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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회 앞에 선 바울
행 22:30-23:11
30 이튿날 천부장은 유대인들이 무슨 일로 그를 고발하는지 진상을 알고자 하여 그 결박을 풀고 명하여 제사장들과 온 공회를 모으고 바울을 데리고 내려가서 그들 앞에 세우니라
1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하거늘
2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 곁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그 입을 치라 명하니
3 바울이 이르되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심판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 하니
4 곁에 선 사람들이 말하되 하나님의 대제사장을 네가 욕하느냐
5 바울이 이르되 형제들아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 줄 알지 못하였노라 기록하였으되 너의 백성의 관리를 비방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더라
6 바울이 그 중 일부는 사두개인이요 다른 일부는 바리새인인 줄 알고 공회에서 외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심문을 받노라
7 그 말을 한즉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에 다툼이 생겨 무리가 나누어지니
8 이는 사두개인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 하고 바리새인은 다 있다 함이라
9 크게 떠들새 바리새인 편에서 몇 서기관이 일어나 다투어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니 악한 것이 없도다 혹 영이나 혹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으면 어찌 하겠느냐 하여
10 큰 분쟁이 생기니 천부장은 바울이 그들에게 찢겨질까 하여 군인을 명하여 내려가 무리 가운데서 빼앗아 가지고 영내로 들어가라 하니라
11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행 22:30-23:11 / [의회 앞에 선 바울] 이튿날 파견대장은 바울을 묶었던 사슬을 풀고 대제사장들에게 유대인 의회를 소집하도록 명령하였다. 바울을 거기에 데리고 나가서 그 소동의 원인을 알아보려는 심산이었다. 1) 바울은 의회원들의 얼굴을 주시하면서 말을 시작하였다. `형제 여러분, 나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오로지 바른 양심을 가지고 살아왔습니다.' 2) 이 말을 들은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곁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바울의 입을 치라고 명령하였다. 3) 바울이 그에게 소리쳤다. `이 겉만 번지르르한 위선자여! 회칠한 돼지우리와 같구나! 하나님께서 당신을 치실 것이오. 나를 치라고 명령하면서 당신 스스로 이렇게 율법을 어기고 있으니 이것이 무슨 놈의 재판이오?' 4 바울 곁에 서 있던 사람들이 바울에게 `대제사장에게 그런 언사가 어디 있소?' 하고 나무라자 5) 바울이 말하였다. `형제들이여,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 줄은 몰랐습니다. ㄱ) `네 백성의 지도자들을 욕하지 말라'고 성경에 씌어 있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ㄱ. 출22:28) 6) 그러고 나서 바울은 의회 안에 사두개파와 바리새파 두 파가 있는 것을 알고 이렇게 외쳤다. `형제 여러분, 나는 조상 대대로 바리새파 사람입니다. 내가 오늘 여기서 재판을 받는 것은 단지 여러분과 마찬가지로 죽은 자의 부활을 믿기 때문입니다.' 7) 이 말을 듣자 의회는 둘로 갈라져 바리새파와 사두개파 사람 간에 분쟁이 일어났다. 8) 사두개파는 부활도 천사도 믿지 않고 영도 없다고 주장하는 반면에 바리새파 사람들은 그런 것이 다 있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9) 의회가 크게 소란해졌다. 그때 바리새파의 율법학자들은 나서서 바울이 다 옳다고 주장을 하였다. 그들은 큰소리로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는 이 사람에게서 아무런 잘못을 찾을 수 없습니다. 아마도 다메섹에 가는 도중에 어떤 영이나 천사가 그에게 일러준 모양입니다.' 10) 소란은 점점 더 커지고 양편 사람들은 서로 달려들어 바울을 잡아당기며 빼앗아 가려고 하였다. 결국 파견대장은 바울이 그들에게 찢겨 죽을까 염려하여 군인들에게 그를 빼내어 병영으로 데리고 가라고 명령하였다. 11) 그날 밤 주님이 바울 곁에 서서 말씀하셨다. `바울아, 염려하지 말라, 네가 여기 이 예루살렘에서 나에 대하여 증언한 것처럼 로마에서도 증언해야 한다.'
바울이 산헤드린 공회에서 예수님을 전하지만 전도의 열매는 맺지 못합니다.
바울과 대제사장의 충돌(22:30-23:5) 천부장 루시아는 유대의 사법기관에 해당하는 산헤드린 공회를 소집하여 바울을 공회 앞에 세웁니다. 바울은 공회 앞에 서는 것을 기회로 여기고 복음을 전하고자 합니다. 바울이 입을 떼자 대제사장 아나니아는 바울의 ‘입을 치라’라고 지시합니다. 이에 바울은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라고 대응합니다. 율법에 의하면, 재판을 받기 전에 처벌하는 것은 불법이었습니다(신 25:1-2). 이에 바울의 대응은 정당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나니아가 대제사장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백성의 관리를 비방하지 말라’라는 율법(출 22:28)에 근거하여 자신의 다소 감정적이었던 대응을 거둬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라는 바울의 말은 예언이 되어 아나니아는 유대인의 난이 일어났을 때 친로마파로 낙인 찍혀 백성들에게 죽임을 당합니다.
바울의 영리함(6-9) 바울은 영리한 방법으로 공회를 분열시킵니다. 공회가 사두개파와 바리새파로 나뉜 것을 인지한 바울은 두 파의 오랜 논쟁거리를 쟁점화합니다. 그것은 바로 부활과 내세에 대한 것입니다. 바울은 바리새인이라는 사실을 먼저 밝힌 후 자신이 심문을 받는 이유가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에 공회 내부에서 부활과 내세를 믿는 바리새파와 믿지 않는 사두개파가 서로 갈라져 다툼으로써 큰 소란이 일어납니다. 급기야 바리새파의 서기관들이 일어나 “혹 천사가 그(바울)에게 말하였으면 어찌 하겠느냐”며 바울을 옹호합니다.
담대하라(10-11) 두 파의 큰 분쟁으로 바울의 안전을 염려한 천부장은 바울을 영내로 피신시킵니다. 바울의 몸은 안전하였지만 그의 마음은 심한 좌절감에 빠졌습니다. 주님은 그날 밤 패배의식에 빠진 바울을 찾아와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처럼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방문은 시기적절하였습니다. 다음날 40명의 결사대가 바울의 목숨을 노리지만 바울은 주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확신 속에서 담대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바울에게 새로운 사명을 주시며 낙심한 바울을 세우셨습니다. 주님은 어려움에 처한 자신의 종을 반드시 기억하시고 함께 하십니다.
적용: 주님은 바울에게 왜 전도의 열매를 맺지 못하느냐고 책망하지 않고 오히려 새로운 사명으로 이끌어주십니다. 우리의 사명은 전도하는 것이며, 결과는 주님께 달려있습니다. 당신은 자신의 사명을 잘 감당하고 있습니까?
인간이 들을 수 있는 가청 주파수의 대역은 80-2만khz라고 합니다. 그 이상이나 그 이하의 소리는 아무리 존재해도 우리는 듣지 못합니다. 우리 인간이 감지할 수 있는 영역은 육체의 오감과 육감의 한계에 제한을 받는데, 특히 영적인 세계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할 뿐 아니라 감각이 있어도 감지하지 못하는 극 초월대의 영역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경악의 수준마저도 초월하십니다. 그 위대하신 영광은 친히 옷소매를 들어, 가려 주시지 않는다면 우린 어쩌면 녹아버리고 해체되어 버릴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범접할 수 없고, 인식할 수조차 없는 그 심대한 차원에 계시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접촉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찬양과 경배입니다.
< 설 교 >
공회 앞에서의 바울의 설교
공회 앞에 세워진 바울
이제 바울은 천부장이 지휘하는 로마군의 영내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다음 날 천부장은 사건의 진상을 알기 위해 유대인 공회를 소집했습니다. “이튿날 천부장은 유대인들이 무슨 일로 그를 고발하는지 진상을 알고자 하여 그 결박을 풀고 명하여 제사장들과 온 공회를 모으고 바울을 데리고 내려가서 그들 앞에 세우니라.”(행22:30) 공회에 대해서는 4장에서 이미 설명드렸습니다. 공회는 명실상부한 유대인 사회의 최고 기구입니다. 산헤드린이란 명칭이 붙여져 있었고, 각 지파별로 선출된 총 72인의 지도급 인사들로 구성되었습니다. 종교, 윤리, 사회적 문제를 다루었고, 사형 판결을 제외한 상당한 사법권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의장은 대제사장이 맡았습니다. 천부장이 공회를 소집하도록 한 것은 바울에 대한 군중들의 소란을 유대 사회의 내부적인 문제로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바울은 공회 앞에 서서 심문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공회 앞에서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거나 자기 변론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방청인들 앞에서 다시 한 번 자신의 신앙을 알리고, 복음을 전하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의 설교는 두 가지 고백, 즉 두 가지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첫째는 양심껏 하나님을 섬겼다는 고백입니다. 둘째는 부활 소망 때문에 심문 받는다는 고백입니다. 오늘은 이 두 가지 고백을 중심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다
첫 번째 고백입니다.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다!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날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하거늘,”(23:1) 바울은 양심 발언을 자주 했습니다.(행24:16, 고전4:4, 고후1:12, 딤전1:5, 딤후1:3 등 21회 사용) 나는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다는 말은 주관적 기준으로 하나님을 섬겼다는 말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하나님 말씀, 율법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다만, 그 율법을 판단하고 적용하는 일은 바울이 양심껏 했다는 말입니다.
바울이 양심껏 섬겼다고 하니까 아나니아가 버럭 소리쳤습니다.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 곁에 서있는 사람들에게 그 입을 치라 명하니,”(2) 여기 나오는 아나니아는 사도행전 9장에 나오는 그리스도인 아나니아가 아닙니다. 바울 당시 대제사장 아나니아입니다. 아나니아란 유대인 중에 흔한 이름으로, 히브리식으로 하나냐(여호와께서 은총을 베푸셨다)입니다. 대제사장 아나니아는 NEBEDAEUS의 아들로, 헤롯 안티파스 2세에 의해 주후 48년에 대제사장이 되어 주후 59년까지 대제사장 지위에 있었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보면 대제사장 아나니아는 성격이 난폭하여 사람을 잘 치고, 재물을 탈취하였다고 합니다. 아나니아가 바울의 입을 치라고 하니까 바울도 정면으로 맞받아쳤습니다. “바울이 이르되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심판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 하니,”(3) 회칠한 담이란 말은 유대인 무덤을 빗대서 한 말입니다. 유대인들의 무덤을 보면 바위를 파서 무덤을 만들고 시신을 넣은 후에는 봉하고 회칠을 하여 치장합니다. 겉은 깨끗하지만 안에는 썩은 시체가 있습니다. 아나니아는 율법을 잘 지키는 것처럼 위선을 떨고 있지만, 당장 법정에서 율법을 어기고 있습니다. 율법 어디에도 죄목 없이 사람을 붙잡아 가두고, 법정에 세우라는 말이 없습니다. 더구나 죄를 정하지 않은 미결수의 입을 발언하는 도중에 때리라는 말씀이 없습니다. “너희는 재판할 때에 불의를 행치 말며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며 세력있는 자라고 두호하지 말고 공의로 사람을 재판할지며, 너는 네 백성 중으로 돌아다니며 사람을 논단하지 말며 네 이웃을 대적하여 죽을 지경에 이르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레19:15-16) 바울의 말대로 하나님이 아나니아를 치셨습니다. 아나니아는 주후 66년 친 로마 정책에 반감을 품은 셀롯당원들에 의해 암살당했습니다. 바울의 말대로 회칠한 무덤 같은 공중 하수도에 숨어 있다가 발각되어 끌려나와 죽임을 당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정말 하나님이 무서운 분인 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이 아나니아를 회칠한 담이라고 책망하니까 대제사장 곁에 서 있던 사람들이 비난합니다. “곁에 선 사람들이 말하되 하나님의 대제사장을 네가 욕하느냐? 바울이 이르되 형제들아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 줄 알지 못하였노라 기록하였으되 너의 백성의 관리를 비방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더라.”(4-5) 바울은 즉시 사과했습니다. 아, 그런가!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 줄 몰랐다! 유대인 바울이 아나니아를 정말 몰랐을까? 학자들의 해석도 두 가지입니다. 아나니아를 이름으로는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그와 대면한 일이 없기 때문에 얼굴은 잘 알지 못했다는 견해도 있고, 반면에 유대인 바울이 아나니아를 모를 리가 없지만, 짐짓 모른 척 하고 책망했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어쨌든 바울은 아나니아를 비난한 일에 대해서 사과했습니다. 개인적 사과가 아닙니다. 대제사장이란 공적 직분에 예의를 갖추지 못한 것에 대한 사과입니다. 대제사장을 욕한 것은 예의에 어긋나기도 했지만, 율법에도 어긋났습니다. “너는 재판장을 모독하지 말며 백성의 지도자를 저주하지 말지니라”(출22:28) 제사장에 대한 바울의 사과는 바울이 율법을 지키고, 양심껏 하나님을 섬겼다는 말을 실제로 증명해 준 행동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다시 요약해 봅시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되 양심껏 섬겨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양심이 절대 판단의 기준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양심은 온전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인정하기 이전의 양심은 제대로 된 양심이 아닙니다. 인본주의와 이기심으로 가득 찬 반쪽 누더기 양심입니다. 죄에 대해서 제대로 반응하지 못합니다. 분별력이 떨어집니다. 거듭난 양심도 마찬가집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 해도 아직도 100% 온전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양심”이란 말은 헬라어로 “suneivdhsi"”인데 “함께” “知覺한다”, 즉 공통의 인식이란 뜻입니다. 영어 단어의 conscience란 단어도 같은 맥락으로 만들어진 단어입니다. 양심 자체는 각자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양심의 판단은 결코 주관적인 것은 아닙니다. 부족한 사람들이지만 공통으로 인식하는 판단의 범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양심껏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내 양심이 기준이라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을 표준으로 해서 공통의 인식 아래 각 사람이 적용해 나갈 뿐입니다.
내가 양심껏 하나님을 섬긴다면 다른 사람도 양심껏 섬기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됩니다. 아나니아가 왜 화를 냈습니까? 자기 양심은 양심이고 바울의 양심은 양심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누구나 부족한 사람들일 뿐입니다. 남의 양심에 개입할 만큼 훌륭한 인물들이 아닙니다. 남이 양심껏 한 일을 가지고 함부로 비판하지 마세요. 성령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인도해 가십니다. 그런데 어떤 특정한 사람만 은혜를 주시고 인도하시나요? 하나님의 자녀라면 예외 없이 다 은혜를 주십니다. 여러분, 양심은 내 양심만 양심이 아닙니다. 내가 받은 감동만 성령의 감동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에게 성령의 감동이 있습니다. 성령께서 특정 성도의 양심만 감싸주시지 않습니다. 모든 성도의 마음에 작용하십니다. 다른 사람의 양심도 양심입니다. 존중해 주세요.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기세요. 하나님의 법을 존중하고, 하나님 법대로 섬기세요. 판단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다른 사람의 양심에 감히 개입하지 마세요. 내 양심을 지켜가세요. 나중에 하나님 앞에 설 때에 모든 삶에 대해서 각자 하나님과 계산하시면 됩니다.
부활 소망 때문에 심문 받는다
두 번째 주제는 부활입니다. 바울은 부활 소망 때문에 심문을 당하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바울이 그 중 일부는 사두개인이요 다른 일부는 바리새인인 줄 알고 공회에서 외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심문을 받노라. 그 말을 한즉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에 다툼이 생겨 무리가 나누어지니, 이는 사두개인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 하고 바리새인은 다 있다 함이라.”(6-8)
부활 소망 때문에 법정에 섰습니다. 굳이 서지 않아도 될 법정입니다. 여러분, 법정에 서보신 일이 있습니까? 저는 교회 교육관 보증금 떼어먹은 사기꾼 때문에 법정에 가 본 적이 있습니다. 평생 살면서 별로 도움이 안 되는 곳입니다. 가지 마세요. 바울은 죄수가 아닙니다. 붙잡혀 재판받을 죄를 지은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 살벌한 법정에 섰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렇게 해서 복음을 전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미 세 차례나 전도 여행을 했습니다. 오늘날로 말한다면 수십 개 국가, 수백 개의 도시를 돌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제 은퇴한다 해도 뭐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세상에서의 안락한 삶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결혼도 하지 않고 독신으로 산 것도 이 세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음 세상을 위해서였습니다. 바울은 남은 생애를 죄수의 신분으로 보냈습니다. 바울은 자유인으로 있을 때보다 죄수로 있을 때에 더 많은 사역을 이루었습니다. 특히 높은 사람들 앞에서 재판 받으면서 설교를 많이 했습니다. 바울은 가이사랴에서 2년, 로마에서 남은 기간을 죄수 신분으로 보냈습니다. 물론 중간에 풀려나기도 했지만 마지막에는 다시 붙잡혀 순교당했습니다. 바울은 가이사랴의 감옥에 2년 동안 있었습니다. 그 기간 동안 천부장의 법정, 유대인 공회, 헤롯 아그립바, 베스도 총독, 벨릭스 총독 앞에 서서 심문을 받았습니다. 그때마다 변론대신 설교를 했습니다. 바울을 심문한 사람마다 결론은 한 가지였습니다. 바울은 죄인이 아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바울을 풀어주지 않았습니다. 바울도 굳이 풀려나려고 애쓰지 않았습니다. 로마 시민권을 사용하여 얼마든지 풀려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죄수 신분으로 로마까지 갔습니다. 황제 앞에 서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세상 법정은 위험한 곳입니다. 그릇된 판결로 죽임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결국 바울은 네로 황제에 의해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죽음에 도전했습니다. 부활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빌 3:10-11) 바울은 삶의 매 순간 죽음 앞에 서서 부활을 생각했습니다. 여러분,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히려 부활 소망을 든든히 갖고 사시기 바랍니다.
바울의 발언은 공회를 두 쪽 내고 말았습니다. 공회원의 절반은 사두개인이고 절반은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은 같은 유대인이지만 서로 다른 신앙을 갖고 있었습니다. 사두개인은 주로 제사장 계층에 속한 사람들로 성전을 중심으로 활동했습니다. 이들은 신약성경 시대 당시 헤롯 왕가나 로마 권력과 적당히 타협하면서, 정치적인 특권도 누리고 성전의 지배권을 누렸습니다. 이들은 바리새인들처럼 대중적 인기가 없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전승과 율법을 거부하였고, 구약은 윤리적인 부분만 채택하였습니다. 천사, 영적 존재, 영혼 불멸, 육체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부활 전하는 것을 아주 싫어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성전 중심으로 세워진 이스라엘 국가가 곧 천국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사두개인과 달랐습니다. 그들은 부활이나 천사나 내세나 영적 세계를 다 믿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부활을 얘기한 바울에게 우호적인 반응을 나타냈습니다. “크게 떠들새 바리새인 편에서 몇 서기관이 일어나 다투어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니 악한 것이 없도다 혹 영이나 혹 천사가 저더러 말하였으면 어찌 하겠느냐 하여,”(9) 부활 문제 때문에 사두개인과 바리새인 사이에 큰 논쟁이 일어났습니다. 잘못하면 바울을 서로 잡아당겨 찢어지게 생겼습니다. 공회는 제대로 진행되지 못하고 난장판이 됐습니다. 천부장은 군인들을 명하여 바울을 영내로 데리고 가도록 했습니다. “큰 분쟁이 생기니 천부장이 바울이 그들에게 찢겨질까 하여 군인을 명하여 내려가 무리 가운데서 빼앗아 가지고 영내로 들어가라 하니라.”(9-10)
지금도 세상 사람들의 생각은 두 가지입니다. 부활을 믿는 그리스도인들과 부활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로 양분됩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지금 내가 사는 곳이 천국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영혼도 믿지 않고, 세상 종말도 믿지 않고, 천국도 믿지 않습니다. 부활 전하는 사람을 싫어합니다. 세상에서나 잘 먹고 잘 살자고 합니다. 현세에 매인 사람으로 살게 만듭니다. 우리는 결단해야 합니다. 바울처럼 부활 소망을 살 것인지, 아니면 세상 웰빙을 위해 살 것인지?
두 가지 결론입니다
1. 양심껏 하나님을 섬기세요.
하나님 법을 따라 하나님을 섬기세요. 그러나 내 양심이 절대적인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인간의 양심을 불완전합니다. 양심껏 살되 겸손해야 합니다. 대제사장 아나니아처럼 남의 양심에 간섭하지는 마세요. 내가 양심껏 섬기듯이 남들도 다 나름대로 양심껏 섬기고 있습니다. 교회의 머리 되신 예수님이 해야 될 일까지 대신 하지 마세요. 교회를 세우시고 움직여 가시는 원동력이 되시는 성령님이 하시는 일까지 대신 하지도 마세요. 성령님은 지금도 각 사람의 양심에 작용하고 계십니다. 내 양심을 움직이고 계시듯이 남들의 양심도 움직이고 계십니다. 모든 섬김, 모든 잘잘못에 대한 계산은 나중에 주님 앞에 서서 하시면 됩니다. 미리 앞당겨 계산하려고 하지 마세요. 그저 묵묵히 내 할 일만 하세요. 그러면 주님이 알아주실 겁니다.
2. 부활 소망으로 사십시오.
저는 저녁에 침상에 누우면서 내일 다시 일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잡니다. 하나님이 일어나게 해 주시면 계속 사는 것이고, 일어나지 못하게 하시면 그냥 부활 대기자로 가는 겁니다. 매일매일 죽음 앞에 서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다시 살아날 부활을 바라보세요. 아마 세상 보는 눈이 달라질 겁니다. 너무 세상 일 혼자 다 할 것처럼 나서지 마세요. 교회 일도 마찬가집니다. 교회를 세우신 분은 주님이십니다. 교회를 인도하시는 원동력은 성령이십니다. 사람은 그저 성령님께 사로잡혀 맡은 부분을 감당할 뿐입니다. 하나님이 하실 일을 대신 하려고 끼어들지 마세요. 너무 거창하잖아요? 그냥 겸손히 내 앞에 놓인 일을 하면서 다가 올 부활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라
이성우 목사
우리 손에 들려져 있는 성경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무수히 많은 책들 가운데서 유일하게 하나님의 존재하심과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해서 아주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는 책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펼쳐서 읽기 시작하면 우리는 누구라도 금방 일하시는 하나님을 그 성경 속에서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아주 많은 분량에 아주 많은 내용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사실 성경은 한 마디로 말하면 일하시는 하나님을 증거 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기록된 책임에 틀림이 없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기본적인 대전제로 삼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은 구약성경 창세기부터 시작하자마자 다양한 방법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을 소개함으로써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제각기 자기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일을 하고 있는 것을 통해서 자기의 존재를 드러내며, 그 의미를 부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의 차이가 있다면 아마도 그것은 일을 할 수 있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를 통해서 분명하게 구분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죽은 자이지만 살아 있는 자와 다른 방식으로 계속해서 일을 하는 사람의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후대 사람들에게 귀한 유산을 물려주거나 생전에 이룬 귀한 업적을 통해서 그 열매가 지속적으로 맺히게 되는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느끼고 알 수 있기 위해서는 반드시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일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기 위해서는 반드시 믿음의 눈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눈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매 순간 모든 일을 통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생각해 볼 때 일찍이 일하시는 하나님을 몸소 체험하며 살았던 믿음의 사람인 다윗 왕은 그가 인생 말년에 기록한 시편 23편의 말씀을 통해서 이런 고백을 남겨 놓았습니다. “(1)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 도다. (3)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도다. (4)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5)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6)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다윗 왕은 이 신앙고백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하시는 모습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더욱이 다윗 왕은 자기 자신이 아버지의 양 떼를 돌봤던 목동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그 경험을 토대로 해서 하나님의 일하시는 모습을 마치 목자가 양을 위해서 하는 다양한 일에 비유해서 묘사함으로써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일하심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이해하고 깨달을 수 있도록 안내하고 있는 것입니다.
목자가 양을 위해서 하는 일들 중에는 우선 양을 인도하는 일입니다. 목자는 양들이 위험한 길로 가지 않도록 안전한 길로 인도할 뿐만 아니라 양들이 맛있는 풀을 먹을 수 있도록 풀밭으로 인도하며, 또한 목이 마를 때는 물을 마실 수 있도록 물가로 인도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결국 이 인도하는 일은 양의 생명과 직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목자가 양을 위해서 하는 일들 중에서 두 번째는 양의 생명을 보호하는 일입니다. 더욱이 양은 다른 짐승들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자기 자신을 지켜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한 순한 짐승일 뿐만 아니라 3미터 이상 앞을 멀리 보지 못하는 짐승이기 때문에 사나운 맹수들의 공격을 미리 알아차릴 수 없어서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있기 때문에 양에게 있어서 목자의 보호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따라서 목자의 존재와 목자의 보호의 역할은 양에게 있어서는 역시 생명과 직결되는 아주 중요한 요소인 것입니다.
목자가 양을 위해서 하는 일들 중에서 세 번째는 양의 필요를 공급하고 채워주는 역할입니다. 양의 우리를 만들어서 밤중에는 안전하게 쉴 수 있는 안식처를 공급해야 하며, 풀이 나지 않을 때를 대비해서 건초를 준비하는 일도 필요할 것이며, 나머지 모든 필요를 제때에 채워줌으로써 양들이 편안하고 안전하게 살아가며 굶주림에 시달리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목자가 양을 위해서 하는 일들 중에서 네 번째는 양이 병이 들었거나 상처를 입었을 때 치료해 주는 역할입니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모든 생명체는 살다보면 병도 들고 상처를 입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제때에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면 행복지수가 낮아져서 삶의 질이 떨어질 뿐만 아니라 지나치게 되면 생명의 위협을 받을 수도 있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양에게 있어서 목자의 존재와 역할을 통해서 치료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생명과 직결되는 문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양에게 있어서 목자의 존재와 그 역할은 한 마디로 말해서 생명 그 자체이기 때문에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 왕은 인생 말년에 자기 인생 여정을 회고해 보면서 하나님이 자기 인생의 목자가 되셔서 인도하시며, 보호하시고, 공급하시며, 치료해 주심으로써 자신의 삶이 부족함이 없는 삶이 될 수 있었음을 고백하면서 이런 하나님의 품 안에서 영원토록 살기를 원하는 바램을 고백하는 신앙 고백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일하시는 하나님을 증거하며 그 하나님의 품에 거하도록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 23편 3절에 기록된 다윗 왕의 고백에 따르면, 하나님은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분’이라는 것이며, 우리를 위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의 결국은 우리를 부족함이 없는 존재로 만들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이 말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우리가 일하시는 하나님의 품 안에 살아가게 되면 우리는 진정한 행복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성경 전체를 믿음의 눈을 통해서 가만히 읽으면서 묵상해 보게 되면, 누구라도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그렇게 일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성경에는 복잡한 내용들도 많이 있지만 한 마디로 말해서 성경의 모든 내용들은 결국 하나님께서 자신의 양 무리를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며, 그들의 필요를 공급하시며, 치료하심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고 행복한 존재로 살아가되 그런 삶을 영원토록 살아갈 수 있도록 일하시는 하나님을 증거하고 있으며, 그 목적은 바로 그렇게 됨으로써 하나님 자신이 영광을 얻으시고 기쁨을 누릴 수 있기를 원하시기 때문임을 증거하고 있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제까지 말씀드린 내용을 토대로 해서 생각해 볼 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의 결국은 생명을 살리고 지키심으로써 생명을 생명 되게 하시는 일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구약 성경 창세기의 말씀을 보면,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분으로써 이 세상의 모든 생명을 창조하신 분이시며, 그 생명을 생명의 길로 이끄시며 지키심으로 영생에 이르도록 하시는 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우리의 생명과 죽음, 그리고 화와 복을 모두 주관하시는 분이시지만 특별히 생명을 주시고 살리시는 일을 하시는 분이심을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2장 7절 말씀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 육체의 생명의 원천이심과 그 육체의 생명을 주시는 분이심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에스겔 37장 1-14절까지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을 떠나 우상 숭배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바벨론의 포로가 된 모습을 죽어서 마른 뼈가 된 모습으로 비유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5절 말씀은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에게 그 마른 뼈들을 향해서 이렇게 외치도록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또한 9절 말씀을 보면,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 하셨다 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 두 구절의 말씀을 종합해서 생각해 볼 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의 결국은 이렇게 영적인 생명을 살리시는 일인 것을 알 수 있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단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우리의 영적인 생명과 육적인 생명을 죽음으로 이끌어 가는 자라고 한다면 하나님은 이와 반대로 그 생명을 지켜 가실 뿐만 아니라 영생으로 인도해 가시는 분이신 것을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위해서 끊임없이 일하시는 분이신데, 하나님은 생명을 살리고 지키는 일을 위해서 필요한 경우에는 사사나 왕을 세우셔서 일하시기도 하시고, 또한 예언자나 제사장을 세우셔서 일하시기도 하시며,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통해서 그 역사를 감당하게 하신 것을 성경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시는 하나님께서 결국에는 하나님 자신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직접 찾아오셔서 모든 생명을 살리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그 몸을 내어 주셨는데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성경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생명을 살리시는 일을 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그치지 않으시고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이후에 성령을 보내 주셔서 이 생명 살리는 일을 계속 이어나가셨는데, 그 사실을 증거하고 있는 성경이 바로 사도행전 이후의 내용들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생명을 살리는 일을 몸소 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 일을 이어나가기 위해서 12제자들을 부르셔서 그들을 특별히 훈련시키셨으며, 그들에게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통해서 약속하신 성령을 부어주심으로써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서 생명 살리는 일을 이어나가도록 역사하신 놀라운 사실을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이 포함되어 있는 사도행전의 말씀을 통해서 특별히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인 사도행전 23장 1-11절까지의 말씀은 사도 바울이 하나님에 의해서 생명 살리는 일에 부르심을 받고는 성령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을 따라서 3차에 걸친 전도 여행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구원하는 일을 감당하고 여러 곳에 교회를 세우고 나서 당시 세계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로마에 가서 선교할 계획을 세우고 그 동안의 선교 결과를 보고할 뿐만 아니라 로마 선교 추진을 위한 후원을 받기 위해서 예루살렘 교회에 찾아갔다가는 그의 복음 전파 사역을 방해하던 유대교 사람들에 의해서 체포당하고 살해 위협을 받는 상황 가운데서 있었던 일들을 기록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사도 바울이 위험에 처하게 되자 로마인 천부장의 손을 통해서 그의 생명을 지키게 하셨는데, 바울은 천부장의 손에 체포당해서 천부장의 영내로 끌려가는 와중에서도 성난 유대인 무리들을 향해서 침착하게 자신의 무죄함과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사실을 증거 하는 열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열정은 바로 생명을 살리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에게 주신 열정이었습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은 이런 과정을 거쳐서 결국은 심문을 받기 위해서 유대인들의 최고 법정인 산헤드린 공회원들 앞에 끌려 나간 사도 바울이 그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도 주저하지 않고 당당하게 자신의 무죄함과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신다고 하는 사실을 선포하면서 변증하는 과정 중에 있었던 일을 증거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특별히 11절 말씀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 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살기등등한 유대교 지도자들 앞에서 행한 설교 때문에 더 위험에 처한 바울을 하나님께서 천부 장을 통해서 보호하시고는 그에게 하신 말씀으로, 바울이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그를 보호하시며, 인도하시겠다는 의미에서 그에게 주신 위로와 격려, 그리고 소망의 말씀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이후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유대인들 중에 열성당원 40명이 바울을 살해하고자 하는 결사대를 조직해서 구체적인 살해 음모를 꾸미고 그 음모를 행동으로 옮기려고 함으로 사도 바울이 위험에 처하게 되자 이번에는 바울의 생질을 통해서 바울과 천부장이 그 정보를 알게 함으로써 천부장의 특별한 보호 가운데서 로마 총독 벨릭스에게로 호송되게 하신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결국 로마 총독인 벨릭스와 그의 후임자인 베스도 총독, 그리고 유대인의 마지막 왕인 헤롯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자신의 무죄함과 더불어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신다고 하는 사실을 담대하게 증거 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비록 죄수의 몸으로 압송되어 갔지만 로마 황제 앞에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게 되었음을 성경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사실을 통해서 우리가 분명하게 알 수 있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은 온 세상 모든 사람들을 죽음의 자리에서 살리심으로 영원한 생명을 누리도록 하시기 위해서 쉼 없이 일하시는 분으로서 이 거룩한 생명 살리는 일을 위해서라면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우리가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아주 다양한 방법으로 일하시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의 생명을 살리시기 위해서 당신 자신의 생명을 아끼지 않고 십자가에 내어주신 분이시며, 오늘도 그 일을 이루어 나가시기 위해서 부족하지만 저와 여러분을 사도 바울처럼 일꾼으로 부르셔서 세우시고는 언제,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함께 하시며 지키시고 도우심으로써 우리들로 하여금 그 역사를 잘 감당해 나갈 수 있도록 일하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그랬고, 초대교회 이후부터 복음을 전함으로써 생명 살리는 일을 감당했던 모든 사역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 일은 많은 어려움이 따르는 일이지만 이 일 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을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이 일을 맡기신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 가운데 성령으로 함께 하시면서 우리들이 이 일을 잘 감당해 나갈 수 있도록 일하시고 계신 사실을 믿으시고 사도 바울처럼 담대하게 생명 살리시는 일을 쉼 없이 해 나가시는 하나님과 함께 그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심으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며 귀하게 쓰임을 받으시는 복된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로마를 향하여
서명성 목사
■ 데이빗 리빙스턴은 아프리카 선교의 개척자입니다. 그는 30년 동안 아프리카 내륙을 횡단하며 오지에 문명과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그가 처음 아프리카에 간 11년 동안은 한 사람도 회심시키지 못했고 어떤 선교지도 개척하지 못했습니다. 선교사들 간의 알력에 시달렸고 가족과 환경에 매어 지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는 기도하며 기다렸고 때가 되매 하나님께서 그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는 아프리카 내부로 본격적인 탐험을 시작했습니다. 아직 선교사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수천의 마을들을 향하여 내륙으로 들어갔고 결국은 최초로 아프리카 대륙을 횡단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그 과정에서 맹수와 질병과 원주민들의 위협에 끊임없이 시달렸습니다. 그의 어려움을 듣고 친구들이 그를 도우려 편지를 보냈습니다. “자네의 고생을 조금이라도 덜어 주기 위해 우리가 자네를 도와줄 사람을 몇 명 그곳으로 보내려 하네. 그러니 그곳까지 가는 길을 상세히 적어 다음 편지에 보내 주면 좋겠네.” 그러자 리빙스턴은 정중하게 그 제의를 거절하며 다음과 같이 답장을 보냈다고 합니다. “마음은 고마우나 이곳까지 오는 길이 있어야만 오겠다는 사람들이라면 나는 사양하겠네. 이곳에서 진정 필요한 사람은 길이 없어도 스스로 찾아오겠다는 사람이거든.” 언젠가 한 번은 리빙스턴이 사자에 물려 큰 부상을 당했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죽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 때 리빙스턴이 한 말이 있습니다. “사명자는 그 사명을 이루기까지 죽지 않는다.” 그 확신대로 그는 살아났으며 그에게 주어진 사명을 다 마칠 때까지 정글 속 탐험을 계속했습니다. 지난 주 살펴 본 바울이 어떤 고백을 하였습니까?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 오늘 우리의 시대는 도전정신을 잃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개척해 놓은 편안한 길로만 가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쓰셨던 사람들은 길이 없던 길을 가며 길을 만들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익숙한 것은 편안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역량이나 달란트를 잠재우게 만듭니다. 새로운 길은 어렵고 힘들지만 우리의 인생을 투자할 만한 길입니다. 그 길은 바울이 걸었던 길이고, 리빙스턴을 비롯한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걸었던 길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울의 여정은 여전히 험난합니다. 그러나 그의 사역은 계속됩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바울의 헌신이 어우러져 가는 곳마다 열매를 거둡니다. 바울이 복음을 들고 로마로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기에 하나님은 그 뜻을 이룰 때까지 바울을 지키시고 격려하시고 힘을 주십니다. 바울만 사명자가 아닙니다. 리빙스턴만 사명자가 아닙니다. 은혜 가운데 부름 받은 모든 성도들이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하는 사명자입니다. 나는 사명자라는 분명한 의식이 있으십니까?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을 이루려고 할 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사명자들에게 주시는 교훈을 본문을 중심으로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본문의 앞부분을 잠시 정리해볼까요? 예루살렘을 방문했던 사도 바울이 유대인들에 의해 붙잡혔다가 로마 당국에 죄수의 몸으로 넘겨집니다. 바울이 끌려가다가 잠시 말미를 얻어 성난 군중들 앞에서 자신의 유대적인 배경을 설명하고 그리스도를 만나 회심한 과정을 말하는데 그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군중들이 다시 폭발합니다. “이러한 놈은 없이하자”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나옵니다. 하나님이 자기들만 선택하였다고 생각하는 유대인들에게 바울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방인들에게 구원을 전한다고 하니 도저히 참을 수 없었습니다. 분노하여 옷을 벗어 던지고 티끌을 공중에 날리며 소란을 벌이니 치안을 맡은 천부장이 바울을 영문 안으로 데리고 갑니다.
바울이 공회에 섭니다.
바울이 그냥 석방된다면 유대인들이 폭동이라도 일으킬 기세였으므로 천부장은 실상을 파악하고자 산헤드린 공회 소집을 요청합니다. 천부장이 공회를 소집할 권한이 없었지만 바울을 제거하기 원했던 유대교 지도자들인지라 그 요청을 쉽게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대제사장과 서기관 그리고 장로들로 구성된 유대인 최고 의결기관입니다. 그 당시 예루살렘은 로마의 식민지였기에 공회에서 정치나 사회문제는 다룰 수 없었고 오직 종교나 풍습에 관한 내용만을 다루었습니다. 누구든지 그곳에 서면 두려움을 느끼게 되는데 바울은 자신의 죄를 들추어내기 위하여 혈안이 되어 있는 사람들 앞에 오히려 당당합니다. 바울은 공회원들을 “형제들”이라고 부르며 변론을 시작합니다.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고 입을 엽니다. ‘섬겼다’는 단어는 ‘시민으로서 의무를 다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즉 모든 일에 선한 양심을 따라 하나님 나라의 시민처럼 살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말은 공회에 모인 사람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습니다. 바울이 양심에 거리낄 것이 없이 올바로 하나님 앞에서 살았다면 바울에게 대적하는 자신들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산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너무나도 당찬 바울의 진술을 들으면서 화가 치민 대제사장은 그의 입을 치라고 명령합니다. 아나니아는 주후 47-59년에 재위했던 대제사장입니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그를 세속적이고 탐욕적이며 성질이 급하고 난폭한 사람으로 묘사했습니다. 바울은 주저 없이 그를 ‘회칠한 담’ 즉 위선자라고 부르고 하나님이 그를 치실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담긴 율법으로 통치해야 할 사람이 앞장서서 율법의 참된 정신을 훼손하고 공정한 재판의 절차를 무시했기 때문입니다(레 19:15). 그의 정체를 알고 난 뒤 자신의 발언에 대한 해명을 했지만 사실상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는 바울의 말은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아나니아는 주후 59년 대제사장직에서 면직되고 66년에 로마에 반기를 든 무장 세력에 의하여 피살을 당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주의 종의 말은 그냥 땅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이때 곁에 선 사람들이 대제사장에 대한 바울의 과격한 언사를 나무랍니다. 대제사장에게 할 행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에 바울은 그가 대제사장인줄 몰랐다고 응수합니다. 바울의 말 속에는 하나님의 율법을 노골적으로 어기는 자를 어떻게 대제사장으로 생각할 수 있겠느냐는 은근한 책망이 담겨 있습니다. 바울은 “너는 재판장을 모독하지 말며 백성의 지도자를 저주하지 말지니라”(출 22:28)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사과합니다. 불의에 맞설 때라도 법과 질서를 존중히 여기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공회에서 소동이 벌어집니다.
공회의 분위기로 보아 바울이 어떤 변증을 해도 그것이 제대로 먹혀들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거기서 빠져나갈 궁리를 합니다. 그때 바울은 공회의 구성원이 서로 대립해온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임을 주목합니다.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하면서 자신은 바리새인의 조상에서 피를 받았고 철저하게 바리새파의 교육을 받았다고 하면서 바리새파에 속한 공회원들의 마음을 잡으려고 합니다. 자신은 죽은 자의 소망인 부활을 전하다가 심문을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바울이 그리스도의 부활만을 말하지 않고 죽은 자들의 종말론적인 부활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의 부활에 대해 말함으로써 바리새파의 호응을 기대하였습니다. 바울의 의도대로 이 발언은 사두개인들을 자극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구약 중에서도 모세오경만 정경으로 인정하며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고 믿는 그룹입니다. 반면에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연구하고 그 말씀대로 살려고 하였기에 유대인 대중들에게 존경을 받았는데 “부활도 있고 천사도 있고 영도 있다”고 믿었습니다. 바울이 부활을 언급하자 사두개인들은 ‘부활? 말도 안 돼. 그런 것이 어디 있어. 죽으면 그만이지’하며 흥분합니다. 이 말을 듣고 바리새인들은 ‘부활이 없기는 왜 없어’하며 맞받아칩니다. 졸지에 공회가 두 그룹으로 나뉘어 서로 손가락질하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그때 바리새파에 속한 유력한 서기관 몇 사람이 일어나 발언합니다.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악한 것이 없도다 혹 영이나 천사가 저더러 말하였다면 어찌하겠느냐” 부활 문제로는 바울을 정죄할 수 없다고 바울을 지지하고 나섭니다. 이 진술은 가말리엘이 베드로와 요한의 문제에 관해 공회에서 말했던 중립적인 발언을 떠올리게 합니다(5:35). 바울의 문제로 모였는데 바울은 빠지고 엉뚱하게 두 그룹 사이에 교리논쟁이 크게 벌어졌고 과격해진 논쟁은 소동으로 발전했습니다. 결국 천부장이 바울을 그 가운데서 데리고 나와야 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산헤드린은 늘 이런 한심한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예수님께서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마 10:16)고 하셨는데 바울은 상황을 지혜롭게 파악하고 적절하게 대처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끌어다가 넘겨 줄 때에 무슨 말을 할까 미리 염려하지 말고 무엇이든지 그 때에 너희에게 주시는 그 말을 하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요 성령이시니라”(막 13:11). 바울은 성령님이 주신 지혜로 산헤드린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지혜의 근원이신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참 지혜를 주십니다.
주님께서 바울을 위로하십니다.
공회원들끼리 벌이는 격렬한 논쟁의 와중에 바울이 다시 부상을 당할 것을 염려한 천부장이 그를 무리 가운데서 빼내어 영내로 들어가라고 부하들에게 명령합니다. 일단 위기는 넘겼지만 바울은 공회 앞에서 복음을 전할 기회를 놓치게 된 것을 아쉽게 생각하였을지 모릅니다. 현재 죄수의 상태로 있는 자신의 장래에 대하여 걱정도 하였을 것입니다. 위기와 고통을 당할 때마다 주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 밤에 나타나신 주님은 다메섹 도상에서처럼 앞에서 계신 것이 아니라 바울 곁에 서서 말씀하십니다. 다정한 격려의 제스처입니다. 바울이 마지막으로 쓴 편지가 디모데 후서 4장을 보면 로마 감옥에 갇혀서 그동안의 사역을 돌아보며 주님은 어떤 분이신지 묵상을 할 때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를 강건케”(4:17) 하신다는 고백을 합니다. 물론 주님이 육체적으로 바울 곁에 계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마 28:20) 약속하셨습니다. 주님이 승천하셨는데 어떻게 우리와 함께 계십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요 14:16) 보혜사의 뜻이 무엇입니까? “곁에 있도록 부름 받은 이.” 주님이 우리 곁에 있도록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 사역을 마치시자 예수님의 뒤를 이어 또 다른 분이 오셨는데 그분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이제는 성령이 우리 곁에 계시며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하십니다. 바울이 험난한 사역 가운데 낙심하지 아니하고 담대하게 일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사람들은 자기 곁을 떠날지라도 주님이 성령을 통하여 곁에 계시며 주님의 인도하심을 체험하였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곁에 계신 주님 때문에 바울은 고독한 상황, 위험한 상황에서도 실망하지 않고 담대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 곁에 계셨던 주님이 바로 우리가 믿고 섬기는 주님이십니다. 무슨 일을 혼자하려면 두렵고 떨릴 수 있으나 주님이 곁에 계신다는 믿음을 가질 때 담대할 수 있습니다.
바울도 인간인데 계속되는 위험 속에 어찌 염려가 되지 않겠습니까? 한 위험이 지나면 또 다른 위험이 다가옵니다. 그럴 때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신 주님의 말씀은 바울에게 큰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바울의 결박과 환난은 결국 예루살렘을 넘어 로마까지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간섭이고 섭리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로마에 갈 때까지는 아무도 그의 생명을 해하지 못하게 하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바울을 지키실 것이고 그의 궁극적인 목적지인 로마까지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렇지만 바울이 로마까지 가는 동안 위험이 계속될 것을 암시합니다. 반면에 공회원들은 장차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부끄러움을 당할 것입니다. 그들은 이미 복음을 들었기에 몰라서 믿지 못했다고 핑계를 댈 수 없을 것입니다.
성도들에게도 문제 다양한 방법으로 예상치 않게 그리고 피할 수 없이 다가옵니다. 그 문제가 구체적으로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을 인하여 불안해하거나 섭섭해하거나 깊은 고민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것을 인하여 다른 사람을 원망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주님은 그저 멀리 계시는 분, 무관심한 분으로 보이기 쉽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지금 어떤 고난을 지나고 계십니까? 우리에게 가장 큰 문제는 우리를 둘러싼 상황이나 문제 자체가 아니라 바로 믿음 없는 우리 자신입니다. 문제만 바라보면 문제가 점점 더 커 보이고 나중에는 그 문제에 눌리게 됩니다. 그러나 고난은 우리의 삶의 일부임을 알아야 합니다. 고난을 통하여 성도들은 하나님을 경험하는 기회를 가집니다. 삶의 현장에서 때로 위기를 경험하는 성도들이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 본문을 중심으로 살펴봅니다.
1. 선한 양심을 따라 삽니다
바울이 공회원들 앞에서 자신을 변호할 때 전혀 주눅 들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겨왔기 때문입니다. 양심은 우리가 아는 최고의 표준을 따르려는 내적 능력을 말합니다. 때문에 양심은 최고의 표준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끊임없이 우리를 일깨워줍니다. 즉 양심은 영혼의 눈입니다. 항상 하나님을 향하고 있는 양심은 언제나 우리를 하나님의 완전함으로 향하게 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지시해줍니다. 대신 우리는 양심에 부끄러움 없이 순종해야 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섬기는 일에는 자신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바울의 눈에는 모든 상황이 아들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이 하신 일을 증거할 기회로 보였습니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상황에 따라 신앙 양심을 저버리고 세상과 타협하지 않습니까? 말씀에 순종하지 못한 것을 합리화하려고 할 때는 없습니까? 윤동주 시인의 말처럼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어야 합니다.
2.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합니다
사도행전에는 3명의 아나니아가 등장합니다. 첫째, 아나니아는 다메섹 도상에서 시력을 잃은 바울을 찾아와 안수하며 기도해주던 경건한 인물입니다. 둘째 아나니아는 교회에서 존경받는 바나바를 흉내 내다가 성령을 속인 죄로 부인과 함께 죽임을 당했습니다. 세 번째 아나니아가 본문에 나오는 대제사장입니다. 그는 당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타락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인물로서 아주 잔인하고 탐욕스러운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바울이 회심할 때 그를 안수해 준 경건한 아나니아는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하였기에 말씀대로 순종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두 아나니아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들의 시선만을 의식하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고 말았습니다. 연약한 인생이다 보니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시선보다 아무래도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를 지켜보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지켜보실 뿐 아니라 그 대가를 치르게 하십니다.
마태복음 23장에는 종교지도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책망이 나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마 23:13). 바리새인들은 겉으로는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말하면서 속으로는 사람들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 경건을 가장한 행동을 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잘못된 지식과 가르침을 전함으로 자신들뿐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에게 거룩한 분노하시며 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외식이란 겉을 꾸미는 것을 말합니다. 외면보다 중요한 내면을 살피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모두는 종교지도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책망을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자기는 물론 다른 사람들까지도 하나님의 복을 받지 못하게 하는 자들이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요즘 신문 광고를 보면 외모를 아름답게 꾸며준다는 성형 광고가 얼마나 많습니까? 겉을 꾸미는 노력의 일부만이라도 속을 다듬는 데 쓴다면 우리의 내면이나 인생이 얼마나 아름다워질까요? 아름답게 보이는 행실과 말과 삶 속에 무엇이 담겨있는 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의 칭찬과 박수 소리에만 신경을 써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시선을 항상 의식하며 주님만 알아주시면 된다는 자세로 나아갈 때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3. 지혜를 구합니다.
대제사장의 방해로 공회에서 변론이 방해를 받자 바울은 공회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로 구성된 것을 알고 그들을 교리 논쟁으로 끌어들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바리새인임을 밝히고 부활에 대하여 언급하니 공회는 바울을 제쳐두고 자기들끼리 격렬한 논쟁을 벌입니다. 그 틈을 타 바울은 위기에서 벗어납니다. 바울은 순간적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를 사용하였습니다. 영적 싸움이나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고난을 당할 때도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피할 길을 찾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 10:16)고 권면하셨습니다. 우리가 어려움에 있을 때에는 문제에만 온통 신경을 쓰기 쉽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우왕좌왕 할 때가 많습니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이 지혜를 구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누구에게 구합니까?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약 1:5). 시련의 날에 성도의 바른 자세는 인내 속에 기도하는 것이요 믿음으로 기도할 때 주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됩니다.
4. 사명을 붙들어야 합니다.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 사명을 감당하는 동안 누구보다도 많은 고난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수시로 그에게 나타나셔서 그의 사명을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바울의 생애가 철저하게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려주었습니다. 주님의 위로가 주어졌기에 바울은 위기의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사명을 감당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아는 자는 지금의 고난도 지나가는 과정으로 생각하면서 최선의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하여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세상의 여러 가지 시련 속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는 비결은 우리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주님께서 우리를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믿는 믿음입니다. 우리의 부족함과 한계를 인정하고 주님께 나아갈 때 위로를 주시고 환난 가운데 피할 길을 마련해주십니다. 시험을 이길 능력은 주님에게서 나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은 바울은 용기가 생겼고 주님이 주신 사명을 완수하려는 열정이 생겼습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말씀을 붙들어야 하고 주님의 발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가 된 것은 그가 자원했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누가 시켜서 된 것입니까 어머니가 서원기도해서 된 것입니까?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 은혜로 부름을 받았기에 바울은 로마에 이를 때까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충실하게 주신 사명을 감당하기만 하면 됩니다. 주님이 그의 곁에서 그를 위로하시고 그를 지켜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를 은혜로 부르셨습니다. 우리의 배후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우리를 위하여 싸우시고 일하십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감사하지 않습니까? 각자 생각해 보세요. 로마로 가야 하리라 그 말씀이 바울의 비전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순종하여 로마를 향하여 나아갔습니다. ‘나의 로마’가 어디입니까? 나를 향한 주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은혜로 나를 부르신 주님, 그 뜻을 이루어지기까지 나를 붙들어 주옵소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곁에서 위로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어떤 형편과 처지에서도 염려하지 않고 좌절하지 않고 주님을 붙들면서 회복을 경험하고 주님의 주신 사명을 향하여 담대하게 나아가며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수고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