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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를 간절히 사모하라 (룻2:1-13절)
본문은 룻기 전체가 대전환을 이루는 룻과 보아스의 만남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 만남의 계기는 룻이 보아스의 밭에서 이삭을 줍는 일에서 비롯되었고, 그 만남의 결과 보아스는 룻에게 그녀가 시모를 따라 유대 땅에 온 것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것이므로 하나님께서 상 주실 것이라고 축복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날개 이래로 피난 온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사되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신 날입니다. 이날에 예수님께 나아와서 그 품에 안기고 주님의 은혜와 보호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본문 1절에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친족으로 유력한 자가 있으니 그의 이름은 보아스더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베들레헴에 기근이 들었을 때에 왜 나오미 가족은 보아스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고 이방 땅인 모압으로 떠났을까요. 이것은 환난이나 고통이 올 때에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명의 샘물인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바닥까지 메말라버리는 세상의 지식에 의존하여 세상으로 가버리는 것을 상징합니다. 보아스는 유다의 후손으로 메시야 계보에 나오는 인물입니다. 특히 본문에서는 아주 능력이 있는 특별한 사람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유력한 자’ 라는 말 ‘이쉬 깁보르 하일’은 두 단어의 합성어입니다. ‘깁보르는 용사를 뜻히고, 하일은 재산이 많은 부자를 뜻하기 때문에 보아스는 재물이 많을 뿐만 아니라 도덕적으로 존경을 받으며 그 지방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보아스는 우리들의 몸과 마음이 쇠잔해 있을 때 우리가 반드시 만나야 할 전능하시고 선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일을 감당해 주실 힘과 능력을 가지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어려움이 올 때에 권능의 두루마기를 입으신 주님을 바라보며 은혜 받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엘리멜렉과 나오미가 보아스를 찾지 않았던 것은 그들이 독립심이 너무 강했고 자존심이 강하여 유력한 보아스가 친척이었지만 그 앞에 고개를 숙여 도움을 청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이들이 영적인 사람이 아니라 육적인 사람이며, 하나님 앞에 교만했음을 보여줍니다. 성경에 ’교만은 패망의 지름길‘이라 했는데 결국 모압에서 큰 실망을 느꼈으며 가슴 아픈 실패를 경험했습니다. 구속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습니다. 그렇지만 동일한 신앙을 가졌다고 해서 우리의 삶까지도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물질의 부요함을 누리지만 어떤 사람은 아주 가난하고 궁색한 삶을 삽니다. 어떤 사람은 늘 평안하지만 어떤 사람은 늘 불안해합니다. 즉 실패하는 신앙이 있고 성공하는 신앙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공하는 신앙을 소유하여 최대한 영적 특권을 누려야 합니다. 엘리멜렉이 실패한 첫 번째 이유는 약속의 땅 베들레헴과 이방 땅 모압을 육신의 안목으로 비교했기 때문입니다. 마치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가나안 땅과 소돔과 고모라 땅을 비교하여 거기로 내려간 것과 같습니다. 당시 베들레헴은 흉년이 들었지만 모압은 풍년이었습니다. 이들은 외적으로만 나타난 현상만을 비교하여 모압을 선택했기 때문에 실패한 것입니다.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성도의 삶과 땅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의 삶은 비교의 대상이 될 수도 없고 비교가 되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성도에게도 고난은 찾아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자신의 신앙을 점검해 보고 회개할 것을 회개해야지 순식간에 망할 세상의 형통을 바라보는 것은 어리석은 행위인 것입니다. 성경에는 죄인을 형통을 부러워하는 대신에 여호와를 경외하라고 가르칩니다.
*잠23:17 네 마음으로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라.
다윗도 실패한 적이 많았습니다. 그럴 때마다 다윗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성도는 세상의 부귀영화를 초개같이 여깁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한없는 은혜와 축복받기를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엘리멜렉이 실패한 두 번째 이유는 그가 세상의 힘을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자마자 곧 풍년이 든 모압 땅으로 이주했습니다. 그의 이러한 행위는 명백한 불신앙입니다. 육신의 판단에 의해 잠깐의 환난을 견디지 못하고 세상의 힘을 의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은 편지하기를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라고 하였고, 바울은 편지하기를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어리석은 것이니 기록된 바 하나님은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 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 지혜에 빠지면 안 되는 것입니다. 엘리멜렉이 실패한 세 번째 이유는 세상의 위안을 구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모압 여자 중에서 아내를 취했습니다. 이는 율법에 엄히 금지된 행위였지만 이방인의 땅에서 영원히 살기 위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이방 여인들을 맞이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엘리멜렉이 죽은 후 자신들의 불신앙을 깨닫고 회개하고 돌아왔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를 유발하는 이방 혼인을 강행했던 것입니다. 결국 이들은 두 아들까지 다 죽고 빈털터리가 되어 나오미와 룻만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습니다. 한 마디로 완전히 실패한 신앙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실패한 신앙인이 다시 성공의 길로 나아가는 길은 은혜의 자리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본문 2절에 룻은 나오미에게 ‘원하건대 내가 밭으로 가서 누구에게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서 이삭을 줍겠나이다.’라고 청합니다. 룻은 이방인인 자신들이 약속의 땅에서 살아갈 수 있는 길은 오직 은혜를 입는 것뿐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룻은 모압에서 살았던 모든 일들을 버리고 이제 하나님의 백성으로 출발을 하려 할 때에 은혜부터 먼저 구합니다. 아마도 룻이 은혜를 받기 위하여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을 것이며 기도의 응답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시모에게 이삭을 주우러 나가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추수 때에 들판에서 이삭을 줍는 일은 심히 부끄럽고 힘들고 천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늙은 시모를 모시고 살아가려면 양식이 있어야 하고 그 양식을 구하려면 천한 노동이라도 해야 합니다. 나오미는 베들레헴을 떠날 때에 모든 땅과 재산을 처분했기 때문에 살아갈 길이 막막했습니다. 유일한 선택은 젊은 룻이 남의 타작마당에서 이삭이라도 주워 연명하는 길밖에 없었습니다. 히브리 사회에서 모세 율법은 추수하는 자들로 하여금 밭의 가장자리에 있는 농작물의 일부를 남겨 두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룻은 이러한 율법의 혜택과 관습을 따라 양식을 구하기 위해 밭으로 나가고자 한 것입니다. 모세 율법은 가난한 자의 생계를 보장하기 위해 추수 후에 이삭을 줍는 자들의 권리까지도 보장하도록 규정하고 있지만 당시 백성들은 이 규정을 아예 무시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이삭 줍는 일을 금지하기도 했습니다. 룻은 모압 여인이기 때문에 모압에 대한 이스라엘의 감정이 좋지 못한 점을 고려할 때 이삭을 줍는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룻은 이방인으로서 당할지도 모르는 온갖 어려움과 냉대를 감수하고 ‘내가 누구에게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서 이삭을 줍겠다.’고 한 결심한 것입니다. 이 말 속에는 시어머니에 대한 룻의 효성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룻은 신실한 신앙이었을 뿐만 아니라 시어머니를 극진히 모시는 현숙한 여인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 나오는 자들을 환영하시고 친히 영접해 주십니다. 본문 3절에 ‘룻이 가서 베는 자를 따라 밭에서 이삭을 줍는데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더라.’고 하였습니다. 후대 유대 랍비들은 이삭줍기에 대한 규정을 정했습니다. ‘만일 추수하는 자가 보리나 밀을 벨 때에 한 줄기나 두 줄기를 놓쳐버리면 그것은 이삭을 줍는 자의 몫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세 줄기 이상 베지 않았다면 그것은 다시 주인에게 돌려져야 한다.’ 참으로 인색한 규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룻이 이삭을 줍기 위해 밭으로 갔을 때 그녀는 그 밭의 주인이 누구인지 전혀 모르는 상태였습니다. 밭의 주인에 대해 알 수도 없었고 알 필요도 없었으며, 그 누구도 그것을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룻은 ‘우연히’ 자기 집안의 친족 보아스의 밭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이 일은 룻의 입장에서는 우연한 일이었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그녀를 위해 준비하신 기회였습니다.
*시37:23-24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기뻐하시나니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할 것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룻이 우연히 보아스의 밭에 이르는 바로 그 시간에 4절에 보면 ‘마침 보아스가 베들레헴으로부터 와서 베는 자들에게 이르되’라고 하였습니다. 룻이 그 밭에 도착하여 이삭을 줍는 바로 그 시간에 보아스가 나타난 것입니다. 어찌 이것을 우연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룻과 보아스의 만남, 이것은 모든 일을 배후에서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의 섭리였습니다. 보아스는 종들과 인사를 주고 받습니다. 구약 시대에 히브리인들의 인사법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안부를 묻거나 헤어질 때 ‘살롬’이라고 인사합니다. 하나님께서 평강 주시기를 바란다는 의미입니다. 두 번째는 존경과 충성을 표시하는 인사로서 땅에 엎드려 절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아스와 그 종들은 관습적인 인사가 아니라 매우 자상하고 친밀한 인사를 했습니다. 특히 주인인 보아스가 먼저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라고 인사하였고, 종들이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화답하는 것은 보아스와 종들 사이에 서로 사랑하고 신뢰하는 굳은 신념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보아스는 주인으로서 많은 은혜를 베풀어 주고 종들은 보아스를 존경하고 신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제자들 사이에 굳은 신념과 은혜가 있는 것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보아스는 룻을 의식합니다. 그래서 그녀의 신분에 대해 추수를 관리하는 사환에게 ‘이는 누구의 소녀냐’ 라고 묻습니다. 이 말은 보아스가 룻을 눈여겨보고 이삭을 줍는 여러 사람들 중에서 특별한 관심을 나타내었다는 것입니다. 자기 밭에서 이삭을 줍는 자에게 베푼 호의는 그의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었습니다. 특히 룻은 한눈에 보아도 베들레헴 여인은 아니었습니다. 그동안 한 번도 본적이 없는 낯선 여인에 대해 보아스는 관심을 가지고 그녀의 신분에 대해 물었던 것입니다. 주인의 질문에 대해 종은 룻에게 호의를 베풀면서 좋게 대답합니다. 종은 첫째로 이 여인이 ‘나오미와 함께 모압 지방에서 온 모압 소녀’라고 하였습니다. 당시 베들레헴에서는 룻에 대한 이야기가 널리 펴진 것 같습니다. 룻이 여호와에 대한 신앙과 시모에 대한 지극한 효성이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던 것입니다. 종은 두 번째로, 룻의 근면성을 칭찬합니다. ‘아침부터 지금까지 잠시 집에서 쉰 외에 일을 계속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룻이 부지런히 일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사환의 말을 들은 보아스는 룻에게 자애를 베풉니다. ‘내 딸아 들으라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으로 가지 말며 여기서 떠나지 말고 나의 소녀들과 함께 있으라.’ 보아스의 이 말은 단순히 값싼 동정심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 룻이 수치심이나 굴욕감을 느끼지 않도록 대단한 친절을 베푼 것입니다. ‘내 딸아’라는 말 ‘빗티’는 자기 딸뿐만 아니라 지체 높은 어른이 젊은 여인을 부를 때 다정하고 친근하게 사용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밭에서 일하고 있는 여인들과 동등한 권리를 인정해 주었습니다. 즉 단을 묶는 여인들 틈에서 마음껏 이삭을 줍도록 했던 것입니다. 이는 만남의 축복입니다. 야곱이 하란의 우물 가에서 라헬을 만납니다. 이 일 때문에 야곱은 14년간 긴 세월을 참고 견디어 마침내 열두 지파의 족장이 될 수 있었습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감옥에 들어갔지만 그곳에서 바로 왕의 관원장들을 만나 애굽의 국무총리가 될 수 있었으며 자기의 전 가족을 대흉년에서 구할 수 있었습니다. 엘리사는 스승 엘리야를 만남으로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과 같은 능력의 선지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만남의 축복과 비교할 수 없는 기이한 만남이 있으니 곧 죄인된 우리와 예수 그리스도의 만남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자기에게 오는 사람은 누구든지 환영하고 영접해 주십니다.
*요6: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보아스는 룻에게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으로 가지 말며 여기서 떠나지 말고 나의 소녀들과 함께 있으라.’고 했습니다. 첫째는, 다른 밭으로 가지 말라는 것이고, 둘째는 여기를 떠나지 말라는 것이며, 셋째는 함께 있으라고 합니다. 같은 내용의 말을 세 번이나 반복하여 말한 것입니다. 보아스의 이 말들은 분명히 은혜의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룻이 시어머니의 허락을 받을 때에 약속한 말이 있습니다. ‘내가 누구에게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서 이삭을 줍겠나이다.’라고 한 말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룻의 소원과 기도를 들어주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당신의 품을 떠나지 말라고 하십니다. 주님의 교회를 떠나지 말라고 하십니다. 아버지의 선물이 도착할 때까지 머물라 하십니다.
*눅24:49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
보아스는 룻에게 ‘나의 소녀들과 함께 있으라.’고 했습니다. ‘나의 소녀들이란 추수하는 자들의 바로 뒤를 따르면서 그 베어 놓은 줄기를 묶는 여인들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보아스는 룻에게 어떤 특정한 위치를 지정해 주면서 그 권리를 인정해 준 것입니다. 이삭을 줍는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단을 묶는 여인들 틈에서 마음껏 이삭을 줍도록 은혜를 베푼 것입니다. 나아가 룻의 신변을 보호해 주었습니다. ’9절에 ‘그들이 베는 밭을 보고 그들을 따르라. 내가 그 소년들에게 명령하여 너를 건드리지 말라 하였느니라.’ 룻이 이삭을 줍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추수하는 일꾼의 바로 뒤를 따라가며 마음껏 이삭을 줍도록 하고 추수하는 일꾼들이 이를 제지하지 못하도록 명령했던 것입니다. 이는 특권 중의 특권입니다. 룻이 마치 그 밭의 주인인 것처럼 마음대로 활보하고 이삭을 줍고 원하는 만큼의 양식을 가져가도록 은혜를 베푼 것입니다. 또한 보아스는 룻이 이삭을 줍다가 목이 마르면 그릇에 가서 소년들이 길어온 물을 마시라고 하였습니다. 팔레스틴 지방은 물을 얻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종들이 들에 일하러 갈 때에는 하루 종일 마실 물을 미리 길어서 가지고 가야 합니다. 그 물을 마신다는 것은 감히 엄두도 못낼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보아스는 룻에게 이런 특권까지도 허락한 것입니다.
신자는 은혜를 받으면 겸손해져야 합니다. 룻은 자신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넘쳤다고 만족해하거나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10절에 ‘룻이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그에게 이르되 나는 이방 여인이거늘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보시나이까 하니’ 라고 하였습니다. 땅에 엎드려 절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나 왕 앞에서 취하는 자세입니다. 룻은 자신의 외모만을 보고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 보아스의 사려 깊은 인격에 대해 존경을 표한 것입니다. 전통적으로 히브리 사람들은 이방 사람들을 천하게 여겼고 율법은 이방인들과 혼인을 금지시켰습니다. 사실 율법이 이방인을 천시하여 혼인을 금지시킨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종교적인 순수성을 보존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왕상11:2 여호와께서 일찍이 이 여러 백성에 대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그들과 서로 통혼하지 말며 그들도 너희와 서로 통혼하게 하지 말라. 그들이 반드시 너희의 마음을 돌려 그들의 신을 따르게 하리라 하셨으나 솔로몬이 그들을 사랑하였더라.
그러나 히브리인들을 이 사실을 오해하여 이방인을 무조건 멸시하였으며 나중에 북이스라엘 백성들이 앗수르와 혼혈이 되자 그들과도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사실을 룻이 알았으므로 자신에 대하여 ‘나는 이방 여인인데 어찌 은혜를 베푸십니까.’라고 물었던 것입니다. 룻의 질문에 보아스는 두 가지 사실을 제시합니다. 첫째, ‘네 남편이 죽은 후에 네가 시어머니에게 행한 모든 일’이라고 했습니다. 아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시어머니를 지극한 효성으로 극진히 받든 것을 말합니다. 둘째,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이방인인 룻의 여호와를 향한 순수하고도 열정적인 신앙을 말하는 것입니다. 보아스는 룻에 대한 아름다운 소문을 이미 듣고 알고 있었으므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온정을 넘치도록 그녀에게 베풀어 주었던 것입니다.
보아스는 룻에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끝나지 않고 그녀를 축복하여 주었습니다. 12절에 ‘여호와께서 네가 행한 일에 보답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는지라.’라고 하였습니다. 보아스의 축복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연상하게 합니다. 일찍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일가 친척 본토를 버리고 가나안 땅으로 이주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나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라고 축복하셨는데 룻 역시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왔기 때문에 여호와의 큰 상급이 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지켜 주시며 은혜를 베푸시는 행위가 마치 어미 독수리가 그 넓고 강한 날개로 새끼를 안전하게 인도하고 보호해 주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보아스는 이 표현을 사용하면서 룻이 언약의 하나님을 자신의 피난처로 삼음으로써 자비로우시며 긍휼이 풍성하신 그 크신 하나님의 날개 아래로 인도되었다고 하였습니다. 보아스의 이러한 축복의 말은 룻에게 큰 은혜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룻은 13절에 ‘내 주여 내가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나는 당신의 하녀 중의 하나와도 같지 못하오나 당신이 이 하녀를 위로하시고 마음을 기쁘게 하는 말씀을 하셨나이다 하니라.’ 고 했습니다. 룻은 자신을 최대한 비하하면서 겸손한 마음으로 ‘당신에게 은혜 입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율법의 규정을 뛰어 넘어 룻을 관대하게 보살펴 주는 보아스의 선행에 대해 그 보살핌을 감사와 겸손의 마음으로 조용히 받아들이는 룻의 행동 속에는 겸손하게 하나님을 신뢰하는 신앙이 잘 어우러져 있습니다. 룻에 대한 보아스의 행동 역시 율법의 규정에 얽매여 행한 것이 아니라 그 율법의 정신을 온전히 이행하려는 신앙의 발로였습니다. 그래서 룻은 보아스를 향해 ‘내 주여’라고 부르면서 ‘내가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한다.’고 하였습니다. 룻은 보아스에게 최고의 존경과 감사로써 자신이 받은 큰 위로와 기쁨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모압 땅을 떠나온 이래로 이처럼 따뜻한 인정을 느껴본 적이 없는 룻은 그 무엇보다도 이방 여인을 여호와의 이름으로 맞이해 주는 보아스의 따뜻한 말 한마디가 그 어떤 호의보다도 더욱 큰 힘과 위로와 기쁨이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추운 겨울에 집이 없는 사람은 비록 판자집이라 할지라도 따뜻한 불빛이 흘러나오는 집과 그 집에 머무는 사람을 부러워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너무나 자명합니다. 그 집에는 음식이 있고 사랑이 있고 보호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생활에 깊숙이 간섭하십니다. 룻은 우연히 보아스의 밭에 이삭을 주우러 갔습니다. 거기서 보아스와 역사적인 만남이 이루어졌고 급기야는 보아스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룻을 향한 보아스의 배려는 일반 가정의 남편도 해줄 수 없는 놀라운 은총이었고 축복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이와 같이 우리의 삶을 간섭하십니다. 우리의 목자가 되시는 주님은 우리 삶의 완전한 보호자가 되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역경과 환난도 우리의 염려가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현재를 풍요롭게 하십니다. 보아스는 룻의 처지를 풍요롭게 해주었습니다. 창세기 12:3절에 보면 ‘아브라함에게 가축과 은과 금이 풍부하였더라.’고 했습니다. 가나안 땅에 흉년이 들어 모든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을 때 아브라함은 큰 부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가난한 삶 가운데서 자기에게 선교헌금을 보내준 빌립보 교인들을 향하여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고 축복했습니다. 하나님은 또한 우리의 복된 미래를 예비하십니다. 보아스는 룻의 장래도 보장해 주었습니다. 일꾼들에게 일부러 보리를 버리라고 하면서 룻의 내일의 삶을 보장해 주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도 우리의 장래를 보장해 주시는 것입니다. 인간은 아무도 자기 장래에 대해 알 수 없습니다. 잠언23:17-18절에 ‘네 마음으로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라 정녕히 네 장래가 있겠고 네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분명히 우리의 앞날에 막힘이 없이 복된 삶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그 은혜가 내 인생을 유복하게 하고 장래에 소망을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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