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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2 장 : 참된 마음(5)
2: 21 -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야고보는 참 믿음이 행함을 수반한다는 사실을 두 가지 예를 들어 증거 한다.
하나는 아브라함이 그 아들인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 한 사건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행함이 있는 믿음이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100세에 얻은 외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 가서 번제물로 드리라고 명령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온전하게 순종했었다.
1]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드릴 때에)
야고보가 '아브라함'을 예로 들면서 '우리 조상'이라고 표현한 것은 수신인이 유대인임을 시사한다(Burdick).
아브라함은 이스라엘 12지파의 조상이었고, 모든 믿는 자들의 조상이다.
* 요 8: 53 - 너는 이미 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보다 크냐? 또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
* 행 7: 2 - 스데반이 가로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 롬 4: 1 -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드릴 때에'라고 번역된 말은 그 의미가 확실하지 않다.
아브라함이 그 아들인 이삭을 실제로는 드리지 않았음에도 헬라어 본문에는 부정 과거인 '아네노카스'가 사용되고 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리기로 작정하고 그 의지를 실천에 옮겼기 때문이다.
즉 사실상 하나님께서 그 뜻하신 바를 실행치 아니하셨을지라도 아브라함은 실제로 아들인 이삭을 드렸을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2]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부가 의문문의 형태로 사용된 '아니냐'(우크)는 긍정적인 대답을 기대하는 야고보의 표현 방식이다.
'의롭다 하심을 받은'(에디카이오데)는 '의로 여기다'라는 의미로 개인의 주관적인 주장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모든 사람이 의롭다고 인정할 만한 선포 행위를 일컫는다.
이러한 의롭다함은 '행함으로' 즉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비로소 선포되었다.
* 창 22: 1-14 - 1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2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3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의 자기에게 지시하시는 곳으로 가더니 4 제 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5 이에 아브라함이 사환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6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취하여 그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7 이삭이 그 아비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가로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가로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8 아브라함이 가로되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9 하나님이 그에게 지시하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놓고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 위에 놓고 10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더니 11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가라사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12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13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수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렸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수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14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2: 22 -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본 절은 아브라함이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사실에 대한 논증으로 '믿음'과 '행함'과의 관계성을 보여준다.
'네가 보거니와'는 '누가 보아도 알 수 있는 증거가 명백할 정도로 충분한 것'을 가리킨다(Robertson). 이것은 '네가 보느냐'라는 의미로 다시 한 번 믿음만을 강조하는 자들을 향한 야고보의 권고를 나타낸다.
야고보는 본 절에서 '의롭다 함'의 근거가 오직 행함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제시해 주고 있다.
아브라함의 의롭다 하심은 오직 행함만이 아니라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믿음'과 '행함'은 불가분리의 근본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음을 나타낸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온전한 믿음이 아닌 죽은 믿음이며, 반대로 믿음이 없는 행함은 올바른 행함이 아니다.
믿음은 행함의 원칙으로 행함과 함께 역사하며 믿음의 바탕 위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결과가 행함이다(Burdick).
그러한 의미에서 아브라함의 믿음도 행함으로 온전케 된 것이다(Manton, Calvin).
이처럼 믿음의 필연적인 결과로 행함이 나타날 때 믿음은 온전케 될 수 있다.
2: 23 -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야고보는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성경말씀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아브라함의 의롭다 하심이 그의 순종의 행위로 인해 확고해졌으며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고 불림을 받았다고 말한다.
야고보는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고 다시 말한다.
그것은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으로는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다는 뜻이다.
1]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성경에 이른바'는 창 15: 6을 가리킨다. 그런데 창 15: 6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의로 여기시고 나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창 22 장의 사건까지는 30년의 시간이 흐른다.
이러한 시차로 인해서 혹자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완전하였기에 '응하였다'고 볼 수는 없다. 이 말 속에는 예언적 의미가 함축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섭리로 인하여 이루어졌음을 분명하게 해주고 있다고 주장한다(Tasker).
또 다른 이는 이삭이 출생하기 전에 이미 하나님이 의롭다고 여겼기 때문에 이삭을 드리는 사건으로 인하여 '응하였다' 즉 의로 여김을 받았다고 하는 사실은 모순이라고 지적하고 있다(Luther).
더군다나 카톨릭주의자나 소키니안들(Socinians)은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의로 여길 때'의 아브라함의 의는 불완전한 것이었으나 이삭을 드리는 행함을 통하여 비로소 완전한 의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창 15장에서의 아브라함의 의는 이미 '완전한 의'였다.
'응하였고'(에플레로데)는 '플레로오'에서 온 말로서 성경 말씀을 '실행 하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릴 때 이미 믿음이 전제되어 있었으며 그러한 아브라함의 믿음 자체가 창 22 장의 사건을 낳는 근거가 된 것이다.
그러기에 창 15: 6의 아브라함의 의는 이삭을 드릴 때 비로소 완전해진 것이 아니라 이미 15 장에서 완전한 '의'였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쳤을 때 이러한 믿음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보여준 것이다(Burdick).
따라서 야고보의 주장과 바울의 주장은 서로 상반되고 모순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서로 다른 측면 즉 행함과 믿음의 측면을 각각 강조한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창 22: 1-14은 창 15: 6을 응하였다는 것이다.
2]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하나님의 벗'(필로스 데우)이라는 칭호는 야고보가 사용하기 이전에도 이미 일반적으로 사용된 칭호이다.(Phillo).
* 대하 20: 7 - 우리 하나님이시여 전에 이 땅 거민을 주의 백성 이스라엘 앞에서 쫓아내시고 그 땅으로 주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영영히 주지 아니하셨나이까?
* 사 41: 8 - 그러나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나의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
야고보는 이 칭호를 사용함으로 '믿음'과 '행함'을 통해서 '의'로 여김을 받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고 깊이 교제를 나누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하나님과 아브라함이 친밀한 교제를 유지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자신을 숨기지 않았음을 의미한다.(Tasker).
* 창 18: 17 -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예수께서도 십자가의 비밀을 안 제자들에게 '이제부터는 종이라 하지 아니하고 친구라 하리라'고 하셨다(요 15: 15).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친구라 함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드렸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하는 것으로 아브라함에게 전적으로 특권을 부여하신 하나님의 은혜이다(Knox).
2: 24 -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본 절에서 야고보는 아브라함의 예를 통하여 전체적인 결론을 맺고 있다.
진정한 믿음이란 정적인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올바른 반응인 행함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믿음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으로서 순종으로 나타난다.
'믿음으로만 아니니라.'(우크 에크 피스테오스 모논)은 믿음도 우리가 가져야 하는 필수적인 것이고, 또한 아브라함처럼 행함으로써 나타내 보여야 하는 것임을 시사한다.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은 믿음으로만이 아니다. 믿음을 통한 행동으로써 의롭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본문은 바울이 엡 2:8,9에서 주장한 것과는 의미상의 차이가 있는 것처럼 보이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야고보의 주장은 진실된 믿음으로 인하여 행함이 산출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22절)
바울 또한 우리의 구원이 행함으로써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오직 믿음이 있는 자는 선행을 무시하지 않는 자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결코 믿음과 행함은 분리될 수 없다.
바울은 다만 율법을 지킴으로써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한 율법주의자들을 대상으로 말하였다.
* 롬 3: 20,28 -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야고보는 그리스도인 가운데 행함과 믿음은 별개라고 주장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말하고 있다(Martin). 따라서 바울과 야고보의 주장은 동일한 것이다(Burdick).
2: 25 -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야고보는 또 하나의 예로 기생 라합을 든다. 여호수아 2장에 보면, 기생 라합은, 가나안 땅을 정복하기 위해 정탐하러 온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을 숨겨주고 피하게 하였다.
그것은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참 하나님이심을 깨닫고 믿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믿음은 위험을 무릅쓴 그의 선한 행위로 나타났다. 야고보는 21절과 24절에 이어 세 번째로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라는 표현을 썼다.
1]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본 절은 라합의 예이다. 라합은 이방인이었다. 야고보가 라합을 예로 든 것은 아마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어떤 특정한 민족이나 한정된 사회 계층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려는 듯하다(Calvin).
라합은 아브라함과 같은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녀는 기생이었고, 이방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믿음에 근거한 행함이었다.
* 수 2: 8-13 - 8 두 사람이 눕기 전에 라합이 지붕에 올라가서 그들에게 이르러 9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백성이 다 너희 앞에 간담이 녹나니 10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편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라 11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의 연고로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하지에 하나님이시니라. 12-13 그러므로 청하노니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여 나의 부모와 남녀 형제와 무릇 그들에게 있는 모든 자를 살려주어 우리 생명을 죽는데서 건져내기로 이제 여호와로 맹세하고 내게 진실한 표를 내라.
* 히 11: 31 -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
그녀가 죽음을 무릅쓰고 사자(使者)들을 도피시킨 것은 신실한 믿음에서 나온 것이다.
2]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그녀가 의롭다함을 인정받은 것은 모든 사람 앞에서 신실한 믿음을 인정받은 것을 가리킨다. 실제로 그녀는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날 자신뿐만 아니라 부모, 형제, 친척과 더불어 구원을 받았다.
* 수 6: 23 - 정탐한 소년들이 들어가서 라합과 그 부모와 그 형제와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이끌어 내고 또 그 친족도 다 이끌어 내어 그들을 이스라엘 진 밖에 두고
다윗 왕과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는 축복을 받았다.
* 마 1: 1,5,6 - 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6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그래서 후대에 신앙의 모범적인 인물로 기록되었다.
* 히 11: 31 -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
야고보의 이러한 주장은 그녀의 과거 생활이나 거짓말했던 것을 간과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녀의 믿음에 의한 행위를 강조하기 위함이다(Adamson).
2: 26 -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야고보는 본 절에서 행함이 없는 믿음을 영혼 없는 몸, 즉 시체에 비유하고 있다. 이비유는산믿음이라면반드시 행함이 뒤따라야 하며 행함은 반드시 믿음에 기초해야 함을 암시한다.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유가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이 죽은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행함이 없는 믿음이 죽은 것이라는 말도 17절과 20절(전통사본)에 이어 세 번째로 사용한 표현이다.
'영혼'(프뉴마토스)는 일반적으로 '영'(spirit)이라고 번역한다(NIV, NASB). 그러나 본문에서 야고보가 사용한 비교는 창 2: 7을 근거한 것으로 본 절의 '프뉴마'는 창세기의 '생기' 즉 생명을 주는 '호흡'을 의미하는 '루아흐'로 보아 '호흡'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왜냐하면 숨을 쉬지 않는 것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나 다름없으며 만약 야고보가 '영'으로 보았다면 '프쉬케'(영혼)를 사용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Robertson, Martin).
원문에는 본 절 초두에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사실의 이유를 말한다.
그 이유는 행함이 없는 믿음이 죽은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영 혹은 영혼이 없는 몸은 죽은 것이다. 사람은 영육이 합해 있어야 산 존재가 되는 것이며, 영이 떠나면 죽은 몸이 된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영혼이 없는 몸과 같이 죽은 것이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 이것은 17절과 20절(전통 사본)에 이어 세 번째로 사용한 표현이다.
야고보가 21절과 24절과 25절에서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라고 표현한 것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사람이 율법의 행위로가 아니고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고 명확히 강조한 바울 사도의 교훈과 충돌하거나 모순되는가? 우리는 그럴 수 없다고 믿는다. 우리는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므로 상호간에 모순이나 충돌이 있을 수 없다.
바울 사도의 '이신칭의(以信稱義)'의 복음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 밝히 증거 되어 있기 때문에, 그리고 그 복음 진리를 어둡게 하였던 천주교회의 배교적 상황 속에서 루터와 칼뱅 등 종교개혁자들이 다시 한 번 더 깨닫고 확신했던 진리이기 때문에, 개신교회의 신앙을 바르게 받은 자라면 누구도 그 진리를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바울 사도와 야고보의 표면적 차이점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바울 사도는 사람이 하나님의 율법을 행함으로 으;롭다 하심을 얻는 의(義)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의(義)를 대조하면서 '사람이 율법을 행하는 행위로가 아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야고보는 선한 행위가 없는 죽은 믿음과 선한 행위가 있는 산 믿음을 구별하면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으로가 아니고 행함이 있는 산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강조한다.
야고보의 표현 자체는 바울의 복음 진리와 충돌하는 것처럼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으나, 그의 의도는 분명히 이해될 수 있다.
바울 사도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강조했을 때 결코 죽은 믿음을 의미한 것이 아니고 산 믿음을 의미하였다.
바울도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말했을 때 결코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을 말한 것이 아니고 행함이 있는 산 믿음을 말한 것이다.
즉 로마서 6: 15에서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라 하였다. 갈라디아서 5: 6에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고 하였다.
본문의 요점은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것이다. 이 내용은 17절과 20절과 26절에 세 번이나 반복되어 있다.
이처럼 강조된 내용이 주는 실제적 교훈은 우리의 믿음은 선한 행위가 수반되지 않는 죽은 믿음이 되지 말고 선한 행위로 증거 되는 산 믿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야고보가 말하는 행위는 어떤 행위인가? 그것은 아브라함과 같은 순종의 행위, 라합과 같은 믿음의 행위를 말한다. 그것은 경건한 삶뿐 아니라, 입을 것과 먹을 것이 없는 형제들과 이웃들에게 선을 베풀고 구제하는 행위를 포함한다.
성경의 요점은 두 가지이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으라는 것이다.
둘째, 선과 사랑을 실천하라는 것이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이 아니다.
행함이 있는 산 믿음이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이 참된 믿음인지 하나님의 뜻대로 이웃에게 선을 베풀며 구제하기를 힘쓰는지 자신을 성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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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설교 감사합니다.