兵使張公漢相永世不忘碑
(병사장공한상영세불망비)
병사 장한상 불망비는 강진군 병영면 병영성 비석군중 유일한 철비로 비높이 90cm, 넓이 32cm, 두께 4.2cm의 그리 크지 않은 철비다.
이 비는 1714년(숙종40)에 세워졌으며, 비의 전면에는 ‘兵使張公漢相永世不忘碑(병사장공한상영세불망비)’라 써있고, 그 좌우에 ‘天彰南鎭 飢病咸蘇 開典雄蕃 卓世之恩(천창남진 기병함소 개전웅번 탁세지은)’이라 두줄로 나누어 씌여져 있다.
이는‘남쪽 진을 하늘에 드러내 굶주리고 병든이 모두 살렸다. 병사의 소임을 법전대로 펼치니 세상에 끼친 은덕 우뚝하다.’라는 뜻이다.
후면에는‘崇禎紀元後五十三年 甲午七月日(숭정기원후오십삼년 갑오칠월일)’이라 새겨 놓았다.
비의 주인공 장한상(張漢相; 1656~1724)은 조선 후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필경(弼卿)이고, 장시규의 아들이다. 1676년 무과에 급제하여 정략장군(定略將軍) 선전관(宣傳官), 진위장군(振威將軍), 훈련원정(訓鍊院正), 내금위장(內禁衛將), 희천(熙川)․자산(慈山)․옥천(沃川)․칠곡(漆谷)․회령(會寧) 등지의 수령을 두루 거치고, 1682년 통신사(通信使)로 일본에 갔다. 1684년 삼척포진영장(三陟浦鎭營將)으로 기용되어 울릉도에 잇따른 왜구의 침범을 막았다. 그 뒤 호남에 대기근이 들어 도적이 들끓자, 장한상이 부임하여 민심을 안정시켰는데, 이곳 주민들이 철비를 세워 송덕을 기렸다. 이후로도 함경북도병마절도사, 경기도수군절도사, 영변부사, 황해도병마절도사로 활약하였다. 경북 의성의 경덕사(景德祠)에 부친 장시규(張是奎)와 배향되어 있다.
병영이란 조선시대 지방군사 조직으로, 강진 병영에 있는 전라병영성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서남부 지역의 군사본부로서 큰 역할을 담당했던 곳이다.
조선 태종 17년(1417)에 쌓은 길이 1,060m 가량의 평지성인데, 현재 복구 공사가 한창이다.
조선 효종 7년(1656)부터 현종 4년(1663)까지 네덜란드선원 하멜이 표류하여, 7년간 이곳에 머물렀다 귀국하여 쓴 『하멜 표류기』로 우리나라 정치, 문화, 풍속을 세계에 알린 곳이기도 하다.
지금은 동문 밖에 있던 비석군을 병영성 복원공사로 인해 북문 안쪽에 옮겨 임시 보관하고 있다.
▲ 병영성 북문과 임시 보관된 비석군
첫댓글 늦게부터 읽기 시작해 잘 보고 있습니다. 철비는 석비에 비해 그 수가 많지 않을 뿐더러 세우기도 어려웠을 것
인데 그 만큼 주인공의 공덕이 남다르기 때문에 세워주지 않았나 싶습니다.
2번째 나주 윤치용 불망비 설명에서 사신(事臣)의 한자를 使臣으로 수정해야 할 듯 합니다.
최 선생님 연재가 끝나면 나도 그동안 준비해 둔 것 한 주제 연재해볼까 합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말씀대로 철비는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제가 조사한 바로는 현재 전국에 99개의 철비가 남아 있으며, 그중 우리 전라남도에는 34개의 철비가 있습니다. 다른 지방에 비하면 많은 편입니다.
그리고, 아주 세밀한 곳까지 보시고 지적해 주시는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使臣(사신)은 나라의 명을 받고 외국에 파견되던 신하를 뜻하는 단어로, 나주 금성관은 지방의 관청으로 외국에서 오는 사신(使臣)이 묵었다기 보다는, 중앙에서 지방에 일을 보러오는 신하라는 의미로 事(일 사)자를 써 事臣(사신)으로 써 보았습니다.
저의 글에 계속 관심 가져주시기 바라며, 연재 준비중인 내용이 기대됩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3) 만정판 춘향가
"<중중모리> 춘향모친이 들어온다. 이 소문을 늦게야 들었든다, 엎어지고 자빠지며 관문 앞으로
우르르 춘향 앞에 엎어지며 " 아이고 내 딸이 죽었네 아이고 이 몹쓸 년아 누가 너를 열녀라고
석비 철비 세월줄 거나 아이고 이게 웬일이냐 이방상존 호방상존 내 딸이 무삼죄요 칠십 당년
늙은 년이 ......
춘향전이 쓰여졌던 시기에 철비가 유행하였던 모양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