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연중 제3주간 월요일
-정인준 신부
마르 3,22-30 <사탄은 끝장이 난다>
그때에 22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 학자들이, “예수는 베엘제불이 들렸다.”고도 하고, “예수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도 하였다. 23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부르셔서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어떻게 사탄이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 24 한 나라가 갈라서면 그 나라는 버티어 내지 못한다. 25 한 집안이 갈라서면 그 집안은 버티어 내지 못할 것이다. 26 사탄도 자신을 거슬러 일어나 갈라서면 버티어 내지 못하고 끝장이 난다. 27 먼저 힘센 자를 묶어 놓지 않고서는, 아무도 그 힘센 자의 집에 들어가 재물을 털 수 없다. 묶어 놓은 뒤에야 그 집을 털 수 있다. 2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29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30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사람들이 “예수는 더러운 영이 들렸다.”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을 보고 ‘베엘제불’이라는 마귀가 들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라고 떠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사탄이 서로 갈라져 싸우면 버티어내지 못하고 다 망한다.’라는 비유 말씀을 들어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께서는 바로 마귀를 대항해서 싸우는데 같은 편이 되겠느냐?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마르 3,28-29)
우리말에 ‘얼토당토않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떠한 경우의 일이 논리에도 맞지 않을 경우를 말하는 것이지요. ‘얼토당토’의 어원을 ‘얼굴이 예쁜 토끼, 당근을 좋아하는 토끼’라는 장난기 섞인 설명이 있습니다. 말의 어원을 정확히 따지는 것이 쉽지는 않는데, 그런데 이 ‘얼토당토’라는 말은 ‘옳지도 마땅하지도 않다.’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비슷한 의미로 ‘가당치도 않다.’라는 말이 있는데 두서없이 아무렇게나 떠든다는 의미의 횡성수설(橫說竪說)과도 같은 맥락이지요. 율법학자들의 말은 비난에 비난을 위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마귀가 아니라 하느님의 아들로서 마귀를 제압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에게 ‘성령을 모독하는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마태오는 그들이 용서 받지 못하는 이유는 “예수는 더러운 영이 들렸다.”고 말하였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밝힙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에 의해서 마귀를 쫒아내시는데 율법학자들은 성령을 마귀로 규정하는 독성을 범한다는 말도 되지 않는 논리를 가지고 주님을 헐뜯는 것입니다.
사람이 살면서 힘든 것 중에 하나는 모함을 받거나 억울한 소리를 들을 때입니다. 그리고 주위의 사람들은 나를 거슬러 말하는 거짓을 사실로 믿는 것도 또한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 중에 하나이지요. 예수님께서는 그런 모독적인 비방의 말을 들으셔도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않으시고 합리적인 설명으로 답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 이치에 맞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억울한 소리나 오해받는 일을 겪을 때, 자칫하면 부지런히 설명하고 변명하기 바쁜 내 자신이 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합리적이거나 이치적이라기보다 감정적이 쉽게 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젊은 시절에는 오해 받는 것을 아주 힘들어 하고 못 견뎌했습니다.
그리고 젊었을 때에는 설명하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되고 사람들이 나를 이해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것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것은 제 삼자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남들은 내 입장을 내가 설명하는 대로 다 받아들이지 않을 뿐더러 제 삼자의 입장에서는 나를 이해하거나 억울한 입장을 굳이 편들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세월이 가면서 좋은 일은 억울하고 또 말도 되지 않는 얼토당토한 경우를 당하더라도 쉽게 해명하거나 설명하기 보다는 오히려 침묵을 지키게 되지요. 그래서 주님의 삶을 받아들이는 신앙인은 억울한 일을 겪으면 분하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하여 이웃에게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침묵 속에서 기도하는 삶을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도 너무 억울한 일을 겪으셨다면 흠집 많은 나 자신은 억울한 일을 겪게 되는 현실을 당연한 일로 받아들이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마귀라는 소리를 들으셨다면 흠집 많은 우리야 그 보다 더 얼토당토한 말을 들어도 되지 않을까요?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