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4년 4월 20일, 나폴레옹은 퐁텐블로城을 출발하여 5월 4일 엘바섬에 도착했다. 동맹국 대표단을
포함한 30명의 수행원들을 태운 7대의 마차가 프레쥐스항까지 여정을 함께했다. 수행원 중에는 엘바
섬에서 나폴레옹을 모실 궁정대원수 베르트랑, 드루오 장군, 캉브론 장군, 근위대 장교들, 그리고 3명
의 시종들과 4명의 비서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나폴레옹이 탄 마차가 프랑스 남부를 가로질러 항구
까지 가는 동안, 그를 알아본 군중들은 ‘황제 폐하 만세!’를 외치며 여전히 나폴레옹에게 충성심을 보
여주었다. 로리올 역참에서는 1개 중대병력이 도열해 있다가 나폴레옹에게 군례를 갖추었다. 인솔자
인 대령이 다가와 예를 올렸다.
“이제 나는 그대의 황제가 아닐세. 그대는 루이 18세 만세를 외쳐야 할걸세.”
“아닙니다. 폐하께서는 언제까지나 저희들의 황제이십니다!”
1814년 5월 4일 오후 2시, 엘바섬에 도착한 나폴레옹이 배에서 내리자 영국군 병사들이 이열종대로
늘어서서 경의를 표했다. 나폴레옹은 ‘이제야 제대로 쉴 곳을 찾았군.’ 하고 중얼거렸다. 부두에 기다
리고 있던 엘바섬 주둔군 장병들과 군중들은 달갑잖은 기색으로 말 한 마디 없이 나폴레옹을 맞았다.
일행이 시내로 들어서자 거리를 가득 메운 군중들이 열렬한 환호로 엘바섬의 새 영주 나폴레옹을 맞
이했다. 그러나 주민들이 함부로 거리에 내다버린 똥오줌에서 견디기 힘든 악취가 진동하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한 교회로 안내되어 엘바섬 영주 즉위식을 가졌다. 나폴레옹은 궁정대원수 베르트랑을
불러 몇 가지 시급한 지시를 내렸다. 그 중 가장 시급한 것은 똥오줌을 거리에 내다버리지 못하도록
금지시키는 조치였다.
5월 5일 오전 4시, 나폴레옹은 말을 타고 섬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섬이래야 233㎢의 크기에 주민은
3천명도 채 되지 않았다. 곳곳에서 길을 내고 다리를 놓아야 할 곳이 눈에 띄었다. 별장을 짓고 휴게
소와 전망대를 세울 적당한 장소도 발견되었다. 리오 마리나에서 만난 철광산 책임자는 나폴레옹과
함께 툴롱전투에 참전했었다며 반가워했다. 물리니에서는 왕궁을 세울 적지를 찾아냈다. 도시를 통
과하지 않고도 섬을 드나들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 그날 오후에는 근위대 척탄병 675명과 폴란드
기병 54명을 포함하여 나폴레옹을 호위할 군사 1600명이 도착했다. 나머지 장병 가운데는 첩자나 자
객이 끼어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나폴레옹은 단 몇 시간 만에 그린 설계도를 내주면서 당
장 왕궁부터 착공하도록 명했다.
1814년 5월 21일, 나폴레옹은 물리니에 급조된 왕궁에 입궐했다. 다음날 일출시각 직전, 나폴레옹은
프랑스 해안까지 불과 12㎞ 떨어져 있는 전망대에 올라가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자신을 감시할 5척
의 영국 함선이 항구에 정박해 있고, 저 멀리 50㎞ 밖에서는 고향 코르시카섬이 아물거리고 있었다.
루이 18세는 즉위하자마자 멍청한 짓을 저지르기 시작했다. 그는 오스트리아군에게 항복했던 뒤퐁
장군을 참모장에 임명했다. 뒤퐁은 10만 명의 병사들을 군에서 쫓아내고 1만 2천 명에 달하는 장교들
의 월급을 반으로 깎았다. 나폴레옹에 대한 간접적인 보복을 그런 식으로 저질렀던 것이다. 군의 사
기는 급전직하했다. 첩보원이 보낸 급보에 의하면, 루이 18세와 아르투아 백작은 나폴레옹을 암살할
자객들을 모으고 있었다.
새 왕궁은 온종일 붐볐다. 나폴레옹은 방문객들을 반가이 맞아 접견했다. 외부 방문객 중에는 영국인
들이 가장 많았다. 런던의회 의원 패저컬리와 버논은 나폴레옹의 건재한 모습에 큰 충격을 받았다.
화려한 제복을 입은 1백 명의 시종들이 깍듯한 예절로 나폴레옹을 모셨고, 수백 명의 장병들이 왕궁
을 호위하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당당한 태도와 어투로 내방객과 환담을 나누었다. 그의 기억은 책보
다 정확했고 입담은 듣는 이를 편안하게 해주었다. 전반적으로 런던에서 만났던 루이 18세와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현명하고 기품이 있었다. 나폴레옹은 엘바섬을 일신하기 위해 집집마다 화장실을 설
치해주고 감자를 심었으며, 빠른 시일 내에 도로를 개설하고 다리를 놓아 교통을 혁신할 터였다. 각
유휴지에는 토양에 맞는 올리브‧포도나무‧밤나무 등을 심어 주민들의 식생활을 풍성하게 하고 획기
적인 소득 증대를 도모할 계획이었다.
루이 18세는 빠르게 프랑스를 망치고 있었다. 국민들의 재산은 왕족과 귀족들에게 빠르게 귀속되었
고, 저녁마다 사치스럽고 호화로운 연회를 열어 국부를 탕진하고 있었다. 나폴레옹 휘하의 원수들과
장군들을 모두 축출하고 망명귀족들을 새 장군으로 임명했다. 탈레랑은 나폴레옹에게 앙심을 품고
있거나 적대적인 자들을 엘바섬 주변의 행정 책임자로 임명하여 호시탐탐 암살 기회를 노리고 있었
다. 나폴레옹에게 매년 주기로 했던 200만 프랑의 연금은 한 푼도 지급되지 않았다. 결국 그들과 싸워
이기는 방법밖에 없었다. 나폴레옹은 파리‧런던‧밀라노에서 발행되는 신문들을 모두 구독하여 다양
한 정보를 입수했다. 런던의 신문보다 파리의 신문들이 더 적대적이어서, 나폴레옹에 대한 추악한 모
함으로 지면을 도배하고 있었다.
1814년 9월 1일 오후 10시, 나폴레옹은 급보를 받고 항구에서 멀리 떨어진 해안으로 갔다. 배에서 막
내린 마리 발레프스카와 그녀가 낳은 나폴레옹의 첫아들 알렉상드르가 서 있다가 나폴레옹에게 와락
안겨들었다. 29세의 마리는 원숙한 여인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고, 10세의 알렉상드르는 금발의
곱슬머리에 모습은 나폴레옹을 꼭 닮아 있었다. 나폴레옹은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그들 모자를 반가
이 맞이했다. 나폴레옹은 마리가 자신을 위로해주기 위해 퐁텐블로城으로 찾아왔을 때 따뜻한 말 한
마디 않고 그녀를 돌려보냈다. 차마 초라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였다. 나폴레옹은 이번에도
그녀와 오래 함께할 수 없었다. 곳곳에 숨어서 나폴레옹의 동정을 살펴 루이 18세에게 고해바칠 첩자
들과, 소식을 들으면 마리를 폴란드의 첩자로 몰아 위해를 가할 오스트리아 황실 때문이다. 마리는
상굿도 그에게 바라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마리 발레프스카와 알렉상드르는 이틀을 머문 뒤 돌아
갔다. 그것이 나폴레옹이 가장 사랑했던 정인 및 자신의 첫 혈육과 가진 마지막 만남이 되었다.
탈레랑은 암살이 여의치 않자 나폴레옹을 대서양의 절해고도인 세인트헬레나로 유배할 공작에 착수
했다. 영웅이 역사를 이끌지 않을 때는 문재인처럼 저능하고 비열한 자들이 지배한다. 장병들에게 월
급을 줄 수 없을 만큼 재정이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감봉된 장교들이 루이 18세에게 분노를 드러내
며 나폴레옹에 대한 충성심에 변함이 없다는 밀서를 보내왔다. 비엔나에서는 나폴레옹을 엘바섬에서
몰아내자고 결의했다. 세인트헬레나로 유배하려는 것이다. 함께 나폴레옹을 적대시하면서도 동맹국
들끼리는 이권을 두고 갈등이 깊어지고 있었다. 영국은 러시아 차르의 폴란드 합병야욕에 제동을 걸
고,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이 작센을 차지하려는 계획에 반대했다. 모든 여건이 나폴레옹에게 손짓
을 하고 있었다. 어릴 때 보나파르트 집안에서 자란 치프리아니가 찾아와 탈레랑이 나폴레옹을 납치
하기 위해 결사대를 밀파했다고 알려주었다.
시간이 없다. 나폴레옹은 탈출계획을 세웠다. 파리로 가야 한다. 20년 공화정의 치적을 모두 지우고
프랑스의 모든 재산을 독점하려는 루이 18세와 그 추종자들로부터 민중을 구해야 한다. 천문에 정통
한 나폴레옹은 엘바섬을 봉쇄하고 있는 영국과 프랑스의 전함들에게 들키지 않고 탈출하기 위해 월
식기간을 이용하기로 했다. 1815년 2월 25일, 나폴레옹은 프랑스의 국민들과 군대에 내릴 포고문을
작성했다. 루이 18세와 귀족들의 권력 독점으로부터 국민들을 구하기 위해 봉기했다는 선언이었다.
병사들에게는 지난 25년 간 함께 이룩했던 프랑스의 위대한 영광을 되찾자고 설파했다. 1815년 2월 2
6일 자정, 나폴레옹과 1200명의 무장한 장병 및 4문의 대포를 실은 열다섯 척의 배가 엘바섬을 탈출
했다. 2월 28일 정오, 나폴레옹의 선단은 프랑스 해안에 상륙했다.
출처:문중13 남성원님 글
첫댓글 지난 6월21일(금) 한일동우회 신.구 임원진 점심초대를 해주신 안인환님께 대한 감사의 뜻으로 오늘(9/5/목) 조촐한 점심자리를 토방집에서 마련 하였습니다. 미국을 다녀온 얘기에서 부터 현 시국에 대한 다양한 세상사로 정담을 나누었고 늦게 합류하신 천우병님까지 함께한 즐거운 자리 였습니다. 평소 산행과 트레킹을 즐겨 하시는 일상이 늘 건강하시고 아름다운 늙음으로 가꾸어 지고 있었습니다. 막걸리 2병 의 거나한 낮술과 가을비 내리는 오후의 낭만이 함께 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