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의 가르침을 볼 것 같으면 `마니 이전에 가르치고 있던 불교`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겨지는 내용은 그림자도 없다. 마니의 가르침 속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산스크리트 어(범어)로 씌어진 불교 경전에서 전하는 불교가 없다.
버키트(Burkitt)는 다음과 같이 쓴다. "마니 자신의 가르침에는 불교가 그의 가르침의 구성 요소라는 흔적이 전혀 없다. 마니는 존경심을 갖고 부처의 이름을 받들지만, 그것은 그가 플라톤과 헤르메스 및 도리스메기스트의 이름을 받드는 것과 별반 다를 게 없다." 알프릭(Alfric)에 의하면 마니는 부처를 몰랐다고까지 말한다.이는 무슨 말인가? 마니가 받드는 부처는 도대체 누구인가? 마니는 도대체 누구를 부처라고 일컫는 것인가?
그리스도의 교회가 마니로부터 개종자를 받아들일 때, 그들더러 마니교의 가르침을 버리겠다는 서원을 하라고 했었다. 정통 그리스도의 교회에서도 네스토리우스파의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교회는 그들에게 "스키티아노스와 사라데스와 부처와 마니의 가르침을 끊어버립니다,"라고 말하게 하였다. 그 네 사람 이름의 순번이 같은 종교의 주요 인물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여기서 말하는 부처란 마니의 스승이었던 테레빈토스 밖에는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니의 직속 후계자는 마르 시신(Mar Sisin)이다. 시신을 희랍어로는 시시니오스라고 한다. 그는 투옥되어 있던 마니에게서 서품을 받아 순교하고, 자기를 `깨달은 자, 빛을 받은 자(부처)`라고 부르고 있었다. 불타(부처)는 산스크리트 어이며,그 뜻은 라틴어 일루미나투스(illuminatus)이다. 불타(佛陀-부처)는 산스크리트어인 `붓타`의 음을 베낀 것이다.
시신의 이름은 마니의 다른 초기 제자들의 이름과 함께 마니의 사망일(페마의 축일)에 언급된다. 시신 이외의 제자들은 토마스(주: 대체로 토마스 복음이라고 하는 그노시스 복음의 저자 토마스), 앗타스(주: 혹은 앗트, 앗타이라고도 한다.라틴어 이름은 아디만스(Adimans)이므로 앗타이를 12종도 중 한 사람인 `다두`와 동일시하는 것은 전혀 근거가 없는 얘기임)와 헤르메스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아디만스의 저서에 대해 언급한다. 그리고 그 제자들은 모두 부처라고 불렀다.
만일 마니가 말하는 부처, 즉 `빛을 받은 자`, `깨달은 자`가 테레빈토스였다면 마니교를 받아들였어야 하는데, 현재 옛 문헌 등으로 미루어 보건대 불교는 마니교안에 들어있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그보다는 오늘날 우리가 알고있는 부처의 생애는 대부분 마니교의 문헌으로부터 글자 그대로 베낀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게 대단히 많다. 우리가 지금 손에 들고 있는 부처의 생애는 후대에 상당히 많은 전설을 삽입하거나 손질한 것으로 본래의 모습이 왜곡된 것이다. 여기서는 그 본래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복원시켜 보련다.
부처는 `석가모니`라고도 한다. 석가모니는 샤카 족, 즉 스키타이 족의무니(성자)로 인도 백성을 가르치기 위해 서방에서 온 스승이다. 석가모니는 왕족 출신으로서 자칭 `왕자`라고 하던 마니와 같은 부류다.
석가모니는 마야 데비라는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 그녀는 슈트나 왕의 처(妻)로서, 자기가 남편의 도움 없이 아이를 가졌다는 것을 현몽을 통해 알았다. 결국 석가모니는 `동정녀`의 아들인 셈이다. 그의 모친은 아카시아 나무에 의지하여 아이를 낳았는데, 아카시아 나무는 가지를 늘어뜨려서 신생아를 받았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외경에 해당되는 `성서`에 실려 있다
(주: 성서는 사실상 책 한 권이 아니고 72권으로 되어 있다. 성서에서 최고의 저자는 천주 자신이다. 그것을 기록한 인간은 수단 및 도구의 역할을 했을 뿐이다. 작가는 천주께서 구술하시는 것을 받아쓰지도 않았으려니와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쓰지도 않았다. 자유와 개성과 교양을 지닌 상태에서 천주의 초자연적인 간섭과 감도하심에 의해 성서를 기록한 것이다.
`정경`이라고 하는 성서 72권을 지정 공인한 것은 가톨릭 교회가 종도들의 가르침에 따라 그대로 전해 온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정경 여부가 의문시된 것도 있지만 나중에 다시 그 정경의 성격이 인정되어 정경임에 틀림없다고 선언된 것도 있다. 16세기에 이르자 오랜 옛날부터 아무런 의심 없이 성신의 감도하심에 의한 정경이라고 한 책에 대해서는 `원 정경`이라고 하고, 또 전에 영감을 받은 것인지를 가늠함에 있어서 의혹이 있었던 몇 권의 책은 `제2 정경`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외경`이란 교회가 처음부터 정경으로 인정하지 않음에 따라 성서로 받아들이지 않은 책을 말한다. 그 외경들은 대부분 정경에 의거한 것이라고는 하나 정경에서 탈락된 것으로 유치하거나, 공상이거나 혹은 이단이다).
그런데 석가모니는 그 모친의 오른쪽 허리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는 `아름답고,빛나고, 보석(마니)과 같이 순수하며, 색동의 아름다운 옥양목 위에 놓였다`. 이 이야기는 그노시스의 `유아기 복음`과 `야고보 복음`에서 빌려온 것이다.
지혜가 있는 것으로 유명한 부자 아시다라는 노인이 신약 성서 속의 늙은 시메온처럼 찾아와서 갓 태어난 아기에게 인사하고, 그의 높은 운명을 예언한다. 노인 아시다는 그 아이가 오래 동안 살지 못한 채 증인이 되리라는 것을 알고는 눈물을 흘린다.
부처는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자신의 사명을 깨닫는다. 무화과나무는 복음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부처는 49일간 단식한다. 그리고 악인(마다)의 유혹을 받는다.마다는 부처에게 세상 영화를 보여주면서 열반에 들어가게 해 주리라고 약속한다. 부처는 그에게 저항하며, 암흑의 군주 군단으로부터 도망친다. 그는 자신의 몸이 빛나는 몸으로 변하는 것을 체험한다.
또 복음으로부터 빌렸음이 분명한 이야기도 있다. 예컨대 방탕한 아들의 이야기,태어날 때부터 장님인 자의 이야기, 우물에서 비천한 계급의 여자와 만난 이야기 등등.
부처는 그 후에 자신이 태어난 고향인 가비라 성(가비라 바스도)에 장엄하게 입성한다. 그는 그 동네의 장래를 예언한다. 제자들이 그의 주위로 모여든다.다바다따라는 배신자가 제자들의 무리에 들어간다. 부처의 죽음에 즈음하여 태양이 어두워지고, 별은 떨어지고, 번갯불이 번쩍이고, 태양이 흔들리며 움직이고, 무서운 바람이 지상을 휩쓴다.
석가모니의 전설(특히 <라리타 비스타라(Lalita Vistara)>라는 책)과 그리스도교의 위경(僞經)이 매우 닮아 있다. 이처럼 복음과 너무나도 닮은 기사(奇事)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는지.
마니는 인도의 북서쪽 박트리아 지방(소그드 지방)의 그리스, 스키타이게과 파르티아게의 왕국에서 그노시스주의를 가르치고 있었다. 또 기원 후 3세기에는 부처의 가르침이 두 갈래의 실크로드를 따라 중앙 아시아 전역에 퍼져 나갔다.
하나는중앙 사막과 고비 사막의 북부를 통해서 중국으로 통하는 길이며, 또 하나는 히말라야 산맥의 남쪽과 티베트로 이어진 길이다. 그 두 개의 길을 잇는 마을에는 3세기경에 만들어진 궁궐이 있다. 그 유적들은 폐허 속에 있다가 19세기에 발굴되었다.
그 스타일, 건축 양식, 장식, 얕은 부조(浮彫), 그림 등은 분명히 그리스와 로마 예술의 영향을 받은 이란 예술에서 온 것이었다. 예술가는 시리아에서 온 것으로 보인다. 거기에 있는 불상은 간다라 미술의 특징을 갖고 있다.
로브노(Lobnor)의 남쪽 미란(Miran)에 있는 불교 사원에는 폼페이에 필적하는 프레스코 화(畵)가 있다. 그 그림을 보건대 부처는 제자인 승려와 프리지아(주: 식물 이름) 모자를 쓴 수염이 없는 사람들, 천사처럼 날개가 달린 요정, 로마 풍의 사등립(四等立)이륜 전차에 둘러싸여 있다. 그 그림을 그린 자는 디타라는 사람다. 양식은 로마와 시리아 풍이다.
빅또르 골루보프(Victor Goloubov)는 "결론을 내리건대, 화가는 안티오키아 혹은 바그다니아의 공방에서 훈련을 받은 자가 아닐까,"라고 쓴다. 중국에 불교를 전한 것은 파르티아 인 또는 인도 스키타이 인으로, 아프가니스탄으로부터 온 이란과 그리스 문화권의 사람들이었다. 진(晋)나라의 도읍 낙양에 정착한 최초의 불교 공동체 창립자는 파르티아 인이었다.
감숙(甘肅) 서역의 오아시스 도시 돈황(敦惶)은 석굴 사원인 천불동으로 유명하다. 돈황에는 벽화도 잘 보존되어 있다. 영국인 오렐 스타인(Aurel Stein)과 불란서인 뻬리오(Pelliot)는 금세기에 수천의 `돈황 문서`라고 부르는 옛 사본을 발견하였다.
그 사본을 찾아냈을 때 현지의 불교승은 거기에 무엇이 써 있는지를 해독하지 못했다. 그들은 그 불교승에게서 `돈황 문서`를 사 들였다. 그 사본에는 불교 사본도 있었지만 상당량은 마니교의 사본이었다.
우선 731년에 이란어를 중국어로 번역한 것으로 `마니가 이룬 빛의 불타 종교의 교리`라고 하는 사본에 의하면, `빛의 부처인 마니는 2월 8일 서역의 나라에서 태어났다,`고 돼 있다. 같은 책에 관한 것으로 스타인 단편이라고 하는 다른 단편도 찾아냈다.
그들은 페르비어와 소그드 문자, 고(古) 투르크 문자, 위구르 문자, 중국어로 쓰여진 사본을 해독해 나갔다. 그것에 의하면 `빛의 두 원리에 의한 3가지 운동`이라는 종교가 설명되고 있다. 다시 성 아우구스티노에 의하면 마니교에서는 음악을 자주 사용했다고 하는데, `돈황 문서`를 보면 악보가 붙은 기도와 찬송가 집이 눈에 띈다.
라들로프(Radloff)는 불교도들이 사용하고 있는 것과 같은 고백의 기도에 관한 단편을 하나 하나 복원하였다. 공동체의 회칙도 눈에 띄었다. 입회자의 조건,사원을 만드는 것 등이 씌어 있었다. 외경의 복음서도 보였다. 부처의 생애에 관한 단편, 북경에서 발행된 `페르시아 종교의 미완성 성서`도 돈황에서 찾아냈다.그것은 필시 서기 900년경에 출판된 것으로 보이는 마니교의 책이다.
막대한 수의 마니교 사본이 중앙 아시아의 여러 불교 승원에서 나왔다. 그러나 불교의 사본과 마니교의 사본이 가르치는 내용은 똑같았다. 실로 불교승들이란 그 가르침에 따른 부처라는 마니였던 것이다. 마니인 부처의 제자들은 자기네에게 `마니교도`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그리스어와 라틴어의 역사가들이 그들을 마니교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으로, 그들은 자기들을 빛의 자식들이라든지, 부처(깨닫는 자)의 제자라든지, `빛나는 자`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
역사학자는 불교가 마니교보다 먼저 있었다는 것에 가로막혀 온갖 고생을 다한다. 결국 역사가는 마니교가 종교를 체계적으로 절충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다른 역사가는 위구르인에게 있어서 불교는 마니교와 공존하고 있었던 것 같다고 말한다.
앙리 샤를르 브지(Henri-Charles Puech)는 자신의 마니교에 관한 책에서 마니와 불교 문헌을 비교하였다. 스타인 단편이라고 부르는 `중국어 교리의 책`에는 도교와 불교와 마니교가 섞여 있다고 한다. 토로번(吐魯蕃)에서 찾아낸 단편에는`인류의 예언자 명단`으로 `셈, 셰무, 에노슈, 니코데, 에녹, 예수`의 이름이 보인다.
마니는 그림과 조각에 재능이 있었다. 덕분에 그는 아시아에서 유명해졌다. 마니는 인도스탄과 도르키스탄을 돌아다녔다. 도르키스탄 전역은 마니의 `빛의 종교`를 받아들였다. 마니교 공동체는 파르드게와 스키다이게 왕의 보호를 받으면서 중앙 아시아의 여러 왕국으로 퍼졌다.
도르판에서 찾아낸 사본에 의하면 마니의 후계자인 부처들, 즉 사라반(Saravan)과 이맘(Imam)이라고 하는 교회의 최고 지도자들의 지도에 따라 여기 저기에 `교회를 겸하는 수도원`을 세웠다. 마니자신은 사후에 `빛의 기둥`에 오르고, 다시 달과 태양에까지 가서 최후에는 `휴식과 기쁨의 나라`, `닐바나, 즉 열반`, `영원한 빛의 왕국`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도르판사본에 의하면 마니는 `예언자들의 낙인`, `최후 시대의 사도`라고 한다.
앙리 샤를르 브지는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과 같은 결론을 향해 조금씩 다가갔다. 그에 의하면, 예컨대 도르판의 근처에 있는 베제클릭(Bezeklik)의 불교 사원은 `의심할 여지없이 마니교의 사원`이었다고 한다. 그는 다른 중앙 아시아의 불교 사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었으리라. 그는 마니교의 전례도 연구하고 있었다. 그는 마니교의 전례와 불교의 전례의 관계를 조금씩 밝혀 나갔다.
마니교는 그노시스주의이며, 온 우주는 보편 원리로 인하여 살아 있다고 한다. 보편 원리란 세상의 영혼이며, 신의 빛이다. 빛나는 세상의 영혼은 이 세계를 구성하는 것을 비롯한 만물에 생명을 주어 살게 하고 있다. 어떤 생물이건 기쁨과 괴로움을 갖고 그 세계 보편의 영혼에 의해서 살게 되고 그 안에 있다. 그러므로 과일을 딴다든지, 야채를 채취한다든지, 나무를 자른다든지, 동물을 죽여서는 안 된다고 한다. 결혼도 안 되고 아이를 낳는 것도 안 된다고 한다. 그처럼 허무맹랑한 사고방식은 그노시스의 특징이며, 마니교도 그렇게 가르치고 있었다.
`선발된 자`, `깨끗한 자`는 하루에 한 차례 공동으로 식사를 한다. 그들은 먹기전에 먹을 것을 향해서 "당신을 베어낸 것은 내가 아닙니다. 당신을 자른 것도 내가 아닙니다. 당신을 반죽한 것은 내가 아닙니다. 나는 당신을 요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나에게는 당신이 고통받은 악에 대해서 책임이 없습니다,"라고 기도한다. 그들은 거룩한 밥공기를 들고 서서 혹은 앉아서 식사를 한다. 정해진 의식에 따라서 식사를 개시한다. 그들에 의하면 소화가 이루어지는 중에는 음식물 속에 갇혀있던 신의 혼이 풀려나 자기네 위장으로부터 하늘로 올라간다고 한다. 그들은 먹는 것을 통하여 갇혀 있던 빛인 신을 물질로부터 해방시킨다고 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식사는 신성한 행위이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먹을 것을 마련해 준 친절한 `구도자`들에게 용서를 베푼다.
다시금 빗슈는 불교승의 `고백으로 인도함`를 중앙 아시아에서 발굴한 사본과 비교하였다. 그는 그 두 가지가 같은 것을 모델로 해서 만들어졌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예컨대 마니교의 `선발된 자`는 매주 월요일 일동이 형제로서 모인 앞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한다. 불교승은 15일에 한번 빠디못카를 불러 같은 기도의 글을 사용하여 고백한다.
불교승의 죄는 모두 빛과 지혜(주: 그노시스식 지혜임)를 거부한 것으로 집중된다. 불교 사본으로 현존하는 것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중세 후기의 것이다. 즉,13세기부터 14세기의 것이다. 그보다 오래된 것은 이미 살펴본 돈황 문서 등의 마니교 사본뿐이다.
부처의 생애에 관한 것으로 가장 오래된 것으로는 산스크리트어로 된 시가 있는데, 그 제목은 `붓다-카리타(Bouddha-Charita)`이다. 인도에서 그것을 최초로 언급한 때는 기원 후 673년이다. 또 `라리타 비스타라(Lalita Vistara)`의 중국어판이 알려져 있지만 그것은 기원 후 6세기 것이다.
`미란다(Milanda)의 대화`는 기원 후 6세기의 중국어판으로 지금도 전래되고 있다. 그것은 인도의 왕 미란다가 어떤 불교승의 도움으로 회개하는 이야기다. 역사가는 그것을 가지고 미란다가 기원전 1세기에 살고 있었던 희랍 왕 메난드로스(Menandros)라는 결론을 내린다.
이는 다수의 다른 학자들이 제기하는 반론의 대상이다. 프르타르고스가 기원 후 2세기에 쓴 책에 메난드로스 왕의 생애가 적혀있어서 우리는 메난드로스에 대해서 알고 있는데, 그것은 부처와도 불교와도 전혀 관계가 없다.
이상의 것으로 미루어 마니교가 불교 쪽으로 흐른 것임을 안다면 모든 것이 처음으로 자연스럽게 이해되리라.
부처의 가르침은 서방으로부터 인도로 전래된 것이지, 인도에서 시작해서 서방으로 전래된 것이 아니다. 그 증거가 되는 예로 인도가 서방으로부터 문화를 흡수하여 자기 것으로 삼았던 것을 비롯한 다른 것이 예거되고 있다.
불교는 기원 후 3세기에 인도의 북서쪽 소그디아나에서 희랍계의 스키타이 인과이란계의 파르티아 인의 왕국에서 등장했다.
마니는 기원 후 3세기에 인도와 중앙 아시아에서 깨달은 자(부처)의 가르침을 폈다. 불교는 그노시스의 마니교가 아시아에 퍼진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부처는 진짜로는 마니이며, 불교의 가르침이라는 것은 마니의 가르침이 시대가 지남에 따라서 민중의 많은 전설, 신화, 미신이 섞여들어 그 가르침의 본질이 변질된 것의 형태로 발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로써 어째서 기원 후 5, 6세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인도와 아시아의 여기저기에 마니교와 불교의 승원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는지를 잘 이해할 수 있다. 또 어째서 그 시기에 미란다, 아소카, 부처의 전설과 신화가 만들어져서 기술되기 시작했는지도 잘 납득할 수 있다. 그 이야기들은 실크로드를 통하여 6세기에는 중국에도 달하여 한문으로 번역되었다. 그렇게 해서 당시의 불교승들이 복사한 8∼10세기 마니교에 관한 책 여러 권이 상술한 지역에 있던 승원의 폐허 속에서 발견된 이유를 이해할 수 있고, 또 그래야 모든 면에서 이치에 맞다. 이로써 다른 지역에서 통상적으로 발생한 사실의 자연스런 역사적 흐름과 자연스런 논리를 역사적 틀의 범위 안에서 찾을 수 있게 된다.
마지막으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억지로 밀어 부친 부처의 가르침을 잘 알지도 못하고 그대로 받아들인 역사의 배후에는 그리스도를 깎아 내리려는 의향이 작용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인도학의 권위자라는 에우게네 부르노프(Eugene Burnouf)는 아무런 증거도 없이 그리스도교가 엣센파를 통하여 인도에서 성립됐다는 것을 애써 인정하게 만들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와 정반대였다.
마니교는 기원후 3세기..정도에 등장하여 기존의 조로아스터교의 신앙에다가 불교, 힌두교, 기독교 등등 여러 종교를 혼합하여 만들어낸 종교... / 뭐하는 신부쉐이인지..모르지만, 일의 선후관계나 제대로 따져보고 글을쓰던지... 그리고, 퍼온 넘도... 대가리는 뻘로 달고 다니냐???
간다라 문화가 인도에 전해지면서... 그 때부터 붓다에 대한 조각상 등등이 많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그것은 신을 인격화 시키고, 조각하는 중근동의 경향이 영향을 미친 것이라 할 수는 있지만... 이 글 쓴 멍청한 신부쉐이처럼..해석할 일은 아니다... 원필이 띠벙아.... /
신부님이 불교의 원천을 창시자인 석가를 마니교 마니 로 잡은 것은 불교가 힌두교에 기원을 두고 있기에 사실에 어긋난다고 할수 있지만, 마니교와 사상적으로 지평 융합적인 면이 있다는 것(종교 다원주의)과 그리스도가 인도등에서 수학 했다는 이설에 대한 원인을 근본적 으로 규명한 점에서 휼륭한 글입니다, -
첫댓글 붓다의 탄생이 기원전 6세기라고 추정되며... 이것은 정확한 역사적 사실에 기초하지는 않았지만, 기원전 3세기 인도의 아소카 왕의 대대적인 불교부흥 정책을 고려한다면... 어느정도 신빙성있는 붓다의 탄생시기라고 보여지는데...
마니교는 기원후 3세기..정도에 등장하여 기존의 조로아스터교의 신앙에다가 불교, 힌두교, 기독교 등등 여러 종교를 혼합하여 만들어낸 종교... / 뭐하는 신부쉐이인지..모르지만, 일의 선후관계나 제대로 따져보고 글을쓰던지... 그리고, 퍼온 넘도... 대가리는 뻘로 달고 다니냐???
간다라 문화가 인도에 전해지면서... 그 때부터 붓다에 대한 조각상 등등이 많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그것은 신을 인격화 시키고, 조각하는 중근동의 경향이 영향을 미친 것이라 할 수는 있지만... 이 글 쓴 멍청한 신부쉐이처럼..해석할 일은 아니다... 원필이 띠벙아.... /
인도 철학사라도 한번 흝어보고 글을 퍼오던가...
병신새끼.. 아주 지롤을 해라. 하긴 기독교인으로서는 당연한 생각이겠지 ㅎㅎ 뇌 자체가 손상된 병신이니까.. ㅎㅎㅎ
얘는또 뭐한다고 여기와서 매를 버냐...?? 원필아, 니 주인 진석이는 잘 지내냐...???
피식^^
쪼개기는. 재섭는 새끼.
신부님이 불교의 원천을 창시자인 석가를 마니교 마니 로 잡은 것은 불교가 힌두교에 기원을 두고 있기에 사실에 어긋난다고 할수 있지만, 마니교와 사상적으로 지평 융합적인 면이 있다는 것(종교 다원주의)과 그리스도가 인도등에서 수학 했다는 이설에 대한 원인을 근본적 으로 규명한 점에서 휼륭한 글입니다, -
약점과 장점을 다 갖춘 접하기 힘든 휼륭한 글을 소개해 주어 고맙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