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파즈 (Topaz)
1969년 미국영화
감독 : 알프레드 히치콕
원작 : 레온 유리스
음악 : 모리스 자르
출연 : 프레데릭 스태포드, 다니 로방, 카린 도르
미셀 피콜리, 존 포사이드, 필립 느와레
존 버논, 퍼 약셀 아로세니우스, 로스코 리 브라운
클로드 자데, 미셀 수보어
거장의 후기작품은 필요 이상의 혹평 및 과소평가를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지간히 잘 만들지 않으면 전성기 시절 걸작들과 비교하여 평가절하 되는 경우가 많지요. 하지만 냉정히 작품을 분석해보면 잘 만들고도 혹평받는 부당한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보면 하워드 혹스의 유작 '리오 로보' 스탠리 도넨의 후기작 '어린 왕자' 스탠리 큐브릭의 '아이즈 와이드 샷' 프리츠 랑의 오리엔탈 2부작인 '벵갈의 호랑이'와 '인도의 무덤' 데이비드 린 감독의 '라이언의 처녀' 빌리 와일더 감독의 '페도라 '같은 영화들입니다. 이 영화들은 거장의 노련미와 솜씨가 엄연히 묻어나는 꽤 괜찮은 작품들인데 마치 한물간 거장의 기대에 못 미치는 범작 취급을 당하고 있습니다. 다 볼만한 괜찮은 영화들입니다.
알프레드 히치콕의 후기작에 속하는 '토파즈' 역시 그런 의미에서 재평가 받아 마땅한 작품이라고 보여집니다. 이 영화는 매우 재미있고 잘 만든 흥미진진한 첩보 스파이물입니다. 적어도 007 시리즈보다는 훨씬 스파이 영화로서 면모를 갖추었다고 봐요. 여자나 만나고 도박이나 하면서 가는 곳 마다 '본드, 제임스 본드' 라고 나 여깄소 라고 신분들 드러내고 총싸움, 주먹싸움이나 하는 비현실적인 첩보물 007과는 달리 '토파즈'는 치열한 머리싸움, 정보전, 전략싸움을 하는 훨씬 짜임새있는 스파이물입니다. 그런데 왜 혹평을 받았을까요?
사실 왜 '토파즈'가 혹평을 받았는지 이유는 대략 알고 있습니다. 기존의 히치콕의 걸작 '사이코'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레베카'와의 비교됨도 있을테고, 아무래도 빅 스타 배우가 안나온 것에 대한 점수깎임도 있을테고, 지금 기준으로 보면 한물간 냉전시대 부산물 같기도 하고 이미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나'나 '톤 커튼' 같은 더 괜찮은 첩보물들을 히치콕이 앞서 만들었고, 시사회때의 안좋은 반응이 혹평으로 이어지고... 뭐 이유야 많죠. 그런 여러가지 이유 때문에 마치 범작 첩보물처럼 평가절하 당하고 있습니다.
목숨을 건 망명을 하려는 가족
망명하려는 고위층을 쫓으려는 소련의 요원들과
그들을 방해하는 미국측 요원들
초반부터 서스펜스가 넘치는 내용
그렇지만 제가 평가할 때 이 영화는 결코 만만하게 볼 수 없는, 꽤 재미나고 짜임새 있는 좋은 첩보영화입니다. 1969년에 이만한 수준의 첩보물을 만들기는 쉽지 않았고, 동시대에서 우수한 첩보물에 속합니다. 007 아류작 만들기 바빴던 60년대에 이런 동서 냉전을 소재로 한 재미난 첩보물이 튀어나온 것은 히치콕이었으니까 가능하지요. '북북서..'나 '톤 커튼' 보다 흥미롭지 않았을 뿐이지, 거장의 솜씨가 잘 묻어나는 영화입니다.
국내 DVD는 127분 편집버전인데 시사회 반응이 안좋아서 144분짜리 영화가 127분으로 편집되어 상영한 버전 그대로 입니다. 하지만 144분 버전은 전혀 뺄 내용이 없는 꽉찬 영화로 오히려 1분 이라도 편집하면 영화가 훼손되는 좋은 편집의 내용입니다. 144분 기준으로 이 영화를 재평가하겠습니다.
'토파즈'라는 제목은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소련을 돕는 비밀 스파이 조직입니다. 프랑스의 고위층이 연루되어 있지요. 결국 그 조직을 파헤치는 것이 결론인 영화입니다. 이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서 영화는 3단계로 구성되어 있지요.
소련의 고위층인 쿠세노프 라는 인물이 미국에 망명을 요청합니다. 그는 아내, 딸과 함께 목숨을 걸고 미국 CIA의 도움으로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합니다. 초반부 덴마크에서 벌어지는 이 쿠세노프 가족 탈출작전은 역시 히치콕 이다 싶을 정도로 긴장감 넘치고 손에 땀을 쥐는 서스펜스의 묘미가 있습니다. 정적인 긴장감이 흐르는 이 긴박한 연출은 히치콕 감독의 장기지요. 가장 히치콕스런 내용이 초장부터 펼쳐지니 영화가 이미 흥미롭지요.
"OSS117' 시리즈 등 첩보영화 경험을 가진 배우
프레데릭 스태포드가 주인공인 프랑스 첩보원으로 출연
50년대 프랑스 인기배우 다니 로방이
중년의 아름다움을 과시하며 '금발머리 여성'의
명분을 나름 채운다.
미국 요원과 프랑스 요원의 협력이 이루어질지....
히치콕 영화에서 사실상 처음으로
인종에 대한 문제가 제기된다.
서스펜스가 수시로 출몰하는 재미난 영화
이후의 내용은 20여분 정도 지나서야 비로소 등장하는 주인공의 무대입니다. 명목상은 미국의 주미프랑스 대사관 직원이지만 실제로는 비밀 스파이인 앙드레 드보루(프레데릭 스태포드)의 활약상입니다. 그는 쿠세노프가 폭로한 소련과 쿠바와의 관계에서 벌어진 첩보내용을 파헤치기 위해서 뉴욕과 쿠바를 오가며 모험을 펼칩니다. 이 두번째 단락의 내용만 갖고도 충분히 재미난 한 편의 첩보영화가 완성될만 합니다. 즉 144분짜리 다소 긴 영화지만 오히려 3부작으로 만들만한 내용을 함축시킨 재미가 있습니다. 이걸 더 편집해서 127분으로 만들다니요. 훼손 그 자체지요.
뉴욕에서 앙드레에게 외주(?)를 받고 비밀 문서를 빼내려는 필립 드브와 라는 인물이 벌이는 작전수행은 굉장히 긴박감 넘치고 흥미롭습니다. 이 부분에서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에서 사용했던 사람은 보이는데 소리는 들리지 않는 기법을 적절히 잘 활용하고 있지요. 이 내용 한가지만으로 '007 위기일발' 전체의 하일라이트 만한 재미가 있습니다. 특히 필립이 앙드레에게 물건을 전달하는 장면도 짜릿하지요. 요란스럽지 않은 가벼운 액션속에 상당한 서스펜스가 담겨 있습니다. 필립이 흑인이었다는 점, 그리고 인종관련 이야기가 오간다는 점에서 히치콕 영화에서 정말 보기 드물게 인종차별을 거론한 점이 의미가 있습니다.
쿠바에서 벌어지는 내용은 히치콕 영화스런 금발머리 미녀는 등장하지 않지만 대신 앙드레를 돕는 여성 비밀요원으로 금발아닌 흑발의 매혹적 미인 카린 도르가 등장합니다. '니벨룽겐' 2부작에서 아름다운 여왕 브륀힐트 역으로 존재감을 보여준 카린 도르의 역할은 영화 전체의 1/3 에 해당하는 이야기에만 등장하지만 금발머리 주인공이 등장하지 않는 부분을 충분히 메꾸어 줄만한 강렬한 존재감과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임무 때문에 쿠바에 출장 다녀오겠소"
"거기 내연녀도 함께 있잖아요"
적진에 침투하여 위험한 미션을 수행하는 주인공
마치 나탈리 우드를 연상시키는 독일 미녀 카린 도르
'니벨룽겐 2부작' 에서 강렬한 존재감을 보여준 배우로
이 영화에서 분량은 적었지만 금발머리 여주인공을 대체할
강렬한 캐릭터를 보여준다.
마지막 3단락은 프랑스에서 벌어지는 신경전입니다. 여기서 프랑스의 실력파 배우 미셀 피콜리와 필립 느와레가 합류합니다. 두 배우의 네임밸류를 감안할 때 출연 분량이 좀 적긴 하지만 3단락에서 핵심역할을 하고 굉장히 중요한 인물이기 때문에 히치콕을 위해서 기꺼이 출연해준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아쉬운 점은 두 배우와 프레데릭 스태포드까지 3명의 대화가 불어가 아닌 영어로 진행된다는 점입니다. 프랑스의 두 배우, 그리고 프레데릭 스태포드 역시 프랑스 영화에 더 많이 등장한 배우임을 감안하면 조금 아쉽지만, 과거에는 영화 제작국가의 언어를 일관되게 사용했다는 점에서 이 영화만의 문제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이 영화에 대해서 캐스팅의 아쉬움을 이야기하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완전 반대입니다. 오히려 히치콕 영화에서 거의 완벽한 캐스팅이 이루어졌다고 봅니다. 우선 주인공 프레데릭 스태포드는 80년대 이후에는 우리나라에서 '듣보잡'이었기 때문에 캐리 그랜트나 제임스 스튜어트 등 일급 배우들이 등장한 히치콕 영화들과 비교해서 아쉬울 수 있지만 천만에요. 그가 누굽니까? 'OSS117'에 두번이나 출연한 전형적인 첩보물 맞춤형 배우입니다. 두 영화 외에도 '백만불짜리 사나이( L'homme qui valait des milliards, 67), '알텐느 공방전(Dalle Ardenne all'inferno, 68)' 등 유사장르에 주로 출연한 배우로 우리나라에도 당시 그의 그런 작품들이 개봉되었습니다. 적어도 제임스 본드 흉내내기에는 딱 적합한 배우였고 그때가 전성기였지요. 더구나 미국배우가 아닌 체코 출신으로 프랑스 영화에 출연하던 인물이었으니 미국에 상주하는 프랑스 첩보원으로 잘 어울리지요. 금발미녀 주인공이 없었지만 앞서 이야기했듯 카린 도르의 캐릭터가 어느 정도 채워주었고, 앙드레의 아내로 출연한 배우는 50년대 프랑스의 인기배우 다니 로방 입니다.주인공급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비중있는 금발여인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중년이 되었지만 아직 아름다움이 남아있는 이 여배우를 이렇게 나름 활용했고, 후반부에 중요한 역할을 부여하기도 하지요. 그리고 프랑스 단락에서 미셀 피콜리나 필립 느와레를 활용한 것은 화룡정점이었지요. 중요한 클라이막스 단락에 걸맞는 배우가 출연비중과 상관없이 무게감있는 캐릭터를 위해서 출연한 것입니다. 톱스타는 없었지만 역할에 맞는 썩 괜찮은 캐스팅이 잘 이루어졌습니다. 오히려 50대의 제임스 스튜어트가 무리한 20대 여인과 로맨스를 벌인 '현기증'보다 나아 보입니다. 그 외에도 미국 CIA 요원을 연기한 존 포사이드를 비롯하여 다수의 조연진들이 모두 자기 역할을 매우 잘 하고 있습니다. 씬 스틸러 급 캐릭터가 매우 많았던 작품입니다.
프랑스에서 벌어지는 '토파즈'의 두목을 찾는 두뇌게임.
3단락으로 연결되는 흥미로운 내용의 마지막 단원
분량은 적었지만 매우 중요한 캐릭터를 연기하는
프랑스의 두 명우, 미셀 피콜리(왼쪽)과 필립 느와레
후반부의 서스펜스도 흥미진진하다.
부부로 출연한 다니 로방과 프레데릭 스태포드
비밀 첩보원과 그의 아내
007 흉내내기 바쁜 시대에 히치콕은 그런 기류에 휩쓸리지 않고 폭력이나 총질 대신 치열한 머리싸움으로 일관한 첩보전을 흥미롭게 그려냈습니다. 배우들도 미국, 체코, 프랑스, 독일, 스웨덴 등 다양한 출신을 고루 기용했고 심지어 흑인 배우를 캐릭터로 활용한 진일보를 보여준 영화이기도 했죠. 거기다 히치콕스런 특징과 재미는 철철 넘쳐났고, 144분 어디에도 편집이 필요한 부분이 없었습니다. 저는 이 작품을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톤 커튼'에 이어 히치콕의 첩보 영화의 맥을 종결하는 수작으로 평가합니다. 캐릭터, 재미, 편집, 서스펜스 모두 훌륭했습니다.
'토파즈'는 꽤 잘 만든 재미난 알프레드 히치콕 영화입니다. 각 배우들이 어떻게 쓰여질까 구경하는 것도 좋은 묘미였고, 내용도 흥미진진했고, 초반부터 히치콕스런 서스펜스가 묻어났고, 007 같은 요란스러움 대신 치열한 머리싸움을 통해서 더 현실성이 있었고, 동서냉전이라는 그 시대스러운 소재를 '톤 커튼'에 이어서 잘 활용했습니다. 거장의 경륜과 솜씨가 잘 발휘된 내용이고 '영광의 탈출'의 원작자 레온 유리스의 원작을 함축하여 한 편의 영화로 잘 완성했습니다. 흥행이나 당시의 혹평때문에 평가절하될 작품이 전혀 아니지요. 60년대 냉전 스파이 영화의 걸작 '추운나라에서 온 스파이' 만큼은 아니지만 충분히 볼만한 당대의 첩보영화 수작입니다. 거장의 후기 작품이지만 충분히 이름값만큼 완성도를 보여준 영화로 재평가 받아 마땅하다고 봅니다.
평점 : ★★★☆ (4개 만점)
ps1 : 프레데릭 스태포드는 1979년 51살로 일찍 사망했지요. 007 아류작 배우들 중에서는 개인적으로 가장 '제임스 본드'에 닮은 이미지라고 생각합니다.
ps2 : 이름있는 배우들 외에도 전체 캐릭터 하나하나가 이렇게 살아 움직이며 인상적인 영화는 드물었다고 봅니다. 주인공에 치중하는 영화가 아닌 배우들의 협연과 조화가 잘 이루어진 영화라고 보여서 더 높이 평가하고 싶군요. 히치콕 영화에서 금발머리 여주인공 타령은 좀 안하는 영화도 있을 수 있잖아요.
ps3 : 히치콕은 30분 좀 넘어서 등장하는데 공항 장면에서 휠체어를 타고 등장합니다. 그런데 누굴 만나더니 그냥 벌떡 일어서서 악수를 하지요. (좀 코믹스럽게 느껴졌습니다.)
ps4 : 주인공 첩보원 앙드레가 제임스 본드처럼 전지전능하지 못했고 실수도 좀 하고 그래서 실망한 관객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좀 더 현실적인 인물이지요.
ps5 : 소련이 미국을 미사일로 공격할 수 있다는 다분히 '60년대 냉전시대'적인 내용이 흥미로웠습니다. 지금으로서는 황당한 내용이지요. 하지만 아직도 팽팽한 냉전이 이어지고 있는 우리나라 남북관계와 대입해보면 흥미롭긴 하지요. 동서 냉전시대는 오래전에 끝났지만 남북 냉전은 언제나 녹아내릴지.....
ps6 : 국내 개봉은 1972년 9월에 되었는데 단관시대인 것을 감안하더라도 서울 관객 6만명을 넘기는데 그친 저조한 흥행기록을 남겼습니다. 본토에서 외에 우리나라에서 조차 실패한 비운의 작품이지요. 당시 해외에서 별로였던 영화도 우리나라 개봉에서 상당수 흥행하던 시대였음에도요.
[출처] 토파즈(Topaz, 69년) 재평가 받을만한 히치콕 첩보 스릴러|작성자 이규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