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7
THE days grew hotter and even the nights grew tolerably warm. On a bullet — chipped tree in
front of our parapet thick clusters of cherries were forming. Bathing in the river ceased to be an
agony and became almost a pleasure. Wild roses with pink blooms the size of saucers straggled
over the shell-holes round Torre Fabian. Behind the line you met peasants wearing wild roses
over their ears. In the evenings they used to go out with green nets, hunting quails. You spread the
net over the tops of the grasses and then lay down and made a noise like a female quail. Any male
quail that was within hearing then came running towards you, and when he was underneath the
net you threw a stone to scare him, whereupon he sprang into the air and was entangled in the
net. Apparently only male quails were caught, which struck me as unfair.
날은 점점 더 뜨거워졌고 밤에도 견딜 수 있을 정도로 따뜻해졌다. 우리 흉벽 앞에 총알이 박힌 나무에는 체리가 잔뜩 열리고 있었다. 강에서의 목욕은 고통을 멈춰주고 거의 즐거움이 되었다. 접시 크기로 분홍색으로 핀 들장미가 토레 파비앙 주변의 포탄 구멍에 우거졌다. 전선 뒤에서는 들장미를 귀에 꽂은 농민들을 만났다. 저녁에 그들은 녹색 그물을 들고 나가 메추리를 잡곤 했다. 풀밭 위로 그물을 펼쳤다 내리고 암컷 메추리같은 소리를 냈다. 소리를 들은 메추리 수컷이 달려와 그물 밑으로 들어가면 돌을 던져 위협하자 메추리가 위로 날아오르고 그물이 걸렸다. 명백히 수컷 메추리들만 잡혔고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There was a section of Andalusians next to us in the line now. I do not know quite how they
got to this front. The current explanation was that they had run away from Malaga so fast that
they had forgotten to stop at Valencia; but this, of course, came from the Catalans, who professed
to look down on the Andalusians as a race of semi-savages. Certainly the Andalusians were very
ignorant. Few if any of them could read, and they seemed not even to know the one thing that
everybody knows in Spain — which political party they belonged to. They thought they were
Anarchists, but were not quite certain; perhaps they were Communists. They were gnarled, rustic-looking men, shepherds or labourers from the olive groves, perhaps, with faces deeply stained
by the ferocious suns of farther south. They were very useful to us, for they had an extraordinary
dexterity at rolling the dried-up Spanish tobacco into cigarettes.The issue of cigarettes had ceased,
but in Monflorite it was occasionally possible to buy packets of the cheapest kind of tobacco,
which in appearance and texture was very like chopped chaff. Its flavour was not bad, but it was
so dry that even when you had succeeded in making a cigarette the tobacco promptly fell out
and left an empty cylinder. The Andalusians, however, could roll admirable cigarettes and had a
special technique for tucking the ends in.
지금 우리 옆의 전선은 안달루시아인들 구역이었다. 그들이 어떻게 이 앞에 있는 지 잘 모른다. 당시의 설명은 그들이 말라가에서 너무 빠르게 도망쳐와서 발렌시아에서 멈추는 것을 잊었다는 것이었지만 이것은 물론 카탈루니아인들, 안달루시아인들을 반야만족으로 공공연하게 낮춰보는 사람들로부터 나온것이었다. 확실히 안달루시아인들은 매우 무식했다.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도 드물었고, 스페인의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 한 가지, 어느 정당에 그들이 속해있는지 조차 모르는 것 같았다. 그들은 자신들을 무정부주의자라고 생각했지만 정확한 건 아니었다. 아마도 그들은 공산주의자일 것이다. 그들은 삐딱했고, 촌스러워 보였고, 양치기나 올리브 밭 노동자였을 것이고, 더 남쪽의 작열하는 태양에 그을린 얼굴을 가졌다. 그들은 우리에게 매우 도움이 되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말린 스페인 담배잎을 담배로 마는 비범한 손재주를 가졌기 때문이었다. 담배 문제는 끝났지만 몬플로리테에서 가장싼 담배잎을 사는 것은 가끔 가능했다. 그것의 모양과 질감은 잘게 자른 왕겨와 매우 비슷했다. 향은 나쁘지 않았지만 너무 말라서 담배를 만드는 데 성공해도 담배잎이 바로 떨어져 빈 원통만 남았다. 그러나 안달루시아인들은 감탄할 만한 담배를 말 수 있었고 끝까지 채워넣는데 특별한 기술을 갖고 있었다.
Two Englishmen were laid low by sunstroke. My salient memories of that time are the heat
of the midday sun, and working half-naked with sand-bags punishing one’s shoulders which
were already flayed by the sun; and the lousiness of our clothes and boots, which were literally
dropping to pieces; and the struggles with the mule which brought our rations and which did not
mind rifle-fire but took to flight when shrapnel burst in the air; and the mosquitoes (just beginning to be active) and the rats, which were a public nuisance and would even devour leather belts
and cartridge-pouches. Nothing was happening except an occasional casualty from a sniper’s bullet and the sporadic artillery-fire and air-raids on Huesca. Now that the trees were in full leaf we
had constructed snipers’ platforms, like machans, in the poplar trees that fringed the line.
영국인 2명이 일사병으로 쓰러졌다. 당시에 대한 나의 두드러진 기억들은 한낮의 더위, 햇볕에 타서 이미 벗겨진 어깨에 모래주머니를 지고 반나체로 일하기, 말그대로 산산조각나 남루한 옷과 장화, 비상식량을 나르는 노새와의 씨름, 노새는 소총 격발에는 신경쓰지 않았지만 공중에서 유산탄이 터질 때 펄쩍 뛰었다, 그리고 모기(막 활동을 시작한)와 쥐, 이것들은 공해였고 가죽벨트나 탄약주머니까지 먹어치웠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저격수의 총탄과 에 의한 가끔의 사상자와 간헐적인 포격과 우에스카에 대한 공습이 있었다. 이제 나무들은 잎이 우거져서 우리는 전선을 둘러싼 포플러 나무에 전망대 같은 저격용 총좌를 만들었다.
On the
other side of Huesca the attacks were petering out. The Anarchists had had heavy losses and had
not succeeded in completely cutting the Jaca road. They had managed to establish themselves
close enough on either side to bring the road itself under machine-gun fire and make it impassable for traffic; but the gap was a kilometre wide and the Fascists had constructed a sunken road,
a sort of enormous trench, along which a certain number of lorries could come and go. Deserters reported that in Huesca there were plenty of munitions and very little food. But the town
was evidently not going to fall. Probably it would have been impossible to take it with the fifteen
thousand ill-armed men who were available. Later, in June, the Government brought troops from
the Madrid front and concentrated thirty thousand men on Huesca, with an enormous quantity
of aeroplanes, but still the town did not fall.
우에스카 반대편에서는 공격이 잦아들고 있었다. 무정부주의자들은 심각한 손실을 입었고 자카 도로를 자르는데 제대로 성공하지 못했다. 그들은 그럭저럭 길 양쪽에 가까이 자리잡아서 길 자체를 기관총 사정거리에 두고 교통이 불가능하도록 했지만 그 간격은 1km 너비였고 파시스트들은 움푹 들어간 도로, 일종의 거대한 참호를 건설하여 그 길을 따라 특정 수의 트럭이 오고 갈 수 있었다. 탈영병들이 알려주길 우에수카에는 탄약은 많고 음식은 매우 적다고 했다. 하지만 그 마을은 분명 함락되지 않을 것이다. 동원가능한 15000명의 빈약하게 무장한 군인들로는 어림도 없었을 것이다. 나중에 6월에 정부는 마드리드 전선에서 부대를 데려와 우에스카에 엄청난 수의 비행기와 3만 병력을 집중시켰지만 여전히 그 마을은 함락되지 않았다.
When we went on leave I had been a hundred and fifteen days in the line, and at the time this
period seemed to me to have been one of the most futile of my whole life. I had joined the militia
in order to fight against Fascism, and as yet I had scarcely fought at all, had merely existed as a
sort of passive object, doing nothing in return for my rations except to suffer from cold and lack
of sleep. Perhaps that is the fate of most soldiers in most wars. But now that I can see this period
in perspective I do not altogether regret it. I wish, indeed, that I could have served the Spanish
Government a little more effectively; but from a personal point of view — from the point of view
of my own development — those first three or four months that I spent in the line were less futile
than I then thought. They formed a kind of interregnum in my life, quite different from anything
that had gone before and perhaps from anything that is to come, and they taught me things that
I could not have learned in any other way.
우리가 휴가를 갔을 때 나는115일을 전선에 있었고, 당시 이 기간은 나에게 전체 생에서 가장 헛된 날들이었던 것 같다. 나는 파시즘에 대항해 싸우기 위해 민병대에 가담했지만 아직 거의 싸우지 못했기 때문에, 추위와 수면부족으로 고통받는 것 이외에 비상식량 값을 전혀 못하는 단지 일종의 수동적 객체로로 존재했다. 아마도 그건 대부분의 전쟁에서 대부분의 병사들의 운명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제 이 시기를 멀리서 볼 수 있기에 절대 후회하지는 않는다. 정말로 조금이라도 효과적으로 스페인 정부를 위해 복무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개인적 관점에서 볼 때, 내 자신의 발전의 관점에서 볼 때, 전선에서 보냈던 첫 3,4개월은 당시 생각했던 것 보다는 덜 헛되었다. 그 시간들은 내 인생에서 일종의 공백기간을 형성했고, 이전에 지나갔던 것과 아마도 앞으로 올 것들과는 아주 달랐다. 그리고 나에게 다른 방식으로는 배울 수 없는 것들을 가르쳐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