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하인드 스토리] 두예 편: 제4회 모든 꿈을 이루고
(사진설명: 벽화로 보는 진 나라 사회상)
제4회 모든 꿈을 이루고
오 나라를 멸한 후 두예는 그 무공으로 작위를 받고 당음현후(當陰縣侯)에 책봉되었으며 식읍(食邑)도 9천 6 백 가구까지 증가되었다. 두예의 아들인 두탐(杜耽)도 정후(亭侯)에 책봉되고 식읍 1천 가구와 비단 8천필을 받았다.
사은을 표시하고자 입궐한 두예가 황제에게 아뢰었다.
“소신의 선조들은 모두 문관이고 소신도 말을 타지 못하고 활을 쏘지 못하는 선비입니다. 소신에게는 장군이 적합하지 않으니 무관을 내려놓겠습니다.”
황제가 웃으며 말했다.
“당음후가 말을 탈 줄 모르기에 추봉거를 하사하지 않았소? 장막에서 전략을 세우고 천리 밖에서 승부를 결정하는 그대가 말을 타지 못하고 활을 쏘지 못한다 한들 무슨 문제가 있겠소? 그대는 천하가 아무리 태평해도(天下安定) 전쟁을 잊으면 반드시 위기가 찾아온다(忘戰必危)고 말하지 않았소? 당음후가 군비를 강화하고 학교를 차려 강한(江漢) 일대의 백성들이 모두 그대를 아주 따른다고 들었소. 그대는 퇴임할 수 없소.”
두예는 잠깐 뭔가를 생각하고 나서 또 말했다.
“소신은 건강이 좋지 않습니다. 목이 굵어지는 병이 있습니다. 전에 강릉을 공격할 때 오 나라 사람들은 나를 미워해서 개 목에 박 바가지를 걸고 그 위에 소신의 이름을 썼습니다. 또 혹이 생긴 나무를 보면 나무 껍질을 벗기고 그 위에 ‘두예경(杜預颈)’이라고 새겼습니다. 퇴임을 윤허해주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전쟁 후 당음후는 수리시설을 건설하고 땅의 경계를 확정하면서 많은 좋은 일을 해서 오 나라 사람들이 지금은 그대를 모두 ‘두부(杜父)’라 부르지 않소. 짐은 당음후가 형주를 지키면서 오 나라 사람들을 위로했으면 하오. 그러니 더는 퇴임을 말하지 마시오.”
두예의 얼굴에 근심의 빛이 어린 것을 보고 황제가 말을 이었다.
“퇴임 이야기는 이제 그만 하고 우리 즐거운 이야기나 합시다. 당음후는 왕제(王濟)가 말을 좋아한다고 애마벽(愛馬癖)이 있다 하고, 돈을 모으고 돈을 좋아하는 화교(和嶠)는 돈 벽(癖)이 있다고 말하는데 그럼 하나 물읍시다. 사람들이 그대를 두무고라 부르고 그대의 머리 속에는 없는 것이 없다고 하는데 그럼 당음후는 무슨 벽(癖)이 있으시오?”
두예가 대답했다.
“소신에게는 <좌전(左傳)> 벽(癖)이 있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왜 퇴임을 생각하겠습니까? 소신은 <춘추좌씨경전집해(春秋左氏經傳集解)>를 아직도 다 쓰지 못했습니다.”
황제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좌전> 벽이라! 당음후는 어딜 가나 그 <좌전>을 읽고 연구한다고 들었소. 보아하니 과연 <좌전>에 빠지셨구려! 이제는 싸울 일이 거의 없을 것이니 공무 여가에 그대의 집주를 쓸 시간이 많을 것이오. 짐은 그대가 무공을 세우는 일과 저서를 펴내는 일을 모두 중하게 여기는 것을 알고 있소. 오 나라를 멸하고 천하를 통일했으니 무공은 이미 세웠고, 이제부터는 시간을 더 많이 들여 저서를 펴내시오. 짐이 그대를 지지하리다.”
두예는 하는 수 없이 형주로 부임해갔다. 그는 머리 속에는 오직 <좌전>만 있고 자신의 주장을 저서로 펴낼 생각에만 골몰했지만 그럼에도 백성들에게 이로운 일이라면 두예는 여전히 진심과 열성으로 임했다.
당시 형주의 물길은 한수(漢水)에서 강릉(江陵)까지의 1천여 리(里, 1리=0.5km)에 달했고 강릉의 북쪽에는 통항이 가능한 수로가 없었다. 그리고 원강과 상강의 합수목에 위치한 파구호는 뒤에 산을 두고 강을 끼고 있는 험준한 곳이어서 형주의 만인(蠻人)들이 험준한 지세를 이용해 조정에 맞서고 있었다.
두예는 민력을 동원해 양강(楊江)을 파기로 작심했다. 하수(夏手)에서 파릉(巴陵)까지 이르는 양강은 길이가 1천 여 리에 달하는데 장마 때는 장강의 넘치는 물을 받아 큰 물의 피해를 줄이고 평소에는 수로로 사용할 수 있었다. 이 일에서도 두예는 크고 작은 일을 모두 꼼꼼히 직접 챙겼다. 대장군의 풍모가 없다고 비웃는 사람들에게 두예는 이렇게 말했다.
“대우(大禹)와 후직(后稷)도 모두 부지런히 일해 일을 성사시켰는데 그 목적은 바로 세상을 구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들을 본보기로 하고 있습니다!”
두예가 이렇게 착실하게 일하자 남방의 백성들은 너도나도 두예를 칭송했다. 두예는 현지와 백성들에게 이로운 일을 많이 함으로써 자신에 대한 오 나라 사람들의 견해를 완전히 바꾸었던 것이다.
이렇게 대단한 사람임에도 두예는 여전히 권세가들의 비방을 받을 것을 걱정해 늘 조정의 권세가들에게 선물을 주었다. 사람들이 그러는 두예를 이해하지 못하고 물었다.
“당신은 황실의 친척이고 거기다가 무공이 하늘을 찌르는데 왜 그런 소인배들의 비위를 맞추려 하십니까?”
두예가 대답했다.
“무슨 이익을 바라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 다만 다른 사람들의 모함을 받지 않기 위해서요.”
“취미가 없는 사람과는 사귀지 말라. 그런 사람에게는 진정이란 없을 것이니”라는 말이 있다. 순진한 두예는 공무의 여가에 경전에 묻혀 있었다. 노후에 두예는 <춘추좌씨경전집주>와 <석례(釋例)>를 펴냈다.
두예의 비서감(秘書監) 지우(摯虞)가 그의 저서를 높이 평가해 말했다.
“좌구명(左丘明)은 원래 <춘추(春秋)>를 위해 <좌전>을 써서 역사사실로 <춘추>를 해석했지만 후에 <좌전>이 단독으로 전해지면서 <춘추>보다 더 유명해졌습니다. 나리의 저서도 <좌전>을 위해 쓴 것이지만 그 참신하고 창조적인 내용이 어디 <좌전>의 내용에만 그쳐 있습니까? 그러니 후세에 반드시 단독으로 전해질 것입니다.”
과연 두예가 최초로 <좌전>을 위해 주를 단 <춘추좌씨경전집주>는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청(淸)나라 사람들은 두예의 이 <집주>를 <십삼경주소(十三經注疏)>에 편입시켜 이 <집주>는 후세 사람들의 <좌전> 연구에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오늘날도 여전히 아주 높은 학술적 가치를 가진다. 많은 사람들은 이 <집주>를 읽고 나서야 오 나라를 멸하고 중국을 통일한 군대 통수 두예 장군이 원래는 최초로 <좌전>에 주해를 쓴 학문의 대가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람은 반드시 죽게 된다는 것을 알면 마음이 여유롭게 되는 법이다. 생과 사를 깨달은 두예는 일찍부터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전에 공무로 형산(邢山)을 지나다가 자산(子産)의 무덤이 여전한 것을 보았다. 그것은 그가 박장(薄葬)을 주장해 간단하게 장례를 치렀기 때문이다. 묘도(墓道)는 뒷부분만 흙을 덮고 앞부분은 비워두어 보물을 묻지 않았음을 보여주었다. 군자는 자산의 고상함을 우러르고 소인배는 취할 이익이 없음을 알아 그의 무덤은 천 년이 지나도록 그대로 남아 있었다. 내가 죽은 후 동쪽으로 이릉(二陵)을 모시고 서쪽으로 궁궐을 바라보며 남쪽으로 이수(伊水)와 낙수(洛水)가 보이고 북쪽으로 백이(伯夷)와 숙제(叔齊)의 무덤이 보이는 수양산(首陽山)의 남쪽에 묻으라. 무덤의 규모는 자산대부(子産大夫)와 같게 하고 관재와 부장품, 장례는 모두 근검의 원칙에 따라 치르라.”
후에 두예는 사예교위(司隶校尉)로 임명되었으며 작위도 더 높아졌다. 승진한 두예는 낙양으로 돌아오다가 등현(鄧縣)에 이르러 갑자기 병사한다. 그 때 그의 나이 63세였다. 두예의 자손들은 두예의 유언에 따라 그를 수양산에 묻어 하늘과 땅이 다할 때까지 옛 사람들과 함께 하도록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