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도 만난 자와 주막
누가복음 10:25-37 246 305 235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준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선한 사마리아 사람’으로 ‘이웃 사랑’으로 이해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묻는 어떤 율법교사에게 ‘영생’을 가르쳐 주신 말씀입니다.(25,30)
율법주의자를 대표하는 제사장과 레위인이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지만 사마리아 사람은 그를 도와주어서 영생을 얻도록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강도 만난 사람과 주막’ 비유는 구속사적으로 기독교 신학의 인간(죄인)론, 기독(구원)론, 교회론, 재림론(최후의 심판), 내세론(영생)을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모든 사건에 주연과 조연이 있듯이 본 비유에도 주연과 조연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강도 만난 자와 사마리아 두 사람 중에 누가 주연이며 누가 조연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웃 사랑’으로 이해하면 강도 만난 자를 도와준 사마리아 사람이 주연이고 강도 만난 자는 조연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영생’을 얻도록 가르쳐 주는 말씀이기 때문에 영생을 얻게 된 강도 만난 사람이 주연이고 그를 도와준 사마리아 사람은 조연입니다.
강도에게 빼앗기고 맞아서 ‘거의 죽어 버려진 사람’은 스스로 영생을 얻을 수 없는 죄인을 상징합니다. 강도 만난 사람은 저와 여러분을 상징합니다. 강도 만난 사람에게서 우리(나)를 보아야 합니다. 우리(나)는 죄로 인하여 거의 죽었던 자였습니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란 말은 도와주지 않으면 죽게 되지만, 누군가가 도와주면 살아날 수 있습니다. 죄인은 스스로 영생할 수 없지만 도와주면 영생을 얻게 됩니다.
기독교의 인간(죄)론은 우리(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아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는 죄로 인하여 죽어 버려진 자였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도와주셔서 영생을 얻게 된 것을 가르쳐주는 신학입니다.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강도 만난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또 레위인도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율법을 지켜서 영생한다는 율법주의자를 대표합니다. 그들은 피를 흘리고 죽은 자는 부정하기 때문에 도와줄 수 없었습니다. 강도 만난 자를 보고 피하여 지나간 것은 그들의 율법으로는 영생을 얻게 할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영생을 얻도록 해 주었습니다.(33,34)
사마리아 사람은 죄인을 구원하신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기름과 포도주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흘리신 피를 상징합니다. 기독교의 구원은 죄를 대속하는 예수님의 보혈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이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와서 돌보아 주었습니다. ‘주막’은 교회를 상징합니다. 개역성경과 개정판에는 ‘주막’이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새번역을 비룻한 한국판 성경과 영어 성경을 비롯한 대부분의 성경은 주점, 또는 여인숙이나 여관이란 ‘inn’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성경에 ‘주막’은 교회론적으로 잘된 번역이라고 생각합니다. ‘酒幕’은 술집도 여관이나 inn도 아닙니다. 제가 1994년 8월에 중국에 가서 북경 어느 호텔에서 잤습니다. 중국은 호텔을 ‘酒店’(술집)이라고 합니다.
요즘은 교통편이 좋아서 ‘주막’을 볼 수 없지만, 걸어 다녔던 옛날은 마을과 마을의 중간쯤에 길가는 사람들이 쉬어 갈 수 있는 큰 정자나무가 있는 작은 오두막인 주막이 있었습니다.
주막은 나그네들이 쉴 수 있는 정자나무가 있고 마실 수 있는 옹달샘이 있습니다. 밥과 술도 팔고, 밤에는 자고 갈 수 있는 방도 있습니다. 나그네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있습니다.
주막은 강도나 짐승으로부터 안전하게 지켜 줍니다. 길가는 나그네들에게 매우 필요했습니다. 예루살렘이나 여리고에 있는 술집이나 여관을 주막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주막은 예루살렘과 여리고 사이에 있었습니다. ‘酒幕’의 술(酒)집으로 오해하기 쉽지만, 본문의 주막은 교회를 의미합니다. 주막은 교회를 닮았습니다. 교회에도 술(포도주)이 있습니다.
병원도 아니면서 강도 만난 사람의 상처도 고쳐주었습니다. 교회는 병원도 아니면서 병든 사람도 고쳐주기도 합니다.
교회는 예수님께서 맡긴 죄인을 가르치고 돌보아주고 영생을 얻도록 하는 곳입니다. 교회는 영생하는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가는 길목에 나그네들이 쉬어 가는 곳입니다.
교회는 영생을 얻도록 하는 곳입니다. 교회가 아닌 다른 어떤 곳에서도 영생을 얻도록 할 수 없습니다. 교회의 돌봄을 받지 않으면 누구도 영생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을 주막에 데리고 가서 돌보아주고 살렸습니다. 그리고 이튿날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 사람을 돌보아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 올 때에 갚으리라’고 말하고 그를 맡기고 떠났습니다.(35)
사마리아 사람이 주막 주인에게 세 가지를 말했습니다. 이것은 오늘의 교회에 가르쳐 주는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첫째로 ‘내가 올 때’라는 말을 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만난 사람을 주막에 맡기고 내몰라라 하고 가버린 것이 아닙니다. 다시 올 때까지 강도 만난 사람을 돌보라고 맡기도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떠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14:2.3)
그리고 예수님은 하늘로 올려져 가셨습니다. 우리를 영원히 살 수 있는 처소를 예비하려고 올라가셨습니다. 처소를 예비하고 데리러 오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막은 약속을 믿는 곳입니다. 술집이나 여관은 약속이 없습니다. 약속이 있기 때문에 기다림이 있습니다. 약속이 없는 곳에는 기다림도 없습니다. 교회는 오신다는 예수님의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 곳입니다.
두 번째는 주막은 강도 만난 자를 돌보아야 합니다. ‘비용이 더 들면’이라는 말씀은 강도 만난 자를 돌보아 준 댓가를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주막 주인은 댓가를 받기 위해서 강도 만난 자를 잘 돌보아야 했습니다.
‘돌보아주라’는 말씀은 강도 만난 사람을 먹이고 가르치는 교육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주인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사마리아 사람이 그를 살려주고 나에게 맡겼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을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님께서 맡겨주신 죄인을 돌보아주는 곳입니다. 그리고 죄인을 구원해 주신 예수님을 가르쳐주어야 합니다. 술집이나 여관은 교육이 없습니다.
세 번째는 ‘갚으리라’는 말씀입니다. ‘갚으리라’는 말은 주막 주인이 강도 만난 자를 돌보아준 댓가를 주겠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잘 돌보지 않았다면 그에 대한 잘못을 묻겠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갚으리라’는 말은 예수님의 재림의 날에 최후의 심판을 의미합니다. 인자가 오시는 날은 최후의 날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5장에 ‘인자가 올 때’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임금으로 오셔서 모든 민족을 모으고 마치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처럼 의인은 오른편으로, 악인은 왼편으로 나누실 것입니다.
그리고 의인에게는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고 하실 것입니다.(마25:34) 그러면 그들은 기뻐 뛰며 천사들의 영접을 받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서 영생하게 됩니다.
그러나 악인들에게는 “저주를 받은 자들아 너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고 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영원한 지옥불 가운데 던져져 영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마25:41)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은 의인에게는 영생하지만, 악인에게는 영벌을 받는 내세가 될 것입니다. 이것을 내세론이라고 합니다.
교회의 돌봄을 받고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영원히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돌봄을 받지 않은 사람을 음부의 불꽃으로 던져져 영벌을 받게 된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은 율법교사처럼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까를 알려고 합니다. 율법은 영생을 얻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의 돌봄을 받아야 영생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강도 만난 사람이 주막에서 고침을 받고 부모와 형제들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갔다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가 건강해서 집으로 돌아갔다고 말씀하셨다면 영생과 아무 관계가 없는 말씀이 되었을 것입니다.
강도 만난 사람은 자신을 주막에 맡겨 준 그분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는 바로 여러분입니다. 속죄함을 받고 구원받은 성도는 주께서 다시 오실 것이라는 약속을 믿고 그분이 오시기를 기다립니다.
주막 밖에는 어둡고 무서운 짐승들의 잡아먹고 먹히는 울부짖는 소리가 들립니다. 강도들이 숨어 있다가 지나가는 나그네를 빼앗고 때려 죽게 오늘의 세상입니다.
그러나 주막은 우리를 영생 얻도록 안전하게 지켜 주는 교회입니다. 교회를 떠나면 영생을 얻을 수 없습니다. 주님 오시는 날까지 기다리는 자가 영생을 얻게 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며 구원받은 은혜를 감사하며 찬송을 부르며 즐거워하며 주님 오시기를 기다립니다. 교회는 사단 마귀로부터 안전하게 지켜 주는 곳입니다.
우리는 교회의 돌봄을 받고 주님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날은 우리의 구원이 완성되는 날입니다. 주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처소에 들어가서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강도에게 맞아 죽었던 그 사람은 자신을 살려준 그분을 얼마나 그리워하며 보고 싶었겠습니까? 얼마나 간절히 기다렸겠습니까? 그의 기다림이 우리의 기다림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재림을 얼마나 사모하고 기다립니까? 어떤 성도는 ‘주님 조금 있다 오세요’라고 한답니다. 참으로 위험한 믿음입니다. 요즘 세상 돌아가는 것이 심상치 않습니다. 주님 오실 날이 머잖은 것 같습니다.
우리 교회는 강도 만난 자의 주막과 같은 교회가 됩시다. 주님 오시는 날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고 하실 때 우리 모두 기뻐 뛰며 주님을 맞이하여 주님께서 예배해 놓으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서 영원히 주님과 함께 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