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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 : 2005년 7월 24일 일요일 낮예배(11시) 진행중...
곳 : 전남 무안군 운남면 내리 원동 화평교회 예배당
이제 딱 4년을 채우는 설교시간. 사람 수가 없는 건 여전하지만 그 때와 달라진 것이 있다면, 기적같이 몇 명의 성도를 만났다는 사실이다. 전에 있던 교회에서 목사의 행위 설교에 치가 떨리도록 질려버린 YJ집사님이 오늘도 변함없이 편안한 얼굴로 앉아있고, 교회 사이에서 요주의 인물로 새롭게 급부상한 MK집사님이, 자기도 같이 가고 싶다며 따라나선 C형제님과 앞뒤로 얌전히 앉아 있다. 그리고 요즘 따라 찬송가 악보 보는 일이 더 까막까막해진(가만~ 내가 지금 어디를 칠 차례지?) 사모는 어떻게 하면 이 손 떨리는 일에서 벗어날 수가 있을까를 상상하며, 중간에 누가 예배하러 왔는지는 안중에도 없는 얼굴로 열심히 부채질하며 앉아 있다...... 뭔 일이 일어날 때가 됐는데... 하는 생각을 뒤로 하고 오늘도 강단에 올라선 오목사, 요한복음에서 사마리아 여인을 찾아온 예수님을 전하고 있는데...
교인1 : 목사님! (벌떡 일어서서 더 이상은 못 참겠다는 목소리로, 울먹이는 것도 같은 목소리로) 그동안 우리 교인들이 목사님에 대해서 참을 만큼 참았습니다. 이젠 더 못 참겠습니다. 교인들이 목사님을 좋아하는줄 아십니까? 다 싫어합니다!
목사 : 언제 나를 사랑해 달라고 한 적이 있습니까? 예수님 한분만을 사랑하자고 한 설교가 그렇게도 못 참을 만큼 싫었다는 말씀입니까...? (순간 그 옛날의 설교시간이 생각났는지 아주 차분한 어투로)집사님께서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본데 말씀하십시오(그리고는 얌전히 앉아서 들을 준비를 하고 있다).
교인1 : 목사님은, 하늘나라는 이 땅에서 받는 복과 상관이 없다고 말씀하시는데, 우리는 복 받은 것이 많이 있습니다.왜 없다고 하십니까? 목사님은 어떻게 영만 이야기를 합니까? 육도 있지 않습니까? 육이 있어야 영도 있는 것 아닙니까? 목사님은 신비주의입니다. 지금이요~(참 답답하다는 어투로) 얼마나 과학이 발달한 시대인데...
목사 : 요한복음 3장 6절에 있습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고 했기에 그 말씀을 그대로 한 것입니다. 육으로는 ‘영’이 될 수 없고 성령으로 난 ‘영’도 ‘육’이 될 수 없기에, 육은 육이고 영은 영이어서 둘이 섞일 수 없는 다른 세계라고 전한 것입니다. 성령으로만 거듭나서 영되도록 일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알아차리고 좋아하고 반가워하는 사람이 영이고, 그렇게 일하시는 것을 거부하고 싫어하면서 왜 사람을 무시하고, 사람의 열심을 그토록 우습게 여기냐고 반감을 가지는 사람은 육입니다.
헌금으로도 안되고, 전도로도 안되고, 뭘 해도 안되고, 오직 주의 십자가의 공로로 말미암은 성령으로 거듭나서 영이 된다고 했습니다. 영이 되면 헌금해도 죄인이고, 전도해도 죄인이며, 뭘 해도 죄인인줄 알게 됩니다. 그런 죄인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 내버리지 않으시는 사랑은 오직 십자가에서만 나오게 된다는걸 깨닫고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사랑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제 설교를 집사님 맘대로 들은 것입니다. 집사님은 늘 뭔가를 해야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고, 예수님의 행위로만은 부족해서 집사님의 행위를 더 보태야만 구원된다는 사고방식으로 들으니 그렇게밖에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교인1 : 목사님이 수준이 있는 분이라는 것은 제가 인정합니다. 그러나 우리같은 시골사람들 하고는 안맞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수준높은 설교는 우리하고는 안맞아요. 도대체가 무슨 소린지 모르겄소.
목사 : 제가 보기에는 수준 때문에 못 알아듣는 것이 아니라 서로 관심사가 다르다고 보여집니다. 설교하고 성경 보는 제 관심사는 예수님이 무슨 일을 하셨는가를 살피는데 있습니다. 그런데 집사님의 관심사는 그것도 살펴야 하지만 그것으로 끝나면 안 된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렵사리 세워놓은 교회가 부흥되어야 동네에서 교인들 체면도 살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믿는 자가 누려야할 복이라고 여기는 것이 아닙니까?
교인2 : 예배드립시다--
교인1 : 목사님은 계속 설교하쇼. 나중에 다시 따로 만나서 이야기합시다.
목사 : 계속 설교하겠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예배는 저의 것이 아닙니다. 더 나아가서 교회는 목사의 것도 아닙니다. 예배도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이고, 교회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목사는 다만 그 사실을 증거할 뿐입니다. 목사는 교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달라고 청했기에 온 것뿐입니다. 더 이상 목사의 입에서 나오는 설교를 듣기 싫어한다면, 그러니까 저 목사한테서는 더 이상 들을 것이 없다고 판단된다면 다른 목사를 데려다가 그 일을 시켜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제가 전하는 복음 듣기를 거부하고 싫어한다면 내일이라도 당장 짐을 쌀 수 있습니다... 설교 계속하겠습니다...
목사가 루스타임까지 적용해 가면서 설교를 마치고 내려오는데, 준비된 듯한 (젊은)질문이 이어진다.
교인 2 : 저희 아버지께서 설교 도중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에 대해서 사과를 드립니다. 그리고 무례하다 하지 않으시고, 잘 받아주신 점을 고맙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여쭙겠습니다. 목사님은 시골마을 사람들의 신앙을 무시하는 것 같습니다. 그동안 힘들지만 힘든 가운데서도 신앙을 잃지 않고 생활해 오신 이 분들의 믿음을 왜 무시하는 발언을 하십니까?
예를 들어 목사님의 설교 중에 “---그렇게 새벽기도 많이 하고 열심히 신앙 생활한 결과가 이것밖에 안되는 것이냐, 이 세상에서 구하고 살아온 결과가 이 정도라면 이제는 정신을 차려야 한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은 그런 것과는 관계가 없다”고 하셨거든요. 이런 말씀들이 시골사람들의 신앙과 생활자체를 무시하는 거라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목사 : 저는 설교 중에 시골사람 도시 사람 차별한 적이 없습니다. 시골에 살든, 도시에 살든,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고 자기를 사랑하는 일에 골몰하는 사람들이 저주를 받는다는 취지로 설교한 것입니다. 자기가 기도한 덕에 복 받았다는 식은 자기 행함에 취해있는 것이고 자기열심에 취해서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시골에서 어렵게 살면서 믿기에 그것이 더 순수한 신앙이라고 보는 것도 잘못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도 알아줘야 하지만 그 십자가를 믿는 자기도 함께 알아달라는 소리 밖에는 안 됩니다. 그것은 복도 아니고 믿음도 아니라고 가르친 것입니다......
교인 2 : ......그리고 목사님의 설교 중에 사람들이 “죄 안짓기 경쟁을 하고 죄 감추기 경쟁”을 한다고 하셨는데 저는 이때까지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거든요. 그리고 복을 받기 위해서 신앙생활 하지도 않습니다. 저도 기복적 신앙은 개인적으로 싫어합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앉아 있는 사람 모두 다 그런다는 식으로 설교하시던데요. 저는 정말 아니거든요.
목사 : 자매님은 자매님의 행위 중에 죄가 아닌 것도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 부분에 대해서는 실수한 것이 됩니다. 자매님은 이 세상에서 잘되고 싶고 잘살고 싶은 거겠지요? 물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는 목적이 있기 때문이고요. 그런데 막살아서는 잘 살수가 없겠지요?
세상 사람들에게 막사는 인간으로 비쳐지면 잘 살수 있겠습니까? 사회에서 인정을 받아야 더 더욱 잘살게 되고, 그래야 전도도 수월하게 진행된다고 그렇게 배워서 그렇게 알고 계시지요? 바로 그것이 죄안짓기 경쟁이고, 죄감추기 경쟁이 아니고 뭡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의 본성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다고 해서 달라지지 않습니다. 기복신앙 아니라고요? 거짓말입니다!! 잘되기를 바라는 것이 우리 몸의 본성입니다(그래서 시골을 떠나 도시로 간 것 아닙니까). 그 본성을 인간이 어떻게 할 수가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 본성에서 종교적인 열심도 나옵니다...
마귀는 언제나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대신에 인간의 종교적 열심과, 윤리적 행실과, 사회적 인정 같은 것을 내세워서, 예수님의 공로를 훼손하는 일로 혈안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정말 성령 받은 영이라면 예수님의 행위만 선포되는 말씀 앞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즐거워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교인2 : 그러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에는 하나님께 받는 복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까?
목사 : 에베소서 1장에 보면 창세전에 예비한 복을 주시는데 그 복은 신령한 복이라고 했습니다. 골로새서 3장에는 우리 생명이 그리스도안에 감추어져 있기에 이 땅의 것을 생각지 말라고 했습니다. 자매님이 꿈꾸는 복이라는 것이 과연 성경에서 말씀하는 그 복인지 본인이 잘 판단해 보세요.
교인 2 : 그래도 하나님이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도 주시는 복이 분명히 있잖아요.
목사 : 있죠!! 성경에 나오는대로 말해야 합니다. 마태복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복>이 나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심령이 가난한 자는 땅의 복에 관심이 없습니다. 땅의 복을 구하려고 달려가다가도 말씀 앞에 서면 곧바로 자신의 죄악됨 앞에 통회하는 심정이 됩니다. 목사도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래서 주님은 성도들로 하여금 모이는 일에 힘쓰게 하지요. 말씀 앞으로 모여지게 합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공로로 말미암아 하늘나라로 데려가지는 복을 날마다 받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는 것이 성도의 복입니다. 그런 사람은 그 복,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인 십자가만을 증거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교인2 : 십자가의 공로로 하늘나라 간다는 것은 저도 알아요. 그것은 궁극적인 것이고요. 어쨌든 우리는 이 세상에 살고 있지 않습니까?
목사 : 그러니까 성도는 궁극적인 것을 바라보고 살아야지요! 성경에서는 하늘 아랫것을 복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대답해보세요. 창세전에 가족이 있었습니까? 부모가 있었습니까?
교인2 : 아니~ 그것은...
목사 : 자꾸 머릿속으로 생각을 돌리지 마세요! 단순하게 어린아이같이 대답하세요! 베드로서에 보면 이 땅은 불살라 없어질 거라고 합니다. 불살라 없어질 땅에서, 땅의 복을 받겠다고 아우성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지요? 자매님은 이 세상에서 가지고 있는 것 다 날아가면 그 때부터 예수 안 믿을 작정이십니까?
교인 2 : 아니죠. 저는 믿지요.
목사 : 그렇다면 됐습니다. 그런데 대체 뭐가 문제입니까...? 한 가지 더 묻겠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사시는 동안 자매님이 생각하는 그런 복을 받고 사셨습니까? 못 받았습니까?
교인2 : ... 못받았지요...
목사 : 그렇지요. 새도 집이 있고 여우도 굴이 있는데 예수님은 머리둘 곳이 없을 정도로 복도 없이 살다가 가신 분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전서에서는 성도를 어떻게 표현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게 하셨다고 하지요. 그러면 성도가 이 세상의 복을 인정하고 사는게 맞습니까, 관계없다는 것이 맞습니까?
교인2 : ......저는 알지만 여기 시골 사람들의 믿음은---
목사 : 자매님! 믿음이 어디서 나옵니까? 사마리아 여인에게 찾아온 분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이 찾아와서 만나주시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할일을 왜 걱정합니까?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찾아오셔서 독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체면과 교인들 위신 따지기 전에 본인걱정을 하시기 바랍니다......
이러고 있는 동안 여기저기서 웅성웅성 거리는 소리가 계속 들려온다. (교인2는 자꾸 뒤쪽의 아버지가 신경 쓰이는지 목사와의 대화에 집중을 못한다) 발언의 기회를 목사로부터 봉쇄당한 MK집사가, 자기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어느새 뒤쪽으로 나가서 교인1과 대화 아닌 대화를 하고 있었는데......
MK : (이말 저말 다 필요 없다는 표정으로)제가 댁의 속을 한번 말해볼까요? 목사 하나 데려다가 교회 부흥시켜 달라는 것 아닙니까? 집사님! 장로 되고 싶어서 그럽니까?
교인3 : 본교회가 어디요? 직분이 뭐요? 왜 여그 왔소?
MK : 본교회? 직분?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교회라는 것은.....
교인1 : (여전히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사수해야 한다는 급한 마음으로, 말을 가로채며) 본 교회는 지켜야 하고, 교회에서 직분은 중요한 것이요. 직분이 중요하지 않다니 그거 문제있소!
교인3 : (저쪽에서 목사가 교인 2에게 하는 질문을 듣고, 당연한 것을 왜 묻느냐는 비양거림으로) 뭘, 믿음이 어디서 나와요? 십자가에서 나오지. 다 관둡시다. 우리는 서로 믿음이 달르요. 우리네하고 당신네 하고는 서로 다른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잉깨.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아무도 판단할 수가 없어요. (신발을 신으며) 하나님만 판단하신다고요...
MK : 그렇죠. (자기도 모르게 뒤쫓아 가면서) 그런데 복음 전하는 목사를 왜그렇게 판단하십니까? (한발짝 더 뒤쫓으면서) 왜 그렇게 판단 하냐고......
빙고!!! 이제야 답이 나왔다! 과연 예수는 인정하되 예수의 피를 믿을 가능성은 인간에게 전무하다.“나는 십자가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꽁꽁 묻어둔 이 소리를 토해 내치도록 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이렇게도 몰아가시면서 일하시나보다.
분노와 조롱 섞인 발자국들이 하나 둘씩 예배당 문을 빠져나간다. 오목사도 곧바로 차량운행 나가고, 예배당 안에는 멈추지 않고 돌아가는 벽걸이용 선풍기만이 쉴새없이 윙윙, 덜덜덜 돌아가고 있다. 성령의 바람은 언제나 계획도 없이 불어댄다.
사모마음은 복잡해진다. 어이고... 복도 지지리도 없지. 결국엔 이 싫어함을 당할라고 이 남도까지 온 것인가. 땀 줄줄 흘리며 무얼 허겠다고 그 발버둥을 쳐댄 것이며... 설교 중에 사마리아 여인에게 주신 말씀(내가 주는 물은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을 들으며 터진 눈물이(그래, 이 땅에서 나는 것들은 퍼먹고 퍼마셔도 갈증의 연속일 뿐이지), 이제는 억울함과 서러움으로 단번에 바뀌면서 더더욱 솟구친다. 이래서 인간은 ‘안 된다’이리라. ‘복음의 눈물’이 ‘땅의 눈물’로 변신하는 데는 단 몇 분이 소요될 뿐이다. 그것이 또 기가 막혀서 눈물에 눈물이 흐르고, 이 순간에도 죄 감추기 경쟁에 끼여들 수밖에 없는(네 죄가 그저 있느니라) 자신이 미워서 이제는 증오의 눈물이 되어 흐른다. 그런데도 이 십자가의 원수 된 죄인을 떠나지 아니하시는 그 은혜가 어찌 이다지도.....
이 묵시와 역사, 역사와 묵시가 순식간에 교차하는 음행한 마음과는 관계없다는 듯, 얼굴에 승리의 미소를 가득 담은 MK가 자기자리로 돌아와서 질문의 각도를 달리하여 말한다.
MK : 이야~ 말씀이 떨어지는 곳에는 언제나 전쟁터라더니, 맞어! 그런데 궁금한 것이 있어요. (갑자기 의심이 간다는 눈초리로) 사모님! 왜 자꾸 눈물을 닦는 것이요? 하나님 일에 감동해서요, 남편이 딱해서요, 자신이 불쌍해서요? (진짜, 성도로서 기분 나쁘다는 목소리로, 그러나 힘을 주어서) 이 영광스러운 전쟁터에서 왜 우는 것이요?
사모 : ...... (그려, 당신은 그리스도의 군사, 맞어.)
YJ : (사모의 대답은 불필요하다는 듯)하하하하.... 오늘 오목사님, 진짜 환상적이네요... 정말 멋있었어요! 그렇지 않아요, 집사님?
모두가 자기 기준대로, 자기가 본대로, 자기의 상상 속에서만 말하니, 이 세상은 동문서답의 각축장이다. 이러한 때에 <같은 믿음>을 가진다는 것이 이 어인 신비가 아니리요! 그리고보니 그리스도인은 ‘교인1’의 말마따나 신비주의자들이다. 과학의 시대와는 무관하게 살아가고 있는 미련한 자들이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보시오. 홍해가 갈라진 사건이 어디 과학인가요? 시내산에서 불 가운데로 나타난 여호와의 영광이 어디 과학인가요? 죽음의 사자가 유월절 어린양의 피가 발려진 집은 건너뛰었다는 이야기가 과학인가요?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지시고 죽었다가 3일만에 다시 살아나서 마귀의 권세를 완전히 깨부셨다는 복음이 어디 과학이라고 할 수 있나요?
복음이 얼마나 명쾌한 것인가. 예수님이 일러주신다. <나>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미워해야 한다. 예수님도 사랑하고 내가 원하는대로 내 것도 챙기는 방식은 주님의 방식이 아닌 것이다. 성령 받은 성도라도 이 땅에 살아가면서 똑같이 내 것을 챙기는 방식으로 살아가지만, 십자가 지신 예수님 앞에 서면,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면, 곧바로 통회하는 심정이 된다. ‘주여, 차라리 이 죄인을 떠나소서’라며 자복하는 심령이 된다. 이때 온유가 나오고 절제가 나온다. 자비가 터지고 말씀대로 사랑이 되는 성령의 열매를 맛보게 된다.
성도는 자기목숨을 미워하는 쪽으로 인도받는다. 십자가 앞에서, 죄인 됨의 끊임없는 발각선상에서 그렇다. 동시에 성도는 자기목숨과 더불어 <성도 한 명 한 명이 천하보다 더 귀하다>는 걸 확인하는 쪽으로 인도받는다. 주님이 낳은 사람들, 주님의 의를 드러낼 도구라는 의미에서 그렇다. 죄인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로 나타나고, 예수님은 그 죄인의 몸에서 <영원한 속죄, 화목제물>이 되어 자신의 ‘의’만 나타내기를 쉬지 않는다.
이 땅의 복이 과연, 자기 목숨을 미워하고 자기를 부인하는 것과 연결되어 있는가, 아니면 자신의 괜찮은 행위는 하나님이 주신 거라면서 점점 더 ‘자기 의’를 쌓아가는 것과 같은 계열에 있는 것인가. 이것은 너무나 분명하게 나누어떨어진다. 예수님은 <나를 인정하는 자>가 아니라,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고 말씀하신다.
설사 어느 누군가로부터 나의 전 생활이 무시당한들 무슨 상관인가. 성도가 말씀 들으면서 주의할 일은 저 목사가 무얼 말해도 결국은 예수님<만> 높이고 있는가를 살피는 일이다. 예수님만 높임 받는다면 내 것은 다 무시당해도 괜찮다. 아니,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마땅하게 여겨야 하며 더 적극적으로는 좋아하고 기뻐해야 할 일이 아닌가! 죄인들에게 무시당한 채, 십자가지신 예수님 앞에서 가타부타 무슨 할 말이 그렇게도 많은가!!!
**능선 너머 참한 예배당 뾰족탑이 아름답던 마을
그 소박한 고향 예배당 지붕에도 유황불이 떨어질 거라고
상상이나 해보았는가. 성도가 믿는 것은 교회생활의 경험과 추억이 아니다.
[불펌으로 인해 출처와 글쓴이를 밝히지 못함을 알려드립니다.]
대한 민국 어느곳에 있는 어떤 목사님께
죄송합니다. 저번주일날 온종일 잠으로 보냈습니다.
그래서 주일예배 빠졌습니다. 그러다 보니 수요일날도 일로인한 핑계로 야간 잔업을 하며
열심히 돈벌었습니다. 몇달 교회다니다 보니 서서히 잠에서 깨어나서 두리번 두리번.. 거리며..
( 어~ 이런 잠을 깼구나.. 오~ 정신 차려야지... 앗~~ 무슨소리지...)
제가 추구하고 믿는 하나님아버지하고 목사님 믿고 있는 하나님아버지하고 스타일이 조금 다르다
라는 나만의 하나님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 약간 삐닥해진것입니다..
티가 날만큼은 아니구요..전혀 티 안납니다.~ 음~~ (깜빡거리는 커서를 바라보며 생각중 )음~~
그런데 위에 글을 읽는 동안 제 자신이 어떠 했다는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대한민국 어느곳에 있는 어떤 목사님.. 힘내십시요. 아시지 않습니까? ㅎㅎㅎ
저는 이상하게 내안에계신 주님을 꺼내어 휘두르는 연장으로 많이 사용합니다 ㅋㅋㅋ
주님께서 많이 불편해 하셨을것입니다. ( 아멘~~ 함께 사라져도 이해 해주십시요.. )
첫댓글 여호와닛시! 승리의하나님 감사합니다.요근래 기도하면서 의문을 품고있었던 문제의 답이 여기에있었네요. 이시대에 주님의 사랑을 있는그대로 선포하시는 귀하신 목사님 저를위해 들려주신 말씀 감사합니다.하나님은 항상 우리의 모든것을 예비해주셨음을 감사합니다.
sunbee님 주님안에서 반갑습니다.^^글 올리시느라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영에 속한 사람은 영이 혼을 지배하고 혼이 육을 지배 하게 되지요.그러나 육신에 속한 사람은 육이 혼을 지배 하고 혼이 영을 지배 하게 됩니다.성령님의 기름부으심이 넘쳐야 영의 사람이 될수 있습니다.기도 없이는 성령님의 기름 부음을 받을수 없지요.그리고 제가 좀 안타깝게 생각하는것은 믿음과 행함은 항상 함께 수반되는 것입니다.믿음 따로 행함 따로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될수가 없을것입니다.나를 사랑하는 자는 나의 계명을 지킬것이라고 말씀 하신 예수님의 말씀처럼...구원은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 암아 받게 됩니다.그러나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야고보서 2장을 참고하시면 도움이 되실것입니다.sunbee님 다음 부터는 주일을 온전히 주님께 드리시기를 부탁드립니다.^^감사드리며 주님의 은혜와 사랑이 더 넘치시길...마라나타
할렐루야... 아멘...
예수피 예수님의 보혈의공로. 십자가의 보혈..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특급중죄인임을 깨닫게 하시는 예수님.. 울게 만드는예수이름 .... 믿음의 본질 예수그리스도 .... 중심이 되시는 예수그리스도 ... 예수십자가..예수 이름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예수... 오직 예수 .. 예수님... 그이름 ... 하나님우리아버지와 우리주 예수그리스도께서 일마다 때마다 평강을 더해 주시길 원합니다...아멘
제가 잘못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