으로 돈벌이 목적으로 도일했다고 쳐도 그 근본은 망국과 일제의 수탈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센징'이라는 이유 하나로 천대는 물론 말로 잘 통하지 않는 일본땅에서 당시 조선인 노동자들은 제 몸 하나도 건사하기 어려운 지경이었습니다. 응당한 보수는커녕 강제노역 중 목숨을 잃은 자만도 수 천명이 넘는 일제 식민통치기는 우리 민족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시절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눈물을 닦아주지는 못할망정 이를 정치공세의 도마에 올리는 일은 후세로서도 인간적으로도 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문제의 발언으로 물의를 빚은 신지호 의원과 나경원 후보측은 강제징용 희생자와 그들의 유족 앞에 마땅히 정중한 사과를 해야 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