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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 출신 플레밍,1928년 푸른곰팡이 항균 작용 발견
1940년 정제된 페니실린 개발
1946년 美 외과학회지 논문에 실려
“감염 치료에 탁월, 물량 부족해 국소 사용”
항생제 개발로 감염 줄어도 세균 진화
강한 내성 지닌 악성 세균 MRSA 등장
런던의 제국전쟁박물관(Imperial War Museum)에서 리 밀러(Elizabeth
Lee Miller, 1907∼1977)의 사진전을 관람한 적이 있다. 그녀는 최전선을 돌아다니며 피투성이가 된 부상병이나 나치의 수용소에서
발견된 시체 등 참혹한 전쟁의 현장을 카메라로 담아 패션잡지 보그(Vogue)에 게재했던 종군기자다.
옥스퍼드 근처
처칠병원에 주둔한 1000병상 규모의 제2 미국 육군병원에 근무하는 간호사들의 사진도 있었고, 간호사 기숙사에서 말리기 위해 널어놓은 빨래
사진도 있었다. 그 가운데 “이 병원에서 미군에 의해 최초로 페니실린이 사용됐다”고 적힌 설명이 눈길을 끌었다.
전투에서 부상 후
사망에 이르는 1차적 원인은 출혈로 인한 쇼크고, 2차적인 원인은 감염이다. 1932년 독일의 생화학자 도마크(Gerhard Domagk)가
설파제의 항균 효과를 확인하고 제2차 세계대전에 사용하면서 부상병의 사망률이 감소했다. 당시 미군은 설파제 가루를 개인이 소지하게 해 감염을
줄이는 효과를 보았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도 부상한 동료에게 가루를 뿌리고 붕대로 감는 장면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설파제는
생물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어서 항생제라고 부르지 않기 때문에, 최초의 항생제는 그 유명한 페니실린이다.
페니실린을 처음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제2 미국 육군병원 의료진. 필자 제공 |
플레밍(Alexander Fleming)은 1928년 푸른곰팡이에서 항균 작용을 발견했지만,
이를 정제한 페니실린이 만들어진 것은 1940년에 들어서였다. 1941년 사람에게 투여해 효과가 확인되자 2차 대전 전장에 다량으로
공급됐다.
1946년 라이언스(Champ Lyons)가 미국 외과학회지에 발표한 논문을 찾아 읽어보았다. “영국에서는 1943년
페니실린이 감염 치료에 탁월한 효과가 있다는 것을 확인했지만, 물량이 부족해 적은 양을 국소적으로만 사용했다. 미국의 정책은 확정된 감염에
대해서만 전신에 투여하는 것으로, 바다를 건너온 이 약은 생명이 위독하거나 만성적인 고름 배출 환자 치료에만 사용됐다.” 말하자면 당시에는 희귀
약품이었던 것이다.
페니실린을 발견한 스코틀랜드 출신 플레밍과 이를 상용화한 오스트레일리아 출신 플로리(Howard Walter
Florey), 유대계 독일인 체인(Ernst Boris Chain)은 우리나라가 광복을 맞이한 1945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하지만 항생제가 개발돼 감염을 줄일수록 세균도 진화해 항생제에 내성을 가진 균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 결과 최근에는
페니실린이나 세팔로스포린 등 거의 모든 항생제에 강한 내성을 지닌 악성 세균인 메티실린 내성 포도알균(MRSA: Methicillin
Resistant Staphylococcus Aureus)까지 등장했다. 항생제를 많이 사용하는 대형 종합병원에서 발견되는데, 공기 중이나
의사나 간호사의 신체 부위, 수술칼, 병원 담요, 튜브 등에서도 3시간이나 생존하고 번식력도 강한 병원 감염의 주범이다. MRSA가 발견되면
이를 이길 수 있는 유일한 항생제 반코마이신(Vancomycin)으로 치료해야 한다.
런던의 임페리얼 칼리지 부속 ‘성모병원(St.
Mary’s Hospital)’에는 이 병원에서 근무한 플레밍의 상반신이 부조된 노벨상 메달을 크게 만들어 건물의 꼭대기에 잘 보이도록 전시하고
있다. 돌이켜보면 인류가 플레밍에게 전해야 할 감사는 노벨상 정도로는 도저히 표현이 안 될 것 같다.
<황건 인하대 성형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