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2월 25일
목요일 예수
성탄 대축일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요한
1,1-18)
The Word became
flesh and made his dwelling among us, and we saw his
glory,
말씀의 초대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의 구원을 선포하며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의 발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노래한다. 이제 사람들은 기쁨의 환성을 올리며 하느님의 구원을 보게 될
것이다(제1독서). 하느님께서는 이제 당신의 아드님을 통하여 말씀하신다. 하느님 영광의 광채이신 그 아드님은 만물의 상속자일 뿐 아니라 그분의
강력한 말씀을 통해 만물이 지탱된다(제2독서).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그분께서는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으며,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으로서 이 세상에 오셨다(복음).
☆☆☆
오늘의
묵상
프랑스의 작곡가
메시앙은 현대 음악의 거장 가운데 하나이자 평생 가톨릭의 신비를 탁월하게 표현한 인물입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기 직전인 1944년에 그가
작곡한 피아노 독주를 위한 연작 ‘아기 예수를 바라보는 스무 개의 시선’은 놀라운 작곡 기법만이 아니라 그의 깊은 영성이 잘 드러난
걸작입니다. 연주 차원에서나
해석 차원에서나 매우 어려운 것으로 알려진 이 곡들을 1996년 피아니스트 백건우 씨가 서울 명동성당에서 연주하여 많은 이의 감동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해하기 쉽지 않은 음악이지만 두 시간에 가까운 연주를 직접 들었을 때 받는 진한 감동은, 이 음악의 주제인 ‘강생의 신비’가
더욱 생생히 다가오게 합니다. 성탄에 대한 복음
말씀과 많은 신학자와 영성가의 영향을 받은 이 작품의 곡명들은 오늘 복음을 묵상하는 데 좋은 영감을 줍니다. 이 곡에서 표현하는, 구유의 아기
예수를 바라보는 스무 가지 방향의 시선은 결국 아기 예수님에게서 인성과 신성이 하나 되어 있다는 신앙의 진리로 초점이 모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시선’, ‘별의 시선’, ‘성모님의 시선’, ‘목자들의 시선’, ‘천사들의 시선’, ‘사랑의 교회를 향한 시선’ 같은 곡명에서 아기
예수님에 대한 사랑에 찬 눈길을 만납니다. 또한 ‘침묵의 시선’, ‘시간의 시선’, ‘십자가의 시선’, ‘기쁨의 성령의 시선’ 등의 곡명에서는
심오한 신학적 사유의 흔적을 느낄 수 있고, 작곡가 자신이 말씀을 새기고 묵상한 체험과 확신을 전하는 것 같은 곡명들도 있습니다.
유난히 아름답고
서정적인 곡명의 하나는 이렇습니다. ‘나는 잠자고 있으나 나의 심장은 깨어 있다.’ 이 곡을 들으며 뛰어난 종교 철학자이자 착한 목자였던 독일의
클라우스 헴멜레 주교의 성탄 묵상이 떠올랐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셨네. 말씀이 심장이 되셨네. 하느님께서 심장을 가지셨네. 하느님의 심장이
뛰시네, 수백만 인간 심장의 맥박 안에서. 이제 우리는 알게 되었네. 사람의 심장 안에 살고 계신 분이 누구신지
……. 말씀이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심장 안에서 함께 숨 쉬십니다. 우리가 잠들거나 쓰러져도 그분께서는 우리 안에 사십니다. 우리를 깨워 주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시간 안에 들어오신 영원하신 분, 한처음에 하느님 곁에 계셨던 말씀,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아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예수님의 기쁜 성탄을 어떻게 맞이하셨는지요? 가족들과 함께 좋은 시간을 보내신 분들도 계실 테고, 또 어떤
분은 성탄자정미사에 참석하셔서 거룩한 시간을 보내신 분도 계실 것입니다. 또 친구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면서 기쁜 성탄을 맞이하신 분도
계시겠지요. 아무튼 어렵고 힘든 일이 있다 하더라도 잠시 잊고 예수님 성탄의 기쁨을 충만히 느끼는 오늘이 되길 바랍니다.
며칠 전, 저희
교구는 사제인사이동 발표가 났습니다. 이 발표에는 제 이름도 들어가 있었지요. 5년 동안 성소국장으로 지낸 시간이 참 빠르게 지나갔다는 생각과
함께 지금까지의 삶을 다시금 되돌아봅니다. 부족한 부분들이 떠오르면서 많은 반성을 하게 되네요.
사람들은 제게
부지런하고 성실하다고 하지만, 사실 스스로를 바라보는 제 모습을 그렇게 부지런하지도 또 성실하지도 못한 것 같습니다. 단순히 ‘새벽 묵상 글’을
오랫동안 써왔다는 것뿐 그리고 남들보다 조금 일찍 일어난다는 것 외에는 다른 부분에서 부지런한 모습도 그리고 성실한 모습도 간직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그것만 해도 대단하다고 이야기해 주셨고 저 역시 은근히 ‘이것만 해도 어디냐? 이 정도면 충분해.’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니 별 것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갓 태어난 아기를
생각해보십시오. 이 아기는 하루 종일 잠만 잡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루 종일 잠만 잔다고 해서 아기를 게으르다고 말합니까? 또 반대로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새벽잠이 거의 없으시지요. 그런데 이렇게 새벽잠이 없어 일찍 일어나시는 것을 부지런하다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기 때에는
잠을 자면서 성장이 되며,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이미 성장이 멈췄고 활동량이 적어 잠이 없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갓 태어난
아기의 수준은 아니지요. 중년의 시기에 들어선 지금, 저는 잠만 자고 게으름을 피울 시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당연히 열정적으로 활동해야 하고,
특히 주님의 뜻을 깨닫고 실천할 수 있는데 최선을 다할 시기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런 위치에 있으면서도 몇 가지 지금 하고 있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면 커다란 착각이고, 자신의 임무에 충실하지 못한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어젯밤에 이 땅에
오신 아기 예수님도 분명히 잠만 잤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잠만 자는 모습에 계속 머무르시지 않습니다. 나이 서른이 되어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면서 공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십니다.
하느님께서도 낮아질
대로 낮아져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마치시고 다시 하늘 나라로 가셨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해야 할까요? ‘이 정도면 되었어’라는 안일한 마음은 벗어 던지고, 대신 지금의 자리에서 주님의 일을 하는데 최선을 다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런 우리가 되라고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오늘 오셨습니다.
사랑이란 서로
마주보는 것이 아니라 둘이서 똑같은 방향을 내다보는 것이라고 인생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다(생텍쥐페리).
집중의
힘(‘좋은생각’ 중에서)
미국 메이저리그의
마지막 4할 타자로 불리는 테드 윌리엄스. 그는 1941년 메이저리그에서 타율 4할 6리라는 전설적인 기록을 달성했다. 야구에서는 3할도 훌륭한
기록이라고 하는데 4할의 타격은 신의 경지라고 불릴 만큼 어려운 것이다. 70년이 지났지만 아직까지 4할대 타자가 나오지 않았다.
많은 사람이 비결을
궁금해하자 그는 ‘타격의 과학’에서 이렇게 밝혔다.
“먼저
셀(Cell, 작은 방) 하나를 야구공 한 개 정도의 크기라 치면, 스트라이크 존을 77개의 셀로 나눕니다. 다음으로 77개의 셀 가운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세 개 반’의 셀에 공이 들어올 때 타격합니다.”
테드 윌리엄스는
자신이 가장 잘 칠 수 있는 코스에 들어오는 공에 집중했던 것이다.
우리는 살면서 아무
공에나 방망이를 휘두르고 있지 않은가? 이제는 삶에서 공 세 개 반의 ‘최상의 셀’을 파악해 그곳에 집중해 보자.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내용 같아서 그대로 옮겨 보았습니다. 할 수 없는 것에 집중해서 더 큰 아픔을 간직하게 되는 것보다는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해서 가능성을
더욱 더 활짝 여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바로 이분이 참
빛, 만물 생성의 힘
-이기정신부-
한창 일할 나이면
모두 바쁩니다. 나름대로 분야별 박사같은 기분입니다. 자신의 부족은 적은 수입이 문제지 더 배울 다른 문제는 잘 모릅니다. 지성 이성 감성
그리고 나는 무엇인지에 무관하며 그간 배운 게 답니다.
바쁜 세월 지나
안정되고 한계를 느끼고 주변에서 죽어들 가면 다르지요. 그제야 인생의 참 빛, 대자연 생성, 인류 진행에 관심 두고 찾아 나서지요. 요한사도는
이 문제에 대해 간략하게 알리며 세상은 이를 몰랐었다 합니다.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요한
1,9~10)”
오늘
밤 우리 구원자 주 그리스도 탄생하셨습니다!
-이수철신부-
오늘
밤 마침내 고대하던 우리 구원자 주 그리스도께서 뉴튼수도원에 탄생하셨습니다.
제
영혼의 고향, 요셉수도원에서 26년 사는 동안
수도원을
떠나 다른 곳에서 성탄을 지내기는 꼭 두 번입니다.
첫번은 2002년
미국 미네소타주에 있는 생존 수도원(St. John' Abbey)이고,
이번
2014년은 여기 미국 뉴저지주에 있는 뉴튼수도원(St. Paul's Abbey)입니다.
하느님은
뉴튼수도원에서 탄생하실 주님을 맞이하라고
저를
안식년에 잠시 뉴튼수도원에 파견하셨습니다.
그동안
대림시기, 뉴튼수도원 형제들은 성탄츄리나무를 판매하며 주님의 길을 충실히 닦아 왔고
마침내
오늘 밤, 형제들이 닦은 길을 통해 우리 구원자 주 그리스도 오셨습니다.
이사야
예언이 마침내 오늘 실현되었습니다.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봅니다.
암흑의
땅에 사는 이들에게 빛이 비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즐거움을 많게 하시고, 기쁨을 크게 하십니다.
사람들은
주님 앞에서 기뻐합니다(이사9,1-2ㄱ)'.
이사야를
통한
하느님의
빛나는 비전, '그리스도의 평화의 빛'이 칠흑같은
어둠을 대낮같이 환히 밝힙니다.
'정녕
주님께서는 우리가 짊어질 멍에와,
어깨에
멘 장대와,
부역
감독관의 몽둥이를,
미디안을
치신 그날처럼 부수십니다.
오!
우리에게 한 아이가 태어났고, 우리에게 한 아들이 주어졌습니다.
왕권이
그의 어깨에 놓이고,
그의
이름은 놀라운 경륜가, 용맹한 하느님, 영원한 아버지, 평화의 군왕이라 불리리이다.'
(이사9,3.5).
이사야
예언자의 숨가쁜 감격에 넘친 고백입니다.
신실하신
하느님이십니다.
우리
모두 그리스도를 탄생시키신 하느님을 찬미합시다.
주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셨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 맛나는 인생이, 세상이 되었습니다.
탄생하신
주님이 계시지 않으면 도대체 무슨 맛, 무슨 기쁨으로 이 사막같은 세상을 살아갑니까?
이
어둠의 시대에 빛으로, 절망의 시대에 희망으로, 죽음의 시대에 생명으로,
주
그리스도께서 오늘 우리 모두의 '마음의 구유' 안에 탄생하셨습니다.
이
벅찬 기쁨을 잠시 가라 앉히고
아기
예수님은 어디서 태어나셨고,
누가
이 복된 탄생을 체험했으며,
그
탄생의 축복은 무엇인지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첫째,
예수님은 어디서 탄생하셨습니까?
베들레헴에
있는 마뭇간 구유 안에 탄생하셨습니다.
아주
상징적입니다.
하느님의
역설입니다.
바로
다음 대목이 은혜롭습니다.
'그들(마리아,
요셉부부)은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뉘었다.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루카2,7).
하느님의
가난과 겸손의 극치입니다.
세상에
이보다 더 낮을 수는, 더 작을 수는, 더 비울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이런 가장 낮은 어둠의 자리 누추한 곳에 탄생하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하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의 눈에 철저히 숨겨져 있는 예수님의 탄생입니다.
예수님의
운명을 예고하는 탄생입니다.
평생을
낮은 자리에서 가난하고 불쌍한, 고통 받는 이들과 끝까지 함께 하시다
마침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의 삶이,
비천한
구유 안에서의 탄생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세상
그 어떤 위인이 이런 비천한 자리에 탄생했습니까?
가난한
이들, 상처받은 이들, 소외된 이들에게는
주님의
이런 비천한 데서의 탄생 자체가 복음이요 위로요 치유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님은 결코 화려하고 안락한 고대광실에서 탄생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도
어둡고 추운, 소외되고 가난한 자리에서 탄생하십니다.
둘째,
예수님의 탄생을 체험한 이들은 누구입니까?
밤의
침묵과 고독 중에 깨어 있던 들판의 양 떼를 지키는 목자들이었습니다.
목자들은
가난한 이들의 상징입니다.
다
잠들어 있던 밤, 깨어 양떼를 지키던 가난한 목자들만이 주님 탄생을 체험했습니다.
그
기라성 같은 신학자나 종교지도자들, 부유한 이들이 아닌,
깨어있던
가난한 목자들만이 주님 탄생을 목격했으니 바로 이것이 복음입니다.
주님의
천사가 이들에게 다가오고, 주님의 영광이 목자들 둘레를 환히 비춥니다.
오늘
밤, 목자들과 함께 깨어 주님 탄생을 기다리는 우리를 향한 주님의 천사의 음성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뉴튼수도원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루카2,10-11).
전능하신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은
시공을 초월하시는 분이십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면 여기 가난한 수도자들이 살고 있는 뉴튼수도원이 바로 다윗 고을 베들레헴입니다.
셋째,
예수님의 탄생의 축복은 무엇입니까?
무엇보다
하느님의 영광을 찬미할 수 있는 기쁨과 평화의 선물입니다.
다음
대목이 이를 입증합니다.
-그때에
갑자기 그 천사 곁에 수많은 하늘의 군대가 나타나 하느님을 이렇게 찬미하였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2,13-14)-
얼마나
신명나는, 은혜로운 장면입니까?
예수님
탄생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하느님의 축복이 차고 넘칩니다.
하느님께는
영광, 사람들에게는 평화, 세상에 이보다 더 큰 축복은 없습니다.
영광과
평화, 예수님의 삶의 요약이자 우리 믿는 이들의 희망이 압축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하느님께는 영광이 되고, 이웃에게는 '평화의 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평화보다 하느님께 영광이 되는 것은 없습니다.
'영광과
평화', 이것이 우리 구원의 양면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바오로의
말씀대로
오늘
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는 하느님의 은총이 나타났습니다(티토2,11).
바로
주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습니다.
주님
탄생을 고대하며 깨어 기다리던 우리들의 '가난한 마음의 구유' 안에
우리
구원자 주 그리스도 예수님 탄생하셨습니다.
탄생하신
주 그리스도의 은총이, 우리 모두를 교육하여, 불경함과 속된 욕망을 버리고,
현세에서
신중하고 의롭고 경건하게 살도록 해 줍니다(티토2,12).
우리
모두 하늘의 천사들과 함께 소리 높여 하느님을 찬미합시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2,14).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주님 성탄의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가득히 내리시길 바랍니다.
아멘.
-조재형신부-
‘하늘 높은 곳에는
하느님께 영광
땅 위에서는 마음이
착한 이에게 평화’
주님의 성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6부작인
‘인류,
우리 모두의
이야기’를
보았습니다.
사자보다 용맹하지
않고,
독수리보다 멀리
보지 못하고,
곰보다 힘이 세지
못하고,
말보다 빠르지 못한
사람들이 어떻게 해서 놀라운 문명과 역사를 이룩하였는지를 보여주는 다큐멘터리였습니다.
인류는
‘신화의
시대,
신학의
시대,
인문학의
시대,
공감의
시대’를 거쳐서 여기까지
왔다고 합니다.
거대한 자연의 힘
앞에 나약했던 인간은 자연재해와 다른 동물들의 위협 속에서 생존의 위협을 느끼며 살아야 했습니다.
다른 동물이 가지지
못했던 상상력을 가진 인간은 절대자인 하느님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조직을 만들었고,
하느님의 개입으로
많은 질문에 대한 답변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말과 글 그리고
도구의 사용은 인간이 가진 최대의 강점이었습니다.
이제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게 되었고,
더 넓은 세상을
향해서 발걸음을 내 딛게 되었고,
이제 인간의 유일한
경쟁 상대는 ‘인간’이
되었습니다.
서로 다른 신의
이름으로 인류는 싸우고 정복을 하였습니다.
이제 인류는 긴
‘신학의
시대’를 살게
됩니다.
교회,
사찰은 삶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신학의 시대에
인류는 질병,
고통,
자연재해를 하느님의
뜻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인간에게 심어주신
하느님의 모상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함께 손을 내밀기를 원하셨습니다.
구원의 역사는
하느님과 인간이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인간은 내면에
감추어졌던 능력을 꽃피우기 시작합니다.
‘르네상스’는 그
출발이었습니다.
미술,
음악,
건축,
문학,
철학,
과학이 인류 앞에
놓인 문제들에 새로운 답을 주었습니다.
산업혁명은 다양한
제품의 생산을 대량화하게 되었고,
인류는 풍요로운
세상에서 국민을 위한,
국민에
의한,
국민의 정부를
만들어 가게 되었습니다.
지난
50,000년 동안 있었던
인류의 증가는 지난 50년 동안
이루어졌습니다.
이제 인류는 공감의
시대,
접속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공감의 시작은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사건에서 시작됩니다.
접속의 시대는
말씀이 사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인류의 시작부터 늘
일관되게 이어져 오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여러분이 원하는
것을 이웃에게 해 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류의
이야기의 알파요,
오메가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사랑의 시작입니다.
성탄
축하드립니다.
우리의 구원자
예수님
-반영억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셨습니다. 성탄을 함께 기뻐하며 주님께서 베푸시는 사랑과 평화가 온 세상과 여러분 안에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서로 인사하시겠습니다. 축하의 인사를!
성탄 축제를
준비하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동안에 노력했던
정성과 수고와 땀에 대해서 하느님께서 넘치도록 갚아주실 것입니다. 고해성사를 통해 맑은 영혼을 간직하게 되었고 특별강론에 귀 기울이면서
영적양식을 충만히 채웠습니다. 지역어르신을 위한 사랑의 점심나누기에 마음을 모았고. 어린이들과 더불어 사랑의 축제를 준비하셨습니다. 모두가
한마음, 한 뜻이 되어 하느님을 찬미하고 서로의 친교와 일치, 실천하는 사랑을 위해 노력한 순간들이 주님을 잘 낳아드리고자 애쓴 모습이고
그러기에 그만큼 주님께서 기뻐하셨으리라 확신합니다. 앞으로도 매사에 열성과 정성으로, 사랑으로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빛으로
오셨습니다. 맑고 밝은
빛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우리의 어둠을 몰아내고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기뻐하십시오. 맑고 거룩한 마음을 지닌 사람들은 기뻐하십시오. 그리고
어둠에 사로잡힌 사람도 기뻐하십시오. 주님께서 당신의 빛으로 비추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신 나머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당신의 외아들을 내어 주셨습니다. (요한3,16)
그리고 성탄은 바로 하느님의 사랑을 보고 만질 수 있도록 구체적으로 드러내준 날입니다. 이 세상에 오신 아기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사랑을 볼 수
있도록 해주는 빛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성탄은 아낌없이 내어주는 ‘사랑과
나눔’의 부르심이며
요청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메마른 곳에 사랑을 전하고, 위로가 필요한 곳에는 위로를 주며, 용기를 잃은 이에게는 격려를 해 주는 성탄절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사도4,12) 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2독서를 보면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시어, 우리를 불의에서
해방시키시고 또 깨끗이 하시어, 선행에 열성을 기울이는 당신 소유의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바로 인간을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여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해서 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시기 바랍니다. 한번
불러볼까요? 예수님! 예수님! 이 이름에는 무슨 뜻을 담고 있지요? “하느님께서는
구원이시다.”
‘예수’라는 이름은
히브리어 ‘여호수아’를 그리스어로 옮긴
것으로 ‘하느님께서는
구원이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이름은 우리를 구원하는 이름입니다. 따라서 많이, 자주 부르십시오.
그런데 그 구원자
예수님께서는 어디서 태어나셨느냐? 복음을 보면
“그들은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뉘였다.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방이
없었다는 것에 마음을 둔다면 그분께 내어드릴 방이 없었던 것이지 방은 얼마든지 있었다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오늘도 여전히
가난하고 비천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지만 이런 핑계, 저런 핑계로 주님을 외면할 때가 많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분이
구세주요, 나를 구원하실 왕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렇게 문전 박대하였을까요?
결국 그분은 구유에
뉘여 졌습니다. 그리고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눕혀진 아기의 모습이 그분의 생애를 말없이 일러주고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구유는 밥통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 들어있어야 하는
것은 밥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바로 밥으로 오셨습니다. 밥은 자기를 완전히 내어 주어서 다른 이의 영양이 됩니다. 자기는 죽고 남을
살립니다. 그리고 우리는 밥을 먹지 않으면 살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밥이 되셨고 오늘도 미사 안에서 성체 성사를
통해서 그 밥을 끊임없이 주십니다. 공짜로 주십니다. 그러나 밥상이 주어져도 매일같이 그 밥을 먹는 사람은 많지 않으니 안타까울 뿐입니다.
이사야서 1장 3절에 보면
“소도 제 임자를
알고 나귀도 제 주인이 놓아준 구유를 알건만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구나.”(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철없이 구는 구나) 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느님의 안타까운 마음을 상기시켜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바로 주님께서 구유에 뉘여 졌다는 것은
이 말씀을 상기시켜 주는 겁니다. 구세주로 오신 그리스도, 빛으로 오신 왕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구나! 안타까운 마음을 일깨워줍니다.
천사가 목자들에게
나타나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하고 주님의 탄생에
대한 기쁜 소식을 선포하고 마침내 수많은 하늘의 군대가 하느님을 찬양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찬양했다는 것은
결국 하느님의 백성이 주님의 구유를 알아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야말로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되었습니다.”(필리2,6-12)
그러므로 귀한 아기
예수님께서 가장 낮고 천한 마구간 구유에 누우신 이유를 새롭게 일깨우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밥이 되어주신
예수님을 기억하며 모든이에게 모든 것,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필요가 되어주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구세주 탄생의
기쁨을 함께하며 다시 한번 축하 드리고 매일 매순간 우리의 마음 안에 구세주 예수님을 모셔 드리고 또 낳아드리기를
희망합니다.
사랑합니다.
나의
성탄
-양승국신부-
성탄을
목전에 두고서야 화두 한 가지가 제 머릿속에 떠올랐습니다.
여기
저기 그럴듯하게 장식된 예수님 탄생 구유를 바라보며 든 생각입니다.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 주변으로 성탄과 관련된 주요 인물들이며 동물들이 둘러서 있었습니다.
다들
나름대로 아기 예수님의 성탄에 기여한 존재들입니다.
그러면서
든 제 개인적인 성찰꺼리는 이것이었습니다.
‘나는
과연 이번 아기 예수님의 성탄에 기여한 바는 무엇인가?’
지난
대림시기 제 삶을 돌아보며 참으로 부끄러웠습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아기 예수님의 성탄에 대한 준비도,
봉헌도,
기여도
너무나 부족했습니다.
늦었지만
성탄 미사를 앞두고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아봅니다.
아무리
성탄이 수천 번 되풀이된다 하더라도 내 안에 아기 예수님께서 탄생하시지 않으면 그 성탄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성탄으로 인해 나 역시 다시 태어나고 새 삶을 시작할 때 성탄은 비로소 의미를 지니기 시작합니다.
내
삶이 변화되고 내 삶이 좀 더 빛을 발하며,
그로
인해 내가 좀 더 이웃들과 화목하게 지내고,
나로
인해 주변이 더 행복해질 때 아기 예수님의 성탄은 바로 나의 성탄이 되는 것입니다.
마리아와
요셉,
목동들뿐만
아니라 말들과 소들도 나름대로 아기 예수님 탄생에 한 역할을 합니다.
그렇다면
말들은 무슨 역할을 했습니까?
이스라엘의
12월
기후가 우리나라처럼 영하로 떨어지지는 않지만 그래도 꽤 추운 날씨입니다.
한
동화 작가의 표현에 따르면 말들은 자신의 콧김과 입김으로 갓 태어난 아기 예수님의 체온 유지에 크게 한몫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소들은 또 무슨 역할을 했겠습니까?
아기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마구간 안에는 동물들 냄새로 인해 파리와 모기들이 꽤나 날아다니고 있었는데,
소들은
가끔씩 꼬리를 이용해 아기 예수님의 얼굴로 날아드는 녀석들을 쫒아내곤 했답니다.
이
미사 동안 성탄시기를 지내며 내가 그분의 성탄을 내 삶 안에 어떻게 지속시켜나갈 것인가,
어떻게
육화시켜나갈 것인가,
어떻게
적용시켜나갈 것인가,
한번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칠레의
유명한 시인 파울로 네루다(1904~1973)의
표현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통해 우리도 진실로 태어납니다.”
다시
말해서 그분의 마구간 탄생으로 말미암아 우리들의 출생도 비로소 의미를 지니고 빛을 발한다는 것입니다.
독일의
심리학자 에릭 프롬(1900~1980)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삶의 첫 번째 과제는 자기 자신에게 빛을 주는 것입니다.”우리
인간은 본질상 너무나 나약해서 스스로 빛을 줄 힘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 삶에 빛을 줄 수 있는 존재입니다.
결국
우리 삶이 지속적으로 빛을 발하려면 우리 안에 아기 예수님께서 매일 계속해서 탄생하시고 성장하셔야한 합니다.
아기
예수님의 성탄은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해 더 성찰하고,
자신의
생애에 더 의미를 부여하고,
자신의
인생에 대해 더 사랑하라는 초대입니다.
이
은총의 시기 우리는 아기 예수님의 성탄을 바라보며 우리 각자의 출생의 이유를 생각해야 합니다.
아름답게
꾸며진 성탄구유를 바라보며 그저 ‘멋있다!’
‘아름답다!’
외치며
사진만 찍을 일이 아닙니다.
이번
성탄 우리 모두 성탄구유 앞에서 해야 할 과제가 한 가지 있습니다.
아기
예수님의 마구간 탄생이 지니는 단순함의 가치,
본질적인
것의 가치,
침묵의
가치,
평화의
가치,
기쁨의
가치,
사랑스러움의
가치를 되새겨보는 것입니다.
아기
예수님의 탄생으로 우리 인생도 비로소 참된 의미와 가치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그분의
탄생으로 우리의 출생도 빛을 발하게 되었습니다.
그분의
탄생으로 우리도 참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은혜롭고 고마운 아기 예수님의 성탄입니다.
말구유의
사랑과 배고픔
-기경호신부-
오늘 하느님께서
연약하고 비천한 모습으로 말구유에 태어나셨다. 그분은 우리처럼 땀 흘려 일하고, 고민하고, 슬퍼하며, 고통을 겪고, 몰이해와 궁핍 중에
사심으로써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희망과 기쁨을 잃지 않고, 우정과 사랑을 나누며 살도록 가르치기 위하여 오셨다. 살맛나는
세상이 되도록 스스로 인간의 살을 취하셨다. 그러니 그분의 탄생을 기뻐하자!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것은 비천하고 죄 많은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우리에 대한 그분의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의 표지이다. 우리네 현실은 더욱 어두워져 가는 것
같다. 경제적 어려움은 사람들을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으로 내몰고, 사회적 종교적 갈등은 사람들에게 불신과 체념, 절망이라는 그림자를 안기고
있다. 무엇보다도 존엄한 인간보다 돈을 더 중요시 하는 자본의 우상화는 심각하다. 연약하고 불안에 떨고 있는 우리들 앞에 그분은 가장 비천하고
초라한 모습으로 오셨다. 하느님께서는 그렇게 기가 죽고 아파하고 쓸쓸해하고 외로워하는 우리와 함께 하기 위하여 당신 친히 ‘연약함의 순종’을
통하여 사랑으로 다가오신 것이다. 하느님께서 육(肉, caro)을 취하신 참으로 거룩하고 엄청난 신비는 그분의 우리 인간에 대한 사랑의 표현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1223년
그레치오에서 성 프란치스코는 구유를 만들고 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랑의 신비를 온 마음을 다해 회상하고자 했다. 그때는 로마에서 천신만고 끝에
수도규칙을 인준 받은 직후였다. 그는 말했다.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 아기를 기억하고 싶습니다. 아기가 겪은 불편함을 보고 싶고, 또한 아기가
어떻게 구유에 누워 있는지를 나의 눈으로 그대로 보고 싶습니다.”(1첼라노 84) 프란치스코의 원의대로 사람들은 구유를 준비했다. 그는 가난한
임금의 탄생과 작은 마을 베들레헴에 관하여 이야기하였다. ‘예수님’이나 베들레헴의 아기라는 말을 할 때에, 그의 혀는 그 감미로움에 입맛을
다시며 맛과 향기를 맛보는 듯 했다.
그레치오는 밤인데도
대낮같이 환히 밝았다. 비록 고달프고 힘들지만 성탄의 신비가 드러나는 지금 여기도 마찬가지이다. 진정한 태양, 그리스도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 마음은 더욱 밝다. 우리 가슴에 진정한 태양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레치오 구유에서 어떤 사람은 놀라운 한 환시를 보았다. 그는
어린 아기가 말구유에 생명 없이 누워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프란치스코가 다가가서 마치 잠에서 깨어나게 하듯 그 아기를 소생시키는 것을
보았다. 그렇다! 그는 자기 가슴속에서 잠자고 있던 예수님께서 깨어나심을 체험했던 것이다. 바로 오늘 밤 다시 한 번 우리의 가슴에서도 이러한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다. 우리의 무관심과 이기심, 게으름에 짓눌려 죽어가던 예수님께서 다시 깨어나신 것이다.
오늘 우리를
구원하실 구세주, 아기 예수님이 태어나셨다. 연약함 속에서 모든 생각과 행동을 선으로 향하게 하는 거룩함의 힘, 마음의 문과 가슴의 벽을 허무는
사랑의 힘이 바로 오늘 나신 아기 예수님의 선물이다. 말구유에 오신 주먹만 한 분이 우리 편이 되셨다. 시대가 어렵고 사람 관계에서 오는 고통이
적지 않아도 변함없이 기다려주시고 마음을 풀어주실 분이 오셨다. 우리는 우리의 어두움을 비추어 줄 빛을 그리워한다. 우리의 고통을 덜어줄 약을,
아픔을 어루만져주고 슬픔을 위로해 주며 고독한 우리와 함께 할 그 빛이 오늘 우리 가운데 오셨다. 이제 내 힘이 아니라 빛으로 오신 그분과 함께
일어서는 빛으로 힘을 내어 다시 앞을 보며 걸어가자.
우리는 내 안의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을 어떻게 키워야 할까? 베틀레헴 사람들은 그분께 방한 칸조차 마련해드리지 않았고(루카 2,7), ‘빵집’ 베틀레헴에서 빵
한 조각 드리지 않았다. 주님은 그렇게 연약하고 초라한 모습으로 오셨다. 성탄의 기쁨은 우리가 밥이 되어 오신 분처럼 다른 이들의 밥이 될 때
나의 기쁨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늘도 길거리에서, 어느 시장 모퉁이에서, 싸늘한 지하도에서, 북녘 땅에서 배고픔에 떨고 있다.
우리 앞에는 비어
있는 말 밥통이 놓여 있다. 사랑에 굶주린 이들의 목마름이 배어 있다. 우리는 여기에 무엇을 채울 것인가? 시련 앞에서의 용기, 미워하고 용서
못하고 지내는 옹졸한 마음 떨어내기, 사회적 약자들을 예수님의 마음으로 어루만져드림, 육체적 정신적으로 아픔을 겪는 이들과 함께함, 서로에 대한
존중과 격려, 세속적인 것과 적당히 타협하는 어리석은 마음의 청산 등. 이런 것들로 빈 구유를 채우는 것이야말로 성탄의 참 기쁨을 사는 길이
되지 않을까? 그렇게 살아갈 때 초라한 말구유가 우리의 마음이 담긴 금빛 성작으로 바뀔 수 있으리라! 나의 가난하고 겸손 마음만이 예수님을
탄생시킬 수 있고, 나의 거룩한 행실만이 예수님을 살릴 수 있음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거룩한
예물
-인영균신부-
“정녕
말씀이 ‘살’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당신 ‘장막’을 치셨습니다”(요한 1,14).
Celtic
Woman이라는 여성 그룹이 부르는 ‘O Holy night’라는 성가가 컴퓨터에서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목소리가 참 좋습니다. 정말
감미롭습니다. 제 마음도 성가 소리와 함께 베들레헴으로 달려갑니다. 어떤 놀라운 일이 일어났나요? 창조주 하느님이 우리처럼 작은 피조물이 되시어
당신 거처를 우리 가운데 마련하셨습니다. 요한 복음사가는 이 놀라운 신비를 강조하기 위해서 ‘살’이라는 그리스어 단어를 사용합니다. 우리가 직접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살덩어리, 곧 물질로 오셨음을 말합니다. 저 멀리 계시는 하느님이 아니라 우리와 온전히 하나가 되시는 이 땅의
하느님을 우리는 느낄 수 있습니다.
이제
베들레헴은 저 멀리 이스라엘 땅에 있지 않습니다. 내가 있는 이곳에 있습니다. 우선 우리 마음에, 그리고 우리 공동체와 우리 집에 당신 거처를
정하셨고 이미 살고 계십니다. 또한 잊지 않고 기억합니다, 세월호에서 영문도 모른 채 죽어야만 했던 우리 아이들 하나하나가 아기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살고 있음을. 아파하는 힘들어 하는 눈물 흘리는 이들의 마음에 아기 예수님은 태어나셨습니다. 거룩한 날, 주님께 달려가 우리의 관심과
사랑을 예물로 드립시다.
성탄을
축하드려요 ^^
< 그리스도를
만나는 길 >
-전삼용신부-
요즘 참 보기 좋은
두 쌍의 부부가 살아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한 부부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란 영화에 나오는
76년간 부부생활을 해
왔던 노부부이고,
또 다른 한 부부는
요즘 ‘힐링캠프’에 나온 기부천사
‘션과
정혜영’
부부입니다.
이들이 이렇게
현대인들의 마음을 울리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이 부부들의
변하지 않는 사랑 때문입니다.
정혜영씨는 아이를
넷이나 키우면서도 점점 더 남편 션이 좋아진다고 말합니다.
이 남편들은 어떻게
했기에 아내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것일까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에서는 오랜 세월
함께 걸어왔던 한 노부부가 이별을 준비합니다.
마지막 할아버지가
98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을 때 할머니는 눈 내리는 추운 무덤 앞에 주저앉아서 “우리 영감 불쌍해서
어떻게 해...
생각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라며 슬피
우십니다.
밤새 기침만 하시고
힘도 다 떨어진 98세 노인이 평생
부인에게 어떻게 했기에 76년이나 함께
살았음에도 죽음을 그렇게 슬퍼하는 것일까요?
할아버지는 젊었을
때 할머니 집에 들어와 일을 하다가 할머니가 14세 때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3년 동안 같은 방을
쓰면서도 할머니를 건들지 않았습니다.
그저 잘 때 얼굴을
쓰다듬는 것뿐이었습니다.
할머니가
17살이 되어서
할머니가 스스로 원하게 되었을 때 진정한 부부가 되었다고 합니다.
어린 신부를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영화 내내 이
할아버지의 그 순수했던 사랑이 변하지 않았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할아버지에게는 오직
할머니밖에는 없습니다.
낙엽을 던지며 혹은
물을 뿌리며 장난을 치지만 꽃을 꺾어 할머니에게 건네주는 모습은 신혼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는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할아버지는 한결같이
할머니를 사랑해 오셨던 것입니다.
이 할아버지의
변함이 없는 모습을 보며 할머니는 다른 사람은 못 믿어도 할아버지만은 믿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션도 정혜영에게
마찬가지입니다.
가수와 연기자로
만나 대한민국 대표 잉꼬부부로 단 한 번도 싸운 적이 없는 부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션은 아내와 함께
10년 동안
35억을 기부하였고
지금도 더 많은 좋은 일을 하기 위해 뼈가 부서져라 달리고 있습니다.
션의 아내
정혜영씨는 매일매일 남편이 더 사랑스럽고 존경스럽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자신에
대한 사랑을 의심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션의 한결같음이
아내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고 그가 하는 모든 일에 동의를 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션은 결혼을 때도
외적인 것 때문에 결혼의 참 의미가 퇴색될까봐 축의금을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은 비록
전셋집에 살지만 더 불쌍한 이들을 돕기 위해 모든 힘을 쏟습니다.
그에게 항상 첫째가
아내이고 둘째가 가족이며 셋째가 가난한 이들입니다.
이것을 철저히 믿게
생활하기 때문에 정혜영씨는 혼자 아이 넷을 키우며 전셋집에 살아도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단
1초도 션과 결혼한
것을 후회해 본 적이 없다고 합니다.
아주 단순한 말
같지만 또한 가장 하기 힘든 일은 남편이 아내에게 믿음을 주는 것입니다.
믿음을 주기
위해서는 자신이 약속한 것을 반드시 지켜야만 합니다.
작은 약속을 안
지키는 것이 습관화되다보면 그 사람 자체에 믿음이 가지 않게 됩니다.
따라서 아내에게
믿음을 주기 위해서는 자신의 입에서 나온 말은 반드시 실현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다보면 아내의 믿음은 더 큰 사랑이 되어 남편에게 향하게 됩니다.
믿음이 없는
분위기에서는 외적인 모든 것이 다 갖추어지더라도 절대 행복할 수 없습니다.
옛날 도둑 셋이
의형제를 맺고 생사고락을 같이 하기로 맹세했습니다.
어느 날 부잣집을
털어서 큰돈을 소유하고는 서로 욕심이 생겼습니다.
한 도둑이 술을
사러 마을로 간 사이에 두 사람이 의논을 하였습니다.
우리가 저놈을
죽이고 둘이서 나누면 몫이 더 많아질 것이 아닌가?
그러나 한
도둑,
역시 생각이
있었습니다.
두 놈을 다 죽이면
모두가 내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오는 길에
술에 독을 타서 가지고 왔고,
두 도둑은 술을
사온 형제를 돌로 때려 죽였습니다.
그리고 술을
마셨습니다.
결국 하나는 돌에
맞아 죽고,
둘은 독이 든 술을
먹고 죽고 말았습니다.
남을 속여먹는
도둑이 무슨 믿음이 있겠습니까?
온 세상을 다
가진다고 하여도 도둑끼리는 믿음을 지킬 수 없어 항상 불안하고 고통스럽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가는
사람과 사귀어야 하는데 믿음이 가는 사람을 찾으려면 당연히 그의 말에 틀림이 없는지 시험해 봐야 합니다.
믿으려면 그가 하는
말이 틀리는지 안 틀리는지 확인을 해 보아야 하는 것은 기본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관계를 맺으면서 이런 노력도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느님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천사가 목동들에게 나타나 구원자가 태어나셨다는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마무리합니다.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
그러니까 천사가
나타난 것은 구세주 탄생의 표징이 아니란 것입니다.
그 표징을 알려
주는 역할을 할 뿐이고,
오히려 알려준 대로
구유에 누워계신 아기 예수님이 표징인 것입니다.
천사는 그저 말씀을
전하는 메신저일 뿐입니다.
진짜 표징은 그
천사의 말이 실제로 일어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엘리사벳이 성모님께
복되시다고 할 때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45)
즈카리야의 문제는
무엇이었습니까?
천사가 말한 것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벙어리가
되는 벌을 받았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확인될 수 있는 것을 미리부터 믿지 않고 시험해 보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목동들은
천사들의 말을 믿었습니다.
아니 어쩌면
반신반의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천사의
말대로 아기가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있는 것을 보고는 확증을 얻게 되었고 믿게 되었습니다.
우리 또한 하느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볼 때에야 믿게 되고 그분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러나 그 말씀이
이루어지는지 이루어지지 않는지 시험해보지도 않고 보려고 노력하지도 않는다면 어떻게 그분께 대한 믿음에 다다를 수 있겠습니까?
션은 독실한 개신교
신자로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행복하다”라는 말을 시험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진정 주는
것이 더 행복하기에 하느님을 더 믿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어쩌면
천사가 나타나 마구간에 가서 구유에 누워있는 아기를 보라고 해도 가지 않으려 하는 모습과 같을지도 모릅니다.
믿음은 말씀이
실제로 이루어지는지 이루어지지 않는지 시험해 보는 것에서 자라납니다.
성경 말씀은 마치
천사의 말처럼 우리가 그대로 해 보라고 주어진 믿음을 증가시키기 위한 도구인 것입니다.
그리고 믿게 되면
행복해집니다.
예수님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래서 고정원씨는
자신의 가족을 살해한 유영철을 자신의 양자로 삼았습니다.
정말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한다는 말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랬더니
유영철로부터 피해를 입은 가족 중에 유일하게 고정원씨 가족만 정상적인 생활을 하게 되었고 용서하지 않은 이들은 그 미움 때문에 알코올 중독이나
자살 등으로 집안이 풍비박산이 났습니다.
고정원씨는 이 모든
것을 보고 그분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짐을 믿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실제로 해
보지 않으면 믿음을 증가시킬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용서
자체를 하려는 노력을 해보지도 않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성경에서는
‘항상
감사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저는 영원한
불만족인 내 속의 자아,
즉,
뱀을 죽이기 위해
매일 감사한 일을 5개씩 쓰고 자라고
합니다.
물론 그 말을
따르는 이들도 있고 따르지 않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 말을 따른 분은
일하다가 손가락이 두 개 잘려나갔어도 바로 그 순간 손목이 다 잘리지 않아 감사하다는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만약 항상 감사하는
습관을 키우지 않았다면 자아가 커져서 불평하게 되고 더 안 좋은 방향으로 갔을 지도 모릅니다.
또 어떤 할머니는
판공을 주는데 당신이 지금까지 오랜 세월을 살아오면서 고해할 거리가 없는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라고 하셨습니다.
바로 하루에
3가지씩 감사한 것을
수첩에 적으면서부터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실제로 해
보고 그분의 말씀은 틀림없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게 되면 진정 믿음이 커지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에서
우리가 바로 시험해 보아야 하는 것은 바로 ‘십일조’입니다.
그것만큼은 하느님도
시험해 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거짓말을
하지 않거나 이웃을 자신처럼 여기고 내어주는 삶 등 너무도 많습니다.
이런 것을
살아가면서 하지 않는다면 예수님을 만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우리도 천사의
말처럼 그리스도를 만났던 목동들처럼,
성경의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를 만나 기쁨에 가득 찼으면 좋겠습니다.
-한상우신부-
"보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
최초의
마음또한 기쁨과
사랑이었습니다.
사랑안에
탄생이 있기
때문입니다.
작은 사랑
하나가 어두운
세상을 훤히 꿰뚫어
빛나게 하여줍니다.
회심의
자리가 성탄의
자리입니다.
성탄의
자리는 사랑하기로
결심한 이들의
자리입니다.
사랑은
무엇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도
충분한 선물임을
성탄은 일깨워
줍니다.
우리 마음의
근처를 서성이시는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에
탄생하시기 때문입니다.
성탄의
선물은 우리 마음이
열리는 마음의
탄생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열려야 소중한
이웃들 소중한
가족들을 알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두려운 우리의
마음이 하느님을
신뢰하는 평화의
마음으로 바뀌기를
기도드립니다.
악착같이
부여잡고 있는 것을
내려놓아야 사람이 되어오신
하느님을 알아 뵐 수
있습니다.
과거에 머물러있는
우리를 오늘의
성탄으로 이끌어
줍니다.
소중한 걸
잊지않는 소중한 성탄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하느님의 언어는
기쁨과
행복이라는 생명의
언어입니다.
사람이
되어오신 하느님의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사랑에
이방인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를 구원하려
오신 하느님을
매순간 기쁘게
맞아들이는 오늘의 성탄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
-서공석신부-
예수
성탄 대축일 밤 미사
루가
2,
1-14.
우리는
오늘 밤,
한
아기의 탄생을 기념합니다.
지금
우리가 들은 복음은 나자렛의 한 서민 요셉과 그 아내 마리아에게서 아기가 태어났고,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어’,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뉘었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어머니는 만삭인데도 로마황제 아우구스토의 호적등록 명령에 따라 남편인 요셉과 함께 먼 길을 떠났습니다.
타향인
베틀레헴에서 아기는 태어났고,
그
아기를 영접한 이들은 그 부근에서 밤을 새며 양떼를 지키던 목자들이었습니다.
우리가
들은 복음은 예수를 주님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초기 그리스도신앙인들이 만들어 기록으로 남긴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신앙이
주님이라 부르는 분이 어떤분인지를 알리기 위해
기록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황제의 명령을 따라 무리한 길을 떠나야 하는 보잘것없는 서민인 부모에게서 태어났습니다.
여관에는
자리가 없어 그 아기는 가축을 위해 만들어진 구유에 뉘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아기는 그 시대 천민이었던 목자들의 영접을 받았습니다.
오늘
복음은 천사의 입을 빌려 선포합니다.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
예수님의
탄생은 인류를 위한 큰 기쁨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던 초기 신앙인들에게 예수님은 큰 기쁨이었습니다.
오늘까지
성탄의 풍습이 기쁨의 표현들을 담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경쾌한
성탄 음악들과 화려한 장식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가까운 사람 사이에 오가는 ‘성탄절을
기뻐하자는’
인사말과
선물들이 있습니다.
그런
것이 모두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체험한 초기 신앙인들이 역사 안에 남겨놓은 풍습들입니다.
어둠이
가장 길어진 동지섣달의 한밤중에 빛을 밝혀 놓고,
우리는
어둠의 한가운데에 예수님이 이 세상에 빛으로 오셨다는 사실을 기념합니다.
이
세상 우리의 삶에는 어둠이 많습니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우리의 인생입니다.
재물을
얻기 위해 우리는 이웃에게 무자비합니다.
권력을
탐해서 소신을 접어두고 윗사람의 눈치를 보며,
자기
한 사람 입신양명(立身揚名)
할
길을 찾기도 합니다.
베풀어진
우리 생명의 의미를 보지 못하고,
자기
한 사람 잘되는 것이 구원이라 착각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절망 가운데에 헤맬 때도 많습니다.
지구촌을
강타한 금융 위기,
여기저기에
발생한 지진,
태풍과
해일 등의 피해들을 우리는 보았습니다.
우리의
성실한 노력이 실패로 끝나는 절망도 우리는 겪습니다.
우리가
헤매는 어둠들입니다.
구약성서
코헬렛은 이렇게 외칩니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이런
어두움들의 한 가운데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빛으로 오신 사실을 기념합니다.
그분은
율법을 잘 지키는 데에 구원이 있다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병든
이,
가난한
이,
불행한
이들은 모두 하느님으로부터 벌 받은 것이라고 가르치는 유대교가 지배하던 땅에서,
그분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 주면서 그것이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가난한 이가 행복하다고 선언하였습니다.
재물의
유무에 인간의 가치와 행복의 잣대를 두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분은
특별한 고행을 하지도 않았고,
사람들에게
그것을 요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분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하느님이 하시는 일을 몸소 실천하셨습니다.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고,
죄인이라는
사람에게 용서를 선포하였습니다.
하느님은
고치고,
용서하고
살리는 분이었습니다.
그분은
어둠 속을 헤매는 백성에게 하느님의 진실을 보여 주는 빛이었습니다.
성탄축일은
예수님이 빈약하고 허약한 인간으로 오신 사실을 기념합니다.
호화롭고
호사스런 삶에는 흔히 허세와 허영이 끼어들어 인간 삶의 진실을 외면하게 합니다.
허세와
허영은 주변 사람들을 압도하려 합니다.
그리고
인간이 자기 스스로를 과시하는 어둠 안에 살게 합니다.
인간
생명이 살고 자라는 건전한 온상은 이웃을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는 보살핌이 지배하는 현장입니다.
재물만,
혹은
높은 지위만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보살펴야 하는,
허약한
이웃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
시선은 인간 욕심이 뿜어내는 어둠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다.”고
요한복음서(1,5)는
말합니다.
그런
우리의 어둠 안에 예수님이 빛으로 오셨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은 우리 삶의 진실을 보여주는 빛이었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참다운 자유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 주었습니다.
유대교지도자들은
율법과 그들의 권위에 맹종할 것을 사람들에게 강요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맹종이 사람을 하느님에게 인도하는 길이 아니라고 믿었습니다.
하느님은
자유로운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당신
생명이 하시는 일을 자유롭게 실천하는 사람이 될 것을 원하셨다는 말입니다.
당신의
자비와 사랑과 용서를 인간이 자유롭게 실천할 것을 원하셨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그 진실을 당신의 삶으로 충분히 보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초기 신앙공동체는 예수님의 입을 빌려 이런 말씀을 남겼습니다.
“나를
본 사람은 이미 아버지를 보았습니다.”(요한
14,9).
자비와
사랑과 용서는 우리 욕심의 어둠이 만드는 각종 차별과 갈등을 그 근원에서 없애버립니다.
그리고
우리가 흔히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복수(復讐)의
어둠이 만드는 악순환도 그 근본에서 차단합니다.
나눔은
가진 이와 갖지 못한 이의 차별을 없애는 행위입니다.
사랑은
버림받은 이와 버린 이의 차별을 없애는 힘입니다.
용서는
잘못한 이가 은혜로움을 체험하게 하는 창조적 능력입니다.
예수님은
자비와 사랑과 용서를 실천하는 데에 당신 목숨을 바쳤습니다.
우리는
차별 안에 안전과 보람을 봅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가져서,
다른
사람들을 무시할 수 있어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 높아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 신심이 두터워서,
비로소
안심하는 우리들입니다.
우리가
헤매는 어둠입니다.
오늘의
초라한 구유는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말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연약하게 다가갑니다.
위세
당당하게 군림하겠다는 사람 안에는 나눔도,
자비도,
사랑도
보이지 않습니다.
오늘
구유의 초라함과 연약함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느님 생명의 진실입니다.
오늘
밤은 고요한 밤,
거룩한
밤입니다.
평화가
무엇인지,
또
거룩함이 무엇인지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하는 아기가 태어난 밤입니다.
우리
앞에 던져진 연약한 하나의 생명입니다.
우리가
차별을 없애는 보살핌을 실천할 때만,
성탄은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되는’
축일일
것입니다.
이웃에게
기쁨이 되는 자비와 사랑의 보살핌이 보이는 곳에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의
어둠을 넘어서 하느님 생명의 빛을 보아야 합니다.
그
빛이 오늘 밤 어둠의 한가운데에 비치고 있습니다.
◆
예수
성탄 대축일 낮 미사
요한
1,1-18.
성탄
축일은 예수님의 기원에 대해 생각해 보는 날입니다.
마태오복음서는
예수님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되었고,
그분이
출생하자 동방에서 세 박사가 베들레헴에 와서 참배하였다고 말합니다.
루가복음서는
동방의 세 박사 이야기는 하지 않고,
우리가
밤 미사에서 들은 대로,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호구 조사령이 있었고,
요셉이
만삭의 아내 마리아를 데리고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갔다가 외양간에서 예수를 출산하여 구유에 눕혔다고 말합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요한복음서는 예수님의 출생과 관련된 이야기들을 모두 생략하고,
예수님은
그 생명의 기원이 하느님에게 있다고 말합니다.
‘한
처음에...말씀이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말입니다.
복음서는
계속해서 말합니다.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느님을 보여주는 빛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고도
말합니다.
모두가
그분을 빛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는 말입니다.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졌지만,
은총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다.’
오늘
복음의 결론입니다.
율법의
시대는 지나갔고,
이제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은총과 진리의 시대가 열렸다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
복음서는 예수님의 삶에서 은총과 진리를 배우라고 선포합니다.
유대교는
율법준수만이 하느님에게 가는 길이고,
그것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은 하느님이 벌하신다고 가르쳤습니다.
인간이
겪는 모든 불행은 하느님이 주신 벌이라고 그들은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느님이 베풀고,
용서하고,
보살피시는
분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은총과 진리입니다.
하느님이
용서하신다는 것이 예수님의 복음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는 복음을 전하라고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셨습니다(요한
20,22).
우리
교회의 현행 고해성사 양식은 13세기에
법으로 제정되었습니다.
스스로
죄인이라 고백하는 사람에게 하느님이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선포하는 고해성사입니다.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엄청난 보속을 하던 시대였습니다.
개별
고해성사를 도입한 것은 사람들이 그런 엄청난 보속을 하지 않도록 하느님의 용서를 깨닫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그 고해성사는 우리가 그것을 통하지 않으면,
하느님이
용서하지 않으신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있습니다.
인류역사는
인간의 행복과 불행을 한손에 쥐고 있는 막강한 하느님을 상상하였습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그것을 하느님이 주신 것이라고 믿으면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습니다.
종교
집단의 기득권자들도 그들의 권한이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고집하였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생각을 하느님의 뜻이라고 사람들에게 강요하기도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횡포에 시달리고 짓밟혔습니다.
예수님은
섬기는 사람이 되라고 제자들을 타이르셨습니다.
당신도
섬기는 사람으로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어둠은
그분에 대해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어둠은
섬김을 알아듣지 못하였습니다.
오늘
성탄은 하느님의 말씀이 작고 연약한 생명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이,
굶주리는
이,
우는
이들도 행복해야 한다고 선언하셨습니다.
하느님은
그런 예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은 그분의 삶에서 하느님의 은총과 진리를 배웁니다.
그분은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고,
병고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고치고 살리면서 축복하였습니다.
그분은
절망에 우는 이들을 그 절망에서 살려내었습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생명이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
시대의 종교기득권자들은 그분 안에 은총과 진리를 보지 못하고,
그분을
십자가에 돌아가시게 하였습니다.
우리는
어둠을 더 좋아합니다.
‘빛이
어둠 속에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빛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오늘 복음은 말합니다.
이웃을
돌보기보다는 우리 자신이 더 많이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어둠입니다.
이웃이
잘못하면,
잘못한
그만큼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어둠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친 용서는 우리의 삶을 비추는 빛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용서하고
보살피며 생명을 살리는 일은 우리의 관심 밖에 있습니다.
우리는
가져야 할 것,
해야
할 일이 많아서,
하느님의
은총과 진리는 우리의 삶 안에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우리
자신의 일에 골몰한 나머지,
우리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어지럽히지 못하게 말씀을 성당 건물 안에 가두어 둡니다.
우리는
빛보다 어둠을 더 좋아하는 백성입니다.
성탄은
그 말씀이 우리의 실천 안에 나타나고,
자라야
한다고 말합니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드님’이십니다.
우리가
배워서 우리 안에도 그 은총과 진리가 자라야 합니다.
진리는
심오한 이론이 아니라,
우리가
용서하고,
보살피고,
살리는
일을 할 때,
우리
안에 은총과 진리가 있습니다.
은혜로우신
하느님 자녀의 실천 안에 있습니다.
진리가
있는 곳에 진리의 원천이신 하느님이 계십니다.
강하지도
않고,
화려하지도
않은 모습으로 태어나,
구유에
누운 한 아기 예수님입니다.
우리의
자유 선택을 기다리는 생명입니다.
은총과
진리는 우리가 찾아서 우리의 삶 안에 성장하게 해야 하는 연약한 생명으로 나타났습니다.
우리의
삶 안에 그 그분의 은총과 진리가 자라게 해야 합니다.
용서하고
보살피며 살리는 데에 하느님이 주시는 은총과 진리가 있습니다.
우리
자신만 소중하게 보려는 우리의 어둠 안에 하느님의 은총과 진리의 빛이 오늘 주어졌습니다.
우리는
어제의 어두운 관행을 벗어나,
하느님의
빛을 받아들여 새롭게 나가야 합니다.
우리의
실천 안에 은총과 진리가 살아 숨 쉬며 살아 있게 해야 합니다.
성탄은
우리에게 기쁨의 축일입니다.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은 없지만’
예수님이
우리에게 ‘하느님을
알려 주셨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집착하고 욕심내는 것은,
구약성서
한 구절을 빌려 말하면,
“꽃처럼
피어났다가는 스러지고,
그림자처럼
덧없이 지나가는”(욥기
14,1-2)
것들입니다.
하느님은
그런 것들과 함께 계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베들레헴 외양간의 구유에 누운,
어린
예수 안에 당신 스스로를 나타내셨습니다.
우리
안에도 하느님의 은총과 진리가 충만할 것을 호소하면서,
예수님은
오늘 구유에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복음의
말씀대로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마태
1,23)
-장봉훈주교-
1. 오늘 구세주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습니다. 성탄의 기쁨과 평화가 신자 여러분의 가정, 그리고 온누리에 충만하길 기원합니다. 특히 구세주 강생의 기쁜 소식이 이
땅의 고통받는 이들, 소외된 이들에게 희망과 위로를 주며, 삶의 무게에 힘겨워하는 이들에게 힘과 용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2. 마태오 복음
1장 23절을 보면, 천사가 요셉의 꿈에 나타나 예수님 탄생의 의미를 알려줍니다.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마태 1,23). 천사는 예수님의 탄생이 하느님께서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사 7,14 참조)의 성취며 실현이라고
선언합니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신 근본적 의미는 바로 ‘임마누엘’이며, 이는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탄생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드러내는 구체적인 사건이며,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실제로 느끼게 하는 표징입니다.
3. 예수님의
삶은 가난한 이들, 소외된 이들,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 하는 삶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의 삶에 동참하셨고, “배고픔과 목마름과
궁핍을 겪으셨으며, 더 나아가 여러 가난한 사람들과 당신 자신을 동일시하고, 그들에 대한 실천적 사랑”(가톨릭교회교리서, 545항)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시며 하느님의 나라가 그들의 것임을 알려주셨고, 죄인이라 불리던 이들, 병자들과 늘
함께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인고을에서 외아들을 잃은 어머니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들어 위로해 주셨습니다(루카 7,11-15 참조). 또한 세관장이었기에 민족의 죄인으로
취급되어 사람들로부터 소외되었던 자캐오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머무셨습니다(루카 19,1-10 참조). 예리코에서는 구걸하던 눈먼 이를 가까이
불러 치유해 주셨습니다(마태 20,29-34 참조). 이 모든 것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2천년이 지난
오늘, 예수님을 통해 보여주신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 모두에게도 변함없이 동일하게 주어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탄생은 우리에게 커다란
기쁨이며 가난한 이들에게 희망과 위로가 됩니다.
4. 예수
성탄은 사랑의 삶에로의 초대요 요청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당신과 같은 임마누엘의 삶에 동행하도록 초대하십니다. 예수님의 초대는 그 분을 믿고
따르는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본받아 이웃들을 향한 사랑의 삶을 사는 것에 맞닿아 있습니다. 이 사실은 최후의 심판에 관한 말씀에서 더욱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이 말씀이 이끄시는 사랑의 삶을 직접 보여주신 분이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8월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한국 사목방문을 통하여 이 땅의 고통받는 이들, 상처받은 이들을 만나고 따뜻이 안아 주셨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세월호 유가족을 위로하셨던 모습, 위안부 할머니들을 눈물 어린 시선으로 보듬어 안아 주셨던 모습, 많은 장애인들을 따뜻하고 환한 미소로 안아
주시며 토닥이시던 모습, 몇 번이나 차를 세우며 아기들에게 입 맞추시며 축복하시던 모습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참된 신앙인의 삶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또한 광화문에서 있었던 시복식 미사 강론을 통해 교황님께서는 “비참한 가난이 소리 없이 자라나고 가난한 사람들의 울부짖음이 좀처럼
주목받지 못하는 사회들” 안에서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섬기는 일은 다름 아닌 “어려움에 처한 형제자매들에게 뻗치는 도움의 손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5. 오늘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구원자요 주님이며 메시아이십니다. 이러한 신앙고백을 머리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삶을 본받는
우리의 삶을 통해 고백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지치고 힘든 우리 삶에 희망을 주시는 분으로, 절망 속에 있는 이들에게 위로자로, 소외된
이들의 벗으로 오셨습니다. 이제 예수님께로부터 희망과 용기, 사랑과 위로를 받은 우리가 소외되고 지치고, 병들고 고통받는 이들의 벗이 되어
사랑의 삶을 살아감으로써, 임마누엘이신 하느님의 사랑을 이웃과 세상에 증거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성탄을
축하드리며 신자 여러분의 가정과 교구 공동체, 그리고 지역사회에 성탄의 기쁨과 평화가 가득히 내리기를 기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