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962
8월27일[성녀 모니카 기념일/연중 제21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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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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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NtotxqmdK1o
[서울대교구 이재협 도미니코(흥보위원회 담당)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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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모니카 성녀는 아들의 회개를 위해서 30년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기도했습니다!>
바라보기만 해도 가슴 뭉클해지고 마음이 뜨거워지는 태극기의 위엄과 가치가, 소위 '태극기 부대'라는 사람들로 인해 크게 훼손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참담하고 부끄러운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이역만리 타국땅에서도 가슴 속에 태극기를 품고 다니시던 독립 운동가들이나 애국지사들이, 하늘에서 이 광경을 내려다보시며 통탄하실 것을 생각하니, 후손된 사람으로서 차마 얼굴을 들수가 없습니다.
신성하고 존엄한 태극기의 격을 심각하게 실추시키고 있는 그들을 향해, '태극기 부대'라는 말 대신, '태극기 모독 부대'라고 부르는 것이 마땅합니다.
머릿속에 떠올리기만 해도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감사의 정이 솟구치는 '엄마'라는 단어가, 일부 몰지각한 몇사람들, 소위 '엄마 부대' 라는 사람들 때문에 그 의미와 가치가 무참히 훼손되고 있습니다.
정말이지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추태는 다른 사람들이 부리는데 이 큰 부끄러움은 왜 우리들의 몫이어야 합니까? 세상의 수많은 위대한 엄마들을 웃프게 만드는 일당들을 '엄마 부대'라는 용어 대신 '엄마 모독 부대'라고 칭해야 마땅합니다.
오늘 우리는 인류 역사상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위대한 엄마이신 모니카 성녀의 축일을 경축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아우구스티누스 주교라는 역사에 길이 남을 탁월한 대학자의 어머니이기도 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란 큰 인물 뒤에는 어머니 모니카의 희생과 헌신, 불굴의 기도가 있었습니다. 청소년 시절 아우구스티누스의 방황과 타락은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가지 말아야 할 곳은 다 다녔었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은 다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마니교 이단에 빠져 헤어날 줄을 몰랐습니다. 충격에 사로잡힌 가족들은 동네 사람들 앞에 얼굴을 들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어머니 모니카는 끝까지 그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야말로 백방의 노력을 다했습니다. 때로 타일러도 보고, 때로 야단도 치고, 때로 눈물로 호소도 해보고, 밤 새워 기도도 해보고 별의 별 방법을 다 썼습니다.
아들 때문에 밤낮없이 울고 다니던 그녀에게 암브로시오 주교님은 이런 위로의 말씀을 건넸습니다. “눈물의 아들은 결코 멸망하지 않습니다.”
문제 청소년 아우구스티누스의 죄와 타락 앞에 취한 어머니의 태도는 참으로 영웅적이었습니다. 달콤한 죄의 유혹에 깊이 빠져든 아들의 마음을 돌아서게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보였습니다.
현명한 어머니는 한 가지 전략을 세우는데 그것은 바로 ‘장기전(長期戰)’이었습니다. 아들의 변화를 위해서는 오랜 투자와 무한한 인내, 집중적인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단과 방탕한 생활에 빠진 아들이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더 이상 야단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기다렸습니다. 아들의 회개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인간적인 노력을 다하고 나머지는 하느님 자비의 손길에 맡겨드렸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냥 기도가 아니라 혼신의 힘을 다한 기도, 목숨을 다 바친 기도, 지극한 정성이 담긴 기도를 바치기 시작했습니다. 아들의 새로운 삶을 지향하며 수시로 단식했으며 더불어 이웃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당시 모니카가 직면해야 했던 현실은 참으로 혹독했습니다. 사방이 높은 장벽으로 가로막혀 있어 탈출구가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들의 방황과 타락의 세월은 점점 길어지고 강도를 더해갔습니다.
남편 역시 신앙심은 빵점이고 출세욕구나 야심으로 가득 차있었습니다. 아들로 인한 스트레스는 하늘을 찔렀고 매일 울고 다니다보니 건강도 급격히 악화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언젠가 반드시 가족 모두가 하느님께로 돌아올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계속 기도했습니다.
놀랍게도 그녀는 남편의 구원을 위해 16년 동안 쉬지 않고 기도했습니다. 아들의 회개를 위해서 30년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기도했습니다.
마침내 하느님께서는 그녀의 간절한 기도에 응답을 주셨습니다. 남편과 아들과 손자가 세례를 받았습니다. 아들은 그렇게 간절히 바랐던 회개의 길로 접어들었고 교회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교부요 추앙받는 대 성인으로 거듭났습니다.
오늘 모니카 성녀가 우리 가정에, 또 교육자들에게 건네시는 메시지가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혹시라도 지금 존재 자체로 고통의 원천인 자녀나 가족 구성원으로 인해 혹독한 마음 고생을 하고 계신가요?
그렇다면 즉시 모니카 성녀를 바라보면 됩니다. 매일 그를 위해 기도하고 계신가요? 일 년 이 년이 아니라 16년 동안, 30년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간절히 기도해오셨나요?
혹시라도 너무 조급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그의 어쩔 수 없는 현실은 무시한 채 내 의지만을 강요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그를 위해 단기적인 전략뿐만 아니라 중장기적 전략도 세워놓고 계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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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QkpSVFGxtB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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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릇보다 음식이 중요하다는 말이 그릇이 더러워도 된다는 뜻인가?>
어제 저희 성당 어떤 신자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제가 빚을 많이 내서 죽을 만큼 힘이 들 때 신부님 강론을 들었습니다. 바로 십일조로 하느님을 시험해 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생겼는지 한 달 적자가 600만 원, 십억 이상의 빚을 지고 있었음에도 십일조를 내어 주님을 시험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코로나 때가 되어서도 적자가 흑자로 바뀌었고 매년 1억 이상씩 빚을 갚아나가고 있습니다. 오늘 다른 곳에 분점을 계약하고 왔습니다. 남편은 자신이 잘해서 그렇다고 말하지만, 저는 하느님께서 보살펴 주심을 확신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위선을 비판하십니다. “너희가 박하와 시라와 소회향은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처럼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들은 무시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십일조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행해야만 했다.”
이제 가톨릭교회에서는 더는 십일조에 대해 말하지 않습니다. 저는 확신하건대 십일조를 내는 개신교 신자들이 더 평균 재산이 많고 하느님께서 함께 계심을 믿는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이 비유를 통해 설명해보겠습니다.
한 아버지의 아들들이 아버지의 멀리서 온 편지를 받고 유산을 받으러 길을 떠났습니다. 그곳에는 협곡이 많았습니다. 어떤 아들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계곡을 건너려면 수백 미터는 내려갔다가 다시 수백 미터를 올라와야 합니다.도중에 뱀도 만날 수 있고 물살이 센 개울도 건너야 합니다.
그런데 그 계곡들에는 다리가 하나 있습니다. 하나 같이 안전하게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 다리는 바로 아버지가 만들어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매 다리마다 거의 피가 묻은 글씨로 무 판에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나를 믿어라. 보기엔 위험해 보여도 실제로는 아래로 가는 길이 훨씬 위험하단다. 그래서 내가 먼저 이 길을 가며 다리를 마련해 놓았다. 네가 나의 사랑을 의심할 수 있지만, 제발 한 번이라도 시험해 보려무나. 나는 이것을 만들다가 많은 피를 흘려 너에게 돌아갈 수 없었단다.” 성경에도 이런 말씀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너희는 십일조를 모두 창고에 들여놓아 내 집에 양식이 넉넉하게 하여라. 그러고 나서 나를 시험해 보아라. ……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내가 하늘의 창문을 열어 너희에게 복을 넘치도록 쏟아붓지 않나 보아라.”(말라 3,10)
아버지를 굳게 믿은 자녀들은 다리를 건너서 아버지께 빨리 이르러 잔치에 참석했습니다. 아버지를 믿지 않은 아들들은 계곡을 건너다 떠내려가거나 뱀에 물려 죽었습니다. 간신이 도착한 아들들은 이미 잔치가 마무리되는 때였고 자신들의 몰골이 심하게 구겨져서 감히 아버지의 잔치에 들어갈 용기를 낼 수 없었습니다.
십일조는 우리가 하느님 사랑과 보살핌을 믿고 시험하는 도구입니다. 이것만큼 믿음이 증가할 도구는 없습니다. 사실 구약성경의 모든 내용이 십일조를 내라는 말씀임을 알아야 합니다. 에덴동산의 선악과부터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바칠 때 멜키체덱이 빵과 포도주를 바치는 것, 그리고 구약의 맨 마지막 방금 읽은 말라키서까지.
우리는 어쩌다 이런 십일조 계명을 버리게 된 것일까요? 오늘 복음 때문일 가능성이 큽니다. 십일조는 내면서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처럼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들은 무시하게” 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잘 묵상해봅시다.
“눈먼 인도자들아! 너희는 작은 벌레들은 걸러 내면서 낙타는 그냥 삼키는 자들이다.” 그렇다면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 같은 계명은 낙타입니다. 낙타를 삼키면 죽습니다. 그렇더라도 벌레들을 먹는 사람이 있을까요? 벌레는 여기서 십일조를 의미합니다. 사실 십일조는 작은 것을 걸러내면서 큰 것도 먹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기 위한 방책입니다. 예수님은 또 말씀하십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그 안은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십일조는 그러면 그릇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그릇 안에 담겨야 하는 것은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 같은 것들입니다. 그릇이 필요하고, 또 그릇을 닦는 이유는 그 안의 것들을 맛있게 먹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매우 맛있는 음식을 내어놓는다면 그릇이 필요 없거나 닦을 필요가 없다는 뜻일까요?
예수님은 십일조를 내되 제대로 내라는 뜻입니다. 십일조의 의도를 알고 제대로 내라는 뜻입니다.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의 음식이 더 중요하다고 하면서 그릇은 신경 쓰지 않는 것도 또 다른 위선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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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프랑스 파리에서 2024년 33회 파리 올림픽이 개최되었습니다. 프랑스는 1924년에 올림픽을 개최하였으니, 100년이 되었습니다. 이번 올림픽에서 한국은 초반에 돌풍을 일으켰습니다. ‘사격, 양궁, 펜싱’에서 금메달을 얻었습니다. 이 종목은 총, 활, 칼로 승부를 겨루는 경기입니다. 한국인의 DNA에 무기를 잘 다룰 수 있는 유전자가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올림픽의 정신은 경쟁이 아니라, 인류의 화합과 평화의 축제입니다. 올림픽에 함께 했던 모든 선수에게 응원을 보냅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의 신앙을 악과의 싸움으로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악한 날에 그들에게 대항할 수 있도록, 그리고 모든 채비를 마치고서 그들에게 맞설 수 있도록,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한 무장을 갖추십시오. 진리로 허리에 띠를 두르고 의로움의 갑옷을 입고 굳건히 서십시오. 발에는 평화의 복음을 위한 준비의 신을 신으십시오. 무엇보다도 믿음의 방패를 잡으십시오. 여러분은 악한 자가 쏘는 불화살을 그 방패로 막아서 끌 수 있을 것입니다. 구원의 투구를 받아쓰고 성령의 칼을 받아 쥐십시오. 성령의 칼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이냐시오 성인도 우리의 신앙을 두 개의 깃발로 표현했습니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깃발이고, 다른 하나는 사탄의 깃발입니다. 올림픽이 평화와 화합의 축제라면, 우리의 신앙은 영원한 생명을 위한 고독한 싸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악과 싸워서 이기는 방법을 설명해 주십니다. 하느님께 바치는 십일조도 중요하다고 하십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의로움과 자비 그리고 신의라고 하십니다. 교회에 헌금하고 교무금 내야 하지만, 정말 중요한 건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눈먼 바리사이야! 먼저 잔 속을 깨끗이 하여라. 그러면 겉도 깨끗해질 것이다.” 운동선수에게 중요한 건 외모가 아닙니다. 꾸준한 연습과 노력으로 실력을 키우는 겁니다. 신앙인들은 무엇으로 속을 채워야 할까요? 말씀에 귀 기울이는 겁니다. 매일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사람은 어둠 속에서도 빛을 찾을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양날의 칼보다도 더 예리합니다." 성체를 모시는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체를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예수님께서는 빵을 나누어 주시기 전에 제자들이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의 발을 씻어 주는 건, 너희도 그렇게 하라고 본을 보여 주는 것이다.” 성체를 모시는 신앙인은 주님께서 하셨던 것처럼 이웃을 위해서 희생하고 헌신해야 합니다.
교우들의 가정을 방문하면 성상을 볼 수 있었습니다. 세례 때 선물로 받기도 하고, 축일에 선물로 받기도 하고, 마음에 드는 성상을 마련하기도 합니다. 좋은 것을 보면 좋은 마음이 생기듯이, 성상과 성물을 보면 우리의 부족한 신앙에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본당에 주보성인을 정하고 모시듯이, 가정에도 가족들이 상의를 해서 주보성인을 모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가족들이 기도할 때 주보성인의 전구하심을 청하면 주보성인이 함께 하실 것입니다. 상징과 표징도 필요합니다. 성물과 성상도 필요합니다. 주보성인의 전구하심을 청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께 대한 항구한 믿음이며, 믿음을 삶을 통해서 드러내는 것입니다. 성물과 성상이 집 안에 있는 것도 필요합니다. 성물을 차 안에 놓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가족들이 함께 모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굳건히 서서 우리의 말이나 편지로 배운 전통을 굳게 지키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또 우리를 사랑하시고 당신의 은총으로 영원한 격려와 좋은 희망을 주신 하느님 우리 아버지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격려하시고 여러분의 힘을 북돋우시어 온갖 좋은 일과 좋은 말을 하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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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23,23-26: 먼저 속을 깨끗이 닦아라.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십일조를 바친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법규였다. 박하와 회향, 근채는 대량으로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정원 같은 조그마한 터에 조금 양념 정도로 심을 뿐이었다. 이것들의 십 분의 일이란 아주 소량이어서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사람들만이 실행하였다. 그런데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그런 십일조까지도 드렸다. 이들은 십일조에 대해서는 철저하면서도 다른 이들에게 불의를 범하고 잔인하였으며 자비를 바라는 이들에게는 귀를 막고 있었다. 예수님은 그렇게 행하면서도 하느님을 제대로 모시고 있다고 자부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향하여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시라와 소회양은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처럼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들은 무시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십일조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행해야만 했다. 눈먼 인도자들아! 너희는 작은 벌레들은 걸러 내면서 낙타는 그냥 삼키는 자들이다.”(23-24절) 하시면서 책망과 회개를 촉구하신다.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은 정의를 실천하는 일과 하느님을 향한 사랑, 즉 자비이다. 하느님을 향한 정의와 자비와 믿음이 십일조나 맏물보다 나은 것이기 때문이다. “공정을 실천하고 자비를 구하고 사랑하며 네 주 하느님을 따를 준비가 되어있는 것 아니냐?”(미카 6,8). 하느님을 따를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들에게서는 진심에서 우러나는 믿음이 보이는 법이다. 우리가 참으로 정의를 실천하고 선을 행하는 것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이루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는 이웃에 대해서 정의롭게 살아가며, 다른 이를 자비롭게 대하며, 다른 이들에 대해서 신의를 지키고 있는가?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 역시 사람들 눈에 보이는 겉이야 번들 하지만 실상은 위선자, 현대판 율법학자이며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라는 책망을 예수께 듣게 될 것이다. 율법의 근본정신을 좀 더 깨달아 알고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진정한 관계를 이루면서 살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율법 조문이 우리를 얽매어서는 안 될 것이다. 모든 하느님 공동체의 법은 우리의 영적인 이익이 되도록 만들어진 것이지 구속하기 위한 것이 아님을 알고 살아가야 하겠다. 법의 근본정신이 무엇인지를 올바로 알고 실천하도록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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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도미니코선교수녀회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테살로니카 2서는 종말과 주님의 재림이라는 주제를 다룹니다. 그런데 오늘 독서는 너무 평온합니다. 이 서간의 배경은 재림이 지체되는 것으로 보이는 상황입니다. 재림의 때는 예상보다 늦어지는데 한편으로는 신자들 가운데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들도 생기고, 다른 한편으로는 재림의 때가 언제일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바오로 사도는 한마디로, 걱정하지 말라고 합니다. 사람들을 동요시키고 불안하게 하는 자들이 나타났다 하더라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종말이 오기 전에 나타나리라고 이미 예고되어 있습니다. 오늘 독서 중간에 생략된 부분에는, 스스로 신이라고 하는 자가 나타나서 “멸망할 자들을 상대로” 속임수를 쓰겠다고 말합니다(2테살 2,10 참조).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이들은 “멸망할 자들”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뽑으시고 부르신 이들이니, 종말에 대하여 누가 무슨 일을 하더라도 걱정할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재난 영화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결과가 예상되기 때문입니다. 어떤 위험한 상황에서도, 대부분의 경우 결국 주인공은 죽지 않으리라는 것을 압니다. 어쩌면 오늘 독서의 상황을 여기에 비길 수 있겠습니다. 언제 종말이 온다고, 몇 명만 구원된다고, 어떻게 하여야 살아남는다고 말하는 이들에게 흔들릴 필요가 없습니다. 속임수를 쓸 자가 나타나리라고 미리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속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일 종말이 온다고 하더라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구원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희망을 간직하며 하루하루 살아가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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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위선자가 안 되려면 끊임없이, 진심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시라와 소회향은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처럼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들은 무시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십일조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행해야만 했다. 눈먼 인도자들아! 너희는 작은 벌레들은 걸러 내면서 낙타는 그냥 삼키는 자들이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그 안은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눈먼 바리사이야! 먼저 잔 속을 깨끗이 하여라. 그러면 겉도 깨끗해질 것이다.”(마태 23,23-26)
1) 위선자들을 꾸짖으신 예수님의 말씀에서, 사도행전 5장의 ‘하나니아스와 사피라’ 부부가 연상됩니다. “하나니아스라는 사람이 자기 아내 사피라와 함께 재산을 팔았는데, 아내의 동의 아래, 판 값의 일부를 떼어 놓고 나머지만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다.”(사도 5,1-2)
하나니아스와 사피라 부부가 재산을 교회에 바친 일은, 당시의 신자들이 한 일을 따라 한 것입니다.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사도 4,32)
“그들 가운데에는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소유한 사람은 그것을 팔아서 받은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고, 저마다 필요한 만큼 나누어 받곤 하였다.”(사도 4,34-35)
당시 교회 공동체는 ‘영적’으로는 ‘한마음 한뜻’이 되었고, ‘물질적’으로는 ‘공동 소유’를 실천하면서, 글자 그대로 공동체를(한 몸을) 이루었습니다. 그 일은 누가 강요한 일이 아니라, 신자들이 스스로 원해서 자발적으로 한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니아스와 사피라는, 재산을 모두 봉헌했다는 칭찬을 듣고 싶어 하면서도, 실제로 재산을 모두 봉헌하는 것은 아까워했습니다. <‘명예욕’에도 사로잡히고, 물질에 대한 ‘탐욕’에도 사로잡힌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재산의 ‘일부만’ 봉헌하면서 ‘전부를’ 봉헌하는 것이라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아마도 다른 사람들은 그 부부가 전 재산을 봉헌했다는 말만 듣고서 칭찬했을 것입니다. 그 부부는 겉으로 보기에는 분명히 훌륭한 일을 했지만, 실제로는 사람들을 속이는 짓을 했습니다. 바로 그런 것이 ‘위선’입니다. <그 두 사람은 자기들이 죄를 짓고 있다는 것을 의식했을까? 양심의 가책이나 죄책감을 느꼈을까? 그들 마음속을 우리는 알 수 없지만, 사람들의 칭찬을 듣는 순간에는, 적어도 그 잠깐 동안에는 만족했을 것이고, 그래서 기분이 좋았을 것이고, 그 순간에는 죄의식 같은 것은 잊어버렸을 것입니다. 위선이 위험한 것은, 위선이 죄라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자기 만족감에 빠진다는 점 때문입니다.>
2) 베드로 사도는 두 사람의 마음속을 꿰뚫어 보았고, 그들이 한 짓을 알아보았습니다. <누가 고자질한 것은 아니고, 성령께서 알려 주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베드로 사도는 하나니아스를 이렇게 꾸짖었습니다. “하나니아스, 왜 사탄에게 마음을 빼앗겨 성령을 속이고 땅값의 일부를 떼어 놓았소? 그 땅은 팔리기 전에도 그대 것이었고, 또 팔린 뒤에도 그 돈은 그대 마음대로 할 수 있었던 것 아니오? 그런데 어쩌자고 이런 일을 하려는 생각을 마음속에 품었소? 그대는 사람을 속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속인 것이오.”(사도 5,3-4) 베드로 사도는 그들의 명예욕이나 탐욕을 꾸짖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속이려고 한 것을 꾸짖었습니다. 위선이 큰 죄가 되는 것은, 감히 하느님을 속이려고 하는 짓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의 마음속을 모두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시는 분이기 때문에, 인간은 하느님을 속일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하느님을 속이려고 하는 것은 대단히 어리석은 일입니다.>
3) 위선이라는 죄를 짓지 않으려면, 우리 마음속에 숨어 있는 여러 가지 나쁜 욕망부터 다스려야 하는데, 그게 누구에게나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 문제에 대해서 바오로 사도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실 내 안에, 곧 내 육 안에 선이 자리 잡고 있지 않음을 나는 압니다. 나에게 원의가 있기는 하지만 그 좋은 것을 하지는 못합니다.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 그래서 내가 바라지 않는 것을 하면, 그 일을 하는 것은 더 이상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자리 잡은 죄입니다. 여기에서 나는 법칙을 발견합니다. 내가 좋은 것을 하기를 바라는데도 악이 바로 내 곁에 있다는 것입니다. 나의 내적 인간은 하느님의 법을 두고 기뻐합니다. 그러나 내 지체 안에는 다른 법이 있어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고 있음을 나는 봅니다. 그 다른 법이 나를 내 지체 안에 있는 죄의 법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로마 7,18-25ㄱ)
사실 스스로 원해서 위선자가 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잘못된 욕망에 빠져서, 또는 잘못된 판단을 하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위선자가 됩니다. 위선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끊임없는 기도와 노력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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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정용진 요셉 신부님]
마태오 복음에는 “행복하여라.”라는 말씀으로 시작되는 행복 선언(산상 설교의 시작, 마태 5,3-12 참조) 의 말씀과 “불행하여라.”라는 말씀으로 시작되는 예수님의 말씀(마태 23,13-37 참조)이 나옵니다. 복음 안에서 이 두 선언이 서로 교차 대구를 이루고 있습니다. 서로서로 맞서고 있습니다.
행복과 불행의 길 앞에서 우리는 어떤 삶을 살 것인지 선택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은 일곱 가지 불행한 삶에 관한 말씀 가운데 네 번째와 다섯 번째의 경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우리의 위선의 가면을 벗겨 내십니다. 위선자는 한마디로 연기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위선자의 행동에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끌고자 하는 목적과 지향이 담겨 있습니다. 위선의 깊은 뿌리에는 자기애와 자기만족의 욕망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기주의는 정확히 참사랑과 반대됩니다.
우리는 두 가지 방식으로 악을 행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마땅히 옳은 일, 명시적인 바른 규정을 어기는 것입니다. 이 경우 모든 사람이 그것은 잘못된 일이고 그 사람이 죄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죄를 짓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와 다른 방식의 악행이 있는데, 이것은 눈에 잘 보이지 않지만 훨씬 더 나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불행하여라.”라고 하신 말씀에 해당하는 일들입니다. 이를테면 법의 준수라는 가면을 쓰고 저지르는 숨은 악행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겉으로는 훌륭한 사람이라고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아 스스로 만족해하지만, 실제로는 작고 약한 형제들에게 상처를 주고 자기 양심을 해칩니다.
‘십일조 규정은 지키면서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처럼 더 중요한 하느님의 법은 지키지 않는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비추어 오늘 하루 우리 자신을 들여다보면 어떨까요? 특히 의로움과 신의 사이에 있는 중심 말씀인 ‘자비’에 대하여 더 많이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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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잔과 접시의 겉은>
과거에 한동안 교회의 일부 수도자들, 심지어는 성직자 몇 분이 불교의 선과 교회 전례의 기도와 접목을 한다고 스님들과 왕래를 하던 모습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불교의 예불에도 함께 하며 참선을 통해 묵상의 새로운 접목도 시도를 했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그들 중 많은 이들이 교회를 떠났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서로 다른 종교라도 서로 왕래가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또 한가지의 모습은 불교의 누구도 수도회나 성당을 찾아와 강의는 한 적은 있어도 적어도 수도자들과 일부 성직자들이 했던 모습처럼 불교의 누구도 수도원에서 함께 하는 모습은 거의 찾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 중에 일부가 불교에 귀의하거나 아니면 교회를 떠나는 모습은 그렇게 바람직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내세우는 것을 들어보면 전통의 가톨릭 교리조차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또 가톨릭의 일부에서는 가톨릭도 아니고 개신교도 아닌 또 하나의 전례의 모임을 하는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는데, 여기에서도 놀랍게도 가톨릭을 제대로 아는 사람들이 드물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치 자기들이 가톨릭의 전통은 낡은 것이고 시대에 뒤떨어진 그래서 자신들이야말로 새로운 개척자로 자처하는 모습도 그렇게 바람직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교회의 일치의 첫 걸음은 자기의 것을 정통으로 잘 알고 교회 사랑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도 교회를 비판하거나 적어도 자신이 옳다는 것만을 내세우는 경우도 볼 수가 있습니다. 백성의 공동선 추구에 같은 방향을 하고 있는 종교와 정치는 어쩔 수 없이 밀접한 연결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진세력은 무조건 보수세력을 그릇된 것으로 몰아 세우고 국민의 지지만을 추구한다면 그것 또한 바람직한 정치는 아닐 것입니다. 이제까지 쌓아온 보수의 정치도 그 나름대로 나라를 사랑하고 자신의 정치 연륜을 세우는 것이지요.
보수와 신진세력이 이제까지의 정치전통을 존중하면서 서로의 장점과 단점을 가리며 비판받을 것은 비판받고 인정할 것은 인정할 때 민주정치의 밝은 미래를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갖고 있는 가치관, 경력만 주장한다면 서로의 공유는 불가능하겠고 발전보다는 분열을 조장하는 것이 더 크겠지요. 종교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전통과 가치관을 존중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것이 종교의 바탕인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은 교회 공동체가 자신들이 갖고 있는 것을 소중하게 여기라며 다음과 같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복음을 통하여 여러분을 부르셨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차지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형제 여러분, 굳건히 서서 우리의 말이나 편지로 배운 전통을 굳게 지키십시오.”(2테살 2,14-15)
예수님께서도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을 비판하시면서도 그들이 지키는 전통에 대해서는 존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왜곡할 뿐만 아니라 지키지 않는 그들의 위선을 탓하시는 것이지요.
“너희가 박하와 시라와 소회향은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처럼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들은 무시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십일조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행해야만 했다.”(마태오 23,23)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들을 ‘눈먼 인도자,’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하게 하면서 속은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한 자’로 신랄하게 비판하시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그들이 군중에게서 군림하고 대접받으려 하지만 그들은 실천은 없는 위선자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는 종교이든지 나름대로 고유한 역사가 있고 전통이 있는 것입니다.
사막에서부터 가나안 정착과 왕제, 그리고 유배의 쓰라림의 역사와 고유의 전통을 가진 그들이지만 그리스도교인들에게는 전적으로 배타적인 모습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일부 종교에서는 가톨릭에 호의적이고 일치운동의 희망을 갖고 끊임없이 노력하지만 일부 교회에서는 무조건 배타적입니다.
놀라운 것은 그들 중에 대부분은 가톨릭 고유의 역사와 전통과 함께 교리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가 유대인들에게서 받는 배타적인 모습을 지금 또다시 일부 교회에서는 가톨릭에 배타적인 모습을 강하게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같은 그리스도를 믿으면서도 상대방의 전통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서로의 대화는 가능하지 않은 것이지요. 남들이야 어쩔 수 없지만 나 외에 상대방의 이제까지 살아온 것들을 존중해 줄 수 있을 때 비로소 구약의 전통을 존중하시는 주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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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지나고 나면 사소한 것들>
+찬미예수님
초등학교 시절의 일입니다. 저는 학급에서 반장이 되고 싶었는데 아이들에게 맛있는 것을 제공하겠다는 다른 후보에게 밀려 부반장이 된 적이 있습니다. 아직 어렸던 저는 그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었고, 집에 와서는 억울함을 이기지 못해 펑펑 울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반장이든 부반장이든 별로 중요한 것도 아닌데 그때는 왜 그것이 그렇게 억울하고 슬펐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이처럼 살다 보면, 그때는 아주 큰 일이었는데 지나고 보면 별것 아닌 일들이 있습니다. 학창시절 친구들과의 관계, 대학 시절의 성적, 기숙사 생활을 할 때의 엄격한 규율 등 그 시절에는 너무나도 중요한 일이었고 민감하게 반응했던 일이었는데, 이제 그 일은 추억 안에서만 존재할 뿐 돌이켜보면 사소한 일들이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노래 중에 “그땐 그랬지” 라는 노래가 있는데 이 노래의 가사는 이러한 우리의 인생사를 잘 표현해 줍니다.
노래 가사의 일부는 다음과 같습니다.
시린 겨울 맘 졸이던 합격자 발표 날에 부둥켜 안고서 이제는 고생 끝 행복이다 내 세상이 왔다 그땐 그랬지
철없이 뜨거웠던 첫사랑의 쓰렸던 기억들도 이젠 안주거리 딴에는 세상이 무너진다 모두 끝난 거다 그땐 그랬지
밤새워 뒤척이며 잠 못들던 훈련소 입소 전날 술잔 나누면서 이제는 남자다 어른이다 다시 시작이다 그땐 그랬지 참 세상이란 정답이 없더군 사는 건 하루하루가 연습이더군.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세상의 모든 일들이 다 이런 식이 아닌가 싶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주변에서 권력과 재물로 인해 서로 다투고 갈등을 빚어내는 사람들을 봅니다. 분명 시간이 지나면 다 지나갈 일이고 해당 직책을 영원히 맡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신기루처럼 사라질 그것을 쟁취하기 위해 사람들은 서로를 해치려하고 미워합니다. 영원한 것은 하느님의 나라이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서로 사랑하기도 모자를 판에 서로 싸우고 미워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말을 한 번 쯤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삶의 힘든 시기에 이 문구를 떠올리지만, 사실 이 글귀의 핵심은 결코 교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좋은 일이 일어나든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든 한 가지 착각을 하는 성향이 있는데, 그것은 곧 현재의 상태가 언제까지나 지속되리라는 착각입니다.
인생은 꽤나 길고 ‘지금’은 한순간에 불과한데 고통스러운 시간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모르니 답답합니다. 한편 좋은 영광을 차지하면, 이것이 자신의 영혼의 상태라고 생각하며 우월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러나 앞서 말씀드렸듯, 이 모든 것은 결국 지나가게 되어있습니다. 그 때가 되면 지금 아주 중요한 것처럼 느껴지는 일은 사소한 것이 되어버릴 것입니다.
그리하여 결국 우리는 현재의 상황 안에서 교만하지 않으며 하느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고 하느님께 찬미하는 태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너희가 박하와 시라와 소회향은 십일조로 내면서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와 같은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들은 무시한다”며 꾸짖으십니다.
박하와 시라와 소회향은, 당시 양념의 용도로 극히 소량으로만 재배되던 구하기 어려운 수확물이었습니다. 그들이 이러한 사소한 것까지 철저히 십일조로 내면서도 예수님으로부터 꾸짖음을 당하는 것은, 정작 중요한 것을 잊어버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위치에 거만하고 완고했으며 자비를 바라는 이들에게는 귀를 막고 있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철저한 율법 정신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로인한 교만에 빠져 율법의 핵심인 정의와 자비와 신의와 같은 사랑의 정신은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교만은 언제나 우리가 배척해야할 태도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이 가장 크신 분이라는 이해, 그분께서 나를 돌봐주고 계시다는 믿음입니다.
이것이 마음속에서 희미해진다면 인간은 자신을 유일한 주인공으로 여기게 되고 이를 유지하기 위한 현세적인 지위, 물질적인 것만을 추구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자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의 권위는 세상에 속한 것일 뿐 언젠가 사라지는 것들입니다. 결국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남아있는 것은 우리가 하늘에 쌓아올린 공덕, 사랑의 실천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 경고하시듯, 먼저 우리의 속을 깨끗이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내면이 깨끗할 때 겉도 깨끗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나는 나의 신앙과 직위, 재물, 혹은 타인과의 관계에 있어 다소 교만하지는 않은지 돌이켜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좋은 일이 있을 때 날카로운 음성으로, 혹은 좋지 않은 일이 있을 때에는 따뜻한 음성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영원한 것은 오직 나 주님 뿐이다. 찬란한 저 태양도 막막한 이 어둠도 이 또한 지나가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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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십일조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더 중요한 것들을 실행해야만 한다.”(23,23)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위선자이며 눈먼 인도자인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박하와 시라와 소회향의 십일조를 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들을 실행”(23,23)하는 것임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이는 곧 예수님께서 이미 밝히신 것처럼,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5,17)하고 하신 말씀을 바탕으로 더 구체적인 실례를 언급하신 것이라 봅니다. 그런데 인자하시고 너그러우신 예수님께서 왜 이토록 모질게 그들에게만 혹독한 질책을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로 그들은 누구보다도 성서를 연구하고 있는 사람들이기에 성서를 잘 알고 있으며, 또한 날마다 기도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그들은 하느님에 관한 전문가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에 관해 전문가들인 그들은 무엇이 껍데기이고 무엇이 알맹이며, 무엇이 본질적이며 무엇이 부수적인가를 잘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독점해서는, 자기들의 기득권 유지를 위해서, 그리고 자신들은 잘 지키지 않으면서도 많은 율법 조항을 만들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23,4)
오늘의 정치 지도자들처럼, 법을 잘 아는 이들은 미꾸라지 그물코를 빠져나가듯 잘도 빠져나갔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죽을 때가 되신 것을 이미 아셨기에 작정하시고 그들의 위선적인 행동 곧,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그 안은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23,25) 그들을 질책하시면서 정말 중요한 것은 말과 행동이 기인하는 생각을 바꾸고, 그 생각을 바꾸기 위해서 그 생각의 밭인 마음을 다시 일구어, 마음을 갈아엎도록 (=회개) 촉구하신 것입니다.
저 역시 사제이기에 신자들의 고민을 들을 때마다 자주 사용하는 문구가 있지요. 본당신부가 변화되면 본당이 변화된다, 그리고 주교가 생각을 바꾸면 교구가 변화된다, 고 말입니다. 물론 본당 신부님들이 들으시면 무척 배신감 느끼시듯 섭섭해하거나 따질지 모르겠지만 이것이 한국교회의 현실입니다. 이 표현 역시 수도자에게도 해당합니다. 우리는 분명 교회 변화의 바람이 가장 큰 어른이신 교황님으로 시작되고 있음을 보고 듣고 체험하고 있지 않습니까?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다는 격언이 결코 허튼소리가 아님을 목격한 세대입니다. 교회는 변화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복음으로 되돌아가야 하며, 그때만이 세상의 표지를 읽을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알았습니다. 우리가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서 말하고 행동하기보다 세상과 대화하고 소통하면서 세상의 문제를 함께 아파하고 함께 짊어지면서 우리가 사는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이 진리와 평화 그리고 정의가 넘치는 세상이 되도록 우리가 먼저 영적 잔(=마음)의 겉만 닦지 않고, 잔의 안에서부터 깨끗하게 정화해야 합니다. 누가 누구를 판단하고 단죄하기보다,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면서, 다 함께 자신의 그릇의 안에서부터 겉에 이르기까지 깨끗이 닦으면서 나아갑시다.
오늘 복음에서 “십일조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더 중요한 것들을 실행해야만 한다.”(23,23참조)라는 말씀을 들으면서, 예전 인테넷 뉴스에서 읽었던 기사를 인용하고자 합니다. 『예장 총회에서 십일조와 각종 헌금을 해야 한다,'는 조항이 포함된 교인의 의무를 교인 자격 정지 판단의 조건으로 삼기로 준비 중이다. 또한 소속 신도가 십일조를 하지 않으면 교인으로서 자격 정지를 당하고, 십일조를 반대하는 부류는 이단이다.』 여러분은 이 뉴스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오늘은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어머니 성녀 모니카 축일입니다. 성녀는 하느님께 나아갈 시간이 오자 아들 아우구스티노에게 이렇게 당부합니다. “아들아, 내 몸뚱이야 어디다 묻든지 그 일로 해서 조금도 걱정하지 말거라. 한 가지만 너에게 부탁한다. 네가 어디 있든지 주님의 제단에서 날 기억해다오.” 오늘은 돌아가신 제 어머니 조 모니카의 축일이기도 합니다. 모든 모니카 축일을 맞이하신 분들에게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저 역시도 성녀 모니카가 아들 아우구스티노에게 ‘주님의 제단에서 날 기억해다오’라고 당부하신 유언대로 제 어머니와 함께 축일을 맞는 모든 분을 위해 ‘주님의 제단’에서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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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프란치스코 성인에 관한 일화 하나가 있습니다.
어느 날, 초라한 행색의 여인이 어린 두 아이를 데리고 성인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너무나 어려운 상황임을 말하면서 성인에게 도움을 간절히 청했습니다. 성인께서는 수도회 관리를 맡고 있는 수사를 불러서 이 여인을 어떻게 도울 수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관리 담당 수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녀에게 줄 만한 것이라고 집 안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성무일도서도 없고, 조과 때 독서로 읽는 신약성경 한 권만 있습니다.” 그러자 프란치스코 성인께서는 곧바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녀가 그 신약성경을 팔아 요긴하게 쓰도록 드리시오. 우리는 신약성경에서 가난한 사람을 도우라는 깨우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독서하는 것보다 희사하는 것이 훨씬 더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이라고 진심으로 믿고 있습니다.”
이 글을 읽는 순간, 제 책상에 놓여 있는 수많은 것들이 보였습니다. 기도의 수단인 신약성경까지 나누지 않더라도 그밖에 나눌 수 있는 것이 차고 넘쳤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만을 간직만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인의 말씀처럼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찾는다면, 내어놓아야 할 것이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 편리와 풍요로움을 좇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쪽이 아닌, 내가 기뻐하는 쪽만을 선택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더 중요한 것을 실행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이 불행 선언의 주인공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가장 중요한 것을 실행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십일조를 열심히 지켰지만, 하느님의 뜻이 담겨 있는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 등의 가치는 소홀히 하고 무시했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부분은 깨끗하게 하려고 했지만, 보이지 않는 마음은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차 있어서 하느님 뜻의 반대쪽에 서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불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하느님과 함께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기뻐하는 쪽만을 선택하는 것이 아닌,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쪽을 선택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과 함께하면서 하느님 안에서 참된 기쁨과 행복을 차지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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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마음은 신용장>
매일 같이 이를 닦고 얼굴을 씻고 옷매무새를 고칩니다. 외출을 하려면 거울을 보고 다시 한 번 몸단장을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일상입니다. 어떤 이는 ‘아름다운 얼굴이 추천장’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성형수술도 하고 외모를 가꾸려 많은 정성을 기울입니다. 그에 비하면 마음을 가꾸는 일에는 너무도 인색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마음이 깨끗하면 표정이 맑고, 얼굴이 빛납니다. 그‘아름다운 마음은 신용장’입니다. 그리고 “마음이 똑바로 향해 있으면 행동 또한 바릅니다. 그리고 마음과 행동이 일치할 때 구원의 은혜를 입을 것입니다."(성 아우구스띠노)
그럼에도 마음을 가꾸는 것에 정성을 기울인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로마12,2). 라고 권고합니다.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정결 예식에 관한 법을 지키고 가르치는 데 신중을 기했습니다. 그럼에도‘위선자’소리를 듣는 것은 중요한 것은 외적인 의식(컵을 닦고 그릇을 닦는 것)이 아니라 속마음이라는 것을 간과했기 때문입니다. 겉을 깨끗이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먼저 닦아야 할 속을 버려두고 겉만 닦는 데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잔이 아무리 좋은 잔이고 화려해도 속이 더러우면 쓸 수가 없습니다. 속이 깨끗하면 다른 것은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형식적 의로움에 사로잡히지 말고 영적이고 참된 의로움을 추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 더럽히는 것은 오히려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마태15,11) “입에서 나오는 것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인데 바로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살인 간음, 불륜, 도둑질, 거짓증언, 중상이 나온다”(마태15,19-20). 그러므로 마음을 깨끗이 하고 하느님과 스스로에게 정직할 수만 있다면 외적 행동 또한 빛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가꾸는 데 인색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신독"(愼獨)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홀로 있어도 부끄러움이 없다는 뜻입니다. 사실 우리는 홀로 있을 수가 없습니다. 언제나 하느님 앞에 있습니다. 하늘의 그물은 누구도 빠져나갈 수가 없습니다. 혹여 내가 누구를 속였어도 그것은 내가 빠져 나간 것처럼 여길 뿐입니다. 사람들 앞에 선 내 모습이 하느님 앞에 선 모습보다 우선일 때 위선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앞에 선 내 모습은 사람들의 평판에서 자유롭습니다. 나 자신을 하느님 앞에 세울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마음이 즐거우면 얼굴이 밝아지고 마음이 괴로우면 기가 꺾인다.”(잠언 15,13) “무엇보다도 네 마음을 지켜라. 거기에서 생명의 샘이 흘러나온다.”(잠언 4,23) 그러니 기도합니다.“주님, 당신께 찬미 노래 부르오리다. 흠 없는 길에 뜻을 두리니 언제 저에게 오시렵니까? 저의 집 안에서 온전한 마음으로 걷고 불의한 일을 저의 눈앞에 두지 않으오리다.…… 그릇된 마음 제게서 멀리 떨어지고 악한 것을 제가 알지 않으리이다.”(시편101,2. 4) 삶의 여정 안에서 ‘더 중요한 것’들이 무엇인지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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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속과 겉>
마태오 23,23-26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시라와 소회향은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처럼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들은 무시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십일조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행해야만 했다. 눈먼 인도자들아! 너희는 작은 벌레들은 걸러 내면서 낙타는 그냥 삼키는 자들이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그 안은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눈먼 바리사이야! 먼저 잔 속을 깨끗이 하여라. 그러면 겉도 깨끗해질 것이다.”
<속과 겉>
“눈먼 바리사이야!
먼저 잔 속을 깨끗이 하여라.
그러면 겉도 깨끗해질 것이다.”(마태 23,26)
속이
겉을
물들이는
까닭은
속이
겉보다
짙기
때문이니
속을
곱게
빚습니다
겉이
속에
스밀 수 없는
까닭은
겉보다
속이
단단하기
때문이니
속을
곧게
다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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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먼저 잔 속을 깨끗이 하여라. 그러면 겉도 깨끗해질 것이다.”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에 이어 네 번째와 다섯 번째의 불행 선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을 신랄하게 질타하십니다.
사실 여러 가지 부패 중에서도 종교적 부패는 항상 가장 신랄한 지탄의 대상이 됩니다. 특히 종교지도자들에 대한 부패는 더욱 그렇습니다. 또 종교지도자들의 윤리적 부패 못지않게 탐욕에 의한 부패는 더욱더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종교적 부패와 분열은 요한 묵시록에 서는세상 종말의 징표로 제시되고 있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의 네 번째와 다섯 번째의 불행 선언은 종교 지도자들의 탐욕에 대한 경고입니다. 네 번째 불행 선언은 그들의 십일조에 대한 형식적이고 맹목적인 태도에 대한 경고입니다. 그들은 율법에 대해서는 규정 이상으로 열성적이었고 철저했고 엄격했습니다. 그러나 율법의 정신인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를 행하는 일은 실천하지 않았던 것입니다.’(마태오 23,23) 그들의 마음을 탐욕으로 채웠기 때문입니다.
다섯 번째 불행 선언은 속은 감추고 은폐하면서 겉은 기만과 허위로 깨끗이 닦는 정결법에 대한 경고입니다. 곧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하게 하지만, 그 안은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차'(마태오 23,25) 있음을 경고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지 속을 씻는 일이 겉을 씻는 일보다 낫다는 차원을 넘어서, 애초에 그릇 안에 담고 있는 음식을 정당하게 취득하였는지를 문제 삼습니다. 곧 불의와 착취, 부정과 탐욕, 이기와 방종에 대한 경고입니다.
앞의 첫 번째에서부터 네 번째 불행 선언에서 ‘무엇이 더 중요하냐?’ 하시며 본질적이고 우선적인 것을 깨우쳐주신 예수님께서는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무엇을 먼저 해야 하는지’를 깨우쳐주십니다. “먼저 잔 속을 깨끗이 하여라. 그러면 겉도 깨끗해질 것이다.”(마태오 23,26)
동시에 루카복음의 병행 구절에서는 깨끗해지는 방법, 곧 더러움을 비워내는 방법도 가르쳐주십니다. “그릇 속에 담긴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그러면 모든 것이 다 깨끗해질 것이다.”(루카 11,41)
결국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채운 그릇을 비우는 방법은 다름 아닌 ‘이웃 사랑’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정결법의 정신이 자신을 지키는 데 있기보다 사랑하는 데 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잔 속을 깨끗하게 하는 일, 그것은 그릇 속에 담긴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는 일입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다 깨끗해질 것입니다.(루카 11,41) 아멘.
하오니, 주님! 오늘 제 마음 속, 탐욕과 방종을 비우소서!
제 잔과 접시를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로 채우소서! 사랑을 채우소서!
제가 당신의 것인 까닭입니다.
제 잔은 당신의 피요, 제 접시는 당신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먼저 잔 속을 깨끗이 하여라. 그러면 겉도 깨끗해질 것이다.”(마태 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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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샘 기도>
주님!
제 마음 속 탐욕과 방종을 비우소서!
깨끗한 것을 깨끗한 채로, 더러운 것을 더러운 채로 드러내게 하소서!
속은 탐욕과 이기로 채우면서 겉모양만 깨끗이 닦고 치장하지 말게 하소서!
당신 사랑을 채우소서.
제 잔과 접시를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로 채우소서!
제가 당신의 것인 까닭입니다.
제 잔은 당신의 피요, 제 접시는 당신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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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행복하여라>
-지혜로운 믿음의 자녀들이여!-
오늘도 옛 현자의 분별의 지혜를 강조한 가르침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진정한 용기란 다퉈야 하는 상황에서 한 번 더 생각하는 분별이다.”<다산>
“공자가 말했다. ‘자로가 용맹을 좋아함은 나보다 낫지만, 사리를 헤아려 분별하는 바는 없다.”<논어>
오늘은 성녀 모니카 기념일입니다. 56년의 짧은 생애가 그대로 시공을 초월하여 한권의 감동적인 성경책 같습니다. 내일은 아드님 성 아우구스티누스 기념일입니다. 이렇게 모자분이 나란히 기념미사를 봉헌하는 일은 가톨릭교회 초유의 일이며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 어머니들이 가장 부러워하는 것이 잘 둔 자식들입니다. 이래서 성모님은 물론 성녀 모니카가 뭇 어머님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의 불행선언 셋에 이어 두 개의 불행선언이 뒤를 잇습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눈먼 무지의 사람들인지 거듭 확인하게 됩니다. 이 고질적 무지란 병의 치유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치유의 답은 오직 하나 부단한 회개를 통한 하느님 중심의 지혜로운 삶뿐이겠습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시라와 소회향은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처럼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들은 무시하기 때문이다.”
십일조의 거부가 아니라 주객전도, 본말전도의 현실을 바로 잡으라는 것입니다. 우선순위를 확실히 하라는 것이요 이것은 분별의 지혜에 속합니다. 바로 우선적이 중심 가치인 의로움, 자비, 신의를 우선 분별의 잣대로 삼으라는 것이요, 하느님 중심의 삶에서 자연스럽게 도출되는 진리입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그 안은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표리부동이 아닌 안과 밖이 같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안과 밖이 같은 사람이 진실하고 겸손한 사람입니다. 안이 깨끗하면 겉은 저절로 깨끗해지기 마련이니 겉은 전혀 신경쓰지 않아도 됩니다. 아주 오래전 중학교 시절 영어선생님 말씀이 생각납니다. ‘겉옷보다는 속옷이, 속옷보다는 마음이 깨끗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질서있는 삶일 때 비로소 탐욕과 방종의 혼탁하고 무질서한 내적 현실도 비로소 정화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래서 오늘 강론 제목을 반대로 “행복하여라, 지혜로운 믿음의 자녀들이여!”로 정했습니다. 무지의 처방이 지혜요, 참지혜와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사랑이요 겸손입니다. 진정 지혜로운 자는 겸손하고 사랑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겸손한 사랑에서 샘솟는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가 하느님 중심의 지혜로운 삶을 살 것을 촉구합니다. 당대의 테살로니카 교회 신도들은 물론 오늘 우리에게도 좋은 도움이 됩니다.
“주님의 날이 이미 왔다고 말하더라도, 쉽사리 마음이 흔들리거나 불안해하지 마십시오. 누가 무슨 수를 쓰든 여러분은 속아 넘어가지 마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복음을 통하여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러니 이제 굳건히 서서 우리의 말이나 편지로 배운 전통을 굳게 지키십시오.”
‘늘 옛스러우면서도 늘 새로운(ever old, ever new)’ 하느님 중심의 전통을 충실히 지킴으로 정체성을 늘 새롭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격려도 참 목자의 가르침처럼 따뜻하고 큰 힘이 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또 우리를 사랑하시고, 당신의 은총으로 영원한 격려와 좋은 희망을 주신 하느님 우리 아버지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격려하시고 여러분의 힘을 북돋아 주시어 온갖 좋은 일과 좋은 말을 하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바로 이런 기도의 열매가, 하느님 은총의 열매가 오늘 기념하는 성녀 모니카입니다. 얼마나 슬기로운 성녀인지 아드님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고백록을 통해 증언합니다. 고백록 9권 후반부 반은 성녀에 대한 아름다운 일화로 가득합니다.
“성녀는 나이가 훨씬 연상의 이교 남자 파트리치우스와 결혼했는데 그는 정력이 넘치고 폭력적 성향에 성적으로 방탕한 사람이었다. 당시는 가정폭력이 일상적이었지만 모니카는 남편에게 복종했기 때문에 그는 결코 그녀를 때리지 않았다. 그녀의 자선과 기도가 짜증나게 했지만, 그가 그녀를 존경하도록 이끌었다. 성녀의 상냥함과 인내는 다른 학대받는 아내들과 어머니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었다. 그들은 그녀가 그들처럼 고통을 겪었음을 알았고 그녀의 모범에 의해 감동을 받았다.
성녀는 매우 신심이 깊었고 매일 교회 전례에 참석했으며 그것은 인내의 덕을 닦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성녀는 힘든 결혼생활을 하는 다른 부인들에게 말하곤 했다. ‘너희가 혀를 잘 다스린다면, 너희는 더 이상 매를 맞지 않을 것이며, 언젠가 네 남편은 좋아질 것이다.’ 사실 성녀는 단 시간에 시어머니를 사로 잡았고, 이교 남편도 개종에로 이끌었고, 그의 난폭했던 기질도 진정시켰다.
후에 아들은 마니교도가 되었고 성녀는 아들이 바뀌지 않자 주교에게 도움을 청하자 주교는 성녀에게 말했다. ‘아들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그렇게 많은 눈물의 아들이 멸망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남편이 죽자 성녀는 아들이 있는 밀라노로 갔고, 밀라노의 주교 성 암브로시오 덕분에 모니카는 17년 기도 후 아들이 나이 28세, 개종하는 것을 보는 기쁨을 누렸다. 밀라노의 성 요한 세례자 교회에서 세례를 받은후 모자는 아프리카로 돌아가던중 모니카는 티베르강 어귀 오스티아에서 387년 56세에 마지막 유언을 남기고 선종했다.
-‘내가 바라는 소원은 내가 죽기전에 네가 신자가 되는 것 하나뿐이었다. 내 하느님은 넘치도록 응답해 주셨다. 나는 이제 지상의 모든 행복을 멸시한 주님의 종이 된 너를 보게 되었구나. 내가 여기서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니? 이 몸이야 아무데나 묻어라. 그 일로 너희가 조금도 걱정하지 말거라. 오직 한 가지 부탁이니 너희가 어디 있든지 주님의 제단에서 나를 기억해다오. 하느님에게서 멀리 떨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단다. 세상 종말에 그분이 어디에서 나를 부활시켜야 할지 모르실까 봐 두려워할 필요는 없단다.’-
바로 성 아우구스티누스 아드님의 증언입니다. 끝까지 옆에서 임종을 지켜본 성인의 결론 말씀입니다. ‘그렇게 병석에 누운지 아흐레 되던 날, 그이의 나이 쉰여섯, 제 나이 서른 셋 되던 해에 그 독실하고 경건한 영혼이 육신에서 놓여났습니다.’(성염, 고백록 337쪽)
모전자전 그 어머니에 그 아들입니다. 저절로 “행복하여라, 지혜로운 믿음의 성녀 모니카와 성 아우구스티누스여!”란 고백과 더불어 인류에게 위대한 성인 모자분을 선물한 하느님께 끝없는 찬미와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성녀 모니카는 인내와 아내들, 어머니들, 학대받는 이들의 수호성인이 됩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지혜로운 믿음의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어 참 행복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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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하느님 관상에 앞서 나-관상을>
옛날과 비교하여 관상에 대해 더 많이 얘기하는 요즘입니다. 기도하면서 좀 더 차원 높은 기도를 하고 싶은 갈망 또는 열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관상이란 근본적으로 보는 것, 다시 말해서 직관 또는 지복직관의 문제이기에 관상을 잘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바로 눈이 멀었기 때문이요 반대로 관상을 잘하고 있다면 그것은 눈이 멀지 않았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니 그만큼 눈이 멀지 않는 것이 중요한데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은 눈이 멀어서 불행하다고, 눈이 멀어서 하느님 관상을 못하기에 불행하다고 오늘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눈먼 바리사이야! 먼저 잔 속을 깨끗이 하여라. 그러면 겉도 깨끗해질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왜 눈이 멀고 어떻게 하다가 눈이 멀게 되었을까요? 이것은 제가 자주 얘기하는 것으로서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는 욕심 때문입니다. 흔히 욕심에 눈이 멀었다고 할 때의 그것입니다.
무엇에 욕심이 있어서 욕심을 부리면 우리는 그것에 잡착하게 되고, 이 집착이 그것 만 보고 그것 밖의 다른 것은 보지 못하게 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 돈 욕심이 있고 돈에 집착하면 눈에 보이는 것은 돈뿐이고 돈 외에는 다시 말해서 돈 밖에 있는 모든 것은 못 보게 되는 겁니다. 그 사람 눈에는 돈만 있고 돈 밖의 다른 것은 그 어느 것도, 하느님도 인간도 다른 피조물도 없고 심지어 자신도 없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교만 때문입니다. 그런데 욕심이 집착하는 무엇에 가려 눈이 멀지 않았는데도 못보는 눈멂이라면 교만은 이것보다 심각한 그야말로 진짜로 눈이 멀어서 보지 못하는 눈멂입니다.
그러기에 교만으로 인해 눈먼 사람이 욕심으로 인해 눈먼 사람보다 볼 수 있게 되기가 더 어려운 것은 자명합니다.
욕심 눈멂은 욕심내는 것을 버리기만 하면 되지만 교만 눈멂은 바로 자기를 버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눈 수술로 치면 욕심 눈멂은 백내장 수술 정도라면
교만 눈멂은 개안 수술 정도이지요.
교만은 지독한 자기중심이요 자기 집중이기 때문입니다. 욕심이 눈에 돈밖에 없는 것이라면 교만은 자기밖에 없는 것입니다.
돈을 버리는 것이 어렵습니까? 자기를 버리는 것이 어렵습니까? 돈을 버리는 것이 쉽습니까? 자기를 버리는 것이 쉽습니까?
오늘 주님께서 나무라시는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의 눈멂은 두 가지 다이고 그래서 돈 욕심만 있는 보통 사람보다 더 불행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하느님 관상에 앞서 나-관상, 자기-관상을 해야 합니다. 나는 무엇을 욕심내고 무엇에 집착하는지, 나의 교만은 어느 정도인지 그것을 보는 나-관상을 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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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마태 23,23.25)
<엄마의 기도!>
오늘 복음(마태23,23-26)은 '예수님께서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책망하시는 말씀'입니다.
네 번째 책망, '박하와 시라와 소회향은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처럼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들을 무시하는 위선에 대한 책망'입니다. '십일조를 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본질'이라는 가르침입니다.
다섯 번째 책망,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그 안의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차 있는 위선에 대한 책망'입니다. 그러니 '먼저 마음 속을 깨끗이 해야 한다는 가르침, 그러면 겉도 깨끗해진다.'는 가르침입니다.
우리도 종종 이런 위선에 빠지기도 합니다. 본질에 충실하지 않는 위선, 겉과 형식에만 충실한 위선에 빠지기도 합니다.
오늘은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어머니이신 성녀 모니카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성녀 모니카는 '엄마의 기도'의 대표적인 모범이십니다. 특히 마니교 이단에 푹 빠져있었던 아들 아우구스티노의 회개를 위해 기도한 어머니이십니다. 아들의 회개를 위해 무려 '십팔 년 동안' 기도하셨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마니교'는 이원론적인 관점에서 영과 육을 분리하고 영적인 것에 더 높은 가치를 두었던 이단, 앎과 지식을 쌓는 일을 더 중요시하고, 그것의 본질인 실천을 경시했던 영지주의 사상을 따랐던 이단입니다. 그리고 이는 또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간직했던 모습이기도 합니다.
아들의 회개를 위해 바친 엄마의 기도를 떠올려봅니다.
나를 위해 기도하는 누군가의 기도, 천사의 기도를 떠올려봅니다.
"슬퍼하는 이를 위로하시는 하느님, 아우구스티노의 회심을 위하여 애태우며 눈물을 흘린, 복된 모니카를 자비로이 굽어보셨으니, 이 어머니와 아들의 전구를 들으시고, 저희가 죄를 뉘우쳐 용서의 은총을 받게 하소서."(본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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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먼저 잔 속을 깨끗이 하여라. 그러면 겉도 깨끗해질 것이다."(마태 23, 26)
순수하고
겸허한 신앙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끊임없이
자신을 헌신한
한 여인의 삶이
바로 오늘을
살아가는
신앙인의
모범이 됩니다.
깨끗한 진리의
밝은 세상으로
이끄는
성녀 모니카의
신앙이 있습니다.
신앙 안에서
자신의 길을
찾았던
성녀 모니카
축일입니다.
아들을 향한
성녀 모니카의
마음은
구구절절한
기도가 됩니다.
어둠과 악을
물리칠 수 있는
힘은 간절한
기도에서
얻게 됩니다.
자식을 지키려는
어머니의 시간과
어머니의 힘을
신앙에서
만납니다.
어머니는
지상과 천상의
연결점이 됩니다.
진심으로 생각하고
간절하게
바라보는 것이
성녀 모니카의
신앙입니다.
성녀 모니카 같은
어머니가 계셔
이 세상은
살아볼 만한
세상이 됩니다.
믿음과 연관성이
없는 삶이란
없습니다.
성녀 모니카의
삶은 오늘을
사는 어머니들을
위로하고
격려합니다.
소중한 자식을
올바로 이끌 수
있는 힘을
기도로 청하는
소중한 성녀
모니카의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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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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