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3년 8월 15일, 나폴레옹은 마흔네 번째 생일을 맞아 폭우를 뚫고 엘베강을 향해 말을 달렸다. 60만
의 적군과 효과적으로 대적하기 위해 먼저 선전포고를 해온 오스트리아군의 후위를 치려는 것이었
다. 나폴레옹은 엘베강의 다리를 건너면서 도대체 몇 번째 이 강을 오가는지 처연한 생각이 들었다.
병사들은 전투도 벌어지기 전에 이미 지쳐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프랑스에서부터 걸어서 멀리 폴란
드까지 갔다가 되돌아오고 있는 중이었다. 군대는 바우첸에서 멈추었다. 나폴레옹이 한창 작전을 구
상하고 있을 때 나폴리 왕 뮈라가 도착했다. 그는 영국과 협상하려다 실패한 직후라 화려한 왕의 복
장을 갖춘 채 달려왔다. 그는 나폴레옹의 첩보대가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파악하고 있음을 잘
알고 옷을 갈아입을 새도 없이 허겁지겁 달려왔을 터이다. 나폴레옹은 좋은 말로 구슬려 뮈라를 돌려
보냈다. 배신은 괘씸했지만, 당장 그가 이끌고 온 4만 명의 기병이 필요했던 것이다.
드레스덴에서 급보가 왔다. 프랑스군의 심장부인 그곳이 포위공격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나폴레옹
은 급히 말머리를 돌렸다. 다시 엘베강의 다리를 건너가면서 나폴레옹은 며칠 전 이 다리를 건너올
때 했던 생각을 되풀이했다. 병사들의 표정에 공황이 그득했다. 드레스덴에 도착하자 오스트리아‧프
로이센 연합군이 가까운 곳에서 50문의 집중 포화를 퍼부으며 밀집대형으로 진격해오고 있었다. 적
들은 25만 명이고 프랑스군은 10만 명이었다. 프랑스군이 설치해놓은 1200문의 대포가 일제히 불을
내뿜는 가운데, 뮈라의 기병대가 적의 좌측을 돌격하고 빅토르의 보병이 뒤를 따르도록 명했다. 그
틈에 네 원수의 대군이 일제히 진지를 뛰쳐나가 적들을 공격하도록 했다. 불과 한나절 만에 전투는
프랑스군의 압승으로 끝났다. 수십 명의 오스트리아 및 프로이센 장군들을 포함하여 1만여 명을 포
로로 잡았다. 가장 반가운 소식은 러시아의 차르 곁에 서 있던 모로 장군이 프랑스군의 포탄에 맞아
폭사했다는 것이었다. 조국을 배신한 자의 말로(末路), 오래도록 앓던 이가 빠진 기분이었다.
인천항의 곡물 저장고
우수한 디자인으로 각종 국제적 상도 받고
세계에서 가장 큰 벽화로 기네스북에도 올랐다.
1813년 8월 27일, 나폴레옹은 전위부대에 합류하여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연합군을 추격하기 위해 말
을 달렸다. 어제의 승리로 병사들은 밤새 사기를 회복하여 ‘황제 폐하 만세!’를 연호했다. 그러나 얼마
못 가 나폴레옹은 구토를 참지 못하고 말에서 내렸다. 그리고는 앞으로 고꾸라졌다. 이질과 감기가
겹친 것이다. 아. 이제 나도 늙었구나! 콜렝쿠르가 드레스덴으로 돌아가 당분간 요양할 것을 강력하
게 권했다. 나폴레옹은 하는 수 없이 마차를 타고 드레스덴으로 돌아왔다. 나폴레옹이 자리에 눕자
하루도 지나기 전에 사방에서 패전 보고가 올라왔다. 작센‧바이에른‧독일에서 징집된 병사들은 사방
으로 도망쳤다. 뮈라는 전투를 지휘하면서도 뒷구멍으로는 영국과 협상을 계속하고 있었다. 모든 장
군들은 나폴레옹의 사후를 대비하여 지나치게 부를 축적하고 있었다. 행정장관 다뤼는 보급품이 부
족하다고 보고했다. 나폴레옹이 조금만 소홀해도 되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멈추지 않고 계속 싸우
는 방법밖에 없었다.
1813년 8월 31일, 러시아‧오스트리아‧프로이센 연합군이 사방에서 드레스덴을 향해 포위망을 좁혀오
고 있었다. 베르나도트의 스웨덴군도 엘베강을 건넜고, 남쪽에서는 블뤼허의 군대가 진격해왔다. 나
폴레옹은 적에게 포위당하여 섬멸되지 않기 위해 즉각 드레스덴을 포기하고 라이프치히로 퇴각하라
고 명했다. 10월 14일, 라이프치히에 도착한 나폴레옹은 후위에 있는 네 원수와 뮈라 원수에게 당분
간 적을 속일 수 있는 작전명령을 하달했다. 적은 이제 프랑스군을 거의 완전히 포위했다. 단 한 군
데, 프랑스로 향하는 길만 열어놓았다. 도랑과 늪과 여러 지류를 건너야 하는 가장 험준한 길이었다.
적군과 싸우기보다 더 헤쳐나가기 어려운 함정인 셈이었다.
1813년 10월 15일 오전 4시, 남쪽에 포진하고 있던 오스트리아군이 100여 문의 대포를 발사하며 빠른
속도로 프랑스군을 공격해오고 있었다. 내일이면 35만 프랑스군을 둘러싼 50만 적군이 3천 문의 대
포를 발사하며 총공격을 가해올 것이다. 이 땅은 금세 피로 물들고 수십만 명의 시체로 뒤덮일 것이
다. 나폴레옹은 뮈라를 동반한 채 전선을 한 바퀴 둘러보며 각 부대에 필요한 지시를 하달했다. 10월
16일 오전 9시, 사방에서 일제히 포성이 들려왔다. 지난 27년 동안 수많은 전장을 누볐지만 나폴레옹
은 이처럼 요란한 포성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유럽의 모든 나라들이 나폴레옹을 옭죄고 있는 것이
다. 나폴레옹은 안전한 곳으로 피신하라는 콜랭쿠르의 권고를 무시하고 가장 치열하게 전투가 벌어
지고 있는 전초를 향해 달려갔다. 보병들이 총을 쏘며 적의 포대를 향해 내닫고 있었다. 놀란 오스트
리아군이 후퇴하고 있었다. 포냐토프스키의 폴란드군도 오스트리아의 기병대를 향해 총을 쏘며 돌격
했다. 첫날의 접전이 프랑스군의 승리로 끝나자 나폴레옹은 포냐토프스키를 원수로 진급시켰다.
1813년 10월 17일 오전 6시, 나폴레옹은 토른베르크 고지에 올라 적정을 살피고 돌아왔다. 콜랭쿠르
를 비롯한 참모들의 눈에 공포가 가득 고여 있었다. 나폴레옹은 쥐어짜는 듯한 위경련으로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그러나 잠시 후 나폴레옹은 다시 몸을 일으켰다. 그가 주저앉아 있으면 프랑스군도 모두
주저앉는다. 10월 18일 오전 1시, 나폴레옹은 전초를 시찰한 뒤 토른베르크 고지에 올랐다. 라이프치
히 전투의 사흘째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프랑스군 전사자보다 적의 전사자 수가 훨씬 많았지만 적은
금세 보충이 가능했다. 그들의 뒤에는 전 유럽이 버티고 있다. 제복이 찢어지고 얼굴에 피를 흘리는
장교가 달려와 작센군이 적군 편으로 넘어가 각중에 포를 돌려 프랑스군에게 포격을 가하고 달아났
다고 보고했다. 뷔르템베르크의 기병대도 군화를 거꾸로 신고 스웨덴 군대와 합류하여 프랑스군을
공격하고 있었다.
퇴로는 라이프치히 방향뿐이었다. 소르비에 장군이 다가와 어제 하루 9만 5천 발의 대포를 쏘아 이제
1만 6천 발밖에 남아있지 않다고 보고했다. 나폴레옹은 속히 에르푸르트 군창으로 달려가 포탄 보급
을 받으라고 명했다. 프랑스군은 침착하게 퇴각을 시작하여 10월 19일 오전 2시 라이프치히에 도착
했다. 나폴레옹은 작센 왕을 만나 작별인사를 했다. 작센군은 프랑스를 배신했지만 왕은 끝까지 신의
를 지켰다. 엘스트강의 다리를 너무 일찍 폭파하는 바람에 수천 명의 군사가 헤엄쳐서 강을 건너다가
상당수가 익사했다. 수영이 서툰 로리스통 장군도 함께 익사했다. 병사들은 총도 대포도 남겨둔 채
강을 건너왔다.
1813년 10월 23일, 나폴레옹은 에어푸르트 궁전에서 남은 병력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근위대 2만 명
외에는 전투가 가능한 병력이 별로 없었다. 네 원수도 가벼운 부상을 핑계로 파리로 돌아갔고, 매부
인 나폴리 왕 뮈라도 이탈리아로 도망쳤다. 아우 제롬의 베스트팔렌왕국을 비롯하여 라인연방의 왕
국들은 일제히 동맹국에 합류했다. 술트 원수의 군대도 스페인에서 철수했다. 나폴레옹은 좌절할 틈
도 없이 독일에 흩어져 있는 모든 군대에 함부르크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하달했다. 모두 모이면 10만
은 될 터이다. 나폴레옹은 서둘러 에어푸르트를 떠났다. 일단의 폴란드 장교들이 달려와 이제 자신들
도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나폴레옹은 끝까지 함께 싸워준 그들을 치하하고 요구를 들어주었
다. 그들은 일제히 ‘황제 폐하 만세!’를 외치고 말머리를 돌렸다. 이제 형제자매들까지 모두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1805년부터 나폴레옹과 함께 싸웠던 바이에른의 드 브레데 장군이 오스트리아에 합류한 뒤 하나우에
진을 치고 5만 병력으로 나폴레옹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폴레옹에게는 1만 7천의 근위대밖에 남아있
지 않았다. 첩보에 의하면, 드 브레데는 프란츠 1세에게 나폴레옹을 사로잡겠다고 장담했다. 드루오
장군의 포병대가 일제히 사격을 가하고 기병대가 돌진하자 나폴레옹을 사로잡겠다고 큰소리를 쳤던
드 브레데 장군의 군대는 무수한 시체만 남긴 채 퇴각했다. 1813년 10월 31일 나폴레옹은 프랑크푸르
트에 도착했다. 잠시 숨을 돌린 나폴레옹은 계속 말을 달려 1813년 11월 9일 오후 5시 파리 외곽의 생
클루城에 도착했다. 사랑하는 황후 마리 루이즈와 로마 왕이 나폴레옹을 기다리고 있는 곳이다. 비록
퇴각하기는 했지만, 그는 전투에서 한 번도 져본 적은 없었다. 나폴레옹은 새롭게 대군을 일으킬 계
획이었다.
출처:문중13 남성원님 글
첫댓글 진통의 정도를 측정하기 위한 등뼈진통주사 역시도 별 효험없이 하루 자고 나니 종전의 아픈 정도 그대로 입니다. 2박3일의 입원으로 척추협착증 의 수술 (비용 4백만원 이상) 이 불가피 할것 같은 지병으로 굳었나 봅니다. 건강이 제일임을 새삼 느끼고 있습니다. 금주말 까지 내내 가을비가 예상되어 기온차가 큽니다. 수술을 할지라도 근육보완에 좋다며 걷기를 최대한 하라는 병원의 사전 당부도 있듯 많이 걸으시며 건강관리 잘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