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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질(虎叱)
범의 질책으로,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등장하는 단편소설이다.
虎 : 범 호
叱 : 꾸짖을 질
호질(虎叱) 연암(軟巖) 박지원(朴趾源)이 지은 단편소설(短篇小說)로 열하일기(熱河日記)에 실리어 있다. 군자를 가장한 선비가 범에게 꾸지람을 당한다는 줄거리로, 당시의 부패하고 위선적인 유생(儒生)들의 가면을 폭로한 작품이다.
범은 착하고도 성스럽고, 문채롭고도 싸움 잘하고, 인자롭고도 효성스럽고, 슬기롭고도 어질고, 엉큼스럽고도 날래고, 세차고도 사납기가 그야말로 천하에 대적할 자 없다.
그러나 비위(狒胃)란 짐승이 범을 잡아먹고, 죽우(竹牛)란 짐승도 범을 잡아먹고, 박(駮)이란 짐승도 범을 잡아먹고, 오색 사자(五色獅子)는 큰 나무 선 산꼭대기에서 잡아먹고, 자백(玆白)이란 짐승도 범을 잡아먹고, 표견(䶂犬)이란 짐승은 날아서 범과 표범을 잡아먹고, 황요(黃要)라는 짐승은 범과 표범의 염통을 꺼내어 먹고, 뼈가 없는 활(猾)이란 짐승은 범과 표범에게 일부러 삼켜졌다가 그 뱃속에서 간을 뜯어먹고, 추이(酋耳)라는 짐승은 범을 만나기만 하면 곧 찢어서 먹고, 범이 맹용(猛㺎 짐승 이름)을 만나면 눈을 감은 채로 감히 뜨질 못하는 법이다. 그런데 사람은 맹용을 두려워하지 않고 범을 무서워하고 보니 범의 위엄이란 대단하지 않은가.
범이 개를 먹으면 취하고 사람을 먹으면 귀신이 붙는 법이다. 그리고 범이 첫 번째 사람을 먹으면 죽은 사람의 혼은 굴각(屈閣)이라는 창귀(倀鬼)가 되어 범의 겨드랑이에 붙어 있다가, 범을 남의 집 부엌으로 끌어 들여 범이 그 집 솥전을 핥으면 그 집 주인은 갑자기 배고픈 생각이 나서, 밤중이라도 그 처에게 밥을 짓게 한다.
범이 두 번째 사람을 먹으면 죽은 사람은 혼은 이올(彛兀)이라는 창귀가 되어 범의 광대뼈에 붙어 있다가, 높은 데 올라가 망을 보다가, 만일 골짜기에 함정(陷穽)이나 덫이 있다면, 먼저 가서 그 덫틀을 풀어 놓는다. 범이 세 번째 사람을 먹으면 죽은 사람의 혼는 육혼(鬻渾)이라는 창귀가 되어 범의 턱에 붙어 있다가 제가 그가 평소에 알던 친구들 이름을 죄다 주워섬겨 바친다고 한다.
하루는 범이 창귀들 더러 호령조로 말했다. “오늘도 벌써 해가 저무는데 어디서 먹을 것을 취할꼬?”
굴각이 말하길, “제가 진작 점쳐 보았더니 뿔난 놈도 아니요, 깃달린 놈도 아니요, 검은 머리한 놈이, 눈[雪] 위로 난 걸음 자국이 비틀비틀 엉성하고 꼬리를 뒤통수에 올려붙여 제 꽁무니도 못 가리는 놈입니다”하였다.
그러자 이올은, “동문(東門)께에 먹을 것이 있는데, 그 이름은 의원(醫員)이라 하고, 입에 온갖 풀을 머금어서 살코기에 향내가 풍긴답니다. 서문(西門)께에도 먹을 것이 있는데, 그 이름은 무당(巫堂)이라 하고, 온갖 잡귀에게 아양을 떨기 때문에 날마다 목욕재계해서 고기가 깨끗하온즉, 이 두 가지 중에서 어느 고기든지 골라 잡수시죠”했다.
그제야 범이 수염을 떨치고 낯빛을 붉히며 말하길, “에에, 醫(의원 의)란 것은 疑(의심할 의)이렸다. 저도 의심을 가진 채 여러 사람들에게 시험하다가는 해마다 남의 목숨을 몇만 명씩 잡거든. 巫(무당 무)란 誣(무고할 무)이렷다. 귀신을 속이고 사람을 호려 해마다 남의 목숨을 몇만 명씩 죽이지. 이러고야 뭇사람의 노여움이 그들 뼛속까지 스며들어 그것이 화하여 금잠(金蠶)으로 화했을 터이니, 독해서 그놈들을 어찌 먹을 것이냐”하니,
이번에는 육혼이 말했다. “저 숲속(유림儒林의 林과 통한다)에 좋은 살코기가 있습니다. 그의 간은 어질고 쓸개는 의의로우며, 충성을 안고 결백을 품고 있으며, 머리엔 풍류를 이고 예절을 행하며, 입으로는 온갖 글을 다 외우고 마음으로는 만물의 이치에 통했으니, 그 이름인즉 석덕지유(碩德之儒; 높은 덕망을 지닌 유학자)라 하옵니다. 등살이 오붓하고 몸집이 기름져서 오미(五味)를 다 갖추고 있습니다.”
그제야 범이 눈썹을 치켜세우고 침을 흘리며 고개를 위로 젖혀 껄껄 웃으면서, “짐(朕)이 이를 좀 상세히 듣고자 한다.”하니, 창귀들은 서로 다투어가며 범에게 꼬아 바친다. “일음(一陰), 일양(一陽)을 도(道)라 하옵는데, 이 오묘한 이치를 저 선비(儒, 유)가 다 꿰뚫어 맞혔답니다. 오행(五行)이 서로 낳고 육기(六氣)가 서로 이끌어 주옵는데, 저 선비가 다 이끌어 내는 조화랍니다. 세상에 맛좋은 고기로서야 이보다 더할 것이 있겠습니까?”
범이 이 말을 듣고는 그만 실쭉해지면서 낯빛이 달라지고 몸을 다시 도사리면서 달갑잖게 말했다. “아니다. 저 음(陰)과 양(陽)이란 것은 한 기운에서 나오고 꺼지는 것에 불과하거늘, 둘로 쪼개어 놓았다니 그놈의 고기가 잡(雜)될 것이요, 오행이란 원래 제자리를 잡고 있어 서로 낳고 말고가 없을 터인데 이제 구태여 새끼니 에미니 자(子)ㆍ모(母)로 갈라놓고, 심지어는 짜고 신맛들에 이르기까지 분배(分配)시켰으니 그 맛이 순(純)하지 못할 것이요, 육기(六氣)는 원래 절로 돌아가는 것이지 일부러 당기고 밀고 할 까닭이 없거늘, 이제 망녕되이 재성(財成)ㆍ보상(輔相)이라 일컬어서 사사로이 제 공을 세우려 하니, 이런 놈의 고기를 먹는다면 어찌 질기고 딱딱하여 가슴에 체하거나 목구멍에 구역질이 나지 않겠느냐.”
때마침 정(鄭)나라 어느 고을에 벼슬에 뜻이 없는 선비 하나가 있으니, 북곽 선생(北郭 先生)이라 불렀다. 그는 나이 마흔에 손수 교정한 글이 1만 권이요, 또 구경(九經)의 뜻을 부연(敷衍)해서 책을 엮은 것이 1만 5천 권이나 되므로, 천자(天子)가 그의 의(義)를 아름답게 여기고, 제후(諸侯)들은 그의 이름을 사모하였다.
그리고 그 고을 동쪽에는 일찍 과부가 된 동리자(東里子)라는 여인이 살았는데, 천자는 그 절조(節操)를 갸륵히 여기고 제후(諸侯)들도 그녀가 현숙하다고 떠받들어 그 고을의 둘레 몇 리의 땅을 봉하여 동리과부지려(東里寡婦之閭), 동리과부의 마을이라 하였다.
동리자는 이렇게 수절(守節)하는 과부였으나 아들 다섯을 두었는데 각기 다른 성(姓)을 지녔다. 어느 날 밤 그 아들 다섯 놈이 서로 노래처럼 된 말로서, “강 북편에 닭 울음 소리, 강 남쪽엔 별이 반짝이네. 방 안 소리 자아하니, 어쩌면 꼭 북곽 선생 목소리 같구나.”하고는 성 다른 형제 다섯이 번갈아서 문틈으로 들여다 보았다.
水北雞鳴 水南明星.
수북계명 수남명성.
室中有聲 何其甚似北郭先生也.
실중유성 하기심사북곽선생야.
동리자가 북곽 선생께 청하기를, “오랫동안 선생님의 덕을 연모하였답니다. 오늘 밤엔 선생님의 글 읽으시는 음성을 듣고자 하옵니다.”한다. 그제야 북곽 선생은 옷깃을 여미고 꿇어 앉아서 시(詩) 한 장(章)을 읊었다.
鴛鴦在屛耿耿流螢 維鬵維錡云誰之型 興也라.
원앙재병경경유형 유심유기운수지형 흥이라.
병풍에는 원앙새 반딧물은 반짝반짝 가마솥과 세발솥은 무얼 본떠 만들었나 흥이라.
(註)
가마솥과 세발솥은 무얼 본떠 만들었나에서 발 없는 가마솥과 세발솥은 그 모형이 다 다르다. 이는 성(姓)이 다른 다섯 아들에게 비하(卑下)였다. 대체 다섯 아이들이 성(姓)도 다르고 얼굴도 같지 않으니, 이는 어떤 잡놈들과 관계해서 이런 것들을 낳았나 라는 의미이다.
(註)
흥이(興也)라는 육의(六義)의 하나로, 먼저 어떤 다른 물건을 읊어서 그 목적하고 있는 것을 끄집어 일으키는 것으로, 예를 들면 원앙새를 먼저 이끌어서 남녀의 사건을 전개하는 것이다.
그 꼴을 본 다섯 아들은 서로 말하기를,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과부의 문엔 함부로 들지 않는다 하였는데 북곽 선생은 어진이라서 그런 일 없을 거야.” “나는 듣자 하니 정나라 성문이 헐어서 여우가 구멍을 내었다고 하더군요.” “나는 들은즉, 여우가 천 년을 묵으면 환생(幻生)하여 능히 사람 시늉을 할 수 있다 하니 그놈이 필시 북곽 선생으로 둔갑한 것일게다”하였다.
다시 서로 의논하되, “나는 듣건대, 여우의 갓을 얻는 자는 천금의 장자가 되고, 여우의 신을 얻는 자는 대낮의 그림자를 감출 수 있고, 여우의 꼬리를 얻는 자는 남을 잘 괴어서 누구라도 그를 기뻐한다 하니, 우리 저 여우를 잡아 죽여서 나눠 갖는 게 어떨꼬”하고 이에 다섯 아들이 함께 어미의 방을 에워싸고 들이쳤다.
북곽 선생이 크게 놀라서 뺑소니를 칠 제 행여 남들이 제 얼굴을 알아볼까 해서 한 다리를 비틀어서 목덜미에 얹고 도깨비처럼 춤추고 귀신처럼 웃으며 문밖으로 튀어나와 달아나다가 그만 들판 구덩이에 빠지니 그 속에는 똥이 가뜩 채워져 있었다.
간신히 휘어잡고 기어올라 머리를 내밀고 바라본즉 범이 어흥하며 길을 가로 막았다. 범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구역질이 나서 코를 싸쥐고 머리를 왼편으로 돌리며, “이놈의 선비, 냄새 되게 구리구나!” 한다.
북곽 선생이 머리를 조아리며 엉금엉금 기어 범 앞으로 나와 세 번 절하고 꿇어 앉아서 고개를 쳐들고 여쭈되, “범님의 덕이야말로 참 지극하시지요. 대인(大人)은 그 변화를 본받고 제왕(帝王)은 그 걸음을 배우며, 남의 아들 된 이는 그 효성을 본받고, 장수는 그 위엄을 취하며 그 거룩하신 이름은 신룡(神龍)과 짝이 되어 한 분은 바람을, 또 한 분은 구름을 일으키시니, 저 같은 하토(下土)의 천한 신하 감히 하풍(下風, 아랫자리)에 있습니다.”한다.
범은 이 말을 듣자 꾸짖는다. “에이, 앞에 가까이 오질 말렸다. 전에 내가 들은즉, 儒(선비 유)란 것은 諛(아첨할 유)라 하더니 과연 그렇구나. 네가 평소에는 온 천하의 모든 나쁜 이름을 모아서 망녕되이 내게 덧붙이더니, 이제 다급해지자 낯간지럽게 아첨하는 것을 그 뉘라서 곧이 듣겠느냐.
대개 천하의 이치야말로 하나인 만큼 범이 진정 몹쓸진대 사람의 성품도 역시 몹쓸 것이요, 사람의 성품이 착할진대 범의 성품도 역시 착할지니, 너희들의 천만 가지의 말이 모두 오상[五常; 부의(父義), 모자(母慈), 형우(兄友), 제공(弟恭), 자효(子孝)]을 떠나지 않으며 경계나 권면이 언제나 사강(四綱)[예(禮), 의(義), 염(廉), 치(恥)]에 있긴 하나, 저 도회지나 큰 고을에 코 베이고 발 잘리고 얼굴에 먹바늘을 뜨고 다니는 것들은 모두 오륜(五倫)을 순종하지 않은 그 잘났다는 인간이 아니더냐.
밧줄이며 먹바늘이며 도끼며 톱 따위 형구를 공급하기에 겨를이 없었지만 그 나쁜 짓들은 막을 길이 없었다. 그러나 범의 집에는 본래 이러한 악독한 형벌이 없으니, 이로써 본다면 범의 성품이 사람보다 어질지 아니하냐.
그리고 범은 초목을 씹지 않고, 벌레나 물고기를 먹지 않으며, 누룩술 같은 정신 어지럽히는 것을 즐기지 않고, 새끼 가진 짐승이나 알 품은 짐승 같은 자잘한 것도 차마 먹지 않는다.
그리고는 산에 들어가면 노루나 사슴을 사냥하고, 들에 나가면 마소를 사냥하되, 아직 배를 채우는 끼닛거리 때문에 남에게 신세를 지거나 송사질을 하는 일이 없다. 범의 도(道)야말로 어찌 광명정대하지 아니하냐.
범이 노루나 사슴을 먹으면 너희들 사람은 범을 미워하지 않다가도, 범이 만일 마소를 먹는다면 사람들은 원수라고 떠들어대니, 이것은 아마 노루와 사슴은 사람에게 은혜로움이 없지만, 저 마소는 너희들에게 공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냐.
그렇지만 너희들은 마소 대접을 어떻게 하느냐? 저 마소의 태워 주고 일해 주는 공로도, 따르고 충성하는 생각도 다 저버리고 다만 날마다 푸줏간이 미어지도록 이들을 죽이고, 심지어는 그 뿔과 갈기까지 남기지 않을뿐더러, 이것도 부족하여 다시 우리들의 노루와 사슴을 토색질하여 우리들이 산에서 먹을 것이 없고 들에서도 끼니를 굶게 하니, 하늘로 하여금 이를 공평하게 처리하게 한다면 너희를 먹어야 하겠는가, 놓아 주어야 되겠는가.
대개 제것 아닌 것을 취함을 도(盜)라 하고, 남을 못살게 굴고 그 생명을 빼앗는 것을 적(賊)이라 하나니, 너희들이 밤낮을 헤아리지 않고 쏘다니며 팔을 걷어붙이며 눈을 부릅뜨고, 함부로 남의 것을 착취하고 훔쳐도 부끄러운 줄을 모르며 심지어는 돈을 형이라 부르고, 장수되기 위해서 아내를 죽이는 일까지도 있은즉, 이러고도 인륜의 도리를 논할 수 있을 것인가.
뿐만 아니라 메뚜기에게 그 밥을 빼앗고 누에한테서 옷을 빼앗으며, 벌을 제압하여 꿀을 약탈하고, 심한 자는 개미 알을 젓담아서 그 조상께 제사하니 그 잔인하고도 박덕함이 너희들보다 더할 놈이 어데 있단 말이냐.
너희들은 이(理)를 말하며 성(性)을 논하면서 툭하면 하늘을 일컬지만, 하늘이 명(命)한 바로써 본다면 범이나 사람이 다 한 가지 동물이요, 하늘과 땅이 만물을 낳아서 기르는 인(仁)으로써 논한다면 범과 메뚜기, 누에, 벌, 개미와 사람이 모두 함께 길러져서 서로 거슬러서는 안 될 것이요, 또 그 선악으로써 따진다면 뻔뻔스레 벌과 개미의 집을 노략질하고 긁어 가는 놈이야말로 천하의 큰 도(盜)가 아니며, 함부로 메뚜기와 누에의 살림을 빼앗고 훔쳐 가는 놈이야말로 인의(仁義)의 큰 적(賊)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범은 아직 표범을 먹지 않음은 실로 차마 제 겨레를 해칠 수 없는 까닭이다. 범이 노루나 사슴 먹는 것을 헤아려도 사람이 노루와 사슴을 먹는 이만큼 많지 못할 것이며, 범이 마소 먹는 것을 헤아려도 사람이 마소를 먹는 이만큼 많지 못할 것이며, 범이 사람을 먹는 것을 헤아려도 사람이 저희들끼리 서로 잡아먹는 이만큼 많지 못할 것이다.
지난해 관중[關中; 중국의 섬서성(陝西省) 지방]이 크게 가물었을 때 사람들끼리 서로 잡아 먹는 것이 몇만 명이요, 그 앞서 산동(山東)에 큰물이 났을 적에도 사람들끼리 서로 잡아 먹는 것이 역시 몇만 명 있었으니까.
그러나 서로 잡아 먹음이 많기야 어찌 저 춘추전국시대만 하였으랴. 춘추 그 때엔 명색이나마 정의를 위해서 싸운다는 난리가 열일곱 번이요, 원수를 갚는다고 일으킨 싸움이 서른 번에 그들의 피는 천리를 물들였고 죽어 자빠진 시체는 백만이나 되었다.
그러나 범의 집에선 물이나 가뭄의 걱정을 모르므로 하늘을 원망할 것도 없고, 원수와 은혜를 모두 잊고 지내므로 세상에 미운 것이 없고, 천명을 알고 그에 순종하므로 무당이나 의원의 간교함에 혹하지 않고, 타고난 바탕 그대로 지녀서 천명을 다하므로 세속의 이해에 병들지 아니하니, 이것이 곧 범이 착하고도 성스러운 것이다.
그뿐일까. 그 얼룩 반점 하나를 보더라도 족히 그 문(文)을 온 천하에 보일 수 있겠고, 척촌의 병장기(兵仗器) 하나 지니지 않고 발톱과 날카로운 이빨만을 쓰는 것은 이로써 무(武)를 천하에 빛내는 것이었다.
범을 제기에 그린 것은 효(孝)를 천하에 넓히는 것이었으며, 하루에 한번 사냥하여 까마귀, 솔개, 참개구리, 말개미 따위와 함께 그 대궁[餕; 먹다 남은 음식]을 나눠 먹으니, 그 인(仁)이야말로 이루 다 쓸 수 없겠고, 남을 헐뜯는 자는 먹지 않으며, 병든 자도 먹지 않고, 상제된 자도 먹지 않으니, 그 의(義)야말로 이루 헤아릴 수 없지 않겠느냐.
그런데 너희들이 먹고 사는 것이야말로 불인(不仁)하기 짝이 없다는 것이다. 저 덫과 함정으로도 오히려 모자라서 저 새 그물과 작은 노루 그물과 물고기 그물과 큰 물고기 그물과 수레 그물과 삼태그물 따위들을 만들었으니, 이는 애당초 그물을 뜬 자야말로 뚜렷이 천하에 화근을 퍼뜨린 놈일 것이다.
게다가 쇠꼬챙이니, 쥘 창이니, 날 없는 창이니, 도끼니, 세모난 창이니, 한 길 여덟 자 창이니, 뾰족 창이니, 작은 칼이니, 긴 창이니 하는 것들이 생기고, 또 화포(火礮)란 것이 있어서 쏘면 소리가 화산(華山)을 무너뜨릴 듯 그 불기운은 음양을 누설하여 그 무서움이 우레보다 더하거늘, 이러고도 그 못된 꾀를 마음껏 부리지 못하여서 이제는 보드라운 털을 빨아서 아교를 녹여 붙여 날을 만들되, 끝은 대추씨처럼 뾰족하고 길이는 한 치도 못 되게 하여, 오징어 거품에다 담그었다가 세로 가로로 멋대로 치고 찌르되, 그 굽음은 세모창 같고, 날카로움은 작은 칼 같고, 열쌤은 긴 칼 같고, 갈라짐은 가지창 같고, 곧음은 살 같고, 팽팽하기는 활 같아서, 이 병장기가 한 번 번뜩이면 모든 귀신들이 밤중에 곡(哭)할 지경이라니, 그 서로 잡아먹기로도 가혹함이 뉘라서 너희들보다 더할 자 있겠느냐.” 한다.
북곽 선생이 자리를 비켜 한참 엎드렸다가 일어나 엉거주춤하더니, 두 번 절하고 머리를 거듭 조아리며, “전(傳)에 이르기를 비록 아무리 못난 사람일지라도 목욕재계를 한다면 상제(上帝)라도 섬길 수 있다(맹자 이루편) 하였사오니, 이 하토(下土)에 살고 있는 천신(賤臣)이 감히 하풍(下風)에 섭니다.” 하고는 숨을 죽이고 가만히 듣되, 오래도록 아무런 분부가 없으므로 실로 황송키도 하고 적이 두렵기도 해서, 손을 맞잡고 머리를 조아리며 쳐다본즉 동녘이 밝았는데, 범은 벌써 어디론지 가버리고 말았다.
마침 새벽에 밭일 하러 온 농부가, “선생님, 무슨 일로 이 꼭두새벽에 들판에다 대고 절은 웬 절이시옵니까.” 하고 묻는다.
북곽 선생은, 내 일찍이 들으니 “하늘이 높다 하되, 머리 어찌 안 굽히며, 땅이 비록 두텁단들, 조심스레 걷지 않을쏘냐 하였네 그려.”하고는 말끝을 흐려버렸다. 시경(詩經)에 나오는 말이다.
謂天蓋高(위천개고)
不敢不跼(불감불국)
謂地蓋厚(위지개후)
不敢不蹐(불감불척)
호질(虎叱)
박지원(朴趾源)의 호질(虎叱)은 도학자인 북곽 선생과 수절 과부인 동리자의 위선적 행동을 통해 당시 지배 계층인 양반들의 도덕 관념을 풍자한 한문 소설로, 범의 질책이라는 제목처럼 의인화된 범을 내세워 작가의 비판 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지은이의 저서 열하일기(熱河日記)에 수록되어 있는 것으로서, 작품의 전후에 각각 작자의 말이 붙어 있다. 작품의 앞에 붙인 전지(前識)에서는 이 작품을 얻어서 기록하게 된 내력을 전하고 있는데, 여기서 박지원(朴趾源)은 자기가 이것을 지은 것이 아니라 중국 소주의 가게에 들렀을 때 벽에 걸려 있는 것을 베껴온 것이라 밝혔다.
이 기록을 두고 호질(虎叱)의 지은이를 박지원으로 보는 데 대한 논란이 있었으나, 이는 박지원의 창작 기법의 하나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이 작품은 그 내용이나 구조에서 홍대용(洪大容)의 의산문답(醫山問答)과 흡사한 데가 있어 양자간의 관계에 관심을 두기도 한다.
작품의 줄거리는 크게 3단락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첫째 단락에서는 범의 속성 및 범과 인간과의 관계를
이야기하고 있다. 여기서 작자는 범의 신령스러움과 용맹함을 칭송하면서 범이 인간 이상의 능력을 갖추고 있음을 보여준다.
둘째 단락에서는 북곽 선생이라는 유학자의 위선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점잖고 학식이 높은 것처럼 행세하지만 밤이면 동리자라는 과부의 집을 찾아다니다가 그녀의 아들들에게 들켜 도망쳐 나온다. 여기서 북곽 선생은 당대의 부도덕한 지배세력을 대변한다.
셋째 단락에서는 동리자의 집에서 도망쳐 나오다가 거름 구덩이에 빠진 북곽 선생이 범을 만나 꾸지람을 듣는 내용이다. 범은 유학자들의 이념이었던 성리학의 모순점과, 그들의 허위의식과 이중적 생활태도 등을 들어서 신랄하게 비판한다. 꾸짖기를 마친 범은 선비를 더럽다고 하여 잡아먹지도 않고 길가에 버려둔 채 돌아간다.
작품의 뒷부분에 붙인 후지(後識)에서는 지은이가 이 작품을 읽고 난 감상을 덧붙이고 있는데, 여기서 그는 다시 한번 당대의 고루한 선비들을 비판한다. 이 작품은 그 소재, 구성, 수사기법 등에서 독특한 모습을 보이는 작품으로서, 박지원 풍자문학의 대표작으로 평가된다. 또한 이 작품은 조선 후기 실학사상의 큰 과제였던 인성론(人性論)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기도 한다.
호질(虎叱)의 행간
호질(虎叱)은 열하일기(熱河日記)에 실려 있다. 북경으로 향하는 길목인 옥전현(玉田縣)을 지날 때, 심유붕(沈有朋)이란 이의 점포 벽에 걸려 있던 것을 베꼈다는 글이다.
작품 서두(序頭)에서 범은 영특하고 거룩하고 문무를 갖추었으며, 자애와 효성, 지혜와 어짊을 지닌 용맹하고 웅장한 천하무적의 존재로 그려진다. 그런데 바로 뒤이어 그 범조차 꼼짝 못하고 쩔쩔매는 존재들이 등장한다.
비위(狒胃)와 죽우(竹牛), 자백(玆白)과 맹용(猛㺎) 같은 짐승들이 그것이다. 범이 사람을 잡아 먹으면 그 넋이 창귀(倀鬼)가 되어 범의 하수인 노릇을 한다. 그들의 이름은 굴각(屈閣), 이올(彛兀), 육혼(鬻渾) 등이다. 무슨 말인가?
범의 앞에 붙은 수식어는 청(淸)나라 황제의 존호(尊號) 앞에 붙는 표현을 조금 바꿔 조합했다. 범은 청나라 황제의 은유(隱喩)다. 그 대단한 범조차 두려워 떨게 만드는 비위와 죽우, 맹용 같은 짐승들은 티베트, 몽골, 신장 등의 북방 이민족이다.
범의 하수인 노릇을 하는 창귀는 한족(漢族)의 지식인들이다. 작품은 범이 밤중에 사람 고기를 먹으러 산을 내려왔다가 위선적 지식인인 북곽 선생을 만나 그 가증스러운 요설(饒舌)에 일장 훈계로 일갈하고, 더럽다며 먹지도 않고 떠나 버린다는 내용이다. 연암은 작품 뒤에 따로 한편의 글을 더 남겨 당시 청나라의 고민을 겹쳐 읽었다.
열하일기(熱河日記) 반선시말(班禪始末)에서는 티베트 불교 지도자인 판첸(班禪) 라마에게 몸을 낮춰 경배하는 청 황제의 속내를 꿰뚫어 보았다. 황제가 열하까지 온 것은 뇌를 누르고 앉아 몽고의 멱통을 틀어쥐려는 것일 뿐이라고 분석했다.
또 티베트(西番)는 특히나 사납고 추악해서 괴수처럼 기괴하니 두렵다. 회자(回子)는 옛날의 위구르인데 더더욱 사납다고도 했다. 당시 청나라가 이들 북방 민족을 자신들의 통제력 안에 두기 위해 얼마나 고심하고 있었는지 연암은 열하일기 곳곳에서 명쾌하게 풀어 보였다.
당시 청나라의 이러한 고민은 지난 올림픽 때 티베트 사태나, 위구르 자치구 우루무치에서 최근 발생한 유혈사태에서 보듯 현재까지도 진행형이다. 몽골, 티베트, 신장은 여전히 중국의 화약고다. 단 한 번의 여행으로 당시 국제정세의 행간을 탁월하게 읽어낸 연암의 혜안이 새삼 놀랍다.
호질(虎叱)/박지원
이 작품은 도학자인 북곽 선생과 수절 과부인 동리자의 위선적 행동을 통해 당시 지배 계층인 양반들의 도덕 관념을 풍자한 한문 소설로, 범의 질책이라는 제목처럼 의인화된 범을 내세워 작가의 비판 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전체 줄거리)
어느 고을에 학자로 존경받는 북곽 선생이라는 선비와 수절을 잘하는 부인이라 하나 성이 다른 다섯 아들을 둔 과부 동리자가 있었다. 북곽 선생이 동리자의 방에 들어가 밀회를 즐기고 있는데, 과부의 아들들이 북곽 선생을 천 년 묵은 여우로 의심하여 방으로 쳐들어온다.
북곽 선생은 도망치다가 똥구덩이에 빠진다. 때마침 먹잇감을 찾아 마을에 내려온 범은 북곽 선생의 위선적인 모습과 인간들의 파렴치한 행동 등 부정적인 모습을 신랄하게 꾸짖고 사라진다.
북곽 선생은 범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비굴한 모습으로 목숨을 애걸하다가 새벽에 일하러 나온 농부와 만나게 된다. 북곽 선생은 범이 사라진 것을 알고 또다시 위선적인 모습으로 돌아와 자기변명을 한다.
(인물 소개)
북곽 선생은 높은 학식과 고매한 인품을 가진 선비로 추앙받지만 실상은 부도덕하고 위선적인 인물로, 평소에는 위엄 있는 척하다가 위기 상황에서는 비굴함을 보이는 이중적인 인물이다. 동리자는 열녀로 알려진 수절 과부지만 실상은 성이 다른 다섯 아들을 둔 표리부동한 인물이다.
다섯 아들은 북곽 선생과 동리자의 위선적인 모습을 드러내는 역할을 하지만,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인물들이다. 범은 비판적인 작가 의식을 대변하는 의인화된 대상으로, 위선적이고 이중적인 양반들을 꾸짖는 역할을 한다.
(이해와 감상)
호질(虎叱)은 북곽 선생과 동리자의 이중적 행동을 의인화된 인물인 범을 통해 직접적으로 비판하고, 당시 양반 계층의 부패한 도덕 관념과 허위의식, 짐승만도 못한 인간의 부도덕성을 풍자한 작품이다.
작가는 명망 높은 유학자로 존경받는 북곽 선생과 열녀로 추앙받는 동리자의 표리부동하고 위선적인 행동을 통해 사대부 계층의 부패한 도덕성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또한 범 앞에서 보이는 북곽 선생의 비굴한 행동과 범이 사라진고 난 뒤 농부 앞에서 보이는 위선적인 모습을 통해 끝까지 위선과 허세를 버리지 못하는 이중성도 풍자하고 있다.
한편 이 작품에서는 범이라는 의인화된 대상을 내세워 북곽 선생을 꾸짖고 있다. 여기서 범은 성리학적 이념만을 중시하는 사대부의 관념성과 부도덕성을 비판해 온 연암의 의식을 대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인물을 통해 드러난 풍자 의식)
북곽 선생은 학식 있고 고매한 인품의 유학자(儒學者)이고, 동리자는 열녀로 추앙받는 미모의 과부이다. 이들은 유교적 질서 내에서 이상적인 인간형으로 칭송받는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표리부동(表裏不同)한 모습을 지니고 있는데, 북곽 선생이 동리자와 밀회를 즐기는 것이나, 동리자가 성이 다른 다섯 아들을 두고 있는 것이 그런 모습이다. 작가는 이렇듯 겉과 속이 다른 두 인물을 제시하여 당대 지배층의 허위의식과 부도덕성을 풍자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범의 역할)
범은 선비로 대표되는 인간을 비판하고 풍자하는 주동적 인물이며, 한국인들의 의식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영적 동물로서 작가 의식을 대변해 준다. 여기서 작가가 범의 입을 빌려 당대 지배층을 꾸짖는 것은 사회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이 당시 유교 사회에서는 받아들여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작가는 범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우회적으로 드러내어 당대 지배층의 위선과 비도덕적인 모습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작품의 묘미와 흥미를 더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농부의 역할)
위선과 아첨에 젖어 있는 도학자(북곽 선생)와 부지런히 노동을 하며 건실하게 살아가는 서민(농부)을 극명하게 대비하여 무능하고 부패한 사대부층에 대해 엄중하게 경고하고 자기 혁신을 촉구하는 작가의 의도를 드러낸다.
(호질의 우화적 성격)
우화의 가장 큰 특징은 의인화한 부정적 인물이 등장하며 그 인물의 본질을 풍자적인 조소와 해학으로 폭로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호질은 우화의 기법을 사용하고 있으면서도, 오히려 의인화된 인물인 범이 부정적 인물인 북곽 선생의 위선과 허세를 풍자하고 인간 사회의 부정적 속성을 고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우화와 차이를 보인다. 이렇게 인간의 속성이 부여된 범을 통한 우회적인 비판은 직접적인 비판보다 풍자의 효과가 크다.
(호질의 풍자 대상)
① 북곽 선생과 동리자(일차적 풍자 대상)
겉으로는 도덕적인 선비와 열녀로 추앙받는 수절 과부이지만, 함부로 과부의 방에 들어가고 성이 다른 자식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겉과 속이 다른 인물들이다. 주된 풍자의 대상은 북곽 선생으로, 범은 북곽 선생을 향해 ‘더럽다, 유(儒)는 유(諛)라’라고 하며 직접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② 양반 사회와 인간 사회(풍자 대상의 확대)
작품의 후반부에서 풍자 대상이 개별적 인간에 머물지 않고 선비 계층과 인간 사회 전체로 확대되고 있다. 북곽 선생이라는 인물에서 나아가 유학자들의 위선, 이중성, 속물근성이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이를 확장하여 인간 사회 전반에 걸쳐 인간의 부도덕성, 악덕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③ 동리자의 아들들과 농부(부차적인 풍자 대상)
동리자의 아들들은 북곽 선생과 동리자의 위선적인 모습을 목격했음에도 그 상황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자신들의 어머니는 여전히 열녀이고 눈앞의 북곽 선생은 천년 묵은 여우의 화신으로 이해하는 등 허상에 빠져 있다는 점에서 풍자의 대상이 된다. 본질을 보지 못한다는 점은 농부도 마찬가지이다. 똥을 뒤집어 쓰고 비굴한 자세로 엎드려 있는 북곽 선생을 발견하고도 북곽 선생에 대한 고정 관념 때문에 눈앞의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어리석은 모습을 보인다.
(호질에서 범의 역할과 그 활용 의의)
① 역할
범은 작가 의식을 대변하는 의인화된 인물로, 비현실 세계의 존재로 나타나면서 풍자의 주체가 되어 현실 사회의 본질과 모순을 꿰뚫어 보고 있다. 또한 객관적 관찰자로서 인물의 부도덕성을 객관적으로 보여 주고 있으며, 동시에 인간과 사회의 심판자로서 양반 지배 계층의 위선적 속성을 폭로하고 풍자하고 있다. 따라서 작가는 범을 통해 북곽 선생으로 대표되는 당대의 위선적이고 부도덕한 선비 계층을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한편으로 동물보다 못한 인간의 부도덕한 악행을 꼬집고 있는
것이다.
② 활용의 의의
범의 입을 빌려 현실의 모순을 비판한 것은 당시 유교 사회에서는 직접적인 현실 비판이 받아들여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작가는 범을 통해 우회적으로 당대 지배층의 위선과 부도덕한 모습을 풍자함으로써 유교 사회의 지탄도 받지 않고 작품의 묘미와 흥미까지 더하면서 신랄한 현실 비판의 목적도 달성하고 있다.
호질(虎叱)
조선 후기에 박지원(朴趾源)이 지은 한문 단편소설. 작자의 연행일기인 열하일기(熱河日記) 관내정사(關內程史)에 실려 있다. 호질(虎叱)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호(大虎)가 사람을 잡아 먹으려 하는데 마땅한 것이 없었다. 의사를 잡아먹자니 의심이 나고 무당의 고기는 불결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청렴한 선비의 고기를 먹기로 하였다.
이 때 고을에 도학(道學)으로 이름이 있는 북곽선생(北郭先生)이라는 선비가 동리자(東里子)라는 젊은 과부와 정을 통하였다. 그녀의 아들들이 북곽선생을 여우로 의심을 하여 몽둥이를 들고 어머니의 방을 습격하였다.
그러자 북곽선생은 허겁지겁 도망쳐 달아나다가 그만 어두운 밤이라 분뇨 구덩이에 빠졌다. 겨우 머리만
내놓고 발버둥 치다가 기어 나오니 이번에는 큰 호랑이가 앞에 기다리고 있었다. 호랑이는 더러운 선비라 탄식하며 유학자의 위선과 아첨, 이중인격 등에 대하여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북곽선생은 정신없이 머리를 조아리고 목숨만 살려주기를 빌다가 머리를 들어보니 호랑이는 보이지 않고 아침에 농사일을 하러 가던 농부들만 주위에 서서 그의 행동에 대하여 물었다. 그러자 그는 농부에게, 자신의 행동이 하늘을 공경하고 땅을 조심하는 것이라고 변명하였다.
호질(虎叱)은 작품 글 뒤에 붙인 박지원의 논평을 통하여 만주족의 압제에 곡학아세(曲學阿世; 道에서 벗어난 학문을 닦아 세상에 아부함)하는 중국 인사들의 비열상을 풍자한 것으로 주제를 파악할 수 있다. 원래 중국의 어느 무명작가의 글을 연암이 약간 가필한 것이라 한다.
호질(虎叱)은 전체적으로 조선 후기 사정에 비추어 두 가지 주제의 설정이 가능해진다. 하나는 북곽선생으로 대표되는 유자(儒者)들의 위선을 비꼰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동리자로 대표되는 정절부인의 가식적 행위를 폭로한 것이다.
특히, 유자의 위선을 공격하면서 호랑이가 강상(綱常; 삼강三綱과 오상五常을 아울러 이르는 말)의 윤리를 절대 당위로 조작한 북곽선생을 꾸짖은 것은 유가 일반의 독선적 인간관을 풍자한 것이다.
호질(虎叱)의 구성에 있어서 연암은 음란한 곳의 대명사가 된 정(鄭)나라를 배경으로 하고 산, 집, 들판으로 장소를 옮기면서 황혼이 되어 음험한 계략이 꾸며지고, 밤이 되어 음란한 행위가 연출되며, 새벽이 되자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서는 극한 상황으로 이어지다가, 아침이 오자 다시 옛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교묘한 수법을 사용하고 있다.
산에서 육혼이 유자를 추천한 것은 들판에서 북곽선생과 호랑이를 만나게 하기 위한 복선이었으며, 들판의 분뇨 구덩이는 호랑이가 북곽선생을 잡아먹지 않는 상황에 필연성을 부여하고 있다.
호질(虎叱)은 그 형식에 있어 전기체를 완전히 탈피하였으나 순정하지 못하다는 비판도 받았다. 동음어를 교묘하게 활용하고 민담과 전설을 삽입하면서 생략과 압축으로 완성된 이 글은 연암 스스로도 절세기문(絶世奇文)이라 평가하였다.
▶ 虎(범 호)는 상형문자이나 회의문자로 보는 견해도 있다. 갑골문의 호(虎)자는 머리는 위로 향하고 꼬리는 아래로 향하며 몸에는 무늬가 있다. 중국인들은 호랑이의 머리에 왕(王)자가 크게 쓰여 있어서 호랑이가 바로 동물의 왕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虎(호)는 虍(범호 엄)부수로 ①범, 호랑이 ②용맹스럽다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범의 꼬리를 호미(虎尾), 용맹스러운 장수를 호장(虎將), 호랑이와 이리를 호랑(虎狼), 털이 붙은 범의 가죽이라는 호피(虎皮), 범에게 당하는 재앙을 호환(虎患), 범의 위세란 뜻으로 권세 있는 사람의 위력을 호위(虎威), 매우 용맹스러운 병사를 호병(虎兵), 범과 같이 날카로운 눈초리로 사방을 둘러 봄을 호시(虎視), 범의 침입을 막는 울타리를 호락(虎落), 범의 아가리를 호구(虎口), 범의 가죽에 어롱진 무늬와 같이 아름답게 변하여 빛난다는 호변(虎變), 씩씩하게 걷는 걸음을 호보(虎步), 능원에 세우는 범 모양의 돌조각을 호석(虎石), 사람이 범에게 잡아먹힘을 호식(虎食), 사나운 범을 맹호(猛虎), 다른 산에서 온 호랑이를 객호(客虎), 용맹스럽고 날래다는 비호(飛虎), 엎드려 앉은 범을 복호(伏虎), 큰 호랑이를 대호(大虎), 범이 죽으면 가죽을 남긴다는 호사유피(虎死留皮), 범이 먹이를 노린다는 호시탐탐(虎視眈眈), 용이 도사리고 범이 웅크리고 앉았다는 호거용반(虎踞龍盤), 범과 용이 맞잡고 친다는 호척용나(虎擲龍拏), 범에게 고기 달라기라는 속담을 호전걸육(虎前乞肉) 등에 쓰인다.
▶ 叱(꾸짖을 질)은 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입 구(口; 입, 먹다, 말하다)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七(칠, 질)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그래서 叱(질)은 ①꾸짖다, 책망하다 ②욕하다 ③소리치다 ④소리의 형용 ⑤혀를 차는 소리 ⑥성을 내는 소리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꾸짖을 핵(劾), 꾸짖을 가(呵), 꾸짖을 타(咤), 꾸짖을 갈(喝), 꾸짖을 매(罵), 꾸짖을 힐(詰), 꾸짖을 견(譴), 꾸짖을 책(責)이다. 용례로는 몹시 질책하여 꾸짖음을 질매(叱罵), 나무라고 욕설함을 질욕(叱辱), 꾸짖어 바로잡음을 질정(叱正), 꾸짖는 것을 질차(叱嗟), 꾸짖어서 나무람을 질책(叱責), 성내어 크게 꾸짖는 것을 질타(叱咤), 큰 소리로 꾸짖음을 가질(呵叱), 마구 꾸짖음이나 요란하게 꾸짖음을 난질(亂叱), 마주 대하여 꾸짖음을 면질(面叱), 화를 내고 꾸짖음 분질(憤叱), 큰소리로 꾸짖기도 하고 격려도 하고 하며 분발하게 함을 질타격려(叱咤激勵)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