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룡폭포
강 문 석
폭포는 그동안 줄곧 생각해왔던 것과는 그 모습이 판이하게 달랐다. 그래서 흡사 꿈속을 헤매고 있는 것처럼 몽환적이었다. 마치 하늘에서 쏟아지듯 곧추서 내리꽂히는 폭포를 마주하자 지금까지 내 머릿속에 기억되었던 폭포의 이미지는 가뭇없이 사라졌다. 현직에 있을 때였으니까 그동안 한세대 세월은 족히 흘렀으리라. 그땐 직장 산악서클에서 천성산을 올랐고 그 무리에 끼어 폭포를 처음 만났던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된 노릇인지 당시의 폭포는 폭포라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로 가느다란 물줄기가 흡사 암소 오줌줄기처럼 흘러내리고 있어서 크게 실망했던 기억을 안고 살아왔었다.
8년 전 폭포를 안고 있는 도시로 이주한 후에도 그러한 연유로 난 의식적으로 폭포를 외면하고 있었다.
기억에 각인된 초라한 모습에다 폭포는 천성산터널이 지나고 있는 산자락에 있다는 것까지 떠올린 때문이다. 내원사 여승 지율이 도롱뇽을 앞세워 국고 십 수 조를 거덜 낸 경부고속철 터널 반대사건은 벌써 십년이 지났지만 충격이 컸던 만큼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아이러니하게도 국가통치권자까지 부산시청 앞마당에서 단식투쟁을 벌이는 지율을 찾아가 손을 잡으면서 판을 키웠고 그렇게 인기영합에 매달린 자의 비열한 행태에 뜻있는 국민들은 너도나도 실망하거나 분노했었다.
대도시에 접한 신도시는 산업체 유치를 통해 재정형편이 좀 나아졌는지 ‘양산8경’을 요란하게 떠들어댔다. 그 안에는 홍룡虹瀧폭포도 들어있었다. 철저하게 외면했던 폭포를 오늘 찾은 것은 순전히 자동차 정기검사 때문이었다. 폭포에서 머지않은 검사소는 손님이 몰려들어 한 시간 정도 대기해야 된다했고 그 시간에 가까운 폭포나 다녀와야겠다며 찾아 나섰던 것이다. 일전에 봄비가 내린 탓도 있겠지만 폭포에서 쏟아져 내리는 물줄기는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의 장백폭포만큼이나 우렁찼다. 가히 이 정도 수량이라면 천 마리의 용이 폭포 아래에 살다가 무지개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전설을 믿어도 좋을 것 같았다.
3단 폭포의 1단은 높이가 80척이지만 2단은 46척 3단은 33척밖에 안되니 1단과 2,3단 길이가 서로 비슷함을 알 수 있다. 능선에 자리 잡은 화엄늪은 천성산이 원래 물이 많은 산이란 걸 알려준다. 그래서 폭포로 연결된 땅속의 수맥은 마치 가압장치가 달린 수도관처럼 끊임없이 폭포로 물줄기를 뿜어댈 수 있을 것이다. 폭포에 바짝 붙여 들어선 관음전은 작품사진에 매달리는 입장에선 눈에 가시가 아닐 수 없다. 예로부터 절은 대부분 삼천리금수강산 명당자리에 들어섰고 이곳 사찰도 폭포의 비경에 빠져 들어섰겠지만 관음전만은 폭포의 자연미를 크게 훼손하고 있어서 너무 심했다는 생각을 줄곧 해왔었다.
그러면서 이렇게까지 해서라도 불교에 문외한인 사람들에게 관세음보살을 주불로 모신 사찰 당우를 알리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생각도 들었다. 우리나라에 보살을 모신 당우로 관음전이 많이 세워진 까닭은 관음이 모든 환란을 구제하는 보살일 뿐 아니라 그의 서원이 철두철미하게 중생의 안락과 이익에 있고 불가사의한 인연과 신력으로 중생을 돕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믿지 않는 사람으로선 도무지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이곳 홍룡사 사찰 창건에도 원효대사와 의상대사가 빠지지 않았다. 북의 금강산까지 전국 방방곡곡으로 이어지는 대사들의 사찰 창건 스토리는 많이 뜨악하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좀 갖다 보태야 절은 유명해질 수 있을 터이니 어쩌겠는가. 허황되긴 마찬가지지만 ‘천성산’이란 이름이 붙은 내력도 한번 살펴보자. 원효대사가 이곳에서 당나라의 승려 1천 명에게 화엄경을 설법할 때 낙수사라는 이름으로 절을 창건하였더란다. 당시 승려들이 이 절 옆에 있는 홍룡폭포에서 몸을 씻고 원효의 설법을 들었다 하여 이름을 낙수사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그 당시 산 이름은 원적산이었다고 한다. 그랬던 산이 1천 명이 모두 득도하여 성인이 되었다고 해서 천성산이 되었으니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원효는 산에다 89암자를 지어 1천 명의 대중을 가르쳤으며 당시 각 암자에 흩어져 있는 대중을 모으기 위해 큰 북을 사용했다는 것도 믿거나 말거나이다. 그 북을 매달아 두었던 집북재와 화엄경을 설법하던 화엄벌이 지금도 이곳에 남아 있다고 기록으로 전한다. 깎아 세운 듯한 바위를 흐르는 폭포수는 흡사 하얀 눈처럼 사방으로 비산하고 있었다. 청명한 날이면 오색찬란한 무지개가 하늘로 솟는다고 붙여진 폭포의 이름이지만 오늘 그런 풍광까지 욕심을 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평일인데다 날씨마저 완연한 봄으로 넘어가느라 여우비까지 흩뿌리고 있었지만 폭포를 찾는 사람들의 발길은 끊이지 않았다.
산신각 아래 위치한 아치형 다리에서 바라본 폭포는 옛 기억에 심한 혼란을 안겨주면서 탄성을 자아내게 했다. 폭포는 산 정상을 넘어온 물기둥이 곧추서 떨어지는 형국이었다. 흐린 날씨에도 탐방객들은 그 신비스러운 폭포의 자태를 열심히 카메라에 담고 있었다. 싱글이나 커플로 온 이들까지도 셀카봉을 이용하여 폭포를 배경으로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추억을 남기고 있었다. 예정에 없던 폭포탐방은 승용차 검사 때문에 이루어졌기에 새삼스레 차에 고마운 마음이 든다. 오늘 내가 가진 것이라곤 스마트폰 하나뿐이다. 폭포 앞에서 두 여성이 열심히 포즈를 취하며 상대방을 촬영해주고 있어서 기다렸다가 부탁했다.
나의 폰을 받아든 중년 여인은 약간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갈 때가 다 된 노인네가 어디다 쓰려고 이러나'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인터넷카페에 올리기 위해서라는 말은 차마 밝힐 수가 없었고 스스로 움츠러들어 고마움도 목례로만 가볍게 표하고 말았다. 폭포를 내려서서 사찰 마당으로 접어들었다. 짙푸르게 싱싱함을 자랑하는 대숲을 빼곤 흐린 날씨와 아직은 겨울에서 온전히 벗어나지 못한 계절 때문에 액정화면 속 영상은 무채색에 가까운 톤으로 나타났다. 절집을 나서자 폭포를 조망하기 위해 앉힌 '가홍정'이 나타났다. 우렁찬 폭포소리는 정자 밑 주차장까지 따라오며 탐방객의 발걸음을 붙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