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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특집>
그들은 나를 ‘모모예’라고 불렀다
―어느 인도네시아 ‘위안부’ 피해자의 이야기 -
김영수
8월이 오면, 우리는 8월 15일 광복의 뜻을 새삼 돌아보게 된다. 우리처럼 쓰라린 일본 식민의 역사가 있는 인도네시아인들은 8월 17일을 독립의 의미로 깊이 새기고 있다. 두 나라 ‘위안부’ 아시아·태평양전쟁 중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명칭 및 표기 방법.(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 국제법정에서 결정. 이하 작은따옴표 사용.)
피해자들은 핏빛 한恨으로 무너진 가슴을 열고 8월 14일 ‘기림일’ 1991년 8월 14일 ‘위안부’ 피해자임을 국내외 최초로 밝힌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일을 기념하여 제정됨.
을 눈물 속에서 다시 맞는다, 그 뜨거운 8월을.
학문의 자유라는 허울 아래, 미국 하버드대학교 로스쿨 램지어Mark Ramseyer 교수가 발표한―논문의 흉내를 낸 허접한― 글 2020년 12월 국제학술지 『국제법경제학리뷰(International Review of Law and Economic, IRLE』on line 판에 「태평양전쟁에서의 성(性) 계약 (Contracting for Sex in the Pacific War)」으로 게재.
에서 태평양전쟁 당시 ‘위안부’ 피해자들은 성노예가 아니라 자발적인 성 노동자로 매춘을 했다는 억지 주장은 많은 파장을 일으켰다. 램지어 교수의 주장에 대해 학문의 자유는 보장되어야 하는 덕목임은 분명하나 학문은 진리와 진실에 근거해야 한다는 국내외 사회단체와 학계의 지적과 비판이 들불처럼 거세게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지적과 비판의 배경에는 램지어 교수의 ‘위안부’에 관한 글이 역사 사실을 철저하게 날조한 학문적 가치가 전혀 없는 휴지 쪼가리라고 평가내릴 수 있는 사료史料와 증언 등 객관적 자료가 차고, 넘치기 때문이다. 이중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인도네시아 ‘위안부’ 피해자의 객관적 사례와 자료도 그 차고 넘침에 일부분 차치하고 있음을 말하고 싶다.
이를 위해 본 글에서는 4부에 걸쳐 <기획특집> 인도네시아 ‘위안부’ 피해자들의 핏빛 과거와 참담한 현실 그리고 향후 방안에 대해 다루려고 한다. 여기에는 일본 패전 후 귀국, 귀향하지 못하고 돼지 몇 마리, 창이나 칼 몇 자루로 물건처럼 교환되었던 ‘위안부’ 피해자 사례, 인도네시아로 끌려간 한국 ‘위안부’들의 참상 그리고 ‘위안부’ 피해자 문제에 대한 제언 등을 포함하고자 한다.
우선 첫 번째로 인도네시아 ‘위안부’ 피해자 전체를 상징적으로 대표하는 마르디옘Mardiyem의 사례를 밝힘으로써 램지어 교수의 허튼 주장과 그에 부화뇌동하는 극소수 국내 학계 인사들의 얼빠진 행동이 얼마나 우스운 희극喜劇인지를 가감 없이 보여주고자 한다.
■ 슬픈 역사의 시작
1941년 12월 7일, 일본제국이 미국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서 태평양전쟁이 시작되었다. 점차 세력을 확장하던 일본은 전격적으로 동남아 지역을 침공하기 시작했고, 이에 대해 350여 년간 인도네시아를 식민 통치하던 네덜란드는 연합국 일원으로 일본에 대해 선전포고를 한다. 1942년 1월 10일 일본군은 동부 칼리만탄 지역을 시작으로 인도네시아에 대한 침공을 시작하는데 그 주목적은 전쟁 물자를 위한 천연자원, 특히 원유와 고무 그리고 주석朱錫 확보와 전쟁 수행을 지원할 강제 노동력 확보에 있었다. 1945년 8월 17일, 인도네시아가 독립을 선언할 때까지 일본의 인도네시아 식민통치가 진행되었다. 일본이 인도네시아를 장악했던 3년 5개월여 동안 약 17만4천9백 명의 육·해군 중심의 일본군이 인도네시아 각지에 주둔하게 된다.
한편 군인들의 성욕 해결과 군대 내 성병 확산 방지, 그리고 치안 유지 등을 위해 1932년 중국 상해에 최초로 위안소를 개설한 일본군은 1942년 3월 남태평양 일본군 사령부 지시에 따라 인도네시아를 포함해 광범위하게 동남아 전역에 위안소를 설치하게 된다. 인도네시아 진주 초기에는 일본군의 성적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 인도네시아에 어쩔 수 없이 잔류해 포로가 된 네덜란드, 오스트레일리아 그리고 영국 여성들이 희생의 대상이 되었다. 인도네시아 내에서 전선의 확산과 주둔 일본군 수의 증가는 ‘위안부’ 수요를 자연스럽게 확대되게 유도했다. 일본은 그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일본의 식민지 및 점령지역에서 여성들을 강제로 동원(위협, 폭행, 유인납치, 사기 취업, 사기 취학 등)한다. 그들은 한국인, 인도네시아인, 중국인, 말라야(말레이시아, 싱가포르)인, 태국인, 필리핀인, 미얀마인, 베트남인, 인도인, 유라시아인 그리고 태평양 군도에서 ‘위안부’를 강제로 차출하기 시작했다. 많은 관련 문건의 파기와 일본 정부의 폐쇄적 태도로 인해 현재까지 태평양전쟁 동안 일본에 의해 ‘위안부’로 강제 차출된 여성의 숫자에 관한 정확한 통계가 없는 실정이다. 다만, 최소 2만 명에서 최대 40만 명으로 추산한다는 다양한 의견이 있을 뿐이다.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이 수세로 몰리기 시작하면서 선박을 이용하여 중국이나 한국 등으로부터 인도네시아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을 위한 ‘위안부’ 차출이 점차 어려워졌다. 많은 선박이 연합군의 공격으로 격침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인도네시아 현지에서 ‘위안부’를 차출하기 시작하는데, 초기에는 일본군이 직접 관장하다가 점차 브로커 역할을 하는 현지 중국인들의 도움을 받기 시작한다.
인도네시아 현지 여성을 상대로 ‘위안부’를 차출・모집할 때 일본은 주로 식당 종업원이나 세탁부로 취업하는 것이라며 거짓 선전을 했다. 그리고 인도네시아 10대 어린 소녀들과 그의 부모들에게는 향후 독립된 인도네시아를 위한 인재 양성 일환으로 싱가포르나 일본에서 학업을 계속 시켜주겠다는 거짓 약속으로 ‘위안부’를 모집하기도 했다. 이는 한국·중국 등과 비교하여 색다른 방식이었다.
학업 계속이라는 거짓 약속은 주로 자바Java 지역에서 입소문을 통해 암암리에 확산되었다. 일본 식민통치 기관에서 말단 직책을 갖고 있으며 최소 초등학교 졸업 학력 이상인 13세부터 18세까지의 딸을 자식으로 둔 사람들이 그 대상이 되었다. 일본은 향후 독립된 인도네시아를 위해 헌신할 인재를 양성한다는 미명美名으로 딸을 둔 부모들을 집요하게 회유, 협박했다. 인도네시아 전역에 약 40곳의 ‘위안부’ 중간 집결지가 도시를 중심으로 개설되었다. 이를 통해 많은 인도네시아의 나이 어린 처녀들이 인도네시아 역내 또는 해외에 있는 일본군의 성노예로 끌려나가게 된다. 중간 집결지에서 일정 기간 체류 후, 어린 소녀들은 싱가포르와 일본에서의 학업 계속이라는 부푼 꿈을 안고 승선하게 된다. 그러나 배가 출항하자마자, 어린 소녀들에게 무자비한 성적 폭행과 강간이 자행되기 시작했고, 배가 일본군이 주둔한 지역까지 항해하는 동안 배 안 소녀들의 육체는 철저하게 유린당하게 된다. 순결을 지키기 위해 배에서 바다로 뛰어내려 자살하는 소녀, 돛대에 매달려 저항하는 소녀들로 배 안은 아비규환의 상황이 벌어졌다. 배가 목적지에 도착한 후, 소녀들의 몸은 성에 굶주린 일본군에 다시 내던져지게 되는데, 이때 소녀들은 이미 자포자기 상태가 된 후였다.
■ 슬픈 역사의 날조
지금이라도 유튜브youtube 검색창에 ‘ianfu’ <위안부>라는 일본어이며 현재 인도네시아에서는 ‘위안부’를 지칭하는 공식어로 사용 중.
또는 ‘mardiyem’을 입력하면 생존해 있는 혹은 작고한 인도네시아 ‘위안부’ 피해자들의 피 맺힌 증언을 차고, 넘치게 보고, 들으면서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이 어떻게 ‘위안부’로 끌려가고, 일본 군인에게 위안소에서 어떤 취급을 당했는지 그리고 지금까지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생생하게 파악할 수 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램지어 교수를 비롯한 일본 정부는 ‘위안부’ 피해자들의 원인과 실체의 역사를 부끄러움 하나 없이 철저하게 날조, 왜곡하고 있다.
여기 일본 정부와 램지어 교수의 허무맹랑한 날조와 왜곡을 완벽하게 뒤집을 수 있는 여러 사례 중 하나를 소개한다. 일본 총리를 역임한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가 자행한 객관적인 사례가 바로 그것이다. 그는 자서전 『I was Commander of 3000 Men at the Age of Twenty Three』
에서 23살 해군 중위였을 때 인도네시아 동부 칼리만탄 발릭빠빤Balikpapan에서 휘하 장병들을 직접 지휘하여 위안소를 건립했다고 자랑스럽게 밝히고 있다. 이는 일본 군부가 ‘위안부’와 위안소 문제에 직접 관여했다는 명확한 증거로 제시할 수 있는 객관적 자료가 되고도 남는다. 더 기막힌 내용은 나카소네 야스히로가 세운 발릭빠빤 위안소에서 고초를 겪은 인도네시아 ‘위안부’ 피해자인 수하르띠Suharti가 2009년 12월 2일 일본 방문 시, 공식 사과와 배상 요구를 위해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와 면담을 요청했으나 일방적으로 거절당 한 사실이 있다는 것이다. 겨울철 인플루엔자의 갑작스러운 유행이 면담을 거절한 구실이었다.
■ 슬픈 역사의 증언
이름이 마르디옘Mardiyem이라는 한 인도네시아 여성이 지난 2007년 7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일본인 시장市長이 획책한 취업 사기에 걸려들어 13세에 ‘위안부’가 되어 피 맺힌 삶을 살다간 여성이다. 마르디옘은 인도네시아 ‘위안부’ 피해자임을 최초로 등록했고, ‘위안부’ 권익을 위해 특히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와 배상 실현을 위해 일생을 바친 활동가이다.
필자는 인도네시아어로 된 그녀의 일대기를 연전年前 겨울에 우리말 번역을 끝냈고, 2021년 한국여성인권진흥원 소속 일본군 ‘위안부’문제연구소에서 출간을 예정하고 있다. 번역을 끝내고 느낀 소회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면서 마르디옘과 필자와의 시공時空을 뛰어넘는 인연을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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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건기乾期가 한창이던 어느 날, 고향인 인도네시아 중부 자바, 욕야카르타Yoyakarta를 떠나는 이제 겨우 13살 앳된 한 여자아이가 있었다. 유랑 극단의 가수로 만들어 준다는 남부 칼리만탄 반자르마신Banjarmasin 일본인 시장市長의 꼬임에 넘어가 반자르마신이라는 낯선 곳에 일자리를 찾는 48명 일행과 함께하는 출발이었다. 동부 자바, 수라바야Surabaya에서 배를 타고 자바해海를 이틀 동안 항해하여 반자르마신에 도착할 때까지 여자아이는 무대 위, 멋진 가수가 된다는 부푼 꿈에 들떠 있었다. 지금 가는 그곳이 그녀의 일생을 처참한 수렁으로 빠뜨릴 지옥 같은 일본군 위안소인지도 모른 채 자기보다 몇 살 더 나이 많은 소녀들과 함께 환한 미소로 가까이 다가오는 반자르마신 항구를 꿈인 양 배 갑판 위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37년 후, 1979년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3월 초순, 김포공항을 떠난 한국의 한 젊은이가 적도의 태양이 작열하는 반자르마신, 샴수딘 누르Syamsudin Noer 공항에 도착했다. 그렇게 마르디옘이 ‘위안부’로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겪었던 위안소가 있었던 반자르마신에 한국 청년은 남부 칼리만탄 열대림을 개발하는 한국 회사에 취업해 첫 해외 근무지로 도착한 것이다.
또다시 많은 시간이 흘렀다. 2020년 겨울, 이제 머리에 하얀 서리가 내린 그 한국 청년이 기막힌 인연의 끝자락에서 가수의 꿈이 짓밟힌 채, 철부지 13세 어린 나이에 강제로 일본군 ‘위안부’가 된 한 인도네시아 여인의 처절한 삶이 핏빛으로 담긴 책을 시린 가슴, 아린 손끝으로 번역을 끝내가고 있었다.
먼 밀림에서 발원해 남부 칼리만탄을 천천히 사행蛇行하다가 반자르마신을 관통하는 바리또Barito 강. 이 강물을 한 번이라도 마신 사람은 죽기 전 언젠가는 다시 그 강가에 서야 한다는 반자르Banjar족의 내려오는 이야기처럼, 한국 청년은 그 강가에 다시 선다. 그는 강 옆에 쪼그려 앉아 처절한 한恨으로 풀어내는 13세 소녀의 기막힌 지난 삶을 듣고 있었다. 바리또 강물은 여자아이의 큰 눈망울처럼 여전히 야자수 밑을 조용히 흐르고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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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주인공 마르디옘은 13세 되던 해인 1942년 취업 사기에 걸려 고향인 중부 자바, 욕야카르타를 떠나 칼리만탄 반자르마신에 있는 뜰라왕Telawang 위안소에서 3년여 일본군 ‘위안부’ 생활을 했다. 15세 때 임신이 되어 5개월 된 태아를 마취 없이 강제 낙태하는 쓰라린 경험과 위안소 일본인 감독의 무자비한 구타를 견디면서 점차 동료 ‘위안부’ 사이에서 중심 역할을 하게 된다.
마르디옘은 1993년 중부 자바 욕야카르타 법률구조단Lembaga Bantuan Hukum Yogyakarta이 ‘위안부’ 피해자 신고를 받을 당시 제일 먼저 달려가는 등 ‘위안부’ 문제 해결에 앞장섰다. 국내외에서 진행하는 ‘위안부’ 문제 회의에 적극적으로 참석해 인도네시아 ‘위안부’ 문제를 공론화하는 노력에 크게 이바지했으며, 줄기차게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와 정당한 배상을 요구해왔다. 인도네시아 ‘위안부’ 피해자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역할을 지속해오던 마르디옘은 2007년, 그녀의 한 맺힌 삶이 담긴 책, 『MOMOYE Mereka Memanggilku&』(그들은 나를 모모예MOMOYE ‘위안부’들에게 일본식 이름을 붙였고 마르디옘은 모모에(ももえ/桃花)라는 이름으로 불렀는데 마르디옘의 자바식 발음으로 인해 모모예(MOMOYE)가 되었음.
라고 불렀다)의 출간을 본 후, 그해 12월 20일, 향년 78세로 영면에 들었다.
이 책은 인류 보편의 가치인 인간애와 인권을 망각한 집단이 전쟁이라는 광기로 여성에게 자행한 집단납치, 집단강간, 집단유기 그리고 그 결과로 야기된 철저하게 파괴된 삶을 힘겹게 살아낸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중 인도네시아 한 여인의 처절한 생존 기록이다.
■ 슬픈 역사의 유산
태평양전쟁 시 강제 동원된 ‘위안부’에 관한 객관적인 사실이 차고, 넘침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의 교묘한 말장난과 억지 주장으로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공식 사과와 배상은 지금까지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한편 인도네시아 안에서 한국 ‘위안부’들의 흔적이 밝혀진 것으로는 수마트라 팔렘방Palembang 무시Musi 강가에 있었던 위안소의 한국 ‘위안부’ 상황과 그들을 관리·감독한 조직에 대한 문헌상 기록이 남아있다. 그리고 중부 자바, 암바라와Ambarawa 지역에 남아있는 위안소의 실제적 흔적을 들 수 있다. 특히 암바라와 위안소는 정서운 할머니(1924-2004)가 ‘위안부’ 생활을 했던 곳이다.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항복하고 인도네시아가 독립을 선언한 1945년 8월 17일 이후, 패주하는 일본군과 함께 한국 ‘위안부’ 중 일부는 귀국·귀향하는 기회를 잡았으나, 그렇지 못하고 인도네시아 각지에서 어쩔 수 없이 ‘현지화’된 한국 ‘위안부’도 상당수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들이 인도네시아 현지에서 어떻게 살다, 세상을 떠났는지 현재까지 알려진 바는 거의 없다. 몇 명이 현재까지 생존해 있고, 그들의 혈육에 대한 조사・연구 역시 전무한 실정이다.
2021년 4월 현재, 한국 내에 생존해 있는 ‘위안부’ 피해자 수는 15명을 기록하고 있다. 이제 그분들의 나이가 모두 90세를 넘었기 때문에 조만간 국내에 생존해 있는 피해자들은 모두 유명을 달리할 것이다. 그렇지만, 오늘도 생존해 있는 15명의 한국 ‘위안부’ 피해자들은 아직도 과거 잘못을 사죄하지 않고 있는 일본 정부에 대해 공식 사과와 그에 따른 법적으로 합당한 보상을 피맺힌 가슴으로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