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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온산 제단(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 한 논리로 완전해독) 원문보기 글쓴이: 티끌
예수님의 분량을 채우라고 하는데 그분의 분량이 무언가
요즘에 사이트를 돌아다녀 보면, 사이트마다 무슨 유행병처럼
예수님의 분량을 채우라는 바이러스가 차고 넘쳐있다. 즉 마지막 때가 되어
우리 신도들이 장성해야 하는데 그 장성의 수위를 어디까지 높여야 하는가 하면
예수님 같이 되어야 한다는 뜻에서 “예수님의 분량을 채우라”는 명령어로 즐비하다.
예수님의 분량을 채우라! 참 멋진 말이 아닌가?
그러나 예수님의 분량을 채우라고 했다면 분량을 채우기 위해 예수님이 누구인지,
그리고 예수님의 분량이 무엇인지 명백히 밝혀야만 하는데, 전혀 그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는 시끄러운 꽹과리 소리이기 때문에 말 잔치에 불과하다.
아무리 멋져 보여도 그것은 그림의 떡이다.
현실적으로 먹고 배부를 수 있는 떡이 아니며 생명의 떡이 아니다.
온 세상에서 터져나오는 함성! 예수 예수 귀한 예수!
이천년 동안 목이 터지게 그리워하며 불러온 예수님에 대한 인류의 노래에
산천초목도 덩달아 감동해서 울었다. 예수라는 말 한 마디에 인류의 감성이
무지개빛으로 무늬져 금새 부자가 되지만, 실상 인간의 이성과 양심을
배부르게 하는 데는 콩 한쪽도 없었다.
그래서일까? 예로부터 예수님의 이름을 팔아서 장사할 생각만 하였지,
정작 예수님이 누구인지 예수님의 분량이 무엇인지는 장사꾼이나
고객이나 알 바도 아니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반드시 우리의 이성으로 그 실체를 알아야 한다.
1)십자가상의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신성과 마리아의 아들이라고 하는 인성 모두를
가지고 오신 이천년 전의 예수님은 사실 자신이 슬픈 자임을 아셨다.
왜냐면 자신이 이 땅에서 천국을 이루지 못하고 반드시 죽어야 하는 외로운
몸임을 아셨기 때문인데 그에 대한 예수님의 목소리를 들어보기로 한다.
[마8:20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또 십자가에 달리실 줄 아시고
[요3: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또 예수께서 운명하시기 직전에
[막15:34 제 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이렇게 예수님은 자신이 죽어야 하고 버림받는 몸임을 아셨기 때문에
외롭고 슬픈 분이셨는데, 그러면 그분의 분량을 채우기 위하여 우리도
그분과 똑같이 십자가에 달려 죽어야 한다는 말인가? 아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나 여러가지 병 고침의 치유사역이나 이적기사 등의
행적과 그분의 가르치신 말씀 등이 모두 오늘날 우리들에겐 비유로 풀어져야
하므로 아니다.
21세기 오늘날 우리에게 비유로 풀어져야 한다는 말은
그동안 일곱인으로 인봉되어 꼭꼭 닫혀 있던 말씀이 열려져 해석되어짐을
의미한다. 따라서 예수님의 죽으심의 참 뜻을 알고 그 뜻대로 행하는
것이 예수님의 분량을 채우는 일인데, 이에 대한 구체적 자세함은 후술하겠다.
2)부활하신 예수님 어떤 분인가?
예수님 죽으신지 삼일 만에 부활하실 것을 미리 아시고 이같이 말씀하셨다.
[요2:1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예수님은 성전(처음 성전) 된 자신을 가르켜 너희가 나를 죽일테지만
삼일 만에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셨던 것이고 예언대로 죽고 부활하셨다.
예수님의 분량을 채우기 위하여
우리도 죽었다가 삼일 만에 무덤에서 부활해야 하는가? 아니다.
부활 역시 21세기 우리들에겐 비유로 작용되어지기 때문에 예수님의 부활의
참 뜻을 알고 그 뜻대로 행하는 것이 예수님의 분량을 채우는 일인데
이에 대한 구체적 자세함도 후술하겠다.
1번과 2번에서 말했듯이 인류를 위한 예수님의 공생애의 초점은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에 있었다. 이 같은 죽으심과 부활을 믿는 어떤 교단사람들은
예수님 처럼 죽을지라도(반드시 순교가 아니고 자연사나 병사등 모든 죽음에서도)
언젠가 다시 문자적 무덤에서 육체가 부활할 것을 믿기도 하는가 하면,
대체적으로 신자들 대부분은
죽어서 예수님처럼 저 하늘 천당에 가서 영생하리라고 믿는다.
그러나 예수님은 저 천당에서 영생하시는 분이 아니며 종말에 사람들을
문자적 무덤에서 육체가 다시 살아나오게 하시는 분도 아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이름으로(하나님의 본성으로) 오셨다가 부활승천
하셨을 때 다시 하나님의 자리로 복귀(영귀)하신 것 뿐이다.
그리고 다시 오신다고 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것은 하나님이
이 땅에 사람으로 다시 오신다는 뜻이다. 이 땅에 다시 오실 때는
기필코 지상천국을 이루신다고 약속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저 천당에서
영생하시는 분이 결코 아니다.
그리고 다시 오실 때도 초림 때처럼 사람의 몸에서 아기로 태어나셔서
성장하실 터이므로, 그동안 예수 믿었던 모든 사람들이 죽었지만 천당에
가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처럼 다시 아기로 태어나 성장하고 다시
믿음의 세계로 초대 받는다.
즉 오늘날 예수님이 다시 재림하셔서 믿는 자들을 향해 말씀하실 때
그 대상들이 됨을 아래와 같이 말씀하셨다.
[마16:2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섯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라고 하셨는데,
죽기 전이란 오늘날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살고 있는 사람들의 죽기전이 된다.
오늘날 택한자들의 육체의 구원(육체의 구원이란 지상천국을 의미함)을 위하여
환난날을 짧게 감하신다고 하신 것처럼 말이다(마24:22).
이천년 전 초림 예수님은 천국이 가까히 왔다고만 하셨지 곧장 천국이라고
하시지 않았다. 이는 천국이 초림 때가 아니라 재림 때에 성취됨을 뜻한다.
따라서 예수님은
그분의 재림 때 성취될 천국에 대한 비유만 잔뜩 베풀고 떠나가셨던 것이다.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이것은 온 세계인을 향해 펼쳐진 실상이다.
그리고 이 실상에 대한 모형과 예언은 구약인데, 구약에서 이미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을 수도 없이 여러가지 방법의 예언으로/상징으로/모형으로
/그림자로 보여주셨다. 간단히 몇 가지 예를 들면,
없어질 처음 성전이 있고(초림), 구원의 둘째 성소(지성소)가 있다(재림).
헐어버릴 처음 예루살렘이 있고(초림), 회복되는 새 예루살렘이 있다(재림).
이혼당한 처음 아내가 있고(초림), 다시 만나게 될 둘째 아내(신부)가 있다(재림).
종의 아들로 상속이 없는 이스마엘이 있고(초림. 초림주는 종의값 은 30에 팔려죽음),
자유자의 아들 상속자 이삭이 있다(재림).
역시 상속을 놓쳐버린 에서가 있고(초림). 상속을 넘겨받는 야곱이 있다(재림).
흙으로 돌아갈 처음 아담이 있고(초림), 모든 산자의 어미 하와가 있다(재림).
이와 같이 우리가 예수님의 분량을 알아보는 일에는 초림 예수님의 분량이
따로 있고, 재림 예수님의 분량이 따로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에 대해 간단히 한 마디로 말한다면 하나님은 하늘의 영으로 계심이
아니고 인간세상으로 내려와 우리와 함께 영생하시는 것이 창조의
목적이며 창조의 완성인데
초림 때는 그러한 지상천국을 이루지 못하고 재림 때 이루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똑똑히 알아야 할 것은
사람들이 너나 없이 예수님의 분량을 채우라는 말에서 예수님은 초림 예수님을
뜻하는데, 초림 예수님의 분량을 채우게 되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게
없어질 처음 성전에 머물러 있어야 하고, 헐어버릴 처음 예루살렘에 갇혀야 하고
이혼 당한 처음 아내가 되어야 하고, 종의 아들로 상속이 없어야 하고,
상속을 놓쳐버린 미움받는 에서가 되어야 하고, 사망의 흙으로 돌아갈
저주의 첫 아담이 되어야 한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초림예수님의 분량을 채우라는 말에 무턱대고
감동해버릴 것인가? 성경을 조금만 제대로 안다면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초림 예수님의 복음의 진수인
그분의 죽으심의 참 의미와 부활의 참 의미를 안다면 절대로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분의 죽으심의 참 뜻은(우리가 죽였지만 동시에 모두 하나님이 정한 시나리오임)
그분은 말씀을 비유로 가지고 오셨기 때문에, 때가 되면(재림 때의 추수철이 되면)
반드시 그 비유의 말씀에서 우리가 죽어야 한다는 뜻에서다. 즉 비유의 말씀으로는
구원이 없기 때문에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을 반드시 버리라는 뜻에서다.
언제까지 비유의 말씀에서 죽지 않고 펄펄 살아 있으면 구원의 둘째 성소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운명하셨을 때 처음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둘러쳐 있던 휘장이 찢어졌음은 바로 이것을 상징해 주고 있다.
처음 성소는 죽음이요, 지성소는 부활의 구원이다.
처음 성소의 죽음이 없으면 지성소의 구원도 없다.
죽음이란 죽기 위한 죽음이 아니다. 죽음이란 부활하여 생명을 얻기 위한 죽음인데
예수님은 이 같은 죽음과 생명을 동시에 비유로서 보여주시고 떠나 가셨다.
다만 비유로서 보여 주시고 떠나가셨으므로
우리가 예수님 처럼 생물학적으로 죽는 믿음을 가지면 안되고,
예수님 처럼 문자적 무덤에서 나오는 믿음을 가지면 안된다.
사람들은 초림주니 재림주니 하는 말 자체를 증오하며 예수님 하면 의례히
이천년 전에 오신 예수님만을 떠올리며 예수님의 분량을 채우라는 말로’
만족해 버리지만 그것처럼 어리석은 바부탱이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초림)의 분량을 채우라는 말이 왜 유행병처럼 돌고 있는가?
이는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성경을 풀어주시되 창세로부터 (비유로) 감추인 것을
드러내리라고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잘난척 우쭐해져서
자신이 오늘의 재림주나 된것처럼 성경을 함부로 풀어낸 결과에서 비롯되었다.
창1-3장은 마지막 재림주의 추수철에 성경전체를 풀어내는 키워드로서
오늘에 대한 순수 예언서다.
그런데 옛적 바울이 성급하게 창세기의 아담을 함부로 터치했다.
에덴동산의 아담은
초림주를 예표한 가상인물인데(창4장에 나오는 아담의 이름만을 빌려온 가상인물)
바울은 성경을 전혀 알지 못한 까닭에 에덴동산의 아담이 문자 그대로
죄와 사망을 온 세상에 들여온 장본인이고, 바울 당시의 초림 예수님은
아담의 그 죄와 사망을 이미 도말한 생명의 구원주라고 천명했다.
즉 바울은 초림예수님만 믿으면 그분이 아담으로부터 들어온 우리의 죄와
사망을 도말했기 때문에 이미 구원은 완성되었다고 믿게 했고
그렇게 구원을 받아놓고 있는 우리들에게 재림 예수님은 죄와 상관없이
두번째 나타나셔서 우리들을 저 하늘로 끌어올려간다고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초림주를 믿기만 하면, 즉 초림주가 주신 비유의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 알바 없이 그분을 열심히 믿기만 하면, 구원은 이미 받아놓은
당상이니 믿는 자들에겐 복음 중에 복음이 되었다.
그리고 재림주는 우리들을 하늘로 끌어올려간다는 손오공 버전으로
미스테리한 우수갯거리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에
아무 주목을 받지 못하게 했다.
이 얼마나 황당한 일인가?
바울은 진정한 구원주로 주목 받아야 할 오늘의 재림 예수님에 대해서는
한낱 단순한 심부름꾼으로 전락시키고(그것도 미스테리한 손오공 버전으로),
초림주는 구원의 주체가 아니라서 이루지 못하고 떠나가셨음에도 불구하고
초림주를 구원의 주체로 둔갑시켜냄으로서 탐욕에 눈먼 사람들로부터
박수갈채를 받고 있으니, 이 얼마나 가당치 않는 일인가?
바울의 교리로 똘똘 뭉친 오늘의 모든 교단들이 막연히 예수님(초림)의
분량을 채우라는 그 말은 우리를 죽으라는 말 밖에 안된다. 속지 말자.
정작 예수님은 우리에게 뭐라고 하셨는가?
[요14: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라고 하셨음을 상기하자.
이는 예수님은 떠나가시고 오늘날 구원의 주체이신 예수님의 재림 때야말로
진정한 구원의 역사가 성취될 터이므로 초림의 예수님보다 큰 것도
하리라고 하신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이를 바꿔서 말한 것이고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라 바울의 말을 추종하므로써
예수님(초림)의 분량을 채우라는 멋진(?) 말로 포장하고 있다.
탐욕으로 일찍 되고자 하는 것, 그게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이다.
속지 말자.
오늘의 재림 예수님의 분량으로 채워야 하는 것이 영생이다.
초림 예수님의 분량으로 채우면 완전히 빈털터리 사망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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